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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스라엘과 아르메니아의 관계에 대한 문서. 각 국은 대대로 사이가 소원한 관계이다. 아르메니아인과 유대인은 전통적으로 생업 분야가 겹치기 때문에 사이가 안좋았던 것도 있고 아르메니아인들이 성경에 나오는 노아가 아르메니아인이라고 주장하는 관계로 종교, 역사적 갈등도 깊다.2. 역사적 관계
2.1. 고대
아르메니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접촉은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티그란 2세 하의 아르메니아 왕국의 최대 강역은 현대 이스라엘의 영토 까지 닿았고 그곳에서 약 1천명의 유대인들을 아르메니아 본토로 정착시켰다. 아르메니아인 또한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했는데 무려 638년부터 예루살렘에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총대주교가 생기기도 하였다. 이들은 현대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며 아르메니아계 중동인으로 불린다.2.2. 중세
아르메니아와 이스라엘 모두 중세에 들어 이슬람 제국, 페르시아, 동로마 제국, 셀주크 제국 등의 외세의 침략으로 본국이 전부 멸망하였다. 그로 인해 아르메니아인과 유대인은 전세계로 퍼지기 시작했고 아르메니아인들이 아나톨리아, 이란에 정착한 반면 유대인들은 유럽으로 많이 정착하였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구두쇠 기질이 강하고 상인 느낌의 스테레오타입이 있었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나톨리아 베이국들과 페르시아 하에서 비교적 번영하며 살았고 유대인들은 유럽에서 많은 핍박을 받으며 여러 고난을 겪었다. 아르메니아인 또한 차별은 있었으나 유대인 만큼은 아니었고 특히 아르메니아인이 상업적으로 우세한 지역에서는 유대인들은 완전히 깔려있었다.2.3. 근세
근세까지도 아르메니아인들이 페르시아와 러시아, 아나톨리아 일대에서 유대인들을 압도하였다. 사파비 왕조에서는 아르메니아인들의 파워가 워낙에 셌던 탓에 현지 유대인들 대부분이 중앙아시아나 캅카스 지역으로 쫓겨나다시피 했고, 러시아 제국 시절에도 러시아 제국의 반유대주의 정책으로 인해 유대인들의 입지가 대폭 좁아지자 그 틈을 타 아르메니아인들이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오스만 제국은 사파비 왕조나 러시아 제국에 비하면 유대인들 입장에서 훨씬 낫긴 했으나 여기도 아르메니아인들이 좀더 우세했고, 특히 수도 이스탄불 인구의 20%가 아르메니아인이었을 정도라 유대인들이 불리한건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오스만 유대인들의 주요 활동 구역은 발칸반도와 북아프리카 지역이었다.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유대인들은 신대륙으로 이주하였고 이는 곧 유대인과 아르메니아인의 판도를 뒤바꾸어 놓는다.
2.4. 근대
20세기 초반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환자로 불릴 정도로 쇠약해지면서 범슬라브주의 열풍을 맞은 발칸반도의 여러 국가들이 러시아의 지원 하에 오스만 제국을 꺾고 독립해낸다. 이에 오스만 제국의 경제는 휘청이고 내부 분열이 심해지자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해외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반면 서아르메니아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시골에서 평소처럼 살아갈 뿐이었고 특별한 대우 같은 것은 없었다. 몇몇은 러시아의 편에 서서 아르메니아 독립 운동과 같은 행위를 하기 시작하였고 안그래도 기독교에 대한 안좋은 의식 등이 덧붙여져 오스만 제국에서는 반아르메니아 감정이 치솟았다. 이것은 곧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알렸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으로 안 그래도 줄던 아르메니아 인구는 바닥을 쳤으며 세계 경제가 서구권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역으로 유대인들이 아르메니아인들을 압도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2.5. 현대
이스라엘 건국 이후 예루살렘 구시가지 내 아르메니아 쿼터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신도 상당수가 추방당했다. 현재도 아르메니아는 자국군 연료를 이스라엘과 갈등이 큰 이란이 책임져 주는 만큼 서로 사이가 좋아질 수 없다. 아르메니아와 이스라엘이 사이가 워낙 나쁘다보니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논리로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지경이다. 게다가 터키랑도 일단 외교관계가 있는 이스라엘이 이러다보니 홀로코스트를 당한 피해자가 많은 이스라엘이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 대하여 침묵한다.아르메니아는 2020년 아제르바이잔과 전쟁에서 참패하여 1994년 2만명이 넘는 자국민 피를 흘려가며 얻어낸 카라바흐 영토 70% 가까운 곳을 겨우 달포 동안 벌어진 전쟁으로 싸그리 잃어버렸다. 그 원인 중 하나가 터키와 이스라엘이 강력하게 아제르바이잔에게 무기를 수출하고 심지어 서로 훈련도 하는 군사적 우방국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아르메니아에선 터키와 이스라엘에 대한 반발과 증오가 강해졌다. 거꾸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수도 바쿠 곳곳에서 이스라엘 깃발을 흔들며 환호하는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있을 정도로 이스라엘과 관계가 무척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