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
19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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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카미 테츠하루 도쿄쿄진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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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오오스기 카츠오(大杉勝男) |
생년월일 | 1945년 3월 5일 |
사망일 | 1992년 4월 30일 (향년 47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출생지 | 오카야마현 가쓰타군 나기초 |
학력 | 간사이고교 |
포지션 | 1루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데뷔 | 1965년 |
프로 경력 | 토에이/닛타쿠홈 플라이어즈 - 닛폰햄 파이터즈(1965~1974) 야쿠르트 스왈로즈(1975~1983) |
지도자 경력 |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타격코치(1990~1991) |
1978년 일본시리즈 최고 수훈 선수(MVP) | ||||
1977년 야마다 히사시 (한큐 브레이브스) | → | 오오스기 카츠오 (야쿠르트 스왈로즈) | → | 1979년 타카하시 요시히코 (히로시마 도요 카프) |
1970~1971년 퍼시픽리그 최다 홈런 | ||||
1969년 나가이케 토쿠지 (한큐 브레이브스) 41홈런 | → | 오오스기 카츠오 (토에이 플라이어즈) 44홈런(1970년) 41홈런(1971년) | → | 1972년 나가이케 토쿠지 (한큐 브레이브스) 41홈런 |
1970년 퍼시픽리그 최다 타점 | ||||
1969년 나가이케 토쿠지 (한큐 브레이브스) 101타점 | → | 오오스기 카츠오 (토에이 플라이어즈) 129타점 | → | 1971년 카도타 히로미츠 (난카이 호크스) 120타점 |
1972년 퍼시픽리그 최다 타점 | ||||
1971년 카도타 히로미츠 (난카이 호크스) 120타점 | → | 오오스기 카츠오 (토에이 플라이어즈)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호크스) 101타점 | → | 1973년 나가이케 토쿠지 (한큐 브레이브스) 109타점 |
1. 개요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해설가, 평론가, 지도자.현역 시절 도에이-닛타쿠홈-닛폰햄, 야쿠르트에서 뛰며 강타자로 뛰면서 이름을 날렸고, NPB 최초로 양대 리그 1000안타를 달성한 인물이며, 시즌 최다 희생플라이 일본 기록을 가지고 있다.
또 NPB 통산 홈런, 타점 9위에 오른 인물이기도 하다.
2. 프로 이전
3형제의 차남으로 태어나, 장남이었던 형의 영향을 받아 야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뒤 형과 아버지를 병으로 잃는 슬픔을 겪었다. 이때 형이 남긴 "나의 모습을 고시엔에 재현시켜 달라"는 유언을 이루기 위해 본격적으로 야구에 전념하게 된다.그 후 칸사이 고교에 입학해 1년차부터 야구부의 주전포수로 뛰었으나, 집안 경제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식야구로 갈아타게 되면서 코시엔 출장은 이룰 수 없었다.[1]
고교 졸업 후엔 선배 오카다 에츠야[2]가 감독으로 재직하던 사회인야구팀 마루이에 입사해 1년차부터 도시대항 야구대회 도쿄 예선전에서 활약했으나, 이듬해인 1964년 야구부를 그만두었다.
그 후 1년 뒤인 1965년, 오카다의 추천으로 도에이 플라이어즈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아 탈락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당시 도에이 타격코치였던 왕년의 강타자 후지무라 후미오가 잠재력을 알아보고 도에이 감독 미즈하라 시게루에게 "도에이가 저 녀석(오오스기)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제 친정팀에 추천해서 입단 시키려고 합니다만,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라고 강력하게 오오스기의 영입을 주장했고, 이에 미즈하라는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한번 자네 안목을 믿어 보겠네'라면서 오오스기의 입단을 허락했다. 그렇게 오오스기는 프로 세계에 발을 들였다.
3. 프로 시절
3.1. 토에이 - 닛타쿠홈 - 닛폰햄
1965년 데뷔 첫 해부터 미즈하라 감독의 신임을 받아 적극적으로 기용된 오오스기는 첫 해엔 타율 1할, 출루율-장타율 2할의 저조한 성적에 머물렀지만 그 와중에도 1홈런 13타점을 치며 가능성을 보였고, 다음 해 약 200타석 나와 타율 0.269, 출루율 0.313, 장타율 0.441로 크게 성장한 모습을 보였다. 196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주전으로 발탁되며 그 해 전시합 출장의 위용을 과시하며 베스트나인을 수상했고, 그 뒤로도 플라이어즈 구단의 주전으로 활약하며 1968년부터 야쿠르트로 이적한 후인 1975년까지 이어진 890시합 연속 출장을 달성했다.[3] 또한 타격 면에서도 1970~1971년 홈런왕, 1970년, 1972년 타점왕을 수상했고, 1971년엔 리그 최다안타를 기록하기도 했다.[4] 또 1970년 15희생플라이로 시즌 최다 기록을 세웠고 이 기록은 현재도 깨지지 않고 있다.
팀 선배인 장훈은 오오스기를 처음 봤을 때 머리는 큰데 어깨와 엉덩이 폭은 좁고 팔은 긴 특이한 체형에 배팅도 뭔가 엉성했지만 그의 숨겨진 재능을 간파하고 "저 녀석 언젠가 3관왕을 차지할 거야"라고 예언했는데, 그 예언은 1970년 시즌에 3분의 2만 들어맞았다. 오오스기는 그 해 44홈런,[5] 129타점으로 홈런 및 타점왕을 획득했고 타율도 0.339로 타격왕까지 노려볼 만한 성적이었지만, 하필 장훈이 0.3834로 사상 최고 타율[6]을 기록하는 바람에 3관왕 달성은 실패했고, 이후로도 3관왕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활약을 펼치며 1960~1970년대에 장훈, 백인천 등과 함께 토에이 - 닛타쿠홈 - 닛폰햄 구단의 중심타자로 뛰었지만, 1974년 시즌 종료 후 전신이었던 토에이 플라이어즈의 색채를 지우고 싶어했던 구단의 새로운 경영주인 닛폰햄(닛폰햄 파이터즈)의 프런트와 당시 사장 미하라 오사무가 주력선수를 대량방출하는 정책[7]을 펼쳤고, 이에 따라 오오스기는 우치다 준조, 오다 요시토와의 1:2 트레이드로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하게 된다.[8]
백인천과 절친으로 서로 이웃집에 살았다고 한다.
3.2. 야쿠르트
야쿠르트로 이적한 오오스기는 이적 첫해인 1975년엔 작년의 부진이 아직 가시지 않은 저조한 성적을 남겼으나, 이듬해부터 다시 맹활약을 펼치기 시작하며 재기에 성공했고, 이후로도 야쿠르트의 주전 타자로 뛰어난 성적을 넘겼다. 1977년부터는 히로오카 타츠로가 전년도 감독대행에 이어 정식으로 감독에 취임함과 동시에 토에이 시절부터 이어온 마구 휘두르는 타격법에서 확실성을 의식하는 타격법으로 바꾸면서 더더욱 호성적을 남기게 된다.
1978년에는 주전 4번 타자로써 타율 .327/30홈런/97타점의 호성적을 기록하며 와카마츠 츠토무, 찰리 매뉴얼 등과 함께 중심타선을 맡아 야쿠르트를 사상 첫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이어 벌어진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일본시리즈에서도 4홈런 10타점[9]을 기록하며 야쿠르트의 사상 첫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 본인은 일본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1978년 일본시리즈 MVP 수상 후 기뻐하는 오오스기.
이후로도 주전으로 활약했으나, 1980년대 들어 부인의 투병 생활과 본인의 지병 악화로 기량이 하락. 점점 주전 자리에서 벗어났고, 결국 1983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다. 은퇴 시즌의 기록은 349타석, 타율 0.261, 출루율 0.316, 장타율 0.488, OPS 0.804, 21홈런, 53타점 등인데, 성적만 보면 당장 은퇴를 고려할 만한 성적이 전혀 아니고, 심지어 야쿠르트에서 9시즌 만에 정확히 199홈런을 치며 양대 리그 최초 200홈런이라는 대기록을 문자 그대로 코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좀 이른 감이 있는데, 상술한 본인과 부인의 몸 상태가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양대리그 최초 200홈런 기록은 1993년 오치아이 히로미츠가 달성하게 된다. 은퇴하면서 오스기는 "이 한 방(200번째 홈런)을 팬 여러분의 꿈 속에서 쳐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통산성적은 2235시합 출장, 2228안타 486홈런 1507타점 32도루 11희생타 86희생플라이 800사사구 1116삼진 266병살타 이다. 또한 양대리그 최초 1000안타의 대기록과 시즌 희생플라이 최고기록을 가지고 있다.
4. 은퇴 후
은퇴 후엔 1984년~1989년까지 후지TV, 닛폰 방송의 야구해설자로 일하다가 1990년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의 타격코치로 부임한다. 하지만 1991년 간암에 걸린 것이 확인되어 결국 이 해 시즌 종료 후 퇴임했다.퇴임 후 투병생활을 계속해왔으나, 결국 병을 이기지 못하고 1992년 4월 30일 향년 4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또 명구회 회원 중 최초로 세상을 떠난 인물이 되었다.
사망 후인 1997년에 일본야구전당에 입성했다.
5. 여담
- 쉽게 흥분하고 감동하길 잘해서 별명이 감동거사 였다. 워낙 감정이 풍부하여 호불호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면서 눈물도 많은 사나이였다.
[1] 당연하지만 코시엔 대회는 엄연한 경식야구 대회니.[2] 일본 야구계에서 몇 안되는 프로 경험이 없는 아마추어 출신 프로야구 코치였다. 2018년 별세.[3] 이 기록은 역대 11위.[4] 최다안타 수상을 시작한 것은 1994년부터였다. 하지만 수위타자의 경우는 역사에 남을 안타 제조기를 팀 선배로 두는 바람에(?) 얻지 못했다.[5] 오오스기는 노무라 카츠야(난카이)와 그 해 막판까지 치열한 홈런더비 레이스를 벌였고 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둔 상황에서 오오스기는 43개, 노무라는 42개로 살얼음판 같은 승부를 이어나갔다. 어떻게든 데뷔 첫 홈런왕을 차지하고 싶었던 오오스기는 주변 동료들이 안쓰러워 할 정도로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결국 마지막 경기에서 홈런 1위를 거의 굳히는 44번째 홈런을 쏘아올린 오오스기는 크게 감격하여 베이스를 돌면서 유니폼이 흠뻑 젖을 정도로 펑펑 눈물을 쏟았고, 이를 지켜보던 장훈을 비롯한 팀 동료들과 마츠키 겐지로 감독까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6] 종전 기록은 1951년 오시타 히로시의 0.3832이었다. 1986년 랜디 바스가 기록을 경신하고 그 후로 스즈키 이치로가 2차례 장훈의 타율을 넘으며 2022년 현재에는 역대 4위의 기록이다.[7] 같은 해 백인천도 타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되었고, 장훈 역시 1975년 시즌 종료 후 자유계약으로 풀려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다.[8] 다만 이해 작년(.270)에 비해 무려 3푼 넘게 추락한 .234로 타율이 떨어진 성적 저하도 원인으로 추정된다.[9] 이 기록은 당시 나가시마 시게오가 가지고 있던 일본시리즈 타점 기록을 갱신한 신기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