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사막교부란, 이집트의 나일강일대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초창기 그리스도교의 은수자들을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기원후 4세기 말, 사막으로 들어간 이집트의 독수도승을 의미한다. 5세기경의 작품들과 기록들에 이 용어가 등장하며, 6세기경의 유다 광야[1]의 수도승들 사이에서는 이집트북부의 은수자 원로들을 의미하는 말로 통했었다. 대표적으로는 성 안토니우스와 암모니우스, 아타나시오스, 파울로스 등이 있다. 성 파코미우스는 공동 수도생활의 시발점으로 여겨지나, 사막 교부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수도승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사막 교부들로부터 기원하며, 아토스의 수도생활과 더불어서 사막 교부들의 수도생활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수도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대략 기원후 2세기에서 4세기 경에 이집트 사막에서 은수생활을 하던 은수자들을 사막 교부라고 하는 편이며, 남성 원로는 압바(abba), 여성 원로는 암마(amma)라고 부르기도 했다. 압바, 암마는 그냥 아빠, 엄마라는 뜻이며, 지금도 베네딕토회같은 정주 수도원에서는 최고 장상을 아빠스 라고 부른다. 이집트 북부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이 은수자들의 직계 후손들은 지금도 콥트 정교회와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의 은수자들로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편이다.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은수자인 바히타위는 콥트 정교회, 즉 이집트의 은수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독자적으로 탄생한 은수자계급이다.2. 생활
가장 대표적인 사막 교부들 중 한 분은 당연히 성 안토니우스라고 할 수 있다. 성인은 나일 강 좌안, 즉 고향 마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동굴에서 10년 동안 은수자로 살았다. 성인은 유년기 부터 사회적으로 고립된[2]삶을 살았기에 은수자로서의 삶에 쉽게 적응했을 수도 있다. 이후 성인은 엘 마이문에서 수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요새에 은거하기 위해 강을 건넜다. 그리고 거기에서 20년간 은거 생활을 하였다. 수많은 제자가 그곳에 있는 성인에게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후 안토니우스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유목민 베두인족 대열에 끼어서 무려 150킬로미터 가량을 걸어간 끝에 샘과 야자수가 있는 산에 정착하였다. 훗날 그곳에는 안토니우스를 기리는 수도원이 세워지게 된다. 356년, 아타나시우스 주교에 의해서, 안토니우스의 생애가 저술되게 된다. 3세기중엽, 데키우스 박해 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고문을 피해서 사막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많았다. 히에로니무스 교부에 의하면, 은수자 파울루스는 이 때,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사막으로 도망친 후, 덕을 닦기 위해 그곳에 계속 머물렀다고 한다.3세기말 경에는 나일강연안과 삼각주분지의 강가 암벽 동굴이나 움막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은수자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 중에서는 피스피르의 안토니우스가 제일 명망이 있었다. 은수자 파울루스는 홍해 부근에 은거했었으나, 다른 수도승들은, 나일강인근 사막에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중에는 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자들도 많았으며, 실제로 그러는 수도자들도 있었다. 나일강 동부의 아라비아 사막은 바위와 돌 투성이인 척박한 땅이며, 거의 해발고도가 2천여 미터에 달한다. 나일강 서부 리비아 사막은 해발 200미터 정도의 석회암 고원 지대이다. 암모니우스와 마카리우스는 이 사막의 북부에서 은수자 생활을 하였다.나일강도처에서 은거하던 안토니우스의 경쟁 수도자들은, 더 깊숙한 사막에서 은거생활을 하기위해서 나일강연안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외 지역에 딱히 은수자들의 부락을 일군 자들은 없었다. 오르(Or), 아폴론, 파테르무티우스 같은 이집트 북부 수도자들은 인근의 사막에서 은거생활을 하였으며, 수많은 제자들이 그들에게 몰려들었다. 암모니우스와 마카리우스 같은 사막교부들은 사막에 정착하였으며 수많은 수도자들이 그들에게 몰려들었다. 이후, 니트리아와 켈리아 그리고 스케티스는 사막교부들의 은수자생활의 중심지가 되었다.사막교부를 위시한 사막의 은수자들과 수도자들은, 지상의 물질적 쾌락과 부, 인간적 걱정에서 모두 벗어나 자신의 마음과 삶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사막의 고독 속으로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투신하였다. 이는 육신, 마귀, 정욕[3] 등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하느님께 온전히 투신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세상과의 격리를 이룸으로서, 온갖 유혹과 헛된 것들로부터 탈피하여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것이 은수자생활의 원천 목적이다. 물론 이러한 은수자적 생활이 복음서를 비롯한 성서에서 명확히 명시하고 있는 개념은 아닐지라도, 이는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한 하나의 특권적 여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은수자의 전통을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힐난하는 일부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 간혹 있으나, 이는 옳은 의견이 아니며, 이들의 전통은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와 유대인들의 은수자생활과 연관을 찾을 수 있다. 그리스의 스토아철학자들은, 지혜를 추구하기 위하여 고독과 은거를 갈망한 사례가 있으며, 유대인전통에서도 역시 히브리 금욕가들인 에세네파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에세네파는 사해근처에서 무리지어 살며, 기도와 야훼하느님을 찬양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이게 다가 아니고, 알렉산드리아 근처 부근에서 독신으로 공동생활을 한 금욕주의 집단인 "테라페우태(Therapeutae)"도 존재했다. 팔라디우스에 의하면, 4세기말까지 니트리아에 5천명, 켈리아에 6백여명의 수도자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스케티스는 알 수 없다.
이러한 생활 방식을 따르는 수도승은 독수도승과 회수도승으로 구분되었다. 말 그대로 독수도승은 홀로 은수 생활을 하는 이들이며 회수도승은 공동생활을 주로 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독수도승들은 주로 육체의 양육과 최소한의 수면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을 노동과 기도로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 수도승 원로들이 "묵상"이라고 불렀던 것은 사실, 현대 가톨릭에서 하는 것처럼 만트라를 속으로 낭송하거나 침묵 가운데 묵상에 잠기는 관상기도의 형식 보다는 구송기도에 가까웠다. 이는 육체적이고 종교적인 수행의 일환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들은 입으로 성서말씀을 암송하는 것을 반복하며 외우는 방식의 기도수행을 주로 수행하였던 것이다
독수도승에게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는, 바로 독방에서 끈기있게 머무르는 것이었다. 독수도승은 반드시 권태와 고독 등에 휩싸이게 되는데, 이를 "아케디아"[4]라고 한다. 이 때 외출하고픈 욕구를 억제하라고 가르쳤던 사막교부들이 꽤 많다.
5세기의 교회사가 소크라테스[5]의 교회사라는 저술에 의하면, 그 당시 사막교부들은 전용 교회가 없는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런 경우에는 주로 인근에 있는 성당의 성찬례에 참석하곤 했으나, 전용 교회가 생긴 뒤로는 토요일과 주일의 두 차례, 성찬례가 거행되었다. 그 당시, 로마교회와 알렉산드리아교회를 제외한 모든 교회는 토요일마다 성찬례를 거행했다고 한다. 이집트 북부 수도승생활 중심지에서도 4세기말까지 토요일과 주일 두번 모두 성찬식이 거행되었다는 증거들이 많이 있다. 당시의 성찬식은 주로 저녁식사 이후 진행되었다고 한다.
3. 관련 문서
4. 출신 인물
[1] 유다 사막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성경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마귀에게 유혹을 받은 그곳이 맞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광야로 알려져 있다.[2] 즉 이미 유년기부터 은수자의 삶에 익숙했을 가능성이 높다.[3] 삼구 라고 하는 개념.[4] 또는 정오의 악령[5] 동명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