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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01b><colcolor=#fff> 본명 | 루이스 브라이언 홉킨스 존스 Lewis Brian Hopkins Jones |
출생 | 1942년 2월 28일 |
잉글랜드 글로스터셔 첼트넘 | |
사망 | 1969년 7월 3일 (향년 27세) |
잉글랜드 이스트서식스 하트필드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68cm |
소속 | 롤링 스톤스 (1962년 ~ 1969년, 탈퇴) |
악기 | 기타, 하모니카, 피아노, 색소폰, 시타르 외 다수 |
장르 | 록, 블루스, 블루스 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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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When this you see, remember me and bear me in your mind Let all the world say what they may speak of me as you find. ― Through the Past, Darkly (Big Hits Vol. 2) 앨범 게이트폴드 커버 안에 적힌 글[1] |
영국의 록 뮤지션, 기타리스트.
영국의 록밴드 롤링 스톤스의 창립자이자 초대 리더였던 인물. 밴드 내에서는 키스 리처즈와 함께 기타 파트를 맡았으며 주로 키스 리처즈는 리듬 기타, 브라이언은 리드 기타 포지션을 맡았다.
둘은 리듬 기타와 리드 기타의 경계를 허무는 기타 연주 방식인 기타 위빙(guitar weaving)을 만들었고 이 방식은 롤링 스톤스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 잡게 되어 브라이언의 탈퇴 후로도 계속됐다.
대중음악계에서 '비운의 천재'로 불리는 인물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에 반비례하게도 운이 상당히 없었으며[2] 그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2. 생애
1942년 2월 28일 영국 첼트넘 (Cheltenham)에서 웨일스 혈통의 중산층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여동생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고 한다. 브라이언 존스의 부모님은 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그에게 피아노와 오르간을 비롯해 색소폰, 기타등 다양한 악기를 가르쳤고,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하게 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그는 반항적이고 저돌적인 행동을 많이 하기로 악명 높았지만, 타고난 머리가 굉장히 좋았기에[3] 시험에서는 항상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1959년경 브라이언 존스는 학교와 집을 떠나 영국의 북부를 떠돌면서 세션 뮤지션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 동시에 블루스에 심취했다. 또한 이 때 롤링 스톤스의 매니저가 되는 앤드류 루그 올드험 (Andrew Loog Oldham)을 만난다. 이후 런던으로 거처를 옮긴 브라이언 존스는 여러 뮤지션들과 교류하며[4], 슬라이드 기타 등의 다양한 테크닉을 습득하게 된다.
1962년 브라이언 존스는 '재즈 뉴스 (Jazz News)'지에 밴드원 모집 광고를 하고, 건반 주자인 이언 스튜어트 (Ian Stewart), 드러머 찰리 와츠, 베이시스트 빌 와이먼, 보컬 믹 재거, 믹 재거가 데려온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즈 등의 멤버를 받아 같은 해 밴드 롤링 스톤스를 결성한다. 브라이언은 영국에 전통 블루스 및 R&B를 알리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롤링 스톤스를 결성했기 때문에 결성 초기 밴드는 자작곡보다는 블루스 곡들을 커버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활동했다. 당시 브라이언은 밴드의 설립자이자 리더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공연 수익도 다른 멤버들보다 5파운드의 금액을 더 받았다[5]. 다만 Nanker/Phelge 명의의 인세는 멤버들에게 동등하게 배분했다고.
허나 이후 밴드의 매니저가 된 앤드류 올덤 (Andrew Loog Oldham)은 반항적이고 섹시한 카리스마를 지닌 믹 재거를 앞세워서 '안티 비틀즈'로 롤링 스톤스를 홍보하기 시작했고 밴드의 음악적인 노선도 블루스 밴드에서 로큰롤로 변경해버렸다. 브라이언은 이런 앤드류의 정책에 반기를 들었지만 1965년에 발표한 재거-리처즈의 자작곡 (I Can't Get No) Satisfaction이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자 밴드내에서 그의 영향력은 크게 약해졌다. 이후 브라이언은 신경쇠약으로 인한 약물 복용을 시작하였다. 그는 롤링 스톤스 멤버들 중 가장 먼저 마약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결국 브라이언 존스는 밴드 활동에 환멸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1966년 폴커 슐렌드로프[6]가 감독하고 패션 모델이자 자신의 약혼녀 아니타 팔렌버그[7]가 주연한 아방가르드 영화 <A Degree of Murder (Mord und Totschlag)>의 사운드트랙 작업 의뢰를 수락하면서 솔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밴드 멤버들에게 앨범 Between the Buttons 녹음 작업에 참여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아니타 팔렌버그와의 결혼 준비 및 본격적인 솔로 활동을 위해 밴드에서 탈퇴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하지만 뛰어난 악기 연주 실력과 카리스마를 지닌 인기 멤버인 브라이언 존스의 탈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 매니저인 앤드류 올덤은 브라이언에게 남아있는 계약기간 동안 밴드 활동을 지속하지 않으면 소송을 걸겠다는 협박을 했고 결국, 브라이언은 남은 계약 기간동안 밴드에 남아서 활동하기로 마음을 바꾼다. 이후 사운드트랙 작업을 마친 브라이언은 주변인들의 권유로 자신의 지나친 마약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모로코의 요양소에 입원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키스 리처즈와 아니타 팔렌버그가 브라이언 존스를 모로코 요양소에 입원시키고 같이 영국으로 돌아온 직후 눈이 맞아 연인 사이가 되면서 아니타는 1967년 3월 경, 브라이언과의 결혼을 일방적으로 취소한다.[8][9][10] 요양소에서 퇴소한 후 새 유럽 투어를 준비하던 중 아니타에게 갑작스러운 결별 통보를 받자 충격에 빠진 브라이언은 투어를 도는 동안 요양소에 가기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마약을 복용하기 시작했고 결국 브라이언의 마약 중독으로 인한 컨디션 불량과 관객들의 폭동[11] 때문에 1967년 유럽 투어는 시작한지 2달이 채 안돼서 중단되고 만다.
이후 롤링 스톤스는 새 앨범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 녹음 작업에 열중하게 되는데 이 앨범은 브라이언 존스의 주도하에 밴드가 유일하게 기존의 사운드를 버리고 당대 유행한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실험한 앨범으로 브라이언의 다양한 악기 연주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앨범이었다
그러나 1967년 12월 8일에 발매된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 앨범이 1967년 6월 1일에 발매된 비틀즈의 명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와 비교당하며 상업적, 비평적으로 완전히 실패하자 브라이언은 음악에 흥미를 잃고 1968년 즈음부터는 스튜디오에 참석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12]
다만, 다음 앨범인 Beggars Banquet이 블루스 록 앨범이 된 것, 특히 델타 블루스적인 요소가 섞인 것[13]은 브라이언 존스가 "제발 다음 앨범은 블루스 록 앨범으로 만들자"고 다른 멤버들에게 간곡히 부탁해서였다고 한다. (브라이언 존스의 지인들은 브라이언이 롤링 스톤즈 멤버들과 관계자들에게 거의 "울면서 빌었다."고 회고했다.) 사이키델릭 시절에 나름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브라이언 존스지만 말년에도 블루스 음악을 가장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브라이언의 마약 복용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서 자동차 사고를 연달아 일으키고 마침내 기소를 당하게 되었다. 재판부는 브라이언에게 가벼운 벌금형으로 선처를 베풀었지만 이 문제로 인하여 브라이언이 미국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마침 미국 투어를 계획중이었던 롤링 스톤스는 그를 자르고 새로운 멤버를 고용하기로 하였다. 1969년 6월 8일 롤링 스톤스의 멤버들이 브라이언의 집에 방문해 그를 밴드에서 해고한다고 통보하였고 메스컴에 발표하는건 브라이언에 맡기기로 하였다.
그건(브라이언을 밴드에서 해고하는 건) 정말, 정말로 내리기 힘든 결정이었어요. 이 사람과 밴드의 시작을 함께 했으니 참담했죠. 우리가 브라이언한테 "이제는 안 될 것 같아."라고 하니까 브라이언이 "그래, 그런 것 같아."라는 식의 대답을 하더군요. 그리고 그게 너무 슬펐습니다. 그리고 그후의 제 심정이 끔찍하고 괴로웠던 게 기억나요.
- 믹 재거, 다큐멘터리 <Crossfire Hurricane>에서#
- 믹 재거, 다큐멘터리 <Crossfire Hurricane>에서#
그리고 브라이언 존스는 밴드에서 해고당한지 겨우 3주 뒤인 1969년 7월 3일 자신의 집[14] 수영장에서 익사체로 발견된다. 그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7살에 불과했다. 그리고 롤링 스톤스에서 존스의 빈자리는 믹 테일러가 대신하게 된다.
그는 밴드를 결성했다. 그가 멤버들을 골랐다. 그가 밴드에 이름을 붙였고 공연을 얻어왔다.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그는 아주 중요했고 높은 지성을 갖고 있었으나 천천히 잃어갔다. 낭비하고 모든 걸 날려버렸다.
- 빌 와이먼
- 빌 와이먼
브라이언 존스의 장례식은 매스컴으로부터 대서특필되어 진행되었으나, 장례식장에 참석한 롤링 스톤스 멤버는 찰리 와츠와 빌 와이먼 둘 뿐이었다. 나름 창시를 주도한 멤버로선 씁쓸한 최후. 다큐멘터리 <Crossfire Hurricane>에서 키스 리처즈는 브라이언의 장례식이 마치 서커스처럼 구경거리로 전락할 것 같았기에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어서 불참했다고 밝혔다. 또한 자신은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믹 재거는 호주에서 영화 <Ned Kelly>를 촬영 중이었기 때문에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브라이언 사후 1972년 발매된 Exile on Main St. 앨범에 그를 추모하는 곡인 Shine a Light가 실렸다. 해당 앨범은 녹음 당시 믹 재거가 비앙카와 눈이 맞아 잠시 동안 잠수를 타는 바람에 롤링 스톤스의 앨범들 중 믹 재거의 기여가 가장 적은 앨범이지만 이 곡만큼은 믹 재거가 단독으로 작곡, 작사한 곡이라고 한다. 1968년, 마약에 깊숙히 중독되어 폐인 생활을 하던 브라이언 존스의 모습을 보고 믹 재거가 안타까워하며 가사의 초안을 썼지만 미완성으로 남겨놓았다가 브라이언 존스가 사망한 직후인 1970년에 브라이언과의 밴드 생활을 회상하면서 곡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이 곡의 녹음에는 키스 리처즈가 참여하지 않았다.
2005년 Stoned라는 전기 영화가 만들졌으나 악평 속에 반향없이 묻혔다. 무명 시절 벤 위쇼가 키스 리처즈로 출연한다.
3. 음악적 성향
시타르를 연주하는 브라이언 존스[15] |
"Brian was a very clever musician. He played bottleneck guitar, electric, and nobody did that. Well except in America, but I mean nobody did it in London."
"브라이언은 실력이 굉장히 좋은 뮤지션이었어요. 브라이언은 보틀넥 기타랑 일렉트릭 기타를 쳤고 그렇게 연주했던 사람이 없었죠. 물론 미국은 빼고요. 하지만 런던에서 그렇게 했던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 찰리 와츠, 다큐멘터리 <Crossfire Hurricane>에서
"브라이언은 실력이 굉장히 좋은 뮤지션이었어요. 브라이언은 보틀넥 기타랑 일렉트릭 기타를 쳤고 그렇게 연주했던 사람이 없었죠. 물론 미국은 빼고요. 하지만 런던에서 그렇게 했던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 찰리 와츠, 다큐멘터리 <Crossfire Hurricane>에서
"He'd had more experience, I think, in playing, so he had some level of musical accomplishment that really Keith and I really didn't."
" 제 생각에 브라이언은 연주 경험이 더 풍부해서 키스랑 제가 도달하지 못한 수준의 음악적 기량을 갖추고 있었던 것 같아요."
- 믹 재거, 다큐멘터리 <Crossfire Hurricane>에서
" 제 생각에 브라이언은 연주 경험이 더 풍부해서 키스랑 제가 도달하지 못한 수준의 음악적 기량을 갖추고 있었던 것 같아요."
- 믹 재거, 다큐멘터리 <Crossfire Hurricane>에서
프린스, 폴 매카트니, 게디 리, 존 폴 존스 이전의 원조 멀티 인스트루멘탈리스트(멀티 플레이어). 많은 악기를 빨리 습득하여 훌륭한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데 특화된 천재이다. 주 분야였던 기타를 비롯해 시타르, 덜시머, 색소폰, 하모니카, 건반 악기, 마림바 등 무수히 많은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특히, 하모니카를 정말 기깔나게 분다. 초반엔 기타와 하모니카를 주로 연주했는데 둘 중 하모니카가 더 좋다고 하였다. 그의 편곡/악기 연주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앨범이 롤링 스톤스의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16]. 원래 다룰 줄 알던 악기도 많았지만 밴드 활동을 하면서 배운 악기도 여럿 있는데, 주변의 증언에 따르면 어떤 악기던지간에 배우는 속도가 남들 대비해서 월등히 빨랐다고 한다. 비틀즈 등 동료 뮤지션들의 음반에도 색소폰, 퍼커션 등 다양한 악기 연주로 참여하였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못 다루는 악기가 없는 광역계이다.
사실 다양한 악기를 모조리 연주할 수 있는 만능 연주자 역할 이미지가 부각되어서 그렇지, 기타에 관한 평을 덧붙이자면, 브라이언 존스는 일렉트릭 기타계의 최고봉이라고 평가받는 지미 헨드릭스가 천재라고 공공연히 언급했던 인물이다.[17] 더불어 슬라이드 기타 주법을 로큰롤 밴드 음악계에 처음으로 도입한 뮤지션 중의 하나로 일컬어진다.[18]
송라이터로서는 활동/재능이 없었다고들 흔히 이야기하는데, 이에 관해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롤링 스톤스의 자작곡들은 모두 재거/리처즈의 명의로 앨범에 수록되었고 매니저 앤드류 올덤 또한 "본래 브라이언 존스는 작곡에 흥미가 없어서 작곡을 하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해서 말해왔기 때문에 롤링 스톤스의 모든 자작곡들은 재거/리처즈가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이에 브라이언 존스는 1965년 잡지 인터뷰에서 인터뷰어가 "당신은 작곡을 하지 않으세요?"라고 물었을 때 "언제나 작곡을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이미 상당수의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대부분 블루스 스타일이다."라고 말하며 앤드류 올덤의 발표를 정면에서 반박하는 모습을 보였다. 1966년에는 아방가르드 영화 <A Degree of Murder (Mord und Totschlag)>의 사운드트랙 전곡을 작곡 및 프로듀싱하며 자신의 작곡 솜씨를 뽐내기도 했다.
롤링 스톤스가 60년대에 발표한 곡들 중에서 재거/리처즈의 이름으로 발표된 브라이언 존스의 곡들이 얼마나 있는지 정확한 확인은 불가능하나 마리안느 페이스폴과 빌 와이먼의 증언에 의하면 브라이언 존스가 작곡한 곡은 주로 Nanker/Phelge(낸커/펠지) 명의로 발표되었으며[19] <Under My Thumb>, <Ruby Tuesday> 등의 히트곡들 작곡에도 관여했다고 한다. 특히, <Ruby Tuesday>의 메인 멜로디는 브라이언이 작곡했다고. 더불어 빌 와이먼은 '낸커/펠지'로 발표되어야 했을 곡 (즉 밴드 공동으로 작곡한 곡) 중에서도 '재거/리처즈'로 크레딧에 오른 곡이 여럿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믹 재거는 브라이언 존스의 작곡력을 부정하며 '내가 본 사람 중 최악의 작곡 실력을 갖고 있었다' 고 평했고 키스 리처즈도 "브라이언 존스는 단 한번도 밴드 멤버에게 온전한 형태의 자작곡을 들려준 적이 없었다."며 그의 작곡에 대한 기여를 부정했다.[20] 브라이언이 작곡 자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그의 악기 연주 실력과 음악적 천재성을 다른 멤버들이 질투한 면이 있는 듯하다.[21]
브라이언 존스는 밴드 결성 초기에는 전통 블루스 음악을 하고 싶어했고 밴드 생활 말년에는 자신의 엄청난 악기 연주 실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해보고자 했었다.
아이러니한건 브라이언의 엄청난 음악적 재능과는 별개로 밴드의 중심이 재거-리처즈였을 때 롤링 스톤스의 전성기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1965년 재거/리처즈가 (I Can't Get No) Satisfaction을 작곡하면서 밴드는 흥행가도를 달리기 시작했고 브라이언이 의욕적으로 참여해서 기존의 로큰롤에서 벗어나 사이키델릭한 사운드를 선보인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 앨범은 상업적, 비평적 성적 모두 좋지 않았다.
4. 기타
- 밴드 내 기타를 주 전문으로 하는 기타리스트들 중에서는 거의 시조격 인물이다.[22] 60년대 중반부터는 기타 하나에 치중하기 보다 다양한 악기에 관심을 가지고 연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 깔끔한 귀족적 이미지[23]를 자랑하며 여자들에게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고[24][25] 온갖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모습을 보였으나,[26] 밴드 내 비중 저하[27]와 동료 키스 리처즈의 NTR로 인한 우울증 문제와 마약 문제를 겪다가 1969년에 재거-리처즈 듀오에 의해 전격적으로 밴드에서 축출당했고, 결국 같은 해 수영장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27세였다.
[1] BRIAN JONES (1943~1969)라는 제목의 익명의 시이다.[2] 당장 그가 정통 블루스 음악을 하려고 만든 취지의 밴드인 롤링 스톤스는 매니저 앤드류 올덤과 재거-리처즈에 의해서 로큰롤 성향을 띄게 되었다. 이처럼 밴드 내에서 재거-리처즈의 비중이 높아지자 브라이언은 애인 아니타 팔렌버그와의 결혼을 준비하면서 솔로 활동을 하기 위해 밴드를 나가려고 했지만 이도 매니저 앤드류 올덤에게 저지당했고 이후 아니타가 같은 밴드 멤버인 키스 리처즈와 눈이 맞은 끝에 브라이언을 차버렸다. 이렇게해서 브라이언 존스는 연이어 밴드, 음악적 동료, 약혼녀(아니타 팔렌버그)를 모조리 잃어버렸다. 결국, 그 후유증으로 인해 브라이언은 마약에 깊게 중독되어 폐인이 되었고 1969년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3] 기록에 의하면 IQ가 135였다고 한다.[4] 대표적으로 크림의 베이시스트인 잭 브루스 (Jack Bruce)등이 있다. 브라이언은 잭과 함께 밴드를 하다가 롤링 스톤스를 결성하였고 밴드에는 브라이언의 후임으로 당시 신인이었던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이 가입한다.[5] 다른 멤버들은 모르고 있었기에 후에 사실이 밝혀지고 반발을 산다.[6] 이후 양철북으로 유명해지는 뉴 저먼 시네마 감독.[7] 아니타 팔렌버그는 1965년부터 브라이언 존스와 사귀면서 브라이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아니타는 브라이언의 패션 스타일을 바꾸게 한 인물이었으며 재거/리처즈의 급부상으로 밴드내에서 위치가 하락한 브라이언에게 다양한 악기를 연주해 보라고 처음 권유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당시 키스 리처즈를 포함한 롤링 스톤즈의 멤버들은 아름다우면서도 지적인 면까지 갖춘 트렌드 세터인 아니타 팔렌버그를 흠모하면서 그녀의 남자친구인 브라이언을 부러워했다고 한다.#[8] 키스 리처즈는 자서전 Life에서 밝히기를 원래 자신의 여자친구는 모델인 린다 키스(Linda Keith)였는데 린다가 미국에서 지미 헨드릭스를 보고 반해서 키스를 차버리고 지미 헨드릭스에게 갔다고 한다. 그렇게 린다에게 차인 후 마음고생을 하고 있던 중 브라이언이 모로코의 요양소에서 아니타에게 폭행을 가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그런 그녀를 도와주려다 서로 눈이 맞아서 영국으로 같이 돌아온 것이 관계의 시작이었다고 한다.[9] 이는 키스 리처즈의 일방적인 주장이고 주변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브라이언과 아니타는 원래 늘 사소한 문제로 다투다가 곧 다시 화해하는 격렬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키스 리처즈는 자신의 여자친구를 빼앗은 지미 헨드릭스가 브라이언 존스와 절친했기 때문에 브라이언과의 사이가 틀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 자서전의 내용과는 달리 키스 리처즈 본인이 직접 인터뷰에서 "나도 브라이언이 나를 죽기 직전까지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라고 말한적도 있다.[10] 키스 리처즈는 1968년 말에 아니타 팔렌버그를 임신시켰고 1969년에 아니타와 키스의 첫 자녀인 말론이 태어난 후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동거를 시작했다. 그러나 키스의 마약 남용, 바람기 등의 이유로 두 사람은 계속해서 불화를 겪었고 결국, 1979년에 키스 리처즈가 아니타 팔렌버그를 차버렸다. 두 사람이 헤어진 사실은 1980년에 발표되었지만 아니타 팔렌버그가 훗날 1979년에 키스 리처즈에게 차였으며 두 사람이 헤어질 당시 이미 키스 리처즈는 패티 헨슨과 불륜 관계였다고 밝혔다.[11] 해당 투어는 롤링 스톤즈가 처음으로 동유럽에서 공연을 한 투어였고 이들을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이 공연의 열기에 흥분하여 폭동을 일으켰다.[12] 1968년 즈음 촬영된 <Sympathy for The Devil>의 녹음 과정을 찍은 영상이 유튜브에 공개되었는데(무려 장뤽 고다르가 제작했으며, Beggars Banquet 앨범 제작 과정과 정치 사회적인 기록이 결합된 다큐멘터리 필름이다) 스튜디오에 오랜만에 찾아온 브라이언 존스에게 믹과 키스가 곡조를 흥얼거리고 이것을 들은 브라이언이 혼자 고개를 숙이고 리듬 기타를 연주하는 장면이 확연히 보인다. 참고로 최종곡에서는 브라이언의 연주 분량이 삭제되고 니키 홉킨스의 피아노로 대체되었다.[13] 델타 블루스를 현대 대중음악의 문법으로 재해석한 것은 롤링 스톤스가 최초라고 한다.[14] 이 집은 곰돌이 푸의 원작자 A. A. 밀른이 살았던 집인데, 브라이언이 구매했다[15] 1966년, 에드 설리번 쇼에서 'Paint It Black'의 시타르 부분을 연주하는 모습이다.[16] 다만 이 앨범 자체의 평가는 그리 좋지 못하다. 믹 재거와 키스 리처즈도 이 앨범을 깠다.[17] 지미 헨드릭스와 브라이언 존스는 실제로 매우 친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둘다 1942년생이고, 위대한 기타리스트로 알려져 있으며, 27세, 즉 비슷한 시기에 죽었다.[18] 일단 영어 위키에서도 롤링 스톤스의 i wanna be your man이라는 곡을 슬라이드 기타가 처음 도입된 밴드음악이라고 서술하고 있다.[19] 믹 재거에 의하면 브라이언 존스는 평소 레논/매카트니, 재거/리차즈 같은 작곡 콤비 스타일을 부러워했다고 한다.[20] 사실 앞의 둘이 비범한 작곡 실력을 갖고 있긴 하다. 당장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순위에도 높은 순위에 들어간다.[21] 일례로 (I Can't Get No) Satisfaction 녹음 세션 당시 브라이언이 "내가 키스보다 기타를 더 잘 연주하므로 곡의 리드 기타를 맡겠다."고 주장했는데 브라이언의 실력을 알고 있었던 키스 리처즈는 그의 주장에 감히 반박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스튜디오에 들어온 믹 재거가 그 사실을 알게된 후 "당연히 곡을 작곡한 사람이 리드 기타를 연주해야지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고 브라이언에게 강하게 따진 결과 키스 리처즈가 리드 기타를 연주할 수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22] 이전에 척 베리나 비비 킹 같은 솔로 기타리스트는 존재했지만 하나의 정립된 밴드 내에서 기타를 주전문으로 하는 인물은 브라이언 존스가 거의 최초라고 볼 수 있다. 조지 해리슨도 대표적인 비틀즈의 연주 전문가였지만, 싱어송라이터로서의 활동이 더 두드러진다는 것을 감안할 때 록밴드의 전문 기타리스트로는 브라이언 존스가 거의 시조격이자 대표주자라고 볼 수 있다.[23] 물론 사망 직전에는 각종 마약을 너무 많이 한 탓에, 같은 밴드의 키스 리처즈 혹은 믹 재거 못잖은 폐인 이미지가 되었다.[24] 피임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는지 27세로 사망하기 전까지 사생아를 4명이나 만들었다.[25] 밴드의 주변인들은 믹 재거가 브라이언이 여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것에 대해 경외감을 느끼는 동시에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26] "1980년대에 프린스가 있다면 1960년대에는 브라이언 존스가 있었다"는 말이 생길 정도. 밴드 관계자들은 평소 키스 리처즈가 이러한 브라이언의 뛰어난 악기 연주 실력을 굉장히 질투했다고 증언했다.[27] 밴드의 방향성 변화가 제일 큰 원인으로 꼽힌다. 과거 브라이언이 우세하던 시절은 블루스 위주의 밴드였지만, 어느새부턴가 로큰롤로 성향이 변하며 브라이언은 연주가 1 정도로 지위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