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像 | Icon
1. 개요
성인(聖人)이나 임금의 화상(畫像)이나 초상(肖像) 또는 그리스도나 성모의 상(像).영어로 icon 자체는 성화나 성상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지만, 한국에서 이콘이라 함은 성화 혹은 작은 지물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진 경향이 있다.
예수나 성모 마리아, 그 외의 성인들의 모습을 조각하거나 그린 것을 말한다. 성상은 천주교와 정교회에서 공경한다. 다만 정교회는 성상파괴파에 대한 양보 및 이슬람 세력의 지배에 따른 영향으로[1] 조각은 잘 사용하지 않고 성화를 주로 사용한다. 성공회도 성모 신심이나 성인 공경 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십자고상과 성모상 같은 성상들을 인정하며 다양한 이콘을 사용하지만, 천주교에 비해서는 사용빈도가 다소 떨어진다.[2]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천지창조 등이 대표적인 성상이다.
성상숭배인지 성상공경인지는 상당한 어감의 차이가 있으므로, 본 항목에서는 숭배나 공경 등의 표현을 최대한 피하여 중립적으로 서술한다.
2. 초기 역사
우선 고대의 유다 민족에서는 성상 제작 풍습이 오늘날처럼 성행하지는 않았다. 우상 숭배의 경향이 짙은 당시의 유다 민족에게, 또 지리적으로 우상 숭배를 하는 이교 민족에 둘러싸여 있던 유다 민족에게는 성상 공경의 본뜻에 대한 오해가 일어날 우려가 있었던 까닭이다.4세기에 제작된 지하 묘지의 그리스도 흉상 |
그러나 그때에도 가톨릭 내부에서는 신앙에 관한 상징적인 것을 많이 사용하였다. 초기 3세기 동안 가톨릭 신자들의 밀회소인 로마 카타콤바의 유적을 보면 성령의 상징인 흰 비둘기를 그린 벽면과 유리병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 거기에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상징인 어린양과 믿음의 표시인 닻 모양과 교회를 의미하는 큰 배를 그리기도 했다.
3. 동로마 제국의 성상 발전
형상 앞에 향을 사르고 불을 밝히는 것은 고대의 기본적인 숭배 방식이었다. 사람들은 황제들의 초상에도 그런 식으로 경배했는데, 3세기와 4세기 초에는 기독교도들이 그것을 거부하다가 정부의 박해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기독교 성상이 고대의 형상을 서서히 밀어낸 이면에는 각 가정에 수호신을 모시는 그런 뿌리 깊은 전통이 자리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그 현상은 일신교를 믿는 기독교도들이 다른 수호신들을 밀어내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추측된다. 기독교가 제국에 확고히 자리 잡은 뒤에는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성인 상들이 가정의 안녕을 바라는 수호신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했다.근래에 고전 후기 동로마 제국의 가정들에는 기독교 성상뿐 아니라 이교 신들의 성상도 모셔져 있었다는 사실들이 밝혀졌다. 동로마 사람들은 그것을 틀에 끼워 벽에 걸거나 그림 크기와 같은 덮개를 씌워 보관했다. 성상은 종종 매장의 부장품으로도 쓰였고, 이집트에서 출토된 미라 얼굴에 초상화가 덮여 있었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학자들은 그 이교적 초상이 동일 기법으로 그려진 기독교 성상의 선구이고, 이시스의 상은 성모 마리아, 제우스와 사라피스(이집트와 그리스의 태양신)의 상은 그리스도의 첫 성상 모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것이 말해주는 또 다른 사실은 납화 기법으로 그려진 이교 신들의 모습과 그리스도 성상의 모습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긴 머리와 수염 있는 모습으로 그릴 것인지, 짧은 곱슬머리를 한 모습으로 그릴 것인지도 화가들의 또 다른 걱정거리였다.
4. 성상의 개념 변화
본 문서의 개요에서도 언급됐다시피, 그리스어 이콘(성상)은 본래 어느 형상에나 다 쓰이는 말이다. 그러다 4세기 무렵부터는 그것이 납화 기법으로 그린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성인, 각 지역의 순교자, 주교, 수도자들의 형상에만 쓰이는 말이 되어버렸다. 종교적 성상은 무덤에도 예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기독교도들이 대리석 석관에 상징과 형상을 아로새겨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그런 관들은 또 종종 교회 안에 안치되기도 했다. 성물에 대한 황제의 후원도 기독교 미술이 발달하는 요인이 되었다. 레오 1세 황제와 황후 아일리아 베리나가 성모 마리아의 허리띠와 베일을 콘스탄티노플로 가져와 블라케르나이의 성모성당에 예배당을 짓고, 그 안에 안치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런 예배당들은 흔히 황제 부부와 성물임을 입증한 두 명의 원로원 의원과 함께 그려진 대형 성모 마리아 상들로 장식되었다. 성모 마리아 축일에는 그 성상을 들고 사람들이 도시에서 행렬을 벌였다.그보다 다소 위상이 떨어지는 축일에는 모자이크화 및 프레스코화로 그려진 거룩한 인물, 주교, 순교자, 성인들의 화상을 공공장소에서 전시했다. 패널화는 금속, 모자이크, 에너멜, 중급 재질의 화판에 신속히 복사되었다. 그러고는 그것에 테두리를 치고, 은 가리개를 덮고, 보석을 장식했다. 표면 보호를 위해 그림 앞에는 비단 가림막을 설치하기까지 했다.
성상은 그렇게 새로운 미술 형식, 특히 비잔티움과 관련된 미술 형식이 되었다. 성상은 또 동로마 제국에서만 최고의 중요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5. 성상의 전성기
그리스도로 믿어지는 얼굴이 선명하게 찍힌 천, 곧 만딜리온(천 위의 그리스도 이콘)과 같이 기적적으로 만들어진 성상은 아케이로포이에토스(사람의 손으로 그린 것이 아닌)로 불리며 더욱 소중히 다루어졌다. 시리아의 에데사와 소아시아 중부의 카물리아나에서는 만딜리온을 모델로 하여 만든 성상을 도시의 수호신처럼 모시며 적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그것을 들고 성벽 주위에서 행렬을 지었다. 또한 니케아 공의회가 끝난 뒤에는 공의회에 참석했던 318명의 교부들의 성상이 니케아의 수호신 역할을 대신했고, 성상들 중에서도 으뜸인 성모상은 콘스탄티노플을 방어하는 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은 그 이유로 성모의 보호를 받는다는 뜻의 테오토코폴리스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성상이 보호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은, 성상은 어찌됐든 묘사된 인물의 본질을 포착하고 있으며 따라서 사람들은 그 성상을 통해 묘사된 인물과 의사소통을 한다는 이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 관점은 카이사리아의 성 바실리우스 주교가 황제의 형상에 대해 언급한 유명한 말로 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성상에 경의를 표하면 성상 속 인물에 그것이 전달된다는 것이었다. 그 이론은 또 성상이 사람에게 말을 거는 방식으로 한층 강화되었다. 마치 대화를 원하는 듯 큰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성상의 모습에서는 위엄이 느껴졌고, 성상은 그런 즉각적 소통을 통해 보는 사람의 주의를 요했고, 그에 대해 기독교도들은 완전한 전념으로 답했다.
6. 성상 파괴 운동
6.1. 동서교회 분열 시기
이후 본격적으로 성화상이 등장한 것은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이후부터인데, 성화상은 처음부터 성서를 읽을 수 없는 이들을 위한 교리교육 수단으로서 여러 성미술의 장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주로 회화를 중심으로 4-5세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그리스도나 성인들을 형상화한 성화상은 6-7세기에 이르러 교회, 카타콤, 수도원은 물론 개인주택에까지 그려지면서 공경 대상이 되었다.여기에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서방 교회에서도 성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계기가 된다. 4세기 후반 훈족에 의해 밀려난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 사회로 흘러들어오자, 무지몽매한 이교도를 교화시키기 위해 많은 교보재(…)가 필요했고,
하지만 문제는 시대가 흐른 뒤, 이슬람교의 등장과 함께 발생했다. 이슬람교는 이슬람교의 관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성상은 우상숭배라고 주장했고, 동로마 제국 동부 속주들에서는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아 성상파괴운동이 발생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소수의 이단운동에 불과했겠지만, 이슬람 세력에 맞서 제국 동부를 군사적으로 수호하던 황제들이 이들의 입장에 동정적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황제들은 시민에 대한 영향력의 측면에서 교회와 경쟁하였으므로, 성상파괴론을 장려하는 것은 매력적인 정치적 도구일 수 있었다.
성상파괴론의 논리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완벽하게 그림으로 그릴 수가 없다'면서 결국 그림은 불완전한 인성(人性)만을 그리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성화상 옹호론자들을 죄다 신성(神性)과 인성을 분리하는 네스토리우스주의자로 비난했다.[3] 무엇보다 성상 자체가 기존 그리스-로마 전통 신앙에서 기독교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산물인 만큼 굳이 이슬람교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성상 반대파는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교도 감화에 더할 나위 없는 효과를 가진 성상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성 스테파노 등 수도원 등에서 활동하던 성화상 옹호 교부들도 지속적으로 성화상에 대해 그 정당성을 설득하였다.
특히 출애굽기(탈출기) 20장의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라는 구절에 대해서는, 조상(彫像) 제작의 무조건 엄금이 아니고, 다만 이를 신으로 숭배하려는 목적으로 제작하는 행위를 금한 계명이라는 게 옹호 측의 설명이다. 즉 '조각상을 신으로 섬기지 마라'는, 어찌 보면 매우 상식적인 우상숭배 금지계명이라는 것.
또한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이 당연한(?) 계명을 하느님이 굳이 내린 이유에 대해 "유다인들에게는 우상 숭배의 경향이 심하므로 이런 명령이 있었으나, 우리는 신학적으로 말하면 이미 미신의 오류를 면하고 진리를 알게 되어 하느님을 모시고 오직 그분께 흠숭지례를 드릴 줄 알며, 하느님께 대한 지식을 더 완전히 더 풍부히 가졌으므로 어린 시대를 지나 장성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아이가 아니며 하느님께로부터 식별 능력을 받아, 형상 표시의 가능 불가능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실제로 탈출기 25장에서는 하느님이 모세에게 '커룹(그룹)의 형상'을 만들도록 시킨다. 즉 '형상을 만드는 것 자체'가 죄라서 금지시켰다면, 이는 하느님이 모순을 행한 셈이 된다(...).[4]
성 스테파노는 황제 콘스탄티노스 5세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 한 닢을 황제에게 내밀며 "폐하, 이것은 누구의 초상입니까?"라고 묻자 황제는 "짐의 초상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스테파노는 동전을 내던지고 그것을 짓밟았다. 당연히 사형선고가 떨어졌고, 형장에서 그는 "아, 내가 한 국왕의 모습을 모욕하여 사형을 당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성상을 태워 없앤 악당들은 어떠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냐!"하고 말하였다.
성화상을 기본적으로 초월적 신성을 가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창문으로 생각한 이들은,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셨으며[5], 신성과 인성은 언제나 같이 붙어다니므로 그림을 그려도 신성과 인성은 언제나 함께 한다고 주장하면서, 성상파괴론자들을 당시 치명적인 이단의 낙인이었던 단성론자로 몰아 반박한다. 이후 동로마 제국 내에서의 정치 지형 변화에 따라 성상 허용과 금지가 번갈아 벌어지면서 애꿎은 인류의 문화유산들만이 수난을 당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서방 교회에서는 동방 교회와는 달리 딱히 성상파괴론을 자극할 만한 떡밥이 없었으므로, 서방 교회 입장에서는 동방에서 갑툭튀한 성상파괴론에 뜨악해서 동서 교회의 사이가 벌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성상파괴론의 탄압을 받은 많은 이콘제작자들이 서방 교회로 망명함에 따라 서유럽의 성미술의 발전을 촉진하기도 하였다.
하기아 이리니 성당의 내부 모습 |
이스탄불 톱카프 궁전 안에 있는 아야 이리니[6]가 바로 성상이 금지된 시절에 지어진 건물이다.[7] 링크를 보면 이콘은 하나도 없고 십자가와 육각별 모양(다비드의 별)만 천장에 달랑 그려진 걸 볼 수 있다.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도 저 모습 그대로 톱카프 궁전의 내부 시설로 편입되어 무기고, 보물창고, 궁중 보물 박물관 등으로 활용되었고 터키 공화국시기인 1909년부터 1978년까지는 전쟁기념관이었다. 지금은 각종 행사를 위한 콘서트홀로 사용되고 있다.
동방 교회에서는 결국 여황제 이리니에 의해 소집된 제7차 공의회(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상에 대한 공경은 성화를 통해 표현된 교리와 성인의 행적에 대한 공경이지, 성화 그 자체에 대한 공경이 아니므로 우상숭배가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동방 교회는 다시 과거의 성화 사용 전통으로 복귀하였다.
이후로 정교회는 매년 사순 시기의 첫째 주일을 정교 주일로 지정하고 전세계 모든 정교회에서 성화(이콘)를 들고 행렬 의식을 거행하면서 성상 논쟁에서 정통 교리가 승리한 것을 기념하고 있다. 즉 성화는 지금도 사용되게 된 것이다. 하지만...
6.2. 종교개혁 시기
1566년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성상파괴가 집중적으로 벌어진 지역들을 표시한 지도.
잠잠해지나 싶었던 성상 파괴 운동은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이번에는 동방이 아닌 서방에서 다시 한 번 재현되었다.
1522년 안드레아스 칼슈타트에 의해 비텐베르크에서 성상이 철거된 것을 시점으로 1523년 취리히, 1535년 제네바 등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성상 파괴 사건이 일어났는데,[8] 그중에서 1566년 저지대 국가들에서 칼뱅주의자들에 의해 벌어진 사건은 시기상으로만 보면 가장 늦게 일어났지만, 80년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발단들 중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9] 가장 유명해졌다.
다만 먼나라 이웃나라등을 통해 알려진 것과 달리 남부에서[10] 북부로 올라가는 식이었고, 당시만 해도 신성모독적 행위라며 거세게 비난하는 반응이 많았던 데다 침묵공 빌럼도 처음에는[11] 오히려 성상 파괴를 진압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현재 네덜란드의 개신교 예배당들은 남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성상이 제거되어 있는데 이는 스페인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80년 전쟁 도중 침묵공이 루터교회에서 칼뱅교회로 개종하고 남부를 제외한 현 네덜란드 지역의 대다수가 개신교 진영으로 들어가면서[12] 각 지방 의회의 동의 아래 성상 철거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이다.[13]
이는 검소하고 문자주의적인 생활을 강조했던 장 칼뱅의 영향으로 당시는 상당한 사치품이었던 성상을 꺼리는 성향이 이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일단 소재부터 대리석에, 하느님과 교회의 권위를 보여야 하는 만큼 보석이나 금은으로 치장하는 경우가 많고 2차원 성화의 경우 거진 계란 노른자를 쓰는 템페라화가 대부분이라 식량 낭비 문제도 있었다.[14] 거기다 인부의 품삯까지 합하면 그야말로 돈지랄이 따로 없는 것. 게다가 개신교에서는 출애굽기 사건에서 나온 금송아지를 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내주신 하느님을 억지로 형상화한 것임을 강조하여 하느님은 오로지 보이지 않는 존재로만 경배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더욱이 "우상을 훼파하고 찍어 없애버려라"는 구절이 있고 열왕기나 역대기를 보면 구약시대에도 히즈키야나 요시야 왕처럼 닥치는 대로 우상을 모두 가루가 될 때까지 남김없이 없애버린 사례[15]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근거로 당시 칼뱅파, 츠빙글리파, 급진주의 재세례파들은 성상 파괴를 정당하다고 여겼다. 이후로 루터교회를 포함한 대다수의 개신교 교파들은 시각적인 요소보다는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활자적, 청각적 요소를 더 중시하게 되었으며 이는 문해율 향상에 관심을 갖게 만들어 근대적인 공교육 개념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16]
또한 이러한 성상에 대한 태도로 당시 네덜란드와 유일하게 교류하고 있던 일본에서 시행되고 있던 후미에에 대해서도 별 거부감없이 받아들여 스페인이나 포르투갈과 달리 일본과의 교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거기에 포교에 대해 별 관심없이 행동했던 네덜란드의 태도도 그 이유 중 포함되었긴 하지만 말이다.
루터교회가 주류였던 독일 북부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도 교회 안에 있는 성상과 조각상들은 그대로 남겨두었지만 야외에 설치된 십자고상과 성모상들[17]은 보이는 대로 뽑아버렸다. 애초에 루터파도 칼뱅파보다 상대적으로 유연한 것일 뿐 성상에 대해서는 원래 회의적이었고, 역사적인 이유 등으로 인해 성상이 남은 것에 가깝다.(이에 관해서는 마르틴 루터의 후반생 문단 참조)
성공회는 다른 개신교 교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상 파괴에 소극적이었다. 가톨릭과의 단절 선언을 한 헨리 8세는 가톨릭 성당과 수도원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성모상은 철저히 부수었지만, 그외의 성상들에 대해서는 (가톨릭을 강하게 상징하는 것이 아니면) 유연하게 받아들였지만 이후 영국내전시기를 거치면서 크롬웰 일당에 의해 남아있던 영국 교회예술들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는데 이 흔적은 지금도 찾아볼 수 있다.
7. 우상숭배인가?
"그리스도의 성화상들이나 동정녀이신 하느님의 어머니와 다른 성인들의 성화상들은 특히 성당들 안에 보유하고 보존할 것이며 마땅한 존중과 공경을 드릴 것이다. 이는 성상들 안에 그 성상들을 공경해야 할 이유가 되는 어떤 신성이나 능력이 있다고 믿거나 과거에 우상들에 희망을 두었던 이교인들이 했던 것처럼 성화상들에게 무엇을 청하거나 이들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에게 드리는 공경은 그들이 표현하고 있는 원형을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입을 맞추고 그 앞에서 모자를 벗고 절하는 그 성화상들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흠숭하고 성화상들이 표상하는 성인들을 공경하는 것이다."
J. 노이너 / J. 뒤피, 《그리스도교 신앙》
J. 노이너 / J. 뒤피, 《그리스도교 신앙》
만일 성상 자체에 어떠한 신적 영험이 있거니 하고 그것을 숭배한다면, 그것은 빼도 박도 못하는 우상 숭배 행위가 되지만, 가톨릭이나 정교회 신자들은 누구든지 성상 그 자체에는 아무런 지성이나 도울 능력이 없음을 잘 안다. 다만 하늘에 실재하시는 하느님과 성인들을 흠숭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할 뿐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대한민국 국민은 국민의례때 태극기 앞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행한다. 그런데 이것이 국기가 의미하는 조국에 대한 경례가 아니고, 그 국기를 만든 재료인 헝겊이나 색깔 그 자체에 대한 경례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도 그렇게 주장하거나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할 때에는 그 형상이 우리 머릿속에 어떤 형태로든지 나타나는 법이다. 이를 내적 심상이라 한다. 내적 심상이 없이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아버지의 형상이 어떤 식으로든지 머릿속에 나타나지 않고서는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날 수가 없다. 그런데 내적 심상 역시 결코 실물 자체는 아니고, 오직 그 실물의 한 표시일 뿐이다. 이 점에 있어서 내적 심상은 외적 표상, 즉 말, 글자, 그림, 동상과 다를 바가 없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탈출기 20장 4절
탈출기 20장 4절
가톨릭 교회는 위의 구절을 어떤 상의 신격화를 금하는 계명으로 해석한다. 즉, 조각상을 제작하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를 신으로 숭배하려는 목적으로 제작하는 행위를 금한 계명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조각상 제작은 절대적으로 금지된 적이 없다. 하느님께서는 순금으로 커룹상을 둘 만들라고 말씀하셨고(탈출 25,18 참조), 또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매달아 두면 뱀에 물린 자라도 그것을 보면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민수 21,8 참조). 커룹은 하늘의 천사이며 뱀은 땅과 물속에 사는 양서 동물이니, 이 커룹의 금상과 뱀의 동상은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땅 밑 물속의 것의 형상을 만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느님께서는 모순을 행하실 리 없다.
8. 기준
우상숭배라고 공격받기 쉬운 부분이기 때문에,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도 나름의 기준이 존재한다.- 공경을 표하는 것은 오로지 축복받은 성상에 한한다.
- 축복받지 않은 것은 교회법상 신앙의 도구로 활용할 수 없다. 거꾸로 말하면 성상은 하나의 도구라는 뜻이다. 개인이 만든 단순한 형상이나 그림에 함부로 공경을 표해서는 안 된다.
안 그러면 주일 학교 포스터에도 공경을 표해야 할 판이다.
- 특정한 성상이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 예를 들어 발등 위에 장미꽃이 얹혀 있는 루르드의 성모상이라면 루르드의 성모님이 의미하는 은총을, 어디서 누가 만든 성상이든, 해당 성인을 의미하는 지물 등이 제대로 표현되어 있고 사제에 의해 적법하게 축복받았다면 모두 신앙의 도구로서 똑같이 드러낸다는 것이 교회법으로 제정되어 있다. 즉, 교황한테 축복받은 묵주이든 동네 성당 보좌신부한테 축복받은 묵주이든 동등한 성물이라는 것. 십자고상, 성모상, 묵주 등을 무슨 부적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매우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천주교의 대표적 이단인 나주 성모동산(마리아의 구원방주)는 이 기준을 위반했다.
[1] 그리스,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 발칸 반도 정교회권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킵차크 칸국의 지배를 받았다.[2] 성공회는 가톨릭의 전통을 따르려는 고교회파 외에도 개신교의 개혁정신을 따르려는 저교회파와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광교회파가 있기 때문에 성상이나 이콘의 활용 정도는 각 교회마다 조금씩 다르다.[3] 실제로 네스토리우스파는 성상을 사용했다가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으면서 성상을 꺼리게 되었다.[4] 개신교에서는 이 부분을 음식 규례처럼 한때에만 유효했으며 현대에는 폐해진 부분이라고 여긴다.[5] 이를 '강생'이라 한다.[6] 그냥 성스러운 평화라는 뜻이고 밑의 성상을 용인한 여제와는 관계 없다.[7]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상 없는 정교회 건축물이기도 하다.[8] 심지어 루터교회 지역이던 코펜하겐에서도 벌어졌다.[9] 정확히는 성상 파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네덜란드측과 스페인측 의견이 충돌했고, 알바 공이 잔혹한 종교재판을 펼친 것이 발단이다.[10] 저지대 지역에서 성상 파괴 사건이 가장 먼저 터진 장소는 現 프랑스령인 옹쇼트(Hondschoote, 네덜란드어로 혼트스호터)성당이었다.[11] 이 당시 빌럼은 루터교도였고 칼뱅교로 개종한 건 나중의 일이다.[12] 가장 마지막으로 개신교 진영에 편입된 곳이 다름아닌 암스테르담(1578년)이다.[13] 출처: Andrew Spicer 《Calvinist Churches in Early Modern Europe》, 116-124페이지[14] 종교개혁가들과 성상파괴론자들 눈에 템페라화는 먹을 것 갖고 장난치는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비춰졌다.[15] 불지옥을 뜻하는 게헨나(=게힌놈)가 이 사건에서 유래한 말이다. 항목 참조[16] 실제로 루터와 칼뱅은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최소한의 교육은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지금도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은 호세아 4장 6절(백성들에게 지식이 없으면 망한다)을 인용하여 문맹이 우상숭배에 대한 변명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17] 지금도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등 가톨릭 및 정교 문화권에 속한 나라들은 길거리에 십자고상과 성모상, 혹은 이콘이 모셔진 사당 비스무리한 것을 길거리에 설치해 놓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