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마추어 선수 시절
야구를 시작하기 전에는 축구선수의 꿈을 키웠다. 당시 포항초등학교 축구부[1]에서 선수로 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5학년 때 심창민이 체육시간에 테니스공을 세게 던지는 걸 본 체육선생님이 곧바로 심창민에게 야구부 입단을 권유하여 종목을 바꾸게 된다. 이후 포항초 야구부가 해체되어 친척집이 있는 부산 영도구로 이사를 간 뒤 동삼초등학교에서 야구를 계속했다.
경남고 재학 시절에는 2학년 때까지 내야수였지만 3학년 때 투수로 전향했다. 당시에는 키가 170cm에 못 미쳐 오버스로로 공을 던지기에는 힘이 부족해서 사이드암 투수가 됐는데, 투수를 시작한 후 1년 사이에 키가 10cm 이상 컸다고. # 이때 경남고 감독이 델동님, 동기로 서진용, 1년 후배로 한현희가 있다. 2010년에 열린 65회 청룡기에서 5차례 등판, 4승을 따내며 모교의 우승을 이끌어 최우수선수상을 수상[2]했다. 그해 7월에는 청소년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고교시절 사이드암 투수로는 드물게 최고 시속 147km/h의 빠른 속구를 가지고 있어, 권오준 외에는 이렇다할 사이드암 투수가 없는 삼성에 2011년 1라운드로 지명되었다.
2. 삼성 라이온즈 시절
자세한 내용은 심창민/선수 경력/삼성 라이온즈 문서 참고하십시오. |
3. NC 다이노스 시절
2021년 12월 13일 김태군을 상대로 김응민과 함께 NC 다이노스에 트레이드되었다.3.1. 2022 시즌
자세한 내용은 심창민/선수 경력/2022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
3.2. 2023 시즌
자세한 내용은 심창민/선수 경력/2023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
3.3. 2024 시즌
자세한 내용은 심창민/선수 경력/2024년 문서 참고하십시오.지난 시즌들과 다를 바 없는 피칭을 보여주며 1군에 한 번도 올라오지 못했고, 결국 9월 29일 방출되었다.
4. 국가대표 경력
4.1. 2015 WBSC 프리미어 12
대한민국 대표팀 개인별 성적 | |||||||||||||
경기 | 선발 | 이닝 | 방어율 | 승 | 패 | 홀드 | 세이브 | 피안타 | 실점 | 자책점 | 4구 | 삼진 | 상세 |
2 | 0 | 2 | 0.00 | 0 | 0 | 0 | 0 | 1 | 0 | 0 | 2 | 4 | ## |
이후 준결승전에 7회에 등판하였으나 연속 볼넷을 내주면서 아웃카운트는 하나도 잡지 못한 채 정우람과 교체되었다. 다행히 정우람이 위기상황을 극복하면서 실점을 기록하지는 않았다.
이 대회에서 우리 대표팀은 극적인 준결승전 승리에 이어 결승전에서도 미국 상대로 팀 완봉승을 이끌어 내며 심창민 또한 프리미어 12 초대 대회 우승자로써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4.2.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한민국 대표팀 개인별 성적 | |||||||||||||
경기 | 선발 | 이닝 | 방어율 | 승 | 패 | 홀드 | 세이브 | 피안타 | 실점 | 자책점 | 4구 | 삼진 | 상세 |
2 | 0 | 2⅓ | 7.71 | 0 | 0 | 0 | 0 | 2 | 2 | 2 | 2 | 1 |
3월 6일 A조 첫번 째 경기 이스라엘전에서 선발투수였던 장원준의 뒤를 이어 5회초 구원 등판하며 WBC 첫 데뷔를 했다. # 첫 타자를 볼넷 내주긴 했지만 이후 후속타자들을 모두 잡아낸 데에 이어 6회초에도 선두타자 볼넷을 허용했으나 4번타자 네이트 프라이먼을 1루수 파울플라이로 잡고는 마운드를 차우찬에게 넘겼다. 최종 1⅓이닝 2볼넷 1K 무실점을 기록.
3월 9일 A조 마지막 경기 대만전에서 선발투수였던 양현종의 뒤를 이어 4회말 구원 등판 했으나 오히려 1사 후 린저쉬안에게 2점 홈런을 허용하며 1이닝 2실점을 기록했다. #
이 대회에서 우리 대표팀은 이스라엘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며 패배한 데에 이어 네덜란드에게는 영봉패를 당하는 굴욕 속에 대만 또한 연장까지 가서야 간신히 이긴 끝에 겨우 1승 2패를 거두며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1] 포항 연고 구단인 포항 스틸러스의 축구부는 아니다. 포항 스틸러스의 초등학교 축구부는 포항제철초등학교에 있다.[2] 준우승팀은 제물포고였고 제고를 이끌던 좌완투수 이현호가 감투상을 수상했다.[3] 은퇴 후 LG 트윈스의 타격코치로 영입되었다.[4] 방출 후 두산 베어스로 이적했다.[5] 실제로 박석민이 삼성에 있는 동안 심창민의 번호는 55번이었는데, 마침 NC에서 55번을 달고 있던 김진성이 방출된 상태라 심창민이 55번을 물려받을수도 있다. 이후 2024년 박석민이 은퇴해 18번이 공백이 되어 심창민이 삼성 시절 쓰던 18번을 달게 되었다.[6] 다만 이 트레이드는 골자를 뜯어보면 양 팀 모두 샐러리캡 정리를 목적으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메인 칩이 된 두 선수가 모두 FA를 목전에 둔 데다가 연봉이 꽤 높은 상태였고, 실제로 그 이후 삼성도 구자욱을 거액에 잡아둘 수 있었으니 트레이드 목적 자체는 달성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