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프리스쿠스 Julius Priscus | |
출생 | 미상, 로마제국 시리아 필리포폴리스 |
사망 | 249년 |
전체 이름 | 가이우스 율리우스 프리스쿠스 Gaius Julius Priscus |
직위 | 프라이토리아니 장교,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 → 렉토르 오리엔티스 |
가족 | 율리우스 마리누스(아버지) 필리푸스 아라부스(동생) 마르키아 오타킬리아 세베라(제수) 필리푸스 2세(조카) |
경력 | 프라이토리아니 백인대장 · 대대장 · 근위대장 집정관 메소포타미아 프라이펙투스 시리아 코엘레 속주 총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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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군인 황제 시대의 근위대장, 총독. 고르디아누스 3세의 근위대장으로, 티메시테우스 급사 후 동생 필리푸스 아라부스가 신임 근위대장에 선임되도록 힘썼다. 페르시아와 교전 중 고르디아누스 3세가 죽자 동생을 황제로 추대했다. 필리푸스 아라부스 아래에서 집정관을 역임했고, 동방의 총독을 맡을 당시, 렉토르 오리엔티스로 불리며 로마 제국 동방 전체의 지배자로 추앙받았다. 하지만 재임 내내 동방 주민들을 상대로 과도한 세금을 가혹하게 거둬, 요타피아누스 반란 원인을 제공했다. 요타피아누스 반란 진압 실패 후 기록이 없으나, 249년 동생 필리푸스 아라부스, 조카 필리푸스 2세가 몰락한 직후 살해됐을 당시, 함께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2. 생애
시리아 트라코니아 지역의 시민인 율리우스 마리누스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남동생으로 필리푸스 아라부스가 있었다. 그는 로마로 건너가 관료 생활을 하면서 로마 정계에서 경력을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세베루스 왕조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 모녀의 눈에 들어 프라이토리아니 장교로 들어갔다. 이는 율리아 모녀의 출신이 시리아 에메사 일대의 태양신 숭배 토착 왕가여서, 시리아 출신인 그에게 호감을 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41년 고르디아누스 3세에게 딸을 시집보낸 티메시테우스가 임페리움을 보유한 근위대장에 임명된 뒤, 티메시테우스의 오른팔로 전면에 나선다. 영악하기로 이름난 티메시테우스가 그를 점찍어 오른팔로 삼은 것은, 서로 연결고리가 있었던 것이 컸다. 율리우스 프리스쿠스는 티메시테우스에게 발탁되기 전 제국 동부에서 로마로 세금을 수송하는 중간 거점 마케도니아 속주에서 감찰관으로 있으면서 프라이토리아니 장교 역할도 수행했다. 이때 두 사람은 세베루스 왕조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시대동안 아나톨리아 일대에서 세금징수, 징발 업무를 수행하며, 일찍부터 손발을 맞췄다. 따라서 같은 속주 출신이라는 이유와 함께 그 능력을 높이 산 티메시테우스가 그를 기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근위대장이 된 티메시테우스가 여러 정적들을 무력화시킨 뒤, 242년 티메시테우스 동료 근위대장에 취임해 고르디아누스 3세 내각의 실질적인 3인자 위치에 올랐다.
243년 티메시테우스가 사산 왕조와의 전쟁을 진두지휘하던 중 돌연 죽자, 낙심한 고르디아누스를 설득해 동생 필리푸스가 자신과 함께 근위대장이 되도록 하였다. 이때 이야기에 관해, 믿을 수 없는 위서《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필리푸스 아라부스 형제가 몸이 안 좋아진 티메시테우스에게 약을 바치고 난 뒤 상관인 티메시테우스가 급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이 기록에만 나온 주장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왜냐하면 티메시테우스 생전부터 고르디아누스 3세 내각은 고르디아누스 3세의 친척 마이키우스 고르디아누스와 율리우스 프리스쿠스, 필리푸스 아라부스 형제가 티메시테우스를 돕는 형태로 구성됐고 프리스쿠스는 이때 마이키우스 고르디아누스도 근위대장에 나란히 추천해 균형을 이루도록 조치를 취했던 것이 확인되기 때문.
244년 2월 고르디아누스 3세가 필리푸스 아라부스 일당에 의해 암살[1] 또는 사산 왕조와의 전투 중 전사[2]한 뒤, 프리스쿠스는 동생을 황제로 추대했다. 이후 그는 필리푸스에게서 오리엔테스 전체를 관할하는 권한을 받고, 시리아 코엘레 총독이 됐다. 따라서 그에 관해 당대 비문에는 렉토르 오리엔티스로 적혀 있다.
필리푸스는 로마로 돌아가기 위해 사산 왕조 샤한샤 샤푸르 1세와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서, 로마 제국은 50만 데나리우스를 배상금으로 바쳐야 했다. 이때 프리스쿠스는 제국 동부 전체를 관할하는 최고 권력을 동생에게 수여받아 렉토르 오리엔티스로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동생이 배상금으로 합의한 50만 데나리우스를 채우기 위해, 본인이 영향력을 행사한 동방 속주에 막대한 세금을 징수하고, 이에 반발한 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248년 안티오키아에서 마르쿠스 요타피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프리스쿠스가 어찌 되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서 알 수 없다. 하지만 반란을 통제할 수 있던 그는 반란 진압에 실패했고, 이후 기록이 없다. 그래서 반란에 휘말려 죽었거나 잠적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비슷한 시기인 249년 여름, 동생 필리푸스도 데키우스와의 전투에서 패한 뒤 자살하거나 부하들에게 피살되었고, 조카 필리푸스 2세 역시 프라이토리아니 손에 처형됐다. 원로원은 프리스쿠스를 포함한 필리푸스 일가 남성들을 전부 처형시킨 뒤, 필리푸스 일가 전체를 기록말살형에 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