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9 22:59:44

제임스 조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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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21세기 새 시대를 맞아 1999년 조사한 지난 천년동안 가장 위대한 작가 조사.
1999년 2월 한 달 동안 BBC 웹사이트에서 진행한 영국인들의 투표로 매겨졌으며, 영국인들이 뽑은 순위라 영국 작가들에게 상당히 편중됐다.
1위2위3위4위5위
윌리엄 셰익스피어 제인 오스틴 조지 오웰 찰스 디킨스 이언 뱅크스
6위7위8위9위10위
J. R. R. 톨킨 제임스 조이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미겔 데 세르반테스 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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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
James Joyce
파일:James+Joyce.poem.2.2.23.jpg
본명 제임스 오거스틴 앨로이시어스 조이스
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
국적
[[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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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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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출생 1882년 2월 2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더블린
사망 1941년 1월 13일 (향년 58세)
스위스 취리히
직업 소설가, 시인
서명
파일:제임스 조이스 서명.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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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colbgcolor=#fff,#1f2023>스위스 취리히 플룬터른 묘지
학력 파일:유니버시티 칼리지 더블린 원형 아이콘.png 유니버시티 칼리지 더블린
(현대어문학 / 학사) (1898년 – 1902년)
사조 모더니즘
활동 기간 1914년 ~ 1939년
혈통 아일랜드인
종교 가톨릭무종교
부모 아버지 존 스태니슬로스 조이스 (1849~1931)
어머니 메리 제인 "메이" 머리 (1859~1903)
배우자 노라 바너클[1] (1931년 결혼)
자녀 아들 조지오 조이스[2] (1905~1976)
루시아 조이스[3] (1907~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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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작품 성향4. 작품 목록5. 문화적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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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mw09549.jpg

아일랜드소설가이자 시인. 영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이며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중요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2. 생애

아일랜드라면 자연스러운 얘기지만 가톨릭 세례를 받았고 가톨릭 계열의 학교를 다녔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50px-James_Joyce_age_six%2C_1888.jpg

1888년 6살 때의 제임스 조이스.[4]

아홉 살인 1891년에 첫 시인 '힐리 너마저(Et Tu Healy)'를 썼는데 아일랜드의 독립투사인 찰스 파넬에 대해 썼다.[5] 조이스는 킬데어에 위치한 클롱고스 우드 칼리지(Clongowes Wood College)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곳은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종교적인 성향이 강했고 남들에 비해 빠르게 월반했던 그는 처음에는 잘 적응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1898년에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더블린(UCD)에 진학해 영어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을 공부했다. 유럽 제언어에 능통했던 그의 언어적 역량은 이미 그 당시부터 두각을 드러낸 모양이다. 특히 헨리크 입센의 희곡을 마음에 들어해서 독학으로 덴마크어를 배우고 리뷰를 쓰기도 했고 입센에게 편지를 보내 답장을 받기도 했다. 1900년의 일이니 그의 나이 18세 때 일이다.

대학 재학 시절에는 학교 신문에 글을 기고하거나 희곡을 두어편 쓰기도 했는데 현재는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1903년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파리로 가 의학을 공부했는데 기술적인 프랑스어가 어렵다고 생각해 이를 관둬버렸다. 어학의 천재이긴 했지만 업계 용어는 불편한 모양이었나 보다. 1904년 조이스는 21번째 생일 때 쓰기로 마음 먹은 스티븐 히어로(Stephen Hero)란 작품에서 기인한 자신의 미학적인 관점을 다룬 예술가의 초상이란 작품을 출판하려고 했지만 Dana라는 잡지에서 거절당했다. 결국 이 작품은 10년 후에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작품으로 재탄생 된다. 단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스티븐 히어로 사이엔 원고에 꽤 차이가 있다. 이웃에 살던 개신교 소녀에 관한 언급 같은 것들이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선 많이 빠졌다고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스티븐 디덜러스(Stephen Dedalus)인데 디덜러스란 이름은 그리스 신화다이달로스에서 따온 것이다. (참고로 아일랜드 사람이 듣기엔 꽤나 괴악한 성인 듯하다.)

참고로 평생 떠돌이로 살았던 것 치고 가정사는 의외로 순탄하다. 노라 바나클이란 여인과 뜨거운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해서 자식들도 키우고, 딸의 정신병 문제로 갈등한 것 빼곤 금슬도 좋았다. 그런데 연애하는 중에도 대문호의 재능은 어디 가지 않는지, 연애 편지에서 나오는 상당히 노골적인 성적 묘사와 음담패설이 아주 걸작이다. 이걸 읽으면서도 또 그걸 좋다고 받아 준 노라 바나클 조이스도 보통 여인은 아니었는지, 세간에서 자기 남편에 대해 운운할 때마다 글쎄 나는 그 이가 사실 글쟁이보다 음악가였으면 더 좋을 거 같은데라며 쿨하게 반응하곤 했다. 제임스 조이스의 연애편지는 그 내용의 솔직함(...)뿐만 아니라 이 양반이 얼마나 신사였는지, 그 안목의 품격과 격조를 보여주는 자료로 활발한 연구의 대상이다.

[조이스의 연애 편지 중 일부. 성적 묘사 주의!]
>(…) 그대여, 그대여, 오늘 밤 나는 내 옆에 있어야 했을 그대의 몸에 참으로 격렬한 욕정을 느끼고 있소. 그대가 내 앞에 서서 골웨이의 빨간머리 양아치 중 절반이 그대와 떡을 쳐본 적이 있다고 고백해도 나는 욕정으로 그대에게 변함없이 달려갈 것이오.
(…) Darling, darling, tonight I have such a wild lust for your body that if you were here beside me and even if you told me with your own lips that half the red-headed louts of Galway had had a fuck at you before me I would still rush at you with desire.
더블린의 퐁테노이 스트리트 44번지에서 보낸 편지, 1909년 12월 3일 자.
나의 사랑하는 걸레년 노라에게,(My sweet little whorish Nora,)
이 음탕한 계집, 네가 말한 대로 너의 편지를 읽으며 두 발이나 뺐어(I did as you told me, you dirty little girl, and pulled myself off twice when I read your letter). 당신도 후장으로 따먹히는 걸 좋아한다니 매우 기뻐. 당신 뒷구멍을 밤새도록 따먹었던 그 밤이 생각나네. 자기랑 했던 섹스 중 가장 화끈한 떡질이었을 거야… 내가 허리춤을 움직이자마자 너의 부끄러움도 모르는 혀는 당신 입술 사이로 삐져나오며, 내가 힘을 조금 더 주면 당신은 뒷구멍으로 방귀를 쏴대곤 했지. 오, 내 사랑, 굵게 나오는 강풍, 길게 뽀오옹 하며 나오는 놈, 기쁜 듯 여러 번 뽕뽕거리며 나오는 녀석, 그날 밤 당신의 엉덩이는 방귀로 가득 차 있었고 난 그 방귀들이 너의 똥구멍에서 기나긴 솟구침이 될 때까지 너를 따먹었지. 박을 때마다 방귀를 쏴대는 여인을 따먹는 건 너무도 아름다운 일이야. 노라, 난 어디를 가던 당신의 방귀를 마음속에서 잊을 수가 없어… 난 그 냄새까지 잘 알 수 있도록 당신이 내 얼굴에 대고 방귀를 마구 쏴줬으면 좋겠어… (중략)
이제 그만 줄일게. 잘 자, 나의 달콤한 방귀쟁이, 나의 음탕한 떡종달새 노라여. 앞으로도 당신에 대한 달콤하고 지저분한 사실들을 얘기해줘.
더블린의 퐁테노이 스트리트 44번지에서 보낸 편지, 1909년 12월 8일 자. 출처 밎 원문
내 남편이 천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이의 생각이 아주 음란하다는 건 확실하죠.
I don't know whether my husband is a genius or not, but he certainly has a dirty mind.
노라 바너클 조이스
1904년 6월 16일 노라 바너클과 싸돌아 다닌 경험은 뒷날 율리시스를 집필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이 여자와 만난 뒤 조이스는 이른바 자기유배(self-exile)의 길을 떠나 스위스취리히 등에서 산다. 거기서 영국인의 도움을 받아 벌리츠 어학원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이후 그는 일이 꼬여서 오스트리아풀라 시로 넘어가서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 장교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6]트리에스테[7]로 갔다가 로마로 갔다가 한다. 그 와중에 자식을 낳기도 하고 동생(스타니슬라오)을 불러 일자리를 주기도 한다. 이 즈음 트리에스테에서 만난 것이 이탈로 스베보(Italo Svevo)라는 이탈리아인 중년남이었는데, 스베보는 젊을 적 소설을 발표했으나 주목을 못 받아 집필을 접고 장인의 사업을 이어받고 있었는데, 사업상 조이스를 영어 가정교사로 고용했다. 스베보는 조이스와의 교류에서 다시 용기를 얻어 다시 글을 쓰게 되었고, 이탈리아 심리소설의 선구자가 된다.

1909년에는 다시 아일랜드를 방문하여 더블린 사람들을 출판하기 위한 작업을 한다. 1912년에 이 소설을 다시 출판하려고 아일랜드를 찾는데 이번에도 일이 파토나자 그 후 그는 평생 더블린을 찾지 않았다. 아버지가 한 번 오라고 해도 안 왔다고 한다. 같은 아일랜드인이자 시인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불러도 당연히 안 갔다.

이후 조이스는 다시 트리에스테로 돌아갔는데 1915년에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자기 제자들이 다 군대로 차출되자 취리히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1920년에는 에즈라 파운드의 초청으로 파리를 방문했고 20년을 거기서 살았다. 여기서 율리시스를 집필했다. 이 시절부터 조이스의 눈에 문제가 생겼고 루이 보르슈에게 아홉 번이나 수술을 받았다.[8] 1929년 보르슈가 죽자 스위스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 딸인 루시아도 정신분열로 치료를 받았는데 의사가 칼 융이었다. 융은 뒤에 율리시스를 읽더니 아비나 딸내미나 둘 다 정신 분열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뒤 파리에서 마리아 졸라와 유진 졸라 부부의 간호를 받으며 피네간의 경야를 썼다. 1940년에는 나치프랑스 침공을 피해 취리히로 옮겼다. 1941년 1월 11일에는 천공궤양으로 수술을 받았는데 당일엔 회복했다가 다음 날 상태가 악화되면서 코마 상태가 되어 1월 13일 2시 15분에 사망했다. 의식을 잃기 직전인 새벽 2시에 조이스는 간호사에게 아내와 아들을 불러달라고 했는데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다고 한다.

장례식은 취리히에서 열렸는데 아일랜드 대사가 스위스에 둘[9]이나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일랜드 정부는 조이스의 유해 일부를 본국으로 보내려고 한 노라의 제안을 거부하기도 했다.

그의 종교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그의 초기 작품에는 종교적, 민족적 색채를 탈피하려는 예술가적인 면모가 많이 드러나 그가 무신론자였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에 그가 성령 주간 등에 교회에 모습을 내비친 적이 있다는 주변인들의 증언도 있긴 하다. 자세한 내용은 영어판 위키백과의 James Joyce 문서를 참조하는 게 나을 듯 한데 대개 이런 부류의 견해에는 왜곡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가려서 읽는 게 좋을 것이다.

헤밍웨이에 따르면 낭비벽이 굉장히 심했다고한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의 주인인 실비아 비치의 극진한 금전적 지원에도 낭비벽 때문에 항상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1917년에 눈 수술을 받아서 이후 평생동안 안대를 착용해야 했으며 이후 눈 수술은 모두 아홉 차례나 받았다. ##

3. 작품 성향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불어닥친 유럽의 내셔널리즘 열풍이나 혹은 그에 반대 기류로 형성된 사해동포주의 류의 관념에 조이스는 굉장히 회의적이었다. 어떤 사상에 얽매이길 굉장히 싫어했는데 덕분에 당대 모더니스트들의 기본 소양이었던 반유대주의는 물론 그의 글벗 다수가 알게 모르게 저질렀던 파시즘 예찬과도 일절 관련이 없으며 아일랜드 출신으로 중하류층의 삶을 소재로 했던 행적에서 알 수 있듯 엘리트주의, 계급주의와도 거리가 멀어서 후대의 독자들은 난해하다는 점만 빼면 아무런 껄끄러움 없이 그의 작품들을 읽을 수 있다. 물론 난해하다는 점 하나로 다른 걸 모두 씹어먹는다

4. 작품 목록

  • 사후출판 작품들
    • 스티븐 히어로 - 후에 젊은 예술가의 초상으로 고쳐 출판되었으며 일부는 소실되었다고 한다.
    • 자코모 조이스(Giacomo Joyce) -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출판되기 직전 즈음에 쓰인 작품이다. 조이스가 취리히로 이사갈 때 원고를 남기고 갔다고 한다. 후속작품인 망명자들과 율리시스의 구절이 적혀 있다고 한다. 제목의 자코모는 카사노바의 성씨와 같다.
    • 고양이와 악마 - 제임스 조이스가 그의 손자 스티븐 조이스를 위해 쓴 동화이다. 시공사판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번역한 장경렬 교수의 번역판이 존재한다.
    • 코펜하겐의 고양이 - 이것 또한 손자를 위해 쓴 동화이다.
    • 핀의 호텔(Finn's Hotel) - 피네간의 경야의 초안으로 추정되는 작품.
    • 기타 평론들과 편지들 - 문학 비평가이자 작가 리처드 엘먼의 제임스 조이스 전기에 포함되었으며 김종건 교수의 조이스 전집에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5. 문화적 영향

  • 영문학계에서 아주 위대한 작가 중 한 사람. 영문학에 정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율리시스는 읽은 사람보다 이 책으로 논문을 쓴 사람이 더 많을 거란 농담이 돌기도 한다. 이 말은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연구자들도 많았다는 뜻의 농담이기도 하다. (사실 이런 표현은 잘 알려진 고전 서적에는 한번씩 붙는 농담이긴 하다.) 저명한 문학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 세 사람으로 프루스트, 카프카와 더불어 제임스 조이스를 꼽았다.
  • 대서양 서쪽에서 최고로 꼽히는 위대한 개츠비를 쓴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피츠제럴드의 첫 장편소설로맨틱 에고이스트교양소설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꽤 영향을 받았다. 다만 그 이후로는 피츠제럴드가 플래퍼 등을 다루는 등 완전히 현대적인 느낌으로 가는 바람에 갈리기에 두 사람의 작품은 전혀 다르다.
  • 워낙에 글이 뛰어나다보니 인용도 자주 되는 편이다. 영화 디파티드에서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나온 Non Serviam이란 말이 인용되기도 했다. 라틴어로 뜻은 나는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I will not serve)인데 원래는 루시퍼가 했다는 말로 종교적으로 불복종한다는 의미로 많이 쓰였는데 인간의 불굴의 의지를 가리키는 말로 조이스가 재해석했다.
  • 현대 물리학에서 다루는 소립자 중 하나인 쿼크피네간의 경야에 나오는 단어에서 따온 용어이다.
  • 전설적인 미디어 학자인 마셜 맥루한[10]의 저작물에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들이 종종 인용된다. 특히 그를 대표하는 작품인 <미디어의 이해:인간의 확장>에서 율리시스피네간의 경야를 잊혀질 만할 때마다 주요 대목들을 언급하며 설명한다.
  • 한편 그의 작품은 손자 스티븐 조이스가 악명을 얻을 정도로 저작권을 철저히 보호했다. 손자 스티븐은 제임스 조이스의 시에도 등장했으며, 2020년 1월 타계했다. # 물론 그가 보호한 것은 저작권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의 사생활도 보호했는데, 상기한 연애편지의 상태를 보면 아무래도 조부모의 이미지를 지키고 싶었던 듯하다.

[1] 1884년 출생, 1951년 사망. 법적인 결혼은 1931년이나 1904년부터 동거하며 사실혼의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동거하는 동안 둘 사이 자식도 가졌다. 법적인 혼인이 늦었던 이유는 제임스 조이스가 결혼 제도 자체에 대해 회의적이었기 때문.[2] 가수였다.[3] 댄서 였다.[4] 당시 아일랜드는 영국의 영토였고 그때 영국의 유행이었던 세일러복을 입었다.[5] 파넬에 관한 언급은 그의 자전적 작품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가족 식사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파넬을 추모하는 데 비해 단티는 파넬이 불륜을 저질렀다며 비난한다. 파넬은 '아일랜드 무관의 왕(the uncrowned king of Ireland)'이라 불릴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당시 아일랜드의 가톨릭계는 친영적인 성향이 강했고 그의 장례식은 가톨릭의 방해로 아일랜드에서 치러지지 못 했다.[6] 오늘날 풀라에서는 조이스가 머물던 술집과 카페 등을 관광상품으로 잘 써먹고 있다. 하지만 막상 조이스는 생전에 풀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오스트리아 해군의 심장이었던 풀라는 사방팔방에 해군 소속 공장들과 함선들, 그리고 군인들로 가득찬 삭막하기 짝이 없는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는 풀라를 바다의 시베리아라 불렀고, 이탈리아로 넘어갈 기회를 고대했다.[7] 현재는 이탈리아령이다.[8] 이 시기에 관련된 대표적인 일화로는 우유 배달원 유니폼을 입고 글을 썼다는 것이 있다. 흰색 유니폼에 햇빛이 반사돼서 눈이 더 잘 보일 것 같아 그랬다고(...) 그 밖에 하루에 일곱 단어밖에 못 썼다고 우울해해자 친구가 "그래도 자네 입장에서는 많이 쓴 편이니까 괜찮지 않은가?" 하고 위로했다고 한다. 그러자 조이스는 7개의 단어 순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라고 친구 앞에서 엎드려 울었다고…[9] 정확히 말하면 주스위스 대사와 주국제연맹 대사[10] 1911년 ~ 1980. 캐나다의 영문학자, 미디어이론가, 문화, 문예비평가, 커뮤니케이션학자. 현대 미디어이론을 홀로 일구어낸 거목. 커뮤니케이션학의 아버지. 뿐만 아니라 언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인터넷이 발명되기 무려 30년 전에 이미 월드와이드웹의 출현을 예측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