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9 19:50:32

시중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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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
(제1ᆞ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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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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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1c25><colcolor=#ffff00> 중화인민공화국 前 국무원 부총리
시중쉰
[ruby(习,ruby=Xí)][ruby(仲,ruby=Zhòng)][ruby(勋,ruby=xūn)](習仲勳, 습중훈[1])
파일:1666522167853.jpg
출생 1913년 10월 15일
중화민국 웨이난시 푸핑현[2]
사망 2002년 5월 24일 (항년 88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가족 아버지 시쭝더
어머니 차이차이화
배우자 치신
장남 시정닝(习正宁)[3]
차남 시진핑(习近平)
삼남 시위안핑(习远平)
정당

1. 개요2. 생애
2.1.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때까지2.2.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2.3. 정계 은퇴 이후
3. 가족4. 기타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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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정치인이다. 산시성의 자생적 공산주의자로 출발해 대장정으로 쫓기던 홍군의 도피처가 된 옌안 해방구를 건설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중앙으로 올라와 국무원 부총리와 국무원 비서장을 역임하였다. 문화대혁명 시기 모든 공직을 박탈당하고 허난성으로 하방되어 노동자로 일하다, 1978년 덩샤오핑의 권력 장악 후 복권되어 광둥성에 부임해 선전시를 경제특구로 지정할 것을 중앙에 건의해 관철시켰다.

1981년부터 국회부의장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당 8대 원로로 꼽히기도 했으나 실제 존재감이 크지는 않았다. 권력투쟁에서 밀려 은퇴한 뒤 잊혀진 인물이 되고 2002년에 사망하였으나, 차남 시진핑중화인민공화국 주석으로 등극하며 재조명받고 있다.

2. 생애

2.1.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때까지

중국 서부 산시성 부평현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주로 대도시의 명문학교로 유학을 나온 중공 초기 지도자들과는 달리, 초중고대학을 모두 산시성에서 마쳤으며, 중학교 시절인 1926년 공청단에 가입했다. 이후 싼위안현 제3사범대학에 재학할 때 학생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었다. 이 때부터 중국공산당 정식당원이 되었다.

1926년 이후 중국공산당은 국공합작을 깨고 국민정부를 수립한 장제스에 의해 불법화되었고, 공산당은 이에 반발해 중국 각지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는데, 시중쉰도 섬서성-간쑤성 경계에서 류즈단(劉志丹)[4]과 함께 유격대 활동을 하고 옌안을 중심으로 한 해방구를 계속 넓혔다. 이때 현지 지역당의 극좌파가 주도한 정풍운동 때문에 류즈단, 가오강과 함께 국민당 간첩으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마침 중국 최남단에 있던 장시 소비에트제5차 초공작전으로 삽시간에 붕괴하면서 대장정을 거쳐 피신해 온 마오쩌둥 일행이 옌안에 도착해 이들을 석방하라고 명령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이후 혁명의 새로운 근거지를 건설한 공로를 인정받아 계속 승진했고, 제2차 국공합작 이후에는 중일전쟁의 전선에 나가지 않고 옌안 해방구를 관리했다.

1946년 제2차 국공내전이 발발하자, 시중쉰은 펑더화이 부대 (서북 인민해방군)의 정치장교로 활동했다.[5] 처음에는 후쭝난이 지휘하는 국민혁명군의 공격에 옌안이 함락되었으나, 펑더화이-시중쉰이 지휘하는 인민해방군은 게릴라전으로 국민혁명군을 괴롭히다가 상황이 무르익자 전면 공세로 전환, 패주하는 국민혁명군을 쫓아 서진하여 후이족 군벌인 마씨 일족을 멸망시키고 닝샤, 칭하이까지 진출했다. 시중쉰은 그 과정에서 국민당 잔당이나 군벌들을 평화적으로 투항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2.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마오쩌둥은 대륙을 5대 지역으로 분할통치했다. 서북국(西北局)에 시중쉰, 서남국 덩샤오핑, 동북국 가오강, 중남국 덩쯔후이(邓子恢), 화동국 라오수스(饒漱石). 1951년 티베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자 중공 정권은 인민해방군파견했지만, 서북국 제1서기 시중쉰은 체포된 티베트 인사들을 석방하고 보복 금지를 약속하여 비교적 평화롭게 마무리하였다. 1952년에는 덩리췬과 왕전이 현지사정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사회주의화를 감행하다가 정세가 매우 심각해진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사회주의화 정책을 완화하고, 체포된 현지인들을 석방했다. 이렇게 티베트와 신장의 소요사태가 진정되면서, 시중쉰의 명망도 높아졌다.

1952년 9월 당 선전부장이 되었고, 1956년에는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9년에는 국무원 부총리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1962년 국가안전부 부장인 캉성이 음모를 꾸몄고, 이에 따라 반역자로 찍혔다 자살한 가오강의 동지라는 이유로 모든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1967년 문화대혁명이 닥치자 다시 반동 펑더화이의 부하였다는 이유로 투옥되었고, 자식들은 박해받았다. 큰딸 시허핑은 반동이라며 홍위병에게 조리돌림을 당하다가 수치심에 결국 자살을 택했고[6], 아들 시진핑은 시골로 추방되어 막노동을 해야했다. 그나마 한때 자신의 상관이었던 저우언라이 총리가 그를 특별히 보호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목숨이 위협받지는 않았다.

문화대혁명 말기인 1975년에야 겨우 석방되었고, 1978년 덩샤오핑이 집권하자 광둥성 제2서기를 맡으면서 당고위직에 복귀하였다. 그 후 광둥성장, 광둥성 제1서기 등을 역임하면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에 발맞추어 선전 경제특구를 계획, 개발하는 등 광둥성의 초기 경제개발을 지휘한다. 1981년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며 이후 정치국원, 당 중앙서기처의 멤버가 되었다.

1987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주화 요구가 분출하자, 후야오방 총서기는 당을 지배하던 원로들에게 크게 질책을 받고 사임하게 된다. 이때 유일하게 후야오방을 옹호한 원로가 시중쉰이었다고 한다. 시중쉰은 기본적으로 덩샤오핑과 개혁개방의 지지자이긴 했지만, 광둥 출신으로서 사실상 광둥 문제의 최고 결정권자 역할을 했던 예젠잉[7]과 더 가까웠다. 때문에 예젠잉의 후원을 받았던 후야오방을 지지하며 덩샤오핑에 맞선 것이다. 선전 경제특구를 기획하고 성공시킨 공이 있었음에도, 과실은 정작 덩샤오핑이 독차지하고 자신은 공로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불만도 덩샤오핑과 갈라서게 된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2.3. 정계 은퇴 이후

결국 덩샤오핑, 천윈을 필두로 한 당 원로들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8]하고 1987년 중앙서기처 서기 임기가 만료되면서 정계를 은퇴한[9] 시중쉰은 베이징에서 여생을 보내는 대부분의 당 원로들과 달리 이례적으로 선전 정착을 결정했다. 덩샤오핑을 비롯한 원로들과 불편한 관계[10]가 되어버린지라 일종의 하방을 선택한 것인데, 노회한 정치인답게 사실 여기에는 선전시광둥성을 사실상 제2의 고향이자 정치기반으로 삼기 위한 포석이 깔려 있었다.

쫓겨나듯 정계를 떠난 시중쉰은 베이징에 남아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어려웠고 그저 여러 원로들 중 하나일 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전에서의 시중쉰은 현지 최고의 원로[11]로, 1990년대 이후 중국 경제성장의 상징이 된 선전을 자주 찾게 된 당 지도자들은 어느 계파에 속해 있든 반드시 그를 찾아뵙고 문안인사를 드려야 했다. 이런 일정은 당연히 매번 보도되었고, 그 때마다 시중쉰은 중국의 개혁개방 과정에서 자신이 적지 않은 공헌을 했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킬 수 있었다.

또 선전에 남는 선택을 통해 시중쉰은 광둥성 주민들의 민심을 얻고 지역 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지역 주민들의 표로 당선되고는 실제로는 서울 부촌에서 생활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시선이 곱지 못한데, 중국의 경제성장을 주도했음에도 정치적으로 소외된[12] 것이 불만이었던 광둥 주민들이 시중쉰의 선전 정착을 나쁘게 볼 이유가 없었다. 위험이 큰 중앙의 권력투쟁에 깊게 관여하는 대신 실질적인 자본과 이권이 오가는 지역을 장악하는 안전한 길을 택한 것인데[13], 이렇게 구축해둔 관계들은 나중에 시진핑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14]

선전에서 여생을 보내다 2002년 베이징의 병원에서 사망했고, 유해는 바바오산 혁명공묘에서 화장된 뒤 고향인 산시성 복평현에 묻혔다. 그의 묘지는 시진핑이 다음 국가주석으로 결정된 2008년부터 혁명사적으로 지정되었다.

3. 가족

결혼을 두 번 했다. 첫 결혼은 옌안 해방구에서 하오밍주(郝明珠)와 결혼했고 자식으로 시푸핑, 시허핑, 시간핑이 있는데, 시허핑은 문화대혁명 당시 박해로 사망했다. 이 결혼은 1944년 이혼으로 끝나고, 바로 치신(齐心)과 결혼했다. 치신 사이에서는 시진핑, 시위안핑 (아들), 치차오차오 (딸), 치안안 (딸)을 낳았다. 아들 시진핑도 한 번 이혼한 후 펑리위안과 결혼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다. 시중쉰의 사망 후에도 배우자 치신은 아들 시진핑의 관저 중난하이에 들어가지 않고 선전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4. 기타

  • 시중쉰의 온화하고 실용-중도적인 성격은 시진핑이 정권을 잡는데 큰 역할을 했다. 시중쉰을 기억하는 공산당 각 계파의 원로들와 고위 당원들은 시진핑도 시중쉰과 비슷한 성격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유아독존식 카리스마형 지도자가 아니라 각 계파의 의견을 경청하여 소통형 통치를 펼 것이라고 생각하여 시진핑을 적극 지지했다. 시진핑 자신도 모난돌이 정 맞을까봐 바짝 엎드려 있었고, 보시라이와는 달리 자기 PR을 펼치거나 가는 곳마다 요란한 짓을 벌이지 않았기 때문에, 최고 지도자가 되기에는 뭔가 부족한 인물로 비치는 측면이 있었지만 그만큼 당내에 비토층도 적었다. 하지만 시진핑은 그들의 생각보다는 훨씬 야심가였고 정권을 잡은 후에는 본색을 드러내 권위주의적 통치를 펴고 있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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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변조선족이 사용하는 중국 조선어로는 습종훈이라고 표기한다. #[2]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성 웨이난시[3] 1941년생, 1998년 사망[4] 생몰년도: 1903년 10월 4일 ~ 1936년 4월 14일. 대장정으로 중국공산당 중앙지도부가 섬서성 옌안에 도착한 이후 마오쩌둥의 명령으로 산서성 군벌 옌시산을 공격하러 원정을 떠났다가 전사한다. 공산당에선 류즈단의 고향 '바오안'을 '즈단'으로 개칭해서 그의 공로를 기념했다. 국내에선 우리식 한자 독음 '유지단'으로 많이 알려졌다. 2000년 이전에 나온 책들은 대부분 유지단으로 표기되었다.[5] 펑더화이가 사령관 겸 정치위원이었고, 시중쉰은 부정치위원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시중쉰이 부대의 최고위 정치위원이었다.[6] 맞아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홍위병때문에 죽은 것은 맞다.[7] 지금도 예젠잉 일가는 광둥성에서 막강한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시진핑과도 대를 이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8] 죽기 직전까지 영향력이 녹슬지 않은 아버지 보이보를 등에 업고 가는 곳마다 요란하게 자기 PR 및 정책홍보를 일삼은 보시라이와 달리, 시진핑은 시중쉰이 실각한 90년대부터 극도로 몸을 낮춘다. 이런 저자세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시진핑은 겸손하고 신중하다는 평판을 얻고 어디에도 큰 원한을 사지 않았던 시중쉰의 인망까지 합쳐져 차기 최고지도자 등극 과정에서 큰 자산이 된다.[9] 전인대 부위원장 직은 1992년까지 유지하였으나, 명예직에 가까웠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었다.[10] 지금도 덩샤오핑 집안과 시중쉰 집안의 불화는 중국 정가에서 유명하다. 시중쉰은 생전 선전의 발전상을 보면서 사람들이 덩샤오핑을 떠올릴 뿐, 자신을 떠올리지는 않는 것을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시진핑은 개혁개방과 광둥성 개방 과정에서의 시중쉰의 업적을 꾸준히 선전하고 덩샤오핑을 은근히 깎아내리고 있다. 시진핑의 주석 등극 즈음에는 덩샤오핑 측에 나름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기도 했으나, 결국 집권 이후 덩샤오핑의 아들 덩푸팡이 시진핑에 대한 공개적 비판에 나서며 두 집안의 불화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11] 단순히 부총리급 직책을 지낸 고위 원로 수준을 넘어, 중국 공산당 관료들 입장에서 시중쉰은 신화적인 대장정의 마침표를 찍은 옌안 해방구의 건설자로서 살아있는 역사책이나 마찬가지였다.[12] 흔히 중국의 4대 도시(1선도시)로는 베이징시, 상하이시와 함께 광둥의 광저우시선전시가 꼽힌다. 그런데 광둥의 두 도시 대신 충칭시톈진시가 4대 직할시를 구성하며, 부국급(정치국원, 부총리급) 행정구역인 직할시에 비해 광저우와 선전은 부성급(차관급) 행정구역에 불과하다. 한때 중앙정치를 점령하다시피 했던 상하이방이 유명한 것에 비해, 광둥성은 중국 최대, 중국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앞선 행정구역임에도 광둥 출신이나, 광둥에서 고위직을 지낸 정치인들이 중앙정치에서 강력한 발언권을 갖는 것도 아니다.[13] 예젠잉의 장남 예쉬안핑(葉選平)이 중앙 고위직으로의 승진기회를 마다하고 광둥성에서 성장까지 역임하고 정치경력을 마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시중쉰 집안과 대대로 동맹관계인 예젠잉 집안도 같은 선택을 했다.[14] 태자당 인사들은 탄탄대로만 걸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공청단파를 중심으로 당내에서는 공산당이 세습이 웬말이냐는 여론이 꽤 강했다. 때문에 태자당 인사들은 견제를 많이 받아, 실제로는 시진핑이나 보시라이보다 리커창 등 공청단파 선두주자의 승진속도가 훨씬 빨랐다. 다만 당 원로들은 자녀들로 하여금 몸을 낮추게 하면서도 시진핑이 국방부장 비서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던 것처럼 군 경력만큼은 반드시 챙겨주고, 중앙보다는 지역에서 힘을 키우도록 했다. 이들은 당 사정에 밝았던 만큼 당을 움직이는 실제 힘은 중앙이 아닌 군과 지역정치에서 나온다는 것을 잘 알았다. 결국 이는 중앙 관료 출신이 주류였던 공청단파와의 권력투쟁에서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차이로 작용했다. 우선 군부는 리커창 대신 군 경력이 있는 시진핑이 후진타오의 후계자로 낙점받도록 힘을 썼으며, 시진핑 집권 이후에는 시진핑이 저장과 푸젠, 상하이에서 30년간 근무하며 구축한 시진핑 사단이 중앙에 대거 진출하며 공청단파를 압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