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2px -12px" | 블라고에브그라드주 (블라고에브그라드) | 부르가스주 (부르가스) | 도브리치주 (도브리치) | 가브로보주 (가브로보) |
| 하스코보주 (하스코보) | 커르잘리주 (커르잘리) | 큐스텐딜주 (큐스텐딜) | 로베치주 (로베치) | |
| 몬타나주 (몬타나) | 파자르지크주 (파자르지크) | 페르니크주 (페르니크) | 플레벤주 (플레벤) | |
| 플로브디프주 (플로브디프) | 라즈그라드주 (라즈그라드) | 루세주 (루세) | 슈멘주 (슈멘) | |
| 실리스트라주 (실리스트라) | 슬리벤주 (슬리벤) | 스몰랸주 (스몰랸) | 소피아 | |
| 소피아주 (소피아) | 스타라자고라주 (스타라자고라) | 터르고비슈테주 (터르고비슈테) | 바르나주 (바르나) | |
| 벨리코터르노보주 (벨리코터르노보) | 비딘주 (비딘) | 브라차주 (브라차) | 얌볼주 (얌볼) | }}}}}}}}} |
10-14세기에 세워진 바바 비다(Баба Вида) 성채
비딘 성벽의 서남문인 스탐볼 카피 (Стамбол капия)
1. 개요
| 불가리아어 | Видин |
| 튀르키예어 | Vidin |
불가리아 북서부의 도나우 강 옆에 위치한 도시. 인구는 약 3만 8천으로, 현재는 중소 도시지만 제2차 불가리아 제국 시기에 주요 도시 중 하나였고 1369-96년간 비딘 차르국의 수도였다. 오스만 제국기에도 중시되었고, 다뉴브 강변 도시들 중 가장 잘 요새화되었다. 1800년 전후로는 아얀 (호족) 오스만 파즈반토을루가 자립하기도 했으나 21세기 들어 중요성을 상실했다.
도나우 강이 S자로 굽이치는 곳에 위치하고, 강 건너편의 루마니아령 도시인 칼라파트와 다리로 이어져 있다. 또한 서북쪽 30km 방면에는 세르비아와도 접경하고 있어 불가리아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성벽으로 둘러진 구도심 내에는 바바 비다 성채, 오스만 파즈반토을루 모스크 및 도서관 등의 유적이 남아있다. 도시 남쪽에는 공단이 있다.
2. 역사
중세 시기 비딘 복원도켈트인의 마을이 세워져 두노니아라 불렸고, 로마 제국 시기 보노니아 (Bononia) 성채가 세워져 모이시아 리메스를 이루었다. 6세기 슬라브인들이 유입되어 바딘 혹은 브딘이라 명명했고, 동로마 제국에서는 비디네 (Βιδύνη)라 불렀다. 10세기부터 바바 비다 성채가 세워졌고, 제1차 불가리아 제국 시기 주교좌이자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971-76년간 미래의 차르 사무일이 형제들이 남부를 통치하는 동안 비딘을 거점으로 동로마 제국에 대한 반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결국 사무일을 패배시킨 바실리오스 2세가 1003년에 비딘을 포위, 8개월의 공성전 끝에 성주의 항복으로 도시를 얻었다. 동로마 시기 그저 국경 도시로 남았던 비딘은 제2차 불가리아 제국 들어 다시 중시되었다.
2.1. 비딘 친왕국 (시슈만 왕조)
비딘 전제군주국의 왕성이던 바바 비다 성채
1280년대에 불가리아의 차르가 된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는 같은 쿠만인 귀족인 시슈만을 비딘의 데스포티스 (왕공)로 봉했다. 이로써 비딘은 한세기 이상 시슈만 가문의 지배 하에 놓이며 번영하게 된다. 1290년, 세르비아 왕국의 스테판 밀루틴이 불가리아 령이던 브라니체보를 점령하고 비딘을 압박하자 이듬해 시슈만은 킵차크 칸국의 노가이 칸에게 복속하며 보호를 구했다. 1292년 시슈만은 세르비아를 침공해 코소보까지 진격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고, 스테판 밀루틴이 반격에 나서 비딘을 포위한 후 점령했다. 다만 노가이 칸의 개입으로 시슈만은 스테판 밀루틴과 사돈을 맺으며 세르비아에 명목상 복속하는 것으로 비딘을 영유할 수 있었고, 이후로도 사실상의 독립된 지위를 누렸다. 1308년경 시슈만이 사망한 후 계승한 아들 미하일 시슈만은 1321년 스테판 밀루틴의 사후 세르비아가 내전에 빠지자 불가리아의 차르에 복속했고, 1323년 게오르기 테르테르 2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차르로 선출되었다.
미하일 시슈만은 모계를 통해 아센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점을 강조하며 미하일 아센 3세로 개명했고, 세르비아와 전쟁에 나섰다. 하지만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 하에 통합된 세르비아는 1330년의 벨버즈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였고, 미하일 아센 3세는 곧 사망했다. 뒤를 이은 아들 이반 스테판은 동로마에 트라키아를 내주어 곧 폐위되었고, 외조카인 이반 알렉산더르가 추대되었다. 이에 미하일 시슈만의 동생이자 비딘의 데스포티스이던 벨라우르가 반기를 들었으나, 1336년에 토벌되었고 이반 알렉산더르는 아들 이반 스라치미르를 비딘의 새 데스포티스로 봉했다. 이반 스라치미르는 외교권 및 전쟁권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지닌 채로 통치했는데, 1356년 어린 의붓동생 이반 시슈만이 세자로 봉해지자 분노하여 완전히 자립해버렸다.
1365년 헝가리 왕국의 러요시 1세가 스라치미르에게 비딘을 넘긴다면 불가리아 왕에 오르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스라치미르가 거부하자 러요시 1세는 비딘을 공격, 한달의 포위 끝에 6월에 함락한 후 포로들에게 가톨릭 세례를 강요했다. 이후 크로아티나의 훔니크에 갇혔던 스라치미르는 1369년 부왕이 제후인 도브루자의 데스포티스 도브로티차 및 왈라키아 공국과 연합해 헝가리 군을 격파, 비딘을 수복하자 비딘의 데스포티스로 복귀했다. 1371년 이반 알렉산더르의 사후 이반 시슈만이 계승하자, 스라치미르는 반발하며 역시 차르를 칭했다. 이때 도브로티차 역시 독립하며 불가리아는 3개로 쪼개졌고, 비딘 대주교구는 터르노보의 불가리아 총대주교가 아닌 콘스탄티노포폴리스 총대주교 관할이 되었다. 1383년 스라치미르는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되어 오스만 군의 비딘 주둔을 허용했다.
1393년 오스만 술탄 바예지트 1세가 터르노보를 함락, 1395년에는 이반 시슈만이 처형하자 불가리아 제국은 사실상 멸망했다. 잔존 세력이 된 스라치미르는 1396년 8월, 지기스문트가 이끄는 십자군이 다가오자 항복했고 오스만 수비대는 학살되었다. 하지만 이듬달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십자군은 대패했고, 바예지트 1세는 곧바로 비딘을 포위해 1397년 초에 함락했다. 스라치미르는 부르사로 압송되었고, 비딘은 동명의 산작의 치소가 되었다. 이로써 반세기 비딘 차르국은 26년만에 완전히 멸망했다.
2.2. 오스만 제국기
1454년 크루셰바츠 전투 후 후녀디 야노시가 이끄는 헝가리 왕국군이 습격한 것 이후로 비딘은 안정을 유지했고, 주요 군사 기지로 활용되었다. 그러던 1689년 10월, 대튀르크 전쟁 중에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많은 사상자를 내며 비딘을 함락했다. 그후 3천 5백의 무슬림 주민들이 니코폴로 추방되었고, 오스트리아 군대는 비딘 성채를 보강하며 40문의 대포를 배치했다. 성채의 증축 과정에서 무슬림 구역의 주택과 상점들이 헐려 자재로 쓰였다. 3천여 건물 중 하맘 2개, 모스크 몇개, 몇몇 상점 및 카페 등 2-3백여 건물만이 잔존할 정도였다. 1690년 8월, 오스만 군이 수복한 이후 비딘은 다시 한세기 가량 안정을 누렸다.2.2.1. 오스만 파즈반토을루 정권
파즈반토을루가 세운 초승달 모양의 병영
1802년에 구도심 남부에 세워진 오스만 파즈반토을루 모스크 및 도서관
1792년 봄, 러시아 및 오스트리아와 패전 조약을 맺은 셀림 3세는 다뉴브 전선에 배치했던 예니체리 부대들을 철수시키며 근대화된 신식 부대를 배치하려 했다. 이에 베오그라드와 비딘의 예니체리 부대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중 비딘의 보스니아계 예니체리 장교 오스만 파즈반토을루는 여러 시도 끝에 1794년에 도시를 장악했고 총독을 축출했다. 여러 차례의 토벌 시도는 모두 실패했고, 1797년 파즈반토을루는 니코폴을 점령하며 불가리아 북부를 평정했다. 1798년 여름, 무려 7만 오스만 정규군이 비딘을 포위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겨울이 다가오고 알리 파샤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핑계로 이탈하자 포위는 풀렸고, 당시 오스만과 동맹이던 러시아 제국의 엄포로 파즈반토을루의 왈라키아 및 도브루자 습격이 저지되었다. 파즈반토을루는 성벽을 보수, 무기를 축적했고 1799년에는 조정과 협상해 사면과 파샤 직위를 얻어내었다. 하지만 이듬해 그가 터르노보와 니코폴을 점령하고 니슈를 위협하자, 조정은 토벌대를 보냈으나 패했고 오히려 반군이 에디르네에 이르며 기세를 올렸다. 파즈반토을루는 재차 왈라키아의 올테니차를 공격했으나 러시아의 위협으로 물러났다.
1801년 5월, 조정은 파샤 직위를 박탈하며 사면을 취소했다. 그해 가을, 파즈반토을루는 파리에 불가리아인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보내 독립 인정 및 군사 동맹을 얻으려 했으나 이미 프랑스는 오스만 측과의 휴전을 준비 중이었기에 거절했다. 이듬해 조정은 오스트리아 측에 파즈반토을루가 재산 및 추종자들과 망명하도록 협상했으나, 오스트리아는 역으로 비딘의 성채 강화를 도왔다. 한편 왈라키아 공 미하이 수추는 파즈반토을루의 부관 마나프 이브라힘과의 연이은 전투 끝에 패했고, 부쿠레슈티의 주민들이 도주할 정도로 혼란을 야기했다. 다만 이번에도 러시아가 개입해 진격을 멈췄고, 1802년 8월 조정은 그를 다시 사면하며 파샤 직을 복권시켰다. 그 무렵 다뉴브 연안의 오스만 군이 철수하며 파즈반토을루는 동쪽의 아얀 (호족)인 이스마일 트루스테니클리오을루와 터르노보를 두고 분쟁을 벌였다. 그러던 1803년 4월, 마나프 이브라힘이 실리스트라까지 진출했다가 트루스테니클리오을루에게 항복한 후 처형되면서 파즈반토을루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1804년 2월에는 세르비아 봉기가 발발하자 그는 기독교도들에게 자치와 세금 동결 및 성당 건축 후원을 약속하는 등 유화책을 펼쳤고, 세르비아 봉기 성공을 축하했다. 하지만 파견 병력이 세르비아 봉기군으로 이탈하자 파즈반토을루는 돌변하여 1806년 부딘의 기독교도 지도자들을 처형했고, 이듬해 2월에 사망했다. 사후 재무관이던 이드리스 몰라가 비딘의 실권자가 되었으나, 그는 루세의 아얀 바이락타르 무스타파 파샤와 대립하던 끝에 불리해지자 1813년 이스탄불 인근으로의 은퇴를 대가로 조정에 항복했다.
2.3. 근현대
1828년에 묘사된 비딘
19세기 중반 기준 비딘은 인구 2만 6천, 수비대 1만이 배치된 불가리아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1853년의 타임지도 비딘이 세르비아, 왈라키아, 트란실바니아와의 접경지이고 니슈 ~ 소피아 ~ 에디르네를 이어주는 거점이자 강력한 성채라 묘사했다. 1859년에는 영국인 탐험가 사무엘 베이커가 비딘을 지나다 비딘의 파샤에게 노예로 팔리던 트란실바니아인 여성 플로렌스를 구해 결혼한 후 세계 각지를 탐험하기도 했다. 1862년 베오그라드와 스메데레보 등지에서 세르비아의 무슬림들이 축출되자 그들은 비딘에 대거 정착했다.
1876년 6월 불가리아 봉기 후 러시아 제국이 개입하자, 루마니아 왕국 역시 1877년 말엽 비딘을 포위했다. 수비대장 메흐메트 이제트 파샤는 악조건 속에서도 저항했지만, 루마니아 군이 수륙 양면으로 포위하고 다뉴브 건너편의 칼라파트에서도 포격을 가해오자 1878년 2월에 항복했다. 루마니아 군은 2달 후 철수했고, 비딘은 신생 불가리아 공국령이 되었다. 이때 무슬림 주민들은 대부분 추방되었다.
1885년 불가리아-세르비아 전쟁 시기 세르비아 군이 비딘을 포위했으나 격퇴되었다. 발칸 전쟁기인 1913년에도 세르비아 군이 재차 비딘을 포위했으나 역시 격퇴되었다. 수천에 달하던 유대인 공동체는 1950년대에 대부분 이스라엘 등지로 이주했다. 1990년에 6만이 넘던 인구는 사회주의 시기에 흥했던 화학 공업의 쇠퇴로 2020년대 들어 4만 미만으로 감소했다.
3. 볼거리
- 바바 비다 성채 (Баба Вида)
로마 시기 보노니아 요새 자리에 세워졌다. 불가리아 제국 시기 왕궁이 되었다가 오스만 제국 시기 무기고 겸 감옥으로도 쓰였다.
- 코나카 역사 박물관 (Исторически музей Конака)
18세기에 구도심 밖에 저택을 개조한 박물관. 주로 일대에서 발굴된 로마 시대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 오스만 파즈반토을루 도서관 (Джамия Осман Пазвантоглу)
1802년 모스크 건설 시에 부속 도서관으로 세워졌다. 내부에 서예 프레스코화 등이 남아있다.
- 톱 카피 (Топ капия)
비딘 성벽의 동문으로, 바바 비다에서 다뉴브 강변으로 나가는 출입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