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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공화국의 거두 4인,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리지선, 천밍수, 장광나이, 차이팅카이 |
1. 개요
1933년 11월 20일, 전 행정원 부원장 천밍수와 그의 측근인 19로군의 지휘관 차이팅카이, 복건성장 장광나이가 처우에 불만을 품고 일본 제국 및 중국 공산당과 연합하여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3당을 표방하며 장제스에 대항하여 일으킨 군사반란이다. 하지만 단 53일만에 진압당하고 만다.2. 배경
1932년 1월의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차이팅카이가 지휘하던 19로군은 일본군에 맞선 영웅적인 분투를 하여 중국은 물론, 전 세계 각국의 화교 단체에서 구국의 영웅으로 드높게 칭송받았으나 상하이 사변이 끝난 이후 초공작전을 돕기 위해 푸젠으로 주둔지를 옮겼다. 이에 19로군 지휘관들은 낙후된 지역에 배치되어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하게 된 사실에 대해서 크게 불만을 품고 장제스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다. 불과 1931년의 1차 양광사변 때까지만 해도 19로군은 장제스에 대한 충성을 바쳤지만 당시 복잡한 군벌정세상 장제스가 이들이 만족할만큼 보상해준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들 19로군은 복건성에서 매우 강력한 배일정책을 실시하며 지지세력을 결집하였다.광저우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의 합작 이후 교통부장 겸 경호 위수사령에 취임하여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활약했던 천밍수는 수뢰사건에 연루되어 사퇴하였고 잠시 유럽 여행을 하며 몸을 피하였는데 1932년 1월 장제스를 대신했던 쑨커가 도무지 장제스의 빈자리를 메우지 못하고 gg를 치고 물러나면서 월계가 중심이 되어 수립했던 쑨커 내각은 한달만에 붕괴했다. 이후 장제스가 행정원장 왕징웨이와 합작함으로 군사위원장에 취임하여 다시 국가지도부에 복귀하였다.[1] 이에 천밍수는 유럽에서 귀국, 홍콩에 체류하며 전 광동성 정부주석 리지선, 공산당 등과 접촉하며 장제스를 타도할 반중앙 움직임을 획책하고 있었다. 그러한 천밍수의 레이더망에 포착된 것이 바로 광동파의 무력이자 장제스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던 19로군이었다. 장광나이, 차이팅카이 등은 천밍수의 회유에 넘어가 공산당과 연개하여 구체적인 반중앙 움직임에 나서기에 이르게 된다. 이들의 행보는 이미 11월 15일자 동아일보에 실릴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당시 신문기사
이렇게 반장제스 분위기가 전국에 무르익었기 때문에 천밍수, 리지선, 장광나이, 차이팅카이, 천유런은 푸젠성 푸저우시에서 정부를 선포하게 된다. 이들은 전국적인 반일-반장 반위기를 타면 정부선포는 성공할 만한 도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대외정책으로 반일을 내세웠으며, 공산당과의 연합도 모색하여 공산당의 주장인 토지개혁 및 공업-광업의 국유화를 정책으로 내세웠다.
3. 전개
3.1. 공산당과 19로군의 접촉
한편 당시 장제스는 공산당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한 제5차 초공작전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천밍수와 결탁한 장광나이, 차이팅카이는 성동격서를 노리고 차이팅카이의 비서 서명홍에게 리지선, 천밍수, 장광나이, 차이팅카이가 연서한 편지를 주어 마오쩌둥과 주더와 접촉하게 했다. 장제스의 차원이 다른 공격에 얻어 터지고 있던 공산당은 즉각 반색, 10월 26일에 천밍수와 '반일반장 기초적 협정'이라는 초보협정을 체결하고 '즉시 쌍방의 군사행동을 정지하고 잠정 경계선을 정한 다음에 가급적 빨리 항일반장의 구체적 작전협정을 결정한다'는 합의를 도출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드러나게 되지만 공산당은 이들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고 이들에게 도움을 준 것도 사실상 없게 된다.당시 차이팅카이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견해는 다음과 같았다. 우선 보구는 유일하게 차이팅카이에 대해서 새로운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이라는 목표와 항일 전위군 결성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면서 차이팅카이가 주저하건 안하든 전면적인 군사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상하이 서기국은 차이팅카이는 신용할 수 없는 인물이며 그는 반공주의 3당의 인물이며 그의 복건사변 역시 군국주의자들의 내분에 불과하다고 깠다.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이 내전을 이용하면 그만이라는 것이었다. 코민테른 요원들도 이 주장에 찬성했고 마오쩌둥은 "반동적 지배계급의 일부가 다가오는 자신의 몰락을 새로운 시위행동으로서 대중의 눈을 딴데로 돌리려는 시도"라고 비난하면서 19로군과 인민정부를 도울 이유가 없다고 했다. 마오쩌둥은 복건정부가 소극적, 우유부단하다고 비난하고 19로군이 먼저 복건 북부의 장제스 군대를 치기 전까지 지원할 수는 없다고 나왔다.[2]
3.2. 중화공화국 선포
인민대표대회의 모습. 차이팅카이와 장광나이의 모습이 보인다. |
1933년 11월 20일 천밍수는 푸저우 공공체육관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장제스 축출과 노동 인민 정부의 수립'을 호소한 다음에 중화공화국 인민정부 성립을 선포하며 푸저우를 수도로 삼고 전국 25개 성, 시에서 100인의 대표를 모아 인민대표대회를 소집했다. 이 대회에서 이들은 난징 국민정부의 부인, 파시스트 국민정부 타도, 제1차 전국인민대표대회 구성을 통한 제헌, 국시 해결을 주장했다. 중화공화국 원년이라는 나름의 연호도 정했다. 광동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후한민이 정부 대표로 옹립되었고 쑹칭링은 총리로 선출되었는데 리지선이 대리하여 주석의 자리에 올랐다. 이외에 천밍수, 차이팅카이, 쑹칭링, 펑위샹, 후한민, 리쭝런, 쉬첸, 천유런 등 11인을 정부위원에 추대했다. 이 중화공화국에 가담한 세력은 천밍수 휘하의 독서잡지사, 고군사, 복건성의 간부들, 일부 펑위샹 패잔병들, 국민당 내부의 좌파, 3당파, 사민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들이었는데 천밍수는 이들을 규합하여 생산인민당을 조직하고 정치범 석방, 항일 반제국주의 단체 지원, 언론, 출판, 결사, 집회, 파업의 자유를 표방하였다. 1927년 이래로 정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던 쉬첸도 갑자기 나타나 여기에 참여했으며 국무총리 대리, 해군총장 등을 지낸 싸전빙은 복건성 인민정부 주석에 추대되었다.
이들은 또한 덴마크 코펜하겐에 체류 중이던 장쉐량에게 지지를 촉구하였다. 이는 장쉐량의 귀추에 따라 십여만 동북군의 행보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장제스 역시 장쉐량에게 귀국을 요청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하지만 장쉐량이 귀국한 것은 1934년 1월이 되어서 였고 그는 갈레아초 치아노 등과 교류하면서 파시스트(...)가 되어 있었다.
중화공화국의 국기 |
복건정부는 공산당의 1933년 1월 17일 선언에 호응, 11월 중순에 두 사람의 사절을 파견하여 11월 27일엔 중화소비에트공화국과 민(푸젠)서변계 및 교통조약을 체결하여 쌍방의 군대가 진주할 수 없는 중립구를 설정하고 교통, 통상문제를 규저했다. 이로 인해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은 국민당의 경제봉쇄로부터 한시름을 덜 수 있었다. 중국 공산당도 처음에는 이들의 움직임에 호응하여 11월 24일 저우언라이는 보구, 오토 브라운 등에게 전보를 쳐서 "현재 장제스가 중앙 근거지 공격을 뒤로 미루고 일부 병력을 푸젠에로 돌려 푸젠 인민정부를 진압하려 하고 있다. 그러니 홍군 제3, 제5군단은 푸젠으로 움직이는 장제스의 부대를 측면 공격해야 한다."라고 주장했고 보구도 19로군을 원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주장이 엇갈리는데 오토 브라운은 마오쩌둥이 차이팅카이를 지원하는데 가장 반대한 인물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기록에는 마오쩌둥 역시 임시당중앙에 장제스의 포위선을 돌파해 공세 작전을 취할 것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당중앙이 근거지를 상실할 것을 두려워하여 장제스의 후방을 공격하는 작전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화공화국은 12월 11일 국민당과의 결별을 선포했다. 한편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상당한 전적을 세운 것을 보고 입맛을 다시고 있던 타이완 주둔 일본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는 자신들도 실적을 쌓기 위해 푸젠을 찔러보고 있었다. 이들은 이미 광저우 주재 일본 영사를 통해 천밍수와 접촉하고 있었고 항일배화 운동의 소멸 보장, 일본인과 만주국인의 생명재산과 상업경영을 위한 주거의 절대안전과 자유 보장, 장제스가 미국과 합의한 복건 비행장 건설 백지화를 조건으로 3백만 위안의 활동비를 천밍수에게 지급했다. 난징 국민정부가 이러한 정보를 입수하여 일본에 항의하자 일본은 중화공화국과의 접촉은 인정했지만 3백만 위안 지원은 부인했다. 중화공화국 세력은 이 중 90만 위안을 공산당에 지급한다는 안을 결정했다.
중화공화국의 지도. |
중화공화국은 리쭝런, 바이충시, 천지탕 등의 서남정무위원회와 후한민 등의 반장 세력들의 호응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후한민, 리쭝런, 바이충시 등은 연명으로 전문을 보내 복건정부를 성토했다.
3.3. 장제스의 친정(親征)과 복건정부의 붕괴
반란진압 이후 정부군을 사열하는 장제스. |
당시 중화공화국은 19로군 휘하 5개 사단, 4만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주력부대를 푸젠 북부에 배치했으며 일부가 푸저우에 있었다. 장제스는 자신이 직접 진압에 나서는 한편 11월 21일 2로군, 4로군, 5로군 휘하 11개 사단에 출정을 명령했고 이들을 2로군에 배속시켰다. 11월 23일 오전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천밍수, 리지선, 장광나이, 차이팅카이 등 5명을 내우외환의 국난을 불러와 인민을 곤고하게 한 죄를 물어 국민당에서 '영원히' 제명하고 반역죄로 엄벌에 처하게 하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국민당은 일본에 19로군을 돕지 말 것을 강력히 요구했고 자신들이 이들의 봉기를 도운 것이 밝혀질까 우려했던 일본 외무성은 "복건사변은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결코 원조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또 일본인이 그 일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주의하겠다."는 약속을 해주었다. 이 때문에 일본은 정말로 복건사변에 별 관여를 안하게 됐다(...). 다만 일본으로부터 91식 전투기 12대를 도입하긴 했는데 중화공화국이 제대로 저항도 못하면서 나중에 죄다 장제스의 손에 들어왔고 중일전쟁 때까지 요긴하게 쓰이게 된다.#
장제스는 초공작전의 지휘를 구주퉁에 맡긴 후 자신이 직접 복건사변의 진압에 나섰다. 11월 29일 난징 국민정부가 보낸 비행기들이 귀순을 종용하는 전단을 뿌린 다음에 일제히 토벌을 개시했다. 장제스의 요술방망이와도 같은 공군력의 존재에 19로군은 공황상태에 빠졌고 장제스가 공산당을 족치기 위해 열심히 닦아놓은 도로들은 19로군을 족치는데도 매우 쓸모가 있었다. 정부군은 신속히 장쑤의 금계, 남성, 임천 일대를 통과하여 푸젠 북부에 진입했다. 당황한 인민정부 요인들은 공산당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공산당은 만프레트 슈테른 코민테른 수석군사대표를 비롯한 모험주의적 인물들이 난창, 창사로 이르는 대규모 돌파작전을 주장하고 보구와 오토 브라운이 이에 반대하여 복건 북부 작전을 주장하는 등 노선 갈등에 휩싸여 있었다. 오토 브라운은 독단적으로 홍군 7개 사단을 복건에 진격시키기로 결정했다. 정치국과 군사위원회도 이에 만장일치로 동의하였고 홍군 1군과 3군을 남평으로 파견했다.[3] 이는 홍군이 확보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영토, 인력, 물자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홍군은 복건에서 상당한 영토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으나 19로군의 붕괴가 생각보다 너무나 빨랐기 때문에 싸움의 대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으며 전진 범위도 그리 넓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은 중화공화국이 그저 군벌할거에 불과하며 항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난, 푸저우의 중공대표를 철수시켰고 12월 12일에는 오히려 천밍수를 반혁명 개량주의자라고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복건정부는 인민정부도 아니고 혁명정부도 아니며 단지 인민을 기만하는 새로운 유희일 뿐이다. 혁명과 반혁명의 중간에 서서 제3의 길을 찾으려 하는 이런 분자는 필연적으로 무서운 실패를 맛보게 될 것이다."
이후로도 공산당은 푸젠 정부를 돕기는 커녕, 중간파들이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성토하며 오히려 적대시했고 결국 19로군은 정부군의 공세에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잇달아 무너졌고 정부군은 푸젠에 순조롭게 진입, 1934년 1월 1일에 총공세를 시작했다. 1월 5일 5로군 9종대 지휘관 유화정이 4사단, 36사단, 56사단을 지휘하여 푸저우로 들어가는 요충지인 남평을 점령했고 11월 7일 4종대 지휘관 이언년이 3사단과 9사단을 이끌고 수구를 점령하고 푸저우 80킬로미터 밖의 지점까지 진출했다. 유일하게 푸저우 서북쪽 100킬로미터 지점의 고전에서 조일견의 3단이 지형을 이용하여 치열하게 저항했으나 2종대 왕경구가 이끄는 87사단과 88사단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차이팅카이가 직접 원군을 이끌고 고전을 지키러 달려갔지만 남평과 수구의 함락에 완전히 고립된 것을 안 조일견도 1월 12일에 차이팅카이를 기다리지 못하고 항복했다. 결국 1월 13일 차이팅카이는 민강을 도하하여 도주했다. 이때 복건정부가 갈 때가 되었단 것을 안 푸젠의 해군이 편을 바꾸어 푸저우를 함락시켰고 이어 하문도 점령당했다. 반란군 지휘관들은 앞을 다투어 투항하였고 쑹메이링이 협상을 하기 위해 도착하자 하라는 협상은 안하고 항복을 하는 등(...) 19로군은 허망하게 무너져내렸다.
4. 결말
1월 초 복건정부의 수도였던 푸저우시는 남경정부군이 접수했으며, 복건정부와 19로군은 취안저우로 천도했으나, 이곳도 21일 모두 함락되었다.천밍수, 차이팅카이, 리지선, 장광나이 등은 모두 홍콩으로 도주했는데 이중 차이팅카이는 미국으로, 천밍수는 다시 유럽으로 달아났다. 미국으로 갔던 차이팅카이는 1차 상하이 사변의 영웅이었던지라 미국 화교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잘 지냈고 훗날 공산당에 합류했다. 하지만 도피하지 못해 체포된 고위인사들은 차이팅카이의 비서인 서명홍처럼 반란죄로 처형되었다.
19로군은 7로군으로 개편되었고 주요 간부는 모두 교체되어 장제스 직계인 황포계가 장악하였다. 또한 옛 19로군 병력 대부분은 후난성으로 전출되어 대장정중인 홍군과 싸우는데 동원되었다. 1500명 정도의 19로군 장병이 홍콩으로 도주했는데 어느 자선가의 도움으로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다. 차이팅카이는 1936년 2차 양광사변이 벌어지자 이에 합류했으나 또 깨졌다(...). 이후 공산당에 합류한다.
사실 이들은 봉기 시작부터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했으므로 패망은 필연적이었다 할 수 있었다. 일단 복건성은 장제스의 권력기반이었던 북쪽의 절강성+강소성+상해시에 비해서 인구 및 경제력은 1/5~/10 정도에 불과했다. 절강+강소와 맞먹는 인구와 경제력을 가진 광동성 및 광서성 군벌의 지지를 받았으면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라이벌 복건성이 주도하는 정부에 광동성 군벌이 참가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여기에 반장항일을 외치면서 일본의 양해를 구하는 등 일관적이지도 못하였고 장제스에 반대하던 국민당 인사들인 후한민과 쑹칭링도 공개성명을 통해 이들을 규탄했다. 틈만나면 난징정부에 반란을 일으키던 광동파조차도 양비론을 펴며 장제스의 사임을 주장했지만, 복건정부 또한 비난했다. 19로군은 자신들의 명망을 믿고 봉기했지만 당시 중국 여론은 일본이라는 큰 적을 앞에 두고 국가분열을 획책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공산당도 복건정부가 자신들의 주장(무조건 항일 및 토지분배, 언론의 자유 및 노동자들에 대한 단체행동권 보장)을 많이 차용하기는 했지만 난창 봉기때 군벌들의 기회주의적 속성에 크게 당한바 있으므로 신중하게 움직였다. 공산당은 복건정부가 군사력면에서나 경제력면에서 난징정부에 맞설만한 역량은 전혀 없기 때문에 어차피 오래 못갈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고, 공산당 자체도 제5차 초공작전 때문에 자체방어에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지원해 주고 싶어도 지원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국공내전 승리 이후엔 이들의 행적에 대해 공산당은 재평가를 해주었다. 중국 공산당 중앙당사연구실이 내놓은 중국 공산당 역사를 보면 이들 푸젠 정부에 대해서 굉장히 우호적으로 평가하며 만약 공산당이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왔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들을 돕기로 결정하지 않은 당시 당중앙을 우회적으로 까고 있다.
복건 정부의 동맹군이 될 수 있었던 공산당도 사정이 좋은 것이 아니라 불과 몇달 후 수도 루이진이 함락되고 대장정의 길에 오르게 된다.
사족으로 이때 중화공화국을 설립한 인사들중 대부분은 중일전쟁 도중 다시 모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민주당파중 하나인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의 시초이다. 이들은 모두 장제스와 철천지 원수들이었기 때문에 장제스를 따라 대만으로 도피하기보다는 공산 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택했다. 한편 복건정부의 외교부장을 맡았던 천유런은 홍콩으로 도피해 있다 1941년 이후 태평양전쟁을 개시한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일본은 왕징웨이 정권의 참여를 종용했으나, 천은 한사코 거부하다가 1944년 왕징웨이 정권하의 상하이에서 사망했다.
5. 매체에서
중국이 건국 60년을 맞아 만든 선전영화 건국대업에서 잠깐 언급되는 마오쩌둥으로부터 북상하여 공산당과 합작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리지선은 정작 마오쩌둥이 자신이 복건사변을 일으켰을때 외면하지 않았냐면서 불신을 표시한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그때는 어쩔수 없었고 지금은 신중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설득에 공산당에 합류한다. 사실 마오쩌둥은 당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주석을 맡고는 있었지만 당권과 군권에서는 밀려나 있었다.6. 관련 문서
- 제1차 초공작전(1930.12.19~1931.1.3)
- 탕산 사건(1931.2.28)
- 제2차 초공작전(1931.4.1~1931.5.31)
- 1차 양광사변(1931.5.27~1932.1.1)
- 나카무라 사건(1931.6.27)
- 만보산 사건(1931.7.1)
- 제3차 초공작전(1931.7.1~1931.9.20)
- 류탸오후 사건(1931.9.18)
- 만주사변(1931.9.18~1932.3.1)
- 3차 장왕합작(1932.1)
- 마옥산 사건(1932.1.18)
- 제1차 상하이 사변(1932.1.28~1932.5.5)
- 송호정전협정(1932.5.5)
- 제4차 초공작전(1932~1933)
- 열하사변(1933)
- 당고정전협정(1933.5.31)
- 폐량개원(1933.4.5)
- 제5차 초공작전(1933.10.16~1934.11.10)
- 대장정(1934~1935)
- 하북 사건(1935.5.2~1935.5.24)
- 장북 사건(1935.6.5)
- 하매 협정(1935.6.10)
- 돈목방교령(1935.6.10)
- 진토 협정(1935.6.27)
- 타다 성명(1935.9.24)
- 히로타 3원칙(1935.10.4)
- 왕징웨이 저격 사건(1935.11.1)
- 법폐개혁(1935.11.4)
- 중미은협정(1935.11.13)
- 기동사변(1935.11.25)
- 12.9 운동(1935.12.9)
- 동정항일(1936)
- 2차 양광사변(1936.6.1)
- 수동사변(1936.11.14)
- 7군자 체포 사건(1936.11.23)
- 서안 사건(1936.12.12)
- 루거우차오 사건(1937.7.7)
7.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 코민테른과 대장정, 오토 브라운, 일월서각.
- 서안사변, 나가노 히로무, 일월서각.
- 중국어 위키피디아 중화공화국 문서
[1] 사실 월계는 장제스 하야 직후부터 재앙적인 상황에 경악하여 장제스의 복귀를 요청하고 있었지만, 1차 양광사변 기간 내내 책임지고 일본 막을 자신 없으면 자신을 도우라고 했던 제의를 씹고 일방적 하야를 요구한 반장파에 대해서 장제스가 협력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2] 이 부분에서 마오쩌둥과 오토 브라운의 증언이 엇갈리는데 마오쩌둥은 자신은 복건사변을 신속히 지원할 것을 주장했지만 교조화된 당중앙과 오토 브라운이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 오토 브라운은 정반대의 진술을 하며 복건을 제때 지원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마오쩌둥의 책임을 거론하고 있다.[3] 장개석비록에 따르면 공산당은 3군, 5군, 7군의 파견을 결정했다가 번복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