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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의당/전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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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국민참여당의 역사2.2. 진보신당의 역사
2.2.1. 민주노동당 분당과 진보신당 창당2.2.2. 진보정당 대통합과 총선2.2.3. 2010년 지방선거 전후2.2.4. 통합 논의2.2.5. 통합 논의 부결
3. 통합진보당 탄생 과정
3.1.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3.2. 국민참여당 논란3.3. 통합할 때까지3.4. 19대 총선 비례대표 부정경선3.5. 유령 당원 의혹
4. 진보정의당

1. 개요

진보정의당의 창당 이전 전신이 된 정당들을 다루는 문서이다. 정의당 항목 분량의 비대로 인해서 문서를 옮기었다.

2. 역사

2.1. 국민참여당의 역사

파일:국민참여당 로고.svg
2010년 6월 2일 전국 동시 지방선거에서 유시민 후보가 47.8%의 득표율로 52.2%의 김문수 당시 경기도지사에게 패했고, 기초단체당에서도 전원 패배한 반면 민주당은 승승장구하여 위치가 상당히 위태로워졌다. 기초의원 전체 당선자 수도 19명으로 진보신당의 25명보다 적다.

숫자나 내용은 나쁘지 않았다. 경기도 도지사에서 유시민 후보는 47.8%로 역대 5번의 선거에서 민주당계 정당이 받은 득표 가운데 2위 였다.[1] 광역비례정당투표 전국 정당지지율은 6.6%로 3%의 진보신당보다 훨씬 높았고, 민노당의 7.2%에 육박했다. 그 자체는 내외로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선전에도 불구하고 유시민 후보의 낙선은 치명적이었다. 유 후보는 민주당 기초단체장(시장, 군수)들이 받은 과반 이상의 총 득표보다 표를 20만표 덜 받았고, 전날 사퇴한 진보신당의 심상정 후보를 찍은 걸로 추정되는 무효표(전 선거보다 3% 많은 18만표 - 4.04%)도 속출했다. 특히 민주당 후보들 보다 덜 받은 표는 4% 격차의 당락을 가를 수준이었다. 민주당계 정당에게 가히 난공불락이었던 경기도에서 승리하여 대권 주자로 발돋움하려는 유 후보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고, 이후 손학규 차기 민주당 대표의 전성시대를 조금 거치며 문재인 후보가 부상하여 결국 야권의 후보가 되었다.

애초에 이념이나 정책, 지역[2]으로 딱히 차별화된 정당이 아니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자 집단에 불과한 국민참여당 자체의 근본적 한계라는 평가가 나왔다. 민주당에 적을 둔 친노 인사인 한명숙 후보가 비록 낙선하긴 했지만 여론조사의 열세를 뒤엎고 유시민 후보보다 더 높은 득표를 올린 점에서도 국민참여당의 존재가치는 퇴색되었다.

국민참여당은 이를 2010년 7월 말의 재보궐선거에서의 선전을 통해 극복하려고 했지만 단일화에서 민주당의 장상 전 총리 서리에게 밀리면서 물거품이 되었다.[3] 결국 국민참여당의 부진은 더욱 짙어졌다.

2011년 3월에는 유시민 전 장관이 대표에 취임했다. 4월 27일 재보궐선거에서는 김해을 선거구에서 국민참여당 이봉수 후보가 민주당 김경수[4] 후보를 물리치고 야권단일후보로 선출되었으며,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의 (전 총리 지명자이자 경남 도지사인) 김태호 후보를 앞서고 있기 때문에 이번 선거에서 국민참여당이 그토록 바라던 원내 진출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았는데...

현실은 시궁창.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이라는 사실 하나만 믿고 너무 안일하게 선거에 임한 결과, 국민참여당의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는 참담한 패배로 끝이 났다. 이로서 원내 진출은 좌절되었고, 유시민 후보는 대권 레이스에서 사실상 탈락하고 그 사이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의 경선 갈등을 조정하던 문재인 전 민정수석이 부상하였다. 유시민 후새드.

결국 유시민 대표는 민주당에 합당을 앞둔 상황에서 활로를 민노당, 진보신당과의 통합인 진보 대통합에서 찾았다. 민노당과의 접촉을 늘리면서 진보신당까지 아우르는 대통합을 추진해서 (과거 진보계 정당에 비판적이었던 그의 모습을 아는) 많은 이들에게 충공깽을 안겨준 상황.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통합 논의만으로도 박터지는 상황에서 별개로 민주노동당과 참여당의 통합 논의도 이루어지면서 이래저래 험난한 상황이 되었다. 여러 진보 정당에서는 (사회당을 포함한) "진보 3당간의 대통합", "참여당을 포함한 대통합", 진보신당과 사회당의 "소통합", 각 정당 독자노선[5] 등의 주장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가운데 진보신당 내의 통합파가 결국 탈당하여 민노당, 국민참여당과 함께 통합을 논의해 11월 안에 결론을 내리겠다는 발표를 했다. 이에 유시민 대표는 11월 안에 국민참여당과의 통합 논의가 결론이 안나면 시민사회세력이 주도하는 "혁신과 통합"에 참여할 뜻을 내비치면서 일종의 간보기 겸 통합 압박을 넣었다. 결국 민노당과 진보신당 탈당파와 함께 통합 진보정당 구성에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국민참여당 내부에서는 야권 소통합에 반발해서 민주당과 혁신과 통합(시민통합당)등이 주도하는 야권 중통합 노선으로 가버린 이들도 일부 있었다.[6] 이병완 전 청와대 비서실장등이 그런 인물들. 결국 전자는 민주통합당, 후자는 통합진보당으로 통합에 각각 성공한 뒤 다시 야권연대를 통해 19대 총선에 임하게 된다.

2.2. 진보신당의 역사

2.2.1. 민주노동당 분당과 진보신당 창당

파일:민주노동당 로고.svg

2006년의 일심회 사건을 계기로 '민주노동당의 주류 세력인 NLPDR(자주파, 민족자주)계통의 종북주의와 부패가 심화되어, 이를 비판'한다며 PD(평등파, 민중민주)계열이 따로 독립해 나와 창당한 당으로 당의 대표 정치인은 노회찬, 심상정 등. 17대 대선의 경선 후보로 나왔던 3명인 권영길, 노회찬, 심상정 중 2명이 이 당에 들어갈 만큼 완전히 민노당이 두 쪽이 났다.

분당에는 표면상으로는 NLPDR계통의 종북주의 논란과 패권주의가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지만, 근 10년동안 NL과 PD의 기싸움이 곯은 대로 곯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NL은 2000년대 초반 이후 당에 대거 입당하면서 지역위원회 선거에서 위원장 선거에 나가려는 PD를 물 먹이거나 가장 나중에 들어와 머릿수로 PD가 있던 위원회를 차지하여[7] 위원회를 자신의 정치 지배 수단으로 삼고 제대로 된 논쟁이 아닌 머릿수로 주요 정책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통과시키려 하는 스탈린주의적 방식을 추구한 바 있다. 이런 방식이 2007년 대선후보 선출 때 결국 NL이 지지했던 권영길이 간발의 차로 당선되는 걸로 이어지자, PD쪽에서 슬슬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분당 직후 당 대의원회의 때, NL계는 자신들의 패권주의적 태도에 대해서 자가반성도 해야 할 판국인데, PD의 종북 언급만 가지고 억울해했다는 평도 있다. 반면 PD 역시 자신들의 계파가 우세인 지역에서 다른 좌파들이 뭔가 하려 하면 머릿수로 견제하고 막았던 유사 행위를 하기도 했으며, 이것은 중앙당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됐다.

위의 같은 표면적 현상이 일어나게 된 더 근본적인 이유중 하나는 이념에 따른 구조의 차이이다. NL의 경우 지도자 일인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구축한다. 강력한 집권층에게 선거로 권력을 위임하고 일단 위임했으면 끝까지 밀어주는 것이 NL의 방식.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당연히 지도부가 거의 모든 권력을 누리게 하므로 많은 병폐를 낳았다. 반면 진보신당 및 다수의 PD계파는 지도부를 정책을 실행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인식하며 중요도가 상대적으로 매우 낮다. 인물보다는 정책이 중요하여 인물이 정책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경우 정책이 우선시된다. 이런 성격상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고 있으나 의견 하나 내는 데 시간을 다 잡아 먹는 상황이 종종 벌어진다(...)

이 당에는 진중권도 당원으로 활동하며, 실제 당 홈페이지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 외 유명인은 언론인 홍세화, 영화감독 박찬욱, 영화배우 문소리 등. 참고로 이들은 모두 이전부터 민주노동당 당원이었으나 분당 과정을 거치며 이적(?)한 케이스.

2.2.2. 진보정당 대통합과 총선

파일:진보신당 로고.svg

진보신당 시절 로고의 바람개비평등(빨간색), 평화(파란색), 생태(초록색), 연대(노란색)를 나타내며, 정당 색깔은 퓨처 레드.

당의 4년 역사를 통틀어 한국사회당과 노선이 비슷해서 합당 이야기가 자주 나왔다. 당이 창당될 때도 한국 사회당을 참여시키려고 했었다가 무산되었다. # 2008년 18대 총선에서 한국사회당은 0.2%를 얻었는데 합당을 했다면 3%를 넘길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후 한국사회당은 등록이 취소되었지만 사회당으로 다시 창당하였고, 다시 합당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민주노동당 측에서 합당을 꺼내들 때마다 "사회당과도 합당 못했다"식으로 계속 나오는 이야기.

근데 웃기는건 사실 한국사회당과 정통 PD, 즉 민노당 시절의 PD는 2000년대 초반까지 서로 열불나게 싸우던 입장이었다는 것. (또 이건 가히 다함께와 일반 PD간의 관계와 비슷했다고 보면 된다.) 사회당은 여러차례의 지도부 교체에 따라 세가 약해지고 사민주의적 경향이 강해지면서,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에서 탈당하고 의석을 중시하는 인물들이 점점 빠져나가면서, 특히 20대 당원들의 지지기반이 여러 공동행동과 사건을 계기로 비슷해지면서 이런 분위기가 이루어진 것이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사태로 인한 촛불시위 이전에는 존재감이 흐릿했지만 이 당에서 운영하는 아프리카 개인방송인 칼라TV로 점점 존재감을 알리고 동시에 인터넷 상에서 세력 확장을 어느 정도는 하였다. 그러나 18대 총선에서 두자릿수 지지율과 비례대표 6번까지 당선, 진보 세력의 결집이라는 목표로 선거에 임했지만, 노회찬, 심상정이 여론조사에서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낙선하고, 정당 득표율이 3%에 미치지 못하면서 한 명의 의석도 확보하지 못했다.

2009년 3월에 당원이었던 프랑스목수정정명훈과의 사건에서 많은 논란을 사기도 했다. 항목 참조. 2009년 4월의 보궐선거에서 울산광역시조승수 의원의 당선으로 처음으로 원내진입에 성공하였다. 물론 겨우 1명으로 정치적 발언력은 민주노동당에 못미치는 수준. 이러다보니 묻혀가는 경향이 강했다. 지지율은 2009년 5월 19일 기준 2.1%. 전월대비 1%가량 하락하긴 했지만 그나마 창조한국당을 추월했다. 근데 원인은 사실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의 갈짓자 행보에 따른 것이다.

2010년 연평도 포격전에서 대북규탄성명에서 민노당은 기권한 반면, 조승수만 "취지는 찬성하나.."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정도의 존재감을 가졌다. 2011년에 대뷔한 김선동 의원이 최루탄을 국회에 날리는 등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것에 비하면 훨씬 약한 이미지.

2.2.3. 2010년 지방선거 전후

2010년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노총 등에서 각종 통합 이야기가 나돌았지만 전반적으로 정서가 곱지 못했다. 제대로 싸워 이혼한 부부보고 재결합하라는 것에 대한 반응이라고나 할까. 자신들과 기치가 다른 민주당과의 연대에 대한 각 당의 갈등도 있는 상황에서 서로간의 모든 잘잘못을 덮고 서로가 불리하게 통합을 하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특히 진보신당 입장에선 사실상 합병당해야 할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에서도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단독 후보 발의안이 부정되고 선거시 진보대통합을 추진하기로 결정되었고, 이 상황에서 노회찬 대표가 2009년 12월 16일, 통합정당은 선거 이후에 논의하더라도 선거연합은 "민주당은 뺀 진보대연합"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은 크게 반발했다. PD 계통에서는 민주당계 정당인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이 없는 제대로 된 진보연합을 하라고 박수를 보냈다. 반면 민주노동당에서는 이 쪽에서도 통합정당 논의를 왜 선거 이후로 하냐고 노회찬을 까고 있다. 결국 노회찬은 민주계와 민노계 양쪽 모두에게 비판받게 되었고, 5당 + 4시민단체의 회의의 파행 끝에 선거연대는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치러지게 되었다.

당 대표인 노회찬이 조선일보 창간 90주년 행사에 참석해 와인을 마시고 조선일보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서 대차게 까였다. "품질이 좋다"라는 등의 평이었다. [8] 하지만 그 때 진보신당 당원들은 정작 그 문제보다 5+4 합의문을 당원 토론 없이 작성한 점에 대해 성토하고 있었다. 후에 최종합의문이 아니라 중간합의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결국 일부 지역후보들을 제외하고는 선거연대가 실패한 상황에서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치러졌다. 이 선거에서 진보신당은 광역의원 3명과 기초의원 22명을 배출했다. 하지만 경기도 지사로 출마했던 심상정 후보는 선거 하루 전에 유시민 후보를 지지하고 사퇴하였으며, 서울 시장으로 출마했던 노회찬 후보는 선거를 완주하기는 했으나 3.3%의 저조한 득표를 했을 뿐이라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물론 사표론 등으로 인해 한명숙 후보로 빠진 표를 감안해야겠지만. 울산광역시, 경상남도, 광주광역시 등에서도 표의 분열에 따라 민주노동당 후보는 낙선하고, 진보신당 후보는 대패하는 현상들이 보여졌다.

한편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한명숙 민주당 후보가 예상밖의 선전으로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를 거의 따라잡았으나 단일화를 거부한 노회찬 때문에 오세훈의 재선을 막지 못했다며 그야말로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9] 사실 이 자체는 단일화 협상에 제대로 나서지 않은 민주당 측에도 책임이 있었던 사안이지만 진보신당에 대한 여론악화는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 6.2 지방선거를 마지막으로 당은 개판 5분전이 되었다. 노회찬은 퇴임 직전 민주노동당+민주당+국민참여당과 함께 '개혁연대'라는 경남도의회 내 교섭단체를 구성하고 새로 당선된 김두관 경남지사를 격려하는 도정질문을 한 당 소속 경남도의원 2인을 당기위원회에 회부하여 야권연대론자들의 비판을 받은 반면 반면, 심상정은 독자생존파들에게 사쿠라라는 야유를 들었다. 그리고 조승수 후임대표는 '진보대통합'과 독자노선을 사이로 줄타기 중이었다.

2.2.4. 통합 논의

2011년 3월 27일에 열릴 당대회를 앞두고 1월 9일, 지도부가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해 진보신당 당원 5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결과는 지도부를 식겁하게 만들었다. 독자생존론을 부르짖는 여론이 많을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사회당과의 통합(진보소통합)에 18.2%, 사회당과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진보대통합)에 26.6%, 사회당과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비민주 야권통합)과의 통합에 24.2%가 찬성했으며 심지어는 사회당,민주노동당,국민참여당에 민주당과의 통합(야권대통합)에 16.8%가 찬성한다고 나왔을 정도였으며 독자생존론은 10.1%에 불과했다.

이를 계기로 노회찬/심상정/조승수 전현직 대표등은 통합노선으로 선회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2011년 실제 당대회 결과는 민주노동당과의 합당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라는 식으로 결론이 났다. 애초에 대의원 선거에서 통합찬성 당원들은 대부분 출마하지 않은 반면, 통합반대 당원들은 당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대거 출마했기 때문이 크다.

한편 박용진 부대표를 중심으로 한 소위 통합파는 민노당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민단체 및 민주노동당, 민주당 개혁세력까지 포괄하는 통합을 주장하는 모임을 결성하기로 해서 2012년 19대 총선,18대 대선을 앞두고 단일정당에 대한 논의를 펼쳤다.

2.2.5. 통합 논의 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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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당 3인 '노심조'.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이런 상황에서 지도부는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을 추진했다. 5월 27일 1차적으로 종북문제를 이유로 협상이 결렬되었으나#, 6월 1일 새벽까지 계속된 재협상 끝에 합의안이 통과#되었고, 그리고 진보신당 게시판에는 헬게이트가 열리고 말았다. 당원들은 소위 독자파, 통합파 2축으로 나뉘어 제대로 분열해 버린것. 결국 9월 당대회에서 합의안이 통과되지 않는다면 지도부가 총사퇴를 한다는 시각이 관측되었다.

6월 19일 고양시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정책 당대회에서 조승수 대표가 지난 분당 과정에서의 자신의 발언과 행동에 대해 사과를 기초로한 축사를 발표하였다. 22일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도 17대 대선과 분당과정에 대해서 사과를 함으로써 이제 남은 건 26일 임시 당대회에서 합의안이 통과 '되느냐 마느냐'였다.

결국, 2011년 9월 4일 오후 서울 삼전동 송파구민회관에서 당대회를 열어 진보정당 통합 합의안을 표결에 부쳤다. 그 결과 재석 대의원 410명 중 찬성 222명, 반대 188명. 찬성이 정족수인 274명(66.6%.3분의 2)을 넘지못해 통합합의안은 당 대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최종 부결됐다.

앞서 말하듯 대의원에서는 통합반대 후보들이 대거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럼에도 과반이 통합찬성으로 나온것은 노,심,조로 대표되는 기존 대표들의 끊임 없는 설득과 회유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외부적 환경도 진보정당의 생존을 위해서 뭉쳐야한다는 여론이 제법 유리한 형국이었고, 무엇보다 국참당을 배제한다는 것에 어느정도 옮겨간 인원도 있었다.

9월 5일 지도부는 사퇴했고, 새지도부를 뽑기 전인 11월 1일, 조승수 전 대표와, 노회찬,심상정 전 대표 등 통합파가 주축이 되어 새진보 통합연대를 결성하고 진보신당을 탈당했다. 이미 탈당전에도 새진보 통합연대는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10월 26일)에서 박원순 후보의 야권통합 선대위에 참여하기도 했었다.

3. 통합진보당 탄생 과정

3.1.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

시작은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분당 직후, 두개의 진보정당은 4월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역시나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둔다. 민주노동당은 10석에서 5석으로 의석이 반토막나고[10] 진보신당0.1%(2만표)차이로 비례대표의 문턱인 3%을 넘지 못한다.[11] 게다가 당내 두 간판인 노회찬(상대가 노원구병의 홍정욱)과 심상정(고양시 덕양갑)이 민주당과 단일화 불발로 근소한 차이로 낙선. 국회 진출에 실패한다. 만약 이때 조금만 더 성공했으면 민주노동 5 대 진보신당 5(노,심 2석 + 비례 2석 + 조승수 1석)로 의석 유지할 뻔 했는데...

그나마 그 직후의 2008년 촛불집회로 나름 희망을 꿈꿨으나.... [12] 이후 존재감도 희미해져가고, 어쨌거나 분당된 직후부터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진보진영에서는 진보대통합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되었다. 이 당시에는 민주노동당+진보신당+사회당+알파였다.

그러나 이 때는 분당 과정에서의 양당 사이에 앙금이 고스란히 남았다. 그런데 2009년에 노무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서 정국이 갑자기 바뀌었다. 민주당계 정당 친노세력은 노무현 정신 계승을 표방하였고, 이듬해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중심으로 국민참여당이 창당된다.[13]

두번째 문제는 2010년 6.2 지방선거.

민주노동당은 적극적인 야권연대로 좋은 성적을 거두지만[14] 진보신당은 거의 내분 직전의 후폭풍을 겪게 되는데, 심상정이 투표 3일 전 독단적으로 후보사퇴하여 유시민 지지를 표명하여 당기위에 회부될 정도로 사태가 커진다. 이러고서 결과라도 좋으면 욕이라도 안먹는데, 심지어 유시민 낙선![15]게다가 노회찬이 완주한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오세훈 시장이 0.6% 차로, 그것도 새벽 개표 중에 재선에 성공하며 넷상에서의 反 진보신당 정서가 들끓었다. [16]물론 그리고 이로써 진보신당은 거의 존재감 상실에 가까운 위기에 처했고, 비로소 당내에 진보대통합 논의가 불붙....어야 하는데 심상정의 후보사퇴 후폭풍[17]으로 또다시 시간만 흐른다.[18]

3.2. 국민참여당 논란

뭐 어쨌거나 진보신당이 미적댄 것도 있지만, 민주노동당 당권파는 진보신당과의 통합을 그다지바라지 않았다. 합쳐봤자 지지율 별로 안오를 것 같고, 여러 사안에서 부딪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민주노총을 비롯한 진보진영의 압박으로 연석회의가 만들어지고, 분당의 원인인 패권주의 논란부터 논의가 시작된다. 어쨌거나 조승수 의원이 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 종북주의 발언을 사과하고, 권영길 의원이 진보대통합을 위해서 불출마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양당간의 앙금은 어느정도 해소된다.

문제는 합당 이후의 지분인데, 진보신당 독자파가 워낙 강하게 나와서 거의 진보신당이 하자는 대로 되었다. 당세가 9대 1인데, 통합 후 지분은 1대 1.

새로 불거진 문제는 국민참여당 논란이었다. 국민참여당이 5.31합의문에 동의하는 세력이냐는 논란이었다. 애초에 유시민은 FTA에 찬성을 여러번 표했고, 민주당의 3무 1반 정책은 포퓰리즘이며, 반값 등록금보다 부실 사학을 국유화시키는 것이 더 빠르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었다. 이에 유시민은 한미 FTA에 대한 입장에 대한 요구에서는 양심의 자유라고 말했다.

기사 진보신당독자파 쪽에서는 한미 FTA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고,[19] 일각에서는 대선후보를 하려는 술책아니냐는 비난도 일었다. (그러자 포기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창당날 연석회의에서 나온 결과물로 '자본주의 폐해 극복, 재벌 해체, 무상의료, 무상교육, 파견제 철폐, 종속적 한미동맹 해체' 등이 담겨있다. 국민참여당은 중앙위 회의에서 이것은 '들어가기 위한 형식에 불과하고 들어가서 우리 내용을 반영하자'라면서 통과시켰다.

국민참여당이 갑자기 진보정당 쪽으로 붙은 것은 민주당으로 가면 그대로 흡수만 될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하면서 지지율이 급감하고, 독자생존이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국민참여당에 대한 비토는 엄청났다. 8월 28일 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는 당권파가 낸 안을 뒤집고, 진보신당의 동의 없이는 국민참여당은 통합 대상이 아니다라는 결의를 했고, 민주노동당 내의 구도를 생각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에 호응하듯 마침내 진보신당9월 4일 당대회에서 진보대통합을 부결시킨다!!! (응??)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가 통합의 불씨를 살려보고자 탈당한다.[20] 이에 민주노동당 당권파는 다소간의 무리를 해가며 9월 25일 당대회에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시도하나, 도리어 부결. [21] 그럼 이제 진보신당하고 다시 합.....칠 줄 알았는데 그게 안되고 걍 독고다이.

3.3. 통합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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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진보신당 탈당파가 구성한 새진보통합연대가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 합의하면서, 민주노동당-국민참여당-새진보통합연대의 3자 원샷 통합이 성사되었다. 민주노동당의 경우엔 다시 통합여부를 설문하자 분위기가 또 바뀌었다고 한다. 이는 민주통합당이나 기타 여러 시점에서 당의 의석, 즉 원내 교섭단체를 지키기 어렵다는 우려가 높아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여전히 배타적 지지를 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나마 표 몰아주기라도 시전하려고 했지만 합당을 2012년 2월 22일날 계획했던 진보신당과 사회당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즉, 민주노총 등의 경우는 여전히 갈팡질팡중이란 이야기.[22] 이런 급변은 진보신당 탈당파 역시 비슷했는데, 진보신당 탈당파의 급작스러운 입장변화는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0807.html를 참고. 국민참여당이야 원래 통합하려고 했고...

각 당의 지분은 민주노동당 55%, 국민참여당 30%, 새진보통합연대 15%로 합의되었고,[23] 기타 지역구 후보 조정 문제 등의 협의를 거쳐, 창당에 이른다. 당명으로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 진보노동당이 후보로 올랐고, 여론조사 등을 통해 통합진보당으로 결정되었다. 당명에 대한 여론은 통합진보당이 대세였고, 국민참여당 내에서는 진보정의당[24]이, 민주노동당 내에서는 진보노동당이 비교적 다득표를 하였다.[25] 창당 직전인 11월 말 여론조사에 의하면 정당지지율 14.7%(민주당 29%)로 양호한 출발. 총선 목표는 원내 교섭단체인 20석으로 하고 있다.

3.4. 19대 총선 비례대표 부정경선

3.5. 유령 당원 의혹

유령 당원 의혹은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 당시에도 제기되었던 의혹인데, 6월 말 당 대표를 포함한 당직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또 다시 유령 당원 의혹이 제기되었다.

송재영 통합진보당 군포시 당위원장의 주장에 의하면, 중앙당이 배포한 선거인단 자료를 분석한 결과 경기도 성남시에서만 무려 160명의 당원이 주소지나 연락처가 불분명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특정 주소지에 61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어 확인해 본 결과 그 61명이 거주하고 있다는 곳은 한 중국집으로 드러났다. 가정집도 아닌 음식점에서 61명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그런가 하면, 31명은 도서관에 함께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어떤 사람은 "한 곳에 당원 수십명이 함께 사는 통진당이야말로 진짜 서민정당이다"며 비꼬는 반응이다.

4. 진보정의당

2012년 9월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후의 역사는 해당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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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위인 임창열 도지사는 한나라당의 손학규를 꺾고 당선된 경우이니 사실상 패배한 경우로는 역대 1위였던 셈.[2] 유시민 전 장관은 전 총선(2008년 총선)에서 대구광역시 수성구 을에 출마했으며, 대구 시장으로 출마하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한명숙 전 총리가 나서기 전에는 서울시장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었고, 호사가 사이에서는 유시민 - 서울 시장, 한명숙 - 경기도 지사라는 역공천도 나오고 있던 판이었다. (두 인물의 구 지역구는 모두 경기도 일산이었다.)[3] 장상 후보는 가히 대패. 이때 밀려난 천호선 후보는 다시 은평을에서 통합진보당으로 민주당과 야권연대를 하여 출마, 꽤 선전했으나 역시 이재오 의원에 밀려 간발의 차로 낙선하고 만다.[4] 노무현의 비서관 출신.[5] 다만 이것은 통합 의지가 높았던 민노당이나 사회당과는 달리 진보신당 내에서만 활발했다.[6] 민주당 + 시민통합당이 중통합이라면 야권 전체 대통합 운동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실제로 배우 문성근 씨 등이 주도하긴 했지만 진보정당계의 큰 야유를 받았고 결국 흐지부지되었다.[7] 심지어 이 와중에 용산구등의 위장 전입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8]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날 참석한 민주당 의원들은 묻혔다는 비판도 있다.[9] 실제로 진보신당 홈페이지나 노회찬의 싸이월드에는 엄청난 수의 악플들이 달렸다고 한다.[10] 그나마 강기갑 의원이 사천에서 친이 직계 이방호를 100여표 차이로 제껴서 분위기는 좋았던 듯.[11] 이 당시 성향이 비슷한 사회당이 3만 5천표(0.17%)를 득표했으니 아쉬운 상황. 그야말로 지못미가 되었다고.[12] 사실 재보궐 선거도 진행했지만, 규모가 작아서 의석을 별로 못 얻었다.[13] 슬로건부터가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는'이다.[14] 주 지지 기반인 울산/경남과 더불어 수도권에서 진보정당 최초로 기초자치단체장 2곳을 가져갔다. 뭐 광역자치단체장을 죄다 사퇴하다보니 비례득표는 다소 저조했다. 전국 평균 7.18%[15] 당시 무효표가 18만표나 되었다. 그러나 이 표가 싸그리 다 유시민에게 갔어도 여전히 김문수가 앞섰기에 결과 자체는 바뀌지 않았을 거다. 다만 본래 심상정에게 가려던 무효표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확보해서 격차를 좀 더 줄였다면 유시민은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기에 유시민/국민참여당 지지자들은 아쉬운 마음이 있다고.(당시 선거에서는 김문수 52.2%, 유시민 47.8%, 약 4.4% 차이로 경기도임을 감안하면 상당한 표차로 졌지만 무효표가 모조리 유시민에게 간다는 전제하에 계산해보면 김문수 50.1%,유시민 49.9%, 약 0.2% 차이로 초박빙이었다.[16] 물론 이것이 정당한 것은 아니었다. 서울 경기의 기초단체장(구청장/시장/군수) 선거에서 민주당이 거두었던 우세에 비하면 한명숙과 유시민은 상대의 재선프리미엄을 감안해도 훨씬 못미치는 성과를 거두었던 것도 사실이고, 진보신당을 지지한 3~4%의 국민들의 한표도 소신껏 내린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그해 초 심상정, 노회찬의 지지율은 민주당 후보들을 앞선 10% 초반이었는데 이것이 3%까지 떨어진것은 이른바 '사표심리'의 영향일 것이다. 결국 사퇴를 안해서 졌다는 식의 주장은 무리가 있다.[17] 막판에 개인적 결정으로 사퇴했다. 당내에 사퇴했다고 비난이 들끓었고, 당밖에서는 너무 늦게했다고 난리나고...[18] 사실 진보신당의 전략 자체는 아주 큰 실패는 아니었다. 09년엔 의석을 확보해 (조승수, 울산 북) 원내 정당이 되었으며,(민주노동당과 결렬 직전까지 갔지만 단일화) 이번 선거에서도 광역단체장 덕에 비례에선 3.17%의 득표를 했던 것.(수도권은 민주노동당보다 다소 앞섰다.) 하지만 대내외적인 상황이 꼬이면서 당당하지도, 그렇다고 유연하지도 못한 선거가 되고 말았다.[19] 이에 전농을 방문한 자리에서 사과를 하긴 했다. 뭐 하긴 했어야 한다는 뉘앙스였지만,[20] 부대표를 지냈던 박용진은 혁신과 통합에 합류하여, 이후 민주통합당 창당에 참여한다. 민주통합당 대변인을 지냈고, 최고위원 선거에 출마하나 낙선했다. 보통 진보정당에서 민주당으로 들어간 세력은 지금까지 NLPDR이 대부분이었지만, 박용진을 따라서, 혹은 박용진 이후 PD계열도 민주당에 합류하는 사례가 꽤 됐다. 대표적으로 2012년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의 손학규 캠프의 캐치 프레이즈 저녁이 있는 삶은 손학규 캠프 내 PD출신들의 작품이다.[21] 한미 FTA 추진과 신자유주의 정책 추진으로 참여정부라면 이를 가는 민주노총에서 강력하게 반발했고, 민주노동당 내의 다함께를 비롯한 좌파가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하지만 다함께는 통진당에 남았지.[22] 다만 당시 상황에서 국민참여당과의 합당을 이유로 민주노동당에서 탈당한 당원은 거의 없었다.[23] 그러나 당원수나 규모로 보나 민주노동당계가 최소 80%이상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24] 이후 (참여계가 주축이 된) 통합진보당 탈당파가 세운 신당에서 이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25] 다만, 선거법상 약칭으로 진보당을 쓸 수 없었다. 진보신당이 있기 때문에 유사 명칭이어서 안되는 것. 약칭없이 등록하겠다고 했으나, 진보신당에서는 반발하는 모양새. 도의상 피해서 정해야하는 거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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