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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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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1. 생애

파일:Xi_Jinping,_Xi_Yuanping_and_Xi_Zhongxun_in_1958.jpg
5세때 촬영된 사진 맨 왼쪽의 인물이 시진핑.

1953년 6월 15일, 베이징에서 시중쉰의 아들로 태어났다. 시중쉰은 동료 공산당원 하오밍주[1]와 결혼하여 1남 2녀를 낳고 1943년 이혼한 후, 1944년 치신[2]재혼하여 2남 2녀를 두었는데, 시진핑은 그중 셋째다. 즉, 총 3남 4녀 중에서 6번째 자녀인 셈이다. 1962년 소설 류즈단 필화 사건[3]에서 시중쉰이 펑더화이[4]로 몰려 반당(反黨) 집단의 낙인이 찍혀 오지로 귀양갔고, 당시 16살이었던 시진핑도 아버지를 따라 산시 성 시골로 하방(추방)되어 불행한 시절을 보냈다.

중국공산당에서는 이 당시 시진핑이 토굴에서 7년간 힘겹게 살았다고 한다. 어렵게 산 것은 사실이다. 아버지가 실각해서 평민이 되었는데다,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아버지가 마오에게 대약진운동에 대해 항의하다가 실각해서 대역죄인으로 찍힌 펑더화이의 부하에다가 반동을 미화한 소설을 펴낸 주범으로 몰렸기 때문에, 가족 전체가 박해를 받았다. 이때, 아버지가 전처와 낳은 이복 맏누나 시허핑(习和平)은 '반동의 딸'로 홍위병에게 두들겨 맞다가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시진핑도 이 당시 상당히 힘든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일:FPQc-fykcpru8013304.jpg
1973년 촬영된 사진 왼쪽에서 2번째에 있다.

소싯적부터 리더십이 있었는지 하방 당한 곳에서 노동자들을 지도하여 최고의 생산량을 올렸다고 한다.[5] 입당 신청을 했으나, 아버지가 반동으로 찍혔기 때문에 여러 번 퇴짜를 맞다가 문화대혁명이 완화된 1973년에야 겨우 입당했다. 이어 1975년 칭화대학의 화학공학과에 '공농병(工农兵) 추천 청강생' 신분으로 무시험 입학했다.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화궈펑이 정권을 잡고 중앙군사위 주석, 당 총서기, 국무원 총리 세 자리를 모두 장악했지만 리더십이 모자랐기 때문에 결국 1979년 부총리였던 덩샤오핑에 의해 실각했고, 실권은 부총리이자 인민정치협상위원회 주석이었던 덩샤오핑이 장악했다. 덩샤오핑은 부총리던 1978년 1962년 이래 16년간 죽 야인으로 지냈던 시중쉰을 정계로 복귀시켰고, 시중쉰은 1970년대 말부터 당 고위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즈음 대학을 졸업하게 된 시진핑도 당당히 태자당에 진입하게 되었다.

약력을 보면 1979년 ~ 1982년 국무원 판공청,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 비서[6]로 나오는데 갓 화공학부를 졸업한 대학생이 한국으로 치면 국방부 장관 비서진으로 3년간 활동한 것이다. 마오쩌둥의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 최고 지도자는 군사적 능력을 중요히 여기는 중국에서, 혁명 원로인 아버지의 후광을 받아 새파랗게 젊은 대학 졸업생부터 군부에 인맥을 형성했다. 이후에도 당부에서 일하며 총서기에 오를 때까지 끊임없이 군부에 끈이 있다고 평가를 받는다. 전 총서기 후진타오가 군부에 끈이 없어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상당히 늦게 인계받은 것에 비해[7] 바로 받은 시진핑은 처음부터 최고 지도자로서 군권 쪽은 훨씬 영향력이 크고, 중국 입장에서 군부 개혁에 내부적으로는 다른 대안이 없다 본다고 한다.

대학 졸업 3년 후인 1982년부터 허베이성의 정딩현의 당부서기를 맡는 것을 시작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이후 허베이성을 거쳤다가 1990년대부터는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보이는 남부로 전직했다. 그리하여 푸젠 성, 저장 성 등 동남부 지방 정부에서 지냈는데, 2007년 상하이시 당서기를 지내면서 장쩌민주룽지의 파벌인 상하이방과도 관계를 맺게 되어 태자당과 상하이방 양쪽의 후원을 받는 거물로 성장했다. 1998년 5월, 1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도 역임해 왔으며 2002년 11월, 1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2013년부터 2018년까지 상하이시를, 2018년부터는 내몽골 자치구를 지역구로 두고 있다.# 2007년 10월, 1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은 아예 건너뛰고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파격적으로 승진하였다. 2008년에는 국가 부주석 직에 올랐다. 하지만 이때까지 보시라이와 리커창에 비해 외국에 덜 알려졌으며 한국에서도 그가 중국의 주석에 오를 것으로 미리 예측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는 부주석을 지냈던 쩡칭훙 외에도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지지와 후원 모두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부주석 겸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처 제1서기를 역임하다가 2010년에 당 중앙 군사위 부주석 직에 오르면서 후진타오를 이을 차기 지도자로 공인되었다.

영국 주재 대사의 딸이었던 첫 아내 커링링(柯玲玲)과는 성격 차이로 이혼했고,[8] 재혼한 현 부인 펑리위안중국 인민해방군 예술단 소속의 가수[9]로 중국의 국민 가수로 불리는 사람인데, 펑리위안의 인기도 시진핑의 권력 상승에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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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郝明珠[2] 齐心[3] 1954년 시중쉰의 동료인 류즈단의 전기가 나왔는데, 중공 정권 수립 후 처음으로 숙청된 '반동' 가오강이 미화되었다는 이유로 여러 사람이 다친 사건이다. 작가뿐 아니라 이를 펴낸 시중쉰 또한 반동이 되었다.[4] 시중쉰은 중공 정권 수립 후 서북 지역 제1서기, 군정 위원회 주석이던 펑더화이가 6.25 전쟁 지휘관으로 불려가면서 1950년 10월부터 1952년 9월까지 서북 지역 군정위 부주석, 주석 대리와 경제 총책을 맡았다.[5] 다만 이런 류의 일화는 어린이 위인전마냥 후대의 미화가 상당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걸러들어야 한다.[6] 현역[7] 후진타오의 뜻도 있었지만[8] 커링링은 아버지가 영국 대사로 나가 있는 기회를 이용해 시진핑과 함께 영국 유학을 가길 희망했으나, 시진핑이 이를 완강히 거부하여 결국 파혼에 이르렀다고 한다. 커링링은 시진핑보다 2살 연상으로 어린 시절부터 서로 알던 사이였으며 성격은 내성적인 시진핑과 달리 솔직한 편이었다.[9] 2012년 기준 현역으로 계급은 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