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2 11:22:40

알렉스 퍼거슨/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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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드 트래포드2. 장수 감독3. 자서전 발간4. 감독5. 진화하는 감독6. 상왕7. 퍼기 타임8. 퍼9. 박지성과의 관계10.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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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드 트래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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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퍼거슨 경 스탠드
재임 시절, 2011년 11월 5일,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맨유 부임 25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북쪽 스탠드의 이름을 올드 트래포드 맨체스터(Old Trafford Manchester)에서 알렉스 퍼거슨 경 스탠드(Sir Alex Ferguson Stand)로 개명했다. 기존의 명칭은 남쪽 스탠드로 옮겨놓았다가 보비 찰튼 경 스탠드로 개명 이후 철거했다.

퍼거슨 경 동상 오픈 행사. 영상

맨유에서의 이룬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올드 트래포드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고, 2012년 11월 23일 공개되었다. 이 행사에 그의 제자들인 에릭 칸토나, 피터 슈마이켈, 에드윈 반 데 사르, 올레 군나르 솔샤르. 뤼트 판니스텔로이, 드와이트 요크, 앤드루 콜, 라이언 긱스, 개리 네빌, 필 네빌이 참석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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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우 자랑스러운 순간이야.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죽은 후에야 동상이 세워지잖아. 근데 난 살아있네!
● 와이프는 날 컨트롤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약속했어요, 매주 토요일마다 동상에 절을 한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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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엔 퍼거슨의 공헌을 기념하여, 그의 이름을 딴 길도 생겼다. 원래 이름은 워터스리치(Waters Reach Road)로 트래포드 자치구에서 의회의 승인을 얻어 길의 이름을 바꿨다. 알렉스 퍼거슨 경 길(Sir Alex Ferguson Way)은 맷 버스비 경 길(Sir Matt Busby Way)과 연결되어 있다. 맨유의 감독, 스탭들, 선수들은 OT에 출근할 때마다 이 두 길을 지나치게 되는 것이다.
1986년에 올드 트래포드에 도착했을 때 앞으로 기다리고 있는 여정들을 생각하지 못했다. 트래포드 자치구로부터 영예를 받고 내 이름을 딴 도로가 생긴다고 하니 영광스러울 따름이다. 지난 27년 동안 위대한 클럽에서 역사를 만들었고 믿을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드린다. 출처

2. 장수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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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7월 존 홀린스첼시의 감독으로 부임한 이래, 2013년 라파엘 베니테즈까지 총 18명의 감독이 다녀갔다. 반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알렉스 퍼거슨, 단 한 사람으로 설명할 수 있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EPL에서 축구 감독의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 짧다는 얘기가 있다. 2006년 영국 워릭 경영대학원(Warwick Business School)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1992년부터 2005년까지 잉글랜드 감독들의 평균 재임기간은 약 2년이었다. 허나 퍼거슨 감독(스코틀랜드 출신)은 무려 27년간 재임하고, 성공신화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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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거슨이 재임했던 27년 중 25년만 보더라도 레알 마드리드는 24명, 인테르는 19명, 첼시는 15명, 유벤투스, 바이에른 뮌헨, 맨시티는 14명, AC 밀란은 13명, 바르셀로나는 11명이 감독으로 거쳐갔다.

그리고 은퇴 후, 사무국과 후임 감독들의 삽질로 인해 그 존재감이 끊임없이 재평가되고 있는 명장이다.

3. 자서전 발간

에브라가 전화로 알려줬는데, 브라질 월드컵 준비과정의 일환으로, 프랑스 국가대표팀 데샹 감독이 선수단 전원한테 내 자서전을 읽도록 했다고 했다더라. 선수들이 책을 편 지 5분 만에 숙면을 취했다고 숙면에 효과가 좋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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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을 인증한 제자 제라르 피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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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아버지 따라서 퍼거슨과 사진찍었던 소년은 훗날 장성하여 자서전을 사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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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자서전의 발간식에서 논란의 월드클래스 발언이 나오는데,
(기자)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이 여태 봐온 최고의 선수들은 누구죠?
(퍼거슨) 펠레, 디 스테파노, 마라도나, 크루이프.
(기자) 순서대로입니까?
(퍼거슨)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요즘 언론을 보면 '월드클래스'라는 수식어가 너무 남발되고 있어. 내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지도 했던 선수들 중 '월드클래스' 선수는 4명 뿐이야. 폴 스콜스, 라이언 긱스, 에릭 칸토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지. 그들은 차이를 만들어 냈고 그것이 그 증거지. 칸토나는 프리미어리그 첫 우승의 기폭제가 되었지. 스콜스와 긱스는 어릴때부터 환상적인 선수였으며, 두 선수 모두 오랫동안 활약했지. 프리미어리그 전체를 통틀어 그들 만큼의 레벨에서 계속 활약한 선수가 있을까? 없다, 절대로 없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완벽한 천재 플레이어지. 가장 재능있었던 제자는 호날두야. 또한 현재 월드클래스라고 칭할 만한 선수는 오직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뿐이야.

이 발언에 대해 베컴"응. 나 월클 아닌거 맞아"라며 쿨하게 반응했지만 퍼디난드는 본인의 페이스북에 "월드클래스의 기준이 무엇인가? 그것은 상당히 애매모호하다. 선수의 평가 기준이 될 수있는 요소는 다양하다. 예를 들어 훌륭한 골잡이, 훌륭한 골키퍼, 훌륭한 태클러, 팀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정신적 지주 등이 있다. 누가 월드클래스 선수이며 월드클래스란 대체 무엇인가?"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참고로 해당 자서전에서 퍼거슨은 베컴에 대해 '베컴은 훌륭한 축구 선수보다도 패션계의 아이돌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때문에 맨유에서 나간 이후로는 톱 플레이어라 불리울 수 있는 영역에 단 한번도 다다르지 못했다'라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정점을 기반으로 꾸준함을 +@로 치는데에 반해, 퍼거슨 같은 경우는 꾸준함을 중점에 두고 선수를 판단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감독 입장에서는 꾸준히 일정 수준을 유지해주는 믿을 수 있는 선수가 더 선호되기 마련이다.

● 은퇴 후에도 영감님의 판독기는 여전히 가동 중이다. 프리미어리그는 이달의 감독상, 선수상, 그리고 이달의 골 수상자를 매달 발표하는데, 수상자 선정에 참여하는 전문가 패널 구성단에 알렉스 퍼거슨 경과 퍼디난드가 포함되어 있다. 참고로, 사상 처음으로 16/17 시즌에는 일반 팬들의 투표도 반영되고 있다. 팬 투표는 전체 결과에 10%로 반영. 또한 이달의 선수상에 한해서는 프리미어리그 20개 클럽의 주장들 역시 투표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본 책 이후에 Leading이라는 책을 하나 더 발간했다. 이 두 권의 책은 영국, 유럽 내에서 축구 서적 중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도서다.

4.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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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스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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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만 몇 년째. 현실은 우승. 그것도 2위와 승점 11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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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감독놀음. 감독이 퍼거슨이야.[2]
재정적인 악조건 속에서도 감독빨로 팀을 우승시킨 퍼거슨 덕분에 맨유는 PIK 부채를 모두 정리할 수 있었다. 물론 퍼거슨이 마냥 망한 팀에서 오로지 감독빨로만 우승했냐 하면 그건 아니고 위상 대비 상대적 지원 측면에서 그렇다는 소리이다. 글레이저가 맨유를 인수하는데 사용한 대부분의 자본은 맨유 구단의 자산을 담보로 잡고 빌린 차입금으로부터 나왔고, 이것은 연간 6천만 파운드의 이자를 발생시켰다. 나머지 금액은 PIK 대출로부터 나왔는데, PIK에 대해서는 맨유 구단은 이에 대해서는 갚을 책임이 없고 이 대출은 모기업 Red Football이 가진 맨유 구단의 지분을 담보로 잡고 빌린 것이다. 이 PIK 대출의 이자율은 연간 14.25%이다. 글레이저 가문은 PIK 대출을 맨유를 인수한 첫 5년 동안 원금을 상환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0년 1월 맨유는 5억 파운드(7,500억원)에 달하는 채권 발행에 성공하였으며, 2010년 4월까지 PIK 대출은 2억 파운드(3,400억원) 가량 남았고 이것은 2010년에 알려지지 않은 방법으로 모두 상환되었다.

퍼거슨이 은퇴한 이후 오히려 더 돈을 많이 쓰는 맨유가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걸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3][4] 퍼거슨이 유스에서 선수를 기용하고 발굴해내고 같은 리그 하위권 팀에서 영입을 주로 하던 것과 대조되게, 퍼거슨 이후의 맨유는 레알의 챔스 우승 주역인 앙헬 디 마리아, 네덜란드 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했던 유망주 멤피스 데파이, 도르트문트에서 좋은 활약을 하던 헨리크 미키타리안 등 이름값 있는 선수들을 꽤나 많이 영입했으나 모조리 실패했다.

심지어 미키타리안과 스왑딜로 데려온 알렉시스 산체스마저 실패함과 동시에 감독들마저 우승권은 커녕 챔스권도 간당간당한 성적을 유지하면서 암흑기에 빠져들 기색을 보였고, 주제 무리뉴는 유로파 리그 우승을 일구어 냈으나 팀 성적이 추락하며 경질당했다. 이후 퍼거슨 밑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누구보다 맨유를 잘 아는 올레 군나르 솔샤르가 감독으로 부임하며 이름값이 아닌 맨유에 필요한, 맨유에서 진심을 다해 뛸 선수를 영입하는 정책으로 바꾸면서 다시 재건의 기미를 보이고 있기는 하다만, 당시 톰 클레벌리, 조니 에반스 등을 데리고도 우승을 일구어내던 퍼거슨의 위상을 알 수 있다. 물론 당시에도 최전방 스트라이커는 최고 수준으로 항상 준비해왔던 퍼거슨이였으나, 미드필더진은 은퇴를 준비하던 라이언 긱스폴 스콜스를 억지로 붙잡아둘 정도로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EPL이 최고의 선수들이 즐비할 뿐만 아니라 승격팀마저 타 리그 수준급 에이스급을 영입할 만큼 부유한 리그 상황을 생각하면 더욱 더 대단하기 이를데 없다.

그래서인지 퍼거슨의 은퇴 이후 큰 영입 없이 팀을 이끌다가 성적 부진으로 경질당한 데이비드 모예스가 사실 명장이 아니냐 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퍼거슨이니까 그 스쿼드로 우승했지 그 스쿼드로 그만큼 한 것도 기적이라는 얘기다.

다만 공격수만큼은 월드클래스에 가까운 선수를 보유하려는 노력을 보여줬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오프 더 볼이 뛰어난 타고난 골잡이 유형의 선수를 최소 1명 이상 보유하려고 했다.[5] 마크 휴즈, 에릭 칸토나, 앤디 콜, 솔샤르, 뤼트 판니스텔로이, 웨인 루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카를로스 테베스, 로빈 반 페르시 모두 공간 활용을 이해하고 마무리 능력은 최고라고 평가받았던 공격수들이다.[6] 이러한 머리가 좋고 마무리가 뛰어난 공격진들이 있었기 때문에 퍼거슨은 패널티 박스까지 공을 가지고 가는 빌드업에 집중하였고, 맨유 특유의 중앙 수비수가 중앙 미드필더에게 공을 주고 그 공을 반대편 측면의 윙어에게 넘겨서 압박이 덜한 측면 공간으로 안전한 사이드체인지를 이룬 뒤 패널티박스로 크로스를 해서 그걸 귀신같이 최고의 공격진들이 넣어버리는 플레이로 승리를 챙겨오는 전술을 짤 수 있었다. 또한 중앙 수비수들이 공을 잡는 상황에서도 언제든지 수비진이 복귀할 수 있게 하프라인 아래에 풀백들을 배치해서 상대의 역습을 저지하는 빌드업 전술은 맨유의 수비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 흔히 맨유 팬들도 잘하고 있지 않은 거 같은데 왠지 경기는 이기고 있다고 평가하는 경기가 많았던 것도, 빌드업이 매우 효율적이라 화려한 플레이가 없이 공을 패널티 박스로 가져가고 그걸 귀신같이 넣어버리는 뛰어난 공격수들과 철저한 역습 방지까지 조화가 이뤄져서 계속 상대의 공격을 가드하다가 몇 번 묵직한 공격을 날려서 상대를 쓰러트리는 식의 경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5. 진화하는 감독

알렉스 퍼거슨이 갱신해 왔던 신화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으며, 그는 유럽 축구에서 나타난 전술적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잘 취합하여 완성된 형태로 선보이는 감독이다. 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마지막 시즌의 전술 변화, 이전까지 주 포메이션으로 사용하던 442에서 4-2-3-1 내지는 4-5-1로 포메이션을 변경하고 테크닉있는 공미를 위주로 한 점유율을 중시하는 전술을 도입하면서 세계적인 트렌드를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고 또다시 딱히 강해보이지 않는 스쿼드로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거뒀다.

아마 계속 현역이었다면 전방압박과 라 볼피아나와 센터백들을 통한 후방 빌드업도 흡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 스리백도 성공적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위의 서술들을 읽다보면 슬슬 눈치챘겠지만 딱히 본인만의 전술적인 철학이 있는 감독은 아니었다. 많은 축구팬들이 '퍼거슨하면 생각나는 전술, 경기 스타일이 있느냐?'라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누구보다 인심 장악, 동기 부여에 뛰어난 감독이었고 전술가로서는 본인의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고 늘 새로운 전술 트렌드를 제대로 이해하고 본인의 전술에 더하는, 마치 마인 부우같은 감독이었다. 퍼거슨의 팀이 늘 우승 경쟁을 해왔던 것은 이런 변화를 수용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7]
셀틱의 10분의 1도 안되는 금액으로 수십 년간 이어진 셀틱과 레인저스 양강 체제를 무너뜨렸다.
UEFA 클럽 랭킹 106위였던 에버딘을 6위로 올렸다.
● 13살에 데이비드 베컴을 스카우팅. 이후 베컴은 맨유를 넘어 잉글랜드를 상징하는 세계적인 아이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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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런던 올림픽 홍보대사, 베컴
헤이젤 참사UEFA 리그 랭킹 3위였던 영국 리그가 한 순간에 29위까지 밀려나며 추락. 헤이젤 참사로 잉글랜드 전체 클럽들이 5년간 유럽 무대를 금지당했고 우수한 용병도 떠났다. 캄프 누의 기적을 일으키며 트레블을 달성, 박살나버린 영국 리그를 캐리했다. 팀의 핵심으로는 7명이나 되는 유스 출신이 뛰고 있었다.
캄프 누의 기적으로 가장 극적인 트레블을 달성했다. 경기 종료 직전 3분 안에 그것도 교체선수들이 들어와서 2골이나 넣으며 역전하는 드라마틱한 경기 스토리를 만들었다.
● 슈퍼스타 베컴의 탄생으로 클럽의 가치가 상승하면서 거부들이 영국 리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글레이저가[8]맨유를 2005년에 인수했다.[9] 그러나 대부분 인수자금은 구단자산을 담보로 빌린 것으로 부채가 없었던 맨유의 재정이 단기적으로 악화되었다. 이러한 재정적인 상황 속에도 '로테이션' 신공과 감독빨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지금 맨유의 재정은 안정된 상태로 최근 폴 포그바로 월드레코드, 리그레코드, 클럽레코드를 동시에 갱신해 화제를 모았다.

퍼거슨이 26년간 만들어낸 브랜드 이미지는 오늘날 메가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있게 했다. 맨유는 미국 자동차 회사 GM의 쉐보레와 유럽 축구 스폰서십 역사상 최대 금액의 스폰서십 계약을 체결했는데 2014-15 시즌부터 7년간 무려 5억 5,900만 달러(한화 약 9,000억 원)에 달하는 대형 딜이다.

6. 상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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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모든 경기장 스텝, 연습생, 어린이들, 그리고 저를 포함한 모든 코칭 스텝, 심지어 구단주까지도 아침 6시에 불러내 경기장 눈을 치웠습니다.
● I am comfortable with the Glazers. They have been great. They have always backed me whenever I have asked them. I have never faced any opposition. 난 글레이저 가문과 함께 하는 게 편했어. 그들은 아주 잘 해줬지. 그들은 내가 언제 무엇을 요구하든 지지해줬어. 반대에 부딪힌 적은 한번도 없었지.
● 2010년 글레이저와 데이비드 길(전 맨유단장)이 루니의 급여를 엄청 올리기로 결정하면서, 내 기분이 어떤지 알고 싶어했어. 난 솔직히 루니가 내가 받는 돈의 2배를 거머쥐는 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지. 암튼 그걸 그대로 말하니까 조엘 글레이저가 바로 말하더군. '나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쩔수 있나요' 간단했어. 나보다 더 많은 선수가 있으면 안될거라고 합의를 봤지. 참고1 참고2
퍼거슨 감독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대한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다.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운영하는 주체는 글레이저 가문이지만 퍼거슨 감독은 재임 시절 글레이저 가문을 뛰어넘는 대단한 영향력을 맨유에 행사하였다. (2011년경) 맨유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식되는 브랜드에 Google, Apple, BBC, Dyson, Facebook에 이어 6위를 차지한 바 있다. 이 조사를 한 Brand Finance의 스포츠 브랜드 평가팀장인 David Chattaway는 글레이저의 이 같은 성공 비결의 핵심요인 중 하나는 클럽의 궁극적인 브랜드 매니저(the club's ultimate brand manager)인 퍼거슨 감독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EPL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로 선정되기도 한 퍼거슨 감독이 은퇴한 뒤 미국 뉴욕 증시에 상장된 맨유의 주가가 꾸준히 하락세이자, 영국 경영컨설팅 회사 A.T.커니의 이매뉴얼 험버트 스포츠 담당 전문가는 "애플이 스티브 잡스를 잃었던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평했다.

은퇴 후의 행보를 통해 상왕의 위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은퇴 후 데이비드 모예스, 루이 판 할 그리고 조제 무리뉴의 경기를 볼 때마다 불안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물론 무리뉴가 맨유 감독 초중반에는 유로파리그를 우승하게 만들어 챔피언스리그에 복귀할때는 기쁜 감정을 내비췄으나 퍼거슨의 못마땅한 표정 및 불안함은 후임감독의 선수 운영 및 전략, 전술에 불안함을 암시한다. 후임 감독에 대한 그의 불신으로 이어지며 결국 경질될 확률이 높아진다.

7. 퍼기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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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기 타임 (Fergie Time)
이기고 있는 경기 혹은 지고 있는 경기에서 추가 시간에 심판에게 자신의 시계를 가리키는데, 이는 주심 및 심판진들에게 쉽사리 경기 종료를 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와 추격하는 상대팀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실제로 퍼거슨의 맨유는 후반 추가시간에 역전골 혹은 동점골이 유독 많이 나오기도 했으며 과거 2009-10 시즌 OT에서 열린 맨체스터 더비에서 마이클 오언의 역전골로 4-3으로 승리한 경기 또한 후반 추가 시간의 추가에서 나온 골이다. 이 경기는 퍼기타임이라는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캐릭의 교체투입과 벨라미의 골세레머니로 시간이 좀 흘러서 합당한 비공식 추가시간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 행동은 이른바 "퍼기 타임"이라고 불린다.

훗날 은퇴 후 인터뷰에서 실제로는 시간이 어느 정도 남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며, 심판과 상대팀에게 압박을 가하는 심리적인 트릭이었다고 하며 일부러 시계를 보면서 심판이 과감하게 경기를 끝내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실제로 시간적 이득을 많이 보았고 12-13 시즌 한정 BBC는 맨유가 지고있을 때 평균 79초라는 비공식 추가시간이 주어졌다고 보도했다. 이것은 영국 언론들의 구설수에도 자주 오르는데 심판을 압박해 판정에 이득을 받는다는 것이 논란이 되는 대목이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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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거슨이 마지막으로 씹은 .
이 껌은 39만 파운드(한화 약 5억 8,000만원)에 낙찰되었다.

슨이란 별명이 있는데, 경기 중에 보면 항상 껌을 씹고 있기 때문이다. 껌 씹는 속도는 그 날 경기력에 따라 다르다. '껌영감' 대신 '퍼껌슨'이라고 더 많이 불린다. '껌거슨'이라고도 불린다.

참고로 경기당 씹는 껌의 개수는 1개라고 한다.

9. 박지성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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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은 2~3년 내로 맨유맨이 될 것이다. 그를 믿기에 데리고 왔고 또 그만큼의 활약을 할 수 있는 선수이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생각에 의아해했지만, 2~3년 내로 분명히 사람들은 나의 결정에 동의할 것이다.
(박지성 QPR 이적시, 퍼거슨 경이 쓴 편지) 지성이에게. 나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대한 네 충성심에 감사하고 새로운 구단에서의 행운을 빌어주며, 널 보내야 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편지를 일찌감치 네게 보내지 못했던 걸 부디 용서해라.[10] 네가 원했고, 필요했던 출전 수를 제공하지 못했던 게 안타깝다. 내가 널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야. 프로 정신, 충성심, 그리고 결단력 같은 면에서 너만큼 신뢰를 할 수 있었던 선수는 없었단다. 난 네 무릎 수술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너의 건강한 모습을 항상 유지하고 싶었다. 물론 이런 말도 네게는 부당했을 테고, 아마 그 결정이 달갑지 않았을 게다. 특히 내 손자는 가장 좋아했던 선수인 널 다른 팀으로 보낸 이후로 아직도 나에게 말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마음에 걸리고 있지만, 너를 보낸 결정이 얼마나 어려웠던 건지 네가 이해해주길 바란다. 유나이티드 소속이던 시절 네 돋보이는 능력을 신뢰했고, 내 코치진들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 넌 내가 보유한 선수들 중 가장 충성심있고 정직한 선수 중 하나였고, 우리 팀에 너처럼 예의가 바른 선수가 있어 자랑스러웠다. 의심의 여지 없이, 넌 축구계의 환상적인 대표 인사이며, 영어에 그렇게 빨리 적응하며 안착하는 걸 보면, 네 결의력과 열정이 축구 뿐 아니라 삶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구단의 모든 이들을 대표해 새로운 구단에서의 성공을 빈다. 지성아, 난 언제까지나 너를 내 선수 중 하나로 여길 것이고, 언제고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날 찾아와라. 마지막으로 너와 네 가족이 언제나 행복하고 행운이 깃들길 바란다.
{{{#!folding [영어 원문]
Dear Ji Sung,

Please forgive me for not having written to you before now to thank you for your loyalty to me and Manchester United and to wish you good luck in your new club, but also the explain my reasons in letting you go.

My disappointment was that I didn't give you the football that you wanted, and needed. It must have felt to you that I was ignoring you but that is far from the truth, there was no player I could trust as much as you in terms of your professionalism, loyalty and determination. I was always conscious of your knee injury and therefore always liked to keep you fresh and of course this wasn't fair to you and understandably didn't enjoy the decision. It is something that still plays on my mind especially as I now have a grandson who still won't speak to me for letting his favourite player move to another club, but I hope you understand the reasons fully now and how difficult a decision it was.

In the time you played was a credit to your outstanding ability and I know it is shared by all my staff as you were in my opinion one of the most loyal and honest players I have had the pleasure to work with and I was proud to have had such a well mannered man in my team.

You are without doubt a wonderful ambassador for football, and the way you settled in and got an excellent command of the English language so quickly was a credit to your determination and enthusiasm not only for football but for life, and on behalf of everyone at the club I wish you success with your new club.

Ji Sung I will always look upon you as one of my players and if you ever need my help you know where I am. Finally I wish you and your family every happiness and Good luck.

Your sincerely,
Alex Ferguson}}}
박지성이 QPR으로 이적할때 박지성은 아주 소중한 선수고 그가 그리울 것이라며 좋은 매너를 보여주어 박지성이 맨유를 나올때 훈훈한 장면을 연출했다. 거기다 QPR과의 경기에서 손수 벤치까지 행차하여 박지성을 찾아가 악수[11]하여 그의 위신을 세워줌으로서 국내 네티즌들에게 역시 멋진 영감님이라고 칭찬을 받았다.

이후 시간이 지나 박지성이 은퇴하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앰버서더에 위촉되자 위촉식에 퍼거슨이 함께 했다. 은퇴 이후 퍼거슨이 관중석에는 참여했지만, 올드 트래포드 그라운드에 공식 행사로 입장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이 당시 구단 관계자들과 팬들이 많이 흥분했다고 한다.

팀 내 상당히 높은 주급 순위나 박지성이 출전한 경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퍼거슨은 박지성을 전략적으로 잘 활용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대 AC밀란 전에서 피를로를 괴롭혔던 경기가 있는데[12] 주로 상대팀의 주요 선수를 묶어놓는 역할이나 공수를 연결하는 교두보 역할을 맡겼다. 대부분 기용되는 경기가 보통 리그 내 강팀과의 경기거나 챔피언스리그에서 중요한 경기였다. 퍼거슨 입장에서 박지성은 강팀과의 경기에서 믿고 쓸 수 있는 카드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2021년 5월 제자 개리 네빌과 진행한 LAD Bible과의 인터뷰에서 "감독했던 선수 중 가장 과소평가된 선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브라이언 맥클레어, 박지성, 로니 욘센이라 대답하였다. 네빌이 박지성의 유명한 피를로 전담 마크 일화를 꺼내자 퍼거슨은 2010-11 시즌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 리그를 회상하며 박지성을 메시에게 전담 마크 시켰어야 했고 그러지 못했던 것은 자신의 실수라 고백했다.[13] 동시에 경기 중에 전술 변화를 주어야 하는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하프타임까지 맨유는 꽤나 선전하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러지 못했다며, 메시는 엄청난 선수였지만 그런 선수를 묶을 수 있을 선수는 박지성뿐이라고 대답했다. 여담으로 국내 축구 선수 중 역대 레전드가 차범근이냐 박지성이냐 손흥민이냐 등에 대해선 의견차가 다양하겠지만, 적어도 박지성이 맨유의 일원으로서 퍼거슨에게는 립 서비스의 대상이 아닌 정말 중요한 선수였다는게 해당 인터뷰를 통해서 드러났다. 특히 한국과 전혀 관계가 없는 순수한 그들만의 인터뷰에서 박지성의 이름이 나왔다는 점은 이게 립서비스가 아니라 진짜 퍼거슨이 평소 생각해오던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또 그동안 박지성의 피를로 봉쇄는 퍼디난드, 스콜스, 네빌, 루니 같은 과거 팀원들에 의해 꾸준히 회자되었지만, 퍼거슨이 말한 챔피언스 리그 파이널에 대한 일화는 거의 처음으로 나온 얘기다.


후에 맨인유럽에서 박지성이 말하길 맨유 입단 당시 영어도 잘 못하고 외로워 할 박지성을 위해 퍼거슨 감독이 직원들에게 매일 핫초코를 챙겨주며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 주라고 하는 등 뒤에서도 세심하게 챙겨 주었다고 한다. 덤으로 핫초코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10.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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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 사진은 대영제국 훈장 3등급(CBE)을 받을 당시 사진이고, 아래쪽 사진은 기사작위를 받는 장면이다. 참고로 비슷한 빨간 끈 목걸이라 얼핏 보면 구분이 안가는데, CBE 목걸이는 보라색에 가까운 빨간 끈 양측에 하얀색 줄이 있고 기사작위(Knight Bachelor) 목걸이는 진한 빨강색 끈 양측에 노랑색 줄이 있다.
  • 스코틀랜드영어 사투리가 매우 심하다. 박지성호날두 등의 외국인 선수들만 그런 게 아니라 영국 선수들조차 퍼거슨의 억양을 알아듣기 힘들었다고 할 정도이다.[14] 그래도 개인 면담을 할 경우에는 외국인 선수들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말을 해서 별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 주방 아주머니의 남편이 뭘하는지, 건강은 어떤지 다 알고 있으며 무슨 일이 나면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지고 지갑을 열었다. 청소 및 주방 아주머니들이 정리해고의 일환으로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은 클럽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이라며 절대 자르지 못하게 길길이 날뛰어서 막았다고.
  • 승부의 신이란 서적에 보면 에버딘 구단에 부상당한 선수를 위한 다용도 운동기구와 함께 당구대를 같이 놔뒀는데 선수들은 한 명이 운동하면 나머지는 당구를 치는 식으로 기구를 돌아가며 썼다고 한다. 평소에는 복도에 발소리가 들려 걸릴 일이 없었다는데, 어느날 퍼거슨이 용무가 있어 퇴근을 늦게 하면서 기구가 있는 곳에 들러버렸다. 그 때 애버딘 선수들 중 한 명이 기지를 발휘해 큐대를 등에 지고 운동을 했고, 퍼거슨은 그냥 웃고 갔다고 한다.
  • 1983년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전 당시 실수한 알렉스 매클리시가 실점의 빌미를 제공하자 그에게 그 유명한 헤어드라이어를 날렸다고 한다. 이후 애버딘은 레알 마드리드를 꺾고 대회 우승을 했다. 매클리시가 경기 후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면서 실수를 곱씹는데 퍼거슨 감독이 들어왔다. 옷을 입고 있어서 물이 바지에 튀었고 매클리시는 그게 웃겼다고 한다. 들어온 퍼거슨은 매클리시를 칭찬하고 나갔다.
  • 언론을 잘 이용할 줄 알았다. 또한, 자기 팀 선수를 보호할 때는 무슨 수를 써서도 보호하는 감독이었다. 다만 이게 가끔 지나치면 말실수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게 독일인 드립. 이 사건으로 바이에른 뮌헨이나 분데스리가 팬덤에서는 심심찮게 까인다. 독일인 드립이 무엇인지 덧붙이자면, 09-10 시즌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에서 3-1로 앞서다가 후반전 하파엘의 퇴장으로 경기력이 밀려 추격골을 먹혀 원정 다득점으로 패한 후, 전형적인 독일인 방식이라고 판정을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독일발 역풍을 강하게 맞았다. 아스날의 수비수 페어 메르테자커를 독일에 널리고 널린 선수라고 비하하여 논란을 빚기도 했다.
  • 영국 축구계에서 그 위상이 대단한데 역대 감독 순위에서 최소라도 3위를 차지하는 명장일 뿐만 아니라 감독 노조 위원장으로 활동한 것도 있고 그 연륜과 영향력도 발군이다. 심지어는 퍼거슨 감독의 아들과 관련된 정확하지 않은 고발 프로를 내보낸 BBC와 수 년에 걸친 신경전을 벌인 끝에 2011년 8월, BBC의 사장과 북부지역 총괄 디렉터 등이 나선 후에야 용서해주는 위엄을 보였다. 이때 BBC는 퍼거슨과 화해한 사실을 속보로 내보냈다고.
  • 또한 그 위상을 적극 이용해 심판들에게도 강한 압력을 행사했다. 만약 마음에 안 드는 판정이 나온다면 하프타임이나 경기 종료 후에 심판 대기실에 들어가서 심판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도 징계는 커녕 기사조차 은퇴하고 나서야 간신히 나오고 있다. 현역일 때는 한 줄도 기사화되지 않다가 모예스 부임 후에야 모예스는 퍼거슨과 달리 심판 대기실에 들이닥쳐서 난리를 피우지는 못한다는 식으로 은근슬쩍 드러내는 식으로.
  • 또한 위에서 언급했듯이 인터뷰 원칙에 어긋나거나 신경에 거슬리는 기자는 가차없이 인터뷰에서 배제해버리는데 맨유 기사를 싣지 못하면 스포츠지로 살 길이 없어지는 거나 마찬가지다. 때문에 인터뷰 금지를 당하는 기자는 스포츠 기자로서 치명타를 입는셈인데 이러한 기자 중 한 명이 나중에 투병 생활을 하게 되자 이 사실을 알고 위문 화환을 보내면서 다시 인터뷰해도 좋다고 허가해준 적도 있다. 다른 기자는 인터뷰 금지령을 풀기 위해 몇 달 동안 열심히 퍼거슨을 찾아다니며 해명하려다가 번번히 기회를 놓치자 열받은 나머지 크리스마스 무렵에 퍼거슨에게 들이닥쳤는데 거기서 퍼거슨이 의외로 관대하게 대해주는 바람에 감격(?!)해서 문제가 된 기사를 편집한 담당 에디터에게 닥돌해서 퍼거슨 대변인 노릇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래저래 무서운 영감님.
  • 선수 시절 골 넣는 스트라이커임에도 불구하고 감독한테 수비 안 한다고 늘 혼났다고 한다.[15] 또 이 때의 흑백사진을 보면 살집이 오른 감독 시절과 달리 꽤나 날렵하고 미남인 선수였다.
  • 은근히 언플의 달인이다. 그래서 2천년대 한창 주제 무리뉴 감독이 리그에서 날아다닐 땐 불꽃 터지는 설전이 오고 갔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서로를 높이 평가하는 사이여서 주제 무리뉴도 2010-11 시즌에서 맨유의 우승이 확정되었을 때 여러 차례 퍼거슨을 띄워주는 인터뷰를 했고 퍼거슨도 주제 무리뉴가 엘 클라시코에서 물의를 빚으며 언론과 팬의 공격을 받자 이를 옹호하는 인터뷰를 했다. 퍼거슨 감독의 말로는 무리뉴가 자신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킨다고. 그래서인지 주제 무리뉴가 프리미어 리그를 떠난 후에도 종종 연락을 한다.[16] 물론 벵거 감독과도 아스날이 한창 잘 나갈 때에는 신나게 서로 갈구며 싸웠지만 아스날이 요즘 5시즌째 무관인 상태라서 그런지 요즘은 조용하다. 심지어 벵거 감독이 2011년도 여름 이적 시장에서 집중공격당할 때 그를 두둔하면서 쉴드를 쳐주기까지 했다. 영감은 치열하게 싸우던 적을 두둔하던 사례가 없던 건 아니고, 보통 그럴 경우 영감이 판단하기에는 그 적수는 이미 같이 정상에서 경쟁할 힘이 떨어진 상태다. 벵거와 든 정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싸우면서 든 정이 무서운 듯.그래놓고 2011-12 시즌 개막하니까 아스날을 가차없이 8:2로 발라버렸지. 하지만 이 때도 대승에 기뻐하긴 커녕 상당히 씁쓸해하는 표정을 보였다. 08/09 시즌에 리버풀이 한창 잘 나갈때 언플로 리버풀과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을 뒤흔들고 리그 우승을 차지한 적도 있다. 마찬가지로 95-96 뉴캐슬의 케빈 키건도 언플로 바르면서 우승을 낚은 적도 있다.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선수의 경기 출장에 관하여 팬과 언론에게 떡밥을 던지고 낚는 것은 다반사. 그런데 요즘은 자기가 자기 떡밥에 낚이는 경우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지금은 사이가 나쁜 라파엘 베니테스와도 처음에는 사이가 괜찮았다. 특히 베니테스는 프리미어 리그로 진출하기 전에 영국에 왔을 때 퍼거슨 감독의 안내로 올드 트래포드를 둘러보기도 했고 자신이 젊었을 때 롤 모델이 퍼거슨 감독이라고 인터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리버풀의 감독을 맡으면서 서로 충돌하다보니 지금은 사이가 많이 안 좋은 듯하다.
  • 불세출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는 감독이지만, 1985~86년에 잠깐 스코틀랜드 감독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국대 감독 경력은 없다. 다른 사례도 있긴 하나, 그 명성과 경력을 보면 신기하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클럽 감독으로서 잘 나가던 사람이 국대를 맡는 일은 잘 없기 때문에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실상 한 해 내내 하는 리그 감독직이 월드컵같은 특정 기간에만 돋보이는 국대 감독직보다 보통은 평가가 높은 편이기 때문. 당장 무리뉴, 펩과 뢰브, 데샹을 두고 누가 더 위대한 감독이냐고 물으면 대다수가 전자를 뽑을 것이다.
  • 가족 관계는 언급된 대로 아내 캐시, 세 아들과 그들의 가족이 있으며 동생 마크 퍼거슨도 유나이티드의 수석 스카우터로 재직중이다. 아내 캐시 여사와의 사이는 아주 좋은 편이며 소문난 애처가로 알려져있다. 프리시즌 경기가 있다고 말했음에도 아내가 어차피 친선경기아님?? 하면서 이삿짐 나르라고 해서 결국 경기장이 아닌 집에서 이삿짐 날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애초에 퍼거슨도 젊었을 때 한 성질머리 했기 때문에 그 성질머리와 함께한 아내의 내공도 만만찮다고 볼 수 밖에 없겠지만...나를 컨트롤할 수 있는 건 나의 아내 뿐이다 라는 명언도 남겼다. 은퇴를 결심하게 된 최초의 계기 역시 처형이 세상을 떠나면서 아내가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서 자신이 아내 옆에 있어줘야겠다 생각해서라고... 그렇게 감독직 은퇴 후 함께 노후를 보내며, 잘 살았으나, 2023년 아내 캐시 여사가 84세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 장남 마크는 재무회계 쪽 일을 하면서 아버지의 재정관리를 담당하며 둘째 대런은 축구 선수를 거쳐 감독일을 하고 있다. 셋째 제이슨은 축구 에이전트 쪽 일을 한다고.[17] 가족을 끔찍히 생각하며 아들들도 모두 아버지 집 근처에 산다고. 특히나 손주들에게 푹 빠져 산다고 한다. 손주 중에서 제이크 퍼거슨이 축구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리뉴의 딸 마틸다가 반해서 종이루비(종이학이라고도)를 접어서 선물했다는 그 손자이다.
파일:알렉스 퍼거슨.07.jpg
알렉스 퍼거슨 감독과 제이크 퍼거슨
  • 정치적으로는 열렬한 노동당 지지자이며 노동당에서 리더십 관련 조언을 하는 고문으로 활동한 적도 있다. 사실 조선소 노동조합 위원장까지 했던 사람이기도 하고, 노동자 계급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니 어찌보면 노동당 지지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노동당 지지세가 강한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는 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맨체스터가 속한 북부 잉글랜드 지역도 스코틀랜드와 비슷하게 노동당 지지자가 많다. 결국 그가 태어난 곳이나 오래 생활한 곳이나 노동당 정서가 강한 곳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족으로 이와 관련된 몇몇 에피소드가 있는데, 한 번은 맨유 구단에서 식당 종업원들과 청소부 등을 해고하려고 하자 감독직을 걸고 막았으며, 감독 초창기 데모하는 노동자들의 모금함을 그냥 지나쳤는데 같이 있던 조크 스테인 감독이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털어 그들의 모금함에 돈을 기부한 것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또한 감독 노조 위원장을 한 적도 있고 타 팀의 감독들이 연락해오면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언론과 팬들의 공격을 받는 감독들의 실드도 잘 쳐준다. 앙숙처럼 보이지만 언론을 통해 무리뉴도 변호한 적이 있다. 베니테스 감독한텐 아닌 거 같지만 넘어가자. 천하의 호지슨도 실드쳐주지만 베니테스는 무시. 그외에도 구단의 안내 데스크에서 근무하는 할머니가 정년퇴직을 하게 되어 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될 위기에 처했을 때도 그녀가 계속 근무할 수 있게 도와주고 출퇴근을 위해 택시를 수배해주기도 했다.
  • 스코틀랜드 출신이지만 확고한 스코틀랜드 독립 반대론자이다. 때문에 2014년 주민투표를 앞두고 독립 반대 진영의 단체인 베터 투게더(Better Together)를 열심히 지지하였고 직접 기부금을 냈다. 그는 주민투표에서 스코틀랜드에 거주하지 않는 스코틀랜드인의 투표권이 없는 것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스코틀랜드가 독립국이 아니므로 법적으로 '스코틀랜드인'의 범위를 한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부득이 스코틀랜드에 거주하는 영국 국적자+기타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잉글랜드에서 거주한 퍼거슨 경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독립 반대를 주장하면서 기부금을 내는 정도였고, 실제 주민투표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반면에 스코틀랜드에 살고 있는 잉글랜드인들은 투표권을 얻었다. 예를 들어 작가 J. K. 롤링은 잉글랜드 출신이지만 오래 전에 스코틀랜드 수도 에든버러에 이주했기 때문에(그 유명한 해리 포터 시리즈도 에든버러에서 집필함) 주민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 참고로 롤링 역시 퍼거슨 경처럼 스코틀랜드 독립에 반대해 베터 투게더를 후원했다.
  • 맨유 부임 기간 동안 리그의 화신답게 EPL에서 3위 아래로 떨어져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특히 그 중에서 준우승을 총 5번[18] 했는데, 그 다음해에 전부 우승을 했다.
94/95 준우승 → 95/96 우승
97/98 준우승 → 98/99 우승[19]
05/06 준우승 → 06/07 우승
09/10 준우승 → 10/11 우승
11/12 준우승[20] → 12/13 우승[21]
  • 퍼거슨이 맨유 감독을 은퇴한 뒤 현지에서 영국 의회의 상원인 귀족원(House of Lords) 의원으로 임명해 달라는 청원이 나왔다. 오늘날 정치적 실권은 하원인 서민원(House of Commons)로 넘어가 귀족원 의원은 거의 명예직이 된 상황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귀족원 의원들은 국가에 대한 공로와 전문성을 인정 받은 인물들이 추천을 받아 남작 작위를 받아(세습 불가. 즉 본인만 귀족 신분) 종신직으로 의원이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퍼거슨 경은 기사작위(Knight Bachelor)를 받긴 했으나 귀족원에 들어가려면 CBE는 물론 그보다 위인 기사작위로도 안 된다. 최소한 남작작위는 갖고 있어야 한다. 퍼거슨이 쓰고 있는 Sir는 준남작 이하 Knight Bachelor 이상에게 부여되는 경칭이다. 남작 이상의 작위를 받으면 그보다 격이 높은 Lord로 불리게 되며 귀족원의 일원이 된다. 상원의 이름이 괜히 House of Lords가 아니다. 다만 그가 정말로 남작으로 서훈이 될지는 미지수. 참고로 지금 귀족원이 너무 비대해진데다가(하원인 서민원보다 의원이 많은데, 상원이 하원보다 큰 나라는 전세계에서 영국 뿐이다.) 이런저런 논란이 많아 의원 정수 축소·제한 주장이나 아예 다른 나라처럼 선출직으로 변경하자는 주장까지 있다. 만약 100% 직선제로 바꾸게 되면 퍼거슨 경이 의원이 될 순 없을 듯. 본인이 몸소 선거에 출마한다면 또 모를까
  • 2013년에 월드 사커지에서 전세계 73명의 패널들을 상대로 올 타임 베스트 11의 투표를 진행했는데, 총 49표를 받아 46표를 얻은 리누스 미헬스를 제치고 감독 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토탈 사커를 창시한 미헬스, 카테나치오의 창시자 엘레니오 에레라, 압박 축구를 고안한 아리고 사키 등 현대 축구 전술의 기반을 다진 명장들과 현재 최고의 감독으로 손꼽히는 주제 무리뉴펩 과르디올라 같은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선정된 것이라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링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디까지나 베스트 11이 중점이 된 투표이기 때문에 표에서는 제외했다. 링크.
  • 퍼거슨 본인이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한국에 유럽 축구 대중화의 계기를 마련한 인물이기도 하다. 박지성이 2천년대 PL을 대표하던 빅클럽 맨유에 스카웃되고 꽤 활약하면서 언론에서 유럽 축구를 다루는 빈도가 급격히 상승했기 때문. 한창 시절엔 '제한맨'이라 할 정도의 맨유 공화국이었던 당시 해외 축구 팬들 사이에서 퍼거슨은 맨유 클럽 감독인지 한국 대표팀 감독인지 헷갈릴 정도로 최고의 지분을 자랑하기도 했다. 물론 한편으론 한국인 선수를 데리고 있는 빅클럽 감독의 고충을 겪게 된 원조로, 당시 믿을맨 박지성에게 궂은 일을 전담시키거나 말년쯤 벤치에 앉혀 놓는 빈도가 늘어날 땐 안티들에게 노망난 영감탱이라 불리기도 했다.
  • 박지성이 은퇴한 이후에도 한국에서 인지도가 제법 있는 편인데, 바로 이 희대의 명언(?) 덕분. 축구에 큰 관심없는 스포츠 이외 분야 뉴스에서도 이 말이 회자되면 거의 100이면 100 1승 얘기(...). 은퇴 이후에도 승률이 엄청나다.
  • 첫사랑 상대가 축구 선수 트렌트 알렉산더아놀드외할머니였다고 한다. 1년 반 동안 사귀었으나 외할머니가 뉴욕으로 이민을 가게 된 탓에 헤어지게 되었다고.[22] 이외에도 아놀드의 외가 쪽은 맨유와 인연이 상당히 많다. 자세한 내용은 아놀드 문서의 여담 항목 참조.
파일:Alex Ferguson Statue_Aberdeen FC.jpg}}} ||
2022년 2월 26일, 에버딘피토드리 스타디움에 퍼거슨의 동상이 세워졌다. 1970~80년대 애버딘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공로로 세워졌다.
  • 수많은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 퍼거슨 감독이지만 국제 대회에서만큼은 원정 다득점 룰에서 항상 발목을 붙잡혔다. 이 징크스가 어찌나 지독했는지 그의 40년간의 감독 생활중,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탈락한 적은 무려 7번[24]이나 되지만, 원정 다득점 원칙의 수혜를 받고 다음 라운드에 진출한 사례는 단 한번도 없다. 즉 홈어웨이 경기 합산 스코어가 동점이 되는 순간 단 한번도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지 못했다는 소리.[25] 결국 이 징크스는 퍼거슨 감독이 먼저 은퇴함에 따라 끝내 깨지 못한채 마무리되었으며[26] 8년뒤 원정 다득점 원칙 역시 폐지됨에 따라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 외 유일하게 퍼거슨 감독은 원정 다득점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대회에서 딱 한 번 수혜를 본적이 있는데, 바로 91/92 시즌 리그컵 4강전이다. 이 대회 같은 경우 특이하게 4강전에 한해 원정 다득점 원칙을 적용하지 않았는데[27][28] 이 당시 미들스브로와의 대결에서 1차전 원정을 0:0 무승부로 마쳤고, 홈경기인 2차전을 1:1로 마쳤다. 이게 UEFA 대회 룰이었다면 퍼거슨 감독은 또 다시 원정 다득점의 악몽으로 탈락하는 거였으나, 앞서 말했듯 이 대회는 180분간의 경기에선 원정 다득점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 룰이였고, 연장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 연장전에서 맨유가 결승골을 넣어 결승전에 진출했으며, 해당 대회 맨유는 결국 우승을 차지했다. 여러모로 원정 다득점과는 인연이 아예 없다고 봐야 될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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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라고사에서 잘해서 퍼거슨이 리턴 시켰는데, 볼튼전에 이후로도 폼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이후, 바르사로 컴백했다.[2]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프리미어 리그가 출범한 1992-93 시즌부터 퍼거슨이 은퇴한 2012-13 시즌까지 맨유는 리그 우승을 13번이나 했으며, 3위 아래로 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3] 물론 이는 퍼거슨의 은퇴 이후 돈이라도 팍팍 써야지 네임드급 선수들을 영입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맨유의 위상이 상당히 추락했기 때문도 있다. 허나 돈 때문에 온 애들이 많아서 그런지 거품이 많다.[4] 퍼거슨 시절 우승은 못해도 3등 안에 들어서 챔스권에는 무조건 드는 맨유였으나 지금은 챔스권은 커녕 유로파 경쟁도 힘겹게 이어나가고 있다. PL 하위권 팀들의 수준이 상승한 것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위권은 맨시티 같은 팀들이 꾸준히 유지하는 걸 보면 결국엔 질이 하락한 선수단 및 감독의 능력 부족, 보드진의 삽질이 겹치며 구단이 무능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5] 퍼거슨의 스쿼드 운영 논리는 매우 확고했는데, 그 중 핵심적인 것은 축구는 골을 넣지 못하면 이길 수 없다는 점이다. 감독의 전술로 골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은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 상황에서 기회를 골로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공격수의 개인 역량이라는 게 퍼거슨의 신념이었고 그렇기에 공격수만큼은 결정력이 검증된 선수를 데려오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 외에 중요시했던 포지션은 개인 능력을 발휘해서 드리블로 공을 빠르게 운반하거나 정확한 크로스나 슛을 날려야하는 윙어 정도였으며, 나머지 포지션은 선수의 개인 능력을 초과하지 않는 선에서 역할을 부여해서 안정적인 빌드업을 했다.[6] 치차리토는 개인기나 드리블은 맨유 수준이 아니었지만 오프 더 볼, 결정력, 집중력만큼은 PL 탑급이었기 때문에 슈퍼 서브로 활용되었다.[7] 재밌는 것은 전술과는 다르게 대인 관계나 매니징 스타일을 보면 굉장히 고집이 강했다는걸 알 수 있다. 주전 경쟁에 밀려서 퍼거슨에게 총을 들고 협박했다는 카더라까지 나왔던 폴 인스가 방출되었던 경우만 봐도 선수가 얼마나 대들던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감독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고집을 밀고 나갈 때와 아닌 때를 잘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8] 자수성가해 부호가 된 글레이저는 1995년 미국프로풋볼(NFL) 팀인 탬파베이 버커니어스(Tampa Bay Buccaneers)를 인수해 스포츠 사업을 시작했다. 글레이저는 인수전에 뛰어들기 전만 해도 버커니어스는 만년 꼴찌 팀이어서 비용이 적게 들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착수한 것이다. 하지만 인수전 막판에 경쟁자가 갑자기 등장하는 바람에 2억 달러 가까운 자금이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이 거래는 풋볼팀 인수 사상 최고 금액이었다. 글레이저는 인수 후 꾸준히 좋은 선수와 코치를 영입해 팀의 성적을 호전시켰다. 마침내 2003년 슈퍼볼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고 이후 버커니어스의 가치는 8억 달러로 치솟았다. 1억 9,200만 달러에 인수한 팀이 10년도 되기 전에 7배 가까이 몸값이 뛴 것이다. 그는 꼴찌였던 팀을 2003년 슈퍼볼 우승팀으로 키우는 능력을 보여줬다. 글레이저는 검소했지만 돈을 쓸 때는 화끈하게 쓰는 사람이었다. 전용기를 구입하기 전까지는 언제나 출장은 이코노미석을 이용했고 대부분 저가항공사만 찾았다. 그는 아들 브라이언을 가리키며 "저 아이가 입고 있는 바지가 보이죠? 저게 200달러(20만원)짜리 휴고 보스 바지야. 난 겨우 20달러(2만원)짜리 바지를 입는데 말이야"라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9] 맨유 인수에 관심있던 거부들 리스트
루퍼드 머독 (전 LA다저스 구단주)
● 로만 아브라모비치 (첼시 구단주)
● 셰이크 만수르 빈 자예드 알 나얀(맨시티 구단주)
하마드 알 타니 카타르 국왕 (PSG 구단주)
● 드미트리 리볼로프레프(AS 모나코 구단주)
맨유가 지속적으로 흑자를 기록하며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다 보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인수하기 위해 눈독을 들이는 거부들이 적지 않았다. 2000년대 초 LA다저스 등 다른 프로 스포츠팀을 사들이려고 했던 글레이저는 영국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눈을 돌렸다. 글레이저가 맨유를 인수하려고 했을 때 맨유팬들이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1990년대 후반에도 언론 재벌인 루퍼트 머독이 맨유를 인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루퍼트 머독은 맨유의 지분을 매입해 인수하려다 소액주주와 서포터 연합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혀 좌절된 적이 있다. 그러나 지난 50여 년간 숱한 비난과 공격에도 개의치 않고 난관을 뚫고 나와 한번 목표를 삼으면 결코 그냥 물러서지 않는 스타일의 글레이저가 여론이 악화됐다고 포기할 리가 없었다. 맨유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포츠팀인 데다 입장권은 거의 대부분 매진이었고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브랜드 가치를 지닌 구단이었다. 그래서 2003년부터 조금씩 맨유의 주식을 사 들이기 시작해 28.1%의 지분을 확보한 뒤 2, 3대 주주에게 공식적으로 매수를 신청, 이를 성사시켰다. 결국, 2005년 글레이저는 맨유의 주식 75%를 인수해 구단주가 되었다. 인수금액은 7억 9,000만 파운드(약 1조 3,900억 원). 하지만 이 중 2억 7,500만 파운드(약 4,850억 원)만이 글레이저 가문의 돈이었고 나머지 인수금액 중 2억 7,500만 파운드는 IB(투자은행)에서 나머지 2억 4,000만 파운드는 이자율이 높은 헤지펀드를 통한 현물출자대출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JP모건 투자은행과 리파이낸싱 과정을 거치며 5억 파운드의 우선순위부채를 가져왔다.
[10] 박지성이 QPR 이적 전 팀 내 연봉 순위 3위였다. (루니, 퍼디난드 바로 다음이었으며, 연봉 81억.) 루니가 그때 당시 154억. 박지성이 새로운 팀을 알아보던 와중에 맨유가 인상된 연봉으로 재계약을 제시했으나 박지성이 거절할 정도로 퍼거슨과 맨유는 박지성을 잡고 싶어했었다.[11] 그 당시 영상을 보면 퍼거슨이 상당한 용기를 냈다고 할 수 있다. 박지성이 QPR로 이적한 첫 시즌에 맨유와의 QPR 홈 경기에서의 일이다. 경기 시작 전, 퍼거슨이 QPR쪽 벤치에 직접 걸어가서 벤치 앞을 소심하게(...) 서성였는데 이적하게 만든 상황이 미안했는지, 퍼거슨답지 않게 박지성에게 먼저 말을 못 걸고 쭈뼛쭈뼛 서성였다. 벤치에서 서브 멤버로 대기하던 박지성 선수는 이를 퍼거슨 감독이 자신에게 간단한 인사를 하기 위해 다가왔다는 제스처라고 간파하고 벤치에서 일어나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퍼거슨 감독에게 악수를 청했다. 퍼거슨도 흡족한 미소를 띠며 박지성과 악수 및 간단한 안부 인사를 하고 바로 맨유 쪽 벤치로 돌아갔으며, 상당히 훈훈한 장면이기도 하다.[12] 당시 밀란의 중심이자 핵이던 피를로를 박지성에게 전담마크시켰고, 박지성은 피를로를 지워버렸다.[13] 이후에 잠시 자신의 결정에 아직도 큰 후회가 남는 듯이 말을 멈췄다.[14] 원래 스코틀랜드 사투리가 알아먹기 괴악한 것으로 유명하다. 영국인들 사이에서도. 그래도 비 스코틀랜드 영국인들과는 같은 언어라 그런지 자주 듣다보면 이해하는데 문제는 없다고 한다.[15] 현대 축구에선 공격수의 전방 압박 및 수비 가담이 굉장히 중요시 되지만, 퍼거슨이 선수로 뛰던 때인 1960~70년대에는 공격수의 수비가담이 전술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요구되지 않았다. 그 당시로 따지면 희귀한 케이스.[16] 무리뉴 감독은 자신이 첼시에 부임한 초기에 올드 트래포드에서 맨유를 이긴 후, 퍼거슨 감독이 포도주를 같이 마시자며 상대팀 감독인 자신을 감독실로 초청해서 환대해 준 것에 감명받았다고 한다. 2007년에도 비슷한 사례로 같이 식사도 했는데, 무리뉴 본인이 회상하길 혹시 이것이 자신을 후계자로 데려가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잠시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퍼거슨 은퇴 후 그 후계자는 누가 될 것이냐는 의문에 무리뉴 감독의 이름이 많이 올라왔지만, 결국 데이비드 모예스로 결정났다. 그리고 모예스는 경질되고, 후임은 루이 반 할이 되었다. 반 할은 2년간 맨유 감독을 하다 경질되고 2016-17 시즌부터 맨유 감독은 무리뉴가 맡게 되었다![17] 알렉스 퍼거슨 경이 뇌출혈로 쓰러졌다가 다시 회복한 후, 자신의 기억을 어떻게든 남기고자 하는 아버지의 요청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영화는 2021년 개봉한 《알렉스 퍼거슨: 좌절은 없다 (Sir Alx Ferguson: Never Give In)》[18] 그중 4번이 1점 차 준우승이었고 마지막은 승점 동률 득실 차 준우승이었다.[19] 트레블 시즌[20] 승점 동률 득실차 준우승[21] 은퇴 시즌[22] 헤어진 이후에도 종종 연락을 했는지 아놀드 리버풀 유스에 들어갔을 때 왜 맨유 유스로 안 보냈냐고 물었다고 한다.[23] 퍼거슨의 경우, 1986년 맨유 부임 이후 각각 1992-93 시즌 프리미어 리그 우승, 1989-90 시즌 FA컵 우승, 1991-92 시즌 리그컵 우승, 1998-99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약 13년 만에 처음으로 모두 달성했다.[24] 그 중에 01/02시즌 레버쿠젠과의 챔피언스 리그 4강전에서 원정 다득점으로 탈락한 대회의 경우 퍼거슨 감독이 감독 생활을 하면서 가장 후회되는 경기라고 회상했다. 결승전 장소가 그의 고향인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였기 때문.[25] 1,2 차전 모두 동일한 스코어가 나올 경우 승부차기로 승부를 가리게 되는데, 심지어 이러한 경우에도 승부차기에서 모두 패했다.[26] 맨유는 결국 퍼거슨 감독이 은퇴한 뒤에야 원정 다득점의 수혜를 봤는데, 그게 바로 18/19 시즌 PSG와의 챔피언스리그 16강전. 홈에서 0:2로 패배했지만 원정에서 극적인 3:1 승리를 거두며 8강에 진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퍼거슨 감독 시절에 비해 한창 암흑기 시절에서야 수혜를 본 셈.[27] 정확히 얘기하면 1,2차전을 합친 180분간의 경기에선 원정 다득점 원칙을 적용하지 않지만, 2차전의 연장전이 끝난 그 순간에는 원정 다득점 원칙을 적용한다.[28] 이 룰은 2018-19 시즌부터 클럽들의 투표로 인해 1,2차전이 끝난 직후에도 승부가 나지 않을 경우 연장전 없이 바로 승부차기로 돌입하여 승자를 가리는 진행방식으로 변경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