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5:28:37

공화인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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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umhuriyet Halk Partisi[2]
약칭 CHP
영문명칭 Republican People's Party
한글명칭 공화인민당
창당일 1923년 9월 9일
1992년 9월 9일 (재창당)
슬로건 사람이 먼저, 단결이 먼저, 튀르키예가 먼저
(Önce insan, önce birlik, önce Türkiye)
이념 케말주의
세속민주주의[3]
사회민주주의
친유럽주의
급진주의[4]
정치적 스펙트럼 중도좌파[5]
당사 앙카라 주 앙카라 시 찬카야 구
아나돌루 대로 12번지
당원 수 1,257,110명 (2021년 기준)
당대표 외즈귀르 외젤
소속 정당연합 민족연합 (2023년 해체)
유럽 정당 유럽 사회당 (협의회)
청년 조직 청년 공화인민당
국제 조직


대국민의회 의석수 130석 / 600석
웹사이트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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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성향4. 기타5. 출신 정치인
5.1. 역대 대표5.2. 기타
6. 선거 이력

[clearfix]

1. 개요

튀르키예중도좌파 세속주의 정당, 현 제1야당. 중앙당사는 수도 앙카라의 찬카야(Çankaya)구에 위치한다.

1923년 9월 9일 인민당으로 출발해 1924년 10월에 '공화인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튀르키예의 국부로 불리며 존경받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초대 대통령과 그의 정치적 동료인 이스메트 이뇌뉘 초대 총리(이후 제2대 대통령)의 주도로 창당되었으며, 튀르키예 공화국의 모든 역사를 함께한 최장수 정당이다.

아타튀르크와 이뇌뉘의 집권 시절 강력한 세속주의 정책으로 현대 튀르키예의 기틀을 닦으며 한때 일당우위지배체제를 구축할 정도로 영향력이 막대했으나, 이슬람주의 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당의 정권교체로 실각한 이후 이슬람주의 정당과 세속주의 군부 쿠데타 세력이 대립하는 구도 속에 정치적 위상과 지위가 애매모호해져버렸다. 그러면서 민주당 이후 조국당과 복지당 등을 거쳐 탄생한 정의개발당이 우위를 점하며 야당으로 밀려난 뒤 현재까지 만년 제1야당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세속주의 수호를 위해 노력하다보니 그 성향도 이슬람주의가 보수우파로 자리 잡은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중도좌파로 이동하였다.

현재 정의개발당 소속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이슬람주의적·권위주의적 권력 강화에 반대하는 야권연합을 주도하는 원내 제2당, 제1야당이다. 점점 권위적으로 변해가는 정부와 보수적으로 변해가는 사회 추세 속에 언제 다시 집권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2. 역사

창립자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로, 1920년대 대국민의회군의 후예가 로잔 조약 이후 인민당이 되었고, 아타튀르크가 공화인민당으로 바꾼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아타튀르크와 함께 초기 튀르키예 공화국을 이끈 이스메트 이뇌뉘도 당연히 공화인민당 소속. 그렇게 튀르키예 공화국 초기에는 사실상 일당제 국가의 집권당이었으나, 1946년 이후 다당제가 시행되기 시작하고 1950년 5월에 이뇌뉘가 대통령직에서 사임한 이후부턴 절대 다수당 지위에서 내려왔다.

1990년대 이후부턴 다수당이 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정권을 잡은 것은 1999년 CHP-DSP연정 때이다.[6] 2001년이 튀르키예에서 세속주의 정당이 연립정권으로나마 집권한 마지막 해이고, 세속주의 세력의 방어자로 불린 세제르는 2000년에 대통령이 되어 2007년까지 튀르키예를 이슬람화의 물결에서 보호하였다. 허나 2007년 이후부턴 세속주의 세력이 야당 신세이다. 세제르는 세속주의자였지만 무소속 대통령이였고 간선제로 선출되었다.

2.1. 2010년대

2010년대 기준으로 당 지도자는 알레비교도이자 자자인인, 케말 클르츠다로을루(Kemal Kılıçdaroğlu)다.[7] 전 당수는 데니즈 바이칼이었으나, 부패 스캔들이 있었다. 사실 튀르키예에서 알레비 교도는 대우가 그닥 좋지 못해 제1야당의 총재가 알레비라고 논쟁이 일기도 했는데, 그는 "튀르키예에서 알레비를 믿는 것이 죄냐?"라는 반응을 보였다. 튀르키예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2016년 7월 15일,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는 트윗을 통해 "민주주의의 주인이 되자"라고 말하면서 당시 튀르키예 쿠데타에 반대했다. 허나 쿠데타가 실패한 후 에르도안 대통령의 숙청 작업에 대해서도 공화인민당은 반대의 입장을 보이며 쿠데타 과잉 숙청 피해 접수 창구를 만들기도 했다.

2018년 4월, 공화인민당 의원 15명이 집단으로 탈당하여 같은 야당인 좋은당에 입당했다. 이는 당 지도부가 지시한 것으로, 튀르키예 정부와 선관위가 '창당 후 6개월이 지나고 전당대회를 개최한 정당만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다'는 선거법을 근거로 창당 6개월이 안 된 좋은당의 선거 참여를 막으려 하자[8] 해당 조항을 무력화할 수 있는 조항인 '20석 이상 의석의 정당은 해당되지 않는다'를 이용하기 위해 자당 의원들을 좋은당에 꿔준 것이다. 당 지도부는 이를 '튀르키예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하였고, 이를 통해 공화인민당과 좋은당의 야권연대가 본격화되고 있다. 대선 후보 등록이 끝난 6월 해당 의원 15명은 공화인민당으로 복당, 다시 131석으로 복귀했다.

2018년 6월 24일 튀르키예 대선에서 에르도안이 승리했지만, 무하렘 인제 후보는 30% 이상의 득표를 얻었다.#

2019년 지방선거에서 광역자치단체장을 기존의 6석에서 11석까지 늘리는 등 크게 선전했다. 튀르키예에 외환위기 경고가 나오는 등 에르도안 체제하에서 경제 문제가 불거지자 대도시 중심으로 공화인민당이 꽤 지지를 받는 데 성공했다. 특히, 앙카라를 25년만에 되찾아왔다는 것이 의미가 크다.

튀르키예 병사의 장례식에 참여했던 공화인민당 대표가 폭행당한 일이 발생되자 공화인민당을 포함한 튀르키예 야당은 반발했다.#

2019년 5월 6일 이스탄불 시장 재선거를 치름에 따라 분노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동년 6월 23일 실시된 재선거에서 에크렘 이맘오을루(Ekrem İmamoğlu) 후보가 다시 승리했다.## 3월 선거보다 오히려 더 큰 격차로 공화인민당 후보가 승리함에 따라 이 결과로 정의개발당은 튀르키예의 주요 도시인 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3곳을 모두를 잃었으며 정권심판론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스탄불 지방법원이 자당 소속인 자난 카프탄조을루(Canan Kaftancıoğlu) 이스탄불 지부장에게 징역형을 선고하자 항소하겠다고 밝혔고 지지자들도 반발했다.#

2019년 9월 8일 에크렘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은 전임자의 흥청망청 행정을 고발할 목적으로 호화 브랜드를 포함한 수백대의 자동차를 전시했고 당연히 이는 전임 시장에 대한 대중들의 공분을 일으켰다.#

튀르키예 정부가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시리아 북동부에서 군사작전을 결정하자 공화인민당은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를 비판했다.#

2.2. 2020년대

2021년 들어 코로나 19 방역과 시리아 관련 정책, 갈수록 보수화되는 사회에 지친 국민들의 여론이 현직 대통령 에르도안에 등을 돌림에 따라 야권의 지지율이 덩달아 오르고 있다. 공화인민당에서 가장 유력한 대권 후보로 꼽히는 에크렘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이나 만수르 야와시 앙카라 시장이 2023년 튀르키예 대통령 선거 여론조사에서 여유롭게 에르도안을 꺾는다는 조사가 나오고 있고, 공화인민당과 협력 관계인 좋은 당 소속 후보와 대결해도 에르도안이 패한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반에르도안과 의원내각제로의 복귀를 골자로 좋은당·민주진보당·행복당·민주당·미래당과 손잡아 야당 6자 연합을 결성하고 3월 6일,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2023년 대통령 선거의 야권 단일 후보로 선출했다.# 흔치 않은 범야권 연대를 형성하면서 어느 때보다도 에르도안을 낙선시킬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예측이 국내외에서 잇따랐지만, 에르도안이 민족주의운동당 지지층을 포함한 샤이 보수층의 표를 대거 흡수하여 여론조사 결과에 비해 크게 선전하면서 클르츠다로을루 후보가 낙선하며 또 다시 정권교체에 실패했다.

대선 패배 후 6개월 정도 지난 시점인 2023년 11월 5일 전당대회를 치렀는데, 관심이 집중된 당대표 경선에서 원내부대표를 맡고 있던 외즈귀르 외젤 의원이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결선투표 끝에 제치고 당선되면서 13년여 만에 당권이 교체되었다. 2010년 스캔들로 불명예 퇴진한 데니즈 바이칼 대표의 뒤를 이어 제7대 당대표가 된 뒤 계속 당을 이끌어왔던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는 대선 패배 책임론에도 불구하고 대표직을 이어가기 위해 다시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당내 대중적 인지도와 지지율이 높은 에크렘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이 2023년 7월부터 "당내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변화(Değişim)'그룹이라는 신흥 계파를 결성하고 외젤 원내부대표와 교류하고 있었기에 당권 교체가 예정된 수순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반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는 수권정당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서도 13년간 당권을 유지하며 "대통령만 아닐 뿐 당대표로서는 에르도안과 비슷하다"는 비판[9]을 들어왔고, 결국 변화 요구에 구질서의 상징으로 지적받으며 퇴장하게 되었다.

물론 당대표 선거에서 패배했다고 해도 당내에서 13년간 대표였던 클르츠다로을루의 영향력은 여전히 건재하다. 일례로 어떤 정치 활동도 하지 않고 이스탄불에서 조그마한 공장을 운영하던 툰젤리 출신 주민의 장례식에 외젤 대표가 자신의 명의로 조화를 보냈고, 공화인민당 이스탄불 지부의 외즈귀르 첼릭 대표가 직접 조문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튀르키예는 물론 한국의 시각에서도 일반적이진 않다. 정황상 클르츠다로을루 전 대표의 동향 출신 측근이기 때문에 당 차원에서 예우한 듯하다.

그러나 당내 영향력에 대한 예우와는 별개로 외젤 대표와 이마모을루 시장을 위시한 계파가 당권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당내 권력 구도에 변화가 점차 감지되고 있다. 2024년 지방선거를 앞둔 당 후보자 공천 심사에서 클르츠다로을루 전 대표를 지지해온 대의원 출신 예비후보들이 전부 탈락한 게 그 일환. 클르츠다로을루 측 인사들은 이에 반발하고 있다.

그런데 외젤이 이끄는 신지도부가 야권 분열에도 자강론을 내세우면서 2024년 지방선거에서 정의개발당을 누르고 승리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당분간 야권 연대를 외치던 반외젤 친클르츠다로을루 쪽 인사들은 당내에서 의견을 펴기 어려워진 상황. 공화인민당이 전국 단위 선거에서 득표율 1위에 오른건 35년만에 처음이었다. 덕분에 외젤 대표와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이 이끄는 신체제가 당분간 탄탄대로를 걸을 것으로 보인다.

3. 성향

유럽 국제 사회주의 연맹에 소속되어있으며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 사회자유주의, 케말주의가 강령이다. 당령은 케말리즘의 6대원칙인 공화주의, 민족주의, 인민주의, 국가주의, 세속주의, 혁명주의다. 이는 튀르키예 헌법에 포함된 것이다.[10]

주된 지지층은 알레비파, 세속주의자, 케말주의자이다. 직업으로 보면 군인을 비롯한 공무원, 노조, 지역으로 보면 튀르키예 서부, 연령층으로 보면 고령층[11], 케말주의자들은 도심에서 주로 살며 학력에선 고학력층, 그리고 소득에서는 고소득층 쪽에서 지지율이 높은 편이다.

4. 기타

슬로건은 "튀르키예 통합의 힘"(Türkiye'nin Birleştirici Gücü)이였지만, 바뀐 듯 하다. "Önce Türkiye""(튀르키예어)가 슬로건[12]이며, 한국어로는 "튀르키예 먼저"라는 뜻이다. 2015년에는 "아나톨리아의 케말"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은근히 케말 아타튀르크를 팔아먹으며 선거유세를 하기도 했다.

건국 주도 세력들이 세워 초기 정치사를 주도했고, 헌법에 당의 이념[13]이 들어갔으며 창당 초기에는 당의 이념이 명확하게 정의되어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만중국 국민당과 유사점이 있다. 또 2020년대 시점에서 종교 근본주의 성격을 가진 소위 '스트롱맨' 정권[14]에 맞서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소속 세속주의 중도좌파 제1야당이라는 점에선 인도 국민 회의와도 유사점이 있다.

한국과 다르게 선거음악을 민중가요 비슷하게 만들기도 한다. 2014년 선거 송이던 Ak dediler kara çıktı(밝다고들 하던데 어둠이 왔네)[15] 물론 케바케라 일반적인 흥겨운 곡도 있는 듯하다. 역시 동일하게 2014년 선거 송인 Güldür Yüzümüzü(우리의 얼굴을 웃게 하라)도 있다.

5. 출신 정치인

5.1. 역대 대표

5.2. 기타

6. 선거 이력

총선
연도 대표 득표수 득표율 증감 의석수 집권여부
1927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 100% - 335/335 유일 합법정당
1931 - - - 287/317
1935 - - - 401/428
1939 이스메트 이뇌뉘 - 100% - 470/470
1943 - 100% ±0%p 492/492
1946 4,150,000 65% -35%p 397/465 여당
1950 3,176,561 39.45% -25.55%p 69/487 야당
1954 3,161,696 35.36% -4.09%p 31/541
1957 3,753,136 41.09% +5.73%p 178/610
1961 3,724,752 36.74% -4.35%p 173/450 연립여당
1965 2,675,785 28.75% -7.99%p 134/450 야당
1969 2,487,163 27.37% -1.38%p 143/450 야당
연립여당[21]
1973 뷜렌트 에제비트 3,570,583 33.30% +5.93%p 185/450 야당
연립여당[22]
1977 6,136,171 41.38% +8.08%p 213/450
1983[23] 네지데트 잘프 5,205,804 30.46% -9.94%p 117/400 야당
1987[A] 에르달 이뇌뉘 5,931,000 24.74% -5.72%p 99/450
1991[A] 5,066,571 20.75% -3.99%p 88/450 연립여당
1995 데니즈 바이칼 3,011,076 10.71% -10.04%p 49/550 야당
1999 2,716,096 8.71% -2.00%p 0/550 원외정당
2002 6,114,843 19.39% +10.68%p 178/550 야당
2007 7,300,234 20.88% +1.49%p 112/550
2011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11,155,972 25.98% +5.10%p 135/550
2015/6 11,518,139 24.95% -1.03%p 132/550
2015/11 12,111,812 25.32% +0.37%p 134/550
2018 11,271,240 22.64% -2.68%p 146/600
2023 13,802,183 25.35% +2.70%p 169/600



[1] 공화인민당의 상징은 6개의 화살(Altı Ok)로 각각 공화주의(Cumhuriyetçilik), 민족주의(Milliyetçilik), 인민주의(Halkçılık), 국가주의(Devletçilik), 세속주의(Laiklik), 혁명주의(İnkılapçılık)를 상징한다.[2] 줌후리옛 할크 팔티시[3] 정의개발당의 보수민주주의에 대조되는 용어[4] 케말 파샤 시절 공화인민당은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보다는 좌익자유주의, 급진적 자유주의에 가까운 성향을 보였다. 케말 파샤가 내세웠던 초강경 세속 정책프랑스식 급진주의의 산물이다. 이스탄불 대신 앙카라를 수도로 한 것 역시 당시만 해도 이스탄불은 구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왕당파 근거지 느낌이 있었고, 반대로 앙카라는 공화파 세력의 근거지 느낌이 있었기 때문.[5] 알자지라 기사[6] DSP는 1980년 케난 에브렌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당 정화 조치의 일환으로 해산되었을 때, 당시 당수이던 뷜렌트 에제비트가 공화인민당의 일부를 이끌고 만든 정당이다. 우리말로는 민주좌파당이다. 다만 이때와 달리 최근 들어서는 서로간 협력을 잘 하지 않는 것 같다. 특히 케말 클르츠다르오을루(Kemal Kılıçdaroğlu) 공화인민당 대표가 취임한 이후로 더하다. 클르츠다르오을루는 자자족이고 알레비 교도이기 때문에 아무리 세속주의여도 민주좌파당 입장에서는 좀 어색한 면도 있기 때문인듯 하다.[7] 케말의 아들이 한국유학 비슷하게 간 것이 뉴스로 나온 바 있었다.[8] 사실 튀르키예 정부, 선관위가 좋은당의 선거 참여를 막으려고 일부러 창당 6개월이 되기 전 시점으로 선거일을 잡은 게 크다.[9]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권위주의 정치와 금권선거 등 각종 선거 부정행위 등을 비판하면서도 당대표 경선 투표 이전 대의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선물을 돌리는 등 내로남불 행태를 보여 비판을 받았다. 또 투표 이전 당대표 후보자들의 정견발표 때 타 후보자들의 연설시간은 짧게 설정하여 촉박하게 진행하고 중간에 연설을 끊어버리는 등 압박을 주었지만, 정작 자신의 정견발표 때는 시간 제한을 훨씬 넘겨 투표 개시 시각이 지났는데도 아랑곳않고 40분 가까이 길게 연설했다. 결국 "정당 지도자로서 국가 지도자와 하는 짓이 똑같다"는 비판을 들었다.[10] 1960년대까지는 반공주의, 권위주의 성향도 있던 일종의 빅텐트 정당이었으나, 1965년을 전후해 초대 총리 겸 2대 대통령 이뇌뉘 등 공산당에 유화적인 당내 좌파 사회주의자들이 당권을 잡으며 뷜렌트 에제비트 당수 체제에서 사민주의 노선이 확립되어 중도좌파 정당으로 분류된다.[11] 중도좌파, 세속주의 정당임에도 청년층보다 고령층의 지지를 더 많이 받는 이유는, 원래 튀르키예는 공화인민당이 기성정당으로 인식되다 보니 청년층에선 낡은 정당이란 인식이 있었는데 때마침 2001년 창당한 정의개발당이 청년 친화적 노선을 걸으며 이들을 포섭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정의개발당도 세월이 흐른 2020년대 들어선 기성정당화 되다보니 지지층을 확실히 구분짓기 애매하다.[12] 발음은 "왼:제 퉐:키예"다.[13] 6개의 화살, 삼민주의[14]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나렌드라 모디[15] AK는 튀르키예어로 '하얗다', '밝다'라는 뜻. 한편으론 정의개발당(Adalet ve Kalkınma Partisi)의 약자가 'AKP' 혹은 'AK Parti'다. 그래서 정의개발당이 상징으로 빛나는 전구를 쓰고 있다. AKP를 언어유희해서 돌려 까는 선거송이다.[16] 초대 대통령이자 국부.[17] 초대 총리이자 제2대 대통령[18] 공화인민당 대표로서 제16대 총리를 역임했다.[19] 케난 에브렌쿠데타 이후 불법화되어 당 조직이 해체되었는데, 직전 대표였던 뷜렌트 에제비트는 민주화 이후 민주좌파당 소속으로 총리직에 복귀했다.[20] 2023년 대선후보이기도 하였다.[21] 1971.3.26 - 1973.4.15[22] 1974.1.26 - 1974.11.17
1977.6.21 - 1977.7.21
1978.1.5 - 1979.11.12
[23] 인민당으로 참여[A] 사회민주인민당으로 참여[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