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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군/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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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부터 2002년까지 사용한 철원군의 깃발

1. 개요2. 삼국시대3. 남북국시대4. 후삼국시대5. 고려시대6. 조선시대7. 일제강점기8. 북한, 대한민국

[clearfix]

1. 개요

철원군의 역사를 다룬 문서.

철원군은 강원도의 몇 안 되는 평야 지대로, 수십만년 전에 용암이 나와 지금의 철원 일대를 메운 것이 철원평야이다. 현재도 이러한 지형 덕분에 강원도 최대의 생산지이다.

2. 삼국시대

고구려 때 모을동비홀(毛乙冬非忽)로서 홀(忽)은 곧 성(城)[1], 모을동비는 '철두루미' 등의 고유어 음차로 풀이하는 견해가 일반적이다.[2] 이를 한자음으로 철원군(鐵圓郡[3])으로 표기하였다가 신라 경덕왕 대에 철성군(鐵城郡)으로 개칭하였다.

3.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한주에 속했다. 동주(東州)라는 별명이 있는데, 동주 최씨의 관향이 바로 철원이다.

4. 후삼국시대

후삼국시대에는 그동안 변두리에 불과했던 철원이 잠깐이나마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바로 궁예태봉[4]수도로 삼았기 때문이다.[5]

하지만 궁예의 철원 천도는 명백한 대실책이었다. 일단 너무 춥다는 점도 있지만,[6] 평야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곳을 관통하는 한탄강의 유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근대 들어 평강 봉래호저수지 등 수리시설들이 축조되기 전까지는 그냥 척박한 벌판에 불과했다.[7][8] 외부에서 물류를 공급할 육로나 수로도 제대로 기능하기 힘들었는데, 한탄강은 폭이 좁고 급류가 세서 큰 배가 다닐 수 없어서 물류의 이동이 힘들었고 그 때문에 물가가 비싸져서 당시 철원에서는 가는 포 1필로 쌀을 5되밖에 살 수 없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열왕 때 금성(경주)에서는 포목 1필로 쌀 450~650되를 살 수 있었고 조선 시대에는 20~40되를 살 수 있었던 걸 보면, 조선시대의 쌀 생산량 증가를 고려하더라도 당시 철원의 물가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5. 고려시대

918년 태봉의 국왕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이듬해 개경으로 천도하였고, 이후 철원은 경기도 소속이 되었다.

고려 말기에는 왜구의 침입이 거세져 왜구가 수도 개경 인근까지 북상하자 고려 조정에서 수도를 내륙인 철원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나오기도 했다.

6. 조선시대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아직 경기 소속이었던 조선 초기에는 도호부로서 삭녕군, 영평현, 장단현, 임강현, 안협현, 마전현, 연천현을 간접 관할했었다.

태종 13년, 철원부로 승격되었다.

세종 16년, 강원도 소속으로 이관된 후 지금까지 강원도로 남아 있다.[9]

조선시대에는 철원군 동송읍에서 임꺽정이 활동해 고석정 맞은편 강에 석성을 쌓고 관군과 대적하였다.

1896년, 13도제를 시행하며 철원군으로 개칭되었다.

1909년, 관인면이 연천군에 편입되었다.

7. 일제강점기

1914년 구 삭녕군 동부 지역-고려시대 승령현(僧嶺縣)#-을 편입하였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원래의 지역 특성에다가 경원선금강산선이 분기되는 교통의 요지라 엄청나게 발전했으며[10], 특히 철원평강평야의 젖줄로 불린 봉래호저수지가 1923년 완공되면서 강원도를 대표하는 곡창지대이자 경원선 연선의 주요 대도시로 거듭났다.

실제로 1935년까지는 도내 최대의 도시였고, 해방 직전인 1944년 당시까지만 해도 당시 철원읍은 춘천읍[11]에 이어 강원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즉, 당시에는 원주 또는 강릉보다도 큰 도시였다. 백화점도 있고, 극장도 있고, 식당 주인이 개인적으로 세운 얼음 창고까지 있을 정도로 번성했다.

8. 북한, 대한민국

그러나 남북이 분단되면서 철원의 운명은 요동치기 시작한다. 해방 직후에 철원에 북한 강원도 인민위원회(도청 격)이 놓여지며 철원읍철원시로 승격되되고 철원군이 유지되었다 1946년 9월에 함경남도 원산시, 문천군, 안변군이 강원도로 편입되며 도인민위원회원산시로 옮겨가며 철원시가 철원군 철원면으로 격하된 것은 그 전조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철원은 김화군, 평강군과 함께 포천/동두천-의정부-서울로 이어지는 핵심 남침 통로 북쪽 끝에 위치한 평야지대였고, 그 지리적 특성상 북한의 전쟁 준비용 병력 및 물자 집적기지로 활용되어 인접한 두 군과 합쳐 철의 삼각지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951년 6월 중공군 춘계공세를 격퇴한 후 대규모 반격을 개시한 유엔군은 전략적 요충지인 철의 삼각지대를 장악하기 위한 공세를 펼쳤다. 철의 삼각지대를 차지하기 위한 유엔군의 파일드라이버 작전(Operation Piledriver)으로 철의 삼각지대의 두 꼭짓점인 철원과 김화가 수복되었으며 이후로도 철의 삼각지대의 지배권을 놓고 양측은 백마고지 전투를 비롯한 수많은 전투를 벌였다. 이로 인해 철원역과 당시의 시가지는 흔적만 남기고 모두 파괴되었으며, 지금은 폐허가 된 철원 노동당사만이 지키고 있다.

철원에서 엄청난 격전이 벌어진 또 다른 이유는 철원이 곡창 지대였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철원을 점령하기 위해 직접 지휘했다고 전해지는 김일성고지가 북한이 점령한 철원에 있는데, 북한군이 전투에서 져서 결국 철원 점령에 실패하자 3일간 거기서 울며 두고두고 아쉬워했다고 한다.[12] 휴전 직후에 철원평야 대부분을 빼앗겨서 열받은 김일성이 철원평야에 용수를 공급하던 봉래호에서 철원평야로 흐르는 물길을 끊어버렸고 때문에 1970년대에 토교저수지, 동송저수지, 산명호저수지 등을 건설하기 전까지 철원군은 만성적인 수자원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따라서 현재는 면적에 비해 주민이 별로 없고 미개발 상태인 지역이 많으며, 비무장지대와 인접하니 철새들의 천국으로 특히 겨울에는 엄청난 수의 철새들이 철원 평야를 찾아온다. 철원군의 마스코트가 두루미일 정도. 이 때문에 농민들은 철새들을 위해 추수 뒤 논밭의 낙곡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heorwon-map.png
1962년까지의 철원군.[13]

실질적인 현재의 철원 지역은 과거 철원군김화군이라는 2개의 독립된 군[14]이었다. 그러다가 8.15 광복 이후 북한 지역(삼팔선 이북)이었으나, 6.25 전쟁으로 중부전선과 동부전선이 38선 이북으로 북상하여 휴전선을 그으면서 철원군과 김화군 모두 두 동강이 나 버렸다.

남한에서 수복한 철원군과 김화군 지역이 1963년 1월 1일을 기해 철원군으로 병합되었고[15] 신서면연천군에 편입되면서 현재의 철원군이 되었다. 북한 쪽의 철원군은 현재도 철원군이며[16] 북한 쪽의 김화군은 김화군과 창도군으로 쪼개졌다. 다만 남한에서도 김화라는 명칭은 현재도 철원군 김화읍으로 남아 있다.

1973년 서면 청양리, 도창리가 김화읍에 편입되었다.

1978년, 김화여자중학교가 개교하였다.

1979년, 갈말면이 갈말읍으로 승격되었다.

1979년 11월 21일, 김화고등학교가 개교하였다.

1980년, 동송면이 동송읍으로 승격되었다.

[1] 미추홀의 홀도 같은 뜻이다.[2] '철'을 '털(毛乙)'로 훈차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삼국통일 이전 고대 한국어에는 (ㅈ) 및 (ㅊ) 발음이 없었다는 가설을 반증하는 것일지도.[3] 오늘날의 한자명과 조금 다르다.[4] 그 전까지는 마진이였다. 하지만 결국에는 태봉으로 변경했다.[5] 다만 철원도성의 유적지들은 현재 비무장지대 내에서 숨죽이고 있다. 태봉국 철원성 유적은 하필 또 재수없게 군사분계선이 정확하게 관통한다. 그 이유는 휴전협정을 하는 날 기준으로 각자가 점령한 그대로 영토를 아예 정해버렸기 때문이다. 남한이나 북한 중 하나에 속했다면 조사가 이루어졌을텐데 저 지경이라 거의 손도 못 대고 있다. 정확한 위치는 경원선 월정리역 정면이 유적터다. 안보 관광으로 갈 수 있는 월정리전망대에서 원래 보이는 위치지만 60년간 자란 무성한 숲에 가려져서 못 본다. 대한민국 육군에서 철원 유적에 직접 들어가 찍은 사진들을 실은 화보집도 있으며, 주요 도서관이나 군부대에 있으나 생각보다 찾기가 어렵다.[6] 후고구려는 말이 후고구려지 舊고구려령 최남단 패서지역 정도를 제외하면 그 기반은 한반도 중부의 광충청주가 담당하고 있었고 비슷한 위도인 패서지역 출신들의 입장에서도 서해바닷가와는 비교가 안되는 강추위다. 특히 철원 건설을 위해 국토 남부의 청주인들을 무려 1천호씩이나 대대적으로 사민했는데 이들 입장에서는 고질적인 식량물가 불안정에 겪어본 적 없는 혹독한 추위까지 겹쳐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7] 그나마 철원평야는 좀 나았는데 평강군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논이 58결밖에 없다고 기록될 정도였다. 분단 이후 봉래호지 등 북한 지역의 수자원을 이용할 수 없게 되자 1970년대 토교지, 동송지, 산명호지 등이 대대적으로 축조, 정비되기 전까지 철원평야는 다시 만성적인 수자원 부족과 가뭄에 시달려야 했다.[8] 이런 문제는 동서가 짧고 남북이 긴 한반도 환경에서 주요 평야마다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일례로 한반도를 대표하는 평야인 호남평야는 정작 강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만경강동진강 정도가 주요하천이라 현대 만경강은 금강 상류 용담호의 물을 도수터널을 통해 공급받아 연명하고 있으며, 나주평야는 4대강의 일원이라는 영산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내 대표적인 다우지인 섬진강 유역에 축조된 승주호 등에서 수자원을 공급받는다. 안주평야는 평야 북단의 청천강 외에 이렇다 할 지류 물줄기 하나 없어 옛말에 쌀 한 됫박은 줘도 물 한 그릇은 못 준다고까지 할 정도다. 이런 주요 평야들을 제대로 개간해서 써먹을 수 있게 된 것은 근대의 일이다.[9] 세종실록 지리지는 그 이전에 쓰여서 그런지 이 변화가 반영되어 있지 않아서 조선왕조실록 우리역사넷 사이트에서 철원을 찾으려면 경기 항목에서 찾아야 한다.[10] 실제로 분단과 전쟁이 없었다면 또는 휴전선이 철원 이북으로 한참 올라간 채로 휴전되었더라면 1950~1960년대에 철원로 승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서 원주시, 춘천시, 강릉시와 함께 강원도 4대 도시로 발전했을 것이다. 또한 영서 남부(횡성군, 영월군, 정선군, 평창군 등)의 중심지가 원주, 영서 중부(홍천군, 화천군, 인제군, 양구군 등)의 중심지가 춘천인것과 비견되어 영서 북부(이천군, 평강군, 회양군, 김화군 등)의 중추도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사실 소군정 이후 북한정권 시절에 철원로 승격하긴 했으나, 1년만에 다시 군으로 환원되었다.[11] 1946년에 춘천부(시)로 승격했다.[12] 이렇게 된 이유는 철원평야는 북쪽이 지대가 높고 남쪽이 지대가 낮은 지형이라 물이 남쪽으로 흘러서 농사에 적합한 지역은 대부분 남쪽에 있는데 이 남쪽이 대부분 남한령이 되었고 물이 부족해 거의 황무지에 가까운 곳만 북한에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13] 빨간색 이름으로 된 지역이 구 철원군 지역, 파란색 이름으로 된 지역이 구 삭녕군 지역. 초록색 선이 휴전선이다.[14] 현재 갈말읍에 속해 있는 정연리는 원래 평강군 남면이었다. 위 지도의 평강군 영역에서 휴전선 아래로 나온 부분이다. 특기할 사항으로, 정연리와 갈말읍, 동송읍과 김화읍은 사합점을 이룬다. 따라서 정연리는 갈말읍의 월경지이다. 실질생활권은 구철원 내지 김화이다.[15] 1963년 발효된 '수복지구과 동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따라 김화군을 철원군에 편입하였다. 단, 이북 5도 체계 하에서 김화군은 여전히 명목상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된다.[16] 하지만 대부분의 영역은 오리지널 철원이 아니고 근처 군에서 빌려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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