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22:25:40

영국-독일 해군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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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조약 내용4. 영향
4.1. 독일 해군의 재건 '인정'4.2. 영국, 독일 외의 국가
5. 기타

1. 개요

Anglo-German Naval Agreement. 1935년 6월 18일, 런던에서 영국독일국 사이에 맺어진 양국간 해군력 균형을 맞추는 조약. 런던 해군조약이라고도 하나 이럴 경우 런던 해군 군축조약과 혼동이 되기에 그냥 영독 해군조약이라고 통칭한다.

2. 배경

1차 세계대전 발발시까지 영국의 목표는 최소한 세계 2위의 해군국과 3위의 해군국을 합친 수준의 해군력을 보유하는 것이었다.[1] 하지만 영국은 1920년대에는 1차대전으로 소모한 막대한 전비, 1930년대에는 대공황의 여파로 더 이상 이전처럼 건함 경쟁을 벌일 만한 국력이 없었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세계 최대의 해군국 지위를 잃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영국은 이를 위해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각국의 반전 무드에 힘입어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체결하여 건함 경쟁으로 국력을 낭비하지 않고서도 우호국인 미국과 함께 세계 최대의 해군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2] 이 때는 미국은 우호적이긴 했지만 미국 정치권에서 고립주의적 외교 노선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맹은 아니었고, 일본 제국태평양동남아시아에서의 영국의 이권에 대한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치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1935년 3월,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와 재군비를 선언하면서 유럽에서도 전운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영국의 램지 맥도널드 수상, 이탈리아 왕국베니토 무솔리니, 프랑스 제3공화국피에르 라발 외상이 이탈리아 스트레사에서 나치 독일의 재군비 선언에 대한 공동전선을 합의, 스트레사 전선을 형성하였으나 영국은 이와 별개로 나치 독일과의 외교적 해결을 고려한다.

독일은 독일대로 히틀러의 도박으로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했으나 외교적으로 고립될 가능성이 커졌고, 영-이-프 3국과 모두 맞서는 것은 어렵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아울러 나치 독일의 외교관 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를 중심으로 외교적으로 스트레사 전선을 무력화하고, 영국으로부터 실질적 권리를 보장받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안 그래도 외교적 해결을 고려하던 영국은 이러한 나치 독일의 타협적 태도와, 1934년 초 나치 독일이 폴란드 제2공화국과 불가침조약을 맺으며 당시까지 유럽에서 가장 전쟁위험이 높았던 독일-폴란드 긴장관계를 단번에 해소했던 전례를 보아, 좀 막나가는 면은 있지만 그래도 대화가 통하는 상대라는 당시로선 지극히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게 된다.[3] 여기에는 대공황 이후 급격히 약화된 영국의 군사력과, 유럽 최대의 산업국인 독일이 본격적으로 건함에 나설 경우,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의 건함 경쟁이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겹쳤다.

원칙적으로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재군비 선언을 한 이상 그 시점에서 독일은 무제한 건함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다. 원래 1차 세계 대전 개전 당시 독일은 영국의 뒤를 이어 세계 2위의 해군국이었다. 기술적으로도 산업적으로도 또다시 세계 2위 수준의 해군을 재건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적어도 영국은 그렇게 생각했다.[4] 그런데 영국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런던 해군 군축 조약에 묶여서 주력함 수와, 주포 구경, 보유 톤수 등에 제약을 받으니 오히려 영국이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미국, 일본 등과 기껏 군축 조약을 맺어 놨는데 이걸 파기하고 다시 독일과 건함 경쟁하기는 싫었다.

이 시점에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벌여 베르사유 조약 이행을 강제하는 방법이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전간기의 영국은 정말로 전쟁까지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프랑스는 영국보다도 더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영국 및 프랑스 내 반전 여론은 상상을 초월한 정도로 높았고, 이러한 상황에서 군사적 충돌에 개입한다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정치인들에게 있어서 정치생명의 종말을 알리는 행위였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는 1940년 독일군의 침공을 받기 이전까지는 독일에 대한 군사적인 개입을 일체 실행하지 않았다.

무역 봉쇄 등을 통하여 독일을 압박하는 방법도 있는데 문제는 첫째 독일이 1934년 폴란드와 불가침 조약을 맺은 이상, 폴란드를 통한 물자 반입을 막을 수 없어 실효성이 없었고, 더 중요한 두번째 이유는 독일을 너무 몰아붙이다가 독일이 소련과 손을 잡는걸 두려워 했다.[5][6] 이때까지만 해도 영국은 파시즘보다 공산주의를 더 두려워했기에 독일이 더 말이 통하는 상대라고 믿었다.

결국 영국 입장에서는 손 놓고 독일의 무제한 건함 계획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재군비를 인정하되 주력함 총 톤수의 35%까지만 보유하도록 제약을 걸고, 정치적으로는 영미가 주도하는 해군조약체제라는 헤게모니를 인정하고 수용시키는게 합리적이겠다고 판단한 것.

3. 조약 내용

조약 내용은 간단하기 그지 없다. 핵심은 나치 독일 해군의 주력함 총톤수는 영국 해군의 주력함 총톤수의 35%를 절대 넘지 못한다는 것. 이른바 100:35의 전력비율을 인정하고 동시에 베르사유 조약으로 묶여있던 나치 독일의 주력함 건조 제한이 완전히 풀리게 되었다. 유일한 제약은 주력함(전함)의 배수량을 최대 35,000톤으로 규정한 것.

나치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10,000톤을 넘지 못하는 중순양함 6척[7], 6,000톤을 넘지 못하는 경순양함 6척, 800톤을 넘지 못하는 구축함 12척과 추가로 어뢰정 12척만의 보유가 가능했는데, 이 조약으로 인해 그동안 갖지 못하던 전함의 건조가 가능해졌다.[8]

또 주력함 총톤수에 있어서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당시 영국군 주력함 총톤수가 522,500톤이니 독일이 확보 가능한 주력함 총톤수는 183,750톤. 더군다나 이때는 이미 워싱턴 군축조약이 파기된 상황이었기에 독일은 실질적으로 20만톤 내외에서 주력함 확보가 가능해졌다. 워싱턴 군축조약 당시 프랑스가 인정받은것과 동일한 대우를 받은 것. 아울러 완전히 보유를 금지했던 유보트의 건조 및 보유를 허용했다.

이 조약으로 독일 해군은 국제법적으로 합법적인 재건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4. 영향

이 조약은 직접적으로는 큰 영향이 없었다.

4.1. 독일 해군의 재건 '인정'

이것으로 나치 독일은 합법적으로 군비증강에 열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영국은 100:35의 비율이 외교적 승리라며 정신승리했지만, 독일은 개전 전까지 20도 못 채웠다. 히틀러의 허세에 놀아난 것. 그나마 독일은 이 조약의 내용을 지키지도 않았다. 비스마르크급 전함이건 아트미랄 히퍼급 중순양함이건 조약 내용을 아득히 넘기는 톤수로 만들어졌고, 예정보다 빠른 1939년에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예정된 35%는 커녕 20%도 다 채우지 못했다.

결국 이 조약의 의의는 히틀러의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재군비 선언을 공인해준 결과가 되었다는 것 뿐인데, 사실상 전쟁을 벌여 조약을 강제하지 않는한 독일의 재군비는 막을 수 없었고, 이 시점에 영국과 프랑스에게 전쟁을 벌일 여건은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면에서 어차피 예정된 수순에 가까웠다.

4.2. 영국, 독일 외의 국가

당시 전쟁준비가 안 되어 있던 영국 입장에서는 이 조약이 나름 합리적이라 생각했을 수는 있겠으나 이 조약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영국이 독일한테 베르사유 조약을 무시하고 합법적으로 재무장을 할 수 있는 명분을 주었다는 것이다. 영국이 단독으로 나치 독일과 해군조약을 체결하면서 사실상 히틀러의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재군비 선언을 공인해준 것으로, 1차 대전 당시 협상국들이 독일의 재무장에 대한 공동대응을 모색하고 있는 마당에 그 공동대응에 동참했던 영국이 독일과의 단독협상으로 다른 협상국들의 뒤통수를 친 것이다.

영국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게 통보하지 않고 이 조약을 맺은 것은 문제가 되었는데, 사실 영국이 '그럼 니가 독일과 전쟁해서 재군비 막아봐' 라고 하면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 결국 비난만 좀 하다 말았다. 프랑스와 아무런 협의 없이 영국 독자적으로 베르사유 조약 파기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프랑스는 영국에 배신감을 느꼈고 분노했지만, 현실적으로 독일 재군비를 막을 방법이 없던건 프랑스도 마찬가지라 어쩔 도리가 없었으니 이 조약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영국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하필 이 조약이 체결된 날이 워털루 전투가 벌어진지 120년 되는 기념일(6월 18일)이었다는 점에서 프랑스는 더 분노했다.

과거 이탈리아는 무솔리니의 제안으로 1934년 이탈리아의 스트레사라는 마을에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함께 독일의 재군비를 막자는 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은 통칭 스트레사 전선이라 불린다. 사실 이탈리아의 입장은 독일을 막는 데 있는게 아니라 '영국, 프랑스와 동맹 맺고 독일을 견제한다고 하면 우리가 에티오피아를 공격해도 영국, 프랑스가 못 본척 해주겠지?'라는게 진짜 목적이었다. 애초에 이탈리아는 독일의 재군비를 막는데 별 관심이 없었고, 에티오피아를 침공할 생각만 가득했는지라 독일이 재군비를 하건말건 신경도 안 썼다. 스트레사 전선은 별 강제 수단도 없는 그저 선언적 효과 뿐인지라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고 영국-독일 해군 조약이 맺어지면서 별 의미없는 조약이 되었다. 에티오피아 전쟁과는 별개로 그동안 나치 독일과 거리가 있던 이탈리아 왕국은 영프의 무력함을 확인했고, 사실상 협상국 간 공조체제에서 이탈하면서 나치 독일과 손을 잡게 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을 견제하는 베르사유 체제는 이미 각국의 이해관계 문제로 흔들리고 있었지만 이것이 공식적으로 표면화된 것은 이 조약부터다. 이후 라인란트 재무장, 오스트리아 병합, 뮌헨 협정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면서 베르사유 체제는 종말을 맞이하고 1차 대전 직후 형성된 대독 포위망(프랑스-영국-벨기에-이탈리아 왕국-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폴란드)과 스트레사 전선은 붕괴된다.

5. 기타

  • 영국이 독일과 해군 조약을 맺어서 이탈리아가 배신당하고, 막나가는 식으로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고 오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미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할 만반의 전쟁 준비를 진작부터 하고 있었고[9] 그 이전 1935년 1월에 프랑스와도 조약을 맺어서 에티오피아를 국제적으로 완전히 고립시켜 놓았다.


[1] 1889년 제정된 해군 방위법을 배경으로 한다. 이를 이국 표준 정책이라 부르며, 영어로는 Two-power standard 정책이라 한다.[2] 1936년에 1차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파기되었고 영국의 주도로 2차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되지만, 2차 런던 해군 군축조약은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가 탈퇴한데다가 각국에 전운이 고조되는 분위기에서 아무도 안지켰다. 영국-독일 해군조약은 1차 런던 해군 조약이 발효중인 상태인 1935년 체결되었다.[3] 당시 배후중상설을 굳게 믿던 독일 국민들은 '전쟁에 진 것도 아닌데 폴란드 놈들한테 억울하게 영토를 빼앗겼다'는 인식이 팽배했고, 이런 여론에 힘입어 바이마르 공화국은 단치히, 폴란드 회랑, 실레시아를 돌려 받을때까지 폴란드 제품의 수입을 거부하고 엄청난 수입관세를 매긴다. 이것이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이다. 이런 상황인 1933년에 히틀러가 집권하자 폴란드 제품의 관세를 대폭 낮추고,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 맺으면서 10여년간 끌어온 무역분쟁을 단숨에 해결해 버린다. 혹시라도 독일이 또 전쟁을 일으킬까봐 조마조마했던 유럽 각국들로서는 이 같은 결단을 지켜보고 '히틀러는 그래도 대화와 타협이 통하는 상대다'라는 매우 상식적인(?) 결론을 내리게 된다. 물론 히틀러의 속셈은 다들 아시다시피...[4] 1897년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가 독일 제국의 해군 장관이 되면서 독일의 해군력은 대대적으로 커지게 된다. 이를 위협시한 영국 역시 건함경쟁에 뛰어들어 1898년부터 1912년까지 영국과 독일은 서로 엄청난 건함경쟁을 벌였다. 이 건함경쟁은 양국 국민들의 자존심 대결 양상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한 번 일어났던 일이니 영국 입장에선 또 독일이 해군력을 늘리겠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다.[5] 이념적으로 나치즘과 공산주의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물과 기름같은 존재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두 나라의 관계는 밀월관계에 가까웠다. 1호 전차의 시험 주행은 소련에서 행해졌고, 독일은 자국에서 구하기 힘든 지하자원을 소련에서 많이 수입해왔다. 대신 독일은 소련에 각종 무기 기술을 전수해 주었고 아트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5번함을 소련에 넘겼다.[6] 무엇보다 이들이 정식 동맹관계가 될 경우 소련의 인력과 독일의 산업이 함께 프랑스를 몰아붙일 것이고, 독일에 대한 양면전선을 이용한 소모는 꿈도 못꾸기 때문에 그런 리스크를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7] 이걸로 어떻게든 전함 비스무리하게 만들어보려고 한 것이 포켓전함으로 불리는 도이칠란트급 장갑함이다.[8] 그래서 건조한 게 비스마르크급 전함. 단,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비스마르크급은 영독 해군조약에서 규정한 35,000톤을 한참 넘긴 함선이다.[9] 이탈리아군은 1935년 4월 이전에 68만의 병력과 3300문의 기관총, 275문의 야포, 200대의 탱켓과 205대의 비행기를 에리트레아소말릴란드에 배치시켰다. 스트레사 조약이 맺어진 1935년 4월에는 추가로 8개 사단과 장비가 증원되어 6000문의 기관총과, 2000문의 야포, 600대의 탱크와 400대의 항공기가 배치되었다. 이게 영국-독일 해군조약이 맺어지기 두 달 전의 일이다. 당연히 영국과 독일이 조약을 맺건 말건 침공할 생각이 가득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상황이 이런데 영국-독일 해군조약 때문에 배신감을 느껴서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는 건 전혀 말이 안된다. 영국-독일 해군조약은 1935년 6월 18일이고 에티오피아 전쟁은 1935년 10월 3일에 개전했는데, 100일 정도 밖에 안되는 준비 기간으로 50만 넘는 병력을 동원한 침공전쟁을 벌인다는건 가능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