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22:49:03

클리블랜드 토르소 살인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범죄
2.1. 수사2.2. 용의자2.3. 관련 사건들?2.4. 엘리엇 네스의 그 후

1. 개요

The Cleveland Torso Murderer
(Mad Butcher of Kingsbury Run)

1935년에서 1938년 사이에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시에서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이자 미제 사건으로 1930년대 미국을 떠들썩하게 한 연쇄 살인사건이다. 토르소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범인이 시신을 토막내서 몸통만 남았기 때문이다. Torso는 이탈리아어에 어원을 둔 단어로 몸통이란 뜻이다.[1]

2. 범죄

1935년 9월 23일 오후, 클리블랜드와 피츠버그를 오가는 철도가 지나는 킹스베리 런 자카스 힐에서 중년 남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친구 한 명과 함께 달리기 경주를 하던 소년 제임스 와그너가 발견했다. 발견 당시 시신은 목이 잘려나갔고 거세당했으며 토막난 상태였다. 처음에 경찰은 시신이 살해된 뒤 약 7~9일간 방치되었다고 판단했으나, 나중에 법의학적 조사 결과 살해된 지 3~4주가 지나서 발견되었다고 드러났다. 이 중년 남성의 머리와 성기는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같은 날 첫 번째 피해자가 발견된 곳에서 불과 9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다른 남성의 시신도 발견되었다. 지문 조사 결과 피해자는 28세 남성으로, 무기 운반 혐의로 경미한 전과 기록이 있는 에드워드 안드레시란 사람이었다. 그는 인근의 주정뱅이이자 포주였다. 안드레시는 죽은 지 2~3일 정도 경과했다고 추정되었으며 머리와 성기도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먼저 발견된 중년 남성은 알 수 없는 약품 때문에 훼손 상태가 심해서 끝내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다.

1936년 1월 26일 아침, 클리블랜드 시내 한복판 대로에서 한 여자가 개 짖는 소리에 밖으로 나가 보았다. 개는 바구니 안에 있는 것을 먹으려고 했는데, 바구니를 열어보니 으로 보이는 고기가 있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 여자는 그 햄이 사람의 오른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구니 안에는 머리·왼쪽 팔·두 다리의 아랫부분이 없는 여성의 시신이 들어있었다. 지문 조사 결과 40세로 매춘 전과가 있으며, 주변의 바에서는 유명한 플로렌스 쥬네비브 포릴로였는데 죽은 지 2~3일 지났다고 추정되었다. 2주 후에 공터에서 없어진 신체부위의 대부분이 발견되었으나 머리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알 카포네 체포로 유명한 엘리엇 네스가 공공안전국[2]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엘리엇은 시카고에서 금주법 위반자들을 소탕하고 마피아들과 싸웠다. 언론에서도 대대적으로 '머리 사냥꾼은 이제 자기 머리를 엘리엇에게 바쳐야 할 것.'이라고 엘리엇을 띄워줬다. 하지만 엘리엇은 갱 사냥과 이 살인사건이 다름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7월 5일 킹스베리 런 어느 다리 밑에서 소년 2명이 네 번째 피해자를 발견하였다. 바지에 싸여진 머리만 있었고 나머지 부위는 400 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죽은 지 2일 정도 지났다고 추정되었다. 이 피해자는 20대 정도의 젊은 남성으로, 몸에 "Helen and Paul", "W.C.G." 등 이름이나 지명이 아닐까 싶은 문신 6개가 있어서 '문신남(Tattooed Man)'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이 남성이 입은 속옷에 세탁 영수증이 붙어 있었는데, 거기에 J.D라는 이니셜이 있어서 피해자의 이름이 아닐까 추측하였다. 피해자들 중에선 신원파악 가능성이 높은 물증들이 가장 많이 발견된 시신이었다. 경찰은 시신의 신원을 알아내기 위해 1936년에 클리블랜드 건설을 기념하여 열린 축제인 "오대호 박람회(Great Lakes Exposition)"에 죽은 남자의 데스마스크[3] 전시하여 신원에 대한 제보를 받으려 했으나, 결국 안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7월 22일, 클리블랜드 서부 브룩클린 빅 크릭에서 하이킹을 하던 젊은 여자가 머리 잘린 남성 시신을 발견했다. 이 남성은 살해당한 지 2개월이 경과했다고 추정되었으며 머리는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알려진 희생자들 중 유일하게 서부에서 발견된 사례였다.

9월 10일, 킹스베리 런에서 30세 정도인 남성 시신이 발견되었다. 머리와 성기를 포함해 여러 부위가 잘리고 몸통도 가로로 잘렸다. 몸통의 절반과 다리 부분만 발견되었으며 나머지 부위는 발견되지 않았다. 살해당한 지 2일 정도 지났다고 보였으며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근처에 있던 모자는 어느 주부가 뜨내기 노숙자에게 줬다고 진술해서 그가 노숙자였음은 분명했다.

해를 넘긴 1937년 2월 23일, 에리호 근처에 있던 유원지 유클리드 비치 파크 부근에서 난도질 당하고 머리가 없는 여성 시신이 발견되었다. 살해당한 지 3~4일이 경과했다고 추정되었지만, 머리는 발견되지 않았고 신원도 밝혀지지 않았다.

6월 6일, 클리블랜드 시내를 흐르는 쿠야호가강 로레인 카네기 다리 부근에서 중년 여성 시신이 발견되었다. 알려진 희생자들 중 유일한 흑인이었는데, 대략 살해당한 지 1년 정도 지나 백골이 되었다. 갈비뼈가 없었지만 나머지 부위는 모두 발견되었다. 경찰의 조사로 시신의 신원이 실종된 40세 로즈 월레스라는 여성의 치아기록과 이 시신의 치아 기록이 거의 일치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실제로 월레스의 아들도 시신이 자신의 어머니라고 인정해 월레스로 판정되었다. 그러나 월레스는 시신 발견 10개월 전에 실종되었는데 시신의 상태는 그것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반론이 있어서, 실제로 월레스인지 불분명하다는 시각도 많다.

같은 날 쿠야호가강에서 남성 시신도 발견되었다. 살해당한 지 2~3일이 경과했다고 추정되었으며 머리와 사지가 잘려 있었다. 이 경우는 잭 더 리퍼처럼 시체의 창자를 꺼낸 상태였으며 머리는 발견되지 않았고 신원도 밝혀지지 않았다. 범인과 공범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보트를 타고 가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더 이상 수사에 진전이 없었다.

1938년 4월 8일, 다시 쿠야호가강에서 사람 다리 하나가 발견되었다. 약 3주 후에는 일부 부위가 더 발견되었고 25세 정도인 여성으로 추정되었다. 살해당한 지 3~5일이 경과했다고 추정되었지만 신체 대부분은 발견되지 않았고 신원도 밝혀지지 않았다.

8월 16일, 클리블랜드 시내의 레이크쇼어 쓰레기장에서 사지가 잘린 채 백골이 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살해된 지 4~6개월이 경과했다고 추정되었지만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같은 시간 그 지역에서 마지막 희생자인 백골의 남성 시신도 발견되었다. 살해된 지 7~9개월이 지났다고 추정되었으며 마찬가지로 사지가 잘려 있었다. 주변에서 발견된 해진 이불에 나머지 부위가 발견되었고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2.1. 수사

잇달아 토막난 시신들이 발견되자 클리블랜드 시민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일단 지역사회가 초토화되었으며 사람들은 밖에 잘 나가지 않았다. 이에 알 카포네 검거로 유명해진 형사 엘리엇 네스가 사건 수사에 투입될 정도로 클리블랜드 경찰은 범인 검거에 사활을 걸었다. 하지만 수사는 난항에 부딪혔다.

당시 나치 독일파시스트 이탈리아에서는 이 사건을 자본주의 세계가 타락한 증거라고 까는 데 이용했다. 이 당시 클리블랜드는 대공황의 여파로 '클리블랜드 플랫츠'라고 불리는 하층민들의 슬럼가가 생겨났고, 여기 사는 하층민들은 그 출신이나 신원을 명확하게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범인은 이 클리블랜드 플랫츠에 사는 사람들을 범죄 대상으로 삼았는데, 공식적인 피해자 12명 중 2명만이 신원이 확인되었고 신원 미상의 남성이 6명, 여성이 4명이었다. 게다가 아직 법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가뜩이나 증거 수집도 어려웠는데, 사체가 사망 후 짧으면 2~3일, 길면 1년 후에나 발견되어서 수사가 매우 힘들었다. 여기에는 범인의 잔인한 수법도 한 몫했는데, 피해자들은 다 참수되었고 종종 팔다리를 잘라내거나 그 후에 추가로 몸통을 쪼개버린 피해자도 있었다.

결국 엘리엇 네스는 마지막 피해자의 시신이 발견되고 며칠 후, 클리블랜드 경찰소방관들을 총동원해 클리블랜드 플랫츠에 거주하는 하층민들을 모두 검거해 수감한 다음 클리블랜드 플랫츠를 밀어버렸다. 하필이면 시신이 발견된 레이크쇼어 쓰레기장은 네스의 집무실에서 훤히 내다보이는 곳이어서 네스가 대폭발한 것. 아이러니하게도 시민들의 수호자로 지지를 받던 네스는 이 결정으로 민심을 잃고 만다. 이후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논란이 있었다.

2.2. 용의자

당시 경찰은 용의자 2명을 수사했다. 처음 떠오른 용의자는 프랭크 돌레잘이라는 중년 남성이였다. 플로렌스 포릴로와 로즈 월레스가 같은 바에 자주 들렀고 에드워드 안드레시도 정기적으로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런데 프랭크가 칼을 들고 다니며 술만 먹으면 사람들을 위협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더구나 프랭크는 포릴로와 잠시 동거했다는 사실까지 찾아냈다. 돌레잘은 이런 증거로 플로렌스 포릴로의 살해 용의자로 1939년 7월에 체포되었다. 프랭크는 자백하지 않았지만 그의 집 화장실 바닥에서 핏자국으로 보이는 흔적을 발견했다. 마침내 프랭크는 포릴로를 살해했다고 자백했으나 이는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라고 드러났고, 그 핏자국이란 것도 사실 핏자국이 아니었다.

그래서 프랭크는 자백을 철회했지만 오하이오주 쿠야호가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프랭크는 8월 24일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시신을 검시한 결과 갈비뼈 골절을 확인했다. 그런데 프랭크의 친구는 체포되기 전에는 프랭크의 갈비뼈가 멀쩡했다고 증언했다. 이 때문에 경찰에게 받은 고문으로 생긴 후유증 때문에 죽었거나, 혹은 경찰이 고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손을 써서 죽였다는 추측이 난무했다. 그러나 클리블랜드 경찰은 지금까지도 프랭크의 죽음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어쨌든 이 사건을 연구하고 있는 학자들은 프랭크와 살인은 무관하다고 보는 시선이 일반적이다.

또다른 용의자는 프랜시스 스위니 박사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의료부대원으로 참전했고 많은 외과수술 경력이 있는 베테랑 외과의사였다. 시신들이 매우 정교하게 절단되었으므로 범인에겐 의학적 지식이 있어야 했고, 안전하게 시체를 운반하려면 자동차가 있는 상류층, 거기에 남성들을 대적하려면 어느 정도 체구도 건장해야 했다. 결국 스위니 박사는 이 자격에 완벽하게 적중했으며 정신병 경력도 있었으므로 유력한 용의자로 주목받았다. 그리하여 스위니 박사는 두 번이나 거짓말탐지기 검사를 받았는데, 두 차례 모두 거짓 반응이 나와 거짓말 탐지기 전문가는 네스에게 "박사를 어떻게 할지는 당신의 판단에 달려있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엘리엇 네스는 어째서인지 스위니를 기소하기를 포기하고, 대신 스위니는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스위니가 범인일 것 같다는 심증은 있었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만한 명백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클리블랜드의 저명인사인 박사를 기소하기는 정치적으로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위니 박사의 사촌동생 마틴 스위니는 클리블랜드 하원의원이자 엘리엇 네스의 정적이었다.[4] 일각에서는 네스가 스위니를 무리하게 기소했을 경우 마틴 스위니로부터 받을 정치적 공격을 의식해서 기소를 포기했다고 보기도 한다. 희한하게도 프랭크 돌레잘을 체포한 보안관은 마틴 스위니와 인척관계에 있었다. 끝내 엘리엇 네스는 스위니가 범행에 연루되었다는 물증을 찾아내지 못 했고 수사는 그대로 유야무야되었다. 묘하게도 살인 사건도 그쳐서 일각에서는 스위니가 진짜 범인이 아니었을까 의심한다.

1950년대까지 엘리엇 네스와 가족들 앞으로 범인이 보낸 듯 보이는 엽서들이 배달되었는데, 내용은 비웃음과 협박이었다. 이 엽서를 보낸 배후가 프랜시스 스위니라는 주장도 있다. 다만 스위니가 자신을 잡는 데 실패한 네스를 비웃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자신을 범인으로 생각한 네스에게 앙심을 품고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불명확하다. 현재 많은 연구자들은 스위니가 범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만, 이를 입증할 만한 근거는 불확실하다.

한편 엘리엇 네스와는 반대로 사건의 실무 책임자였던 베테랑 형사 피터 멀로는 범인이 철도 노동자라고 판단했다. 범인의 흔적이 전혀 없는 이유가 사람을 죽이고 기차로 클리블랜드를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던 것. 실제로 펜실베이니아의 버려진 화차에서 시신 3구가 발견되어 피터 멀로의 추측을 뒷받침하는 듯했지만 끝내 범인을 잡지는 못했다.

2.3. 관련 사건들?

공식적으로는 이 사건의 피해자가 12명이고 1938년에 끝났다고 하지만, 일부 연구자들은 살인범이 훨씬 이전부터 활동하지 않았는가 의심한다.

첫 번째 피해자가 발견되기 전인 1934년 9월 5일, 엘리호 근처에서 신원불명의 여성 시신이 난도질 당한 채로 발견되었다. 이 여성을 흔히 '호수의 여인' 또는 '0번째 희생자'라고 칭한다. 시신이 처음 발견될 때에는 별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일곱 번째 피해자가 호수의 여인이 발견된 곳 근처에서 발견된 탓에 연구자들은 호수의 여인이 알려지지 않은 첫 번째 피해자가 아닐까 의심한다.

또한 클리블랜드 밖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클리블랜드에서 남동쪽에 있는 펜실베이니아뉴캐슬 시에서도 1936년 7월 1일 신원불명의 남성이 머리가 절단된 채로 발견되었다. 뉴캐슬시의 근교 습지에서는 1921년부터 1934년 사이, 1939년부터 1942년 사이에 머리가 절단된 시신 여러 구가 발견되었다.

또한 펜실베이니아주 알레게니 카운티 맥키즈락 지구에서 1940년 5월 3일 머리가 절단된 신원불명 시신 3구가 발견되었다. 1950년 7월 22일에는 클리블랜드의 더벤포트 거리에서 로버트 로버트슨이라는 남성이 시신으로 발견되었는데 이 남성도 머리가 절단된 채로 발견되었다. 일련의 범행수법이나 시신을 훼손한 스타일이 클리블랜드 토르소 사건과 유사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클리블랜드 토르소 살인 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동일범이 1920년대부터 1950년까지 클리블랜드·영스타운·피츠버그 일대에서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연쇄살인을 저질렀다고 본다. 클리블랜드 경찰서의 형사 주임 피터 메를요 등이 강력하게 이를 주장하였다.

1947년 블랙 달리아 사건도 동일범의 소행이 아닐까 추측하는 사람도 있지만, 근거도 없고 가능성도 낮다. 여기서 뜬금없이 블랙 달리아 사건이 언급되는 이유가 있다. 1938년 12월, 클리블랜드 경찰서장 조지 마토워치에게 편지가 한 통 배달되었다. 필자는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처하며 "이젠 편히 쉬시오. 난 따뜻한 캘리포니아로 갈 테니."라고 적었다. 이 때문에 이 편지대로 범인이 캘리포니아로 건너가서 엘리자베스 쇼트를 살해하지 않았느냐는 추측이 나온 것이다.

인터넷을 잘 찾아보면 당시 희생자들의 사진을 볼 수 있다. 다만 정말 무참히 살해당한 피해자들의 시신들이라 정신건강에 매우 해로우므로 잔인한 것에 내성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큰 충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2.4. 엘리엇 네스의 그 후

엘리엇 네스뺑소니 사고와 여러 스캔들로 1941년 국장직을 사임하고 1947년 클리블랜드 시장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년 후에는 주급 60달러짜리 일자리까지 잃고 무명과 가난 속에서 살다가 1953년 제지공장에 취업했다. 네스는 동료에게 소개받아 오스카 프렐리라는 저널리스트를 만나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네스는 그중 자신이 금주령 시대 마피아와 싸웠던 비화와 이 사건의 대한 생각을 이야기했고, 프렐리와 함께 《건드릴 수 없는 사람들(Untouchables)》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1957년에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네스는 책이 출판되기 6개월 전에 54세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성공을 보지 못했다. 1987년에 알 카포네를 체포한 비화 부분을 바탕으로 영화 언터처블이 개봉한 덕분에 다시 유명해졌는데, 네스 역은 케빈 코스트너가 맡았다.

[1] 때문에 머리, 팔, 다리 없이 몸통만 표현한 조소 작품을 뜻하기도 한다.[2] Department of Public Safety. 클리블랜드의 경찰조직과 소방조직을 관리 감독하는 부서이다.[3] 시신의 얼굴 부분에 석고 등을 두껍게 칠해서 본뜬 마스크.[4] 마틴 스위니는 민주당 소속이었고 클리블랜드 시장과 엘리엇 네스 등은 공화당 소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