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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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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파일:also sprach zarathustra_Friedrich Nietzsche.jpg
<colbgcolor=#dddddd,#010101><colcolor=#373a3c,#dddddd> 작가 프리드리히 니체
장르 철학서[1]
언어 독일어
발매일 1883년

1. 개요2. 줄거리
2.1. 서설
3. 상징4. 미디어 믹스5. 패러디6. 기타7. 읽을 만한 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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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만인을 위한, 그러나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Also sprach Zarathustra: Ein Buch für Alle und Keinen)』으로, 차라투스트라를 주인공으로 삼아 소설 형식으로 철학을 풀어낸 프리드리히 니체의 대표작이다. 니체는 이 책으로 자신이 "인류에게 이제까지 주어진 그 어떤 선물보다도 큰 선물을 주었다"[2]고 말했다. 그만큼 독보적인 책이라는 것.(보편적이란 말!)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는 그가 가장 치명적인 오류인 '도덕'을 최초로 창조한 사람이고 그만큼 도덕의 문제에 대해 그 어떤 사상가보다 더 오래 그리고 더 많이 경험을 쌓았으므로, 그와 대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3]

차라투스트라가 10년 동안 머무르던 동굴에서 하산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펴는 내용으로, 주로 철학서로 분류되지만, 옴니버스로 구성된 소설처럼 이야기를 전개하며, 여러 등장인물과 사물, 시간과 공간에 상징이 담겨 있는 등 문학적 요소도 많은 작품이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883년에 출간된 1부를 시작으로 1년 동안 집필이 계속되어 2, 3부가 각각 출판되었다. 4부는 출판사 없이 40여 부만을 사비로 간행해서 8명의 지인들에게 나눠주기만 했다. 1~4부의 합본은 1892년, 나우만(Naumann)에서 니체 전집을 기획하여 발간되었다.

2. 줄거리

2.1. 서설

차라투스트라는 30살에 고향을 떠나 산으로 들어갔다. 산 속 동굴에서 10년간 고독을 즐기다가, 어느날 그는 자신의 넘쳐흐르는 지혜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자 산을 내려오기로 결심했다. 산을 내려온다는 것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일종의 '즐거운'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산을 내려와서 첫번째로 만난 사람은 숲 속의 성자였다. 성자가 차라투스트라에게 왜 내려왔냐고 묻자,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선물을 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신을 믿고 있었던 성자는 차라투스트라에게 그들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거나 적선을 하는 방식으로 선물을 줘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것이 선물인지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자는 차라투스트라를 오해하고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단지 자신의 넘쳐흐르는 풍요와 사랑을 주체하지 못해서 자신의 풍요와 사랑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려는 것일 뿐이다. 그러한 선물은 동정이 되어선 안 된다. 사람들의 의지를 고양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에 대한 믿음'이 성자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는, 성자와 헤어지면서 이런 말을 내뱉었다. "이 늙은 성자는 숲속에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것을 아직도 듣지 못했구나!"

성자와 헤어진 차라투스트라는 가까운 도시에 들어섰다. 그곳 시장에는 줄타기 곡예사의 공연을 보기 위해 많은 군중들이 모여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군중들에게 자신의 넘쳐흐르는 지혜의 가르침 ㅡ 위버멘쉬에 대해서 말해보지만, 군중들은 줄타기 공연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도리어 되지 말라고 말한 '인간말종'이 되겠다고 아우성이다.

바로 그때, 줄타기 곡예사가 두 개의 탑에 걸쳐진 밧줄 위를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가 중간쯤 이르렀을 때 탑에서 작은 문이 열리더니 광대[4]가 나와 재빠른 걸음으로 앞에 있는 곡예사[5]를 뒤쫓았다. 그러고 광대는 "너는 지금 너보다 뛰어난 자의 앞을 가로막고 있잖아!" 이렇게 소리치면서 앞을 가로막고 있던 줄타기 곡예사를 훌쩍 뛰어넘었다. 이에 줄타기 곡예사는 그만 넋을 놓고 허둥대다가 밧줄을 헛딛고 곤두박질쳤다. 곡예사는 그렇게 죽었다. 차라투스트라는 기꺼이 위험을 업으로 삼은 곡예사를 높게 평가하곤 그를 묻어주기로 결심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죽은 곡예사를 등에 메고서 길을 나섰다. 깜깜한 밤이었다. 도중에 광대의 경고를 받았으며, 도시의 성문에서 무덤파는 자들과 만나기도 하다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어느 외딴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에는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차라투스트라에게 빵과 포도주를 건냈다. 노인은 심지어 죽은 곡예사에게도 빵과 포도주를 먹으라고 말하고는 축객령을 내렸다.[6] 그 후 차라투스트라는 길과 별빛에 의지해서 동이 틀 때까지 걸었다. 그는 늑대로부터 보호하고자 죽은 자를 속이 빈 나무 속에 넣고서는, 곧 잠에 빠졌다.

잠에서 깨어난 차라투스트라는 아침놀의 햇살을 받으며, 살아 있는 길동무[7]가 필요한 것을 깨달았다. 위버멘쉬의 가르침은 군중이 아니라 길동무에게 말했어야 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다짐을 하면서 정오[8]에 이르자 하늘 위에 뱀을 목에 휘감은 독수리 한 마리가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날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차라투스트라는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 짐승들이다!"[9] 차라투스트라는 문득 사람들 틈에 있는 것이 위험한 길임을 깨닫고는[10] 좀 더 영리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차라투스트라의 하강은 시작되었다.

3. 상징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상징과 패러디로 가득차 있어서 상징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면 그저 시집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책을 읽기 전에 어느 정도 상징에 대해 아는 것이 필요하다. 각각의 상징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 태양 - 자기 자신의 주된 의지, 본능, 열정, 주관. 자기 내부의 명령. 가치 생성의 주체. 반대로 '달'은 타인들의 의지와 명령에 의존하는 것으로서, 냉정하고 객관적인 정신을 가리킨다.
  • 황금 - 자신의 내부로부터 솟아나오는 힘들의 압도적인 압력으로 인해 아무런 생각 없이 자기를 희생하여 남에게 덕을 선사하는 것을 상징한다.
  • 하늘 - 자기 자신의 육체적ㆍ신체적 공간. 니체에 따르면 정신이 아니라(정신은 신체의 일부에 불과하다) 자신의 육체적ㆍ신체적 공간이야말로 자신의 의지가 뛰어 노는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마주치는 '우연'은, 자신의 선택을 통해 자신에게만큼은 '필연'으로 바뀌게 된다. 즉 세상의 모든 우연이 필연으로 되는 곳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11]
  • 낮과 밤 - 낮은 '건강한' 상태. 밤은 '병든' 상태. 여기서 '건강'이란, 자신을 사랑하고 긍정할 줄 알며 자신에 대해 긍지를 지녀서 대담하고 활기 넘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병'이란, 자신을 싫어하고 부정하며 자신의 것에 만족 못해서 상대방의 것을 질투하고 구걸하며 의기소침한 것을 말한다. 니체에 따르면, 건강한 사람은 넘치는 활력으로 창조물을 생산한 뒤 병든 상태가 된다. 병든 사람은 다시 창조물을 생산하기 위해 건강을 되찾기를 갈구하고, 이렇게 건강한 상태와 병든 상태는 낮과 밤이 바뀌듯이 끊임없이 순환한다.
  • 그림자 - 자신의 병든 상태. 의인화될 때에는 상대주의에 빠져 목표를 잃어버린 자.
  • 정오 - 건강한 의지로 넘치는 상태. (태양이 머리 위로 뜨는 정오에는 그림자가 사라진다.)
  • 대지 - 생명. 성장. 변화. 생성. 대지는 '지금 여기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한다. 그 반대는 세계의 배후에 있다고 여겨지는 '영혼', '천국'을 말하는 것으로서 플라톤의 이데아와 그리스도교의 신으로 대표되는 절대적인 가상이다. 대지를 사랑해라는 말은 이러한 불변하는 가상을 믿지 말고, 변화하고 있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긍정해라는 말이다.
  • 바다 - 자기 자신만의 정신 세계.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은 사유의 모험을 떠난다. 반대로 '뭍(육지)'은 대중들이 사는 세상.
  • 산 - '자기 자신'으로 서 있음을 상징한다. 따라서 산을 올라간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 별 - 자기 자신의 의지가 요구하는 사명. 꿈과 목표.
  • 샘 - 자기 자신이 만든 가치. 사람은 자기 자신이 만든 가치로 살아가므로, 가치는 샘물과 같은 것이다.
  • 재 - 자기 자신에서 비롯된 것을 가리킨다. 창조의 준비물. (불사조는 자신의 재에서 재탄생한다)
  • 피 - 격렬한 감정. 영혼.
  • 거울 - 어떤 관점으로 본다는 것. 따라서 '백 개의 면을 가진 거울'은 백 개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 늪 - 남을 비난하는 것에만 열을 올리는 태도. 정작 자신에 관한 일이나 문제에 대해서는 맞닥뜨려 해결하려 하지 않고 피하면서, 남에 대해서는 질투와 복수의 마음으로 비방과 불평만 하는 태도.
  • 차라투스트라의 선물 -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가르침.
  • 줄 타는 사람(곡예사) -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과 같이, 자신의 길을 가고자 노력하는 사람.
  • 어릿광대(포센라이서(Possenreißer)) - 교양을 가진 엘리트. 사회와 대중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사는 자신의 삶이 충실하다고 착각한다.[12]
  • 무덤 - 과거의 기억. 잊혀진 것. 무덤에 묻혀 있는 '관'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한탄을 상징한다.
  • 길동무 - 경쟁자. '자신의 길'을 갈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경쟁자가 될 만하다.
  • 독수리와 뱀 - 독수리는 긍지를 상징. 뱀은 영리함을 상징. '독수리와 함께 있는 뱀'(긍지를 가진 영리함)은 '자기 자신의 삶'을 사는데 엄청난 도움이 되지만, '독수리가 없는 뱀'(긍지 없는 지식)은 허무로 빠지기 때문에 반대로 엄청나게 위험하다. 차라투스트라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도 이런 '독수리가 없는 뱀'(긍지 없는 지식)인데, 이때 차라투스트라[13]가 '뱀의 대가리를 깨무는 결단을 내리고 웃음소리를 내는 것'이 상징하는 바는, 긍지 없는 지식에 휘둘리지 말고 삶에서 중요한 것은 '명랑함'임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 나귀 - 모든 것을 다 좋다 하고 심지어는 이 세계를 최선이라고 말하면서,[14] 삶이라는 무거운 짐을 견디는 자.[15]
  • 낙타 - 삶이라는 무거운 짐을 진다는 것에는 나귀와 비슷하나, '순종'한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이에 비해 나귀는 어떤 명령에 '순종'한다기 보다는 세상의 온갖 우연을 '견뎌낸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 사자 -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 "~해야 한다"는 타인의 명령을 부정하고 싸우는 자. 자유를 쟁취하는 자. 하지만 사자만으로는 새로운 가치의 창조를 할 수 없다. 그래서 '웃는 사자'를 길러내는 교육이 필요하다. '웃는 사자'는 더 높고, 더 강하고, 더 승리를 구가하고, 더 쾌활한 자들로서 신체와 영혼이 올곧은 자들이다.[16] '웃는 사자'는 그 용기로 영원 회귀 사상(아이를 창조)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 아이 - 가치를 창조하는 자.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 최초의 움직임이자 신성한 긍정. 자식이나 제자,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을 의미하기도 한다.[17]
  • 난쟁이 - 무겁고 진지함. 이성적인 것. 도덕적인 것. 사회가 개인에게 강제하고 규정하는 것. '중력의 정신'이라고 불린다. 약간의 광기를 의미하는 '명랑함'과 반대다.
  • 거미 - 이성적, 학문적 체계. 세상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거미줄처럼 듬성듬성있는 체계라는 틀로서 세상을 이해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특히 그 중에서도 복수와 질투의 심리로 하향평준화를 원하는 평등 이론의 설교자를 타란툴라라고 부른다.
  • 개 - 대중 또는 대중을 대변하는 자. 대중들은 여론을 앞세워 그들의 정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비난하고 물어뜯는다. '불개(Feuerhund)'는 선동되어 혁명을 일으키려는 대중을 말한다. 니체는 '건강한 불개'에 대해서도 말하는데, 건강한 불개는 복수나 질투의 감정이 아닌 자신의 넘쳐 흐르는 의지에 따라 자유를 쟁취한다.[18]
  • 사형집행인 - 자신들의 정의를 얘기하면서 남을 처벌하려는 충동이 강한 자.
  • 양 - 기존 학문만이 옳다고 여겨 그것을 따르기만 하는 학자. 그는 기존 학문을 반복해서 말할 뿐, 자신만의 생각은 말하지 못한다. 창조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 불구자 - 다양한 욕망에 대한 자신만의 평가 기준이 없는 사람. 그는 각각의 부분 욕망에 대해서만 좋아하거나 싫어하며, 자신의 모든 욕망을 포괄하는 전체적인 기준이 없다. 니체는 이를 '취향이 없다'고 말한다. '취향'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우연을 하나로 모으고 압축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심지어 그 취향이 '자기 자신의 의지가 필연적으로 선택한 것'이라는 확신마저 가질 정도여야 한다.
  • 썩은 열매 - 열매는 창조의 결과물이므로, 썩은 열매는 그런 창조의 기쁨마저도 공허해지는 것, 즉 허무주의를 의미한다.
  • 여자 - 말 그대로 여성을 뜻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 비유로 쓰이며, 비유로 쓰였을 때 자신의 '삶'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삶의 맹목성', '삶의 변덕'이 니체가 삶을 여자로 가리키는 이유다. 1부 18장에서 '늙은 여자'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여자를 만나러 갈 때 채찍을 잊지마라고 조언하는데, 이 때 '여자'는 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닌 '삶'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3부 15장 「또 다른 춤의 노래」에서 삶을 여자에 비유하면서 삶에 순종하는 것이 아닌 삶에 명령을 내려야 된다는 의미에서 채찍을 언급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여자(삶)에게 귓속말을 하며 '영원 회귀'를 암시하는데, 영원회귀는 다시 모든 것이 되돌아온다는 것, 그래서 순종하는 삶과 지배하는 삶이 번갈아가며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라는 얘기다.
  • 문 - 영원회귀 사상을 상징.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 지금껏 내가 창조해왔던 것들과 싸울 줄 아는 결단. 이는 창조의 기쁨을 '계속해서' 누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이 이때까지 이뤄낸 성과물조차 비판하고 넘어서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자신의 불행을 불러오더라도 말이다.
  • 겨울 - 자신의 작품을 알아보지 못하고 냉대하는 세상. 또는 그런 시련의 시기. 반대로 봄과 여름은 자신을 대접해주고 심지어 추종해주는 시기. 니체는 차라리 여름보다는 겨울이 낫다고 얘기한다.
  • 두 명의 왕 - 명예의 두 측면, 즉 권력과 돈을 상징한다. 더 자세하게는 두 명의 왕 중에 한 명은 '군주(권력)', 다른 한 명은 그러한 군주를 조종하는 '소상인(돈)'을 상징한다. 니체는 "생각은 군주가 하더라도, 조종은 소상인이 합니다"[19]라고 말했다.[20]
  • 거머리 - 엄격한 학문적 양심을 가진 학자의 '지식'.[21] 학문적 엄격함과 냉철함을 가진 학자는 자신의 전공 하나만 알고 다른 모든 것에는 무지하므로, 자신의 열정(피)을 소모시켜 자신의 학적 지식(거머리)만을 키운다. 그에게는 그 자신의 삶을 위한 열정(피)이 메말라 있다.
  • 실직자 - 교황. 신이 죽었기 때문에 일자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
  • 가장 추악한 자 - 동정 받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자기 자신을 내팽개치고 허무에 빠진 자. 변장하고 그럴싸하게 꾸미는 것을 좋아한다.[22] 동정 받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안다는 점에서 그는 '좀 더 높은 인간'에 속하지만, 창조적 파괴가 아닌 수치심과 열등감으로 파괴적 행위를 한다는 점, 자기 자신의 의지를 사랑할 줄 모른다는 점에서 '가장 추악한 자'이다. 그는 자신의 수치심 때문에 목격자인 신을 죽이게 되지만, 허무에 빠져 있기 때문에 곧 새로운 신을 받들어 섬긴다.
  • 자발적 거지 - 예수. 평화애호가.
  • 둥근 고리 - 영원 회귀를 상징.

4. 미디어 믹스

  • 유희왕 듀얼몬스터즈: 카이바 세토가 읽는 책으로 등장한다. 심지어 원문인 독일어판으로 읽고 있었는데, 유명 교수들조차 어려워할 정도의 고난이도 책임을 감안하면, 카이바의 천재성을 알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교향시):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96년에 이 책을 바탕으로 한 교향시를 만들기도 했다. 이 곡의 서주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오프닝으로 쓰인 것으로 유명한데, 워낙 이 서주가 유명하고 널리 쓰이다 보니 약 35분에 달하는 이 교향시를 단순히(?)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OST 정도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 SKY 캐슬: 독서토론 옴팔로스에서 언급된다. 이수임이 처음 들어올 때 읽을 책이었으며, 결국 파국을 맞는 계기가 된다. 상술된 것을 보면 알겠지만 교수들도 어려워하는 책이 이 책이다.
  • 격기3반: 닥터 오진의 최후에 이 책의 내용이 언급된다.

5. 패러디

"차라투스트라는 가장 숙명적 액운인 도덕이라는 오류를 창조해냈으며, 따라서 그는 그 오류를 인식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하다."
-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지 中
패러디가 많은 책이다. 내용 곳곳에 신약성서 패러디가 많으며, 책 제목도 자라투스트라[23]의 패러디로 볼 수 있다.

6. 기타

  • 영원회귀, 힘을 향한 의지, 초인 등 니체 철학의 많은 개념이 한데 모이는 사실상 프리드리히 니체의 대표작으로 본인의 저작 중 가장 인지도가 높지만, 많은 니체 연구자들이 입을 모아서 "이건 절대로 처음 읽으면 안 된다! 제일 마지막으로 읽어야 한다!"라고 이 책으로 니체 철학에 입문하는 것을 만류하는 책이다. 반대로 입문 추천작은 니체 본인이 이 책의 해설서로 쓴《선악의 저편》이나, 이마저도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도덕의 계보》혹은 《안티크리스트》와 같은 저서로 니체 철학에 입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쉽게 말해서 '니체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즉 저자의 의도에 대한 이해가 깔린 다음에 봐야 이해할만하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은유적이고 함축적이어서 이해가 어려운 니체의 책 가운데서도 온갖 문학적 장치로 가득 찬 수수께끼 같은 책이기 때문이다.[24]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유명하다는 이유로 도전했다간 도대체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지 머리가 터져나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화려한 경구를 접하고서 니체에게 이끌려 이 책으로 니체 철학에 입문하는 사람이 많다.
  • 한국어 번역본이 보통 한두 종류 뿐인 서양 철학서들 중에서 독보적으로 여러 종류의 한국어 번역본이 나와 있다. 오죽하면 한국어로 번역된 철학서들 중에서 《논어》 다음으로 많은 번역본이 존재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 그런데 강대석, 백승영, 이진우, 정동호 등 니체 철학 전공자들의 번역은 문학적 가독성이 딸리고 반대로 곽복록, 홍성광 등 독문학자의 번역은 니체 철학에 대한 이해가 얕다는 단점이 있다. 때문에 수준 높은 철학적 이해도와 문학적 가독성을 동시에 갖춘 번역이 현재로서는 없다시피 하다. 가장 많이 추천되는 번역은 황문수 번역(문예출판사)이지만 일본어 번역본을 참조한 탓에 일본식 번역어가 적지 않아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낡아 보이는 감이 없지 않다.

7. 읽을 만한 글귀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다리라는 데에 있다. 인간에게서 사랑받을 만한 점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자 내려가는 존재라는 데에 있다. 나는 사랑하노라. 하강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 모르는 사람들을.
서문 4절[25]
나의 제자들이여, 나는 이제 홀로 가련다! 그대들도 이제 홀로 떠나라!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 나를 떠나서 차라투스트라에 저항하라! 아니 차라리 그를 부끄러워하라! 그가 그대를 속였을 수도 있으니... 언제까지나 제자인 채로 머무는 것은, 스승에 대한 제대로 된 보답이 아니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의 월계관을 빼앗으려 하지 않는가?...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명한다.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아라. 그대들이 모두 나를 부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1부 22. 선사하는 덕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서서히 자살을 하며
바로 그것을 삶이라고 부르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새로운 우상' 中
사랑하는 자는 경멸하기 때문에 창조하려고 한다! 자신이 사랑한 것을 경멸할 줄 모르는 자가 사랑을 알겠는가!
나의 형제여, 그대의 사랑, 그대의 창조와 함께 그대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나중에 가서 정의가 다리를 절며 그대를 뒤따라올 것이다.
나의 형제여, 그대의 눈물과 함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나는 자기 자신을 넘어 창조하려고 파멸하는 자를 사랑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창조자의 길' 中
그대들은 "삶이란 견디기 힘들다." 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그대들은 아침에는 긍지에 가득차 있다가 밤이면 체념하고 마는가?
삶이란 견디기 힘들다. 그러나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마라! 우리는 모두 사랑스러운 노새가 아니던가?
한방울의 이슬에도 몸을 떠는 장미 한송이와 우리 사이에는 무슨 공통점이 있는가?
그렇다. 우리는 삶에 친숙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데 친숙하기 때문에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두려움을 알면서 두려움을 제압하는 자, 심연을 보지만 자긍심이 있는 자가 대담한 자다.
심연을 보지만 독수리의 눈으로 보는 자, 독수리의 발톱으로 붙잡는 자에게 용기가 있다.
사람은 대지와 삶이 무겁다고 말한다. 중력의 악령이 바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가벼워지기를 바라고 새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이름이 차라투스트라라고 했던가. 그러나 그도 변했군. 그대는 자신의 타고 남은 재를 산으로 날라 갔지. 오늘은 그대의 불덩이를 골짜기로 날아 가려고 하는가? 그런데 이제 잠든 사람들에게로 가서 뭘 하자는 건가. 바닷속에 있는 듯 고독 속에서 살았고, 그 바다가 그대를 품어주었지. 그런데도 그대는 뭍에 오르려 하는가."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인간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오."
"하지만 이제 나는 신을 사랑하네. 인간에 대한 사랑은 나를 파멸시킬테지."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사랑에 대해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소. 다만 인간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오."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말게. 차라리 그들로부터 얼마간을 빼앗아 그것을 그들과 나누어 가지도록 하게. 그래야 인간에게 더없이 큰 도움이 될 것이네. 그들로 하여금 애걸하도록 하게."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자선을 베풀고 싶지는 않소, 나는 그렇게 할 만큼 가난하지는 않다오."
"그들은 은둔자를 불신하며 우리가 선물을 주려고 왔다는 것을 믿지 않네. 왜 그대는 나처럼 곰들 속의 한 마리 곰, 새들 속의 한 마리 새로 머물고자 하지 않는가. "
차라투스트라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 늙은 성자는 숲 속에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조차 듣지 못했구나."



[1] 옛날에는 소설장르로 분류하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거의 대부분 철학장르로 분류하고 있다.[2] 『이 사람을 보라』 서문 4절.[3] 차라투스트라는 선과 악의 투쟁을 모든 사물의 운행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바퀴로 본 최초의 인간이었다. 도덕을 힘, 원인, 목적 자체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번역한 것이 차라투스트라의 업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이 근본적으로 이미 답이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가장 치명적인 오류인 도덕을 창조했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오류를 인식하는 점에서도 최초의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는 이 도덕의 문제에 대해 그 어떤 사상가보다 더 오래 그리고 더 많이 경험을 쌓았다. 역사 전체가 사실상 이른바 '도덕적 세계질서'라는 명제 대한 실험적인 반박인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237~239)[4] 교양 교육을 받은 엘리트. 도덕과 종교를 대표하는 자이다.[5] 교양 교육(도덕, 종교 등)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길을 걸으려는 사람. 하지만 마음이 유약해서, 자신보다 늦게 출발한 엘리트(광대)가 자신을 넘어서자 끝내 좌절하고는 죽고 만다.[6]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교적인 '이웃 사랑'을 상징하는데, 노인은 삶이 죽어버린 자에게도 이웃 사랑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일화는 동정에 기반한 그리스도교의 믿음 강요를 비판하고 있는 장면이다.[7] 군중들은 타인이 정해놓은 길을 쫓아가기만 급급한 사람들을 말한다면, 길동무는 어설프게나마 '자신의 길'을 갈 줄 아는 사람을 말한다.[8] 여기서 정오는 만물의 '그림자(거짓과 위선)'가 사라지는 시간을 말한다.[9] 독수리는 긍지를 의미하는데, 이제 '자기 자신'이 긍지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10] 위험한 까닭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11] '자신의 선택에 의해 (옳고 그름이) 필연으로 바뀌게 된다'는 말은, 객관적인 옳고 그름은 없으며 오직 주관적인 옳고 그름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2] 여기서 어릿광대는 사회가 원하는 가치, 즉 돈, 명예, 이성 등을 추구하며 안정된 생활을 꿈꾸는 엘리트를 말한다. 사회가 하라는대로 해서 물질적으로 성공한 엘리트를 말한다. 그렇다고 어릿광대가 보수적이거나 전통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니체는 (그리스 로마 전통을 추구하긴 하지만) 그리스도교 전통은 무시하기 때문이다.[13] 꿈에서 양치기로 나오는데, 뒤에 그 꿈의 양치기가 차라투스트라 본인임을 밝힌다.[14] 정말이지 나는 모든 것을 다 좋다 하고 심지어는 이 세계를 최선이라고 하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자를 나는 매사에 만족하는 자라고 부른다. 모든 것에서 맛을 느낄 줄 아는 매사에 대한 만족. 이런 것은 최선의 취향이 아니다! 나는 극도로 반항적이고 까탈스러운 혀와 위장을 존중한다. "나"와 "그렇다"와 "아니다"라고 말하는 법을 배웠으니 말이다. 모든 것을 다 씹고 소화한다는 것. 이것은 진짜로 돼지의 특성이다! 허구한 날 '이-아(옳다)' 하는 것. 이런 일은 나귀와 나귀 정신을 가진 자만이 배운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397~398)[15] 나귀가 비극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짊어질 수도 팽개쳐버릴 수도 없는 짐에 눌려 몰락한다는 것... 철학자의 경우.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16)[16] 언젠가는 그대들의 씨앗으로부터 나의 진정한 아들과 완전한 상속자가 자라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녕 요원하지만. 어쨌든 그대들 자신은 내 유산과 내 이름을 물려받을 자가 아니다. (중략) 더 높고, 더 강하고, 더 승리를 구가하고, 더 쾌활한 자들을, 신체와 영혼이 올곧은 자들을 나는 기다리고 있다. 웃는 사자들은 반드시 출현하고야 말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554~555)[17] 내 아이들이 첫봄을 맞이하여 서로 가까이 나란히 어우러져 함께 바람에 흔들이며 푸릇푸릇 자라고 있다. 내 정원과 최고의 토양에서 자라는 나무들이다. 그리고 참으로! 저런 나무들이 나란히 어우러져 함께 바람에 흔들리며 푸릇푸릇 자라고 있다. 내 정원과 최고의 통양에서 자라는 나무들이다. 그리고 참으로! 저런 나무들이 나란히 어우러져 있는 곳, 바로 거기에 지복의 섬들이 있다! 그런데 나는 언젠가는 그 나무들을 뽑아내어 따로따로 심을 것이다. 각각의 나무가 고독을 배우도록, 반항과 예지를 배우도록. 나무들은 각각 불굴의 삶의 살아 있는 등대로서, 울퉁불퉁 마디와 굽어 있는 모양새와 휘어지는 강건함으로 바닷가에 서 있어야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329~330)[18] 내가 여전히 옳다는 증거로, 다른 불개에 대해 말할 테니 들어보라. 이 불개는 진짜로 대지의 심장으로부터 말을 하지. 그의 숨결은 황금의 입김과 황금의 비를 내뿜는다. 그의 심장이 그것을 원하지. 그러니 재와 연기 그리고 뜨거운 점액이 그에게 대체 뭐란 말인가! 이 불개로부터는 웃음이 오색찬란한 구름처럼 흩날린다. 이 불개는 너의 꾸르륵거림과 침뱉기와 내장의 격통을 혐오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275)[19] 3부 7장 「지나쳐가기에 대하여」[20] 니체는 왼편 왕이 비교적 말을 아낀다고 말했는데, 여기서 왼편의 왕과 오른편의 왕을 구분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21] 학자는 "실로 나는 나 자신의 피로 나 자신의 지식을 키워오게 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거머리가 자신의 지식이라는 것.[22] 가장 추악한 자는 하나의 왕관을 쓰고 두 개나 되는 자줏빛 띠를 두르고 있었다. 추악한 자 모두가 그러하듯 그도 변장하고 그럴싸하게 꾸미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548)[23]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본명 Zaraϑuštra(자라수슈트라). 독일어로는 Zarathustra(차라투스트라)며, 영어로는 Zoroaster(조로아스터).[24] 이하 백승영 교수 강의 동영상 25분 20초부터 참조[25]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