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16:53:58

정치적 무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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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2.1. 원인2.2. 정치 불참여와 연결된 관계2.3. 국민 개개인의 능력2.4. 인터넷과 정치적 무관심2.5. 중립과 정치적 무관심2.6. 현황2.7. 정치적 관심의 범주
3. 정치적 무관심의 종류
3.1. 전통형 무관심3.2. 현대적 무관심
4. 어록5. 관련 문서6. 외부 링크

1. 개요

정치적 무관심( / Political apathy[1])은 특히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의 주체라 할 수 있는 국민들이 정치와 정치적 주제, 현상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말한다.

2. 상세

2.1. 원인

국민이 정치에 갖는 인식과 관심도는 역사적으로 그 사회에서 형성되어 왔던 환경과 그에 따른 사회적 관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정치적 무관심을 유발하는 여러 사회적 요소들은 다양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국민의 생업이 순탄하며 삶의 수준이 양호하고, 개인주의 성향의 사회이거나, 내셔널리즘 가치관이 옅은 국가일수록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두는 경향이 적다고 여겨진다. 국가와 국민의 대표자로 여겨지는 국가원수의 선출권에 따라 정치에 대해 갖는 인식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정치적 무관심이 팽배하다고 알려진 일본이나 영국, 독일 등의 나라는 내각제인지라 의회에서 정부 수반이 선출되기 때문에, 정치 지도자에게 본인이 선택한 지도자라는 인식이 형성되기 어려울 수 있고, 이는 국민의 특정 정치 인물, 집단에 대한 관심과 소속감을 저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또는 한편, 미국과 같이 자신이 속한 국가가 강한 국력과 국제적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에 따라 정치 지도층에 대한 관심이 형성되는 것처럼, 그 나라가 위치한 국제적 지위도 정치적 무관심의 한 요인이 될 수도 있다.

2.2. 정치 불참여와 연결된 관계

'정치 불참여(政治 不參與)'는 개인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정치적 무관심과는 의미가 다르다. 특정 정치 행위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보이콧이 이 둘의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다. 보이콧에 참여한 사람은 정치 불참여를 선언한 것이지만, 그럼으로써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므로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편 의무투표제가 시행되는 국가에서도 이 둘의 차이가 드러난다. 의무 투표제 국가에서는 투표를 하지 않을 경우 법적 불이익을 주기 때문에 정치 불참여가 이론상으로는 발생할 수 없다. 하지만 정치에 관심이 없는데도 투표장에 '끌려나온' 투표자들은 별 생각 없이 아무한테나 투표하게 되는데(이를 '당나귀 투표(Donkey vote)라 한다), 이런 투표자들의 행위를 정치에 관심이 있는 행동이라 해석할 전문가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정치적 무관심은 정치 불참여를 유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떤 현상이나 행위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그에 참여할 의지가 없다는 말도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치적 무관심과 정치 불참여는 일종의 순환 관계가 있다. 정치적 무관심은 정치 불참여자의 수를 늘려 정치와 민의가 괴리되게끔 만들며, 그러한 현실에 무력감을 느낀 사람들은 정치적 무관심에 더욱 빠진다. 그 결과 정치 불참여자가 사회에 만연하게 되고, 그 악순환이 멈추지 않으면 정치와 민의가 끝내 분리된다.

2.3. 국민 개개인의 능력

정치는 국민의 삶에 분명 중요하지만, 모든 국민들이 현실 정치에 지속적이고 무한한 관심을 쏟아붓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국민에게 제일 중시되는 것은 결국 본인의 생업과 가정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인간 개인이 가진 에너지는 한계가 있기에 생업에 종사하다 보면 정치에 집중하기 어렵다. 당장 평일 오전 10시에 국감이 열린다고 가정했을 때, 이를 실시간으로 꼬박꼬박 확인할 수 있는 직장인이 몇 명이나 될지 생각해보자.

한편 국민의 정치적 판단력은 편차가 크다. 어떤 학문을 제대로 공부했다고 하려면 최소한 대학 졸업자이어야 하고, 보통 석사 정도는 되어야 전문가로 행세할 수 있다. 정치학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평범한 국민의 정치적 지식은 높게 봐도 고등학생, 낮게 보면 의무교육인 중학생 수준에 머물러 있다. 거기에 이름도 생소한 정치인, 정당 간 관계, 지역별 정치 특징, 정책 이름, 보도 자료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각종 공약들까지 더해지면 정치는 더욱 난해해지기 마련이다. 이를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국민은 현실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 민주주의 국가는 완전한 직접민주주의를 채택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정치적 장벽 및, 자칫 다수의 감정적이고 편향적인 정치 노선이 지배하는 포퓰리즘의 난립을 막기 위해 엘리트 정치를 섞어, 정치 전문가인 정치인이 정치를 상당수 맡는 대의민주주의를 대부분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정치는 정치인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인식에 기반한 정치적 무관심이 생기기도 하니 아이러니하다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시대 민주주의가 겪는 가장 큰 문제는, "그 정치 전문가들이 과연 제대로 정치를 할 자격이 있는가?", 그럼에도 왜 "저 어리석은 정치인보다는 똑똑한 나는 왜 정치를 할 수 없는가?"라는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정치 전문가와 국민의 간극 때문에 발생한다.

2.4. 인터넷과 정치적 무관심

현대에 들어 인터넷은 정치 이야기가 가장 많이 오가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탓인지 인터넷에서 정치 이야기를 보기 싫어하는 네티즌을 정치적 무관심의 사례로 보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는 올바르지 않은 시각이다.

술집에서 친구 몇 명이 모여앉아, 거실에서 가족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뉴스를 보며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일반적인 광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축구장이라면 어떨까? 축구장에서 계속 정치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람을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좀 좋게 표현해줘야 눈새, TPO를 모르는 사람 정도일 것이고,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중증 정치병 환자다.

인터넷도 마찬가지다. 정치를 다루는 커뮤니티라면 몰라도, 인터넷에는 정치 관련 커뮤니티보다는 그렇지 않은 커뮤니티가 더 많다. 가령 게임을 다루는 커뮤니티의 경우, 해당 커뮤니티에 접속한 사람들은 게임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지 골치 아픈 현실 정치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 (게임과 관련이 없는) 정치 이야기를 주야장천 하는 사람은 소위 '분탕 치는 트롤' 취급 받는 것이 당연하다. 커뮤니티의 목적에서 벗어나는 이런 행위를 정치적 무관심과 엮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정치 이야기를 하라고 판을 깔아둔 곳에서도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당장 얼굴을 맞대고 할 뿐더러, 토론을 중재할 사회자가 있는 TV 토론 및 시사 정치 토크 프로그램, 국정 감사조차 별별 막말과 견강부회로 얼룩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상에서도 명절에 만난 친척끼리 정치 이야기를 하다 편을 갈라서 싸우는 경우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러니 익명성이 보장된 인터넷 환경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온갖 욕설, 명예 훼손, 인격 모독 등이 판치는 진흙탕 싸움이 되는 것이 인터넷 속 일반적인 정치 이야기다. 네이버와 다음의 뉴스 댓글란은 정치병자들의 헛소리와 유언비어로 얼룩진 지 오래됐고, 한때 인터넷 민주주의의 참신한 시도로 기대받았던 다음 아고라도 결국 정치병자들한테 유도된 극도의 정치적 편향성을 보이며 침몰했다. 심지어 실명 SNS인 페이스북의 뉴스 기사 게시물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부작용이 청산되지 못한 채 이는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재현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런 분위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정치 떡밥을 배척하는데, 이걸 정치적 무관심이라고 칭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2.5. 중립과 정치적 무관심

예컨데 공무원, 군인에게 정치적 중립을 지키라는 것은 투표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특정 정당, 특정 정치인을 선전/비방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공무원과 군인들이 공적인 자리에서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징계 사유가 된다. 왜냐면 군대는, 관공서는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공무원과 군인도 사상의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라고 하는 것이 본인의 직분을 이탈한 정치적 행위를 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중도주의와 중립 자체를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중도주의의 경우 좌파와 우파에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인 정책을 요구하는 것일 뿐, 마냥 정치에 무관심하여 손을 놓고 있는 행위나 이념이 아니다. 특정 정치적 입장을 취할 경우 대개 해당 입장에 맞는 정책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는 반대파는 물론이거니와 온건 성향의 유권자에게도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 대표적이다. 자본주의자들은 소유권의 보장을 통한 자유로운 재화의 이동이 사회의 부를 증대하고 경제적 효율성을 확보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극히 예외의 경우가 아닌 한 개인 혹은 단체의 경제적 자유를 무제한적으로 보장하는 정책을 지지한다. 반면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의 편중과 특정 계층의 생산 수단 독점이 경제적인 불균형과 불평등을 낳으며 이것은 사회를 좀먹고 계층을 발생, 고착화시키는 암적인 존재라고 믿기 때문에, 생산 수단을 국유화하고 국민 복지를 평준화하는 정책을 지지한다.

중도주의자는 이 둘의 논리적 한계를 지적한다. 자본주의자의 논거에는 귀속적 지위로 인해 발생하는 운 좋은 무능력자의 사례와 시장 실패에 관한 비효율이 배제되어 있다고 비판할 것이며, 사회주의자의 논거에는 어차피 국유화된다면 누가 열심히 노력할 것이냐며 지적할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자의 의견을 인정하되 시장의 실패를 막을 다양한 방어장치의 도입[2]을 지지할 것이고, 사회주의자의 의견도 인정하되 사회주의의 실패를 막을 다양한 방어 장치의 도입[3]을 지지할 것이다.

'중립'은 중도주의와 성향이 다르다. 중도주의는 중립적 의견을 견지하는 정치 성향으로, 정치에 관심이 없으면 취할 수 없다. 반면 중립은 그냥 이도저도 아님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질적 차원에서 자신의 정치적 지지 성향을 중립론자로 밝히는 이들은 대개 정치에 별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는 중도주의라는 단어를 정치적 중립과 동일 선상에 놓고 자신을 합리적 인간으로 보이게 하려는 치장 심리에서 비롯된다.

중립론자는 정치적 무관심이 심한 사회일수록 숫자가 증가한다. 정치적 중립은 단순히 사회적 산술 평균의 중간값인 중도주의가 아닌 이성을 통한 합리적 기준 설정 과정 그 자체다. 따라서 정치적 중립은 합리적 기준의 설정 과정에서 나오며 그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결과적 편파성과 무관하다.

2.6. 현황

앞서 개인의 에너지와 능력이 유한하기 때문에 정치적 무관심이 발생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이는 개인의 생업이 곤란해지면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 없게 된다는 것 또한 의미한다.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에 들며 다양한 경제적 악재가 발생했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으로 인해 촉발된 대침체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촉발된 대봉쇄가 이 기간 중 일어난 대표적인 경제적 위기다.
경제적 위기가 발생하면 고용을 책임지는 기업이 흔들린다. 따라서 고용 시장의 유연화가 이루어지며 고용 감소가 발생한다. 특히 생존에 미치는 영향이 적어 경기의 흐름을 크게 타는 직종(요식업, 레저)이 주력인 자영업은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는 경우가 많다. 결국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는 생업이 곤란해지는 현상이 발생하고, 이는 이기주의와 정치 극단주의가 득세하는 배경이 된다.

특히 청년층은 이런 흐름에 매우 무방비한데, 그나마 저축이라도 쌓아두고 집이라도 어떻게 구해 놓은 중장년층과 달리 경제적 기반이 없기 때문이다. 적은 일자리를 두고 경쟁이 벌어지니 스펙의 기형적 성장이 이루어지고 개인의 마음에도 여유가 없다.

일본의 경우 1990년대 이후 잃어버린 10년을 겪으며 경제적 활력이 크게 줄었다. 거기에 더하여 인구의 고령화가 심해지고 노인층의 소비 특성이 겹쳐 경제 동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였다. 그 결과 청년층은 극도의 정치적 무관심을 보이고 있다.

현대 사회는 계속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가고 있다. 그런 한편 경제적으로는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상태이다.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 없고 싶어서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관심을 가지기도 힘들어진 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따라서 정치적 환경이 양자택일화를 한다. 경력을 기르는 대신 정치에 관심을 끊을 것인지,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대신 경력을 기를 기회를 버릴 것인지, 둘 중 하나를 택한다면 대부분의 사회인은 인간 관계가 망가질 위협이 적은 스펙 쪽을 택할 것이다.

2.7. 정치적 관심의 범주

다만 정치에 관심이 있는 것의 근거와 그 범위 설정에는 논의가 필요하다. 가령, 어떤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상', '정책', '업적'과 같은 비교적 객관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잘 생겨서(얼빠)', '착해 보이기 때문이다', '어렵게 살았다(언더독 효과)', '아버지가 잘했다(세습)', '나(유권자)랑 동성(혹은 이성)이다' 같이 본인 자신에게만큼은 이득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정치적인 면에선 분명히 비합리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정치인에게 이런 잣대를 들이대었을 때이다. 객관적인 이유를 들어 정치인을 지지할 수도 있지만, 비합리적인 이유로 정치인을 지지하는 사람도 생각 외로 많다. 비합리적인 이유를 근거로 들어 어떤 후보에게 투표한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어쨌든 투표소에 나가 투표했기 때문에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고 봐야 하는가, 아니면 후보에 대한 고찰 없이 연예인 인기 투표하듯 나라의 앞날에 관여한 생각 없는 사람이라고 봐야 하는가?

또한 지지한 후보는 알지만 그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핵심 측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소속된 당은 모르겠는데 인물이 괜찮아서 표를 주었다면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이런 종류의 '어설픈 관심'은 무관심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볼 수 있는가?

언론에 언급된 것 이상의 정치 관련 지식을 얻는 한편, 숱한 정치인들의 포트폴리오를 일일이 파악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과거에는 정보가 없어서 몰랐다면, 요즘은 정보가 너무 많아서 놓치기 쉽다.

3. 정치적 무관심의 종류

3.1. 전통형 무관심

정치는 특별한 사람, 높은 사람만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정치를 다른 세계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태도다. 은연 중에 가지게 된 권력에 대한 충성심과 복종심이 기저에 깔린 경우가 많다.
  • 공포형 무관심: 구시대 권위주의에 오랫동안 매몰되어 있던 사람들에게 발현되기 쉬운 무관심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무지하고 힘이 없어 권력자들에게 반항하지 못하니, 권력자들이 뭘 하든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깐 나를 괴롭히지 말아 달라라는 정치 의사의 표출이다. 학습된 무기력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 신뢰형 무관심: 현 정치 체제나 권력에 깊은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발현되기 쉬운 무관심이다. 이들은 정부의 공정성과 정통성에 지나친 확신을 가진 나머지, 선거 때는 적극적으로 투표하지만 그 결과에 대한 심판에는 무관심하다. 심하면 '권력자는 항상 서민을 위해 고생하고 있으며 시민들은 지도자의 영도력에 추진력을 실어주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까지 미치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로 북한이 존재한다. 북한은 에서 주민들에게 김일성 일가가 공정성과 정통성을 갖고 있다고 가르치며, 당원과 주민 공히 김일성 일가가 잘못을 해도 심판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또, 1989년에 나온 북한 가요인 휘파람에서도 '혁신자는 항상 서민을 위해 고생하고 있으며, 혁신자가 주는 꽃다발을 복순이에게 주면 복순이도 좋아한다.'는 폭군 찬양 뉘앙스의 가사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신뢰형 무관심은 지도자의 권위가 실추되거나 국가 자체[4]가 붕괴할 경우 주민들은 패닉 상태를 겪을 수밖에 없다. 공포형 무관심보다 더 위험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점을 공자 역시 지적한 바 있다. 단, 북한의 경우에는 특히 고난의 행군과 코로나 사태로 당과 김일성 일가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했지만, 북한 내부 독재와 정치 탄압 특성상 표출이 더 어렵다고 한 상황이다.
  • 무정치형 무관심: 시쳇말로 정치가 밥 먹여 주냐고 외면하는 경우. 정치적 참여에 신경쓸 시간에 자신에게 더 직접적이고 확실한 이익을 주는 활동에 더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또는 자신의 정치 참여 활동으로 얻는 사회적 이익에 비해서 정치 참여로 받게 되는 개인적인 피해가 너무 크다고 여기는 경우이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아고라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그날 일을 쉬어도 되도록 참여 수당을 지급했다고 한다. 정치가 밥 먹여준다

3.2. 현대적 무관심

근대 민주주의 정치 체제에서 정치적 무관심은 체제와 상호 모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의 여러 양태 때문에 정치적 무관심이 일어나고 있다. 영어로 '얼간이'란 뜻인 'idiot'의 어원도 그리스어로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에서 나왔다.
  • 굴절적 무관심: 원래는 강렬한 정치적 관심이 존재했지만, 정치권에 대한 요구와 기대가 뜻대로 실현되지 않다 보니 이에 환멸을 느껴 정치적 관심이 식어버린 경우다. 이들은 '내가 투표한다고(혹은 투표 안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혹은 '이놈이 되나 그놈이 되나 마찬가지'라는 냉소주의적 신념 하에 정치 참여를 포기한다. 극단적으로 이는 대중의 소외 현상을 불러올 수 있으며 권력으로 하여금 현상 유지를 가능하게 해서 권력의 폭력화를 허용하게 된다. 이 상태에서는 권력이 소수 집단을 폭력으로 탄압해도 잘 발견되지 않고, 공론화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악순환은 결국 정치혐오로 인한 투표 포기로 직결된다.
  • 사생활화형 무관심: 국민들이 자신의 생업 및 이에 밀접한 이해관계에만 몰두한 나머지 공공의 이익과 사회 발전에는 무관심해지는 경우다. 현대 사회는 복잡하고 전문화되면서 사회 문제와 현상을 파악하는 데 과거보다 많은 노력이 들게 되었기 때문에, 거대 담론을 피한 채 개인적인 이익과 행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이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이런 분위기가 만연하면 권력은 국민들에게 당장의 사소한 이익을 만족해 주면서 다른 한편으로 강압을 펼칠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이해관계인들에게는 이익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에 결정적인 불이익이 되는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있게 된다. 대승적인 식견과 견해를 가진 정치인보다는 특정 지역구 주민이 당장 좋아하는 공약을 내세우는 정치인이 쉽게 당선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소비형 무관심: 국민들이 소비에 몰두하고 달콤한 대중문화를 향유하고자 하면서, 골치 아프고 어려운 정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되는 경우다. 사회 생활형 무관심과도 연관이 있다. 이것을 의도적으로 유도하는 정책이 바로 우민화 정책이다. 우민화 정책 하에서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은 서로 손을 잡아 대중 매체 등으로 소비형 무관심을 조장하고, 이 무관심을 지렛대 삼아 여론 조작을 활발히 진행하게 된다. 대한민국 역시 전두환 정부 시기에 국민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3S(Sex, Sprots, Screen) 정책을 실시한 바 있다. 1970년대에는 볼 수 없었던 에로 영화나 프로 스포츠가 1980년대에 갑자기 생겨난 게 바로 이 때문이다.
  • 중립형 무관심: 정치에 대한 관심도나 이해도 다 있어도 투표를 하지 않거나 정치성향을 일부러 숨길 수 밖에 없는 유형이 존재한다. 이는 전통적 무관심중 공포형 무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주로 대인 서비스직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자신의 고객이나 관련자가 정치성향을 드러내면서 자신과 맞지 않을 경우 거부감을 드러내거나 심할 경우 서비스를 거부하거나 진상을 부리는 경우가 현대에 급격히 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과거에도 존재하던 경우로 지역감정이 극에 달하던 시기에는 특정 지명 이름이 붙은 식당을 일부러 가지 않는다거나 점주에게 시비를 거는 경우부터 해서 정치적 이유로 진상질과 갑질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 현시대는 SNS의 확산으로 인해 정치극단주의가 표면화되다보니 이제는 얼굴도 본 적없는 사람들이 정말 사소한 이유로 정치성향 시비를 걸어 별점 테러나 리뷰 조작을 저지르다보니 어쩔수 없이 성향을 숨겨야 하고, 그것이 공포형 무관심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높인다.

4. 어록

(А вот скажи, какая, по-твоему, самая плохая человеческая черта?)
(그럼 당신 생각에 인간의 본성 중 가장 최악인 건 무엇입니까?)

Похуизм. Я бы за проявление похуизма (если бы была у меня такая веселая власть) расстреливал на месте без суда и следствия. И притом — из самых гуманных побуждений и соображений. Весь стыд и позор, который мы повсеместно ныне наблюдаем и имеем, коренится лишь в одном — в равнодушии, которое позволил себе сперва один, затем — другой, третий, — и оно разрослось, как мясо, как опухоль, как глист какой.
그건 바로 포후이즘[5]입니다. 만약 포후이즘의 기미가 보이기라도 한다면 (만약 저에게 그럴 즐거운 힘이 있다면) 전 그 어떤 재판도 조사도 없이 바로 그 지점을 쏴버리고 싶습니다. 더 나아가, 가장 인간적인 동기와 분별을 위해서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그리고 어디에나 퍼져 있는 모든 수치와 불명예는 전부 무관심에서 비롯된 겁니다. 처음에는 자기 자신만을 잡아먹지만,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사람에게 퍼져나갑니다. 마치 고깃덩이마냥, 마치 종양마냥 말이죠.

(А как же твои призывы «Похуй на хуй!», «Выше-ниже поебать!» и т. п.?)
(하지만 "씨발 좆이나 까!" "위아래로 전부 좆이나 까!" 같은 당신의 외침들은 그럼 무엇입니까?)[6]

Да это же не похуизм! Это — АНТИПОХУИЗМ!! Когда говоришь: Вот это — говно, что это значит? Это значит, это — говно по сравнению с тем, что говном не является и так далее. Когда поется СЕДНЯ-ЗАВТРА-ПОЕБАТЬ!, это значит, что на свете есть просто ЗАЕБАТЕЛЬСКИЕ вещи, которые наглядно, ощутимо, ОЧЕВИДНО выше, важней, пуще и ваще, чем все эти нелепые выше-ниже, седни-завтры и прочий вздор. Я всю жизнь пел и говорил только об этом! Я никогда не высказывался в том смысле, что все вообще — говно (мне, честно говоря, обидно, что обо мне могут такое помыслить). Наоборот — доказываешь до рвоты всему миру, ЧТО НЕ ВСЕ ЕЩЕ ОБОСРАНО, что ЕСТЬ ЕЩЕ ЧТО-ТО ЖИВОЕ И ВЕЛИКОЕ, и ОНО — ВОТ ТУТ, ПРЯМО ЗДЕСЬ, ВОТ ОНО! — только иди, бери и не оглядывайся.
그건 포후이즘이 아닙니다! 그건 안티-포후이즘입니다! 뭔가가 쓰레기 같다고 말하면, 그건 무슨 뜻입니까? 그건 바로 쓰레기 같지 않은 것과 비교했을 때 그게 바로 쓰레기 같다는 겁니다. "오늘이고 내일이고 다 좆까!"라고 노래한다면, 그 말인즉슨 이 세상에 더 시각적으로, 지각적으로, "매우 명벽하게" 높은, 더 중요한, 기타 등등의 "좆나게 죽여주는" 것들이 있다 이 소립니다. 그 모든 우스꽝스러운 위아래나, 회색빛 내일이나, 다른 헛소리들보다 말입니다. 생애 내내 저는 오직 이것에 대해 노래하고 말해 왔습니다! 전 모든 게 전반적으로 쓰레기라는 의미로 말한 적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저에 대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니 상처받는군요) 그 반대로, 당신이 이 세상에 토해내듯 증명하는 겁니다. "아직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좆되어 버린 건 아니다", "아직 이 세상엔 무언가 살아 숨쉬는, 위대한 것이 있다"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여기에, 바로 여기에, 여기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앞으로 나아가 거머쥐고, 뒤돌아보지 마십시오.
예고르 레토프, 인터뷰 "200년의 고독"(200 лет одиночества) 중
나의 목소리가 국가의 일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아무리 약하다 할지라도, 자유 국가의 시민이자 주권자의 한 사람으로 태어나 투표권을 가진 것만으로도 정치에 관해 알아야 할 의무를 나 자신에게 부과하기에 충분하다.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갈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 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그들이 노동 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 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르틴 니묄러 목사,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7]
옆동네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던 민경이가
백혈병 환자가 되어서
죽어도 아무도 몰랐다
같은 공장 같은 보직의
선영이 지영이도
같은 병으로 차례로
죽어도 아무도 몰랐다

(중략) 그 무엇도 우리의 행복을
막을수 없을 것 같았는데
갑자기 아들내미가
군대에 갔다 자살을 했다
난 화가 났는데
아무도 화를 안 내줬다
신문에 안 나오니까,
결국 아무도 몰랐거든
UMC/UW, 《사람들을 착하게 만들어 놓았더니》 中. 위 《나치가…》와 비슷한 맥락의 가사이다.
정치란 덜 나쁜 놈을 골라 뽑는 과정이다. 그 놈이 그 놈이라고 투표를 포기한다면 제일 나쁜 놈이 다 해 먹는다.
- 민중 운동가, 함석헌.기사 다만, 이와 비슷한 관용어는' 함석헌'이 발언하기 이전에도 계속 쓰이던 말이다.

5. 관련 문서

6. 외부 링크


[1] 영어 위키백과의 표제어.# apathy 대신에 indifference/disengagement가 들어가기도 한다.[2] 독과점 등의 불공정 거래 금지, 상속세 도입, 기본적 인간의 삶 유지를 위한 복지 정책 등.[3] 결과적 평등보다는 기회적 평등의 중시, 복지를 폭 넓게 하되 사유 재산제의 인정 등.[4] 북한이 딱 그 경우이다.[5] 매사에 경멸적인 태도와 무관심을 고수하는 태도. 러시아어 욕설 "Пошёл нахуй"(씨발 좆이나 까)에서 유래한 "Похуй"(좆도 신경 안 쓴다, 영어로 치면 Don't give a shit에 상응하는 표현이다.)에 -ism을 붙인 말.[6] 1980년대 레토프는 "씨발 좆이나 까"(Похуй нахуй), "좆까"(Поебать) 등의 노래를 작곡한 바 있다. 인터뷰어가 언급한 문장들은 전부 이 노래에서 등장하는 가사들이다.[7] 사실 이 유명한 말의 시조가 누군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위의 것은 1976년도 버전이 기반. 위키피디아 참조[8] 플라톤의 시대에는 선택받은 소수의 엘리트만이 지식을 독점하고 있었고, 따라서 모두가 참정권을 가진 민주주의는 결국 무식한 다수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중우정치로 흐르기 쉬웠다. 플라톤은 이를 경계하여 이런 말을 남겼으나, 의무 교육이 보편화된 현대에 이르러서는 '가장 저질스러운 이들'이 부패한 엘리트를 주로 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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