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18:57:30

사보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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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사보섬 해전/savo.jpg
아이언 바텀 사운드(Iron Bottom Sound)라 불리는 사보 섬 인근 해역. 위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엄청나게 많은 배들이 가라앉았다. 순양함에서 구축함, 초계함, 수송선 까지 다양하게 여기에 가라앉았다.
사보섬 해전
파일:external/s20.postimg.org/USS_Quincy_CA_39_savo.jpg
[1]
날짜
1942년 8월 8일 ~ 1942년 8월 9일
장소
사보 섬, 솔로몬 제도
교전국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호주|]][[틀:국기|]][[틀:국기|]]

[[일본 제국|]][[틀:국기|]][[틀:국기|]]
지휘관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리치먼드 K. 터너
파일:호주 국기.svg 빅터 크러츨리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미카와 군이치
전력 중순양함 6척[2]
경순양함 2척[3]
구축함 8척
중순양함 5척[4]
경순양함 2척[5]
구축함 1척
피해 규모 중순양함 4척 침몰
중순양함 1척 손상
구축함 2척 손상
1,023명 전사
중순양함 3척 손상
58명 전사
결과
일본군의 승리, 미군의 제해권 상실

1. 개요2. 경과
2.1. 일본 해군 제8함대의 출격2.2. 일본군 함대의 진격2.3. 연합군 함대의 분산2.4. 남부부대2.5. 북부부대2.6. 일본군 함대의 철수
3. 결과
3.1. 양측의 피해3.2. 어쩌다 이런 꼴이?
3.2.1. 장병들의 피로3.2.2. 지휘관들의 오판3.2.3. 전투능력 제로3.2.4. 플레처 제독의 철수는 정당했는가?
3.3. 그 후
4. 기타5. 미카와 제독의 철수명령은 적절했는가?
5.1. 적절하지 않았다5.2. 적절했다
6. 매체에서7. 관련 링크8. 관련 해전9.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적을 과소평가하면 전투효율과 준비성이 떨어지게 됩니다. 적이 약하다는 태도를 보이면 결국 자기 발등을 찍게 되죠.
월리엄 보데트[6], 히스토리 채널 <배틀 360>, -지옥의 혈전-

사보섬 해전은 1942년 8월 7일~8월 10일까지 제2차 세계 대전의 태평양 전선에서 벌어진 미 해군, 왕립 호주 해군의 연합군 해군 함대와 일본 해군의 해전이다. 양 측 수상함대가 항공모함 없이 정면으로 부딪친 전투였으며, 미 해군은 스스로가 역사상 최악의 해전이라고 부를 정도로 철저하게 박살났다. 일본에서는 '제1차 솔로몬 해전'이라고 불린다.

2. 경과

2.1. 일본 해군 제8함대의 출격

과달카날 섬이 연합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라바울에 있던 해군중장 미카와 군이치 제독은 제8순양함대를 이끌고 미 해군 함대를 야간에 급습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함대 편성은 제8함대 기함인 타카오급 중순양함 초카이와 제6전대 소속 중순양함 4척이었지만, 제18전대의 경순양함 텐류와 유바리, 제29구축대의 카미카제급 구축함 유나기가 참가 의사를 표명한다. 미카와 중장은 "배가 낡았고 숙련도도 떨어진다"는 이유로 이들의 참가를 거부했지만, 제18전대 참모의 끈질긴 탄원으로 동행을 허가했다.

그러나 이들의 동행은 미카와 군이치 제독에게 두통거리가 되었다. 제6전대야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봤으니 문제가 없지만, 난데없이 끼어든 텐류와 유바리와 유나기는 초카이와의 무선연락조차 안 되는 상태라서 제대로 된 싸움이 불가능했던 것. 게다가 유바리는 추진기 고장으로 속도가 느려진 상태여서 함대의 속도를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또한 비행기의 지원은 바랄 수도 없었고, 미 해군의 순양함과 구축함 전력은 제8함대를 압도하고 있었으며, 제61임무부대의 항공모함 와스프, 새러토가, 엔터프라이즈도 과달카날에 상주하고 있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도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작전을 허가하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연합함대의 명령은 아니다"는 조건을 달아 출격을 승인했다.

2.2. 일본군 함대의 진격

1942년 8월 7일, 16:00에 라바울을 출항한 8함대는 미군 잠수함과 정찰기에 발각되었지만, 경미한 피해를 입은 채 과달카날로 순조롭게 항진했다.[7]

이즈음 8함대를 발견한 허드슨 정찰기는 맥아더 장군 휘하의 호주군 소속이었는데, 이들은 아군 함대로 바로 보고를 보내지 않고, 정찰 구역을 다 돈 다음에야 맥아더 장군한테 보고를 올렸다는 내용이 1949년 새뮤얼 모리슨의 서술을 시작으로 널리 퍼졌으나, 이후 지속된 연구로 그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 되었으며 2014년 미 해군은 당시 허드슨의 통신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모리슨의 주장이 근거가 없음을 인정했다. 허드슨 은 8월 8일 10:20과 11:10에 함대를 목격했으며 첫 목격 당시 목격 사실을 뉴기니 폴리버에 있는 연합군에 무선으로 전했으나 무선을 받았다는 확인을 받지 못하자 12:42에 복귀해 재차 보고했다. 두번째 목격 시에도 15:00에 보고하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두 보고는 각각 18:45와 21:30까지 과탈카날 해역의 연합 함대에 전해지지 못했다. 해군소장 리치먼드 K. 터너 제독이 이 정보를 받았을 때는 이미 한참 늦어서 이 되었기에 정찰기를 띄울 수 없었다. 이는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당시 과달카날의 함대를 지휘하던 터너 제독은 "해병대 1사단이 상륙을 끝내려면 사흘 정도는 있어야 하는데, 그 동안 엄호 좀 해주십시오."라고 요청했지만, 프랭크 플레처 제독은 "그러고는 싶은데 우리 항공모함이 재급유가 필요해서 곤란하다."라면서 곰리 제독한테 함대를 빼겠다고 요청하고 8월 8일자로 과달카날 근해를 벗어났다.

나중에 전투 보고서에도 연료가 부족하다는 점을 매우 강조했지만, 이는 플레처 제독의 핑계였고 실제 이유는 라바울에 짱박힌 일본놈들 비행기가 예까지 날아오는데 항모를 박아둘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당시 미 해군 태평양 함대는 산호해 해전에서 USS 렉싱턴을, 미드웨이 해전에서 USS 요크타운을 상실했고, USS 레인저는 대서양에서 작전중이었다. 또한 USS 호넷은 비행단 재편성을 위해 잠시 후방에 이탈한 상황으로, 태평양 함대가 실질적으로 가용가능한 3척의 항공모함들이었던 USS 엔터프라이즈, USS 새러토가, USS 와스프를 잃을까 우려하던 점도 여기에 한 몫했다.[8] 이에 터너 제독은'"주력함대가 비열한 핑계를 치면서 도망쳤다!"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이미 떠난 함대가 돌아올리 있나. 결국 터너 제독이 정보를 받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어있었다.

이렇게 미군이 스스로 패배를 자초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카와 제독의 제8순양함대는 허점을 보이는 연합군을 향해서 순조롭게 진격하고 있었다.

2.3. 연합군 함대의 분산

8월 8일, 플레처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과달카날을 벗어난 후 연합군 함대는 분산되어 각기 다른 방향을 경계 중이었다. 터너 제독은 자신의 기함인 수송선 맥카울리에서 해병1사단장인 해병소장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 영국 해군소장 V.A.C. 크러츨리와 함께 작전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 무렵 미 해군 근처에 접근한 미카와 제독은 조심스럽게 정찰기를 날렸다. 주변을 열심히 살펴본 정찰기는 미 해군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했고 일단 근처에 미 항모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미카와 제독은 조심스럽게, 야음을 틈타서 연합군 함대의 뒤통수를 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윽고 제8함대의 중순양함들에서 띄운 정찰기들이 연합군 함대에게 접근했는데, 그 중 하나는 모든 등화를 켜고 주변을 살펴보는 간덩이 부은 짓을 했다. 대놓고 나 여기 있다고 밝힌 셈인데, 이 정찰기를 본 미군은 적이라면 상식적으로 등화를 켜고 비행하지 않을테니 저건 아군 비행기라고 판단하여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상군은 항공모함의 철수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에 아군 항공모함에서 날린 정찰기라 판단했다.

어쨌든 제8함대의 정찰기들은 연합군 함대의 위치를 미카와 제독에게 보고했고, 초카이의 야간 견시도 미군 구축함 랄프 탈벗과 블루를 발견했다. 미카와 제독의 함대는 랄프 탈벗에 모든 포를 겨누었지만, 랄프 탈벗은 그냥 북쪽으로 가버렸고 일본군 함대는 순조롭게 두 구축함 사이로 빠져나갔다.[9]

그렇게 제8함대는 자신들이 연합군 함대가 모인 곳에 진입했다는 것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미카와 제독의 돌격 명령에 맞춰 연합군 남부부대를 향해 산소어뢰를 겨냥했다.

2.4. 남부부대

수상정찰기들이 조명탄으로 연합군 함대의 위치를 밝혀주는 가운데 일본군 함대는 어뢰공격을 개시했다. 이제서야 적 함대를 발견한 USS 패터슨이 경보를 울렸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고 결국 남부부대는 아래와 같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 8월 9일 1시 34분 구축함 USS 자비스 발견
  • 8월 9일 1시 36분 구축함 USS 패터슨, USS 버글리 발견 및 중순양함 HMAS 캔버라, USS 시카고 발견
  • 8월 9일 1시 38분 일본군 함대가 일제히 어뢰 발사
  • HMAS 캔버라 피탄 및 전투능력 상실
  • USS 시카고 피탄
  • USS 패터슨 피탄

기습을 받은 HMAS 캔버라는 뒤늦게 반격을 시작했지만 이미 선수를 친 일본군에게는 그냥 먹잇감일 뿐이었다. 결국 캔버라는 전투 개시 5분 만에 만신창이가 되어 침몰했다.

시카고는 어뢰 한발을 맞았으나 피해를 억제하고 반격했다. 그러나 발사한 조명탄이 불발이어서 제대로 조준하지 못한 채로 사격했기 때문에 한발도 명중시키지 못했다. 일본함대가 북부부대 공격을 위해 방향을 돌린 덕분에 추가적인 피해는 없었으나 일본함대 후방경계임무중이던 구축함 유나기를 발견하고 공격하는데 정신이 팔려 북부부대에 대한 경고도, 일본함대에 대한 추격도 하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고 유나기에 대한 사격에서도 한발의 명중탄도 내지 못했다.

구축함 패터슨은 일본함대를 발견하고 경보를 울리면서 선회하여 일본함대에 함포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포격전 중 4번 포탑에 피탄당해 8명의 전사자를 내고 전장을 이탈했다. 다행이 일본함대가 북부부대 공격을 위해 그대로 북상한 덕분에 더 이상의 피해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구축함 버클리는 패터슨이 일본함대를 발견하고 불과 몇초 후에 일본함대를 발견하고 좌회전하면서 우현어뢰 발사를 시도했으나 어뢰요원들이 발사제원 입력에 실패해 발사하지 못했다. 버클리는 함이 완전히 선회한 후 좌현어뢰 8발을 발사했으나 그때는 이미 일본함대가 북상중이어서 속도가 느린 미국어뢰로는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남부부대는 캔버라가 기습당한 1시 43분부터 패터슨이 패퇴한 1시 49분까지, 즉 고작 6분만에 한발의 명중탄도 내지 못한채 일방적으로 제압당했다. 게다가 패터슨의 경보는 북부부대에게 전달되지도 않았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일본군 함대는 이제 북부부대를 향해 전진했다.

2.5. 북부부대

남부부대를 격파하고 5분 후, 일본군 함대는 초카이가 탐조등을 비추는 가운데 포문을 열었다. 제일 먼저 공격을 당한 미군 중순양함 아스토리아는 포술장의 지휘 하에 반격에 나섰지만, 잠에서 깬 함장이 포격을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포술장은 지금 적이 공격하고 있다며 무시하고 포격을 계속했지만, 함장은 더 큰 목소리로 포격을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William G. Greenman 대령 1942
https://ussastoria.org/Ships_Crew.html

아군을 포격하는 것일수도 있다는 함장의 어거지에 아스토리아는 포격을 중지했다가 피격을 당해서야 다시 포격을 시작했지만 마지막 사격에 쏜 포탄이 초카이 1번 포탑에 직격 파괴한 것을 끝으로 다수의 명중탄을 맞은 아스토리아는 결국 무력화되었다.

그리고 북부부대도 역시나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 8월 9일 1시 46분 빈센스 포착
  • 8월 9일 1시 48분 어뢰 발사 및 1시 50분 일본군 함대의 함포 사격 개시
  • 아스토리아 피탄 및 무력화
  • 퀸시 피탄으로 2시 35분 침몰
  • 빈센스 피탄으로 2시 50분 침몰
  • 랄프 탤벗 피탄
  • 8월 9일 오전 8시 캔버라 자침
  • 8월 9일 오후 12시 15분 아스토리아 침몰
  • 8월 9일 오후 1시 자비스 전장 이탈 중 항공기 공습으로 침몰

아스토리아가 무력화될 때, 중순양함 퀸시는 사력을 다해 항전했지만 함 후방의 함재기가 아오바의 포격을 맞고 화재를 일으키자 눈에 띄는 표적이 된다. 곧바로 일본군의 집중포화를 맞은 퀸시는 큰 피해를 입었고, 최후의 수단으로 초카이를 향해 포격을 가하며 충각 돌격을 감행, 함교 후부에 2발의 포탄이 명중 또 다른 1발은 수상기용 크레인에 명중했다. 함교에 침투한 포탄은 미카와 제독으로부터 6m 떨어진 지점에 명중했지만 불발탄이었기에 작전실이 파괴되고 전사 34명, 부상 38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뿐, 미카와 제독은 무사했고 퀸시는 아오바의 어뢰에 맞아 침몰했고 함장 새뮤얼 N. 무어를 포함 대부분의 승조원이 전사했다.

일본 8함대가 연합군 북부, 남부부대를 탈탈 털어버리는 데 걸린 시간은 채 30분도 되지 않았고 남은 것은 경순양함 2척, 구축함 2척으로 구성된 연합군 동부부대와 잔존한 중순양함 2척과 구축함들 그리고 수송선들이었다.

2.6. 일본군 함대의 철수

그러나 미카와 제독은 현장에 항공모함이 없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철수했다는 사실까진 알지 못했다. 그 결과 항모 함재기의 역습을 우려하여 더 이상 공격은 하지 않고 날이 밝기 전에 빨리 전장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그 덕분에 상륙한 해병대와 아직 미처 양륙하지 못한 물자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한편 사보섬에서의 패전을 들은 플레처 제독은 움찔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곰리 제독에게 함대를 뺀다고 이야기했지만, 막상 이에 대한 허락을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패전의 원인을 제공한 입장이 될 수 있었기에 전전긍긍하고 있었으나 다행히 곰리 제독의 철수허락 메시지가 늦게나마 전달됐고 그 허가를 내린 시간이 함대를 빼기 직전임이 명백해지자 안심했다. 이때 근처에 있던 USS 와스프 함장 F.P. 셔먼 대령은 함재기를 발진시켜서 미카와 함대에 야간 공습을 하려고 했지만, 항모 전단장 해군 소장 노이에스 제독이 항공모함의 야간발함을 금지해서 무산된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미군의 공습은 없었고, 일본군 함대는 귀로에 올랐다.

그런데 8월 10일 오전 9시 8분, 귀환하던 일본 함대는 후루타카급 중순양함 카코를 잃었다. 6전대 기함 아오바에 좌승한 6전대 사령관 고토 아리토모 소장이 이제 일본군이 장악한 해역에 들어왔으니 잠수함 회피 운동을 중단해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는데, 근처에 숨어있던 미군 잠수함 S-44가 이것을 보고 카코에 어뢰를 날린 것이다. 해전에서는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기함의 실수로 중순양함 한 척을 날려먹은 것이다. 다만 카코의 함장은 '적이 너무 멀리서부터 쫓아온거니 어쩔 수 없었다'라며 딱히 아오바의 판단을 책망하지는 않았다. 고토 제독은 나중에 자신의 실수에 대해 사과했다.

3. 결과

수와 질에서 유리했던 미국·호주 연합군 함대가 참패를 당하고 과달카날의 제해권을 빼앗긴, 상식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해전이었기에 그 여파도 대단히 컸다. 미군은 일본군이 만만찮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고, 일본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3.1. 양측의 피해

연합군 측 피해 일본군 측 피해
  • 중순양함 캔버라, 아스토리아, 퀸시, 빈센스 침몰
  • 중순양함 시카고 손상
  • 구축함 랄프 탤벗, 패터슨 손상
  • 해전에서 전사자 총 1,023명
  • 구축함 자비스 전장 이탈 중 공습으로 침몰, 전사자 247명
  • 중순양함 초카이, 아오바, 키누가사 손상
  • 해전에서 전사자 총 58명
  • 중순양함 카코 전장 이탈 중 잠수함에 의해 침몰, 전사자 68명

위에서 보듯 명백한 연합군의 참패였다.

중순양함 카코의 침몰은 해전 중이 아니라 귀항하던 도중에 일어난 일이고, 초카이와 아오바의 피해는 경미했다. 특히 아오바는 어뢰발사관을 피탄당했음에도 승조원들의 재빠른 대처 덕분에 금방 화재를 진압할 수 있었다.

이 해전의 결과로 미군은 한동안 과달카날 전역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상실했고, 이로 인해 안그래도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과달카날에 상륙한 해병대는 아군의 엄호와 보급이 끊어진 상태로 일본군이 남긴 식량으로 배를 채우고 일본군이 남긴 시설에서 지내고 일본군이 남긴 장비와 자재를 활용하고 부분적으로 재개된 보급으로 버티며 비행장 건설을 진행해야 하는, 그야말로 일본식 생활을 해야 했으며, 정기적인 일본군 함대의 함포사격과 일본군 폭격기의 폭격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당시 해병대는 자조적인 의미에서 이 폭격 시간을 '도조 타임'이라 불렀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해병대는 악착같이 비행장 건설과 사수를 완수하여 연합군의 우세를 떠받졌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연합군은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급히 과달카날로 불러들이고 공중과 해상을 통한 물자수송과 병력보강, 전투를 통해 비행장과 제해권을 확보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이 과달카날 전역에서 산타크루즈 해전 중 항모 한 척(USS 호넷)을 상실, 한 척(USS 와스프)을 초계 중 잠수함 뇌격에 상실, 또 한 척(USS 새러토가)이 초계 중 잠수함 뇌격에 피해를 입고 전선 이탈, 한 척(USS 엔터프라이즈)이 동부 솔로몬 해전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입은 피해로 수리차 복귀하는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이런 압승도 무색하게, 일본군은 수많은 과오를 저지르면서 결국 과달카날 전역에서 패배하고 만다.

3.2. 어쩌다 이런 꼴이?

3.2.1. 장병들의 피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것도 문제지만, 체스터 니미츠 제독을 더 노하게 만든 것은 그 과정, 즉 레이더까지 있었는데도 설령 레이더에 기계적 결함이 있었다고 쳐도 견시들이나 전탐병들이 아군 함정 사이로 코 앞에서 유유히 지나가는 적함을 못 알아봤다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니미츠 제독은 예하 지휘관들을 몽땅 모아놓고 엄중하게 추궁했는데, 그 결과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당시 해상 부대는 상륙전이 시작된 이래로 공습을 경험한 뒤에 지휘관의 지시로 일본군의 후속 공격을 대비하느라 근 이틀동안 전원비상태세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이틀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면 사람이 받는 스트레스피로가 기하급수적으로 늘 것은 뻔한 일.[10]

이러다보니 말단 수병에서 함장까지, 모든 승조원들이 뻗어버려서 대부분이 간이침대나 의자같은 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니까 제대로 싸우기에는 심신이 모두 피폐해졌던 판에 일본군 함대가 야밤에 몰래 숨어들어온 것이니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11] 결국 지휘관들은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비상태세를 걸지 않고 승조원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취하게 했다.

3.2.2. 지휘관들의 오판

해전 내내 미군 지휘관들은 오판을 거듭했다. 일본군 제8함대를 발견해놓고도 쟤네들은 이쪽으로 안 올거야라고 오판하거나, 전투 중에 아군일지도 모르니 포격을 멈춰라라고 명령하는 아스토리아의 함장 같은 경우도 있었다.

이 중에서도 압권은 제8함대의 정찰기 중 하나가 연합군 함대의 머리 위를 선회할 때 벌어진 일로, 미군은 분명히 이 정찰기를 발견해놓고도 한 밤중에 불을 켜고 우리 머리 위에 나타날 정도로 일본군이 바보일 리가 없다. 그러니 저건 우리 편 비행기다.며 무시했다.

결국 전투를 분석한 미군은 우리 모두가 바보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지휘관들에게 별다른 견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해전 당시 중순양함 시카고의 함장이었던 하워드 보데 대령은 함장 직에서 물러났고, 1943년 4월에 권총으로 자살했다. 사보섬 해전의 비공식 보고서에서 보데 대령의 행동에 가혹한 평가를 내린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경계와 전투에 실패한 데다 북부함대에 경보도 보내지 못한 불명예스러운 군인에게 호의적인 평가가 내려질 리가 없고, 보데 대령 자신도 변명할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자살한 것이다. 시카고는 수리를 끝마친 후 전선으로 돌아왔으나, 1943년 1월의 렌넬 섬 해전에서 침몰했다. 중순양함 빈센스 함장 리프콜 대령도 일선에 복귀하지 못하고 육상에서 행정직만 맡았다. 끝내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것이다. 중순양함 아스토리아의 함장 그린맨 대령 역시 패전에 책임이 있었으나, 이후 아스토리아가 침몰에 이르기까지 과정에서 보여준 리더십과 용기로 인해 훈장을 받았고 이후에는 제독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그 역시 다시는 전선으로는 복귀하지는 못했고 행정직으로 복무했다.

3.2.3. 전투능력 제로

해전 상황을 보면 미군의 포탄은 모두 빗나가거나 불발탄이 되는, 가공전기에서나 나오는 엽기적인 결과가 나왔다. 당장 구축함 버클리는 어뢰 발사에 실패해서 공격기회를 놓쳤고, 중순양함 시카고는 조명탄이 불발이 되는 바람에 제대로 된 조준을 못해서 단 한 발도 명중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압권은 단연 중순양함 퀸시로, 일본군 제8함대 기함 초카이의 함교에 명중탄을 냈는데도 불발탄이어서 미카와 제독 사살에 실패했고, 결국 일본군에게 격침당했다. 아무리 잘 맞춰도 포탄이 안 터지는데 이길 리가 없었다. 미군도 이 문제를 알아차리고 대대적인 포탄 개량에 나서서, 1년 후에는 불발탄 발생률을 많이 줄이게 된다.

그와 반대로 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공격에서 괜찮은 포격전/뇌격전 능력을 보여줬으며, 방어에서는 중순양함 아오바가 공격을 받아 어뢰발사관에 불이 났는데 재빨리 진압해 괜찮은 대미지 컨트롤 능력을 보여줬다. 전후에 미군은 "일본군에겐 대미지 컨트롤에 대한 개념이 없다"고 평가했지만 어디에든 예외는 있고, 아오바가 바로 그 예외적인 군함이었다. 이후 아오바는 세 번이나 대파되고도 살아서 귀환함으로서, 어쩌다 한 번 운 좋게 살아난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했다.

3.2.4. 플레처 제독의 철수는 정당했는가?

미드웨이 해전의 역전승을 일궈냈던 플레처 제독은 연료 부족을 핑계로 함대를 뺐지만 나중에 실제 플레처 제독이 작성한 전투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남은 연료량을 보니 굳이 재급유를 안 받아도 되는 수준이었다. 고로 책임회피성이 짙은 핑계를 댔다 하여 전후 역사가들한테 가루가 되도록 까인다.

이렇게 까일 만도 한게, 제61임무부대에는 일본군 제8함대 따위는 단숨에 박살낼 수 있는 강력한 군함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전함 노스케롤라이나를 비롯하여, 항공모함 와스프와 새러토가, 그리고 엔터프라이즈에게 일본군 중순양함 몇 척 정도는 쉬운 목표물이었는데, 싸움도 못 해보고 아군의 패배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애초에 일본이 야간 작전을 시행한 것도 바로 이 미 항모 때문이었다. 주중에 붙으면 피해가 커지니 자기들이 유리한 야간까지 기다려 전투를 개시한 것이고, 심지어 승리 이후에도 확실하게 물자를 공격해 승리를 굳히는 대신 자기들이 플레처 제독의 부대가 있는걸 발견 못한 것뿐이지 어딘가 있을 것이라고 믿어 후퇴했다.

그래도 플레처 제독에게 실드 쳐 줄 거리가 없지는 않은데, 이미 연합군 함대 전반이 개판 오분전인 상황에서 야간 해전에 휘말려 격침되었을지도 모를 제61임무부대의 항공모함들을 살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아군 함대가 소멸되는 것조차 모르는 지경으로 전황이 돌아간 꼴을 보면 제61임무부대 항공모함들이 남아 지원해줬다고 해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지 의심되는 상황이다. 물론 제61임무부대 함선들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실책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미 해군의 항공모함 전대가 야간작전 능력을 완전히 획득하게 되는 시기는 일러도 1944년 이후였다. 당초 엔터프라이즈만 해도 야간 발착함 훈련은 1944년의 레이테 만 해전 이후에나 정식으로 했다. 미드웨이에서 스프루언스 제독이 일본 해군 제1항공전대, 제2항공전대 소속 항공모함 네 척을 다 털어먹고 나서도 왜 야간전을 포기하고 간격을 유지하면서 도주한 건가를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다.

3.3. 그 후

"You son of a bitch, if you do that you are yellow!!"
"이 개새끼야, 그럼 넌 겁쟁이라고!!"
사보섬 해전 직후 터너 제독이 플레처 제독을 비난하면서 한 말.
이 해전으로 플레처 제독은 터너 제독에게 비난을 들었고 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한 이탈한 제61임무부대 함선들은 플레처 제독이 빠지라고 명령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아군함대를 내버려두고 도망가버린 상황이 되었다. 이때 과달카날에서 거의 유기된 제1해병 사단장 반더크리프트 소장은 플레처를 맹비난했다.

이 해전에서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우다가 침몰한 뉴올리언스급 중순양함 퀸시의 이름은 볼티모어급 중순양함 퀸시에 계승되었으며, 퀸시와 운명을 함께 한 사무엘 N. 무어 함장의 이름은 알렌 M. 섬너급 구축함 DD-747에 붙여졌다. 여담으로 원래 아스토리아, 퀸시, 빈센트는 아스토리아급이었지만, 네임쉽인 아스토리아가 침몰한 후 살아남은 동형함인 뉴올리언스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미 해군은 철저한 피의 복수에 나섰다. 우선 중순양함 카코가 사보섬 해전 이후 귀항하다가 미군 잠수함에 격침된 것을 시작으로, 중순양함 후루타카가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서 침몰했다. 엔터프라이즈는 과달카날 해전에서 아오바 없는 제8함대와 재회했고, 여기서 미카와 제독의 휘하 함정들을 싸그리 급강하 폭격과 뇌격으로 개박살냈다. 키누가사 격침, 초카이 중파, 마야 중파, 이스즈 대파 등의 피해를 입은 제 8함대는 퇴각했다. 경순양함 텐류는 1942년 12월 19일에 미군의 가토급 잠수함 알바코어의 어뢰를 맞고 격침되었고, 경순양함 유바리는 1944년 4월 27일에 미군의 가토급 잠수함 블루길의 어뢰 2발을 맞고 하루 후에 침몰했다. 카미카제급 구축함 유나기는 1944년 8월 25일에 미군의 발라오급 잠수함 피쿠다에게 격침되었다. 제 8함대의 기함 초카이는 레이테 만 해전에서 원인이 불명확한 폭발과 공습으로 인해 무력화되어 자침 처분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아오바는 레이테 만 해전 이후 대파 상태에서도 끝내 살아서 본토까지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아오바는 다른 전후생존함들과는 다르게 구레 군항 공습에서 메인 대공포대가 되는 불운을 겪었고, 미군은 1945년 7월 28일에 전함 이세, 하루나와 더불어 아오바를 중요목표물로 지정하고 대대적으로 공격해 미 육군 항공대의 폭격으로 격침시켰다. 이것으로 미군은 사보섬 해전의 피의 복수를 완수했고 일본 해군은 괴멸되었다.

4. 기타

뒷이야기로, 이때 격침당한 아스토리아의 승무원이었던 밥 쉴러는 후에 수상기 구축함이던 핼포드에 타게 되었고 그를 맞이하러 나온 함장에게 배에 관한 것들을 물었는데
"핼포드? 그럼 이 배의 함종은 무엇입니까? 경순양함? 중순양함?"
"아니, 이거 구축함이야. ...DD-480..."
"구축함이라니? 구축함은 함재기를 탑재하지 않습니다!"
"이보게나 젊은이, 이젠 그렇다네."
원 사이트에는 구조 당시 아스토리아의 수상기 파일럿이었던 것으로 나와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보섬 해전 당시 핼포드(DD-480 halford)는 여전히 워싱턴주의 푸젯 사운드에서 건조중이었다. 핼포드의 진수는 42년 10월이었고 취역이 43년 4월이다. 건조중인 함선을 끌고 사보섬까지 갈리가 없다. 밥 쉴러[12]는 소위로 아스토리아에 타고 있었는데 구조된 후 진주만 샌프란시스코를 거쳐서 나중에 핼포드에 수상기 파일럿으로 탑승했었다.#

5. 미카와 제독의 철수명령은 적절했는가?

사보섬 해전 이후, 일본군 수뇌부는 완전한 승리의 기회를 날려버린 멍청이라는 이유로 미카와 제독을 저평가하게 되었고, 과달카날 전투가 일본의 패배로 끝난 후 1943년 4월 1일에 그를 제8함대 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한직으로 쫓아냈다. 이 해전은 전후에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일본에서는 진주만 공습에서 나구모 제독의 3차 공습 포기, 레이테 만 해전의 구리다 턴과 함께 대단히 아쉬운 순간으로 거론되고 있다.

반대로 미국에서는 미카와 군이치 제독에 대해 최고의 전술가라는 평가를 내렸다. 미군이 반격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연합군 함대를 박살내버렸기 때문이다. 워낙 크게 당했기에 전후에도 우린 그때 왜 그렇게 바보처럼 깨졌는가를 연구할 정도였다.

5.1. 적절하지 않았다

미군 항공모함은 철수하고 있었기에 제8함대를 막을 병력은 미 해군에 존재하지 않았고, 일본군이 과달카날의 미군 수송함들을 격침시켰다면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군이 승리했을 가능성은 매우 커졌을 것이라는 논리다. 한 미 해군 지휘관은 이에 대해, 미카와는 태평양 전선에서 미군의 첫 공세를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중대한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라며, 미카와 함대 전체를 희생시켜서라도 보급품을 실은 미군 수송함을 격침시켜야 했었다고 평했다.[13][14]

5.2. 적절했다

미카와 군이치 제독이 적절한 타이밍에 철수했다는 견해다.

우선 억지로 작전에 참가한 텐류와 유바리와 유나기가 문제인데, 제6전대는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사이였지만 텐류를 위시한 3척은 초카이와의 무선 통신도 안 될 정도였고 배의 성능도 크게 떨어졌으며, 승조원들의 능력도 대단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을 데리고 미군 수송함들을 공격한 후, 날이 밝기 전에 미군 항모의 공격권 밖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전투 과정에서 미카와의 휘하 함정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므로 진격을 계속하려면 배들을 일단 집합시키고 어뢰를 재장전한 후 '어디 있는지 모르는' 잔존 미군 함정들을 경계하면서 나가야 하는데 텐류, 유바리, 유나기 같은 무선 통신도 안 되는 배들이 시간 내에 집합과 재무장과 진격까지 해내는 건 무리였다.

미군 항모의 위협이 엄연히 실존한다는 것도 문제다. 미카와 제독으로서는 와스프와 새러토가, 엔터프라이즈의 존재를 계산에 넣고 움직여야 했고, 해가 뜨자마자 미군이 공습을 한다고 간주해야 했다. 실제 역사에서는 와스프의 함장의 공습 주장이 기각되었지만, 미카와 제독이 그런 뒷사정을 알 방법은 없었다. 공습으로 제8함대가 중순양함을 잃을 경우 미군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인 일본군에게는 매우 큰 피해였을 것이다. 제8함대가 미 항모의 무선교신을 엿들은 것도 철수결정에 영향을 끼쳤다고. 결과적으로 중순양함 1척을 잃기는 했지만, 미군 항모의 공습을 당할 경우 그 이상의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는 나중에 과달카날 해전에서 미카와 함대가 칵터스 항공대와 엔터프라이즈의 공습을 당했을 때, 키누가사가 침몰하고 다수의 군함들이 큰 피해를 입음으로서 증명된다.

6. 매체에서

가공전기에서는 미카와 제독이 미군 수송선들을 습격한다는 결정을 내리는 방향으로 스토리를 진행시킨다. 물론 텐류나 유바리 같은 잉여 군함들은 작전에서 제외되며, 묘코급 중순양함 같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배들이 제6전대와 동행하곤 한다.

엔터프라이즈의 일대기를 다룬 <배틀 360> 3화 지옥의 혈전 편에 이 해전이 나오는데, 미군의 질적 우위를 역설한 후 "그러나 일본군은 놀라운 전술로 모든 것을 극복했다"며 논조를 바꾼다. 일본군 군함들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지만 미군이 경험한 끔찍한 패배와 그 여파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나마 설명해준다. 배경은 공격을 받고 불타오르는 미군 중순양함들.

드라마 더 퍼시픽 1화에서 레키 일행이 밤에 잠시 목격한 해전이 바로 이 사보섬 해전이다. 전투 상황에 대해 잘 모르는 레키 일행은 밤중에 군함들이 쾅쾅 터지는 걸 보고 "터너 제독이 일본 함대를 박살내서 해협에 가라앉히는 거다"라며 기대했지만, 다음 날 해변은 박살난 쓰레기들과 미 해군 수병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7. 관련 링크

8. 관련 해전

8.1. 에스페란스 곶 해전

1942년 10월 11일 있었던 해전. 일본에서는 에스페란스 곶 해전을 '사보섬 해전'이라고 부른다. 당시 아오바(중순양함)도 참전했으며, 그 논란에 대해서는 와레 아오바로도 갈 수 있다.

8.2. 타사파롱가 해전

타사파롱가 해전은 미국측 기록이고 일본측에서는 룽가곶 야전(ルンガ沖夜戰)이라 칭하며, 그 외에 제4차 사보섬 전투라 부르기도 한다.

9. 관련 문서


[1] 아오바의 탐조등에 포착되어 집중 공격을 받는 USS 퀸시.[2] USS 시카고, USS 아스토리아, USS 퀸시, USS 빈센스, HMAS 오스트레일리아, HMAS 캔버라[3] 산 후안, HMAS 호바트[4] 초카이, 아오바, 키누가사, 후루타카, 카코[5] 텐류, 유바리[6] 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 경력이 있는 미 해병대 대원.[7] 8월 7일 오전에, 제8함대의 출항 이전에 미군 항공모함을 공격하기 위해 라바울에서 일본군의 1식 육공 27기, 99식 함폭 9기, 제로센 17기가 출격했지만 이들은 미군 항모를 발견하지 못했고, 근처의 연합군 함선을 대신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미군 전투기의 반격을 받아 큰 성과를 올리지 못했고, 사카이 사부로도 큰 부상을 당한 후 겨우 라바울로 귀환하게 된다.[8] 핑계라는 평가를 받긴했지만 그럼에도 저 3척은 미 해군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소중한 3척이었다. 해전의 패러다임이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재편되가는 상황과 저 3척을 잃으면 안그래도 힘든 해군의 제공권 장악에 치명적인 공백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3척이 철수하지 않고 머물러있다가 사보섬 해전에 말려들어 상실되기라도 했다면 항공대는 처음부터 다시 쌓아올려야하고 항공모함도 금방 나오는게 아니기에 이후 나올 에식스급이 전력화될 때까지 사실상 제공권을 상실한다는 의미와 동일했다.[9] 두 구축함은 8함대의 군함을 같이 정찰 중인 아군으로 착각했다.[10] 이것은 과거에도 이미 있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호넷의 경우가 그 사례. 특히 호넷의 경우는 항공대 사령관인 링 중령의 권위주의적 태도에 의해 항명사태가 벌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11] 당시에도 미 함대의 대부분은 구축함들까지 레이더를 탑재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이 성능이 떨어지는 구형 SC레이더인데다 남태평양 특유의 오락가락하는 날씨의 영향을 받아 제대로 된 결과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고성능의 신형 SG레이더를 장착한 산 후안도 있었지만 결국 레이더 결과를 분석하는 건 사람인지라 위에 적힌 대로 피로에 쩔어있던 전탐병들은 레이더에 잡힌 게 수상기인지 군함인지도 헷갈려하는 판이었다.[12] Bob Schiller 미국의 50~70년대 각본가[13] Mark Stille, The Naval Battles for Guadacanal 1942, p.42[14] 사실 아래 반론 항목에도 있는 내용이지만 미카와가 까이는 부분들은 대부분 결과론적인 부당한 비판이 대다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