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 제18·19대 방위청 장관 | |
<colcolor=#fff><colbgcolor=#3CA324> 일본국 제20-22·25-31대 중의원 의원 고이즈미 준야 小泉純也 | Koizumi Junya | |
출생 | 1904년 1월 24일 |
가고시마현 가와베군 히가시가세다촌 (현 가고시마현 미나미사츠마시) | |
사망 | 1969년 8월 10일 (향년 65세) |
학력 | 니혼대학 법학부 (정치학과 / 학사) |
부모 | 아버지 사메지마 야자에몬 |
가족 | 장인 고이즈미 마타지로 배우자 고이즈미 요시에(小泉芳江) 장녀 고이즈미 미치코(小泉道子) 차녀 고이즈미 다카코(小泉隆子) 3녀 고이즈미 노부코(小泉信子) 장남 고이즈미 준이치로 차남 고이즈미 마사야(小泉正也) 손자 고이즈미 고타로 손자 고이즈미 신지로, 손자며느리 타키가와 크리스텔 손자 미야모토 요시나가(宮本佳長)[1] |
정당 | |
의원 선수 | 8 (중) |
의원 대수 | 20, 21, 26, 27, 28, 29, 30, 31 |
지역구 | (구) 가나가와현 제2구 |
악력 | 입헌민정당 사무직원 자유민주당 총무, 부회장 간사장 중의원 의원 (제20-31대 / 舊 가고시마현 제1구[2] / 舊 가나가와현 제2구) 법무정무차관 (제2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제18-19대 방위청 장관 (제3차 이케다 개조내각), (제1차 사토 내각) |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일본 내각총리대신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아버지. 데릴사위로 입적하기 전 옛 성은 사메지마(鮫島)였고, 방위청 장관직을 역임해 별명은 안보남(安保男)이었다.2. 생애
2.1. 젊은 시절
1904년 1월 24일, 가고시마현 가와베군 히가시가세다촌(현재의 미나미사츠마시)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사메지마 가문에서 태어났다.아버지인 사메지마 아키미사에몬(鮫島彌三左衛門)은 태풍으로 인해 어선의 상당수가 소실되거나 침몰 하면서 운영하던 선박 사업에 실패했고, 지역 가다랑어 가공 공장에서 근무하다가 아들 준야가 11세 때 병으로 사망했다, 이윽고 어머니도 5년 뒤에 병으로 사망했다. 부모가 일찍 사망한 뒤 집의 가세가 기울어 준야는 유년시절을 가난하게 보내야했고, 3남 6녀의 형제 중 3명이 사망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후 가고시마 실업의 야학에 다니면서 시내에 있는 포목점 야마가타야에 근무했고, 야간학교를 졸업한뒤 조선은행에 일자리를 구하고자, 차 심부름을 했다. 또한 직공으로 오사카와 가나가와 츠루미의 아사히 글라스 공장에서 일했다.
국회의원 이와키리 시게오(岩切重雄)의 서생[3]이 되어 니혼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의 야학부에 다녔고, 1930년 졸업했다. 이후 이와키리의 소개로 입헌민정당의 직원이 된다. 그리고 같은 가고시마 출신의 의원 도코나미 다케지로(床次竹二郎) 전 내무대신의 가르침을 받았다.
준야가 입헌민정당 사무직원이었을 무렵, 입헌민정당의 간사장이던[4] 고이즈미 마타지로의 딸인 고이즈미 요시에를 알게 되었다. 마타지로의 처소에 출입하던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마타지로는 두 사람의 관계를 반대했고, 두 사람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피를 하여 도쿄 아오야마의 아파트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마타지로가 신문의 사람 찾는 란에 준야와 요시에를 찾는 광고까지 낼 정도로 갈등이 극심했다.
결국 마타지로가 양보해서 "준야가 국회의원이 될 수 있으면,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을 허용하겠다."고 말해, 그가 데릴사위가 돼서 마타지로의 뒤를 잇는 조건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한다.
2.2. 정치경력
1937년, 준야는 고향인 가고시마현에서 입헌민정당 후보 중 한명으로 제20대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처음으로 당선됐다.[5] 1942년의 중의원 선거에서는 대정익찬회의 추천을 받아 당선됐고, 이때문에 전후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추방이 해제된 후 구 민정당계 중 기시 노부스케와 가까운 정치가에 의해 결성된 신일본정치경제조사위원회에 참여하고, 이 모임은 이후 일본재건연맹으로 발전했지만, 곧 재건연맹을 탈퇴하고, 개진당에 입당했다.1951년, 장인어른 마타지로가 사망하자 그의 후계자로 가나가와 2구에서 개진당 후보로 출마 후 당선되면서 11년 만에 정계에 복귀했다.
그 후 하토야마 이치로가 이끄는 일본민주당의 결성에 참가했고, 1955년의 보수 연합에 의해 자유민주당이 탄생하면서 이전 민정당계 우파 정치인들이 결집한 오오아사 타다오(大麻唯男)파에 속했다. 자민당에서는 당 총무, 부회장 간사장 등을 역임하였고, 오오아사의 사후 기시 노부스케 파 → 후지야마 아이이치로파 (애정회)에 소속했다.
1955년 제2차 하토야마 내각에서는 법무성 정무차관(현 대신정무관)을 지냈다. 1964년, 제3차 이케다 내각 개조 내각과 제1차 사토 내각의 방위청 장관을 역임했다.
1964년 12월 4일, 커티스 르메이의 훈일등 욱일대수장 서훈의 의결에 참여했다. 이 서훈에 대하여 일부 우익 진영에서는 도쿄 대공습과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에 관여한 르메이에게 욱일대수장을 수여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라고 비난했지만, 준야는 "공적과 전시의 사정은 별도로 생각한다. 방위청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 르메이는 원폭 투하의 직접 부대의 책임자가 아니었고, 새뮤얼 모리슨에 의하면 원폭 투하는 트루먼 대통령이 직접 지휘한 것이다"고 설명했고, 사토 에이사쿠 총리도 이에 동의하고 있었다. 추천은 고이즈미 준야 방위청장관과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무대신이 주도한 것이었다. 르메이는 12월 7일 방위청에서 고이즈미 장관을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이날은 미와 사무차관이 인사를 받았다.
방위청장관 재직시절인 1965년, 한반도 전쟁 발발 시 자위대가 출동할 수 있는지의 가능성을 방위청 내부에서 극비리에 모색했던 소위 미쓰야 연구 문제를 고발하고 사임했다.
1969년 8월 10일 65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무덤은 요코하마시 가나자와구의 보수원(宝樹院)에 안장되었다.[6] 장남인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같은 해 총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고, 3년 후 총선에서 처음으로 당선되었다.
3. 재일 조선인 북송 사업 주도
고이즈미 준야는 1950년대 말 재일 조선인 북송 사업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자민당 국회의원이면서 재일 조선인 귀국 협력회의 대표 위원으로 취임한 후, 재일 조선인의 북송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확인됐다.일본의 국제정치경제정보지 인사이드 라인의 편집장 도시가와 타카오는, 고이즈미 준야가 재일 조선인의 북송에 적극적이었던 이유에 대해서 "당시 준야의 선거구인 가나가와 2구에 다수의 재일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는 가와사키시가 포함되었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냉전이 최고조였던 당시 자민당 의원의 신분으로 사회당이나 공산당과 초당파적 회의를 가진 것 자체가 이례적이었다고 말했다.[7] 또한 도시가와는 준야가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에서 사무관으로 잠시 근무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4. 소속 정당
<rowcolor=#fff> 소속 | 기간 | 비고 |
| 1937 - 1940 | 정계 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0 | 정당 해산 |
| 1940 - 1945 | 창당 |
대일본정치회 | 1945 | 입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5 | 정당 해산 |
| 1945 - 1947 | 창당 |
신일본 정치 경제 조사위원회 | 1947 - 1948? | 입회 |
일본재건연맹 | 1948 - 1952 | 당명변경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52 | 탈퇴 |
개진당 | 1952 - 1954 | 창당 |
| 1954 - 1955 | 신설 합당 |
| 1955 - 1969 | 합당 사망 |
5. 선거 이력
<rowcolor=#ffffff>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37 | 제2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구) 가고시마 1구 | | - | 당선 (2위) | 초선[A] |
1942 | 제2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 | 당선 (4위) | 재선[A] | |
1953 |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구) 가나가와 2구 | 개진당 | 46,027 (15.80%) | 당선 (3위) | 3선[10] |
1955 |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57,559 (16.7%) | 당선 (1위) | 4선 | |
1958 |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66,699 (17.2%) | 당선 (3위) | 5선 | |
1960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6,994 (17.5%) | 당선 (2위) | 6선 |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1,607 (15.5%) | 당선 (3위) | 7선 |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3,286 (15.8%) | 8선[11] |
6. 둘러보기
고이즈미 가문 | ||||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colcolor=#fff><colbgcolor=#D7003A> 1대 | 고이즈미 마타지로 | ||
2대 | 고이즈미 준야 (데릴사위) | |||
3대 | 고이즈미 준이치로 | |||
4대 | <rowcolor=#D7003A> 장남 | 차남 | ||
고이즈미 고타로 | 고이즈미 신지로 | |||
처 타키가와 크리스텔 | ||||
※둘러보기 : 일본의 정치 가문 | }}}}}}}}} |
[1]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전처 미야모토 카요코(宮本佳代子)의 3남.[2] 대선거구제 시절[3] 다른 사람의 집에 하숙해 가사와 잡무를 도우면서 공부나 하적을 하는 젊은이. 주로 일본 근대시절에 성행했다.[4] 하마구치 내각 - 제2차 와카쓰키 내각에서 체신대신을 역임했다.[5] 이 당시에는 한 선거구에서 일반적으로 2~5명을 선출하는 대선거구제가 시행될 무렵이어서, 준야 역시 5명의 후보 중 2등으로 당선에 성공했다.[6] 장인 마타지로와 같은 곳에 유해가 안장되었다.[7] 실제로 간사이에 오사카가 있다면, 간토에는 가와사키가 있다고 할 정도로 재일교포들이 많이 거주한 곳이었으며 코리아타운이 작게나마 있고 현재도 교포(올드 커머)들이 많이 거주 하고 있다.[A] 대선거구제[A] [10] 중선거구제[11] 1969.8.10 임기 도중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