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35:07

알렉스 퍼거슨/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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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드 트래포드2. 장수 감독3. 자서전 발간4. 로테이션5. 진화하는 감독6. 매우 유동적인 선발 라인업7. 리더십에 대한 평가8. 상왕9. 퍼기 타임10. 퍼11. 박지성과의 관계12.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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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드 트래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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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퍼거슨 경 스탠드
재임 시절, 2011년 11월 5일,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맨유 부임 25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북쪽 스탠드의 이름을 올드 트래포드 맨체스터(Old Trafford Manchester)에서 알렉스 퍼거슨 경 스탠드(Sir Alex Ferguson Stand)로 개명했다. 기존의 명칭은 남쪽 스탠드로 옮겨놓았다가 보비 찰튼 경 스탠드로 개명 이후 철거했다.

퍼거슨 경 동상 오픈 행사. 영상

맨유에서의 이룬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올드 트래포드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고, 2012년 11월 23일 공개되었다. 이 행사에 그의 제자들인 에릭 칸토나, 피터 슈마이켈, 에드윈 반 데 사르, 올레 군나르 솔샤르. 뤼트 판니스텔로이, 드와이트 요크, 앤드루 콜, 라이언 긱스, 개리 네빌, 필 네빌이 참석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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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우 자랑스러운 순간이야.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죽은 후에야 동상이 세워지잖아. 근데 난 살아있네!
● 와이프는 날 컨트롤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약속했어요, 매주 토요일마다 동상에 절을 한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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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엔 퍼거슨의 공헌을 기념하여, 그의 이름을 딴 길도 생겼다. 원래 이름은 워터스리치(Waters Reach Road)로 트래포드 자치구에서 의회의 승인을 얻어 길의 이름을 바꿨다. 알렉스 퍼거슨 경 길(Sir Alex Ferguson Way)은 맷 버스비 경 길(Sir Matt Busby Way)과 연결되어 있다. 맨유의 감독, 스탭들, 선수들은 OT에 출근할 때마다 이 두 길을 지나치게 되는 것이다.
1986년에 올드 트래포드에 도착했을 때 앞으로 기다리고 있는 여정들을 생각하지 못했다. 트래포드 자치구로부터 영예를 받고 내 이름을 딴 도로가 생긴다고 하니 영광스러울 따름이다. 지난 27년 동안 위대한 클럽에서 역사를 만들었고 믿을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드린다. 출처

2. 장수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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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7월 존 홀린스첼시의 감독으로 부임한 이래, 2013년 라파엘 베니테즈까지 총 18명의 감독이 다녀갔다. 반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알렉스 퍼거슨, 단 한 사람으로 설명할 수 있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EPL에서 축구 감독의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 짧다는 얘기가 있다. 2006년 영국 워릭 경영대학원(Warwick Business School)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1992년부터 2005년까지 잉글랜드 감독들의 평균 재임기간은 약 2년이었다. 허나 퍼거슨 감독(스코틀랜드 출신)은 무려 27년간 재임하고, 성공신화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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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거슨이 재임했던 27년 중 25년만 보더라도 레알 마드리드는 24명, 인테르는 19명, 첼시는 15명, 유벤투스, 바이에른 뮌헨, 맨시티는 14명, AC 밀란은 13명, 바르셀로나는 11명이 감독으로 거쳐갔다.

그리고 은퇴 후, 사무국과 후임 감독들의 삽질로 인해 그 존재감이 끊임없이 재평가되고 있는 명장이다.

3. 자서전 발간

에브라가 전화로 알려줬는데, 브라질 월드컵 준비과정의 일환으로, 프랑스 국가대표팀 데샹 감독이 선수단 전원한테 내 자서전을 읽도록 했다고 했다더라. 선수들이 책을 편 지 5분 만에 숙면을 취했다고 숙면에 효과가 좋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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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을 인증한 제자 제라르 피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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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아버지 따라서 퍼거슨과 사진찍었던 소년은 훗날 장성하여 자서전을 사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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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자서전의 발간식에서 논란의 월드클래스 발언이 나오는데,
(기자)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이 여태 봐온 최고의 선수들은 누구죠?
(퍼거슨) 펠레, 디 스테파노, 마라도나, 크루이프.
(기자) 순서대로입니까?
(퍼거슨)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요즘 언론을 보면 '월드클래스'라는 수식어가 너무 남발되고 있어. 내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지도 했던 선수들 중 '월드클래스' 선수는 4명 뿐이야. 폴 스콜스, 라이언 긱스, 에릭 칸토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지. 그들은 차이를 만들어 냈고 그것이 그 증거지. 칸토나는 프리미어리그 첫 우승의 기폭제가 되었지. 스콜스와 긱스는 어릴때부터 환상적인 선수였으며, 두 선수 모두 오랫동안 활약했지. 프리미어리그 전체를 통틀어 그들 만큼의 레벨에서 계속 활약한 선수가 있을까? 없다, 절대로 없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완벽한 천재 플레이어지. 가장 재능있었던 제자는 호날두야. 또한 현재 월드클래스라고 칭할 만한 선수는 오직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뿐이야.

이 발언에 대해 베컴"응. 나 월클 아닌거 맞아"라며 쿨하게 반응했지만 퍼디난드는 본인의 페이스북에 "월드클래스의 기준이 무엇인가? 그것은 상당히 애매모호하다. 선수의 평가 기준이 될 수있는 요소는 다양하다. 예를 들어 훌륭한 골잡이, 훌륭한 골키퍼, 훌륭한 태클러, 팀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정신적 지주 등이 있다. 누가 월드클래스 선수이며 월드클래스란 대체 무엇인가?"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참고로 해당 자서전에서 퍼거슨은 베컴에 대해 '베컴은 훌륭한 축구 선수보다도 패션계의 아이돌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때문에 맨유에서 나간 이후로는 톱 플레이어라 불리울 수 있는 영역에 단 한번도 다다르지 못했다'라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정점을 기반으로 꾸준함을 +@로 치는데에 반해, 퍼거슨 같은 경우는 꾸준함을 중점에 두고 선수를 판단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감독 입장에서는 꾸준히 일정 수준을 유지해주는 믿을 수 있는 선수가 더 선호되기 마련이다.

● 은퇴 후에도 영감님의 판독기는 여전히 가동 중이다. 프리미어리그는 이달의 감독상, 선수상, 그리고 이달의 골 수상자를 매달 발표하는데, 수상자 선정에 참여하는 전문가 패널 구성단에 알렉스 퍼거슨 경과 퍼디난드가 포함되어 있다. 참고로, 사상 처음으로 16/17 시즌에는 일반 팬들의 투표도 반영되고 있다. 팬 투표는 전체 결과에 10%로 반영. 또한 이달의 선수상에 한해서는 프리미어리그 20개 클럽의 주장들 역시 투표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본 책 이후에 Leading이라는 책을 하나 더 발간했다. 이 두 권의 책은 영국, 유럽 내에서 축구 서적 중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도서다.

4. 로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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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스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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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만 몇 년째. 현실은 우승. 그것도 2위와 승점 11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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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감독놀음. 감독이 퍼거슨이야.[2]
재정적인 악조건 속에서도 시즌 내내 로테이션을 성공시키며 팀을 우승시킨 퍼거슨 덕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는 PIK 부채를 모두 정리할 수 있었다. 물론 퍼거슨이 마냥 망한 팀에서 오로지 감독빨로만 우승했냐면 그건 아니고 위상 대비 상대적 지원 측면에서 그렇다는 소리이다. 글레이저가 맨유를 인수하는데 사용한 대부분의 자본은 맨유 구단의 자산을 담보로 잡고 빌린 차입금으로부터 나왔고, 이것은 연간 6천만 파운드의 이자를 발생시켰다. 나머지 금액은 PIK 대출로부터 나왔는데, PIK에 대해서는 맨유 구단은 이에 대해서는 갚을 책임이 없고 이 대출은 모기업 Red Football이 가진 맨유 구단의 지분을 담보로 잡고 빌린 것이다. 이 PIK 대출의 이자율은 연간 14.25%이다. 글레이저 가문은 PIK 대출을 맨유를 인수한 첫 5년 동안 원금을 상환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0년 1월 맨유는 5억 파운드(7,500억 원)에 달하는 채권 발행에 성공하였으며, 2010년 4월까지 PIK 대출은 2억 파운드(3,400억 원) 가량 남았고 이것은 2010년에 알려지지 않은 방법으로 모두 상환되었다.

퍼거슨이 은퇴한 이후 돈을 더 많이 쓰는 맨유가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3][4] 퍼거슨이 유스에서 선수를 기용하고 발굴해내고 같은 리그 하위권 팀에서 영입을 주로 하던 것과 대조되게, 퍼거슨 이후의 맨유는 레알 마드리드 CF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주역인 앙헬 디 마리아, 에레디비시에서 득점왕을 차지했던 유망주 멤피스 데파이,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좋은 활약을 하던 헨리크 미키타리안 등 이름값 있는 선수들을 꽤나 많이 영입했으나 모조리 실패했다.

심지어 미키타리안과 스왑딜로 데려온 알렉시스 산체스마저 실패함과 동시에 감독들마저 우승권은 커녕 챔스권도 간당간당한 성적을 유지하면서 암흑기에 빠져들 기색을 보였고, 주제 무리뉴UEFA 유로파 리그 우승을 일구어 냈으나 팀 성적이 추락하며 경질당했다. 이후 퍼거슨 밑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누구보다 맨유를 잘 아는 올레 군나르 솔샤르가 감독으로 부임하며 이름값이 아닌 맨유에 필요한, 맨유에서 진심을 다해 뛸 선수를 영입하는 정책으로 바꾸면서 다시 재건의 기미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당시 톰 클레벌리, 조니 에반스 등을 데리고도 우승을 일구어내던 퍼거슨의 위상을 알 수 있다. 물론 당시에도 최전방 스트라이커는 최고 수준으로 항상 준비해왔던 퍼거슨이였으나, 미드필더진은 은퇴를 준비하던 라이언 긱스폴 스콜스를 억지로 붙잡아둘 정도로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프리미어 리그가 최고의 선수들이 즐비할 뿐만 아니라 승격팀마저 타 리그 수준급 에이스급을 영입할 만큼 부유한 리그 상황을 생각하면 더욱 더 대단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래서인지 퍼거슨의 은퇴 이후 큰 영입 없이 팀을 이끌다가 성적 부진으로 경질당한 데이비드 모예스가 사실 명장이 아니냐 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퍼거슨이니까 그 스쿼드로 우승했지 그 스쿼드로 그만큼 한 것도 기적이라는 얘기다.

다만 공격수만큼은 월드클래스에 가까운 선수를 보유하려는 노력을 보여줬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오프 더 볼이 뛰어난 타고난 골잡이 유형의 선수를 최소 1명 이상 보유하려고 했다.[5][6] 멀티 포지션 기용까지 동원하여 윙 포지션만큼은 뎁스가 모자라는 일이 없도록 했다.] 마크 휴즈, 에릭 칸토나, 앤디 콜, 솔샤르, 뤼트 판니스텔로이, 웨인 루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카를로스 테베스, 로빈 반 페르시 모두 공간 활용을 이해하고 마무리 능력은 최고라고 평가받았던 공격수들이다.[7] 이러한 머리가 좋고 마무리가 뛰어난 공격진들이 있었기 때문에 퍼거슨은 패널티 박스까지 공을 가지고 가는 빌드업에 집중하였고, 맨유 특유의 중앙 수비수가 중앙 미드필더에게 공을 주고 그 공을 반대편 측면의 윙어에게 넘겨서 압박이 덜한 측면 공간으로 안전한 사이드 체인지를 이룬 뒤 페널티 박스로 크로스를 해서 그걸 귀신같이 최고의 공격진들이 넣어버리는 플레이로 승리를 챙겨오는 전술을 짤 수 있었다.

또한 중앙 수비수들이 공을 잡는 상황에서도 언제든지 수비진이 복귀할 수 있게 하프라인 아래에 풀백들을 배치해서 상대의 역습을 저지하는 빌드업 전술은 맨유의 수비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 흔히 맨유 팬들도 잘하고 있지 않은 거 같은데 왠지 경기는 이기고 있다고 평가하는 경기가 많았던 것도, 빌드업이 매우 효율적이라 화려한 플레이가 없이 공을 패널티 박스로 가져가고 그걸 귀신같이 넣어버리는 뛰어난 공격수들과 철저한 역습 방지까지 조화가 이뤄져서 계속 상대의 공격을 가드하다가 몇 번 묵직한 공격을 날려서 상대를 쓰러트리는 식의 경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5. 진화하는 감독

알렉스 퍼거슨이 갱신해 왔던 신화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으며, 그는 유럽 축구에서 나타난 전술적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잘 취합하여 완성된 형태로 선보이는 감독이다. 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마지막 시즌의 전술 변화, 이전까지 주 포메이션으로 사용하던 442에서 4-2-3-1 내지는 4-5-1로 포메이션을 변경하고 테크닉있는 공미를 위주로 한 점유율을 중시하는 전술을 도입하면서 세계적인 트렌드를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고 또다시 딱히 강해보이지 않는 스쿼드로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거뒀다.

아마 계속 현역이었다면 전방압박과 라 볼피아나와 센터백들을 통한 후방 빌드업도 흡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 스리백도 성공적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위의 서술들을 읽다보면 슬슬 눈치챘겠지만 딱히 본인만의 전술적인 철학이 있는 감독은 아니었다. 많은 축구팬들이 '퍼거슨하면 생각나는 전술, 경기 스타일이 있느냐?'라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누구보다 인심 장악, 동기 부여에 뛰어난 감독이었고 전술가로서는 본인의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고 늘 새로운 전술 트렌드를 제대로 이해하고 본인의 전술에 더하는, 마치 마인 부우같은 감독이었다. 퍼거슨의 팀이 늘 우승 경쟁을 해왔던 것은 이런 변화를 수용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8]
셀틱의 10분의 1도 안되는 금액으로 수십 년간 이어진 셀틱과 레인저스 양강 체제를 무너뜨렸다.
UEFA 클럽 랭킹 106위였던 에버딘을 6위로 올렸다.
● 13살에 데이비드 베컴을 스카우팅. 이후 베컴은 맨유를 넘어 잉글랜드를 상징하는 세계적인 아이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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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런던 올림픽 홍보대사, 베컴
헤이젤 참사UEFA 리그 랭킹 3위였던 영국 리그가 한 순간에 29위까지 밀려나며 추락. 헤이젤 참사로 잉글랜드 전체 클럽들이 5년간 유럽 무대를 금지당했고 우수한 용병도 떠났다. 캄프 누의 기적을 일으키며 트레블을 달성, 박살나버린 영국 리그를 캐리했다. 팀의 핵심으로는 7명이나 되는 유스 출신이 뛰고 있었다.
캄프 누의 기적으로 가장 극적인 트레블을 달성했다. 경기 종료 직전 3분 안에 그것도 교체선수들이 들어와서 2골이나 넣으며 역전하는 드라마틱한 경기 스토리를 만들었다.
● 슈퍼스타 베컴의 탄생으로 클럽의 가치가 상승하면서 거부들이 영국 리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글레이저가[9]맨유를 2005년에 인수했다.[10] 그러나 대부분 인수자금은 구단자산을 담보로 빌린 것으로 부채가 없었던 맨유의 재정이 단기적으로 악화되었다. 이러한 재정적인 상황 속에도 '로테이션' 신공과 감독빨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지금 맨유의 재정은 안정된 상태로 최근 폴 포그바로 월드레코드, 리그레코드, 클럽레코드를 동시에 갱신해 화제를 모았다.

퍼거슨이 26년간 만들어낸 브랜드 이미지는 오늘날 메가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있게 했다. 맨유는 미국 자동차 회사 GM의 쉐보레와 유럽 축구 스폰서십 역사상 최대 금액의 스폰서십 계약을 체결했는데 2014-15 시즌부터 7년간 무려 5억 5,900만 달러(한화 약 9,000억 원)에 달하는 대형 딜이다.

6. 매우 유동적인 선발 라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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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5-0 위건 애슬레틱 FC (공격수 2명 미드필더 6명 수비수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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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fL 볼프스부르크 1-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공격수 2명 미드필더 7명 수비수 1명)[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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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 유나이티드 FC 0-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공격수 4명 미드필더 4명 수비수 2명)[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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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1 레알 마드리드 CF[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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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0 아스날 FC (공격수 2명 미드필더 1명 수비수 7명)[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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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쿼드로 승점 11점차 2012-13 시즌 EPL 우승[16]
미드필더였던 선수들을 다 수비에 몰아넣어도 아스날 등을 상대로 승리하거나 지금 보면 어떻게 저런 멤버들로 우승을 하지? 라는 생각을 갖게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것을 보면 정말 천재.[17] 이것들말고도 2009-2010 시즌 중후반 박지성을 공격형미드필더처럼 중앙에서 써먹는 전술로 재미를 본 적도 있다. [18]

선발라인업뿐 아니라 경기중에도 포지션을 파괴하는 운영을 여러번 선보였는데 이런식으로 승리한 경기도 많지만 이런 운영을 해서 진 적도 많다. 2010-2011시즌 박지성의 아시안컵 종료후 복귀전인 웨스트햄전에서 에브라의 핸드볼 2번으로 0:2로 밀리자 공미로 나온 긱스를 레프트백으로 놓고 그 자리에 최전방의 루니를 놓고 치차리토를 넣은 후 또 왼쪽의 박지성 자리로 루니를 옮기고 베르바토프를 투입해서 루니의 헤트트릭으로 역전승했다. 후반기 아스날전에는 경기가 안 풀리자 박지성ㆍ루니를 중앙미드필더로 넣었는데 패했고, 2011 UCL 결승에서도 스코어에서 밀리자 라이트백 파비우 자리에 발렌시아[19]를 내리고 나니를 넣고 중앙의 긱스와 왼쪽의 박지성의 위치를 바꿨지만 패했다.

7. 리더십에 대한 평가

7.1. 포용력

퍼거슨은 항상 팀의 핵심 에이스라고 생각되는 선수들을 우대하며 감싸기 위해 노력했다. 몇몇 선수들이 사고를 쳐도 축구만 잘한다면 무조건적으로 감싸며 우쭈쭈해주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전략적인 행동이었다.

데이비드 베컴은 어린 시절부터 퍼거슨을 존경했고, 아버지처럼 믿으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퍼거슨은 선수들과 농담도 잘하고 경기에 승리하면 입이 귀에 닿을 정도로 큰 웃음도 짓는 등 선수들과 가까이 하면서도 요령껏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오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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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네빌과 나는 오랫동안 퍼거슨 감독 밑에서 축구를 해왔기 때문에 그가 선수들을 기용하는 교묘한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퍼거슨 감독은 주전에서 제외할 선수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잘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퍼거슨 감독의 태도만 가지고도 경기 출전 여부를 알았고, 그것을 가지고 우스갯소리를 하고는 했다. 이를테면 그 주에 감독이 유난히 신경을 써주면..."게리, 감독이 무척 신경 써주는데, 이번 경기는 분명히 못 나갈 것 같아." 라는 말을 자주 했다.
데이비드 베컴
퍼거슨 감독은 내가 할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선을 확실하게 정해준다. 꼭 우리 엄마 아빠같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내가 퍼거슨 감독을 처음으로 본 건 내가 13세 때 14세 이하 경기를 뛰고 있을 때다. 경기 후 퍼거슨 감독은 내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잘했다. 꼬마야. 앞으로 계속 그렇게 하면 나중에 큰 선수가 될 수 있을거야.' 나에게 그 말은 엄청난 말이었다. 퍼거슨 감독은 그렇게 유소년 선수들이 뛰는 곳에 자주 나타나 그들을 격려해주고는 했다.
웨스 브라운
퍼거슨은 그의 제자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심지어 그가 내보내야 했던 선수들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한 번은 그가 다음 시즌에도 남을 수 있을지 걱정하던 어린 선수가 있었는데, 그는 슬프게도 맨유를 떠나게 되었다. 퍼거슨은 직후 자신이 다른 클럽을 구해주겠다고 했고, 10분 동안 그는 전화를 몇 번 걸더니 그 선수의 계약을 따냈다. 그가 그 선수에게 미안함을 느끼기도 전에 그 선수의 다음 팀이 결정된 것이다.
(FA의 유스 규정에 대해) 프레이저 캠벨, 키에런 리차드슨, 필립 바슬리, 라이언 쇼크로스 등 프리미어 리그에서 활약하는 맨유 유스 출신은 상당수지만, 맨유의 눈높이에 맞는 선수들은 아니었다. 빛을 본 선수는 이들보다 훨씬 선배인 대런 플레쳐 이후 조니 에반스, 최근엔 대니 웰벡, 톰 클레벌리 정도다. FA의 유스 규정은 최악이었다. '90분 룰(90-minute rule)'은 유스 시스템을 옭아맸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들을 찾기란 어려웠다.
90분 룰이란 각 클럽 유스 아카데미에서 1시간 30분 이내에 거주하고 있는 유스 선수들과만 계약할 수 있다는 조항. 이 룰로 인해 프리미어 리그의 클럽들은 유망주 영입에 상당히 애를 먹었다. 이 규정은 많은 클럽들로부터 반발을 샀고, 결국 2011년경에 폐지되면서 종전의 유스 계약 방식으로 회귀했다. 출처
게리 네빌은 레딩의 호텔에서 퍼거슨이 몇 명의 선수들과 맨유의 유스 팀에 있다가 지금은 다른 팀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을 쭉 적어내려가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 명단은 굉장히 길었는데 무려 60명에 달했다고. 퍼거슨은 이들을 모두 기억하려고 했다. 그에게는 어린 선수들을 퍼스트 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이었는데, 이에 못지 않게 중요했던 것이 비록 맨유에서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그 선수들이 축구 선수로서 성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퍼거슨의 아래에서 맨유 선수로 뛰고 나면 클럽을 떠나게 되더라도 맨유 선수로 남게 되는 것이다.

7.1.1. 에릭 칸토나

칸토나는 그간 이곳저곳에서 말썽을 일으켰던 트러블 메이커였다. 실력은 뛰어났지만 그를 감당할 수 있는 구단이 없었다. 충성심은 애초에 바랄 수도 없었다. 마르세유와 계약을 할 시 칸토나는 당시 마르세유 회장이었던 베르나르 타피에게 대들었으며, 타피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헤어진 뒤 나는 내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칸토나가 제어가 불가능한 선수라는 것을 그 때 이미 알고 있었다.
칸토나를 프랑스 내에서 원하는 클럽은 없었다. 그러던 중 전력 증대가 급했던 리즈 유나이티드가 칸토나를 영입했고, 칸토나는 리즈에게 18년 만의 우승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리즈의 감독이었던 하워드 윌킨스와의 불화로 맨유에 입단했다. 당시 리즈는 칸토나를 120만 파운드에 시원하게 넘겼다.

칸토나는 프랑스 축구계의 앙팡테리블이라고 불리던 존재였다. 남다른 카리스마와 골에 대한 집중력, 공간 창출 능력을 겸비한 공격수였지만 프랑스 대표팀 감독의 전술을 공개 석상에서 비난하거나 심판에게 유니폼 상의를 벗어 던지는 등의 행동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세간의 평가와 다르게 칸토나는 지독한 연습벌레였다. 팀 훈련 외에도 개인 훈련을 거르지 않는 성실파였는데, 수위가 워낙 혹독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장기는 절묘한 볼 컨트롤과 페인팅, 페널티 박스 외곽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중거리포였다. 칸토나는 출중한 기량으로 찬사를 많이 받았지만 여러 가지 사건을 벌이며 신문 기사 1면에 단골로 이름을 올렸다.

이러한 사고들 가운데 가장 큰 대형 사고는 1995년 1월에 터졌다.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경기 도중 상대 선수를 향해 킥을 날린 칸토나는 퇴장 명령을 받아 필드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경기장에서 나가는 도중 상대 서포터로부터 패드립[20]을 들은 칸토나는 관중석으로 돌진해 쿵후를 연상하게 하는 이단 옆차기를 날리는 행동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칸토나는 2주간의 구류 처분을 받았고, 결국 쿵후의 제왕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과 함께 9개월간의 출장 정지와 120시간의 봉사 시간을 채워야 했다. 당시 모두가 칸토나를 비난했고 필드를 평생 밟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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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토나가 있으면 우승했고 칸토나가 없으면 눈앞에서 트로피를 놓쳤던 맨유
하지만 단 한 사람만이 온갖 비난을 감수하고 칸토나의 편에 서있었는데, 바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었다. 결국 퍼거슨과 팬들의 지지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었던 칸토나는 달라졌는데, 이 시기쯤 맨유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며 맨유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것이다. 징계 기간 동안 인테르가 칸토나에게 러브콜을 날렸는데, 칸토나는 "나는 맨체스터에 뼈를 묻겠다."라고 말하며 이적 제안을 거부했다.

그리고 1995-96 시즌, 9개월간 필드를 떠나있었던 칸토나가 합류했다. 당시 맨유에는 팀의 주축이었던 폴 인스가 팀을 떠났고, 주전이었던 마크 휴즈와 칸첼스키스도 타 팀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퍼거슨의 아이들이라고 불리는 라이언 긱스게리 네빌, 필 네빌, 폴 스콜스, 니키 버트, 데이비드 베컴 등의 유망주를 기용했을 때였다. 재능은 뛰어나나 어린 선수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카리스마가 필요했고 칸토나가 적임자였다. 칸토나는 승부욕과 근성, 특유의 카리스마로 상대를 압도하고 동료들을 이끌었다. 페테르 슈마이켈로이 킨도 칸토나 앞에서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결국 칸토나는 퍼거슨의 아이들과 함께 1996-97 시즌 리그 2연패를 달성했다.
1995년 어느 날 아침, 주장인 스티브 브루스가 15,000파운드짜리 수표를 들고 드레싱룸에 나타났다. 맨유 퍼스트팀 선수들이 축구 비디오에 다 같이 출연했는데, 이게 그 출연료였고 이 돈은 18명이 나눠 가져야만 하는 돈이었다. 똑같이 나눌지 출연 비중으로 각자 나줄지. 대체 어떤 방법으로 18명이서 이 돈을 나눠 가질지에 대해서 옥신각신하다가 결국에는 다수결 투표 끝에 Winner takes all 한 사람에게 몰아주기로 결론이 났다. 물론 여기에 응하기 싫은 사람도 선택권을 줬는데, 800파운드(약 150만 원)를 자기 몫으로 챙기고 내기에서 빠질 수 있었다. 당시 800파운드라는 돈은 어린 선수들(데이비드 베컴, 게리 네빌, 필 네빌 등)에게는 월급의 반에 해당되는 엄청 큰 돈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내기 대신 800파운드를 선택했다. 어린 선수들 중에는 오직 폴 스콜스와 니키 버트, 이 두 사람만이 내기에 참가해 잭팟을 노려보기로 결정했다. 12,000파운드, 과연 이 돈은 누구에게로 갈 것인가. 마침내 내기에 참가한 각 선수들의 이름이 적혀있던 쪽지를 모자에 넣어 섞고 그 중 하나를 뽑았을 때, 모자 속에서 나온 쪽지에는 에릭 칸토나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승자 칸토나는 그 12,000파운드 수표를 집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칸토나는 수표 두 장을 손에 들고 나타났다. 거기에는 폴 스콜스와 니키 버트, 이 두 선수들의 이름이 각각 적혀져 있었다. 칸토나가 말하길 "이 돈은 자칫하면 한 푼도 받을 수 없는 위험한 내기에 용기내어 참가한 두 어린 선수들에게 내가 주는 상이다." 이게 바로 진짜 칸토나의 모습이다. 무슨 행동을 할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특별한 클래스가 있으며 그 자신보다 훨씬 더 간절히 그 돈이 필요할 두 어린 선수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람.
로이 킨, 본인의 자서전에서 칸토나에 대해 쓴 말
칸토나가 맨유에 있던 기간 동안 맨유는 그가 없던 시즌은 정말 너무도 아쉽게 승점 1점차로 트로피를 눈앞에서 놓쳤다.[21] 올드 트래포드의 팬들은 칸토나가 있고 없고가 얼마나 다른지 경험했고 그의 영향력을 온몸으로 느꼈기에 그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었고 추앙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베컴도 FA컵 우승을 하고 다 함께 축하 파티를 했는데, 베컴의 아버지가 칸토나랑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칸토나와 한 테이블에서 이야기한다는 사실에 얼마나 흥분했는지 자신의 아버지가 바로 저 순간을 위해서 자신을 그렇게 미친 듯이 연습시켜서 맨유 선수를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칸토나는 1997년 5월 11일 웨스트햄과의 경기를 끝으로 더 이상 경기를 뛰지 않았다. 나이가 많았거나 실력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만 31세에 불과했다. 단지 그는 정상에서 멈추고 싶었던 것이다.[22]
나는 팬들이 나의 이름을 연호하는 노랫소리가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내일 그 소리가 멈출까 봐 두려웠다.
우리가 마지막 대화를 나눈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네. 그리고 난 늘 내가 너에 대해 품고 있는 존경의 표시로 이 편지를 꼭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어. 우리가 훈련을 다시 시작했을 때, 난 다시 너의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오길 기다려왔어. 그런데 그건 단지 나의 희망이었고 현실이 아니었지. 우리가 Mottram에서 만났을 때, 난 너의 눈의 눈을 보고 알 수가 있었어. 맨유에서의 너의 시간이 끝났음을 말이야. 그래도, 난 여전히 네가 그런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너의 아버지와 나의 충고를 들었어야 했다고 생각해, 느긋하게 생각하면서 말이지. 한 가지 네게 바라는 건 늘 활동적이고 몸 상태를 최고로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이야. 나는 내가 32살의 나이에 스털링 샤이어의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를 기억하고 있어. 그땐 난 늘 훈련과 선수에 대한 코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을 했어. 나 자신의 몸 상태가 어떤지에 대해선 잊어버리고 말이야. 그리고 6년 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을 때, 난 다시 나의 예전의 몸 상태를 되찾기 위한 훈련을 시작했어. 끔찍한 시간이었지. 그러니까 너도 너의 몸 상태를 늘 최고조로 유지시켜야 할 거야. 난 당연히 네가 우리의 매 경기 결과들을 지켜볼 것이라는 걸 확신해. 그리고 너를 대체하기 위한 선수로 셰링엄을 데리고 온 것 또한 알 거야. 우리가 꽤 잘하고 있다는 거 알 수가 있겠지? 그런데 테디 셰링엄은 그가 토트넘에서 뛰었던 자리를 찾는데 힘겨워하고 있고, 가끔 너무 깊숙한 위치에서 뛰려는 경향이 있어. 그래서 우린 뭔가 수정을 가해야 할 것 같아. 새로운 선수들은 가끔 우리의 레벨에서 뛰는 것이 정말 힘들다는 것을 잘 깨닫지 못해. 매 경기가 마치 대회 결승전에서 만난 상대들과도 같잖아. 그래서 난 테디 셰링엄이 우리 팀을 위해 해내길 기대하고 있어. 난 여전히 기억하고 있어. 우리가 시즌 말에 고민했던 거 있잖아. 맨유에겐 분명 탑클래스의 공격수가 필요하고 그러한 공격수의 부재는 분명 문제로 남을 거라고. 맨유의 재정 규제가 앞으로도 늘 우리가 최고의 선수를 OT에 데리고 오는 데에 있어 늘 걸림돌이 될 거니까. 바로 그 급여 체계 때문에. 그런데 생각해보면 또 웃긴 거지. 왜냐하면 네가 바로 그 탑클래스의 선수인데. 그럼 너를 정상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또 다른 선수를 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되니까. 내가 만약 젊었다면, 분명 좀 다르게 바라봤을 수도 있어. 어찌됐든, 난 팀을 짊어 지고 나아가야 하고. 어떠한 마음의 장벽도 담아두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난 항상 내 선수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고. 계속 그러길 희망해. 그리고 늘 어린 칸토나를 발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야. 정말 꿈같은 일이 되겠지! 편지를 마치면서, 앞으로도 우리가 담소도 나누고, 한잔도 하고, 아님 뭐 식사라도 하고... 그렇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고 싶어. 안 그래도 클럽이 다가오는 만찬에 널 초대했다는 얘길 들었어. 난 그날 만남에 대해 네가 이것저것 신경을 써줬음 싶어. 근데 뭐, 그런 것보다 여전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맨유에게 얼마나 훌륭한 선수였고. 그리고 선수로써 네가 나를 위해 행했던 모든 노고에 대해 얼마나 감사함을 가지고 있는지를 상기시켜주는 거야. 네가 그냥 차 한잔을 하러 오든, 성대한 행사같은 거 말고 그냥 친구로 대화를 하러 오든, 넌 언제든지 OT에서 환영받을 거야. 사실 그러한 단순한 것들이 내겐 가장 의미 깊은 일이 될 거고. 에릭, 넌 네가 날 필요로 할 때 언제든지 날 찾을 수 있어. 그리고 이젠 넌 더 이상 나의 선수가 아니지만, 너에게 소중한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칸토나의 은퇴 당시 퍼거슨이 쓴 편지

7.1.2. 웨인 루니

당신들은 19살 때 어떤 청소년이었지? 나는 글래스고에서 노동자 시위에 참가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루니의 난폭한 성격에 대해 기자들에게 질문을 받자 퍼거슨이 한 대답[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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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동 루니 시절
과거 퇴장 머신이라고 불리던 악동 루니. 루니의 잦은 성질 폭발에 화가 난 퍼거슨은 당근과 채찍을 내리며 공을 들였고, 결국 루니는 퍼거슨의 의도대로 맨유의 주전 공격수로 자리잡아 팀을 이끄는 기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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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님 루니 쓰담쓰담 출처
(루니의 이적설이 있었을 때) 오늘 루니가 좀 주위를 둘러보길 바랍니다. 여기 말고는 갈 곳이 없다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군요. 여기 말고는 갈 곳이 없어요. 유럽의 다른 클럽으로 떠난 선수들을 본 적이 있죠. 그리고 그들은 항상 모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돌아오고 싶어 하더군요.
게리 네빌#

7.1.3.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호날두는 입단 당시 스포르팅에서 썼던 번호인 28번을 원했지만, 퍼거슨에게 받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7번은 그로서는 큰 부담감이었다.
2003-04 시즌 리그 29경기 4골 / 맨유 리그 3위
2004-05 시즌 33경기 5골 / 맨유 리그 3위
2005-06 시즌 33경기 9골 / 맨유 리그 2위 (초기 스탯)
당시 호날두는 거친 프리미어 리그에서 다소 고전하는 모습을 면치 못하면서 언론은 퍼거슨에게 오류였다고 보도를 쏟아냈다. 하지만 퍼거슨은 호날두는 세계 최고가 될 테니 지켜봐 달라며, 그는 잠재력이 있는 선수이며 나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라며 언론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이렇듯 퍼거슨은 호날두에게 무한한 신뢰하는 모습을 보이며 언젠가는 최고가 될 것임을 자부했다.

또한 호날두가 선수 생활 최대 위기를 맞았을 때 끝까지 그의 옆에 있었던 것도 퍼거슨이었다. 그는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웨인 루니의 퇴장 때 심판에게 가서 루니의 퇴장을 유도했다는 이유로 잉글랜드 언론과 국민들의 엄청난 비난거리가 되고 말았다. 심지어 홈에서도 관중의 야유가 쏟아졌다. 거기다 이전부터 프리미어 리그에서 최고 수준의 시뮬레이션 액션 메이커인 일명 'Diver'라고 불리며 맨유를 제외한 타 팀의 수많은 팬들에게 집중 포화를 받고 있었던 상황이어서 호날두는 순간적으로 이런 돌출발언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 뛰기 힘들다. 맨체스터를 떠나야 할 것 같다. 나는 아무도 해치지 않았는데 (잉글랜드 팬들과 언론이) 나에게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2, 3일 안에 어디로 떠날지 결정하겠다. 엄마 당분간 잉글랜드에 오지마세요.[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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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크를 다트판으로 만들 정도로 험악했다.
그때 호날두를 감싸고 나선 이가 퍼거슨이었다. 퍼거슨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루니의 퇴장은 호날두의 잘못이 아니라고 거듭 주장했다. 이에 호날두는 잉글랜드 팬들의 홀대를 감수하며 맨유는 항상 자신을 지지했고, 자신을 위해 존재했다면서 자신은 맨유에 진 빚을 갚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호날두는 자신을 알아주고 믿어주는 퍼거슨에게 어릴 때 받지 못한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던 것이다. 결국 호날두는 맨유에 잔류했고, 카를로스 케이로스 코치의 말마따나 훈련 종료 후에도 한두 시간 더 개인기 연습을 하는 열성을 보인 끝에 현재 최고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출처1 출처2 출처3 출처4 출처5 출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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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기타임. 각도까지 제대로 배운 애제자
퍼거슨은 호날두를 얼마나 데리고 있을지 케이로스 코치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케이로스 코치는 "알렉스, 당신이 쟤한테서 5년간 뽕을 뽑는다면, 대박입니다. 포르투갈 선수들이 타국(예외: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같은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으로 17살에 진출해서 5년 동안 머물렀던 전례가 없어요."라고 말했다고. 퍼거슨은 회고하건데 상당히 괜찮은 결과물이었다고 평했다.
퍼거슨은 내게 정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에요. 지금까지도 우리는 정말 좋은 관계를 맺고 있고 엄청 자주 대화해요. 서로 문자도 보내구요. 우리는 우리의 감정 상태에 대해 얘기해요. 예를 들어 최근에 UEFA 슈퍼컵에서 우승했을 때 퍼거슨이 제게 'Man of the Match'를 시상했죠. 리스본에서 챔스 우승을 했을 땐 내가 도핑 테스트를 받으러 갈 때 그가 동행했어요. 그는 내가 정말 존경하는 사람이고 친한 친구예요. 함께한 모든 감독님들 중 우정을 나눈 사람은 퍼거슨이 유일해요. 펠레그리니와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했고 안첼로티와도 좋은 관계를 갖고 있어요. 하지만 진정한 관계를 맺고 주기적으로 대화하는 사람은 퍼거슨뿐이에요.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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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현재까지도 호날두와 퍼거슨은 서로를 아끼고 있다.

7.2. 선수들과의 마찰

퍼거슨은 클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감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맨유라는 클럽은 항상 감독이 가장 중요한 인물인 곳이라는 신념을 항상 유지해왔다.
내가 더 이상 맨유의 억만장자 축구선수들을 통제할 수 없으면, 난 끝난 목숨이다. 그래서 난 절대 통제력을 잃지 않았다.
(리빌딩에 대해) 열심히 뛰었던 선수를 내보내는 게 나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모든 증거는 필드에 있다. 선수의 기량이 저하되고 있는 걸 본다면, 2년 뒤에 어떨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축구 매니지먼트는 결국 선수에 관한 모든 일이다. 감독은 내가 선수들보다 잘 뛸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선수들도 내가 감독하면 더 잘하겠다고 생각한다.
(리빌딩 때문에 퍼거슨이 판니스텔로이를 쫓아내듯 이적시켜 버린 것에 대해) 퍼거슨이 새로운 팀을 리빌딩 하고 있을 때, 그는 기꺼이 그와 같은 일을 하죠. 그에게는 팀이 최우선이에요. 그는 항상 그 말을 했고 그가 제일 많이 반복한 말이죠. 그가 한 일은 충분히 납득할 만 했어요. 저도 받아들였구요. 저는 레알 마드리드로 떠나 그곳에서 훌륭한 4년을 보냈고, 그도 그의 클럽을 더 성장시켰죠. 유나이티드에 대한 내 종합적인 느낌은 이거에요. 그곳에서 훌륭한 5년을 보냈고, 감독님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 오늘(퍼거슨 동상 오픈 행사) 돌아오기를 원했다는 거죠. 그가 제게 줬던 기회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거든요. 물론 결별할 때의 방식에 대한 감정들이 있지만, 그는 선수들에게서 최고를 이끌어 내는 사람이에요. 저한테도 마찬가지 일을 했구요.
뤼트 판니스텔로이

퍼거슨은 선수들을 다룰 때는 어느 정도 관용의 모습을 보인다. 한 번씩 선수들끼리 펍에 가서 술을 마셔도, 나이트클럽에 가서 놀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한 번씩 팀플레이에 어긋나는 모습을 보이더라도 두세 번의 질책 이외의 별다른 반응은 없다. 어쩌다 그런 플레이가 비난을 받을 때면 한 번씩 앞장서서 선수의 플레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해 주고 경쟁에서 밀려서 팀을 떠나게 되더라도 최대한 곱게 보내주는 쪽을 택한다.

하지만 아버지 같이 인자했던 퍼거슨도 선수단의 위상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터질 때만큼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다.

7.2.1. 로이 킨

대표적인 예가 MUTV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팀원들을 디스했던 로이 킨인데, 아무리 킨이 주장이라지만 특정 선수들에게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대놓고 디스를 하는 데에 있어서 퍼거슨은 킨이 감독의 위치를 침해한 것으로 여겼고 결국 키노게이트가 터진 지 일주일 만에 킨은 맨유와의 계약을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
(유벤투스전 경기를 보고) 그날 로이 킨의 경기력은 내가 지금까지 본, 한 선수로부터 나온 가장 강인하고 인상적인 플레이였다. 그는 마치 '경기에서 지느니 탈진해서 죽어버리겠다'는 생각을 한 선수처럼 경기장의 모든 잔디를 밟고 다녔고, 바로 그의 그런 모습이 우리 선수들의 사기를 끌어올려 줬다. 그런 선수를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이 영광스럽다고 느꼈을 정도였다.[25]
로이 킨은 1인 엔진룸이며, 다른 선수들 2명이 할일을 혼자서 하는데다, 경기가 가라앉았을때 그는 혼자서 스타디움의 관중을 기립시키는 선수다. 내가 지도한 최고의 선수.
로이 킨은 내가 프리미어 리그에서 겪어본 미드필더 중에서 가장 터프했다. 우린 서로 자주 투닥거렸지만 그는 내가 정말 존경하는 선수로 남아있다. 로이 킨은 카리스마가 넘친다. 그는 자신을 위해 싸울 줄을 안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권리를 위해 싸우며, 그는 승리자로 남아있다.
파트리크 비에라
킨은 맨유에서의 짬밥이 커지면서 점점 라커룸의 실권을 장악하려고 했고, 그날 킨의 기분에 따라 라커룸의 분위기가 좌지우지 되었다고 한다. 결국 키노게이트[26]가 터진 것. 키노게이트가 터진 후 케링턴에 모여있는 선수들은 킨을 보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헤이", "와썹" 이라고 말하면서 몸을 풀었고, 선수들이 일부러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걸 본 킨은 폭발하며 "니들도 남자들이면 나한테 화났을꺼 아냐, 그럼 나한테 한놈이라도 먼저 와서 말을 하든가, 여태 가만히 있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그러고 있냐! 뭐라고 말들을 좀 해봐!"라고 말했다. 이때 퍼거슨이 나타나 조용히 하라고 했지만 킨은 물러서지 않았다. 둘은 합의 후에 전 선수단이 모인 자리에서 MUTV 비디오 인터뷰 테이프를 틀었고, 킨은 팔짱을 낀 채 그 자리에 산처럼 서서 함께 비디오를 지켜보았다. 퍼거슨은 주장으로서 팀의 사기를 저하시켰으니 사과하라고 했고, 이에 킨은 "나는 사과할 게 없다, 승리의 의지를 잃고 자신과 팀메이트들을 실망시킨 선수들은 스스로에게 사과해라"라고 대꾸했다. 결국 퍼거슨은 약 15일 동안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하고 고심 끝에 킨을 팀에서 떠나보낸다.
맨유를 떠나는 날 아침 나는 축구에 대한 사랑을 잃었다.
로이 킨
맨유를 떠난 킨을 영입한 당시 셀틱 FC의 감독은 퍼거슨의 제자인 고든 스트라칸이었다.[27] 영상 후에 킨이 선덜랜드 AFC의 감독으로 부임하자 퍼거슨은 맨유의 선수들을 보내주기도 했지만, 킨이 자서전에서 퍼거슨을 아주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아직도 이 둘의 사이는 굉장히 안 좋은 편이다.

7.2.2. 야프 스탐

자서전을 발표하며 팀원들을 디스했던 야프 스탐도 있다. 맨유 수비진의 핵이었던 스탐은 1999년 프리미어 리그, UEFA 챔피언스 리그, FA컵 우승을 차지하며 3관왕에 오르는 등 퍼거슨과 함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2001년에 터진 자서전 파문으로 인해 SS 라치오로 쫓겨나듯 이적했다.[28] 스탐은 집을 고치며 맨유 생활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이적에 힘들었다고 한다.
(스탐을 판 것에 대해 퍼거슨이 한 말) 라치오에게 내가 먼저 18.5m 오퍼를 넣었지. 그들은 "18.5m? NO, 16m? YES" 라고 했었고, 나는 거절할 수 없었어. 스탐의 나이가 벌써 30세의 나이였거든. 나는 만약 우리가 1년 정도 로랑 블랑을 얻을 수 있었다면...이라고 생각했어. 스탐이 이적한 뒤, 웨스브라운과 존 오셔 같은 젊은 선수들을 데려왔었지만, 그것은 완전히 실패였어. 야프와 나는 같이 잘 지내. 네덜란드의 아약스 토터먼트에서 있었던 마지막 시간에도 통화를 했어. 스탐과 나는 오랫동안 이야기했어. 괜찮았어.
스탐: 나는 클럽이 나를 이적시키기를 원하는다는 걸 알았어요 너무 빠른 이적 때문에 퍼거슨이랑 갈등이 생겼습니다. 어느날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전화 한통을 받았죠. 퍼거슨의 비서였어요. 그녀는 퍼거슨을 바꿔줬고, 영감은 '어디있니'라고 물었어. 내가 '집 근처 주유소'라고 말하니 그는 '거기서 기다려'라고 말한 뒤 곧장 차를 타고 내가 있는 곳으로 왔었죠. 집 근처 주유소까지 온 퍼거슨은 내게 '빨리 라치오로 이적해줄 수 없을까'라고 물어보았어요... 출처
또한 당시 스탐의 아킬레스건 부상도 이적에 영향을 끼쳤는데, 첫 두 시즌에 51경기씩을 소화하다가 바로 다음 시즌인 2000-01 시즌에는 평시즌의 절반도 못 미치는 23경기에 출전하는 데에 그쳤다. 이적 시즌인 2001-02 시즌에는 2경기에 나선 게 전부였다.
(은퇴 후 지도자 생활을 하며 퍼거슨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스탐) 지도를 하다 보면 왜 감독이 어떤 특정 시기에 확고한 결정을 내리는 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설령 선수가 부상을 달고 있으면 수개월 정도는 경기에 나설 수 없죠. 그리고 선수가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예전의 기량을 찾을 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선수는 거절하기 힘든 또 다른 클럽의 제안에 받아들일지도 모르죠.
(레딩의 공식 웹사이트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선수 시절 함께 일했던 감독들 중 누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느냐는 질문에) 알렉스 경은 이미 세계적으로 축구계에서 이름을 떨친 분이죠. 제가 맨유에 합류한 1998 시즌이에요. 하지만 그는 감독으로서도 계속 성장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과 일하면 감독으로서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는데 도움이 되는 경험을 쌓을 수 있죠.
야프 스탐
어렸을 때부터 맨유의 팬이었던 스탐은 은퇴한 지금도 맨유의 경기를 즐겨본다. 맨유에서 스카우트직으로 일한 적이 있으며, 2016-17 시즌에 레딩 FC의 감독으로 부임함으로서 임시직 혹은 영구직으로 프로 구단에서 감독직 자리를 얻은 퍼거슨의 여러 선수들 중 31번째 선수가 되었다. 언젠가 맨유의 감독이 되는 게 그의 꿈이라고 한다.

7.2.3. 폴 인스

퍼거슨이 맨유의 감독에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초창기 시절에는 맨유의 레전드 중 한 명인 폴 인스가 자신이 주전 경쟁에서 밀리는 것에 불만을 품고 퍼거슨에게 대들었는데[29]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인스는 다른 팀으로 이적했다. 맨유 팬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던 인스의 이적 때문에 맨유 팬들이 퍼거슨을 비난했는데도 퍼거슨은 폴 인스와의 뒷얘기를 함구했다. 당시 서포터스 협회는 '폴 인스 되찾기 캠페인'까지 벌였으나 퍼거슨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서포터스를 차분하게 설득하고 그의 뜻을 받아들이게 했다. 훗날 맨유의 다른 레전드인 스티브 브루스가 수십 년이 지난 후에 인스를 비판하며 알려지게 되었다. 하여튼 이런 인스도 이적 후 퍼거슨과 사이가 나쁘진 않았는지 퍼거슨 은퇴 발표가 나자 그를 기리며 칭송했다.
큰 충격을 받았다. 퍼거슨 감독이 이룩한 업적은 믿을 수 없는 것이며 그런 훌륭한 감독은 우리는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퍼거슨 감독이 2주 전쯤 나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2년 정도 더 맡는 문제를 논의했기 때문에 충격이 더 크다. 퍼거슨은 언제나 나를 마치 자신의 아들처럼 대했다.
폴 인스, 퍼거슨의 은퇴 소식을 접하고

7.2.4. 뤼트 판니스텔로이

에릭 칸토나 이후 최고의 포워드라는 평을 들었던 뤼트 판니스텔로이는 2000년대 초중반 맨유와 아스날의 라이벌리를 상징하던 선수였다.[30] 리그 득점왕 1회, 리그 우승 1회, 챔스 득점왕 3회로 당시 맨유를 상징하던 에이스였는데, 웨인 루니의 영입 이후 2005-06 시즌부터 출장 시간에 불만을 가지게 된다.[31]

도화선은 2005-06 시즌 칼링컵[32] 결승전이었는데, 당시 퍼거슨은 판니스텔로이를 선발에서 제외했고 교체로라도 출전시켜줄 것을 약속했으나[33] 끝끝내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결국 판니스텔로이는 퍼거슨에게 욕을 했다. 또한 그를 위로하기는 커녕 타 선수들을 챙기며 눈앞에서 우승을 챙긴 퍼거슨의 반응에 대해 판니스텔로이의 반응은 훈련에 불참하고 감독의 허락 없이 경기장을 이탈하는 등의 것이었으며, 퍼거슨은 그가 분위기를 흐리는 모습을 더는 지켜보지 못했다.
You XXXX. 판니스텔로이가 말했다. 난 항상 그것을 기억할 것이다. 믿을 수 없었다. 케이로스 코치가 그에게 달려들었고 덕아웃은 다루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다른 선수들은 그에게 '얌전히 굴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끝이었다. 나는 절대 그를 (예전 모습으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 사건 후, 그의 행동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또한 퍼거슨의 말에 따르면 판니스텔로이는 맨유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루니 같은 어린 선수들을 데리고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출처. 이후 2010년 판니스텔로이는 그의 행동에 대해서 후회했고, 이를 사과하기 위해 퍼거슨에게 연락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올드 트래포드 퍼거슨 동상 오픈 행사에도 참석하는 등 다시 화기애애한 무드를 연출했다.
2001-2006, 219경기, 150골을 축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감독 밑에서 달성했어. 유니크한 특권이었어.
여담으로 이렇게만 보면 판니스텔로이가 굉장히 꽁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사실 맨유 시절에는 박지성이랑도 친하게 지냈고 그 영향인지 이후 유럽 무대에 갓 진출한 손흥민이 팀에 적응할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도 했다. 손흥민이 함부르크 시절 판니스텔로이가 아니었으면 유럽 무대 적응도 못하고 힘들게 지냈을 거라며 감사를 표했을 정도.

7.2.5. 데이비드 베컴

지금까지 가르친 선수들 중에서 자기가 실수를 저질러도 그에 대해 요만큼도 신경쓰지 않았던 것은 데이비드 베컴 뿐이었다. 베컴은 자신이 끔찍한 플레이를 하고 있어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남자였다.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 재능이었다.
알렉스 퍼거슨, 본인의 자서전에서
그 어떤 선수도 퍼거슨에게 대체가 불가능한 선수는 없으며, '퍼거슨의 아이들'로 유명했던 애제자 데이비드 베컴도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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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보다 열흘 먼저 은퇴를 발표한 퍼거슨 감독과의 첫 사진을 찾은 베컴
"방금 이걸 찾았다. 참으로 오래 전 사진... 믿을 수 없이 뿌듯한 날이었다."

퍼거슨은 베컴의 아버지 테드, 베컴의 어머니 산드라와의 전화를 통해 베컴의 맨유행을 꾸준히 권했다. 베컴이 뛰는 모습을 보기 위해 런던에서 맨유의 경기가 있었을 때는 경기 전에 베컴을 드레싱룸으로 초대까지 했을 정도. 베컴의 아버지는 맨유의 팬이었고 특히 바비 찰튼을 좋아했다. 베컴의 미들네임은 로버트 조셉인데, 로버트는 바비 찰튼, 조셉은 조부에서 따온 것이다. 참고로 조부는 토트넘의 팬이었다고.
토트넘의 초대로 테리 베너블스(당시 토트넘 감독)를 만나러 갔었지만, 그 사람은 베컴이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테이블에 발을 올려둔 상태로 우리와 이야기를 나눴고, 계약을 요구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퍼거슨과는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퍼거슨을 만나기 위해 맨체스터로 갔을 때, 그는 이미 데이빗에 대한 모든 서류를 가지고 있었고, 그 날이 데이빗의 생일이라고 케이크까지 준비해뒀었습니다. 우리가 감독 자신과 맨유에게 중요한 인물인 것처럼 대했었죠. 열정이 넘쳤고, 우리에겐 미래에 대한 눈을 뜨게 해 준 일이었습니다. 계약에 대해서는 두 번 생각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토트넘에게 데이빗은 그냥 서류상의 숫자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맨유에게는 한 명의 사람이었지요..
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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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거슨 영감의 아버지 모드
베컴의 재능은 신이 주신 재능이다. 베컴은 영국 최고의 슈퍼스타이다
(은퇴 경기를 앞둔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베컴은 놀라운 선수였다. 자신을 재창조하는 능력이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어느 날 베컴은 휴가를 떠났는데, 퍼거슨이 전화를 걸어서 자기가 달던 등번호 10번을 뺏었다고 전했고 즉시 열받아서(?) 퍼거슨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었는데도 안 받아서 마음이 상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도 맨유의 등번호 10번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결국 베컴은 시무룩해진 채로 다시 팀에 돌아갔는데, 퍼거슨이 갑자기 7번을 달으라고 할 때 베컴은 너무 기뻤고 영광스러웠다고 한다. 맨유 7번은 에이스를 의미하기 때문. 그 당시 칸토나가 은퇴하고 난 후 7번이 비워져 있었고, 퍼거슨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베컴에게 7번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34][35][36]

이렇게 퍼거슨이 예뻐하던 베컴도 퍼거슨의 통제력을 벗어난 순간에는 맨유를 나갈 수밖에 없었다. 너무 가정적인 남자였던 베컴은 아내 빅토리아 베컴과 아들 브루클린 등 가족 문제를 때론 축구보다도 우선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컴은 이것을 보통 사람이 누리는 평범한 행복이며 축구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았다고 여겼지만 퍼거슨의 생각은 달랐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마치고 2002-03 시즌이 시작되면서 베컴과 퍼거슨의 갈등은 더 심해졌다. 갈비뼈 부상을 입고 여름 휴가를 떠난 베컴은 휴가지로 바로 가지고 않고 잉글랜드 대표팀과 함께 버킹검 궁전으로 가서 영국 여왕을 알현했다. 대표팀 일정이기 때문에 공적인 일로 여왕을 만난 것이지만 퍼거슨은 이것을 혼냈다. 부상을 당한 선수는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부상 치료에만 전념해야 하는데 휴가 도중 다른 일을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퍼거슨은 당시를 회상하며 베컴이 버킹엄 궁에 모습을 드러낸 걸 TV로 보았을 때 그가 맨유에 대해 얼마만큼이나 진심인 것인지에 의문을 느꼈다고 밝혔다. 이어 경기를 앞두고 아들 브루클린의 유치원 연극 공연에 참석했다가 훈련에 늦자 또 혼이 났다. 그러던 중 베컴은 퍼거슨과 긴 이야기를 할 기회를 얻었고, 이때 서로 간의 오해를 풀고 일시적으로 관계를 회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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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눈에 알 수 있는 치명적인 삼각관계
내게 큰 문제는...그가 빅토리아와 사랑에 빠졌고 그게 모든것을 바꿔 놓았다는 것이다. He was never a problem until he got married. He used to go into work with the academy coaches at night time, he was a fantastic young lad. Getting married into that entertainment scene was a difficult thing - from that moment, his life was never going to be the same. He is such a big celebrity, football is only a small part.

그러나 2월 16일 바로 그 유명한 라커룸 사건이 터졌다. 경기에서 패하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퍼거슨은 경기 후 라커룸에서 2번째 골을 허용한 것에 대해 갈갈이 날뛰며 욕설과 함께 화를 터뜨렸고 베컴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그 골이 자신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 베컴은 그것은 상대 선수가 미드필드에서 돌파해 넣은 골이 아니냐고 말했고, 퍼거슨은 경기 전 그것에 대해서도 베컴에게 말했고 베컴의 가장 큰 문제는 남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둘은 계속 말다툼을 벌였는데, 베컴 또한 역시 지지않고 퍼거슨을 디스했다고 한다.[37] 감독이 왕인 맨유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화가 난 퍼거슨은 앞에 놓인 축구화를 걷어찼고, 그 축구화는 의자에 앉아있던 베컴에게 날아가 베컴은 눈 부위를 맞아 피를 흘렸다. 이때 베컴은 이성을 잃고 퍼거슨에게 달려들었으나 팀 동료들이 제지해 약 1분 간의 소동은 끝났다. 팀 동료 라이언 긱스가 후에 밝힌 바에 의하면 이 사건 전에도 둘은 자주 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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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실에서 치료를 마치고 나온 베컴에게 퍼거슨은 이번 일은 정말 미안하며 일부러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며 사과를 했으나, 공개적인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베컴은 이를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으로 상황은 종료됐으나, 이후 사건의 자초지종을 베컴의 부인인 빅토리아가 언론에 공개해 버리면서 둘의 사이는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베컴은 유벤투스와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를 앞두고 팀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이번 사건은 잊어버렸다고 밝히고 경기에 전념하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경기에서 맨유는 승리했고 둘은 화해를 해 이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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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컴의 이적에 대해) 또한, 전에는 맨유를 위해 전력을 다하던 베컴의 폼이 현저하게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베컴은 내게서 4미터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었고 그와 나 사이 바닥 위에는 축구화가 놓여 있었다. 베컴이 X을 했고 나는 그를 향해 다가가다가 축구화를 걷어차 버렸다. 그 축구화는 베컴의 눈 바로 위에 맞았고 그는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에게 덤벼들려고 했다. 주변에 있던 선수들은 모두 그를 말리고 나섰고 나는 그에게 '너는 네 팀과 동료들을 실망시켰다. 할 말이 있으면 맘대로 해봐'라고 말했다. 그가 어떤 선수이든, 자신이 맨유라는 팀보다 더 큰 존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팀을 떠나야만 한다. 감독이 권위를 잃는 그 순간, 그는 팀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 팀은 선수들에 의해 돌아가게 되고, 그러면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이다.
내 인생에서 그렇게 자제력을 잃은 순간은 처음이었다. 내가 유나이티드에 합류했을 때 나는 그들을 떠나고 싶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클럽이 나를 팔 거라고 내게 말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레알 마드리드와 대화했다. 나는 내 꿈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됐고, 다른 팀과 대화를 해야만 했다. 그 후 2년 동안 맨유 경기를 볼 수 없었다. 처참했다. 맨유를 떠나는 것은 그렇게나 힘들었다.
난 단 한번도 맨유를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러나 클럽은 나를 팔려고 했고 때문에 떠날 수 밖에 없었어. 다만 난 맨유 아카데미로 들어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맨유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거지.
맨유에서 보낸 7년의 하루하루를 매일마다 그리워하고 있다. 맨유의 선수였던 시절과 팬들 그리고 여전히 그곳에 있는 친구들이 모두 그립다. 맨유는 항상 내 가슴에 있다.

베컴은 맨유를 떠나면서 프리미어 리그에는 맨유 외에 다른 클럽은 가지 않겠다고 말했고, 이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38] 말년에 이후 둘은 화해했고 PSG와의 경기 관람도 같이 하는 등 화기애애.[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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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꼭 꼽아야 한다면 처음으로 맨유와의 입단 계약서에 서명을 한 것입니다. 사실 그날이 내 생일이었고 퍼거슨 감독님은 나를 위해 생일 케잌을 준비했었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위해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어요.
(유니세프 자선 경기에 퍼거슨이 감독을 하는 것에 대해) 제가 영감님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했어요. 감독님은 제게 아버지 같은 존재이지요.
절반은 내 부모님의 덕이고, 절반은 퍼거슨 감독님의 덕입니다. 그 만큼 그를 존경해요. 부모님은 나를 기르시고 내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퍼거슨 감독님은 나를 완전히 다른 레벨의 선수로 성장해 맨유를 위해 그리고 잉글랜드를 위해 뛸 수 있도록 만든 장본인이세요. 그는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어리고 젊은 맨유의 선수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특히 그는 나에게 있어 매우 좋은 사람입니다. 나는 런던에서 부모님과 떨어져 홀로 맨체스터로 올라왔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었고, 그는 나에게 아버지와 같이 대해주었습니다. 때로는 그는 매우 엄격하게 나를 교육시켰고 나는 그의 교육에 잘 따랐죠. 그는 나를 비롯하여 다른 선수들에게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의 방문은 열려있으니 언제든지 오라고 말하며 용기를 주었죠. 그는 단순히 감독을 떠나 아버지였어요.
퍼거슨 감독님은 아직도 항상 그래오셨던 것처럼 저희를 잘 챙겨주십니다. 몇 주전에도 뵈었고, 항상 저희를 아이들 보듯, 케어해주십니다. 감독님 앞에서는 절대 술도 마시지 않고, 밤에 나가서 놀자는 말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샌가 제가 와인잔을 들고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더군요. 제가 그러고 있다는 걸 자각한 순간 얼른 잔을 등 뒤로 숨겼어요! 저와 니키 버트, 폴 스콜스 모두 같았지요. 우리는 모두 등 뒤로 와인을 숨겼어요.
퍼거슨 감독님은 제게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줬어요. 그는 저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우리와 함께 했던 어린 선수들 또한 신뢰했었죠. 12년 동안 그와 함께 할 수 있어서 행운이었고 그는 진정 최고입니다.

7.3. 헤어드라이어

원래 스포츠인들이 다 그렇지만, 특히 퍼거슨은 화가 나면 축구인들 사이에서도 매우 무서운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나 가끔 경기장에서도 선수들을 실시간으로 질책하는 사례가 꽤 있는데, 이때 굉장히 매서운 모습을 보여줘 팬들에게도 그의 질책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선수들에게 퍼거슨의 매서운 질책은 '헤어드라이어'로 불리는데, 이유는 그가 경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거나 졸전을 펼치면 라커룸에서 선수들의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불같이 분노하기 때문이라고. 처음 그에게 '헤어드라이어'라고 부른 제자는 마크 휴즈로, 2015년 6월 25일 솔즈베리 경마장에서 열린 경마 대회에서 퍼거슨의 소유의 말 '헤어드라이어(Hairdryer)'가 데뷔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40]
항상 소리치고 괴성을 지를 순 없다. 비난을 받고 싶은 선수는 누구도 없다. 그렇게 해서는 먹혀들지도 않는다. 하지만 라커룸에서 상황은 다르다. 실수에 대해서는 지적해야 한다. 난 경기 직후 곧바로 실행에 옮긴다. 월요일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그것으로 끝이다. 그리고 다음 경기를 향해 전진한다. 30명의 백만장자 선수들과 호흡하면서 통제력을 상실해서는 안된다. 잘못된 행동을 하면 벌금을 부과한다.
터널로 들어가고 심판이 다시 피치로 부를 때 까지(하프타임) 8분의 시간이 있다. 이 시간을 잘 써야 하는건 필수다. 이기고 있을 땐 모든 것이 쉽다. 만족하지 말고 집중하라고 이야기하고 해결할 수 있는 작은 문제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지고 있을 땐 임팩트(충격이라고 쓰고 헤어 드라이어라고 읽는다.)를 줘야 한다. 전반이 끝나기 몇 분전에 나는 항상 가서 무엇을 말해야 할까 생각한다. 거의 무아지경이다. 정신을 집중한다. 나는 노트에 적는걸 믿지 않는다. 다른 코치들이 수행하는걸 본다. 하지만 난 게임의 어떤 부분에서도 실수하는걸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드레싱룸으로 가면서 내 노트를 보면서 , '오 30분에 이렇게 했으니까 됐어.'라고 말하는걸 상상할 수 없다. 나는 그 방식이 선수들에게 인상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개개인이 잘못한 경우에도 퍼거슨 감독님이 당사자를 나무라기보다 우리 전체를 나무랐던 여러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왜 네 동료가 곤경에 처하도록 놔둔 것이냐? 왜 그를 보호하지 않았던 것이냐? 너희들 모두가 그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에 책임이 있다. 너희의 동료가 곤경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가 선수들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이는 그가 벌금이 효과적인 지도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 그가 벌금을 부과했을 때 이는 항상 팀 단위였다. 그는 우리가 연대 책임에 대한 그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 명이 실패하면 우리 모두가 고통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런 연대에 대한 의식을 우리에게 심어주고자 했다.
게리 네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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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중에 실시간으로 헤어 드라이를 맞은 조니 에반스라이언 긱스[41]

실제로 목격하면 미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화를 내는데[42], 퍼거슨 본인도 자신의 화를 못 이겨서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선수들에게 과도하게 쏟아낸 적도 많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미친듯이 화내기보다는 짧게 지시사항을 던져주며 선수들을 조련하는 것에도 능했다. 예를 들어 "드록바 마크 제대로 못하는 새끼는 끝나고 뒤질 줄 알아라.", "지금 저 리버풀이 리버풀이냐? 나 젊었을 때 리버풀에 비하면 말야.. 제라드? 걔 공 좀 차지, 근데 너희들에게 비할 바냐?", "얘들아 쟤넨 그냥 토트넘이야." 등의 말들이 있다.

물론 아무리 퍼거슨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눈 바로 앞에서 머리가 휘날릴 듯이 욕을 쏟아내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선수가 헤어드라이어에 반발한 적도 종종 있었다. 퍼거슨에게 충성심이 강한 맨유 유스 출신 선수들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한 번은 라이언 긱스가 챔피언스 리그 유벤투스전에서 하프타임에 퍼거슨이 자기를 집중적으로 조지기 시작하자 참지 못하고 음료수를 퍼거슨의 발에 집어던졌는데 이를 용납할 리가 없는 퍼거슨은 바로 긱스를 교체 아웃시켰다.[43] 자기와 충돌할 수는 있어도 선을 넘어서 감독의 권위에 도전하면 그 누구라도 경기에서 빼버렸던 퍼거슨은 선수들에게 자기가 보스임을 늘 각인시켰다고 한다.

웨인 루니는 베컴 사건과 헤어드라이어를 설명한 적이 있는데, 영상 루니의 말에 따르면 헤어드라이어를 제일 많이 당한 선수는 게리 네빌이었다고. 그건 네빌이 그걸 견딜 수 있을 만큼 정신력이 강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네빌: 사실 나도 힘들었..읍..
2006-07 시즌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 셀틱전이 제가 본 최악의 헤어드라이어였어요. 그는 루이 사하의 얼굴에 대고 소리를 질렀어요. 호되게 당한 사람은 루이 사하뿐만이 아니었죠. 제가 클럽과 새로운 계약을 협상 중이라는 걸 감독님은 알고 있었어요. 그는 제게 들어갈 돈을 절약하게 되었죠. 선수들은 재계약을 할 때 더 많은 돈을 원해요. 하지만 그런 형편없는 경기를 한 후에는 그럴 만한 자격이 없죠. 그 시합 후에 전 상향된 계약을 할 자격이 없었어요. 이 세상에서 알렉스 경의 헤어드라이기를 당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어요. 그는 제 얼굴 바로 앞에 서서 소리치죠. 마치 제 머리를 BaByliss Turbo Power 2000 앞에 놓은 거랑 같은 느낌이예요. 그건 끔찍해요. 저는 누구에게서도 그런 고함을 받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 고함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서 때때로 저도 되받아쳐서 소리질러요. 저는 그에게 당신이 틀렸고 내가 옳다고 말하죠. 하지만 진정이 되고 난 후에는 대개 그 반대라는 것을 깨닫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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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yliss Turbo Power 2000
천재다. 그냥 천재였다. 일단 선수의 심리를 가장 적절하게 자극했다. 우리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박살(=헤어드라이어) 나는 날들이 있었다. 영감의 수준에 맞지 않는 경기를 하면 하프타임 때 문을 부숴져라 닫고 나서 ,"2:0? 2:0? 야 이 좆같은 새끼들아. 지금 솔직히 양심적으로 6:0 7:0은 나와야 하는거 아니야? 니네 그 따위 공 찰래? 장난하냐? 그 따위로 할꺼면 때려쳐!" 시합이 잘 풀리는 날도 영감이 우리에게 주문하는 건 완벽 그 자체였다. 그리고 우리 모두 완벽한 게임을 위해, 그리고 영감을 위해 달렸다.
리오 퍼디난드
(호날두의 10대 시절 맨유 첫 시즌) 호날두가 패스하는 법을 배우고 있던 시기에, 가장 힘들었던 선수들은 유나이티드의 공격수들이었다. "얘랑 못 뛰겠어. 크로스를 아예 안 하잖아." 판니스텔로이는 훈련 중 종종 소리치곤 했다. "백날 달려봤자 저 자식은 패스도 안 할 텐데 뭐" (에드빈 판데르사르 왈) "베컴은 볼을 잡으면 판니스텔로이에게 항상 크로스를 올려줬으니까요. 퍼거슨은 채찍질 후에는 당근을 줘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알릭 와일리 코치 왈) "가끔씩 감독님은 모든 선수들 앞에서 호날두를 혼내곤 했습니다. '왜 크로스를 안하고 드리블을 한 거냐?!!!!'라는 식으로요. 그런 식으로 호통을 친 후, 그는 슬그머니 호날두의 옆에 가서 앉아 왜 그가 그렇게 혼내야만 했는 지를 설명해 줍니다." 선수들은 둘의 스페셜한 관계를 질투하면서 농담을 하곤 했습니다. "퍼거슨 니 아빠잖아, 니 아빠!!" 출처
하지만 오직 에릭 칸토나만은 헤어드라이어에서 예외였다고 한다.[44][45]
퍼거슨 감독은 페테르 슈마이켈, 나, 폴 인스, 팰리스터를 비롯해서 모든 선수들의 영혼을 쏙 빼놓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내 앞에서 "도대체 누가 사우스게이트를 맡기로 되어있었나?". "칸토나요." 내가 대답했다. 퍼거슨 감독은 칸토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칸토나, 너에게 실망했다. 경기장에서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돼."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생각했다. '그게 다야? 정말 그게 다야? 다른 선수였다면 헤어드라이어를 정통으로 맞고도 남았을 텐데.'
데이비드 메이
또한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H조 1경기 독일 vs 멕시코의 중계를 했던 SBS 해설위원 박지성은 자기는 맨유 선수 생활 중에 직접 헤어드라이어를 당해본 적은 없었다고 증언했지만, 옆 사람이 당하는 것만 봐도 오금이 저려서 정신을 바짝 차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46] 이런 걸 보면 퍼거슨의 헤어 드라이어에서 예외였던 경우는 그를 만족시키면서 예의가 좋거나, 아니면 팀 리더격이라 권위를 세워줄 필요가 있거나 하는 경우 등이었을 듯 싶다.[47]

그 외 2024년 5월에는 애슐리 영은 자신과 대런 플레처도 맞지 않았다고 밝혔다. 기사

7.4. 언론 플레이

퍼거슨은 우리가 제대로 했는데도 경기를 졌으면 분위기 전환용으로 어디가서 싸움을 붙어와 분위기를 바꿨다. 언론과 싸우거나 심판과 싸우거나. 다만 우리가 엉망으로 한 날은 우리를 아작냈다.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아작났는지 아무도 모를 뿐이다. 그게 새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도 위대한 거다.
리오 퍼디난드
퍼거슨은 언론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며 자기 팀 선수를 보호할 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호하는 감독이었다.[48] 영상 맨유를 10년 동안 담당했던 출입 기자에 의하면 퍼거슨에게 '너 오지마'라는 소리를 듣는 신문/타블로이드/방송국의 담당자가 속한 부서는 그날 뒤집어졌다고. 기자들에게 퍼거슨은 "당신들은 멍청이들. 아, 아니다. 진정 축구 전문가들이지? 왜 4-3-3이 어쩌고, 4-4-2가 어쩌고 해봐. 다시는 캐링턴에 못 들어오게 할 줄 알어."라는 말도 서슴치 않았다.

한 번은 '더 선'이 "맨유의 홈구장인 올드 트래포드의 명칭을 스폰서의 이름으로 바꿀 수 있다"고 보도한 적이 있는데, 퍼거슨 경이 노발대발한 것은 당연지사. 그는 그 기사를 직접 작성한 기자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며 디스.

하지만 가장 웃긴 것은, 기자들이 이런 퍼거슨을 '이해'하며 일부 기자들을 제외하면 그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보였다고. 퍼거슨이 질문하는 사람을 이름으로 부른다거나 하면 그 기자들은 화색이 돌고, 자신을 놀리거나 하는 발언 "이봐, 자네는 그걸 양복이라고 입었나?"를 들으면 그 어떤 기자(자신도 포함)들도 무슨 대단한 영광인듯 행동했다고.

퍼거슨이 말하길 "내가 맨날 성질만 내면 이미 죽었겠다. 난 부드러운 사람이야. 대신에 니(기자)들이 날 화나게 하는 경우, 내 선수들이 날 화나게 하는 경우가 무척이나 많지. 그리고 난 화가 나면 바로 나오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 그러나 자신이 많은 선수를 헤어드라이어로 불어버린 것은 인정.


[1] 사라고사에서 잘해서 퍼거슨이 리턴 시켰는데, 볼튼전에 이후로도 폼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이후, 바르사로 컴백했다.[2]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프리미어 리그가 출범한 1992-93 시즌부터 퍼거슨이 은퇴한 2012-13 시즌까지 맨유는 리그 우승을 13번이나 했으며, 3위 아래로 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3] 물론 이는 퍼거슨의 은퇴 이후 돈이라도 팍팍 써야지 네임드급 선수들을 영입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맨유의 위상이 상당히 추락했기 때문도 있다. 허나 돈 때문에 온 애들이 많아서 그런지 거품이 많다.[4] 퍼거슨 시절 우승은 못해도 3등 안에 들어서 챔스권에는 무조건 드는 맨유였으나, 지금은 챔스권은 커녕 유로파 경쟁도 힘겹게 이어나가고 있다. PL 하위권 팀들의 수준이 상승한 것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위권은 맨시티 같은 팀들이 꾸준히 유지하는 걸 보면 결국엔 질이 하락한 선수단 및 감독의 능력 부족, 보드진의 삽질이 겹치며 구단이 무능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5] 퍼거슨의 스쿼드 운영 논리는 매우 확고했는데, 그 중 핵심적인 것은 축구는 골을 넣지 못하면 이길 수 없다는 점이다. 감독의 전술로 골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은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 상황에서 기회를 골로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공격수의 개인 역량이라는 게 퍼거슨의 신념이었고, 그렇기에 공격수만큼은 결정력이 검증된 선수를 데려오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 외에 중요시했던 포지션은 개인 능력을 발휘해서 드리블로 공을 빠르게 운반하거나 정확한 크로스나 슛을 날려야 하는 윙어 정도였으며, 나머지 포지션은 선수의 개인 능력을 초과하지 않는 선에서 역할을 부여해서 안정적인 빌드업을 했다.[6] 물론 그 중요하게 생각했던 윙어진은 체력소모가 많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물량을 많이 준비시키는 편이었다. 박지성이 뛰던 당시 맨유에는 긱스, 호날두라는 확고부동한 에이스급 윙어들이 있었지만, 그 자리에는 박지성, 나니, 토시치, 리처드슨 등 타 포지션 대비 많은 백업 선수들을 준비해놓고 이들을 적재적소에 돌려가며 썼다. 심지어 최전방 공격수 솔샤르조차 우측 윙어로 기용하고 칼링컵 등 부담이 덜한 대회에는 하파엘이나 파비우를 전진시켜 윙으로 기용하기까지 했다.[7] 치차리토는 개인기나 드리블은 맨유 수준이 아니었지만 오프 더 볼, 결정력, 집중력만큼은 프리미어 리그 탑급이었기 때문에 슈퍼 서브로 활용되었다.[8] 재밌는 것은 전술과는 다르게 대인 관계나 매니징 스타일을 보면 굉장히 고집이 강했다는걸 알 수 있다. 주전 경쟁에 밀려서 퍼거슨에게 총을 들고 협박했다는 카더라까지 나왔던 폴 인스가 방출되었던 경우만 봐도 선수가 얼마나 대들던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감독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고집을 밀고 나갈 때와 아닌 때를 잘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9] 자수성가해 부호가 된 글레이저는 1995년 미국프로풋볼(NFL) 팀인 탬파베이 버커니어스(Tampa Bay Buccaneers)를 인수해 스포츠 사업을 시작했다. 글레이저는 인수전에 뛰어들기 전만 해도 버커니어스는 만년 꼴찌 팀이어서 비용이 적게 들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착수한 것이다. 하지만 인수전 막판에 경쟁자가 갑자기 등장하는 바람에 2억 달러 가까운 자금이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이 거래는 풋볼팀 인수 사상 최고 금액이었다. 글레이저는 인수 후 꾸준히 좋은 선수와 코치를 영입해 팀의 성적을 호전시켰다. 마침내 2003년 슈퍼볼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고 이후 버커니어스의 가치는 8억 달러로 치솟았다. 1억 9,200만 달러에 인수한 팀이 10년도 되기 전에 7배 가까이 몸값이 뛴 것이다. 그는 꼴찌였던 팀을 2003년 슈퍼볼 우승팀으로 키우는 능력을 보여줬다. 글레이저는 검소했지만 돈을 쓸 때는 화끈하게 쓰는 사람이었다. 전용기를 구입하기 전까지는 언제나 출장은 이코노미석을 이용했고 대부분 저가항공사만 찾았다. 그는 아들 브라이언을 가리키며 "저 아이가 입고 있는 바지가 보이죠? 저게 200달러(20만원)짜리 휴고 보스 바지야. 난 겨우 20달러(2만원)짜리 바지를 입는데 말이야"라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10] 맨유 인수에 관심있던 거부들 리스트
루퍼드 머독 (전 LA다저스 구단주)
● 로만 아브라모비치 (첼시 구단주)
● 셰이크 만수르 빈 자예드 알 나얀(맨시티 구단주)
하마드 알 타니 카타르 국왕 (PSG 구단주)
● 드미트리 리볼로프레프(AS 모나코 구단주)
맨유가 지속적으로 흑자를 기록하며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다 보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인수하기 위해 눈독을 들이는 거부들이 적지 않았다. 2000년대 초 LA다저스 등 다른 프로 스포츠팀을 사들이려고 했던 글레이저는 영국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눈을 돌렸다. 글레이저가 맨유를 인수하려고 했을 때 맨유팬들이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1990년대 후반에도 언론 재벌인 루퍼트 머독이 맨유를 인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루퍼트 머독은 맨유의 지분을 매입해 인수하려다 소액주주와 서포터 연합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혀 좌절된 적이 있다. 그러나 지난 50여 년간 숱한 비난과 공격에도 개의치 않고 난관을 뚫고 나와 한번 목표를 삼으면 결코 그냥 물러서지 않는 스타일의 글레이저가 여론이 악화됐다고 포기할 리가 없었다. 맨유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포츠팀인 데다 입장권은 거의 대부분 매진이었고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브랜드 가치를 지닌 구단이었다. 그래서 2003년부터 조금씩 맨유의 주식을 사 들이기 시작해 28.1%의 지분을 확보한 뒤 2, 3대 주주에게 공식적으로 매수를 신청, 이를 성사시켰다. 결국, 2005년 글레이저는 맨유의 주식 75%를 인수해 구단주가 되었다. 인수금액은 7억 9,000만 파운드(약 1조 3,900억 원). 하지만 이 중 2억 7,500만 파운드(약 4,850억 원)만이 글레이저 가문의 돈이었고 나머지 인수금액 중 2억 7,500만 파운드는 IB(투자은행)에서 나머지 2억 4,000만 파운드는 이자율이 높은 헤지펀드를 통한 현물출자대출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JP모건 투자은행과 리파이낸싱 과정을 거치며 5억 파운드의 우선순위부채를 가져왔다.
[11] 아직 안토니오 발렌시아가 풀백으로 전향하기 전이다. 지금에 와서는 익숙해 보이는 포지션이지만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기용. 지금으로 치면 전문 윙어이면서도 수비 가담이 괜찮다고 평가되는 윌리안이 풀백으로 출장한다고 가정하면 비슷한 상황이 될 것이다. 루이스 반 갈이 발렌시아를 풀백으로 완전 전향시켜 대박을 터트렸으나, 그 시작은 이미 퍼거슨의 이런 변칙 기용에 근원했던 것이다.[12]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볼프스부르크와 2009-10 시즌 챔피언스리그 조별 리그 6차전 경기. 당시 맨유는 핵심 자원들의 부상, 징계 등의 이유로 인해 사면초가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퍼거슨 감독은 남아있는 자원들을 활용하여 원정 경기에서 3:1 대승을 거두었다. 수비진들이 부상을 당해서 미드필드 자원으로 포백 수비 라인을 구성했음에도 안정적인 수비를 보여주었다. 마이클 캐릭대런 플레처는 자신들의 성향을 바탕으로 새로운 색깔을 뽐내며 수비진을 지휘했다. 마이클 오언은 오프사이드 트랩을 뚫고 수비 뒷공간을 파고 드는 영리한 움직임과 순도 높은 골 결정력(5개의 슈팅 중 3개의 골)으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교체 투입된 가브리엘 오베르탕은 오언의 2번째 골을 어시스트했다. 참고로 아무리 백업들을 극도로 쥐어짰다고 해도 볼프스부르크 상대로 이긴게 그렇게 큰 의미가 있냐고 할 수도 있는데, 저 시즌 볼프스부르크는 전시즌 분데스리가 우승팀이었다. 독일 챔피언팀을 저런 전술로 때려잡은 것.[13] 2011/12시즌 칼링컵 3라운드 경기. 투톱인 오웬과 베르바토프, 레프트백인 파비우만 제자리에서 뛰고있다. 전반전에만 3골을 몰아치고 후반전엔 긱스와 박지성까지 교체 아웃 시켰다. 폴 포그바가 이때 긱스의 교체로 맨유에서 데뷔했고, 교체 3명을 다 쓴 상황에서 센터백으로 나온 프라이어스가 부상당하자 베르바토프가 센터백으로 10여 분간 뛰었다.[14] 이 경기에서 필 존스는 호날두를 전담마크 하며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압도적인 점프력으로 호날두는 헤딩골을 넣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이전에 있었는데 2011년 코파델레이 결승과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페페를 수미 자리에 넣어 메시를 잘 막았고 코파델레이 결승에서는 이겼지만 챔피언스리그에서는 페페가 퇴장당하며 끝났다.[15] 당시 맨유의 코치였던 르네 뮬레스틴의 회상으로 맨유는 후방 빌드업을 무기로 삼는 아스널을 상대로 항상 강한 전방 압박으로 우위를 가져왔는데, 주전 선수 몇명이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정상 스쿼드로는 전방 압박이 약해질 것이 예상 되자 퍼거슨이 꺼내든 전략이었다고 한다. 전방 압박 하나 때문에 아예 수비수들을 중원에다 박아놓은 것. 퍼거슨은 아르센 벵거가 늘 하던걸 똑같이 할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고.[16] 노란색으로 강조된 선수들은 다비드 데헤아, 리오 퍼디난드, 마이클 캐릭, 로빈 반페르시인데, 이들은 해당 시즌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다.[17] 사실 퍼거슨 감독은 돈을 함부로 쓰는 편이 아니다. 오버페이 한 정도가 리오 퍼디난드 정도로 손 꼽히는 편. 그 퍼디난드도 무려 10년 가량을 주전으로 써먹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손해가 아니었다.[18] AC밀란전ㆍ리버풀전 등[19] 발렌시아는 대타 풀백을 소화했지만 2013~2014년까지는 완전한 윙어였다.[20] 당시 병환 중이던 칸토나의 어머니를 욕하는 내용이었다.[21] 그 시즌에는 앨런 시어러가 몸담고 있었던 블랙번 로버스가 우승했다.[22] 그러나 퍼거슨 감독은 칸토나에게 이전같은 열정이 느껴지지 않아 보인다고 생각했고,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썼으나 끝내 칸토나는 은퇴한다.[23] 루니는 프로 선수이기 이전에 당시 어린 소년이었으므로, 그보다 더 험난했던 19살을 보냈던 퍼거슨 본인은 이를 이해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보인다.[24] 이에 퍼거슨은 "잔말 말고 공이나 차라. 공을 차다 보면 가만 있을 때 나던 온갖 생각이 다 사그러든다."라고 말했다다.[25] 다만 로이 킨은 이 칭찬에 대해 오히려 "나를 모욕되게 만든다. 내가 뭘 하길 바라는건가? 포기하라는건가? 모든 잔디를 밟지 말라는건가? 팀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말라는건가? 내 클럽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말라는건가? 사람들이 나에게 이런 코멘트를 남기고 내가 영광스러워 해야한다는 식의 반응이 기분 안좋다. 우체부가 편지를 배달하는건 자기 할 일인데 그걸 칭찬하나? 나의 일은 맨유가 축구 경기를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이다."면서 시니컬한 반응을 보였다.[26] 미들즈브러와의 경기에서 4:1로 대패한 직후 5명의 동료 선수들의 실명을 인용해 가며 비판했고 이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 당시 킨에게 비판을 받았던 선수들은 대런 플레처, 키어런 리차드슨, 앨런 스미스, 리오 퍼디난드, 존 오셔이다.[27] 스트라칸은 선수 시절 공격적이며 기술이 뛰어난 측면 미드필더였다. 그는 에버딘 시절 퍼거슨 감독의 휘하 아래 유럽컵을 거머쥔 핵심 멤버로 후에 맨유 선수로도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28] 퍼거슨 본인도 스탐을 쫓아낸 것은 큰 실수라고 인정했을 정도였으며, 이후 웨스 브라운, 로니 욘센 등으로 버티는 데에 한계를 느낀 퍼거슨은 리오 퍼디난드에게 3,500만 달러를 지르게 된다. 스탐의 나이가 이제 곧 서른이었던 데다가 주식 상장을 해 돈지랄을 하던 라치오에서 1,500만 파운드 딜을 제시하자 승낙했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29] 권총 협박을 했다는 설도 있는데, 항목에 따르면 권총이었는지에 대해 정확한 출처가 없다고 한다.[30] 당시 아스날을 상징하는 선수는 하이버리의 왕(king)이라 불린 티에리 앙리였다.[31] 서브와 주전을 오가는 선수였던 올레 군나르 솔샤르의 폼 역시 준수했기에 판니스텔로이의 자리는 애매해져갔다. 게다가 당시 유망주였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게 사실상 패드립을 시전하는 사건도 발생하면서 퍼거슨에게 단단히 찍혀있었다.[32] 지금의 EFL컵[33] 실제로 이때 경기를 보면 알겠지만 맨유가 골을 넣을 때마다 몸을 푸는 경기장 뒤쪽에서 계속해서 환호하는 판니스텔로이를 볼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본인이 출전하지 못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겠지만.[34] 베컴 자서전 원문 "When I first got into United's first team as a regular, my squad number was 24 (he had worn 28 before that, too). The following season I was given the number 10 shirt. The meant a great deal to me: Denis Law and Mark Hughes had both worn it before me. Maybe the history that went with the number was why I scored so many goals wearing it. I remember, though, the summer we signed Teddy Sheringham, the boss actually took the trouble to phone me when I was away on holiday in Malta to tell me he was taking that squad number off me. No explanation, NO alternative and no argument. I remember saying to Gary Neville at the time: 'What's he done that for? Whay would he phone to tell me that? Did he just want to make sure he ruined my holiday? I was devastated, trying to work out what I'd done wrong. Then, a month later when we turned up for pre-season training, he had a new shirt ready: the number 7. The boss handed me Eric Cantona's squad number. The surprise of that honour stopped me in my tacks." 출처[35] 하지만 미러에 의하면 퍼거슨은 베컴에게 7번을 주기 싫었다고 하는데, 당시 칸토나가 은퇴하고 7번이 공석이 되자 퍼거슨이 제일 먼저 면담했던 건 로이 킨이었고 그때 킨은 자신은 16번이 좋고 대놓고 베컴이 7번을 달기를 원하는 게 보이는데 걔나 주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퍼거슨은 "나도 ㅅㅂ(Fucking) 걔가 7번을 달기를 원하는 거 아는데 걔한테 주기 싫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미 베컴의 안에서 축구만 좋아하던 순수 청년이 사라져가고 스타성만 쫓고 있다고 생각한 퍼거슨은 베컴에게 7번을 주는 게 선수를 망치는 결정타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외에는 딱히 7번에 어울리는 선수는 없었고, 결국 7번은 베컴에게로 돌아갔다.[36] 물론 스타성만을 생각한다는 것은 너무 베컴을 비판하는 판단이고 실제 베컴은 언제나 축구를 최우선시 했다. 다만 긱스스콜스같이 미디어를 가까이하지 않은 선수들을 눈 앞에서 지켜본 퍼거슨에겐 너무나 연예계 생활을 챙기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훗날 레알 마드리드, LA 갤럭시에 입단해 두 팀 모두 리그 우승까지 이끌었던 베컴의 폼을 보자면 퍼거슨의 걱정이 너무 컸던 거이기도 했다. 실제로 베컴에 대한 퍼거슨의 의심은 그 당시 좀 과한 면이 있었다.[37] 베컴이 당시 했던 말은 내가 애슐리 콜에게 발려서 진거라고요? 그러는 영감님은 벵거 감독에게 전술로 발린거잖아요!라고 항변했다고 한다.[38] 실제로 FA 직전인 2012-13시즌 겨울 이적시장에서 당시 폭풍영입을 진행하던 QPR에 제의를 받았으나 자신이 EPL에서 뛸 구단은 맨유뿐이라며 거절한 일화가 있다.[39] 사실 말년에 잘 화해해서 다행이었고 맨유도 베컴 이후의 위기를 잘 넘겨서 다행이었지, 베컴을 레알로 보낸 것은 퍼거슨의 실책에 가까운 판단이었다. 베컴을 보낸 이유는 순수히 감독과 선수의 불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며, 베컴의 당시 27세란 나이는 베컴을 내보내면서 리빌딩이란 문구를 외치기에도 민망한 것이었다. 베컴을 보낸 그 다음 시즌부터 맨유는 3년간 우승하지 못했고 그 중 두 시즌은 우승권과 매우 크게 떨어진 3위에 불과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베컴-반 니스텔루이로 이어지는 강력한 공격옵션이 사라지면서 공격진이 조합을 찾지 못하고 크게 약화된 것이 매우 컸다. 거기다 베컴은 우측 윙이 아닐 때에도 중앙 미드필더로써 중원에 힘을 실어준 선수였고, 노쇠화한 로이 킨을 장기적으로 대신해줄, 그리고 베컴을 도와줄 것으로 생각했던 베론이 처참하게 실패하고 그 뒤에 에릭 젬바젬바, 클레베르손 등마저 실패하며 베컴의 공백을 처절하게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베컴의 자리에 그대로 들어온 호날두는 그럭저럭 잘 하긴 했지만 너무 어렸을 뿐만 아니라 반 니스텔루이와의 궁합이 최악에 가까웠다는 것도 맨유의 고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문제는 에버튼에서 웨인 루니를 거액에 데려온 뒤에도 해결되지 않았다. 거기에다 퍼디낸드의 도핑 징계, 로이 킨의 폭주, 반 데 사르 영입 이전 지긋지긋한 골키퍼 문제(파비앙 바르테즈, 로이 캐롤, 팀 하워드 등)까지 퍼거슨을 골치아프게 했고 특히 05-06시즌 벤피카에 패해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광탈까지 당하면서 퍼거슨은 무려 은퇴까지 고민하게 된다. 이후 반 데 사르, 박지성, 에브라, 비디치, 캐릭의 영입 및 반 니스텔루이의 방출 등으로 팀이 교통정리되고 젊은 선수들의 기량이 올라오면서 맨유는 다시 우승을 노리는 강팀으로 돌아오게 된다.[40] 사실 영국 경마계에서 퍼거슨은 나름 유명한 마주이다. 2002년 유럽 경마의 발롱도르라고 할 수 있는 카르티에 어워드 유럽 연도대표마인 록 오브 지브롤터의 공동 마주이기도 했으며, 말의 은퇴 후 소유권을 놓고 공동 마주이자 오랜 지기인 존 매그니어와 분쟁 끝에 합의는 봤지만 존 매그니어가 소유한 유럽 최대의 서러브레드 목장인 쿨모어 스터드가 맨유 주식을 처분하고 축구 사업에서 철수하는 사건으로 이슈가 되기도 했다.[41] 참고로 긱스가 헤어드라이어를 맞은 이유는 박지성 때문이었다. 당시 박지성은 상대 골대 앞에서 멋진 가슴 트래핑으로 긱스에게 공을 내줬지만 이를 예상하지 못한 긱스는 공을 받지 못했는데, 이로 인해 퍼거슨의 화를 불러일으킨 것. 자신의 가슴을 세게 치면서 말하는 퍼거슨의 행동으로 보아 대충 "가슴 트래핑으로 공을 내줬는데 놓치다니 눈을 어디다 달고 다니는 거냐"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42] 카가와 신지는 퍼거슨처럼 무서운 감독은 난생 처음이라고 인터뷰하기도 했고, 리오 퍼디난드는 그렇게 라커룸이 터지는데 밖으로 이야기가 새나가지 않는 것도 참 대단한 거라고 회고하기까지 했다. 고든 램지가 연상된다는 팬들도 많다. 마침 둘 다 스코틀랜드 사람이다[43] 다만 이날은 긱스 입장에서도 억울할 만했던 것이, 퍼거슨은 경기 전 팀 회의 시간에 "지단은 이제 끝났다. 얜 느리고 약하니까 너네들이 가서 부딪치면 이길 수 있을 거다"라며 꽤나 무리수를 뒀는데 당시 지단은 아직 20대 중반으로 몸 상태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경기장 터널에서 지단의 옆에 서있었던 긱스는 지단의 엄청난 피지컬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감독님이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44] 상당히 현명한 결정인 것이, 칸토나는 자신만의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고 동시에 자신만의 기준이 타인의 잣대에 휘둘리는 것을 상당히 싫어하는 사람이다. 즉 내 기준에는 잘했음에도 상대가 그것에 대해 비판한다면 불같이 달려든다는 것. 거기다가 칸토나는 상대방이 강하게 나온다고 주눅이 들거나, 머리를 식힐 만한 성격이 아니라 오히려 더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기행을 벌일 정도의 인물인지라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계산된 행동이라고는 하나 퍼거슨이 헤어드라이어를 시전했다가는 그대로 칸토나가 폭발해 둘의 관계가 그대로 파토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칸토나에게만큼은 웬만해서는 에둘러서 조용히 말한 것이다.[45] 그런 칸토나조차 퇴장을 자주 당했을 때나 관중에게 이단옆차기를 한 다음에는 퍼거슨이 정말 죽일듯이 헤어드라이기를 날렸다고 한다.[46] 그래서인지 박지성은 2006년에 쓴 자서전 제 1장의 이름을 헤어드라이어 트리트먼트라고 했다.[47] 사실 박지성 같은 선수에게 감독이 헤어드라이어를 가동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딱히 사생활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일도 없이 축구에만 집중하는 타입이고, 이타적인 플레이를 즐기고 항상 열심히 하는데다 중요한 경기에 믿고 내보낼 수 있을 만한 실력이지만 확고한 주전으로 뛰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크게 반발하는 것도 없이 묵묵하게 감독이 시키는 대로 잘 뛰고 있으니 인간적으로 박지성 같은 선수에게 별다른 이유 없이 노발대발 화를 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비슷하게 폴 스콜스 역시 헤이드라이기를 맞지 않았는데 박지성처럼 다소 조용하고 튀는 행동이 별로 없는 유형이었다.[48] 이게 가끔 지나치면 사단이 나는데 대표적인 게 독일인 드립이다. 이 사건으로 바이에른 뮌헨이나 분데스리가 팬덤에서는 심심찮게 까인다. 독일인 드립이 무엇인지 덧붙이자면, 2009-10 시즌 챔피언스 리그 8강 2차전에서 3-1로 앞서다가 후반전 하파엘의 퇴장으로 경기력이 밀려 추격골을 먹혀 원정 다득점으로 패한 후, 전형적인 독일인 방식이라고 판정을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독일발 역풍을 강하게 맞았다. 당장 본인부터가 퍼기타임 등으로 리그에서 판정 이득을 받는다는 의혹이 있는데, 해외축구 커뮤니티에서 마치 주제 무리뉴와 비슷하게 졸렬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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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상왕

파일:퍼거슨경의 눈치우는 방법.jpg
●저는 모든 경기장 스텝, 연습생, 어린이들, 그리고 저를 포함한 모든 코칭 스텝, 심지어 구단주까지도 아침 6시에 불러내 경기장 눈을 치웠습니다.
● I am comfortable with the Glazers. They have been great. They have always backed me whenever I have asked them. I have never faced any opposition. 난 글레이저 가문과 함께 하는 게 편했어. 그들은 아주 잘 해줬지. 그들은 내가 언제 무엇을 요구하든 지지해줬어. 반대에 부딪힌 적은 한번도 없었지.
● 2010년 글레이저와 데이비드 길(전 맨유단장)이 루니의 급여를 엄청 올리기로 결정하면서, 내 기분이 어떤지 알고 싶어했어. 난 솔직히 루니가 내가 받는 돈의 2배를 거머쥐는 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지. 암튼 그걸 그대로 말하니까 조엘 글레이저가 바로 말하더군. '나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쩔수 있나요' 간단했어. 나보다 더 많은 선수가 있으면 안될거라고 합의를 봤지. 참고1 참고2
퍼거슨 감독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대한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다.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운영하는 주체는 글레이저 가문이지만 퍼거슨 감독은 재임 시절 글레이저 가문을 뛰어넘는 대단한 영향력을 맨유에 행사하였다. (2011년경) 맨유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식되는 브랜드에 Google, Apple, BBC, Dyson, Facebook에 이어 6위를 차지한 바 있다. 이 조사를 한 Brand Finance의 스포츠 브랜드 평가팀장인 David Chattaway는 글레이저의 이 같은 성공 비결의 핵심요인 중 하나는 클럽의 궁극적인 브랜드 매니저(the club's ultimate brand manager)인 퍼거슨 감독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EPL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로 선정되기도 한 퍼거슨 감독이 은퇴한 뒤 미국 뉴욕 증시에 상장된 맨유의 주가가 꾸준히 하락세이자, 영국 경영컨설팅 회사 A.T.커니의 이매뉴얼 험버트 스포츠 담당 전문가는 "애플이 스티브 잡스를 잃었던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평했다.

은퇴 후의 행보를 통해 상왕의 위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은퇴 후 데이비드 모예스, 루이 판 할 그리고 조제 무리뉴의 경기를 볼 때마다 불안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물론 무리뉴가 맨유 감독 초중반에는 유로파리그를 우승하게 만들어 챔피언스리그에 복귀할때는 기쁜 감정을 내비췄으나 퍼거슨의 못마땅한 표정 및 불안함은 후임감독의 선수 운영 및 전략, 전술에 불안함을 암시한다. 후임 감독에 대한 그의 불신으로 이어지며 결국 경질될 확률이 높아진다.

9. 퍼기 타임

파일:external/ichef.bbci.co.uk/_64333935_fergiecompo.jpg
퍼기 타임 (Fergie Time)
이기고 있는 경기 혹은 지고 있는 경기에서 추가 시간에 심판에게 자신의 시계를 가리키는데, 이는 주심 및 심판진들에게 쉽사리 경기 종료를 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와 추격하는 상대팀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실제로 퍼거슨의 맨유는 후반 추가시간에 역전골 혹은 동점골이 유독 많이 나오기도 했으며 과거 2009-10 시즌 OT에서 열린 맨체스터 더비에서 마이클 오언의 역전골로 4-3으로 승리한 경기 또한 후반 추가 시간의 추가에서 나온 골이다. 이 경기는 퍼기타임이라는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캐릭의 교체투입과 벨라미의 골세레머니로 시간이 좀 흘러서 합당한 비공식 추가시간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 행동은 이른바 "퍼기 타임"이라고 불린다.

훗날 은퇴 후 인터뷰에서 실제로는 시간이 어느 정도 남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며, 심판과 상대팀에게 압박을 가하는 심리적인 트릭이었다고 하며 일부러 시계를 보면서 심판이 과감하게 경기를 끝내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실제로 시간적 이득을 많이 보았고 12-13 시즌 한정 BBC는 맨유가 지고있을 때 평균 79초라는 비공식 추가시간이 주어졌다고 보도했다. 이것은 영국 언론들의 구설수에도 자주 오르는데 심판을 압박해 판정에 이득을 받는다는 것이 논란이 되는 대목이다.

10.

파일:퍼거슨 마지막껌.jpg
퍼거슨이 마지막으로 씹은 [49]

슨이란 별명이 있는데, 경기 중에 항상 껌을 씹기 때문이다. 껌 씹는 속도는 그 날 경기력에 따라 다르다. '퍼껌슨' 외에도 '껌영감', '껌거슨'이라고도 불린다.

참고로 경기당 씹는 껌의 개수는 1개라고 한다.

11. 박지성과의 관계

파일:퍼거슨경과박지성.jpg
박지성은 2~3년 내로 맨유맨이 될 것이다. 그를 믿기에 데리고 왔고 또 그만큼의 활약을 할 수 있는 선수이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생각에 의아해했지만, 2~3년 내로 분명히 사람들은 나의 결정에 동의할 것이다.
(박지성 QPR 이적시, 퍼거슨 경이 쓴 편지) 지성이에게. 나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대한 네 충성심에 감사하고 새로운 구단에서의 행운을 빌어주며, 널 보내야 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편지를 일찌감치 네게 보내지 못했던 걸 부디 용서해라.[50] 네가 원했고, 필요했던 출전 수를 제공하지 못했던 게 안타깝다. 내가 널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야. 프로 정신, 충성심, 그리고 결단력 같은 면에서 너만큼 신뢰를 할 수 있었던 선수는 없었단다. 난 네 무릎 수술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너의 건강한 모습을 항상 유지하고 싶었다. 물론 이런 말도 네게는 부당했을 테고, 아마 그 결정이 달갑지 않았을 게다. 특히 내 손자는 가장 좋아했던 선수인 널 다른 팀으로 보낸 이후로 아직도 나에게 말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마음에 걸리고 있지만, 너를 보낸 결정이 얼마나 어려웠던 건지 네가 이해해주길 바란다. 유나이티드 소속이던 시절 네 돋보이는 능력을 신뢰했고, 내 코치진들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 넌 내가 보유한 선수들 중 가장 충성심있고 정직한 선수 중 하나였고, 우리 팀에 너처럼 예의가 바른 선수가 있어 자랑스러웠다. 의심의 여지 없이, 넌 축구계의 환상적인 대표 인사이며, 영어에 그렇게 빨리 적응하며 안착하는 걸 보면, 네 결의력과 열정이 축구 뿐 아니라 삶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구단의 모든 이들을 대표해 새로운 구단에서의 성공을 빈다. 지성아, 난 언제까지나 너를 내 선수 중 하나로 여길 것이고, 언제고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날 찾아와라. 마지막으로 너와 네 가족이 언제나 행복하고 행운이 깃들길 바란다.
{{{#!folding [영어 원문]
Dear Ji Sung,

Please forgive me for not having written to you before now to thank you for your loyalty to me and Manchester United and to wish you good luck in your new club, but also the explain my reasons in letting you go.

My disappointment was that I didn't give you the football that you wanted, and needed. It must have felt to you that I was ignoring you but that is far from the truth, there was no player I could trust as much as you in terms of your professionalism, loyalty and determination. I was always conscious of your knee injury and therefore always liked to keep you fresh and of course this wasn't fair to you and understandably didn't enjoy the decision. It is something that still plays on my mind especially as I now have a grandson who still won't speak to me for letting his favourite player move to another club, but I hope you understand the reasons fully now and how difficult a decision it was.

In the time you played was a credit to your outstanding ability and I know it is shared by all my staff as you were in my opinion one of the most loyal and honest players I have had the pleasure to work with and I was proud to have had such a well mannered man in my team.

You are without doubt a wonderful ambassador for football, and the way you settled in and got an excellent command of the English language so quickly was a credit to your determination and enthusiasm not only for football but for life, and on behalf of everyone at the club I wish you success with your new club.

Ji Sung I will always look upon you as one of my players and if you ever need my help you know where I am. Finally I wish you and your family every happiness and Good luck.

Your sincerely,
Alex Ferguson}}}
박지성이 QPR으로 이적할때 박지성은 아주 소중한 선수고 그가 그리울 것이라며 좋은 매너를 보여주어 박지성이 맨유를 나올때 훈훈한 장면을 연출했다. 거기다 QPR과의 경기에서 손수 벤치까지 행차하여 박지성을 찾아가 악수[51]하여 그의 위신을 세워줌으로서 국내 네티즌들에게 역시 멋진 영감님이라고 칭찬을 받았다.

이후 시간이 지나 박지성이 은퇴하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앰버서더에 위촉되자 위촉식에 퍼거슨이 함께 했다. 은퇴 이후 퍼거슨이 관중석에는 참여했지만, 올드 트래포드 그라운드에 공식 행사로 입장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이 당시 구단 관계자들과 팬들이 많이 흥분했다고 한다.

팀 내 상당히 높은 주급 순위나 박지성이 출전한 경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퍼거슨은 박지성을 전략적으로 잘 활용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대 AC밀란 전에서 피를로를 괴롭혔던 경기가 있는데[52] 주로 상대팀의 주요 선수를 묶어놓는 역할이나 공수를 연결하는 교두보 역할을 맡겼다. 대부분 기용되는 경기가 보통 리그 내 강팀과의 경기거나 챔피언스리그에서 중요한 경기였다. 퍼거슨 입장에서 박지성은 강팀과의 경기에서 믿고 쓸 수 있는 카드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2021년 5월 제자 개리 네빌과 진행한 LAD Bible과의 인터뷰에서 "감독했던 선수 중 가장 과소평가된 선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브라이언 맥클레어, 박지성, 로니 욘센이라 대답하였다. 네빌이 박지성의 유명한 피를로 전담 마크 일화를 꺼내자 퍼거슨은 2010-11 시즌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 리그를 회상하며 박지성을 메시에게 전담 마크 시켰어야 했고 그러지 못했던 것은 자신의 실수라 고백했다.[53] 동시에 경기 중에 전술 변화를 주어야 하는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하프타임까지 맨유는 꽤나 선전하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러지 못했다며, 메시는 엄청난 선수였지만 그런 선수를 묶을 수 있을 선수는 박지성뿐이라고 대답했다. 여담으로 국내 축구 선수 중 역대 레전드가 차범근이냐 박지성이냐 손흥민이냐 등에 대해선 의견차가 다양하겠지만, 적어도 박지성이 맨유의 일원으로서 퍼거슨에게는 립 서비스의 대상이 아닌 정말 중요한 선수였다는게 해당 인터뷰를 통해서 드러났다. 특히 한국과 전혀 관계가 없는 순수한 그들만의 인터뷰에서 박지성의 이름이 나왔다는 점은 이게 립서비스가 아니라 진짜 퍼거슨이 평소 생각해오던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또 그동안 박지성의 피를로 봉쇄는 퍼디난드, 스콜스, 네빌, 루니 같은 과거 팀원들에 의해 꾸준히 회자되었지만, 퍼거슨이 말한 챔피언스 리그 파이널에 대한 일화는 거의 처음으로 나온 얘기다.


후에 맨인유럽에서 박지성이 말하길 맨유 입단 당시 영어도 잘 못하고 외로워 할 박지성을 위해 퍼거슨 감독이 직원들에게 매일 핫초코를 챙겨주며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 주라고 하는 등 뒤에서도 세심하게 챙겨 주었다고 한다. 덤으로 핫초코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12. 기타

파일:퍼거슨경.png}}} ||
위쪽 사진은 대영제국 훈장 3등급(CBE)을 받을 당시 사진이고, 아래쪽 사진은 기사작위를 받는 장면이다. 참고로 비슷한 빨간 끈 목걸이라 얼핏 보면 구분이 안가는데, CBE 목걸이는 보라색에 가까운 빨간 끈 양측에 하얀색 줄이 있고 기사작위(Knight Bachelor) 목걸이는 진한 빨강색 끈 양측에 노랑색 줄이 있다.
  • 스코틀랜드영어 사투리가 매우 심하다. 박지성호날두 등의 외국인 선수들만 그런 게 아니라 영국 선수들조차 퍼거슨의 억양을 알아듣기 힘들었다고 할 정도이다.[54] 그래도 개인 면담을 할 경우에는 외국인 선수들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말을 해서 별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 주방 아주머니의 남편이 뭘하는지, 건강은 어떤지 다 알고 있으며 무슨 일이 나면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지고 지갑을 열었다. 청소 및 주방 아주머니들이 정리해고의 일환으로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은 클럽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이라며 절대 자르지 못하게 길길이 날뛰어서 막았다고.
  • 승부의 신이란 서적에 보면 에버딘 구단에 부상당한 선수를 위한 다용도 운동기구와 함께 당구대를 같이 놔뒀는데 선수들은 한 명이 운동하면 나머지는 당구를 치는 식으로 기구를 돌아가며 썼다고 한다. 평소에는 복도에 발소리가 들려 걸릴 일이 없었다는데, 어느날 퍼거슨이 용무가 있어 퇴근을 늦게 하면서 기구가 있는 곳에 들러버렸다. 그 때 애버딘 선수들 중 한 명이 기지를 발휘해 큐대를 등에 지고 운동을 했고, 퍼거슨은 그냥 웃고 갔다고 한다.
  • 1983년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전 당시 실수한 알렉스 매클리시가 실점의 빌미를 제공하자 그에게 그 유명한 헤어드라이어를 날렸다고 한다. 이후 애버딘은 레알 마드리드를 꺾고 대회 우승을 했다. 매클리시가 경기 후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면서 실수를 곱씹는데 퍼거슨 감독이 들어왔다. 옷을 입고 있어서 물이 바지에 튀었고 매클리시는 그게 웃겼다고 한다. 들어온 퍼거슨은 매클리시를 칭찬하고 나갔다.
  • 언론을 잘 이용할 줄 알았다. 또한, 자기 팀 선수를 보호할 때는 무슨 수를 써서도 보호하는 감독이었다. 다만 이게 가끔 지나치면 졸렬한 무리수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게 독일인 드립. 이 사건으로 바이에른 뮌헨이나 분데스리가 팬덤에서는 심심찮게 까인다. 독일인 드립이 무엇인지 덧붙이자면, 09-10 시즌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에서 3-1로 앞서다가 후반전 하파엘의 퇴장으로 경기력이 밀려 추격골을 먹혀 원정 다득점으로 패한 후, 전형적인 독일인 방식이라고 판정에 대해 음모론을 제기한 것이다. 게다가 아스날의 수비수 페어 메르테자커를 독일에 널리고 널린 선수라고 비하하여 논란을 빚기도 했다.
  • 영국 축구계에서 그 위상이 대단한데 역대 감독 순위에서 최소라도 3위를 차지하는 명장일 뿐만 아니라 감독 노조 위원장으로 활동한 것도 있고 그 연륜과 영향력도 발군이다. 심지어는 퍼거슨 감독의 아들과 관련된 정확하지 않은 고발 프로를 내보낸 BBC와 수 년에 걸친 신경전을 벌인 끝에 2011년 8월, BBC의 사장과 북부지역 총괄 디렉터 등이 나선 후에야 용서해주는 위엄을 보였다. 이때 BBC는 퍼거슨과 화해한 사실을 속보로 내보냈다고.
  • 또한 그 위상을 적극 이용해 심판들에게도 강한 압력을 행사했다. 만약 마음에 안 드는 판정이 나온다면 하프타임이나 경기 종료 후에 심판 대기실에 들어가서 심판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도 징계는 커녕 기사조차 은퇴하고 나서야 간신히 나오고 있다. 현역일 때는 한 줄도 기사화되지 않다가 모예스 부임 후에야 모예스는 퍼거슨과 달리 심판 대기실에 들이닥쳐서 난리를 피우지는 못한다는 식으로 은근슬쩍 드러내는 식으로.
  • 또한 위에서 언급했듯이 인터뷰 원칙에 어긋나거나 신경에 거슬리는 기자는 가차없이 인터뷰에서 배제해버리는데 맨유 기사를 싣지 못하면 스포츠지로 살 길이 없어지는 거나 마찬가지다. 때문에 인터뷰 금지를 당하는 기자는 스포츠 기자로서 치명타를 입는셈인데 이러한 기자 중 한 명이 나중에 투병 생활을 하게 되자 이 사실을 알고 위문 화환을 보내면서 다시 인터뷰해도 좋다고 허가해준 적도 있다. 다른 기자는 인터뷰 금지령을 풀기 위해 몇 달 동안 열심히 퍼거슨을 찾아다니며 해명하려다가 번번히 기회를 놓치자 열받은 나머지 크리스마스 무렵에 퍼거슨에게 들이닥쳤는데 거기서 퍼거슨이 의외로 관대하게 대해주는 바람에 감격(?!)해서 문제가 된 기사를 편집한 담당 에디터에게 닥돌해서 퍼거슨 대변인 노릇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래저래 무서운 영감님.
  • 선수 시절 골 넣는 스트라이커임에도 불구하고 감독한테 수비 안 한다고 늘 혼났다고 한다.[55] 또 이 때의 흑백사진을 보면 살집이 오른 감독 시절과 달리 꽤나 날렵한 선수였다.
  • 은근히 언플의 달인이다. 그래서 2천년대 한창 주제 무리뉴 감독이 리그에서 날아다닐 땐 불꽃 터지는 설전이 오고 갔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서로를 높이 평가하는 사이여서 주제 무리뉴도 2010-11 시즌에서 맨유의 우승이 확정되었을 때 여러 차례 퍼거슨을 띄워주는 인터뷰를 했고 퍼거슨도 주제 무리뉴가 엘 클라시코에서 물의를 빚으며 언론과 팬의 공격을 받자 이를 옹호하는 인터뷰를 했다. 퍼거슨 감독의 말로는 무리뉴가 자신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킨다고. 그래서인지 주제 무리뉴가 프리미어 리그를 떠난 후에도 종종 연락을 한다.[56] 물론 벵거 감독과도 아스날이 한창 잘 나갈 때에는 신나게 서로 갈구며 싸웠지만 아스날이 요즘 5시즌째 무관인 상태라서 그런지 요즘은 조용하다. 심지어 벵거 감독이 2011년도 여름 이적 시장에서 집중공격당할 때 그를 두둔하면서 쉴드를 쳐주기까지 했다. 영감은 치열하게 싸우던 적을 두둔하던 사례가 없던 건 아니고, 보통 그럴 경우 영감이 판단하기에는 그 적수는 이미 같이 정상에서 경쟁할 힘이 떨어진 상태다. 벵거와 든 정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싸우면서 든 정이 무서운 듯.그래놓고 2011-12 시즌 개막하니까 아스날을 가차없이 8:2로 발라버렸지. 하지만 이 때도 대승에 기뻐하긴 커녕 상당히 씁쓸해하는 표정을 보였다. 08/09 시즌에 리버풀이 한창 잘 나갈때 언플로 리버풀과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을 뒤흔들고 리그 우승을 차지한 적도 있다. 마찬가지로 95-96 뉴캐슬의 케빈 키건도 언플로 바르면서 우승을 낚은 적도 있다.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선수의 경기 출장에 관하여 팬과 언론에게 떡밥을 던지고 낚는 것은 다반사. 그런데 요즘은 자기가 자기 떡밥에 낚이는 경우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지금은 사이가 나쁜 라파엘 베니테스와도 처음에는 사이가 괜찮았다. 특히 베니테스는 프리미어 리그로 진출하기 전에 영국에 왔을 때 퍼거슨 감독의 안내로 올드 트래포드를 둘러보기도 했고 자신이 젊었을 때 롤 모델이 퍼거슨 감독이라고 인터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리버풀의 감독을 맡으면서 서로 충돌하다보니 지금은 사이가 많이 안 좋은 듯하다.
  • 불세출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는 감독이지만, 1985~86년에 잠깐 스코틀랜드 감독을 맡아 월드컵 조별예선에서 탈락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국대 감독 경력은 없다. 다른 사례도 있긴 하나, 그 명성과 경력을 보면 신기하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옛날 사람이라 하더라도 클럽 감독으로서 잘 나가던 사람이 국대를 맡는 일은 잘 없기 때문에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실상 한 해 내내 하는 리그 감독직이 월드컵같은 특정 기간에만 돋보이는 국대 감독직보다 보통은 평가가 높은 편이기 때문. 당장 벵거, 무리뉴와 뢰브, 데샹을 두고 누가 더 위대한 감독이냐고 물으면 대다수가 전자를 뽑을 것이다.
  • 가족 관계는 언급된 대로 아내 캐시, 세 아들과 그들의 가족이 있으며 동생 마크 퍼거슨도 유나이티드의 수석 스카우터로 재직중이다. 아내 캐시 여사와의 사이는 아주 좋은 편이며 소문난 애처가로 알려져있다. 프리시즌 경기가 있다고 말했음에도 아내가 어차피 친선경기아님?? 하면서 이삿짐 나르라고 해서 결국 경기장이 아닌 집에서 이삿짐 날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애초에 퍼거슨도 젊었을 때 한 성질머리 했기 때문에 그 성질머리와 함께한 아내의 내공도 만만찮다고 볼 수 밖에 없겠지만...나를 컨트롤할 수 있는 건 나의 아내 뿐이다 라는 명언도 남겼다. 은퇴를 결심하게 된 최초의 계기 역시 처형이 세상을 떠나면서 아내가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서 자신이 아내 옆에 있어줘야겠다 생각해서라고... 그렇게 감독직 은퇴 후 함께 노후를 보내며, 잘 살았으나, 2023년 아내 캐시 여사가 84세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 장남 마크는 재무회계 쪽 일을 하면서 아버지의 재정관리를 담당하며 둘째 대런은 축구 선수를 거쳐 감독일을 하고 있다. 셋째 제이슨은 축구 에이전트 쪽 일을 한다고.[57] 가족을 끔찍히 생각하며 아들들도 모두 아버지 집 근처에 산다고. 특히나 손주들에게 푹 빠져 산다고 한다. 손주 중에서 제이크 퍼거슨이 축구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리뉴의 딸 마틸다가 반해서 종이루비(종이학이라고도)를 접어서 선물했다는 그 손자이다.
파일:알렉스 퍼거슨.07.jpg
알렉스 퍼거슨 감독과 제이크 퍼거슨
  • 정치적으로는 열렬한 노동당 지지자이며 노동당에서 리더십 관련 조언을 하는 고문으로 활동한 적도 있다. 사실 조선소 노동조합 위원장까지 했던 사람이기도 하고, 노동자 계급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니 어찌보면 노동당 지지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노동당 지지세가 강한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는 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맨체스터가 속한 북부 잉글랜드 지역도 스코틀랜드와 비슷하게 노동당 지지자가 많다. 결국 그가 태어난 곳이나 오래 생활한 곳이나 노동당 정서가 강한 곳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족으로 이와 관련된 몇몇 에피소드가 있는데, 한 번은 맨유 구단에서 식당 종업원들과 청소부 등을 해고하려고 하자 감독직을 걸고 막았으며, 감독 초창기 데모하는 노동자들의 모금함을 그냥 지나쳤는데 같이 있던 조크 스테인 감독이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털어 그들의 모금함에 돈을 기부한 것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또한 감독 노조 위원장을 한 적도 있고 타 팀의 감독들이 연락해오면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언론과 팬들의 공격을 받는 감독들의 실드도 잘 쳐준다. 앙숙처럼 보이지만 언론을 통해 무리뉴도 변호한 적이 있다. 베니테스 감독한텐 아닌 거 같지만 넘어가자. 천하의 호지슨도 실드쳐주지만 베니테스는 무시. 그외에도 구단의 안내 데스크에서 근무하는 할머니가 정년퇴직을 하게 되어 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될 위기에 처했을 때도 그녀가 계속 근무할 수 있게 도와주고 출퇴근을 위해 택시를 수배해주기도 했다.
  • 스코틀랜드 출신이지만 확고한 스코틀랜드 독립 반대론자이다. 때문에 2014년 주민투표를 앞두고 독립 반대 진영의 단체인 베터 투게더(Better Together)를 열심히 지지하였고 직접 기부금을 냈다. 그는 주민투표에서 스코틀랜드에 거주하지 않는 스코틀랜드인의 투표권이 없는 것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스코틀랜드가 독립국이 아니므로 법적으로 '스코틀랜드인'의 범위를 한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부득이 스코틀랜드에 거주하는 영국 국적자+기타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잉글랜드에서 거주한 퍼거슨 경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독립 반대를 주장하면서 기부금을 내는 정도였고, 실제 주민투표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반면에 스코틀랜드에 살고 있는 잉글랜드인들은 투표권을 얻었다. 예를 들어 작가 J. K. 롤링은 잉글랜드 출신이지만 오래 전에 스코틀랜드 수도 에든버러에 이주했기 때문에(그 유명한 해리 포터 시리즈도 에든버러에서 집필함) 주민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 참고로 롤링 역시 퍼거슨 경처럼 스코틀랜드 독립에 반대해 베터 투게더를 후원했다.
  • 맨유 부임 기간 동안 리그의 화신답게 EPL에서 3위 아래로 떨어져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특히 그 중에서 준우승을 총 5번[58] 했는데, 그 다음해에 전부 우승을 했다.
94/95 준우승 → 95/96 우승
97/98 준우승 → 98/99 우승[59]
05/06 준우승 → 06/07 우승
09/10 준우승 → 10/11 우승
11/12 준우승[60] → 12/13 우승[61]
  • 퍼거슨이 맨유 감독을 은퇴한 뒤 현지에서 영국 의회의 상원인 귀족원(House of Lords) 의원으로 임명해 달라는 청원이 나왔다. 오늘날 정치적 실권은 하원인 서민원(House of Commons)로 넘어가 귀족원 의원은 거의 명예직이 된 상황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귀족원 의원들은 국가에 대한 공로와 전문성을 인정 받은 인물들이 추천을 받아 남작 작위를 받아(세습 불가. 즉 본인만 귀족 신분) 종신직으로 의원이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퍼거슨 경은 기사작위(Knight Bachelor)를 받긴 했으나 귀족원에 들어가려면 CBE는 물론 그보다 위인 기사작위로도 안 된다. 최소한 남작작위는 갖고 있어야 한다. 퍼거슨이 쓰고 있는 Sir는 준남작 이하 Knight Bachelor 이상에게 부여되는 경칭이다. 남작 이상의 작위를 받으면 그보다 격이 높은 Lord로 불리게 되며 귀족원의 일원이 된다. 상원의 이름이 괜히 House of Lords가 아니다. 다만 그가 정말로 남작으로 서훈이 될지는 미지수. 참고로 지금 귀족원이 너무 비대해진데다가(하원인 서민원보다 의원이 많은데, 상원이 하원보다 큰 나라는 전세계에서 영국 뿐이다.) 이런저런 논란이 많아 의원 정수 축소·제한 주장이나 아예 다른 나라처럼 선출직으로 변경하자는 주장까지 있다. 만약 100% 직선제로 바꾸게 되면 퍼거슨 경이 의원이 될 순 없을 듯. 본인이 몸소 선거에 출마한다면 또 모를까
  • 2013년에 월드 사커지에서 전세계 73명의 패널들을 상대로 올 타임 베스트 11의 투표를 진행했는데, 총 49표를 받아 46표를 얻은 리누스 미헬스를 제치고 감독 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토탈 사커를 창시한 미헬스, 카테나치오의 창시자 엘레니오 에레라, 압박 축구를 고안한 아리고 사키 등 현대 축구 전술의 기반을 다진 명장들과 현 시대 최고의 감독으로 손꼽히는 펩 과르디올라주제 무리뉴 같은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선정된 것이라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링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디까지나 베스트 11이 중점이 된 투표이기 때문에 표에서는 제외했다. 링크.
  • 퍼거슨 본인이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한국에 유럽 축구 대중화의 계기를 마련한 인물이기도 하다. 박지성이 2천년대 PL을 대표하던 빅클럽 맨유에 스카웃되고 꽤 활약하면서 언론에서 유럽 축구를 다루는 빈도가 급격히 상승했기 때문. 한창 시절엔 '제한맨'이라 할 정도의 맨유 공화국이었던 당시 해외 축구 팬들 사이에서 퍼거슨은 맨유 클럽 감독인지 한국 대표팀 감독인지 헷갈릴 정도로 최고의 지분을 자랑하기도 했다. 물론 한편으론 한국인 선수를 데리고 있는 빅클럽 감독의 고충을 겪게 된 원조로, 당시 믿을맨 박지성에게 궂은 일을 전담시키거나 말년쯤 벤치에 앉혀 놓는 빈도가 늘어날 땐 안티들에게 노망난 영감탱이라 불리기도 했다.
  • 박지성이 은퇴한 이후에도 한국에서 인지도가 제법 있는 편인데, 바로 이 희대의 명언(?) 덕분. 축구에 큰 관심없는 스포츠 이외 분야 뉴스에서도 이 말이 회자되면 거의 100이면 100 1승 얘기(...). 은퇴 이후에도 승률이 엄청나다.
  • 첫사랑 상대가 축구 선수 트렌트 알렉산더아놀드외할머니였다고 한다. 1년 반 동안 사귀었으나 외할머니가 뉴욕으로 이민을 가게 된 탓에 헤어지게 되었다고.[62] 이외에도 아놀드의 외가 쪽은 맨유와 인연이 상당히 많다. 자세한 내용은 아놀드 문서의 여담 항목 참조.
파일:Alex Ferguson Statue_Aberdeen FC.jpg}}} ||
2022년 2월 26일, 에버딘피토드리 스타디움에 퍼거슨의 동상이 세워졌다. 1970~80년대 애버딘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공로로 세워졌다.
  • 수많은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 퍼거슨 감독이지만 국제 대회에서만큼은 원정 다득점 룰에서 항상 발목을 붙잡혔다. 이 징크스가 어찌나 지독했는지 그의 40년간의 감독 생활중,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탈락한 적은 무려 7번[64]이나 되지만, 원정 다득점 원칙의 수혜를 받고 다음 라운드에 진출한 사례는 단 한번도 없다. 즉 홈어웨이 경기 합산 스코어가 동점이 되는 순간 단 한번도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지 못했다는 소리.[65] 결국 이 징크스는 퍼거슨 감독이 먼저 은퇴함에 따라 끝내 깨지 못한채 마무리되었으며[66] 8년뒤 원정 다득점 원칙 역시 폐지됨에 따라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 외 유일하게 퍼거슨 감독은 원정 다득점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대회에서 딱 한 번 수혜를 본적이 있는데, 바로 91/92 시즌 리그컵 4강전이다. 이 대회 같은 경우 특이하게 4강전에 한해 원정 다득점 원칙을 적용하지 않았는데[67][68] 이 당시 미들스브로와의 대결에서 1차전 원정을 0:0 무승부로 마쳤고, 홈경기인 2차전을 1:1로 마쳤다. 이게 UEFA 대회 룰이었다면 퍼거슨 감독은 또 다시 원정 다득점의 악몽으로 탈락하는 거였으나, 앞서 말했듯 이 대회는 180분간의 경기에선 원정 다득점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 룰이였고, 연장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 연장전에서 맨유가 결승골을 넣어 결승전에 진출했으며, 해당 대회 맨유는 결국 우승을 차지했다. 여러모로 원정 다득점과는 인연이 아예 없다고 봐야 될 수준.


[49] 이 껌은 경매에서 39만 파운드(한화 약 5억 8,000만원)에 낙찰되었다.[50] 박지성이 QPR 이적 전 팀 내 연봉 순위 3위였다. (루니, 퍼디난드 바로 다음이었으며, 연봉 81억.) 루니가 그때 당시 154억. 박지성이 새로운 팀을 알아보던 와중에 맨유가 인상된 연봉으로 재계약을 제시했으나 박지성이 거절할 정도로 퍼거슨과 맨유는 박지성을 잡고 싶어했었다.[51] 그 당시 영상을 보면 퍼거슨이 상당한 용기를 냈다고 할 수 있다. 박지성이 QPR로 이적한 첫 시즌에 맨유와의 QPR 홈 경기에서의 일이다. 경기 시작 전, 퍼거슨이 QPR쪽 벤치에 직접 걸어가서 벤치 앞을 소심하게(...) 서성였는데 이적하게 만든 상황이 미안했는지, 퍼거슨답지 않게 박지성에게 먼저 말을 못 걸고 쭈뼛쭈뼛 서성였다. 벤치에서 서브 멤버로 대기하던 박지성 선수는 이를 퍼거슨 감독이 자신에게 간단한 인사를 하기 위해 다가왔다는 제스처라고 간파하고 벤치에서 일어나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퍼거슨 감독에게 악수를 청했다. 퍼거슨도 흡족한 미소를 띠며 박지성과 악수 및 간단한 안부 인사를 하고 바로 맨유 쪽 벤치로 돌아갔으며, 상당히 훈훈한 장면이기도 하다.[52] 당시 밀란의 중심이자 핵이던 피를로를 박지성에게 전담마크시켰고, 박지성은 피를로를 지워버렸다.[53] 이후에 잠시 자신의 결정에 아직도 큰 후회가 남는 듯이 말을 멈췄다.[54] 원래 스코틀랜드 사투리가 알아먹기 괴악한 것으로 유명하다. 영국인들 사이에서도. 그래도 비 스코틀랜드 영국인들과는 같은 언어라 그런지 자주 듣다보면 이해하는데 문제는 없다고 한다.[55] 현대 축구에선 공격수의 전방 압박 및 수비 가담이 굉장히 중요시 되지만, 퍼거슨이 선수로 뛰던 때인 1960~70년대에는 공격수의 수비가담이 전술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요구되지 않았다. 그 당시로 따지면 희귀한 케이스.[56] 무리뉴 감독은 자신이 첼시에 부임한 초기에 올드 트래포드에서 맨유를 이긴 후, 퍼거슨 감독이 포도주를 같이 마시자며 상대팀 감독인 자신을 감독실로 초청해서 환대해 준 것에 감명받았다고 한다. 2007년에도 비슷한 사례로 같이 식사도 했는데, 무리뉴 본인이 회상하길 혹시 이것이 자신을 후계자로 데려가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잠시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퍼거슨 은퇴 후 그 후계자는 누가 될 것이냐는 의문에 무리뉴 감독의 이름이 많이 올라왔지만, 결국 데이비드 모예스로 결정났다. 그리고 모예스는 경질되고, 후임은 루이 반 할이 되었다. 반 할은 2년간 맨유 감독을 하다 경질되고 2016-17 시즌부터 맨유 감독은 무리뉴가 맡게 되었다![57] 알렉스 퍼거슨 경이 뇌출혈로 쓰러졌다가 다시 회복한 후, 자신의 기억을 어떻게든 남기고자 하는 아버지의 요청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영화는 2021년 개봉한 《알렉스 퍼거슨: 좌절은 없다 (Sir Alx Ferguson: Never Give In)》[58] 그중 4번이 1점 차 준우승이었고 마지막은 승점 동률 득실 차 준우승이었다.[59] 트레블 시즌[60] 승점 동률 득실차 준우승[61] 은퇴 시즌[62] 헤어진 이후에도 종종 연락을 했는지 아놀드 리버풀 유스에 들어갔을 때 왜 맨유 유스로 안 보냈냐고 물었다고 한다.[63] 퍼거슨의 경우, 1986년 맨유 부임 이후 각각 1992-93 시즌 프리미어 리그 우승, 1989-90 시즌 FA컵 우승, 1991-92 시즌 리그컵 우승, 1998-99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약 13년 만에 처음으로 모두 달성했다.[64] 그 중에 01/02시즌 레버쿠젠과의 챔피언스 리그 4강전에서 원정 다득점으로 탈락한 대회의 경우 퍼거슨 감독이 감독 생활을 하면서 가장 후회되는 경기라고 회상했다. 결승전 장소가 그의 고향인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였기 때문.[65] 1,2 차전 모두 동일한 스코어가 나올 경우 승부차기로 승부를 가리게 되는데, 심지어 이러한 경우에도 승부차기에서 모두 패했다.[66] 맨유는 결국 퍼거슨 감독이 은퇴한 뒤에야 원정 다득점의 수혜를 봤는데, 그게 바로 18/19 시즌 PSG와의 챔피언스리그 16강전. 홈에서 0:2로 패배했지만 원정에서 극적인 3:1 승리를 거두며 8강에 진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퍼거슨 감독 시절에 비해 한창 암흑기 시절에서야 수혜를 본 셈.[67] 정확히 얘기하면 1,2차전을 합친 180분간의 경기에선 원정 다득점 원칙을 적용하지 않지만, 2차전의 연장전이 끝난 그 순간에는 원정 다득점 원칙을 적용한다.[68] 이 룰은 2018-19 시즌부터 클럽들의 투표로 인해 1,2차전이 끝난 직후에도 승부가 나지 않을 경우 연장전 없이 바로 승부차기로 돌입하여 승자를 가리는 진행방식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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