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5 13:03:44

아게실라오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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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 에우리폰티다이 왕조 제 20대 국왕
아게실라오스 2세 | Agesilaus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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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00502><colcolor=#ffd400> 왕호 아게실라오스 2세
Agesilaus II
그리스어 이름 Ἀγησίλαος
아버지 아르키다모스 2세
배우자 클레오라
생몰년도 기원전 444년 ~ 기원전 360년
재위 스파르타 국왕
기원전 400년 ~ 기원전 360년

1. 개요2. 초기 생애
2.1. 유년 시절 2.2. 왕위에 즉위하다2.3. 키나돈의 반란 모의2.4. 아시아 원정, 리산드로스 숙청
3. 선임 왕이 된 후
3.1. 코린트 전쟁3.2. 코린트 전쟁 이후3.3. 테베 전쟁, 스파르타의 몰락3.4. 스파르타를 일으키기 위한 노력3.5. 만 망할 순 없다3.6. 인생 최후의 원정
4. 평가5. 일화6.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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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파르타 에우리폰티다이 왕가의 제20대 국왕.

장남도 아니었고, 장애는 용납되지 않는 국가 스파르타에서 장애를 갖고 태어났지만, 끝내 왕위에 올라 스파르타의 최전성기와 몰락기를 함께 한 스파르타 역사상 최고의 국왕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왕족은 입학하지 않아도 되는 스파르타 교육의 산실 아고게자진하여 수료한 단 둘 뿐인 스파르타 국왕으로도 유명하다.[1][2]

2. 초기 생애

2.1. 유년 시절

기원전 444년에 선대 에우리폰티다이 국왕 아르키다모스 2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3] 아르키다모스 2세는 이전에 자신의 고모(아버지의 이복 여동생)인 람피토와 결혼해[4] 장남 아기스를 낳았다. 람피토가 죽자, 귀족 멜리시피다스의 딸 에우폴리아와 결혼해 아게실라오스를 낳았다. 그가 태어난 지 2년 뒤 여동생 키니스카가 태어났다. 키니스카는 아게실라우스의 격려를 받아 운동에 취미를 붙여, 올림피아 제전 출전을 목표로 전차를 훈련시켜 전차 종목에서 최초로 올림피아 제전 본 대회 여성 우승의 쾌거를 달성했다.[5]

아게실라오스는 태어났을 때부터 체격이 왜소한데다가 절름발이 장애인이었다. 원래 스파르타는 국법으로 아기들을 일제히 검사해 장애가 있으면 즉결처형하는 나라였으나, 아게실라오스는 왕족이었던데다가 스파르타의 제1계급 시민 수 감소가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던 시기라서 그런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이렇게 태어날 때부터 불안한 지위를 가졌던 아게실라오스는 강수를 두었다. 바로 스파르타식 군사 학교 아고게에 입학을 자진한 것이다. 원래 스파르타 내 고위 왕족들은 아고게 입학이 면제되고 전문 가정교사에게 1대1로 군사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아게실라오스는 교육을 받다가 죽을 확률이 전장에 나가서 죽을 확률과 동등하다는 말까지 내려오는 아고게에 자진 입학한 것이다. 놀랍게도 아게실라오스는 작은 체구와 장애에도 불구하고, 아고게를 수석으로 졸업해냈다. 이는 스파르타인들에게 무척 명예로운 일이었고 훗날 그의 커다란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이 시절에 스파르타의 불후의 명장 리산드로스의 동성 연인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그와 리산드로스의 관계 변화를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설이다.

아고게의 전통적 졸업 의식 크립테이아[6]까지 마친 아게실라오스는 스파르타 시민이 되어 전투에 나갔다. 당시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치열하게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아게실라오스는 그의 형 아기스 2세가 친정한 만티네아 전투(기원전 418년)에 참전한 것이 거의 확실시되며, 그 외에도 여러 군사 충돌에 참가했다. 이후 왕위에 오르기 전에 테베 귀족 아리스토메니다스의 딸 클레오라와 결혼했다.

2.2. 왕위에 즉위하다

기원전 400년, 형이자 선왕인 아기스 2세올림피아 제전에 참가하기 위해 델포이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 객사했다. 따라서 왕위는 원칙적으로 그의 아들이 계승해야 했겠지만,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아기스 2세에게는 레오티키다스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왕의 아들이 아니라 왕비가 간통하여 낳은 사생아라는 소문이 있었다는 것이다.[7] 고대 그리스에 유전자 검사법 같은 게 있을 리 없으니 레오티키다스가 사생아인지를 감별해 낼 방법도 없었고, 아기스 2세마저도 그가 자신의 친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단 한 번도 레오티키다스를 친자라고 인정하지 않다가, 죽기 직전에야 그를 자신의 아들이 맞다고 인정하였다.

이에 따라, 아게실라오스는 사생아를 왕위에 앉힐 수 없으니 자신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귀족들도 의견이 팽팽히 갈렸다. 레오티키다스를 지지하는 귀족 디오페이테스는 옛 신탁을 거론했다. 왕가에 내려오는 신탁은, 스파르타 왕위에 절름발이는 앉으면 안 된다고 했다. 디오페이테스는 이 신탁에 따라 절름발이인 아게실라오스는 왕위에 앉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아게실라오스의 편을 들어 이를 반박한 것은 이 시점에서 그리스 최고의 권세를 가진 인물 리산드로스였다. 리산드로스는 이 신탁은 말 그대로 절름발이가 왕위에 앉으면 안된다는 단순한 신탁이 아니라, 스파르타의 두 왕을 인간의 두 다리에 비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테네인의 사생아가 왕위에 앉았다간 두 왕 중 하나가 권위를 잃어 나라 전체가 절름발이처럼 기우뚱거린다는 것이었다. 이 논리는 귀족들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져, 결국 아게실라오스가 왕위를 쟁취한다. 아게실라오스 2세에 대해 기록을 남긴 대표적 사가 두 명인 크세노폰플루타르코스는 여기서 조금 다른 서술을 보이는데, 크세노폰은 리산드로스가 왕위 쟁취에 뻗은 영향력이 별로 크지 않다고 주장한 반면 플루타르코스는 리산드로스가 아게실라오스를 왕위에 앉힌 장본인이라 생각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플루타르코스의 편을 들고 있다.

2.3. 키나돈의 반란 모의

그가 즉위하자마자 처음으로 맞닥뜨린 사건은 기원전 399년에 일어난 키나돈의 반란 모의 사건이었다. 키나돈은 하이포메이온이라고 이름 붙은, 시민권 박탈자였다. 하이포메이온들이 시민권을 박탈당한 이유는 재산을 모두 잃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404년 리산드로스가 아테네에서 뜯어온 막대한 재산이 스파르타에 유입되면서, 어마어마한 인플레이션이 터져 재산이 휴지조각이 되어 시민 자격을 유지할 수 없는 이들이 대거 발생했던 것이다. 특히나 스파르타는 리쿠르고스 개혁이 낳은 사회 분위기로 인해 항상 가난했기에, 이런 사태가 처음이라 전혀 대응이 되지 않았다. 키나돈은 이에 원한을 품고 하이포메이온들을 규합해 쿠데타를 일으켜 시민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음모는 발각되었고, 아게실라오스 2세가 나서서 주동자들을 처형했다.

2.4. 아시아 원정, 리산드로스 숙청

아기스 2세 시절이던 기원전 412년에 스파르타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와 협정을 맺어, 이오니아 지역 그리스 폴리스들의 종주권을 넘겼다. 그러다 다시 이오니아에 개입할 명분을 얻게 되었다. 기원전 401년에 페르시아 왕자 소 키루스가 샤한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이오니아 지역 그리스 폴리스들은 그를 지지했는데, 소 키루스의 숙적이자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과도 사이가 아주 나쁘던 리디아와 카리아의 사트라프 티사페르네스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소 키루스가 쿠낙사 전투에서 패사한 이후에도 그리스 폴리스들은 전쟁을 이어갔다. 기원전 397년, 리산드로스의 주도로 아시아 원정이 계획되었다. 목표는 티사페르네스를 몰아내고 이오니아 지역 그리스 폴리스들의 종주권을 되찾는 것이었다.

스파르타는 헤일로타이 계급 및 그리스 폴리스들의 견제를 위해 해외 원정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리산드로스 역시 혹시나 원정이 실패할 때를 대비해 원정군에 스파르타 시민은 단 30명만 편제하여 장교 내지 군사고문 역할을 맡게 했고, 전투 인원은 해방된 헤일로타이[8] 2천 명과 다른 폴리스 출신 동맹군 6천 명으로 채웠다. 여기에 아게실라오스 2세가 직접 올림피아와 델포이에 가서 제우스아폴론의 축복을 받아 왔다. 또한 아시아로 원정을 나가는 만큼 특별한 기운을 받고자 보이오티아의 아울리스 항구로 나아가서 희생제의를 드리려고 했다. 아울리스 항구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유명한 이야기 일리아스에서, 미케네 국왕 아가멤논이 트로이로 출병하기 전 제의를 올린 곳이었기에 아시아 원정 성공을 기원하는 제의에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하지만 아게실라오스 2세는 제의를 드리러 오면서 아울리스를 다스리는 보이오티아 연맹과 그 맹주 테베에 사전 공지도 하지 않았고, 아울리스 현지의 사제가 아닌 스파르타에서 데려온 사제로 제의를 치르려 했다. 이는 보이오티아의 맹주이던 테베를 자극했다. 테베는 이미 리산드로스의 원정 참가 제안을 아테네와 코린트와 함께 매몰차게 거절해서 스파르타와 관계가 악화된 상태였는데, 스파르타가 이런 행동까지 보이자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테베는 제의를 깽판치고 희생 제물을 석방시켜 제의를 막았다. 결국 아게실라오스 2세는 아울리스 항에서 제의를 드리지 못 한 채 아시아로 출병해야 했고, 남은 평생 동안 테베에 악감정을 품었다.

기원전 396년, 아게실라오스 2세와 리산드로스, 그리고 8천 명의 원정군이 아시아의 스파르타 세력 거점 에페소스에 입성했다. 아게실라오스 2세는 우선 티사페르네스와 3개월 간의 휴전을 맺어 원정군 내부와 이오니아 일대의 갈등을 처리할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마침 서사시 한 편을 찍어가며 간신히 이오니아에 다다른 크세노폰과 남은 인원 8천 명의 그리스 용병단을 맞아들였다. 이들은 쿠낙사 전투의 소 키루스 진영 패잔병들로, 현대의 이라크 바그다드 인근으로부터 걸어서 이오니아까지 탈출하는 데 성공한 정예병들이었다. 이 엄청난 규모의 무력 집단에 그리스와 페르시아 모두 골머리를 썩고 있었는데, 아게실라오스 2세는 그들의 리더 크세노폰과 친분을 맺고 이들을 원정군에 편입했다. 휴전 기간이 끝난 후엔 즉각 프리기아의 주도 다스킬레이온으로 진격했다. 진격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원군으로 왔던 노련한 용장이자 이 시점에서는 프리기아 사트라프 직에 있던 파르나바조스가 페르시아 기병대를 보내자 멈췄으나 많은 재물을 약탈할 수 있었다.

아시아에 있는 동안 아게실라오스 2세는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스파르타의 권신 리산드로스의 권세가 과도하게 커졌다는 것이었다. 리산드로스는 왕과 함께 이오니아 일대를 순방하며 자신이 스파르타에 얼마나 중요한 인재인지 어필하려 했는데, 민중들이 리산드로스에게 보내는 환호가 과도해서 오히려 왕을 들러리 취급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진노한 왕은 리산드로스를 군사 직위에서 배제했고, 리산드로스 계파의 정치적 요구를 일절 거부했다. 가뜩이나 정적이 많았던 리산드로스는 순식간에 실각했고, 아게실라오스 2세는 리산드로스를 뜬금없이 궁중 고기 책임자로 임명해 자신의 식탁에 올라올 고기나 썰게 만들었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리산드로스는 완전히 권력을 잃고 스파르타로 혼자 귀국했다. 결국 아시아 원정을 통해 떨어진 권위를 다시 세워보려던 리산드로스는 괜히 왕을 자극해 완전히 실각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후 리산드로스는 원한을 품고 국왕을 세습제가 아닌 선거제로 바꾸려는 음모를 획책하게 된다.

리산드로스가 숙청된 후 기원전 395년, 아게실라오스 2세는 사르디스로 진격할 것을 일부러 소문냈다.이 소식을 들은 티사페르네스는 이는 당연히 성동격서 책이고 자신이 사르디스로 가면 부유한 카리아로 진격할 것이라 생각해 카리아로 왔으나 아게실라오스 2세는 그대로 사르디스로 진격했고 사르디스는 신나게 털렸다. 티사페르네스는 황급히 회군했으나 사르디스 근교의 헤스모스 평원에서 아게실라오스 2세에게 참패했고, 권위가 한껏 오른 아게실라오스 2세는 스파르타 국왕 최초로 육군-해군의 전권을 쥐게 되었다. 왕은 해군 통수권을 그의 젊은 처남 페이산드로스에게 맡겼다. 그의 패장 티사페르네스는 정적 파리사티스의 농간에 의해 처형되었다. 티사페르네스의 임지를 계승받은 티트라우스테스는 30탈란트의 뇌물을 아게실라오스 2세에게 주고 파르나바조스가 사트라프로 있는 프리기아로 옮겨가도록 주선했다.

아게실라오스 2세는 기원전 394년에 프리기아로 넘어가 이 일대를 공격하려 했으나, 공성장비의 부족으로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그래서 왕은 일단 파르나바조스와 협정을 맺고 철수했다. 옛 트로이가 있던 곳 근처로 철수한 아게실라오스 2세는 다시 원정 준비를 시작했다. 크세노폰은 왕이 페르시아의 수도 슈쉬로의 원정을 계획했었다고 하나 실제로 그럴 확률은 낮다. 하지만 노회한 파르나바조스는 군사력으로 아게실라오스, 그리고 스파르타와 계속 싸울 생각이 없었다. 파르나바조스는 그리스 폴리스들에 로도스의 티모크라테스라는 장수를 사절로 보내 스파르타에 전쟁을 걸어달라고 막대한 뇌물을 뿌렸다.[9] 가뜩이나 스파르타를 싫어하던 폴리스들은 페르시아가 돈까지 주며 부추기자 즉각 거병했다. 이렇게 코린트 전쟁이 발발했다. 이렇게 되자 아게실라오스 2세는 결국 그리스로 돌아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왕은 페르시아를 떠나면서 "나는 1만 명의 페르시아 궁수들에게 쫓겨난다."라고 말했는데, 1만이라는 숫자는 수없이 많다는 비유이고, 궁수는 궁수 그림이 새겨진 페르시아 다릭 금화를 일컫는 것으로, 즉 페르시아의 군사가 아닌 페르시아의 돈에 쫓겨난다는 아쉬움을 담아 남긴 말이다.

3. 선임 왕이 된 후

3.1. 코린트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영향으로 아테네는 민주정과 성벽을 모두 잃었고, 테베도 스파르타의 동맹으로 참전했으나 스파르타가 폴리스들을 장악하는 것을 견제하려다 동맹이 끊기고 두드려맞았다. 이 때문에 두 폴리스는 스파르타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있었다. 아테네는 아게실라오스 2세 즉위 3년 전에 테베의 지원을 받아 민주정을 회복하고 복수의 때만을 기다려 왔다. 그리고 때가 좋게 파르나바조스의 청탁이 들어오자, 테베가 그들의 속국 오졸리안 로키스를 동원해 스파르타의 동맹국 포키스를 공격하면서 코린트 전쟁이 시작되었다. 스파르타는 권력이 충분히 줄었다고 판단된 리산드로스에게 다시 군권을 주었다. 스파르타군을 두 갈래로 나누어 리산드로스와 아기아다이 왕가의 왕인 파우니시아스가 각각 지휘하게 했다. 두 군은 보이오티아의 할리아르토스로 진격하기로 했는데, 리산드로스의 군이 먼저 도착했다. 리산드로스는 먼저 이 도시를 공격하다가 전사하고 말았다.[10] 한발 늦게 도착한 파우니시아스는 설상가상으로 아테네가 참전해 트라쉬불로스가 이끄는 아테네군이 이곳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결국 전투 중단을 협상하고 전사자의 시신만 챙겨 회군했다. 할리아르토스의 패배는 스파르타에 큰 분노와 당황을 일으켰고, 파우니시아스는 재판에 회부되어 탄핵되었다. 결국 왕 파우니시아스는 테게이로 망명했고, 아기아다이 왕은 그의 아들 아게시폴리스 1세가 물려받게 되었다. 전황이 초전부터 꼬여버리자 결국 스파르타는 아게실라오스 2세를 귀국시켰다. 파우니시아스의 폐위로 어린 아게시폴리스가 즉위해 아기아다이 왕가의 권위가 부족해져 아게실라오스 2세는 두 왕 중 선임이 됐으며, 이후 그의 치세는 사실상 그가 단독 통치를 하는 것처럼 굴러가게 되었다.

아게실라오스 2세는 이오니아 현지 그리스인들을 잘 설득해 이탈을 막았고, 군세를 보존한 채로 프리기아 북쪽으로 이동해 아비도스에서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넜다. 이후 비잔티움에서부터 마케도니아 남쪽을 거쳐 테살리아 일대로 진입했다. 테살리아의 나르타키움에서 테베의 동맹 파르살리아와 기병대로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왕은 테살리아를 돌파한 후 영웅스러운 전투가 있었던 테르모필레를 거쳐 보이오티아 일대에 진입해 본국과 동맹국들의 지원을 받았다. 이때 왕에게 낭보가 들려왔다. 아기아다이 왕가의 섭정 아리스토다모스가 네메아 전투에서 테베-아르고스-아테네-코린트의 4개국 연합군 2만 4천 명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직후엔 비보도 들려왔는데, 그의 처남 페이산드로스가 이끄는 스파르타 해군이 크니도스에서 코논이 이끄는 페르시아 해군에게 괴멸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스파르타 해군이 괴멸하자 파르나바조스와 코논의 페르시아군은 즉각 이오니아로 진격했다. 별 수가 없던 아게실라오스 2세는 병사들에게 크니도스의 비보는 숨기고 네메아의 승전보만 전해 사기를 올린 후, 코로네아에서 사기가 충천한 테베-아르고스 연합군과 맞닥뜨렸다. 테베군은 스파르타의 동맹국 군대와, 아르고스는 스파르타 본국 군대와 전초전을 벌였는데 아르고스군은 곧 패퇴했으나 테베군은 동맹국 군대를 제압하고 스파르타 후미로 가서 스파르타의 전리품 수레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분노한 스파르타군은 회군해서 테베군을 공격했다. 원래 호플리테스 간의 전투는 특유의 전투 방식 상 전투 중엔 전사자가 많지 않고 무너져서 도망가다가 전사자가 나지만, 스파르타와 테베의 뿌리깊은 적대감 때문에 이 전투는 역사상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치열하여 전투 중에 많은 전사자를 보았다. 심지어 아게실라오스 2세가 전열에서 싸우다가 부상을 입을 정도였다. 결국 테베는 완패했다. 그나마 대형을 지켜 퇴각하는데 성공한 테베는 전투 중지 협상을 걸고 전사자의 시체만 챙겨 퇴각했다. 이때 아게실라오스 2세는 테베 패잔병 수십명이 숨어있는 장소를 파악했으나 자비를 베풀어 이들을 살려주었다. 승전보를 올린 아게실라오스 2세는 델포이에 들러 아폴론 신전에 지금까지 아시아와 그리스에서 얻은 전리품의 10분의 1을 바치고 스파르타로 귀국했다.

기원전 393년에는 부상에서의 회복과 리산드로스 계파 잔당들의 정치 공세로 큰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이 동안 아게실라오스 2세는 아게시폴리스 1세와 친분을 맺어 정치적 공격을 견제했다. 스파르타 해군을 괴멸시킨 코논은 스파르타가 움직이지 않는 동안 스파르타 후방을 마음껏 공격했다. 이후 기원전 392년에 안탈키다스를 리디아로 사절로 보냈다. 리디아의 사트라프 티트라우스테스가 죽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측근 티리바조스가 새로 집권해서, 그를 설득해 페르시아군을 멈추기 위함이었다. 스파르타는 이오니아 일대의 종주권을 다시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그리스 동맹군 측도 이를 막기 위해, 아테네가 코논을 대표로 해서 사절단을 보냈다. 양쪽의 말을 모두 들은 티리바조스는 이오니아의 종주권을 쿨하게 포기하는 스파르타보다 이를 못 버리는 아테네 및 그리스 동맹군이 더 위협적이라고 판단하고 코논을 사로잡아 감옥에 투옥시켜버렸다. 그리고 스파르타에 자금 지원을 시작했다. 하지만 티리바조스는 아직 스파르타를 적으로, 아테네를 동맹으로 판단하고 있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 의해 해임되어 잠시 장군직으로 돌아간다.

기원전 391년, 코린트에서 반란이 일어나 스파르타 과두제가 전복되고 민주제가 들어섰다. 이에 왕은 이복형제 텔레우티아스를 해군 사령관에 앉힌 후, 코린트에서 도망친 과두제 잔당들과 함께 코린트로 진격해 레카이온과 코린트의 시골 지역들을 점령하며 승전보를 올렸다. 하지만 후미에 배치해 놓은 주둔군이 레카이움에서 이피크라테스가 이끄는 아테네군에게 대패하면서 이득을 모두 잃었고 아르고스군도 때맞춰 진격해 코린트에 입성했고 코린트를 합병했다. 다시 스파르타로 회군했다.

기원전 389년에는 아게실라오스 2세가 직접 아카르나니아로 진군해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388년에는 아르고스를 한 번 더 공격했다. 이후 기원전 387년, 스파르타를 지원한다는 이유로 리디아 사트라프에서 해임되었던 티리바조스는 리디아 사트라프로 복직했다. 아테네가 키프로스와 이집트를 지원해 페르시아에 반하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스파르타를 지원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티리바조스는 샤한샤의 공인을 받아 그리스 폴리스들을 소집해 평화회의를 주최했다. 스파르타는 안탈키다스를 다시 사절로 파견했다. 이 회의는 가결되었고 이를 안탈키다스 평화 조약 또는 왕의 평화 조약이라 부른다. 이 회의에서 그리스 폴리스들은 페르시아가 키프로스 섬과 클라메네조스 섬, 그리고 에게 해에 있는 모든 섬을 점령하는 것을 승인했으며 아테네가 오래 전부터 다스리던 속국 서너 개를 제외하고는 그리스 내에서 모든 동맹 또는 연맹이 금지되었다. 또한 그리스 폴리스들은 명목상으로 페르시아의 속국이 되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에게 '평화의 수호자' 지위를 받아 연맹 금지 등의 조약을 면제받았으며 대신 이에 대한 대가로 이오니아 일대를 페르시아에 넘겼다. 이로써 코린트 전쟁은 명목상으로는 스파르타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뜬금없는 조약 내용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실상은 그리스 폴리스끼리만 피터지게 싸웠고 실속은 모두 페르시아가 챙겼다. 이처럼 손 안 대고 이오니아를 꿀꺽한 페르시아는 스파르타와의 분쟁을 멈추고 남쪽으로 국력을 집중해 키프로스를 재점령하고 이집트를 몰아붙여 볼 수 있게 되었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를 등에 업고 패권을 계속 쥘 수 있게 되었지만 스파르타의 이상한 외교정책은 많은 동맹 폴리스의 이탈을 불러왔다. 게다가 그리스 사람들 입장에서는 스파르타가 이오니아의 그리스 동포들을 판 것을 엄청난 불명예로 여겼다. 그래서 스파르타의 리더십은 급격하게 위축되었고 이는 훗날 스파르타의 파멸을 불러온다.

3.2. 코린트 전쟁 이후

스파르타는 즉각 그리스 내부에서의 전후 처리에 돌입했다. 테베가 이끌던 보이오티아 연맹을 해체했고, 아르고스와 코린트를 다시 분리한 후 코린트를 속국으로 만들었고, 기원전 385년에 만티네이아를 5등분으로 분할해 버렸다. 또 기원전 383년에는 포에비다스가 스파르타군을 이끌고 테베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테베를 점거해 버렸다. 이는 포에비다스의 독단적 행동이어서 군권이 박탈되고 처벌을 했어야 하나, 아게실라오스 2세가 개입해 포에비다스는 스파르타에 명예를 안겨 주었다며 적극 변호해서 처벌을 막아주었다. 이후 기원전 379년에 쿠데타에서 탈출한 테베 고위층 펠로피데스와 에파미논다스가 테베로 다시 잠입했다. 그들은 스파르타 앞잡이들을 암살한 후 테베를 독립시켰다. 이에 스파르타와 테베 사이에 다시 전쟁이 벌어진다. 아게시폴리스 1세의 뒤를 이은 아기아다이 왕 클레옴브로토스 1세가 테베로 진격했으나 싸우지 않고 돌아왔다.

3.3. 테베 전쟁, 스파르타의 몰락

클레옴브로토스 1세가 별 소득 없이 회군하자 기원전 378년과 377년, 아게실라오스 2세가 나서서 두 차례 직접 보이오티아로 원정했다. 이에 테베는 아테네와 군사 동맹을 맺게 되었다. 테베는 수석 치안 판사에 펠로피데스를, 군대 총사령관에 에파미논다스를 임명했고 아테네는 총사령관으로 코논의 아들 티모테우스를 임명했다. 테베는 스파르타군과 직접 충돌을 피하고 요새를 세워 수비적으로 대응했고, 결국 아게실라오스 2세는 테베 인근 시골만 실컷 털고 회군해야 했다. 이는 테베 시민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테베는 이때 군대를 확충하고 유명한 게이 부대 신성부대를 결성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 나섰다. 또한 군사를 주변에 보내 보이오티아 연맹 재건을 선언했다. 아게실라오스 2세는 연맹 해체를 명령하는 것 말고는 손 쓸 방법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아게실라오스 2세가 중병에 걸려 군사 작전을 나가지 못 하게 되었다. 기원전 376년에 스파르타 해군이 패배했고, 기원전 375년에 아테네가 스파르타와 평화 조약을 맺었으나 곧 깨졌다. 테베의 에파미논다스와 아테네의 티모테오스는 소소한 승리를 거두며 스파르타를 계속 괴롭혔다. 결국 수 년 간의 전쟁에 지친 각국은 평화 회담을 열게 되었다. 아게실라오스 2세가 스파르타 대표로 나섰고 에파미논다스가 테베의 대표로 참석했는데, 처음에는 에파미논다스는 테베의 대표로 서명하며 스파르타가 명령한 보이오티아 연맹 해체를 따를 듯 했다. 그러다 갑자기 자신은 테베 뿐만 아닌 보이오티아 연맹의 대표자라며 서명을 보이오티아 연맹 대표로 바꾸었다. 이에 아게실라오스 2세가 크게 분노하여 항의했지만 에파미논다스는 이를 무시했다.[11] 분노한 아게실라오스 2세는 클레옴브로토스 1세 왕을 시켜 테베로 진격하게 했다. 그리고 벌어진 참사가 바로 레욱트라 전투이다. 어떻게 졌는지, 얼마나 처참하게 졌는지는 레욱트라 전투 문서 참조. 레욱트라에서 클레옴브로토스 1세 왕 본인이 전사하고 수천 명의 소중한 스파르타 시민을 잃으면서, 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승전으로 시작된 스파르타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스파르타는 도망자 처형도 못 할 정도로 많은 시민을 잃었다. 결국 같은 해에, 아테네에서 평화 조약이 조인되었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해체되었다. 스파르타의 성벽도 허물어졌다. 이전에 스파르타가 5등분으로 분할했던 만티네이아는 다시 통합되었다. 아르고스도 과두정이 무너지고 민주화되었다. 새로운 패자는 테베가 되었다.

3.4. 스파르타를 일으키기 위한 노력

이것으로 스파르타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스파르타가 멸망한 것은 아니었고, 아게실라오스 2세는 스파르타를 계속 이끌어 나가야 했다. 아게실라오스 2세는 포기하지 않았다. 우선 가까운 곳에 있는 적국 만티네이아부터 조치해야 했다. 만티네이아는 역시 스파르타와 사이가 아주 나쁘던 테게아와 짜고 아르카디아 지역의 폴리스들을 모아 아르카디아 연맹을 형성하려 했다. 아게실라오스 2세는 이를 막기 위해 기원전 370년에 아르카디아 지역을 침공했다. 그러자 만티네이아는 테베에 원군을 요청했고, 에파미논다스가 즉각 7만 명의 연합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에파미논다스는 아르카디아 일대를 지키면서 아르카디아 연맹 형성 및 신도시 메갈로폴리스 건설을 지원했다. 군사 수부터 압도당한 아게실라오스 2세는 더 이상의 참사를 막기 위해 전투를 회피했는데, 그러자 기원전 369년에 에파미논다스는 대대적 공격을 가했다. 7만 명의 군대가 네 갈래로 나누어 스파르타가 위치한 라코니아 지역 곳곳으로 진격했고 동시에 헤일로타이, 페리오이코이[12], 심지어 일부 시민들까지 반란을 일으켰다. 아게실라오스 2세는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했고 어떻게든 스파르타 시가지는 지켜냈다. 하지만 에파미논다스는 도시 전체가 스파르타의 헤일로타이 노릇을 200년 넘게 해오던 메세니아로 진입해 이 곳을 독립시킨 후 철군했다. 이로써 스파르타는 농업 기반이 박살났고, 아르카디아 연맹과 메세니아라는 두 적대국을 코 앞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게실라오스 2세는 외교적으로 변화를 주었다. 이 시점에서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상황을 보고받고, 기존에 스파르타에게 주었던 맹주의 지위를 테베로 바꾸어 준 상태였다. 페르시아의 승인을 받을 정도로 테베가 커지자 아테네는 테베에게 위협을 느꼈다. 이를 간파한 아게실라오스 2세는 아테네에 동맹을 제안했고, 아테네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스파르타-아테네 동맹이 결성되었다. 또한 엘리스 등 테베의 패권에도 저항하던 다른 폴리스들을 규합했다. 그 후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페르시아를 약화시키려 하였다. 이 때 페르시아는 사트라프들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프리기아 사트라프 아리오바르자네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스파르타는 아게실라오스 2세가, 아테네는 티모테오스가 군대를 이끌고 지원을 갔다. 그러나 아리오바르자네스가 샤한샤의 본대와 대치하게 되자, 둘은 철군했다.

3.5. 만 망할 순 없다

기원전 362년, 에파미논다스는 네 번째 펠로폰네소스 원정을 시작했다. 이전에 에파미논다스가 만들어 주었던 아르카디아 연맹에서 만티네이아가 독립한 것이다. 만티네이아는 스파르타-아테네 진영에 가담했는데, 이 만티네이아를 짓밟는 것이 이번 원정의 목적이었다. 이에 아게실라오스 2세가 스파르타-아테네-만티네이아 연합군을 이끌고 만티네이아에서 에파미논다스가 이끄는 테베-아르카디아 연합군과 싸우게 되었다. 이 전투에 대해서는 만티네아 전투(기원전 362년) 문서 참조. 아게실라오스 2세는 신성부대를 투입한 테베 군에게 결국 패배했지만, 테베에게 이 전투에서 회복불가능한 손실을 입혔다. 막대한 전사자를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테베의 유일한 자랑거리이자 스파르타의 철천지 원수 에파미논다스를 이 전투에서 죽였다. 에파미논다스 사살이라는 전과가 워낙 커서 아게실라오스 2세는 전투 후 "경기에서는 졌지만, 승부에서는 이겼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실제로 테베도 스파르타에게 뭘 요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스 최고의 폴리스 세 곳인 스파르타, 테베, 아테네가 죄다 심각한 피해를 입으면서, 세 국가는 평화협정을 맺고 전쟁을 그만두게 된다. 테베는 쟁취한지 10여년 밖에 안 된 패권을 도로 잃게 되었고 그리스는 사상 초유의 패권 국가 없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침체기에 빠진 그리스는 30여년 후 마케도니아 왕국필리포스 2세에게 격파당하고,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의 패권을 잡게 된다.

3.6. 인생 최후의 원정

기원전 361년, 수많은 일을 겪은 아게실라오스 2세는 당대 기준으로 초장수 노인인 83세였다. 하지만 아게실라오스 2세는 원정을 멈출 수 없었다. 레욱트라 전투 이후 스파르타는 농업 기반을 빼앗겼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상업을 하자니 밑천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패권을 잃은 스파르타에게 남은 건 사람, 강력한 병사들뿐이었다. 그리고 아게실라오스 2세는 패권 회복의 꿈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 재건을 위해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를 위해 병사들을 이끌고 용병 사업을 해서 예산을 벌어야 했다. 따라서 페르시아에 대한 견제도 하고 돈도 벌기 위해 83세의 노왕은 이집트로 건너갔다. 이 때 이집트에서는 새 파라오 테오스가 페르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아테네의 사브리오스도 도착하자, 파라오 테오스는 해군을 사브리오스에게, 육군은 아게실라오스 2세에게 맡기고 레반트로 진격했다. 하지만 이집트 내부의 정치 모략에 의해 아게실라오스 2세와 테오스 간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약화되었다. 그러다 기원전 360년, 원정길에서 파라오의 조카 나크트호르헤브가 반란을 일으켰다. 나크트호르헤브는 두 그리스 장수들에게 가담을 요청했다. 사브리오스는 반란 가담은 하지 않았으나 파라오도 돕지 않았고, 아게실라오스 2세는 나크트호르헤브의 편을 들었다. 스파르타 군의 도움을 얻은 나크트호르헤브는 파라오를 내쫓고 수도로 가서 넥타네보 2세로 즉위했다. 그가 즉위한 후 곧 나일강 삼각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아게실라오스 2세는 이 반란의 진압에도 참가했다. 넥타네보 2세는 고마워하며 용병 대금으로 220달란트를[13] 지급했다. 돈을 받은 왕은 스파르타로 돌아가는 배를 타기 위해 키레나이카로 진군했으나, 노환으로 인해 결국 스파르타에 닿지 못하고 기원전 360년 키레나이카에서 사망했다. 향년 84세였다. 왕의 시신은 밀랍으로 방부처리된 뒤 스파르타로 운구되어 스파르타에 묻혔다.

4. 평가

스파르타에서 심각한 결점이었던 장애와 왜소한 체구를 갖고 태어났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팔랑크스의 선두에서 스파르타를 이끈 왕이다.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긴 대표적인 옛 역사가들은 크세노폰플루타르코스다. 크세노폰과 플루타르코스, 또 아게실라오스 2세에 대해 기록을 남긴 대부분의 고대 역사가들은 그를 상당히 고평가하고 있다. 그의 개인적 성품은 상당히 검소했으며, 자신의 신념에 대한 믿음이 굉장히 굳셌고, 용기, 절제, 엄격함 등의 여러 미덕을 갖추었다. 또한 그는 스파르타인답지 않게 가족과 친구를 중요하고 따뜻하게 생각했다. 또한 대단히 명석했다고 한다. 스파르타의 왕이라는 이미지에 안 맞게 아들 아르키다모스와 목마놀이를 하다 친구들에게 들킨 적도 있고, 아르키다모스의 친구인 클레오니모스의 아버지 스포드리아스가 피레우스에 불법침입했다 쫓겨나 처형당할 위기에 놓이자 아들의 친구가 슬퍼할 것을 염려해 스포드리아스를 사면하기도 했다. 크세노폰은 아예 아게실라오스 2세의 추종자로 살았으며 《스파르타 헌법》과 《아게실라오스》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는 일찍이 아게실라오스 2세 치세 초기의 아시아 원정 때 그의 군대에 합류해 스파르타군에서 오랫동안 복무했다.[14] 크세노폰 이외에도 많은 역사가들은 그를 스파르타 최고의 군주이자 그리스 군주의 모범으로 그리고 있다.

그는 전쟁 군주였으며 일생동안 쌓은 커리어의 대다수가 전쟁이다. 그는 재위 초반과 후반엔 군사적 업적을 거두지만 정작 그의 재위기간에 스파르타는 몰락을 맞는다. 특히나 당시 스파르타는 아기아다이 왕들이 쫓겨나거나 죽는 등으로 자주 바뀌어 아게실라오스 2세가 사실상 원톱인 체제였다. 여기서 그에 대한 평이 갈리게 된다. 고대 역사가들은 스파르타의 몰락에 아게실라오스의 책임을 높게 잡지 않았다. 크세노폰과 플루타르코스 등이 지목한 스파르타의 몰락 원인은 리산드로스가 벌인 다른 폴리스들에 대한 과도한 정치적 억압과 아게실라오스 2세 왕을 제외한 아기아다이 왕들 등 다른 장수들의 군사적 실패였다. 실제로 이는맞는 이야기였고, 2,000년 가까이 이런 사관이 이어졌다.

하지만 몇몇 현대 역사가들은 아게실라오스 2세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의 전적을 분석하면 아게실라오스 2세는 군사적으로 해전과 공성전에 약했던 것이다. 거기다 키나돈의 반란 모의에서 드러난 스파르타의 인플레이션 등에도 조치를 취하려 한 흔적이 없어 전형적인 맹장형 군주처럼 내정에 약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의혹도 있다. 19세기 영국의 역사가 존 버리는 아게실라오스 2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전한 최강국 스파르타를 물려받아 치세 내내 패배만 했으며 그의 시기에 스파르타가 완전히 무너졌다고 강력히 비난했다.

물론 아게실라오스 2세와 동시대를 산 역사가들의 평이 워낙 좋고,[15] 실제로 스파르타의 몰락은 왕 하나의 능력으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총체적인 제도의 문제였다는 것을 감안해야 할 필요가 있다.[16] 아게실라오스 2세가 즉위했을 때 이미 리산드로스의 전리품으로 인해 스파르타의 사회 분위기는 해이해졌고, 아게실라오스 2세는 군사적으로 분투했으나 그 이외의 장수들의 승률이 너무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치세 전반에는 리산드로스가 나라 안팎을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치세 전반을 비판하려면 리산드로스를 비판하는 게 맞는다.

정리하자면 업적 면에서 보면 패배의 연속으로 스파르타 최고의 군주라는 호칭이 맞지 않을지도 모르나, 개인의 성품과 놓여진 시대 상황에 할 수 있는 만큼 대응한 부분에서 결국 스파르타 최고의 군주라는 호칭을 증명해낸 왕이라 할 수 있다.[17]

5. 일화

정교한 수사법과 웅변술 등을 중시했던 아테네나 여타 폴리스들과 달리, 스파르타인들은 평소에는 과묵하나 어쩌다 시니컬하게 던지는 한 마디가 촌철살인인 것으로 유명했다. 이를 라코니아식 수사법이라 하고, 아게실라오스 2세 또한 스파르타인답게 라코니아식 수사법에 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가 아게실라오스 2세에게, 웅변가들이 이야기를 과장하는 능력이 훌륭하다며 칭찬했다. 그러자 아게실라오스 2세는 "작은 발에 큰 신발을 신기려는 제화 기술자가 좋은 기술자요?" 라고 반문했다.

누군가가 아게실라오스 2세에게, 도대체 리쿠르고스의 개혁이 스파르타에게 가져다 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게실라오스 2세는 "쾌락에 대한 경멸이오."이라고 답했다.

누군가가 아게실라오스 2세에게, 스파르타는 어디까지 팽창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아게실라오스 2세는 창을 휘두르며 "이 창이 닿는 데까지요.'라고 답했다.

아게실라오스 2세가 아시아에 있을 때, 어느 집 지붕에 네모난 나무 기둥을 쓴 것을 보았다. 이를 본 아게실라오스 2세는 아시아에서는 네모나게 자라는 나무가 있냐고 물었다. 집 주인은 둥근 나무를 네모나게 깎은 것이라 답했다. 그러자 아게실라오스 2세는 "그럼 뭐, 나무가 네모나게 자라면 도로 둥글게 깎으려 들겠군." 이라고 말했다.

누군가가 아게실라오스 2세를 위해 꾀꼬리 소리를 기막히게 따라하는 배우를 부르려 하자, 아게실라오스 2세는 거절하면서 "진짜 꾀꼬리 소리도 들어보았소."라고 답했다.

6. 어록

내가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는 행동을 했다면, 그것이 나를 기억하는 기념물이 되 줄 것이다. 내가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는 행동을 하지 못 했다면, 기념물을 아무리 세워도 나는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고귀함이란 허영심이 아닌 위대한 선행에서 나오는 것이다.

불의가 없다면 용기는 더 이상 미덕이 되지 못 할 것이다.

[1] 다른 한 명은 그 유명한 영화 《300》의 주인공 레오니다스 1세다. 의외로 둘은 닮은 구석이 있는데, 레오니다스는 3남, 아게실라오스는 차남이라 왕위 계승 구도와 거리가 멀었으며 둘 다 형이 적법한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죽어서 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공통점이 있다.[2] 왕자가 아고게를 면제 받은 명분이 "왕위 계승자가 아고게 수행 중 사망할 경우 혼란이 발생할 것이므로 이를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므로, 1순위 계승권자가 아닌 차남 이하의 왕자는 면제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3] 스파르타는 건국할 때 스파르타 일대에 있던 네 마을 중 두 마을이 연합을 하여 다른 두 마을을 쳐서 무너뜨려 세워졌다고 하는데, 이 두 마을의 지도자가 공동왕위에 오른 것이 스파르타 특유의 이중 국왕 제도를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스파르타는 아기아다이 왕가와 에우리폰티다이 왕가의 두 왕을 모셨으며, 두 왕은 서로의 통치행위에 대한 거부권을 가졌다.[4] 아르키다모스의 아버지는 본인의 부왕(아르키다모스의 조부) 레오티키다스 2세보다 일찍 죽었다. 졸지에 후계자를 잃은 노왕은 재혼을 하였으나 아들을 새로 얻진 못했고 대신 딸을 얻었으니 이 딸이 바로 람피토다. 이후 레오티키다스 2세는 죽은 아들이 생전에 남긴 자식, 즉 자신의 손자인 아르키다모스를 새로 얻은 늦둥이 딸 람피토와 결혼시켰다.[5] 고대 역사가들은 아게실라오스 2세가 올림피아 제전의 마초적이고 귀족적인 돈지랄 엘리트 체육 제도를 멸시해, 여동생을 우승시켜 올림피아 제전 특유의 남성중심-귀족적 분위기를 비판하려 했다고 기술했으나, 현대 역사가들은 아게실라오스 2세가 동생의 끼를 보고 역사상 최초의 여성 올림피아 우승자를 탄생시켜 본인과 가문의 명성을 올리는데 써먹으려 했다고 생각한다. 키니스카가 죽은 후에도 아게실라오스 2세 주도로 키니스카에 대한 신적 숭배가 이어진 것을 보면 실제로 이런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6] 아고게 졸업생들이 밤에 메세니아의 헤일로타이 마을을 습격해 스파르타 정부가 요주의 인물로 찍어둔 불만 많은 헤일로타이들을 살해하는 의식. 결속력을 높이는 살인 의식과 반동분자를 숙청하는 스파르타의 정치적 의도를 함께 가진 의식이었다.[7] 여기서 레오티키다스의 친부로 지목되는 사람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연인이었고 파란만장한 삶으로 유명한 풍운아 알키비아데스이다. 그가 스파르타에 망명해 있던 시절 아기스 2세의 왕비 티마이아와 간통을 했다고.[8] 이들은 네오다모데스라고 한다.[9] 크세노폰은 티모크라테스를 보낸 것이 프리기아 사트라프 파르나바조스가 아닌 리디아 사트라프 티트라우스테스라고 주장했으나, 연대기를 보면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10] 리산드로스가 사망한 후, 아게실라오스 2세는 리산드로스의 가택을 압수수색할 것을 지시했다. 압수수색에서 리산드로스가 놀라울 정도로 청렴하게 살았다는 것이 밝혀졌으나, 더 중요한 것은 리산드로스가 쓰던 일기와 편지였다. 여기에는 스파르타의 국왕들을 몰아내고 선거군주제를 채택해야 한다는 주장이 실려있었다. 결국 리산드로스는 죽어서 역적으로 낙인찍혔고, 이 사실이 공표되자마자 그리스 각국 명문가들과 혼약이 맺어져있던 그의 딸들의 약혼이 모조리 깨졌다.[11] 이 때 아게실라오스 2세가 "보이오티아는 별개로 서명해야 하지 않는가?" 라고 묻자 에파미논다스는 "스파르타가 페리코이오이들에게 조약에 별개로 서명할 권리를 주기 전까진 불허하오." 라고 대꾸했다고 한다.[12] 2등 계급 시민 또는 반시민으로 번역된다. 평민으로 인정되나 그렇다고 시민의 영예도 얻지 못 한 이들로, 아고게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는 타 폴리스의 호플리테스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주로 상업이나 공업 등 농업을 제외한 다른 필수적인 일들에 종사했다.[13] 아테네 최전성기의 연수입이 1000탈란트였다. 최전성기 아테네 연수입의 5분의 1을 넘는 금액으로 특히나 가난한 국가였던 스파르타에겐 거금.[14] 이 때문에 고향 아테네에서 추방당했지만 아게실라오스 2세에게 좋은 저택을 받아 레욱트라 전투 이전까지 스파르타에서 살다가 레욱트라 전투 이후 코린트로 도주했다가 스파르타-아테네의 국교가 회복된 기원전 365년에 추방이 풀려 아테네로 돌아갔다.[15] 다만 이런 역사가들 중에는 크세노폰 같은 스파르타에 대한 환상을 가진 이들도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16] 또한 스파르타의 왕은 실권이 약했다.[17] 사실 그 동안 쌓이고 쌓인 스파르타의 병폐들이 터진 거고 하필 그 당시 왕이였던 아게실라오스가 덤탱이를 뒤집어 쓴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