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18:15:00

소비보르 절멸수용소

소비보르에서 넘어옴
파일:SS-Totenkopfverbände.png 나치 독일의 주요 절멸수용소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소비보르 헤움노 마이다네크
파일:sobibor mausoleum.jpg
↑ 소비보르 마우솔레움(陵墓)

1. 개요2. 운영 역사3. 수용소 구조, 학살 과정4. 주요 간부
4.1. 초대 수용소장 프란츠 슈탕글4.2. 프란츠 라이히라이트너(Franz Reichleitner)4.3. SS 상사 '늑대' 구스타프 바그너4.4. SS 상사 '가스마이스터' 에리히 바우어(Erich Bauer)4.5. SS 상사 카를 프렌첼(Karl Frenzel)4.6. SS 상사 쿠르트 볼렌더(Kurt Bolender)
5. 소비보르 봉기6. 폐쇄와 발견7. 희생자 수, 생존자8. 전후9.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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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Obóz zagłady w Sobiborze (SS-Sonderkommando Sobibor) (폴란드어)
  • Das Vernichtungslager Sobibor (독일어)
  • Sobibór extermination camp (영어)
들어가기 전에: 원어 표기인 'Sobibór'는 폴란드어로, 'ó'는 폴란드어에서 'u'로 발음되기 때문에 실제 발음은 '소비부르'에 가깝다.[1] 하지만 악센트가 없는 'Sobibor'라는 표기법이 더 잘 알려진 관계로 흔히 '소비보르'라는 명칭이 통용되기에 여기서도 '소비보르'라고 표기한다.

소비보르 수용소는 나치 독일이 라인하르트 작전에 따라 세운 두번째 절멸수용소로 루블린 근처 소비보르에 위치했다. 베우제츠와 더불어 폴란드 남부의 유대인을 학살했고, 1943년부터는 폴란드 뿐 아니라 네덜란드, 프랑스 등 점령지 각지의 유대인들을 처형하여 운영기간동안 약 170,165~200,000명의 유대인이 이곳에서 희생되었다.

소비보르 역시 트레블링카처럼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 수십명의 생존자가 나왔다. 이 사실에 경악한 루블린 총독부 SS경찰 사령부는 추가 봉기를 우려해 소비보르를 즉시 폐쇄함과 동시에 라인하르트 작전마저 종료시켰다. 이렇게 소련군 당도 한참 전에 폐쇄되었기 때문에 다른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처럼 증거가 거의 확실히 인멸되었고 대부분의 수용소 간부들이 오랫동안 심판을 받지 않다가 1965~66년 서독의 하겐에서 진행된 소비보르 재판으로 살아남은 간부 여럿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절멸수용소는 '산업화'된 방식으로 학살을 시행했다. 자세한 방법에 대해서는 홀로코스트의 방식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문서를 참고.

2. 운영 역사

파일:Holocaust Poland.png
↑ 폴란드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 확대 가능. 소비보르의 위치를 확인 바란다. 다만, 이 지도는 소비보르로의 이송을 제대로 나타내진 못하고 있는데, 소비보르로는 수는 적어도 아우슈비츠처럼 점령지 각지의 유대인들이 이송되었기 때문이다.

나치의 반 유대주의 이데올로기 실행방식이 아직 절멸로 결정되지 않았을 때, SS는 니스코-루블린 계획(Nisko und Lublin Plan)에 따라 1940년 초 소비보르 근처에 루블린 '보호구역'을 만들었다. 이곳은 나치의 새로운 동방영토에 이주하게 될 독일인들을 위한 식량 공급창고로서, 유대인들을 격리시킨 뒤 그곳에 살게 하면서 노동시키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이에 따라 95,000명의 유대인들이 이곳에 보내져 자신들이 살 터전과 대농장을 만들고 있었는데, 바르바로사 작전 직후 이 계획은 폐기되었다. 이후 나치의 '유대인 문제 해결책'이 절멸로 가닥을 모으면서 루블린의 총독부 SS경찰 사령부는 라인하르트 작전을 개시하고 베우제츠 절멸수용소를 지었다. 소비보르 절멸수용소는 라인하르트 작전에 따라 세워진 두번째 절멸수용소로 베우제츠가 세워진 직후 1942년 3월 착공해 1942년 4월 지어졌다. 4월 말, 수용소 건설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가스실이 시험가동되기 시작했고 5월 중순부터 수용소는 완전히 가동되었다.

라인하르트 3개 절멸수용소 건설의 실무 감독관은 리하르트 토말라(Richard Thomalla)[2]였는데, 이 자는 3개 절멸수용소가 건설되고 있을 때 항상 임시 수용소장을 맡았다. 소비보르에서도 4월까지 그가 임시 수용소장으로 있다가 4월 28일 하트하임 안락사센터의 책임자였던 프란츠 슈탕글이 소장으로 부임했다. 가동 이후 약 두달만에 9만명의 유대인이 소비보르에서 학살되었고, 1942년 7월부터 1942년 12월까지 수용소를 지나가던 루블린-헤움 철도가 공사를 했기 때문에 소비보르의 학살은 잠시 멈추었다. 이 기간 동안 가스실의 용량은 두 배로 확장되었다. 이때까지 소비보르로 보내진 유대인은 주로, 니스코-루블린 계획이 폐기된 뒤 그곳에 격리되어있던 유대인들이었다. 계획에 동원된 95,000명의 유대인 중 약 60,000명이 소비보르로 보내졌고, 이밖에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지역의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보내졌다.

1943년 초까지 폴란드 남부의 유대인은 거의 절멸되었기 때문에 소비보르는 새로운 희생자를 받았다. 1943년 3월부터 7월까지 네덜란드에서 약 34,000명의 유대인이 이곳으로 보내져 살해된 것을 포함해 슬로바키아, 프랑스,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등 나치 점령지 각지의 유대인들이 수백 ~ 수천명 단위로 소비보르로 이송되었다.

3. 수용소 구조, 학살 과정

파일:sobibor map.jpg
↑ 1943년 6월 수용소 구조, 확대 가능

다른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들처럼 소비보르도 세 구역으로 나뉘어졌다. 1구역은 경비병들과 간부들이 거주하는 구역이었는데, 소비보르의 간부들은 다른 절멸수용소에서와 달리 수용소 경계 내에 상주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막사가 많은 편이었다. 2구역은 희생자들의 하차, 물품 압류, 탈의가 진행되는 곳이었고 3구역은 학살구역이었다.

희생자들이 도착하면 우선 플랫폼에서 바로 연결된 막사로 둘러싸인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 건물을 지나며 희생자들은 가지고 온 짐을 내려놓았다. 이곳에서 간부 중 하나가 의사처럼 보이도록 하얀색 가운을 입고선, 유대인들이 더 먼곳의 노동현장으로 보내질 것이고 그 전에 이곳에서 샤워와 위생검사를 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소비보르는 별도의 탈의실을 갖추지 않았기에 광장에서 즉시 탈의가 이루어졌고 광장 뒤로 이어진 '튜브'를 따라 '샤워실'로 이동했다. SS 간부가 이들을 인솔했고 행렬 뒤에서는 대여섯 명의 우크라이나인 부역자가 길을 재촉했다. 크리스티안 비르트가 고안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방법은 바로 전에 세워진 헤움노와 베우제츠에서도 적용되어 있었고 이후에 세워지는 절멸수용소에서도 대부분 같은 방식이 적용되었다. 현지 유대인과 외국 유대인에 대한 대우는 많이 달라서, 화차로 실려온 폴란드 유대인에겐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하차 작업을 진행했지만 '객차'에 실려 편안한 여정 끝에 도착한 폴란드 밖의 유대인들에겐 가스실에 들어갈 때까지 위장된 친절을 보였다.[3]

먼저 지어졌던 베우제츠의 가스실이 임시 가건물처럼 목재로 지어져 문제가 많았기에 소비보르에는 콘크리트 가스실을 지었다. 처음 지어진 건물에는 3개의 가스실이 있었고 건물 바로 옆에 소련제 가솔린 엔진이 부착되어 배기가스가 각 가스실로 흘러들어가게 했다. 이 건물은 1942년 7월 주변 철로 공사로 학살이 잠시 중지된 틈에 확장을 해서 6개의 가스실을 가진 것으로 개조되었고 모양은 베우제츠의 가스실과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크기는 조금 더 커서 하루 최대 20,000명을 학살할 수 있었다.[4]

베우제츠, 소비보르, 그리고 후에 트레블링카에 처형용 엔진을 설치한 SS 분대지도자(Scharführer. 중사에 상응) 에리히 푸흐스(Erich Fuchs)는 훗날 소비보르에 처음으로 가스실이 설치되고 시험되던 날을 이렇게 증언했다.
"1942년 4월 어느날 나는 비르트의 명령을 받고 소비보르에 설치할 처형용 엔진을 구하기 위해 렘베르크[5]로 갔다. (중략) 무거운 소련제 왕복 엔진이었는데 아마 기갑차량이나 트렉터에서 쓰던 엔진일 것이다. 최소 200마력에 수랭식 v8기통 엔진이었다. 우리는 엔진을 콘크리트 베이스에 놓고 파이프를 배기구에 부착했다. 그 다음 우린 엔진을 시험해봤다. (중략)베우제츠에서 알게된 화학자 한 명이 장비를 들고 가 가스 농도를 측정했다. 그 뒤 시험으로 가스처형이 이루어졌다. 내 기억이 맞다면, 30명에서 40명의 유대인 여성들이 처형되었다. 여성들은 근처 숲에서 탈의하고 SS와 우크라이나 경비병에 의해 무리지어 가스실로 들어갔다. (중략) 10분 뒤, 여성들은 모두 사망했다. 화학자와 SS 장교가 엔진을 정지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공구들을 정리하고 시체가 치워지는 모습을 봤다. 시체들은 가스실과 더 먼곳으로 연결된 좁은 철로를 통해 옮겨졌다." # p.100 참조

시체가 처리되는 과정은 위의 증언과 같았다. 소비보르의 가스실 역시 밖으로 바로 통하는 큰 문이 있었고 이 문을 통해 시체가 치워졌다. 존더코만도들은 시체를 협궤에 놓여진 수레에 태운 뒤 수용소 외곽의 매장 구덩이로 가져갔다. 다른 절멸수용소들처럼 소비보르에서도 처음엔 시체를 그냥 매장했다. 하지만 1942년 11월부터 매장된 시신을 조금씩 소각하기 시작했고, 1943년 1월 경 나치 독일이 카틴학살의 현장을 발견한 이후에는 대대적으로 시체 소각을 실시했다.

소비보르에는 약 500~600명의 존더코만도가 수용되어 있었다. 이들 중 400명의 존더코만도는 2구역에서 일하며 희생자 하차, 물품 분류작업을 했고 나머지는 학살구역에 거주하면서 시체 처리를 담당했다. 소비보르에서 존더코만도를 뽑는 방식은 베우제츠, 트레블링카보단 좀 더 체계적이어서 이발사, 재단사 등 전문기술을 가진 인원 위주로 뽑았다.[6] 다른 절멸수용소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에 대한 대우도 매우 가혹했고 간부들은 수시로 존더코만도들을 구타했다. 매일 밤 더 이상 필요없어진 인원 일부가 총살되었고 바로 다음에 들어온 희생자 무리에서 뽑힌 인원으로 대체되었다.

존더코만도 중 칼리슈 게토에서 이송되었던 샤울 플라이샤키에르(Shaul Flajszhakier)는 소비보르에서 신발장이로 일했는데, 다른 수용자들을 구타할 것을 명령받았으나 거부하여 SS에게 구타를 당한 뒤, 수용소의 생활 여건을 '칭찬'하는 노래를 즉석에서 만들라고 지시받았다. 그리고 그 명령에 따라 샤울은 다음과 같은 아이러니한 노래를 즉석에서 만들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얼마나 즐거운가.
Fahijad
그들은 우리에게 먹을 음식을 주지.
Fahijad
푸른 숲에서 일하는 건 얼마나 즐거운가.
우리가 머무는 이곳.
Fahijad, Fahijad, Fahijad

이 노래에서 Fahijad의 의미는 확실치 않은데, 이디시어 학자들은 샤울이 이디시어를 모르는 SS몰래 집어 넣은 욕설이 아닐까 하고 추정한다.# 어쨌든, 가장 가혹한 간부 중 하나였던 구스타프 바그너는 이 노래를 매우 좋아해서 존더코만도들에게 자주 이 노래를 시켰다고 한다. 한편, 동료를 구타하는 걸 거부하고 죽음의 갈림길 앞에서 이 노래를 만들었던 샤울 플라이샤키에르는 소비보르 봉기 때 전사하고 만다. #

4. 주요 간부

소비보르의 간부들은 다른 절멸수용소들과 달리 수용소 내에 살면서 상주했는데, 1979년 구스타프 바그너가 BBC와 가졌던 인터뷰에 따르면 이들은 저녁이 되면 일 얘기를 일절 하지 않고 술과 카드놀이에 빠졌다고 한다. 게르슈타인 보고서에는 게르슈타인이 트레블링카에 방문했을 당시 열린 연회에 대해 나와있는데, 음식은 특별하진 않아도 고기 위주로 풍족했다고 한다. 힘러는 절멸수용소 장병들에게 육류 위주로 특히 많은 식량을 공급했고, 장병들의 요청에 따라 술도 어느 부대보다 많이 보내주었다고 하는데[7], 아마 소비보르 역시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절멸수용소에서는 어땠는 지 모르겠지만, 후술할 '가스마이스터' 에리히 바우어의 증언에 따르면 엄청난 악행의 공범자로서 소비보르 간부들 간의 유대감은 매우 끈끈했다고 한다.
우린 외국 땅에서 신뢰할 수 없는 우크라이나인 자원자들에 둘러싸인 '공범자'("verschworener Haufen") 무리였다. 우리들 간의 유대감은 매우 끈끈해서 프렌젤, 슈탕글 그리고 바그너는 SS문장이 박힌 반지를 만들어 영구 주둔 장병들에게 나눠 주었다. 이 반지는 공범자라는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 수용소 간부 전원에게 나눠졌다. 또한 수용소의 업무들은 공유되었다. 우리들 모두가 특정 시점에서 하차작업, 탈의, 가스처형 등 소비보르의 업무 중 하나를 수행하고 있었다. #

4.1. 초대 수용소장 프란츠 슈탕글

이후 트레블링카 수용소장으로 부임하여 본격적으로 악명을 떨치는데, 이후의 행적에 대해선 이곳을 참조바란다.

4.2. 프란츠 라이히라이트너(Franz Reichleitner)

파일:Franz Reichleitner.jpg

두번째이자 마지막 수용소장. 재직기간 13개월로 가장 오래 소장으로 있었다. 소비보르가 해체된 후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 토벌 임무를 수행중 1944년 1월 3일 파르티잔에 의해 사살되었다.

4.3. SS 상사 '늑대' 구스타프 바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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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생.

1931년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나치당에 입당했다. 엥겔베르트 돌푸스의 오스트리아 사회기독당 정권이 오스트리아 나치당을 불법화시키고 탄압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독일로 도망쳤으며 거기서 처음에는 SA에 나중에는 SS에 가입했다.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 초반에는 T-4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1942년 라인하르트 작전이 시작되자 바그너는 T-4 프로그램의 경험을 살려 소비보르에 배치되었고 그곳에서 소비보르에 도착한 유대인의 처리 과정을 감독하며 동시에 존더코만도 선발 및 관리 역할도 맡았다.

소비보르에서 구스타프 바그너의 잔인한 일처리 때문에 존더코만도들은 그를 '늑대(װאָלף)' 내지는 '야수(החיה)'라고 불렀다. 바그너는 특별한 이유 없이 '정기적으로' 존더코만도를 구타하고 죽여 존더코만도들 사이에서 악명을 떨쳤다. 그는 어머니의 아기를 빼앗아 갈기갈기 찢어죽이기도 했으며, 손수 존더코만도 두 명을 소총 개머리판으로 때려죽인 적도 있었고, 어느 날은 일과 뒤 존더코만도의 숙소 막사에 들어와 수면 중이던 16살쯤 되는 청소년을 바로 일어서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타하다 총으로 쏘아죽이기도 했다. 다른 한 편 존더코만도들을 일부러 모욕하기 위해서 유대교 명절 욤 키푸르 날에 수감자 구역(Lager Ⅰ) 광장에 들어와 단식을 지키려는 경건한 존더코만도 몇 명에게 강제로 빵을 먹게 하면서 이를 두고 웃으며 농담하기도 했다.

소비보르 봉기가 있었을 당시 바그너는 자리를 비웠다.[8] 소비보르가 폐쇄된 뒤 바그너는 다른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 간부들처럼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지역으로 파견되어 파르티잔을 토벌에 종사했으며 동시에 유대인 색출 작업을 병행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프란츠 슈탕글과 함께 시리아를 경유하여 브라질로 탈출했다. 브라질에서는 "귄터 멘델"이란 가명으로 신분을 위장했으며 1950년 4월 12일자로 브라질 영주권을 취득했다. 그는 부잣집 집사로 일하다가 건설 노무자로 일했고 현지 과부 여성과 결혼했다. 하지만 운이 다했는지 1967년에 현지인 아내가 죽었고 4년이 지난 1971년에는 경제적으로 추락하여 거지가 되어 거리에서 노숙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후 농장 일꾼으로 취직하면서 거지 신세는 벗어났지만 1978년 5월 30일 나치 사냥꾼인 시몬 비젠탈에게 발각되어 브라질 경찰에게 체포되면서 꼬리를 잡혔다. 시몬 비젠탈에게 발각된 후 소비보르 절멸수용소 봉기 생존자 스타니스와프 "슐로모" 슈마이즈네르(Stanisław "Szlomo" Szmajzner)[9]가 공개적으로 그와 대면하여 다시 한 번 신원을 확인했다.

1978년 5월 30일 구스타프 바그너가 체포되자 이스라엘, 폴란드 정부가 범죄자 인도를 강력히 요청했다. 안타깝게도 브라질 정부와 법원 모두 그 요구를 거절했다. 바그너의 모국인 오스트리아 정부까지 나서서 요구했지만 범죄자 인도에는 결국 실패했고, 그는 변호사를 고용한 채 가석방 상태로 자택에서 거주했다. 하지만 1980년 10월 3일 바그너는 상파울로 자택 화장실에서 가슴에 칼이 꽂혀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변호사는 바그너가 자살했다고 주장했지만 자살자가 가슴을 칼로 찌르는 경우가 드물며 전후 유대인들이 나치 전력자에게 복수하는 주된 방법 중 하나가 칼로 찔러 죽이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가 암살되었다는 의혹이 지금까지 남아있다.[10] 모사드의 비밀공작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4.4. SS 상사 '가스마이스터' 에리히 바우어(Erich Bauer)

파일:Erich Bauer.jpg

(1900년 3월 26일 - 1980년 2월 4일)

베를린에서 태어난 바워는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한 후에 1933년 입당해 돌격대 대원이 되었다가 다시 친위대로 이적했다. 그는 1940년까지 차장 일을 하다가 1940년 후반에 T-4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승진했다. 1942년 4월에 소비블 강제 수용소로 파견된 바워는 그곳에서 유대인과 집시들의 가스실 처형을 담당하는 가스실 운영자였다. 얼마나 유대인들을 잔인하게 처형했는지 수용자들은 바워에게 목욕탕의 마이스터(장인)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 바워는 소비블 강제 수용소의 탈주극이 벌어졌을 때 수용자들에게 살해된 친위대 중사 루돌프 베크만의 시체를 처음으로 발견하여 가까이에서 일하던 유대인 수용자 2명을 총살하기도 했다.

전후 오스트리아에서 미군의 포로가 된 바워는 1946년에 석방되어 베를린에 머물렀고, 전후 건물 잔해를 정리하는 직업을 얻어 생활하다 우연히 소비보르에서 탈주한 생존자들과 마주친 후 체포되었다. 그렇게 1949년에 다시 체포된 후 전범혐의로 기소된 바워는 1950년 5월 8일에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서독에서 사형이 폐지되면서 종신형으로 감형된 후 1971년에 가석방되었고, 1980년에 사망했다. 바워는 소비보르의 주요 간부들 중 가장 먼저 체포되어 소비보르에 대한 증언을 상당히 많이 남겼는데, 문서 곳곳에 그의 증언이 배치되어 있다. 바워가 감형 없이 형을 살다 1980년 사망했다는 얘기도 있다.

4.5. SS 상사 카를 프렌첼(Karl Frenzel)

파일:칼 프렌첼.jpg

1911년 브란덴부르크 제페르닉 출생. 청년 시절 목수로 일했고 그 영향으로 독일공산당 지지 성향의 목수노동조합에 가입했으며 18세에 사귄 첫 여자친구는 유대인이였다. 공산당 탈당 후 1930년 새로운 직업을 찾기 위해 나치 돌격대에 입단했다가 SS로 이적하였다. 라인하르트 작전 시행 이후 소비보르 수용소의 경비 책임자로 발령받았다. 구스타프 바그너가 자리를 비우거나 휴가 중일시 그가 대신하여 유대인을 가스실에 보내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자도 전쟁이 끝난 후 신분을 감추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무대조명 기술자로 일했으나 결국 1965년 9월 6일에 다른 SS 대원들과 함께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는 학살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85년 건강악화로 석방되었고 1996년 10월 2일 하노버 근처의 가브센이란 곳에서 사망했다.

1983년 인터뷰에서 자신은 소비보르 수용소에 발령받았을 땐 노동 수용소에서 경비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만 들었고, 도착한 곳이 절멸수용소임을 알게 되자 상관에게 여기서 근무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1945년 종전 후 학살에 가담할 것을 요구한 나치를 증오하게 되었으며 희생자 유족들에게 직접 사과하고 싶었지만 네오나치의 보복이 두려워 하지 못했다고 변명하기 급급했다.

4.6. SS 상사 쿠르트 볼렌더(Kurt Bolender)

파일:Kurt Bolender.jpg

1942년 가을까지 소비보르 학살구역의 책임자였고 그 뒤엔 우크라이나인 경비병 지휘관이었다. 존더코만도들이 소비보르에서 가장 무서워하던 인물로 소비보르 재판 당시 기소 항목에 약 360명의 존더코만도들을 직접 처형한 것이 추가되었다. 그는 항상 '베리(Barry)'라는 세인트 버나드를 끌고 다니며 존더코만도들을 위협했으며 일을 시작할 때면 반바지만 입은 채로 돌아다니며 존더코만도들을 채찍으로 때리고 다녔다. 그에 대한 소비보르 봉기 생존자들의 증언이 다음과 같다.
"파울 그로트와 쿠르트 볼렌더는 '베리(Barry)'라는 개를 데리고 다녔어요. 그 개는 그들의 옆에서 조용히 걸어다녔지만, 주인이 유대인 인부 한 사람에게 돌아서서 '그래서 니가 지금 일하기 싫구나?'라고 말하면 베리는 그에게 달려들어 살점을 물어뜯고 떼어냈습니다." - 아다 리흐트만 (Ada Lichtman) -
"쿠르트 볼렌더가 운동선수같은 몸에 장발을 하고, 종종 반바지만 입은 채 거의 반 나체로 긴 채찍을 들고 다니면서 자신과 마주치는 수용자들을 후려치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중략) 언젠가 제가 플랫폼에서 일할 때 우리가 화차 창문 하나를 열어놓은 채 닫지 않았다고 부주의를 이유로 벌을 받게 되었는데요, 우리 모두 채찍을 100대씩 맞았습니다. 볼렌더는 그의 일에 엄청난 열의를 보였습니다. 또한 그가 화차에서 갓난아기, 어린이, 병자들을 '가짜 보건실'(총살구덩이)로 가는 카트에 바로 던져넣는 장면도 한 번 이상 봤습니다. 그는 학살구역의 존더코만도들을 위한 식량을 수송하는 인원 10명을 선발하는 사람이었는데요, 그가 직접 인부들을 인솔할 열망을 보인 날이면, 일이 끝났을 땐 그들 중 한 명도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 모세 바히르 (Moshe Bahir) -

1942년 말 아내와의 이혼소송 중에 증인에게 위증을 하도록 지시했다는 혐의로 나치 당국에 체포되어 잠시 형을 살았는데, 형기 중에 소비보르 봉기가 터져서 소비보르가 폐쇄 절차를 밟았기 때문에 출소 후엔 도로후차 노동수용소에 배치되었고 곧 다른 간부들처럼 트리에스테로 발령받았다. 전후 가명을 사용하며 베를린 나이트클럽의 문지기로 일하다가 1961년 신원이 밝혀졌고 1965년 체포되어 소비보르 재판으로 넘어갔다. 재판의 최종 판결이 나오기 2달 전 자살했다.

5. 소비보르 봉기

1943년 봄 이후 소비보르로의 이송은 많이 줄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수용소가 폐쇄될 거라는 소문이 존더코만도 사이에서 돌았다. 1943년 6월 30일 베우제츠가 완전히 해체된 후 마지막 존더코만도 300명이 소비보르로 들어와 처형되었는데, 이들은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방으로 도망다니다 경비병들에게 사살되었다. 이들 중 한명이 소비보르의 존더코만도에게 수용소가 폐쇄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적은 쪽지를 넘겼는데, 진실을 확인한 소비보르의 존더코만도들은 비밀리에 수용소 탈출을 위한 봉기를 준비했다. 먼저 7월 20일 수용소에 필요한 나무를 캐는 존더코만도들이 계획과 무관하게 봉기를 일으켰는데, 대부분 살해되었지만 8명이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이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SS는 남아있던 존더코만도 모두에게 봉기 계획이 공유되고 있다는 점은 알지 못했고, 수용소 이송 전 졸키에프 게토의 유대인평의회(Judenrat) 의장이었던 레온 펠트헨들러(Leon Feldhendler)의 지휘하에 계획이 구체화되고 있었다.[11] 1943년 9월엔 민스크에서 소련군 포로 중 유대인 포로들이 대거 소비보르로 들어왔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존더코만도로 뽑혔고, 실전경험이 있던 이들은 후에 일어날 봉기에 큰 보탬이 되었다. 봉기는 1943년 10월 13일로 계획되었는데 당일 근처 노동수용소에 있던 SS병사 몇 명이 소비보르로 들어오는 예상 못한 변수가 생겨 봉기를 하루 미루기로 했다.

1943년 10월 14일 오후 4시, 부수용소장 요한 니에만이 제복을 고치기 위해 수용소 내 양복점을 들렀다가 복수심으로 들끓는 소련군 출신 존더코만도에게 도끼로 머리가 쪼개진 것을 시작으로 드디어 소비보르 봉기가 개시되었다.

당시 수용소장 프란츠 라이히라이트너(Franz Reichleitner)와 경비병 지휘관이던 구스타프 바그너, 후베르트 고메르스키는 불확실한 이유로 출장 중이었는데,[12] 이들의 부재로 인해 경비병 조직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존더코만도들은 20명의 간부, 경비병들을 죽이고 수용소 각 건물을 파괴했다. 봉기를 성공적으로 일으켰지만 무기가 부족했기에 600명의 존더코만도 중 300여 명이 사망하거나[13] 붙잡혔지만 나머지 300명은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날 아침에야 정신을 차린 SS는 본격적으로 도망자 색출을 시작해 약 190여명이 추적당해 살해되었고 나머지 생존자 중 53명은 추적으로 살해되진 않았지만 전쟁 끝날 때까지 여러가지 다른 이유로 사망하면서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소비보르의 존더코만도 생존자는 58명이었다.

6. 폐쇄와 발견

이게 바로 여기 숲의 매력이에요.
고요하고 아름다운 곳이죠.

그래도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곳이 항상 고요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는 겁니다.

한때는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가
총성과 사람들 비명, 개 짖는 소리로 가득했죠.
당시 이 근처에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에는
그 시기가 특히 더 인상 깊게 남아 있을 겁니다.

봉기가 있고 나서
독일군에서는 수용소를 폐쇄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1943년 초겨울에
이곳의 흔적을 모조리 숨기기 위해
3~4년 정도 자란 작은 소나무들을 심었죠.

"그게 저 나무들인가요?"[a]
네 맞습니다.
"저기가 옛날에는 전부 구덩이들이 파여 있던 곳이라고요?"[a]
네. 1944년에 이 숲을 처음 본 사람도
그 전에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저 나무들이 이곳이 절멸 수용소였다는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 얀 피본스키(Jan Piwonski), 대전 당시 소비보르 기차역 철도 보조 관제사. 《쇼아》27~28p에서 발췌.

1943년 5월의 바르샤바 게토 봉기, 8월의 트레블링카 봉기와 비아위스토크 게토 봉기를 거치면서 루블린 사령부는 추가 봉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소비보르 봉기까지 일어나자 이미 폴란드 유대인 거의 전부가 사망한 터였기에 하인리히 힘러는 지체없이 소비보르도 폐쇄할 것을 명령했고 이에 따라 루블린오딜로 글로보츠닉은 1943년 10월 19일 라인하르트 작전을 종료했다.

핵심증거인 가스실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건물이 있던 터에 아스팔트를 깔아 도로의 일부로 만들었다. 10월 20일 수용소 해체를 막 마친 트레블링카의 마지막 존더코만도 200명이 소비보르로 와서 처형되었다. 그리고 11월 23일 소비보르의 마지막 존더코만도들도 수용소 해체를 마친 뒤 처형되었고, 이것을 마지막으로 소비보르는 사라졌다.

7. 희생자 수, 생존자

회플러 전보에 따르면 1942년 12월 31일까지 소비보르로 101,380명이 이송되었고, 3월 2일부터 7월 20일까지 34,313명의 네덜란드 유대인이 소비보르로 이송되었다. 이밖에 여러 자료들을 취합해 미국의 홀로코스트 추모 박물관이 내놓은 희생자의 최소수치는 167,000명, 네덜란드의 소비보르 재단이 산출한 희생자 수는 170,165명이다. 하지만 라울 힐베르그나 체스와프 마다이추크 등 많은 학자들이 200,000명까지 인용하고 있기에 소비보르의 희생자 수는 대략 164,000 ~ 200,000명으로 정리될 수 있다.

10만 명에 이르는 네덜란드 유대인 중 1/3 이상이 소비보르에서 살해되었기 때문에 전후 네덜란드 정부는 이곳에 관한 자료들을 철저히 모으고 조사했는데, 이 중 2004년 발견된 18세의 네덜란드 유대인 헬가 딘[16]의 일기장에 따르면 네덜란드의 유명인사 여럿도 이곳에서 학살되었다.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기계체조 금메달리스트 헬레나 노르하임과 안나 폴락, 유디켸 시몬스, 이들의 코치였던 게리트 클리레코퍼, 네덜란드의 인기 마술사 마카엘 벨레만 등이 이곳에서 살해당했다. 여성 희생자 일부는 성노예로 뽑혀 집단 성폭행을 당한 뒤 살해되었다고 한다. '가스마이스터' 에리히 바우어는 이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난 두명의 오스트리아 유대인 여성 루스와 기셀라의 죽임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받았다. 이들은 소위 '숲지기의 집'으로 불리는 곳에서 살았는데, 자주 SS가 쳐들어갔다. 거기서 난교가 일어났다. 볼렌더, 고메르스키, 카를 루드비크, 프란츠 슈탕글, 구스타프 바그너가 거기 참여했다. 난 그 방 바로 위층에서 지냈는데, 그 난리통에 출장 후에 매우 힘든데도 잠을 잘 수 없었다. "

8. 전후

전후 가장 먼저 재판받은 간부는 상술한 '가스마이스터' 에리히 바우어였다.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전쟁포로로 잡혔고 1946년베를린에서 풀려났다. 그는 베를린에서 파괴된 건물의 파편을 모으는 일자리를 구해서 지내고 있었는데, 1949년의 어느날 소비보르 봉기의 생존자 두 명과 너무나 우연하게 만나고 말았다. 이들을 본 바우어는 "대체 어떻게 당신들이 아직 살아있는 거지?"라고 반복해서 말했다고 한다.[17] 그는 곧바로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고 자신의 만행을 부정했지만, 증인으로 참석한 네 명의 생존자들에게 집중포화를 맞은 끝에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감형 없이 형을 살다 1980년 79세의 나이로 베를린 테겔 감옥에서 사망했다. 한편, 재판 당시에 했던 그의 증언을 통해 당시 절멸수용소의 간부들이 자신의 업무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난 소비보르에서 가스처형당한 유대인 수가 약 35만 명인 것으로 추정한다.[18] 언젠가 소비보르의 구내식당에서 카를 프렌젤, 구스타프 바그너, 그리고 프란츠 슈탕글[19]이 하는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는데, 그들은 베우제츠, 트레블링카, 소비보르의 희생자 수를 비교하면서 소비보르가 '경쟁에서 가장 뒤쳐진다고' 안타까워했다."

소비보르 희생자들의 첫 기념비는 1965년에 세워졌다. 그리고 1993년 10월 14일에 별도로 소비보르 수용소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수용소 밖의 숲에는 소비보르의 봉기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앞서 서술한,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존더코만도 58명 중 마지막 생존자인 시미온 로젠펠트는 2019년 9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기사

9. 미디어

  • 1987년 TV 영화 소비보 탈출(Escape From Sobibor)이 있다. 실존인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룻거 하우어가 사샤라는 애칭을 가진 소련군 포로이자 실존인물인 알렉산드르 페체스키로 나와 주역을 맡았다. 주역인데 1시간이 지나서야 첫등장한다. 1989년 3·1절KBS2에서 "소비보르 대탈출"이라는 제목으로 1,2부로 나눠 오후 1시 20부터 4시까지 더빙 방영되었다. 그 뒤에 SBS에서도 소비버 탈출이란 제목으로 재더빙하여 방영했다. 성우진은 한상혁, 권희덕, 황윤걸 외. 비디오로도 출시되었다. 90년 초에 나온 비디오 출시명은 해괴하게도 "에스케이프 소비보". 1995년에 다른 비디오 업체에서는 소비버 탈출이란 제목으로 재출시했다. 이후 케이블 영화 방송으로 종종 자막판이 방영하곤 했다.

    이 영화는 사실과 달리 각색이 꽤 되었다. 카포가 엄청 좋게 나오고 이들이 도와 대탈출에 기여하기도 하고 할머니건 여자건 민간인들도 나오며 이들도 다같이 봉기하여 지뢰밭을 달려가고 뒤에서 기관총으로 갈기는 간수병들 총알 세례를 피하고 숲으로 사라진 이들이 달려가면서 하나하나 이들 이름과 실존인물 여러 후일담을 이야기한다. 같은 유태인에게 배신당해 사살당하기도 하고 이 봉기 이후로 평생 행불된 이들도 나오기도 하며 이때만 해도 주인공 격인 페체스키는 살아있다고 나오는데 1990년 만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 2018년에 러시아에서 만든 영화 소비보르가 개봉했다. 그럭저럭 평타를 거두고 2배 정도 흥행을 거뒀다. 한국 제목은 "홀로코스트:소비보르 탈출"

[1] 실제로 러시아어 표기법을 보면 'Собибур(소비부르)'라고 되어 있다.[2] 1945년 5월 체코에서 소련 NKVD에게 잡혀 즉결처형됨.[3] 소비보르 뿐 아니라 다른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에도 외국 유대인을 보낼 땐 많은 경우에 객차를 이용했다. 폴란드 밖이라서 장거리 여정인 만큼 이런 편의를 제공하지 않다간 중간에 반란, 탈출의 위험이 컸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쓴 것으로 보인다. 트레블링카의 주민들은 호화 열차가 절멸수용소로 가는 걸 보며 크게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절멸수용소들은 소비보르를 제외하면 주 대상이 폴란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객차 이송'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4] 게르슈타인 보고서에 따르면 베우제츠에서는 하루 최대 15,000명, 트레블링카에서는 25,000명(1942년 9월 이전엔 12,000명), 그러나 각 수용소의 희생자 수는 이송되는 유대인 수로 결정되었다. 게르슈타인 보고서[5] 현재의 우크라이나 르비우, 당시 명칭 르부프.[6] 트레블링카 생존자 아브라함 봄바(Abraham Bomba)의 증언에 따르면, 트레블링카의 존더코만도는 매우 임의적으로 선발되었다고 한다. SS 한 명이 다가와 건강해 보이는 사람 몇명에게 '너, 너, 너 나와.' 이 한마디로 존더코만도가 뽑혔다.[7] 아무리 악독한 인간이라도 절멸수용소의 업무는 맨정신으론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트레블링카에 1942년 8월 발령되었던 SS하사 프란츠 수호멜 역시 발령 직후 한동안 술에 빠져 지내야 했다고 한다.[8] 덕분에 수용자들은 그가 없다는 것을 알고 봉기가 성공할 거라 믿었을 정도였다.[9] 소비보르 절멸수용소에서 남동생과 함께 금(金)장이로 일했다. 구스타프 바그너를 비롯한 수용소 간부들이 희생자들의 금품을 개인적으로 착복하는데 그들 형제를 악용했다.[10] 아르헨티나에는 독일인 뿐만 아니라 유대인 역시 적잖이 살고 있다.[11] 다만 폴란드인 카포 하나가 유대인들 몇명이 탈출을 준비하는 것 같다고 밀고했고 부수용소장 요한 니에만은 존더코만도 72명을 처형함으로써 탈출계획을 좌절시킨 줄 알았다.[12] 이 때문에 봉기를 일으킨 존더코만도들의 첫 타겟이 요한 니에만이 된 것이다.[13] 힘러의 명으로 수용소 주변에 지뢰를 설치했다.[a] 인터뷰어 클로드 란츠만의 질문이다.[a] [16] 헬가 딘 일가(一家) 역시 네덜란드의 강제수용소에서 소비보르 절멸수용소로 강제 이송되었기에 안타깝게도 모두 살해당했다.[17] 봉기 당시 바우어는 수용소 주변 헤움이라는 소도시서 수용소 물자를 공급받고 있었다.[18] 학자들은 언급된 수치가 과장되었다고 본다.[19] 초대 수용소장으로 1942년 8월까지 재직. 트레블링카는 1942년 7월 세워졌기 때문에 이 대화는 1942년 7월과 8월 사이에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