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대체역사 웹소설.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에 묘사되는 개변된 역사를 서술한다.2. 개변된 역사
-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처절한 저항 끝에 밀린 것은 원 역사와 동일하나 여기서는 주인공의 개입으로 원 역사보다 2~3시간을 더 버티며 일본군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히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일본군은 경복궁을 향해 대포까지 쏴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반정부 성향의 일본인 기자가 이 장면을 찍어 김시혁에게 넘기는 바람에 약점이 잡혀 원역사에선 창설을 막았던 친위영의 설치를 허락해야 했고 친위영 소속의 김시혁이 주도하는 군제 개혁에도 딴지를 걸지 못하게 된다.
- 동학 농민 혁명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2차 봉기가 터진 건 동일하지만 진압과정이 사뭇 달라졌다. 원역사에서는 동학군이 이인-효포 가도는 점령해놓고 우금치에서 참패했는데 여기서는 주인공의 개입으로 이인-효포가도에서 동학군이 와해된다. 홀로 떨어져 세 불리기에 전념하던 김개남 봉기군도 관군과 민보군의 공세에 무너져 1895년이 오기도 전에 진압이 완료되어 동학군이 원역사보다도 빠르게 무너졌다. 전봉준 등 동학군 수뇌부들은 달아나서 종적이 묘연해졌다는 말을 끝으로 소설에서 더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 대한제국 친위 쿠데타
작품상에서 총 2번에 걸쳐 일어나며 1차 쿠데타는 경복궁 습격과 동학 농민 혁명 진압,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거세지자 김시혁이 원역사의 춘생문 사건과 아관파천을 기반으로 친일파 내각 척결 계획을 세운 쿠데타로[1] 원역사의 두 사건에서는 고종이 경복궁을 탈출해 미국 공사관이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갈 계획이었지만 여기서는 고종이 탈출하지 않고 경복궁에 머물며 김시혁이 이끄는 소부대와 보부상들이 일본군의 진입을 러시아군이 도착할때까지 막아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용산의 일본군이 도착하기 전에 러시아군이 한 발 앞서 도착하며 쿠데타는 성공적으로 끝난다. 이후 2차 쿠데타는 역시나 일본이 다시금 친일 내각을 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이며 극동에 전운을 고조시키고 고종도 김시혁을 견제하며 전쟁 준비가 힘들어지자 역시나 김시혁이 수립한 황색 작전을 발동하여 일어나며 역시나 친일 내각을 무너뜨리고 고종의 실권도 대부분 앗아가며 극동 전쟁 준비의 최후의 기반이 되어준다.
- 대한제국 군제개혁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군사 항목 참조
- 1901년 대타협
원역사에선 없던 외교전으로 일본이 만주와 한반도에 야욕을 드러내자 김시혁의 주도로 프랑스에 중재를 요청했고 거기다 고종이 독일도 끌어들이며 2차 삼국간섭의 형태가 되어 아쉬운 대로나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 극동 전쟁
김시혁의 개입으로 역사의 큰 물결이 바뀐 대표 사례로 원역사의 러일전쟁에 대한제국이 러시아 편에 붙어 싸우게 된데다 1904년 2월에 벌어질 전쟁이 1903년 10월로 당겨지면서 한러일 모두가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채 전쟁에 돌입했고, 이 결과는 엄청난 변화로 바뀐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 포츠머스 조약
원역사와 비슷하게 포츠머스에서 전쟁의 끝을 알리는 조약이 체결된다. 하지만 원역사와 차이가 있는 것이 우선 전쟁에서 가장 크게 활약한 대한제국의 입지가 커지며 협상 당사자로서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로 인해 원역사대로면 이 조약으로 한국의 식민화가 확정되지만 여기선 한국이 승리한 만큼 한국의 식민 조항은 당연히 삭제되고 한러방위협정을 끝내는 대가로 일본에 목줄을 채우는 방향으로 협상이 끝난다.[2]
- 남만주의 대한제국-장작림 전쟁
포츠머스 조약에서 한국에게 할당된 남만주를 두고 한일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물론 우선권은 열강들에게 인정받고 남만주를 사실상 점유한 한국에게 있었지만 일본군부의 대륙에 대한 집착은 엄청났다. 한국 역시 당장 남만주를 제대로 편입하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이 틈을 잘 파고든 인물이 장작림으로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군의 근대화까지 이루는 등 만주에서 무시 못할 세력을 형성한다. 당연히 일본을 그를 이용해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장작림을 지원했고 때맞춰 위안스카이도 자신의 황제 즉위 명분을 위해 고토 수복을 내걸며 은근슬쩍 장작림을 밀어주면서 장작림은 남만주로의 진출을 꾀하게 됐고 결국 전쟁이 터진다.[3]
이러한 장작림의 움직임에 한국군은 신속하게 대응한다. 극동전쟁 이후 대량의 자전거를 보급하고 기동 작전 훈련에 주력한 덕분에 한국군은 미쳐버린 기동성을 지니게 된 상태였고 정보전도 잘돼서 장작림의 움직임에 대한 예견도 어느정도 되어있었기에 전쟁에서 누가 이길지는 명백해진 상태였다. 결국 장작림은 자신만만한 공세가 무색하게 순식간에 한국군에게 반격당해 주력군의 과반을 잃고 근거지인 잉커우까지 밀리며 시한부 신세가 되고 만다.
당시 고종황제를 꼬드겨 일본군을 파견할 생각이던 일본 외무성은 서울에 와서야 이상사태를 감지하고 경악한다. 일본 외무성은 중국 현지의 신문을 통해서 정보를 얻은 탓에[4] 장작림이 잘 싸우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막상 한국에 왔더니 진실은 정반대 였던 것.[5] 이번 전쟁으로 장작림이 완전히 파멸하면 이번 전쟁을 지지한 위안스카이는 무조건 몰락하는 길밖에 없으니 대륙의 주도권 전쟁의 승패 결정권이 사실상 한국의 손에 들어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일본이 지난 수십년간 대륙에 펼친 모든 영향력이 소멸할 게 확실했다. 결국 이전의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달은 일본은 장작림이라도 살리기 위해 주변국들에 중재를 요청하기 시작한다.
결국 러시아 공사관에서 한국에게 전투 중지를 요청하면서 장작림은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다시금 인고의 시간을 보낼 것을 다짐한다. 한국은 잉커우를 포격해 파괴하는 선에서 군사 행동을 마무리 한 뒤 장작림의 행동을 빌미로 북양정부에게서 막대한 배상금을 뜯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쟁은 마무리 되지만 장작림이 살아남으며 만주는 언젠가 다시 전쟁이 터질 수 있는 불완전연소 상태로 남게 된다.
- 호국전쟁
대한제국의 개입으로 위안스카이는 한층 처절하게 몰락한다. 홍헌제제로 혁명의 이상을 무너뜨리고 일본이 제시한, 사실상 국권 침탈 시도인 21개조를 받아들인 북양 군벌은 한간 취급을 받으며 국민의 지지를 상실한 반면, 수차례 실패로 위상이 땅에 떨어졌던 쑨원은 역으로 불굴의 애국지사로 부상한다.
위안스카이에게 파견된 일본 군사 고문단의 활동과 일본의 자금 지원은 대한제국 원수부 기록조사실이 포착하는 족족 언론에 까발려 효과적으로 차단된 반면, 대한제국 고문단에게 속성으로 군사교육을 받고, 그들의 보조를 받은 호국군은 원래 역사보다 훨씬 효율적인 전투 지휘가 가능해진데다 한국의 동맹인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통해 무제한에 가까운 군수품과 인력을 공급해주면서 운남과 사천의 군벌들을 아우를 수 있게된 호국군은 짧은 시간에 6개 사단 10만에 달하는 대군을 결성하는데 성공한다. 호국군은 허술한 진압군을 손쉽게 격파하며 사천을 휩쓸었고 이에 자극받은 광동과 광서 군벌들까지 호응하며 15개 사단 20만으로 세를 불려나간다. 반면, 위안스카이 측은 한국 육군 2개 사단이 산해관 인근으로 기동하는 바람에 50만에 달하는 주력 부대가 북쪽에 발이 묶여 차오쿤이 지휘한 토벌군에 겨우 7개 사단 6만명만 딸려 줄 수 있었고 당연히 허무하게 녹아내리고 만다.
운남, 사천을 넘어 광동, 광서까지 장악하는데 성공한 호국군이 복건성까지 넘보자 위안스카이는 21개조를 바로 취소하긴 어려우니 일단 홍헌제제를 취소하고 공화국으로 복귀하겠다는 타협안을 내놓았으나 호국군이 그 정도로 만족할 리가 없었고 이대로면 열강이 아예 대한제국에게 중국에서의 전권을 위임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질린 일본마저 손을 떼면서 완벽히 외통수에 몰린 위안스카이는 화병으로 쓰러져 사망한다.[6] - 일본군 소장파의 김시혁 숭앙
일본 육군은 극동 전쟁 참패의 책임을 지고 원로급 노장들이 대거 할복하면서 유신 원로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그의 번벌을 제외한 군맥이 죄 소실되어 버렸다. 종전 이후 임관해 뚜렷한 전범(典範) 없이 성장한 위관급 장교들은 자랑스러운 일본군을 반론의 여지없이 완벽하게 깨뜨린 김시혁에게 관심을 갖고 연구하다 비어있는 그들의 우상 자리에 김시혁을 넣기 시작한다. 국군주의 사회의 젊은 장교들 눈에 일신의 능력으로 약소국에서 최고의 군대를 키워낸 불패의 명장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던 것.
여기에 좌관급 장교들, 직업상 이유로 김시혁의 행적과 전술을 깊이 파고들 수 밖에 없었던 사관학교 교수들과 참모본부 아시아 제병과 참모들마저 동조하면서 김시혁은 점차 군부 소장파 전체의 우상에 가까워져 간다. 이들은 극동 전쟁은 물론 동학 토벌과 의화단 진압, 2차례의 쿠데타를 면밀히 분석하며 김시혁이야 말로 (앞으로 벌어질) 모든 전쟁의 아버지란 결론을 내린다. - 한성 폭동
브루실로프 공세에서의 대승이 본국에 전해지며 민족주의적 분위기가 기름을 붓자 일부 흥분한 하층민들이 양화진, 진고개, 정동 일대의 일본인, 중국인 거주민들에 대한 약탈과 폭행을 시작했고 이윽고 종로와 명동까지 휩쓰는 거대한 폭동으로 번진다. 전쟁으로 가파르게 상승한 물가와 흉년으로 흉흉해진 민심이 고토 회복을 부르짖으며 치욕적 과거를 상기시키는 민족주의를 만나 폭주한 것. 이를 국가헌병대의 비중을 확대할 기회로 본 고종에 의중으로 군의 개입이 일절 배제되고 경찰력으로 진압이 이뤄졌다. 진압 과정에서 2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습격받은 중국, 일본인 수십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수십채의 가옥이 불타, 수억의 재산피해가 발생한다.[7]
- 미국의 군사 개혁
원 역사에서도 1차 대전 시기 추진된 미국의 군사 개혁이 한국군이 독일을 참패시킨 것에 힘입어 한층 강력하게 추진된다. 연방군은 소수만 둔 채 유사시엔 다수의 주방위군으로 대응하겠다는 전통적인 방식을 폐기하고 다수의 연방군과 그 이상의 예비역을 확보하며 무장이나 훈련이 태부족하고 주지사들의 사병 성격까지 띄고 있는 주방위군을 연방군이 강력하게 통제하는 것을 골자로 하며 한국군의 전술 체계를 받아들인다. 다만, 여전히 올드 해빗이라 불리는 보수파들의 반발이 심했고 무엇보다 미국이 이런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할 어떤 인적, 물적 준비가 갖춰져 있지 않다보니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해프닝이 벌어진다.
- 러시아 2월 혁명
1917년 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총파업이 일어났고 근위군단을 비롯한 진압병력이 여기에 합류해 겨울궁전으로 몰려간 것까지는 동일하나 그곳에 김시진이 지휘하는 근위 시베리아 소총병 사단이 버티고 있었다. 이들은 겨울궁전과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거점으로 한채 무장을 해제하고 길을 열라는 반란군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한다. 시베리아 소총병 사단에 소수 근황파 병력까지 합쳐 12,000명에 불과한 충성파는 8만이 넘는 적을 맞아 120시간 동안 방어에 성공한 것도 모자라 역공을 가하고 반군의 장갑대대까지 분쇄해버리는 기염을 토한다.
궁전을 함락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전투가 길어지자 방관중이던 크론슈타트 섬의 해군이 중재에 나섰고 그 결과 니콜라이 2세는 권력은 잃었으되 일단 폐위는 면하게 되었으며[8] 맨셰비키도 볼셰비키도 아닌 해군과 손잡은 입헌민주당과 두마가 정국 주도권을 쥔 상태로 오월동주가 시작된다.
2.1. 제1차 세계대전
원래 역사에서도 1910년대 초반에 버차니를 중심으로 군사 개혁을 추진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대한제국을 방문해 김시혁에게 보다 상세한 노하우를 전수받는 한편 회첸도르프와 그를 지지하는 보수파와도 타협에 성공한다. 개혁에 탄력을 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본래라면 정예들을 모두 잃어야 했을 프셰미실 전투에서 정예 병력을 보전하는 데 성공하고[9] 갈라치아까지 일방적으로 패퇴한 러시아는 극동의 대한제국에게서 돌파구를 찾으나 일본의 위협과 내부 갈등으로 쉬쉬하는 모습을 보이자 관동주(뤼순, 다롄) 매각을 조건으로 일본과 접촉할 만큼 급하게 움직였다. 관동주 매각은 곧 안보적 사형선고이기에 참전할 수 밖에 없게 된 대한제국은 프랑스에 중재를 요청해 관동주 매각을 뒤로 미루고 본격적으로 동부전선에 참전한다.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이 러시아군을 압도해버린 탓에 부전선을 맡은 영국과 프랑스. 특히 프랑스의 손실이 막심해져 식민지 병사들까지 끌어와 처절한 방어전을 벌였으며 이탈리아는 이대로는 북부 이탈리아를 오스트리아에 도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원래 역사처럼 협상국으로 참전. 이손초에서 오스트리아군과 밀고 밀리는 소모전을 벌인다.
- 브루실로프 공세
- 치머만 전보
- 비스와 강의 기적 혹은 피의 가을
- 다섯 군대 전투
- 러시아의 단독 강화
- 한국의 서부전선 참전과 일본의 회피
- 카포레토 전투
- 한일 추가 파병
원역사의 동부전선 브루실로프 공세와 달리 김시혁이 본격적으로 유럽 전쟁사를 바꾸게 된 계기다. 동부전선 참전이 확정된 뒤 대한제국이 참전하게 된 최초의 전투로 원역사와 달리 렘베르크와 슈타니슬라우를 차지했으며 독일군조차도 한국군을 막지 못한채 군단 하나에게 집단군이 갈리는 등 원역사와 많이 다른 전개를 보인다.
자신만만한 독일군 앞에 진정한 전쟁기계의 위엄을 선보이며 단 6주만에 독일군 20만, 오스트리아-헝가리군 35만을 녹여버리고 동맹군이 서부 우크라이나와 발트 3국을 내놓은 채 비스와강 유역까지 물러나게 만들었다.[10] 다만 파벨 대공의 트롤링으로 코벨을 포위해 섬멸하고 전쟁을 조기 종전 시킨다는 최초의 목적은 이루지 못한 채 라스푸티차와 보급의 한계로 한달 반만에 종료된다.
최종목표 달성엔 실패했으나 동부전선을 사실상 1914년 국경으로 되돌리고 베르됭 공세에 사활을 걸었던 서부전선 독일군까지 멈춰세움은 물론 오랫동안 간을 보던 루마니아의 참전이 사실상 확정되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부담이 극심해졌다.[11]
원역사보다 훨씬 큰 승전은 다른 협상국의 분위기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프랑스 신문이 브루실로프와 김시혁을 성자로, 한국군과 러시아군을 성자의 군대로 묘사한 만평을 실는가 하면 영국군은 타타르와 황인종들이 한 걸 자신들이 못 할리 없다며 적극적으로 솜 전투를 밀어 붙인다. 일본에서도 천황이 직접 니콜라이 2세와 고종에게 축하서신, 김시혁에게 국화장을 서훈한다. 김시혁에게 직접 깨져본 일본군 고위 장교들은 소장파에 팽배한 김시혁 숭상에 힘이 더해질 것을 우려한다.
원역에서도 독일의 참담한 외교 안목을 보여줬던 사건이 더 빠른 시점에, 더 큰 스케일로 벌어진다. 동부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안긴 한국을 떨쳐낸답시고 중국과 일본 양쪽에 동맹을 제안하며 전보를 보냈는데 중국에는 교주만, 관동주, 남만주를 탈환해주겠다, 일본에는 관동주, 교주만, 남태평양의 섬들 영유권을 인정해주겠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아무나 하나 걸리라고 막 던진 것으로 당장 중국과 일본의 조건이 서로 양립이 불가능하다. 여기에 멕시코에 보내는 전보는 또 똑같이 보내서 동서로 불을 지른 꼴이 되었다.
한국군의 활약으로 갈리치아를 수복하고 왕조의 수명을 연장할 기회를 잡은 로마노프였지만 멍청한 니콜라이와 그를 둘러싼 궁정귀족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 해 기어이 추가로 일을 벌린다. 이번에 확실히 승리를 거둬서 지난 루츠크 전투에서 상실한 러시아 제국 근위대의 손실을 무마시키고 정치적으로 유리한 지점을 확보하겠다는 차르의 욕심과 그에 부화뇌동한 궁정귀족들은 내각과 스타브카의 공세 만류에도 불구하고 1914년 개전 이전 국경선 회복 및 동프로이센 지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여 전쟁을 확실히 끝내겠다는 명목으로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살아남은 훈련된 병력을 모조리 쏟아부은 2차 공세를 실시한다.
그러나 공세의 중심이었던 비스와 강 너머엔 3개 제국과 1개 왕국의 최정예들이 칼을 갈며 기다리고 있었다. 팔켄하인은 러시아의 어설픈 기만전 시도를 간파하고 지난 전투에서 패배한 린싱겐을 야전원수로 진급시킨 뒤, 젝트 중장과 함께 바르샤바의 독일군을 비롯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오스만 제국군, 불가리아 왕국군 도합 40여 만 명을 편성해 역습을 노렸고, 부르흐뮐러 대령이 지휘하는 4,000여 문의 집중 포격 전술과 정교한 화학탄 투발로 러시아 제3군과 제8군을 사실상 궤멸시킨다. 비스와의 참패를 시작으로 동부전선 전역에서 동맹국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었고, 김시혁과 브루실로프의 승전이 무위로 돌아감은 물론 전 전선이 무너져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른다.
패전을 눈앞에 둔 러시아가 매달릴 곳은 한국군 밖에 없었다. 온정에 호소하고, 재조지은을 부르짖고, 종국엔 한국이 싸워주지 않으면 우리도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는 저열한 협박까지 늘어놓으며 참전을 채근한다. 김시혁과 주러 한국대사 이상설은 본국 여론을 설득할 대가로 하얼빈 이남의 철도 노선 지분을 한국에 매각하는 형식으로 전부 넘기고 이를 공식 문서화할 것을 요구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러시아는 받아들인다.[12]
재전을 결정한 김시혁은 상처 입은 사단들을 재투입하는 대신 유일하게 건제를 유지한 시베리아 소총병 여단에 타 부대에서 각출한 공병, 포병, 강습 대대들을 더해 증편 여단을 꾸려 교통의 요지 코벨로 나아간다. 절망적인 사투를 벌이던 러시아군이 한국군의 도착을 목도하고 보여주는 반응이 실로 열렬한데 총사령관인 브루실로프부조차 그들을 성자의 군대라 칭하며, 장병들은 숫제 무릎을 꿇고 기도와 칭송을 바친다. 딱 이 친구들이 생각나는 장면.[13] 그렇게 다섯 제국[14]의 군대가 코벨에서 마주친다.
적 병력 살상과 장비 무력화에 주력하는 화학전 교리를 막 완성한 동맹군에게 투발 농도와 작용제를 전부 다르게 나눠서 전술적 행동을 제약하는 현대식 화학전 교리를 선보이고, 독일이 자랑하는 스톰트루퍼마저 강습보병대와 포병대로 통렬히 받아쳐 오스만 최정예 일디림 군단에게 괴멸급 피해를 입혔고[15] 코벨 북서쪽에선 러시아군도 칼닙카에서 오스트리아-불가리아 군을 저지, 린징겐의 공격 의지 자체를 분쇄해 버리고 코벨 방어에 성공한다. 각각 에스토니아와 벨라루스로 진격한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나르바와 모길료프에서 라스푸티차와 러시아군의 악착 같은 저항에 진격이 둔화되어가다 코벨 공략 실패로 보급이 위태로워지자 눈물을 머금고 메멜-카우나스 선으로 철수한다. 독일이 공세종말점에 이른 것을 확인한 스타브카는 민스크의 근위군단을 코벨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지키던 6군은 나르바로 증원해 예비대를 남김없이 털어내 전선을 강화한다. 결국 동부전선사령부는 물론 카이저와 팔켄하인마저도 동부 전선을 포기하고 서부 전선에 모든 걸 거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김시혁과 한국군의 선전이 불러온 나비효과. 차르의 실권만 빼앗은 채 연정 체계를 꾸린 러시아는 김시혁이 갈리치아를 지켜내고 동맹국 정예 부대를 격파해놓은 덕분에 각 정파가 일시적으로 손을 잡은 것만으로도 동맹군의 칼 끝을 막아내는 데는 성공, 원 역사의 브레스트 조약보다 훨씬 관대한 조건으로 전쟁에서 빠져나갈 조건을 달성한다. 이는 곧 영프에겐 거대한 공포였다. 동부 전선에 있던 300만 동맹군의 서부 전선 합류가 시간문제가 되었기 때문.[16] 막대한 물량을 가진 미군이 본격적으로 배치되려면 1918년 여름까지 기다려야 했다. 진지하게 생존의 위협을 느낀 영프는 동방의 두 제국. 한국과 일본을 무슨 수를 써서든 호출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은다.
협박과 경고가 뒤섞인 독촉을 받아든 양국의 태도는 상반되었다. 내각과 중추원의 결정에 복종하는 군부가 중립을 견지하는 상태로 황실, 내각, 중추원이 갑론을박을 벌였으나 만주의 이권과 막대한 채권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선 파병 밖에 없다는 데 뜻을 모은 한국은 군단급 병력과 독립지휘권을 보장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김시혁의 보장을 누름돌 삼아 지구 반대편 전장으로의 참전을 결정된다.
반면, 거의 동시에 논의를 시작한 일본은 덴노와 민간 내각이 지지하는 파병을 군부가 작당해서 엎어버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육군대신 다나카 가이치가 중심이 되어 내세운 명분은 극동전쟁 패배의 상흔[17]을 극복 못 한 육군은 싸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단 규모 파병이나 한국군과 연합작전 등의 대안도 모두 고사한 군부는 육해군 장교단 수백명으로 참관단을 구성해 파견하고, 수송 전력이 태부족한 한국에 수송함대를 지원하는 것을 타협안이라며 내놓는다.
한국군 군단의 참전 소식을 접한 프랑스는 반색하며 최신 스패드 전투기의 우선 공급을 약속했고, 일본을 향한 배신감에 치를 떤 영국은 김시혁을 포슈 바로 아래 협상국 최고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추천하는 한편 동맹의 대가로 일본에 지급하던 군사 예산을 한국의 전비를 지원할 예산으로 돌려버린다. 눈치가 보인 일본은 결국 지상군을 파병하기로 하는데.... 그 지상군이란게 자원병 6천이었다. 이것도 늘어난 것으로 육군에서 처음 제시한 병력은 2천명이었다. 훨씬 국력이 약한 태국도 1200명을 보내기로 했는데. 6천 파병을 당당히 전달한 것도 모자라 필요한 물자 지급도 전부 영국이 떠맡을 것을 요구해 영국 정계에 어이를 빼놓는다.
2차 파스샹달 전투와 말메종 요새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은 독일은 솜과 파스샹달에서 얻은 이득을 모두 토해낸다. 동부 전선에 있던 병력이 재배치되기 전까지 시간을 벌고, 미군과 한국군이 본격적으로 배치되기 이전 승기를 잡을 방안이 필요했던 힌덴부르크는 오스트리아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이는 김에 북이탈리아에 새로운 전선을 열기로 한다. 격전지인 이손초의 배후인 카포레토를 쳐서 알프스 산악에 묶여 있는 이탈리아군을 포위섬멸하고 자연방위선이 없는 북이탈리아를 쓸어버리는 것. 한국군의 전술을 받아들여 한층 날카로워진 독일군의 공세는 이탈리아군 사단의 절반을 와해시키는 치명타를 입히며 성공한다. 수십만 대군의 물자가 적재되는 핵심 보급창 베네치아와 산업 중심지 밀라노가 위협받자 이탈리아는 남은 정예병력을 전부 끌어모아 피아베 강에서 혈전을 벌이고, 자칫 남프랑스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에 다급해진 프랑스는 한국에 추가 파병을 요구한다.
대등한 관계는 아니나 비백인, 비열강 국가로서 상당한 양보를 받은 동맹제안에 한국의 여론은 추가 파병 찬성으로 기울고, 김시혁의 제안에 따라 이미 한계에 달한 함경, 평안 대신 황해와 경기에 3급 동원령을 내려 5만의 병력을 추가로 징병하기로 한다. 한편 영국에게 전후 아시아 질서를 아예 재편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들은 일본도 자원병으로 퉁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5만의 병력을 파병하기로 하는데 끝까지 수작을 부려 관서는 제쳐두고 정부에 반항적이고 경제적으로도 가난한 관동에서 징발하기로 한다.
[1] 시기상으로는 춘생문 사건과 겹치며 러시아에게 지원을 받는다는 세부 사항은 아관파천과 겹친다. 실제 아관파천도 춘생문 사건에서의 교훈을 검토해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2] 이와중에 일본은 정신을 못차렸는지 한반도를 이익 지대로 설정하려고 바득바득 애를 썼지만 비테 선에서 컷됐다.[3] 이때 일본의 목적은 일본군의 만주 주둔이었다. 일본은 한국에 동양척식회사 합자를 제안하고, 그 과정에서 만주에 적잖은 일본 개척민들을 보냈는데, 그들이 큰 피해를 입으면 자국민 보호를 명분삼아서 일본군을 만주에 주둔시킬 명분을 얻으려는 계획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일본 개척민들이 이미 엄청난 피해를 본다는 사실은 신경쓰지 않았다. 애시당초 개척민의 대부분이 불순분자들로 어차피 일본 내에서도 범죄자 취급받는 이들이라 거리낌이 덜했던 것으로 보인다.[4] 이건 달리 말하면 한반도와 남만주 내부에 그렇다할 정보망이 없다는 이야기다. 즉, 정보전에서 한국에게 사실상 패하고 있는 것.[5] 정황상 이를 밀어준 위안스카이의 북양 정부가 신문을 검열해 진실을 감춘 것으로 보인다.[6] 이때 비공식적 유언으로 조선놈들이 감히!!!라고 대한제국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고 한다. 사실 위안스카이가 성장하게 된 계기가 조선 수탈이었던 만큼 조선 덕에 성장했다 조선 때문에 몰락했으니 완벽한 수미상관을 이룬 셈이다.[7] 진압 과정에서 총을 쏘진 않았다. 군을 배제한 채 경력만 투입하고 화기 없이 물대포와 둔기만으로 진압하는 그 시대 기준 무척 선진적인 시위 진압이 이뤄졌으나 워낙 소요가 컸고, 갑작스러웠다.[8] 미군이 참전하기 전에 동부전선을 정리하기 위해 공세에 나선 동맹국을 저지할 군대 편성에 차르와 황실이 협력하고, 공세를 막아낸 후에는 오직 종전에 힘써야 한다는 조건으로 한동안 황실을 존속시키기로 한다.[9] 흔히 오헝군의 약점으로 언급되는 출신지별로 다른 언어 문제는 프셰미실 이전까진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 전투에서 숙련병과 정예 장교들을 대거 손실하며 불거진 문제였는데 원래보다 정예 병력을 더 많이 육성하고, 성공적으로 보전하면서 이 약점이 사라졌다.[10] 오데르-나이세 선에 익숙한 지금 시각에선 그냥 폴란드 땅이지만 동프로이센 코앞이다.[11] 동맹국에서 가장 체급이 작은 불가리아는 원 역사대로 성인 남성의 90%를 징집하는 바람에 루마니아를 상대할 여력이 없다고 설명된다.[12] 하얼빈이 만주 유일의 환승역이라 이곳이 한국에 넘어가면 남만주 전체가 넘어가고, 남만주가 넘어가면 인구 밀도가 낮고 하얼빈 외 대도시가 없는 북만주도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와 사실상 만주 전체가 한국 영향하에 놓이게 된다.[13] 드로즈돕스키를 통해 그들이 투입된다는 건 이 전장이 그만큼 뭣같다는 뜻이라는 언급까지 한 걸 보면 스페이스 마린 묘사에서 따왔음이 유력하다.[14] 대한제국,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는 당시 왕국의 지위였기 때문에 여섯 제국이 아닌 다섯 제국이다. 불가리아의 지도자 호칭이 흔히 황제 칭호 하면 하나로 보는 차르이긴 하지만 1차 대전 시기에 차르라는 호칭은 황제에서 왕을 의미하는 호칭으로 격하되었기 때문에 불가리아는 제국을 칭할 수 없다. 그래서 당시 러시아 제국 황제의 칭호는 공식적으론 임페라토르였다.(물론 실질적으로 많이 쓰인 호칭은 차르이긴 하다.)[15] 갈리폴리에서 영국군을 격파한 19사단은 편제가 삭제되고, 20사단도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16] 원 역사에선 러시아가 참패하며 두 차례에 걸친 혁명으로 무너져버린 덕에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핀란드, 발트 3국, 캅카스까지 죄다 뱉어내야 했고 동맹국은 이 방대한 땅을 관리하느라 110만에 달하는 병력을 묶어둬야 했으나 역사가 바뀌어 온건한 협상을 맺고, 관리할 영토도 크지 않아 아무리 높여 잡아도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수십만 정도만 남겨 두고 나머진 서부전선으로 투입할 수 있게 됐다. 영프도 영프지만 60만 이탈리아군이 90만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저지하고 있는 이손초 전선은 동부전선에 배치된 오스트리아군 120만이 귀환하면 절대로 버틸 수 없는 구조이고 이손초 전선이 돌파당해 북이탈리아가 무너지면 남프랑스까지 고속도로가 뚫린다.[17] 장교 사망자만 3만 5천. 사상자가 아니라 사망자만. 오야마 원수, 노기 대장 등 간신히 살아남은 인원들마저 특유의 책임 문화 탓에 할복, 퇴역했고 부상, 실종 처리된 인원까지 합치면 메이지 유신 이래 길러온 육군의 인재풀이 통째로 사라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