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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ian National Congress | |
힌디어 표기 | <colbgcolor=#FFFFFF,#191919>भारतीय राष्ट्रीय काँग्रेस |
한국어 명칭 | 인도 국민 회의 |
약칭 | INC |
창당일 | 1885년 12월 28일 |
상징색 | #19AAED |
대표 | 말리카르준 카르게 |
당사 | 24, Akbar Road, 뉴델리-110001 |
이념 | 세속주의[1] 자유주의 (인도) 사회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 경제적 자유주의[2] 시민 내셔널리즘 빅 텐트[3] 역사적 : 사회주의 간디사회주의 민주사회주의 |
스펙트럼 | 중도 ~ 중도좌파 역사적 : 중도좌파 ~ 좌익[4] |
당원 수 | 2,000만 명 |
국제조직 | |
청년조직 | 인도 청년 회의 |
노동조직 | 인도 노동조합 총회(INTUC) |
정당 연합 | 연합진보동맹(UPA) (2004~2023) 인도국가개발포괄동맹(I.N.D.I.A) (2023~현재) |
기관지 | 내셔널 헤럴드 |
상원 의석수 | 29석 / 245석 |
하원 의석수 | 102석 / 543석 |
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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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의 중도좌파 정당, 현 제1야당.식민지배를 받던 영국령 인도 시절 독립운동 조직으로 탄생하였으며, 독립 공화국 인도를 상징하는 최초의 정당이자 가장 오래 집권한 정당으로 20세기 중반~21세기 초 다수 기간 집권한 인도를 대표하는 여당이었다. 그러나 2014년 인도 인민당이 급부상한 이후 세가 줄어 정권 교체에 실패하고 있다.
공식적인 약칭은 INC이지만 인도 내에서는 당명의 마지막 단어 '회의(Congress)'의 두문자인 CONG으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인도 국기의 삼색은 본래 이 정당의 깃발에서 유래한 것이다.[5] 중화민국의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가 국민당 당기에서 유래한 것과 비슷한 사례.
2. 역사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시절 독립운동의 거두로 활약한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초창기에는 영국 식민당국에 친화적인 성향의 단체였지만, 1905년 당국의 벵골 분할령에 거세게 반대하며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반(反)영국 독립투쟁 조직으로 변모했다.
인도가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되면서 정당으로 발전했는데, 독립운동에 앞장서며 폭넓은 지지를 얻은 덕에 초대 총리에 오른 자와할랄 네루가 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후 그를 시작으로 그의 집안 사람들이 당 지도부를 대대로 주도하게 되었다. 네루의 딸 인디라 간디, 인디라의 아들 라지브 간디, 라지브의 아내 소냐 간디, 라지브·소니아 부부의 아들딸 라훌 간디와 프리양카 간디까지 네루의 후손들이 4대째 당내 실세로 군림 중이다. 이 때문에 '네루-간디 당'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고 있다. 참고로 인디라 간디 때부터 남편의 성을 따르며 얻게 된 '간디'는 마하트마 간디와는 혈연 관계가 없는 별개의 성씨다.
1945년부터 1977년까지 일당제나 다름없을 정도로 탄탄한 지지세를 기반으로 장기 집권하던 거대 여당이었다.[6] 그러나 제3차 경제 계획이 저조한 성과에 그치고, 무리한 산아 제한 정책에도 출산율 감소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등 정책 실패가 잇따르자 민심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으며 직을 내려놓을 위기에 놓인 인디라 간디 총리가 1975년 비상계엄령을 선포, 1977년까지 계엄군에 의지해 반대파를 탄압하는 비민주적 체제를 유지하자 반발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결국 1977년 총선에서 패해 32년간의 집권을 마무리하고 야당으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정권 교체로 들어선 새 집권당은 오직 '반(反) 인디라 간디' 하나의 가치만을 대의 삼아 일사불란하게 헤쳐모인 세력이었고, 좌파와 우파가 각자의 노선 차이를 잠시 눈감고 손잡은 탓에 화학적 결합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결국 새 여당에서 얼마 안 가 내분이 일어나며 실시된 1980년 조기 총선에서 인디라 간디를 다시 총리 후보로 내세워 압승하여 실각 3년여 만에 다시 집권 여당으로 복귀한다. 이후 재집권 4년여 만인 1984년 인디라 간디 총리가 군대를 투입한 시크교 무장단체 유혈 진압 사태에 앙심을 품은 시크교 신도 경호원들에게 총기 난사를 당해 암살되자 그녀의 아들 라지브 간디가 당권을 넘겨받았다. 사망한 간디 총리를 기리는 범국민적 추모 열기가 그해 12월까지 지속되는 가운데 총선에 참여했고, 이 전국적인 추모 분위기와 동정론에 힘입어 총 의석 543석 중 무려 411석을 얻는 초유의 압승을 거두면서 라지브 신임 총리를 중심으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라지브 간디 총리는 의회의 75.69%를 차지한 거대 여당의 기반 위에 순탄히 재임기를 시작한 것에 비해 각종 부패 스캔들에 연루되며 구설수에 올랐다. 결정적으로 총리인 자신의 가문을 비롯한 국방부 관계자들에게 브로커가 뇌물을 건네고 그 대가로 스웨덴 방산업체의 납품 계약을 따낸 이른바 '보포스 스캔들'이 치명타를 날렸다. 이 사건으로 전국적인 비난을 받으며 구태 정치인의 상징이 되어버린 라지브 간디는 국정 운영의 동력을 상실해버렸고, 1989년 총선에서 의석을 200석 넘게 잃으며 당세가 급격히 위축되었다. 최종적으로 197석을 얻으며 원내 제1당 자리는 지켰지만, 보포스 스캔들 내부조사를 놓고 간디 총리와 대립하다 사임한 비슈와나트 프라탑 싱 전 국방장관이 자신을 중심으로 한 신당 '인민당(Janata Dal)'을 창당하여 이 총선에서 143석을 얻어 선전하고 인도 인민당, 인도 공산당 등과 연합해 연립정부를 꾸리기로 합의하면서 정권을 상실하고 제1야당으로 밀려났다.
프라탑 싱 총리를 중심으로 한 연립내각이 각 당의 갈등으로 얼마 되지 않아 분열의 조짐을 보이자
재집권한 그해 곧바로 경제 위기를 맞이했으나, 라오 총리의 주도 하에 대외 개방과 관세 인하 등 적극적인 경제 기조 전환으로 성장률을 끌어올리며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1996~2003년까진 인도 인민당이 성장하면서 야당 신세가 되었다가, 2004년 총선에서 다시 집권하면서 만모한 싱 총리 체제 아래 인도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다는 평을 듣게 된다.[7] 덕분에 2009년 재집권도 했지만 2010년대 초중반 들어 성장이 정체되면서 2014년에는 다시 야당으로 밀려난다.
이후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이끄는 인도 인민당의 힌두교 근본주의식 우경화에 위기감을 느낀 지지자들이 다시 결집하면서, 우선 2018년 12월 7일의 라자스탄 주 선거[8]에서 인도 인민당을 누르고 110~140석 사이의 자리를 가질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고, 2019년 총선도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권교체까진 아니어도 개헌 저지선을 확보할 정도는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실제 인도 인민당도 2010년대 중후반 경제성장을 이끌었지만 하필 총선을 앞두고 다시 경기침체가 와 인도의 실업률이 45년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국민회의로선 호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겨우 52석을 건지는 대참패를 당했고, 당수인 라훌 간디는 자신의 정치기반인 우타르프라데시 주 아메티 지역구까지 인도 인민당에 뺏기는 굴욕을 당한다. 이 지역구는 과거 어머니 소니아 간디의 지역구이기도 했고, 심지어 큰아버지 산제이 간디와 부친 라지브 간디의 지역구이기도 한 곳이라 라훌 간디에게는 상징성이 엄청나게 큰 곳이다. 그런데 이 곳을 인도 인민당에게 내준 것. 그나마 케랄라 주에서 당선되어[9] 정치생명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정치 리더로선 치명타를 입었다.
이렇게 된 요인으론 당수인 라훌 간디의 리더십과 비전 부족, 네루-간디 가문의 이름만 강조하는 식상한 선거전략, 어머니 소니아 간디에게 휘둘릴 수 있다는 우려 등 내외부의 곪은 살을 결국 제거하지 못한 대가가 크다는 것이 거론된다. 실제 정당 성향과는 별개로 다이아몬드 수저라 할 수 있는 라훌 간디에 비해 정적인 나렌드라 모디는 비록 힌두 강성 정당인 인도 인민당 출신이라곤 하나, 짜이 행상으로 자수성가해 총리 자리까지 올랐고, 대통령인 람 나트 코빈드 역시 불가촉천민 신분으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것과는 극명히 대비된다.
또 극단적인 인도민족주의자 입장에서 보자면 라훌 간디가 외국인과 혼혈[10]인 것도 탐탁친 않았을 것이다. 그 외 선거 직전 인도-파키스탄 분쟁이 터지면서 공군이 국지적 전투를 벌이며 국민을 자극할만한 안보 이슈가 주요 선거 변수로 부상한 것도 국민회의 입장에선 별로 득될 게 없는 국면이었다.
결국 2019년 총선 이후 라훌 간디 대표는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났으며, 그 자리는 모친인 소니아 간디가 대행하고 있는데 한동안은 새로운 당대표를 뽑지 않고 있다. 참고로 라훌 간디에겐 프리양카 간디라는 여동생도 있는데, 이 여동생 역시 정계에서 활동 중이다.
2020년 8월엔 당내 인사 일부가 간디 가문에, 좀 더 당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든지 아니면 아예 빠지든지 결단을 하라며 개혁을 요구하기도 했다. 일단은 소니아 간디가 임시 대행을 맡는 것으로 유지되는 모양새.#
2022년 10월 말리카르준 카르게가 당대표로 취임하면서 드디어 네루-간디 가문이 아닌 인물이 당을 이끌게 되었다. 그러나 카르게 대표는 이미 80세의 고령인데다 네루-간디 가문과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는 정치인이기 때문에, 라훌 간디가 카르게 대표를 소위 '바지사장'으로 내세우고 뒤에서 실권을 휘두르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여하튼 카르게 대표를 주축으로 한 신임 지도부 체제가 출범한 뒤 2023년 2월 북동부 트리푸라·나갈랜드·메갈라야 세 곳의 주의회 선거에 참여했으나 참패하였다. 당세가 위축된 현실을 다시금 확인했다는 혹평이 이어지는 가운데 5월 10일 치러진 남부 카르나타카 주의회 선거에서 출구조사 예측치를 상회하는 단독 과반 의석(135석)을 확보해 압승하였고, 선거 연패를 탈출하며 반등의 기회를 마련했다. 특히 이 지역은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집권 인도 인민당을 지원하기 위해 스무 번이나 방문해 선거유세를 진두지휘할 만큼 상당히 공을 들였던 곳이고, 주의회 선거 역사상 최고 투표율인 73.19%를 기록할 만큼 열기가 뜨거웠던 곳이라 더욱 의미가 크다는 평. 이와 함께 곧 치러질 총선 관련 지지율 여론조사에서도 모디 총리와 인민당의 집권을 저지할 만큼은 아니지만 100석 이상을 확보해 제1야당의 세를 늘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러나 그해 12월 치러진 차티스가르·라자스탄 주의회 선거에서 출구조사 예측치를 하회하는 패배를 당하며 상승세가 한풀 꺾였다.
2024년 총선 진행 결과 인도 인민당의 의석 과반 확보를 저지하면서 많이 선방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정권교체를 할 정도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2014년 이후 10년 가까이 찾아온 최악의 암흑기에선 벗어나는 모양새. 다만 여당 자리는 다음 총선을 노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총선 직후 무소속 3석을 입당시켜 총 102석이 되었다.
선거 이후 INDIA 연합의 추대로 라훌 간디 전 대표가 10년만에 부활한 공식 야당 대표 자리에 오르면서 다시 인도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됐다. 이전 10년간은 선출을 위해 필요한 하원 의석수(전체 의석수 10%)에 미달해 공식 야당 대표를 선출하지도 못하고 있었던걸 생각하면 격세지감.
3. 성향
명목상으로는 사회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다만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중도화되어 지금은 자유주의 성향도 있다.[11]21세기 기준으로 당내 주류는 사회자유주의에 가까운 성향을 보인다. 그 외에 리버럴, 사회민주주의자, 민주사회주의자, 사회주의 좌익들부터 힌두교 전통을 현대적이며 부분적으로 옹호하는 자유보수주의자, 온건 내셔널리스트까지 다 모여있는 포괄정당에 가깝다.
세속주의를 내세우는 정당이라 힌두트바와는 거리감이 있다.
4. 주요 당원
- 마하트마 간디 - 인도 독립의 아버지, 인도의 국부이다. 그의 얼굴이 인도 루피 모든 지폐에 도배되어 있다.
- 자와할랄 네루 - 초대 총리, 마하트마 간디의 친구이자 인디라 간디의 아버지이다. 라지브 간디의 외할아버지이면서 소니아 간디의 시할아버지, 라훌 간디에게는 진외조부이다.
- 찬드라 보스 -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인도 국민군 사령관. 인도국민회의 55대 총재.
- 인디라 간디 - 전 총리, 자와할랄 네루의 딸이자 라지브 간디의 어머니이고 소니아 간디의 시어머니, 라훌 간디의 친할머니이다. 1984년 칼리스탄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시크교의 성지 암리차르 황금사원에 전차를 밀어넣는 블루스타 작전을 승인한 뒤, 자신의 경호원이었던 시크교도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 라지브 간디 - 전 총리, 인디라 간디의 아들이며 소니아 간디의 남편이자 라훌 간디의 아버지이다. 스리랑카 내전 내전에 인도군을 투입하여 스리랑카 타밀족에 대한 군사작전을 승인했다가, 타밀나두 선거 유세 중 타밀족 여성의 자살 폭탄 테러에 암살되었다.
- 소니아 간디 - 이탈리아 출신, 현재 당대표를 대행하고 있으며 전 대표 라훌 간디의 어머니이자 전 총리인 라지브 간디의 부인이다.
- 라훌 간디 - 2004년 정계에 입문하여 2007년부터 인도 청년회의와 학생연합의 의장도 맡고 있다. 핵심 당직을 모두 거쳤고 2017년부터 2019년까지 당대표를 지냈다.
- 말리카르준 카르게 - 2022년부터 당대표에 재임 중이다.
- 프리양카 간디 - 라훌 간디의 여동생이다. 2004년부터 당적 없이 인도 국민회의에서 일했으며 2019년 1월 입당하고 직업정치인이 되었다.
- 프라티바 파틸 - 인도의 전 대통령이자 첫 여성 대통령. 아래 만모한 싱 총리 임기때 대통령으로 재직하였다.
- P. V. 나라심하 라오 - 인도의 전 총리.
- 만모한 싱 - 인도의 전 총리이자 시크교도이다. 그가 항상 머리에 쓰고 다니는 파란 터번은 시크교도들의 상징이다.
5. 여담
- 이 당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간디-네루 가문의 사당화(私黨化)가 된 거 아니냐는 비판을 한다. 이 가문에서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를 배출하고, 네루의 후손들이 인디라 간디때부터 치열한 당내 권력투쟁 끝에 인디라 간디가 승리한 뒤[12] 인디라 간디의 후손들이 줄지어 당대표와 총리를 지내면서 가장 큰 권력을 오래 쥔 탓에, 지금의 간디(네루)들인 소냐 간디, 라훌 간디를 대표하는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당대표가 결정난다는 말도 나올 정도로 위세가 크다. 그러다보니 당내에서 이들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세력도 딱히 없고, 간디-네루 일가도 여전히 구시대적 정치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해 BJP의 힌두극단주의, 실용주의 노선에 대항할 정책을 제대로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 튀르키예의 공화인민당,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노동당과 역사·정치적으로 유사한 부분이 있다.
- 세 당 모두 건국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국부가 창당을 주도했다. 인도국민회의는 자와할랄 네루가, 공화인민당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스라엘 노동당은 다비드 벤구리온이 창당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세 사람 모두 자국 내에서 국부로 칭송받고 있다.[13]
- 창당의 주역인 두 사람[14]이 각 당 소속으로 자기 나라 최초의 정치적 실권자의 자리에 올라 건국 초기 발전을 주도했다. 네루는 초대 총리, 아타튀르크는 초대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벤구리온은 총리 시절 노동당 소속은 아니었지만[15] 초대 총리로 재임했다.
- 건국 초기 압도적인 여당의 지위를 누리며 장기 집권했는데, 이는 창당의 주역인 세 명과 그를 따르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공식적인 독립과 건국 연도를 시작점으로 할 때 인도국민회의는 1950년부터 1977년까지 총 27년을, 공화인민당은 1923년부터 1950년까지 총 27년을 연속으로 집권했다. 공교롭게도 두 당의 집권 햇수가 같고, 공화인민당의 집권이 끝나던 해에 인도의 독립과 인도국민회의의 공식적인 집권이 시작됐다. 이스라엘 노동당은 1968년부터[16] 1977년까지 집권한 후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다시 잠깐 집권했다.
- 세 당 모두 힌두교, 이슬람교, 유대교라는 특정 종교 우위의 국가를 이끌었지만, 종교색을 지양하는 세속주의 정교분리 성향이 짙었으며 이를 정책의 기본 바탕으로 삼았다.
- 건국 초기의 압도적 우위라는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세 당 모두 21세기 들어선 종교색이 짙은 신흥 정당의 급부상에 제1야당으로 밀려난 이후 예전만큼의 힘을 내지 못하고 있다. 인도국민회의는 힌두 민족주의 성향의 신생 정당 인도 인민당에게 1996년 정권을 내준 이후 2004~2014년에 만모한 싱을 총리로 세워 재집권했지만, 2014년부터 다시 인민당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에게 정권 교체를 당한 뒤 현재까지 제1야당에 머물러 있다. 공화인민당 역시 2002년 이슬람주의를 용인[17]하는 정의개발당에 정권을 내준 뒤 현재까지 만년 제1야당 신세를 면치 못하는 중이다. 이스라엘 노동당 역시 2009년 이후 베냐민 네타냐후를 중심으로 한 유대 민족주의 성향의 리쿠드에 밀려 전혀 힘을 내지 못하고 있다. 셋 다 오랫동안 이어지는 비집권 기간으로 인해 수권 능력을 잃어가는 것 아니냐는 일각의 우려와 비판의 시선도 받고 있다.[18] 상대측의 지도자 모디, 에르도안, 네타냐후가 소위 '스트롱맨' 스타일의 권위주의 성향 지도자로서 독재자 논란이 있는 것도 비슷하다.[19]
- 국제 정당 연합체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와 진보동맹의 정회원 정당이라는 점도 공통점이다.[20] 그 외 지금은 종교색 짙은 상대당에 맞서 세속주의를 지키는 정당으로 자리매김했지만, 집권 기간 일부에선 권위주의적 행태를 보인 적이 있었던 점도 공통점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 이념적으로는 콜롬비아 자유당과도 유사한 성향을 보인다.
- 한국에서 1995년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 당명도 이 정당에서 영향을 받았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 패한 후 정계를 떠나있던 김대중이 1995년 정계복귀를 선언하면서 "당이란 명칭을 쓰지 않은 예로 인도의 국민회의가 있다."라고 말하면서 신당 명칭을 새정치국민회의라고 지었고#, 15대 대선에서 당선된 바 있다. 다만 여기만 참고한건 아니고, 당시 김대중이 넬슨 만델라와 교류가 있었던지라 아프리카 국민회의도 영향을 미쳤다.
6. 역대 선거결과
<rowcolor=#fff> 연도 | 대표 | 의석수 | 득표율 | 득표율 증감 | 비고 | 집권 여부 | |
1934 | 불라바이 데사이 | 42 | 미상 | - | - | 비집권 | |
1945 | 찬드라 보스 | 59 | 미상 | 미상 | - | 비집권 | |
1951-52 | 자와할랄 네루 | 364 | 44.99% | 미상 | - | 네루 1기 내각 | |
1957 | 371 | 47.78% | +2.79 | - | 네루 2기 내각 | ||
1962 | 361 | 44.72% | -3.06 | - | 네루 3기 내각 | ||
1967 | 인디라 간디 | 283 | 40.78% | -3.94 | - | 간디(I) 1기 내각 | |
1971(INC(R)[21] ) | 352 | 43.68% | +2.90 | - | 간디(I) 2기 내각 | ||
1977 | 154 | 34.52% | -9.16 | INC+ | 비집권[22] | ||
1980 | 353 | 42.69% | +8.17 | INC+ | 간디(I) 3기 내각 | ||
1984 | 라지브 간디 | 414 | 46.86% | +4.17 | - | 간디(R) 1기 내각 | |
1989 | 198 | 39.53% | -7.33 | INC+ | 간디(R) 2기 내각 | ||
1991 | P. V. 나라심하 라오 | 244 | 36.40% | -3.13 | INC+ | 라오 내각 | |
1996 | 140 | 28.80% | -7.60 | INC+ | 비집권 | ||
1998 | 시타람 케스리 | 141 | 25.82% | -2.98 | INC+ | 비집권 | |
1999 | 소니아 간디 | 114 | 28.30% | +2.48 | INC+ | 비집권 | |
2004 | 145 | 26.53% | -1.77 | UPA | 싱[23] 1기 내각 | ||
2009 | 만모한 싱 | 206 | 28.55% | +2.02 | UPA | 싱 2기 내각 | |
2014 | 라훌 간디 | 44 | 19.31% | -9.24 | UPA | 비집권 | |
2019 | 52 | 19.49% | +0.18 | UPA | 비집권 | ||
2024 | 말리카르준 카르게 | 99 | 21.19% | +1.70 | I.N.D.I.A | 비집권 |
[1] Soper, J. Christopher; Fetzer, Joel S. (2018). Religion and Nationalism in Global Perspectiv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180–250.[2] Mohan, Rakesh. (2018). India Transformed : Twenty-Five Years of Economic Reforms. Washington, DC: Brookings Institution Press. pp. 44–49.[3] Lowell Barrington (2009). Comparative Politics: Structures and Choices. Cengage Learning. p. 379.[4] 인도 공산당이나 인도 공산당(마르크스주의)보다는 중도적이었다.[5] 파란색 수레바퀴는 인도 최초, 최고(最古)의 비문인 아소카 왕의 석주의 사자상에 새겨진 문양이다. 이 사자상은 현재 인도의 국장이다.[6] 사실 따지고 보면 더 길어서, 1947년 8월 15일부터 1996년 5월 16일까지 약 49년 동안은 압도적인 제1정당이었다. 그 기간 동안 비(非) 인도 국민 회의 정당들이 어떻게든 연합해 잠깐 잠깐 집권한 적은 있지만 각 정당의 기간은 3년을 넘기지 못했고, 각 정당의 집권 기간을 다 합쳐봐야 5년이 안 되었다. 또 이중 1947년 8월 15일부터 1989년 12월 2일까지 약 42년 동안은 사실상 자와할랄 네루-인디라 간디-라지브 간디 3대의 세습 체제였다. 물론 인디라 간디 일부 기간을 빼곤 선거로 선출된거긴 하다.[7] 이때 인도국민회의의 총재는 라지브 간디의 미망인 소니아 간디였지만, 그녀는 이탈리아 출신의 귀화 외국인이었기에 총리 자리에 직접 앉지 않고 경제전문가 만모한 싱을 막후에서 지원하는 포지션을 취한다.[8] 인도에서는 주의회 지방선거일이 주마다 다르다.[9] 인도는 한 후보가 2개의 선거구에서 출마하는 것이 가능하다. 2014년 선거에서 나렌드라 모디 역시 본인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구자라트 주 및 우타르프라데시 양쪽에서 출마했고, 둘 다 당선되어 구자라트의 지역구를 내려놓은 바 있다.[10] 어머니 소니아 간디가 이탈리아 출신이다.[11] 극초기에는 친영 리버럴 정당에 가까웠고 네루 총리 시절에는 민주사회주의 정당에 가까웠다. 물론 21세기 현재는 네루 가 인사들도 사회주의를 버리고 시장자유주의를 받아들여 진보적 자유주의에 가까운 성향이다.[12] 사실 인디라 간디는 처음 총리에 오를 때만 해도 당 원로들의 얼굴마담이었다.[13] 물론 인도는 네루에 더해 간디도 있긴 하다.[14] 네루와 아타튀르크[15] 노동당의 전신인 마파이 출신이다.[16] 전신인 마파이당까지 포함하면 1948년부터 집권했다.[17] 정의개발당은 의외로 당 강령에 이슬람주의 같은 특정 종교 기반의 정치 이념을 명시하고 있지는 않으나, 이슬람주의 보수 세력을 핵심 지지층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이들의 이해를 대변하며 이슬람주의 정당이나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18] 다만 2024년 기준으론 공화인민당은 2024년 튀르키예 지방선거에서 승리했으며, 인도국민회의 역시 2024년 총선에서 집권엔 실패했지만 의석수를 대폭 늘려 최악의 암흑기에선 벗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노동당은 제1야당 신세인 인도 국민 회의나 공화인민당보다도 더 인기를 잃고 군소 야당 수준으로 추락하여 메레츠와의 합당을 준비 중이다.[19] 다만 독재자라는 여론이 더 우세한 에르도안과 달리 모디, 네타냐후는 정치 스타일이 포퓰리스트 정치인일 뿐이지 독재자라고 평가받는 경우는 적은 편이다. 네타냐후는 독재자가 될 뻔하긴 했지만 실패로 끝났다.[20] 이스라엘 노동당은 진보동맹 정회원이지만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소속은 아니다.[21] 인도국민회의가 INC-R과 INC-O로 분리되어 총선에 참가하였다.[22] 인도 독립 이후 첫 정권교체, 인도국민회의 첫 비집권.[23] 원래는 당수인 소니아 간디가 총리로 취임할 예정이었으나, 이탈리아 귀화자인 소니아 간디가 부담감 등으로 만모한 싱을 대신 총리 후보자로 지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