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24 12:22:01

트로바토레


Il Trovat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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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등장인물 소개4. 스토리
4.1. 1막
5. 명반과 영상물
5.1. 음반5.2. 영상물
6. 여담

1. 개요

주세페 베르디가 작곡한 오페라. 제목은 중세 유럽음유시인을 가리키는 것.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와 함께 베르디 중기 작품 '빅3'라고 불린다.

2. 상세

리골레토가 카바티나와 카발레타 없이 아름다운 선율이 연이어서 나오는 것이라 하면, 일 트로바토레는 베르디의 초기작 나부코조반나 다르코같은 레치타티보-카바티나-단절부-카발레타의 구조로 이뤄져있다. 즉, 다시 벨 칸토 스타일로 후퇴한 것.

초연 당시 한물간 작풍을 재탕했다는 것과 스토리 전개가 너무 난해하다는 혹평도 있었지만 매력적인 저음 캐릭터[1]와 아름답고 정열적인 음악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다. 대본은 헐렁할지언정 스토킹의 제왕 루나 백작과 얀데레 중증 집시엄마 아주체나의 캐릭터가 매우 강렬하고 매력적이다.

3. 등장인물 소개

  • 루나 백작 (Count di Luna)[2] : 아라곤의 귀족이자 군대 지휘관 (바리톤)
  • 만리코 (Manrico) : 우르젤 공작 군대의 젊은 지휘관 겸 음유시인 (테너)
  • 레오노라 (Leonora) : 아라곤 공작부인의 젊은 시녀 (소프라노)
  • 아주체나 (Azucena) : 만리코를 양육한 집시 여인 (메조 소프라노)
  • 페란도 (Ferrando) : 루나 백작이 중용하는 늙은 장교 (베이스)
  • 이네스 (Ines) : 아라곤 공작 부인의 시녀이자 레오노라의 친구 (소프라노 또는 메조 소프라노)
  • 루이츠 (Ruiz) : 만리코 군대의 장교 (테너)

4. 스토리

4.1. 1막

첫 장면부터 루나 백작이 사는 성의 성문 앞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루나 백작의 병사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계속 일어나는 전쟁 때문에 망중한을 보내고 있던 것이다. 그 때, 늙은 장교 페란도가 나타나서 병사들을 격려하고, 백작 가문에서 내려오는 공포스런 옛날 이야기를 해준다. 이 오페라에서 유일하게 나오는 베이스 카바티나 "선대 백작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네(Di due figli vivea)" 이다.

페란도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대강 이렇다. 지금 백작의 아버지였던 선대(先代) 백작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이는 현재의 루나 백작 이고, 둘째 아이는 '가르시아'라는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가르시아는 요람에 누워서 지낼만큼 너무 어렸는데, 하루는 한 집시 노파가 다가와서 아이를 뚫어지게 본 것이었다. 그 후 선대 백작의 둘째 아들 가르시아는 열병에 걸려서 의원들이 아무리 치료를 해도 낫지 않자, 선대 백작은 그 집시 노파의 저주 때문이라 생각하고, 그 노파를 잡아오게해서 화형시켰다. 그런데, 노파가 화형 당할 즈음에 요람 속에 있던 아이는 사라져 버렸고, 노파를 화형시킨 잿더미 속에서 타버린 아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5. 명반과 영상물

일 트로바토레는 194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자주 올려진 레퍼토리 였지만, 90년대 이후로 각 배역을 부를 수 있는 가수들이 많이 없어져서 희귀 레퍼토리가 되어버렸다. 그 때문인지 최근에 나온 일 트로바토레 음반이나 영상물은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일 트로바토레 음악에 접근하려면 예전에 나온 음반이나 영상물을 접하는 것이 훨씬 이로울 것이다.

위의 서술에서 바로잡을 점을 덧붙이면, 세계에서 일 트로바토레를 부를 가수가 없을 만큼 힘든 레퍼토리로 분류되는 것은 아니다. 희귀한 헬덴 테너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바리톤 아리아는 리사이틀의 단골 프로그램이다. 음반과 영상물 생산이 과거에 집중된 것은 인터넷 다운로드와 스트리밍의 득세, 음반 수요 하락, 메이저 음반회사들의 부실과 혼란 등등 업계 전반의 몰락에 기인한 것이지 일 트로바토레 출연진도 못 구할 정도로 성악가가 모자라서가 아니라는 것. 90년대 말, 2000년대는 유명 지휘자들부터가 구조조정 대상이 되어 메이저 레이블에서 떨려나갔고 오페라 전곡반 프로젝트들은 수직낙하했다. 새로이 녹음되는 스튜디오 음반은 씨가 마르다시피했고 음원과 공연티켓을 동시에 팔 수 있는 실황 영상물이 대세가 되었는데, 대세라지만 그 생산량은 황금기에 비할 수 없다. 이름값이라도 내세워야 팔린다는 계산인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스타 캐스팅이나 되어야만 제작되어 겨우 연명하는 상태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흐보로스토프스키의 은발을 널리 알린 2002년 메트 프로덕션도, 티켓과 음반 판매에서 수지를 맞추지 못하는 오페라 업계의 부진을 개선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기획의 일부이다.

5.1.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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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에 젊은 카라얀의 지휘 아래 녹음된 음반이다. 말년의 그와는 달리 매우 열정적이고 파워풀하게 지휘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음반에서는 카라얀보다 전설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의 존재가 더 눈길을 끈다. 사실 칼라스는 이 오페라를 크게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드라마틱한 표현와 벨칸토 창법이 역할에 잘 들어맞는다. 만리코 역의 명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도 훌륭한 노래를 들려준다. 파네라이의 루나 백작이나 바르비에리의 아주체나도 좋은 가창을 들려주나 여기에 소개된 다른 음반들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제작비 절감을 위해 당시 주로 실황으로 녹음을 하던 EMI가 모처럼 돈들여서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음반이다. 하지만 이 음반보다 한달 먼저 데카에서 녹음된 에레데 음반이 스테레오로 녹음되어 델 모나코와 테발디, 시미오나토의 음성을 스테레오로 들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EMI의 모노 녹음은 큰 아쉬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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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차례로 플라시도 도밍고, 레온타인 프라이스, 셰릴 밀른즈.

1969년 RCA에서 주빈 메타가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플라시도 도밍고, 레온타인 프라이스, 피오렌자 코소토, 셰릴 밀른즈가 주역을 맡은 이 음반은 스테레오 시대의 대표적인 명반으로 꼽힌다.[3] 주연 4인방이 모두 고르게 뛰어난 드문 음반이다. 프라이스와 코소토는 이미 1962년 카라얀의 잘츠부르크 실황에도 출연하듯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이 역할에서 10년째 최고의 성악가들로 꼽히던 이들이었고 코소토는 지금도 최고의 아주체나로 꼽히고 있다. 프라이스는 중저음대의 특유의 어두운 음색 때문에 당대에도 그랬지만 호불호는 있다. 반면 플라시도 도밍고와 셰릴 밀른즈는 국제적 인지도에서는 거의 신인이었다. 특히 도밍고는 이게 첫 오페라 녹음이다. 주빈 메타의 뛰어난 해석과 당대 최상의 배역진들이 만나 불꽃튀는 해석을 들려주고 있다. 젊은 주빈 메타의 해석은 특기할만 하다. 매우 강렬한 해석을 들려주는데, 다른 연주들보다 매우 생동감 있고 열정적이라는 호평이 많은 편이지만 일부에서는 너무 몰아친다고 평하는 이들도 있다. 당시 오페라 녹음계의 후발주자였던 RCA가 아직 오페라 녹음에 대한 노하우가 충분치 않던 시절이라 1969년 녹음 치고는 음질이 좋지 못하다는 점이 단점으로 꼽힌다. 영국의 명망있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맡았는데, 일반적으로 들을 수 있는 이탈리아나 메트로폴리탄 오케스트라보다 뛰어난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려준다는 것은 장점이다. 또한 이 음반은 최초로 악보의 전곡을 생략없이 모두 연주한 최초의 음반이다.

60년대에는 일 트로바토레의 명연들이 가장 많이 나왔다. 1962년 세라핀이 스칼라 가극장을 지휘한 DG음반과 1964년 토마스 쉬퍼스가 로마 극장을 지휘한 음반 역시 명연주로 꼽힌다.

1962년 DG의 독일인 프로듀서들이 녹음한 세라핀 반은 지휘자, 성악진, 악단, 합창단까지 풀 이탈리아인으로 구성된 음반이다. 카를로 베르곤찌(만리코), 안토니에타 스텔라(레오노라), 에토레 바스티아니니(루나 백작), 피오렌자 코소토(아주체나) 등이 주연을 맡았다. 이 음반은 최초의 베르디 바리톤 중 한명이었던 에토레 바스티아니니가 맡은 루나 백작으로도 많은 주목을 받는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장샌긴 외모로 유명했던 바스티아니니는 악역 스토커 루나 백작을 재평가 받게 한 인물로 유명하다. 외모를 제외하더라도 가창 자체로도 역대 최고의 바리톤 중 한 사람으로 첫 손에 꼽힌다. 하지만 이러한 레전설들과 별도로 이 음반에서 바스티아니니의 루나 백작은 역할의 성격에 비해 치나치게 강하게 부른다는 지적이 있다.

1964년 EMI에서 녹음된 쉬퍼스 반은 프랑코 코렐리(만리코), 가브리엘라 투치(레오노라), 줄리에타 시미오나토(아주체나), 로버트 메릴(루나 백작) 등이 주연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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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에 리처드 보닝의 지휘 하에 조안 서덜랜드, 루치아노 파바로티, 메를린 혼, 잉그바르 빅셀이 각가 4명의 주역을 맡아 녹음한 음반이다. 유명한 베르디 바리톤인 잉그바르 빅셀을 빼고는 모두 벨칸토 오페라에서 활약을 한 가수들이라 상당히 호불호가 갈리며, 명연주로 거론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베르디의 근원이 벨칸토 오페라고, 그의 후기 오페라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오페라들이 벨칸토 창법을 요구하므로 딱히 엇나간 캐스팅은 아니다. 오히려 '히스테릭한 일 트로바토레'들에 질리고 '벨칸토 오페라로서의 일 트로바토레'를 듣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일 트로바토레 그 자체를 감상하고 싶은 경우에 이 음반은 비추천된다. 왜냐면 너무나 원곡을 심하게 바꿔서 부르기 때문이다.

서덜랜드는 50대에 들어 목소리에 무게가 실려 훌륭한 레오노라를 들려준다. 특히 유명한 아리아 'D'amor sull'ali rosee(사랑은 장미빛 날개를 타고)'에서는 그녀의 특기인 트릴을 마음껏 뽐낸다. 그러나 서덜랜드가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고쳐 부르는 수많은 부분은 호불호의 원인이 된다. 단순히 화려함을 위해 수많은 부분을 고쳐 불러 원곡을 알아 볼 수가 없을 지경인데, 이게 또 원곡의 비극적인 부분과 전혀 안어울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문제다. 이점 때문에 이 음반이 명연주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다. 파바로티의 만리코나 메를린 혼의 아주체나, 잉그바르 빅셀의 루나 백작도 가창과 극적인 표현을 모두 적절히 갖춘 노래를 들려준다.[4]

5.2. 영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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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빈 국립 가극장에서 열린 실황이다. 이 작품에 남다른 애착을 가졌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는 물론 연출도 맡았다. 플라시도 도밍고가 만리코를, 라이나 카바이반스카가 레오노라, 피에로 카푸칠리가 루나 백작을, 피오렌차 코소토가 아주체나, 호세 반 담이 페란도를 맡는, 오페라 역사에 남을 초호화 캐스팅이다.[5]

카라얀은 이탈리아 오페라 전통보다 작품 본연의 비극에 집중하는 해석을 들려주고 있어서 다른 지휘자들과 상당히 다르게 해석하는 부분이 많다. 일반적으로 빠르고 경쾌하게 부르는 노래를 약간 느리게 연주하면서 쉽게 흘려보내기 쉬운 선율미를 강조하거나 장엄함, 비극적인 느낌을 극대화하는 경우가 많다. 작품이 점차 비극을 향해 흐르는 3, 4막에서 카라얀의 해석은 더욱 빛난다.

카라얀의 연출에 대해서는 혹평하는 이들도 많지만, 편견을 버리고 보면 기대 이상인 경우도 많은데, 일 트로바토레서도 카라얀의 연출은 괜찮은 부분이 많다. 특히 4막에서 만리코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한 레오노라의 결연한 스토리를 비교적 절제된 흐름 속에서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연출을 보이고 있다. 특히 주연 4인방 모두 설득력 있고 감동적인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플라시도 도밍고의 만리코는 이미지에서나, 연기에서나 찌질한 마마보이 주인공 역할을 잘 소화해냈다. 그 유명한 카발레타 "저 타오르는 불꽃을 보라!(Di quella pira)" 끝부분에서 고음처리가 갑갑한 것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훌륭하다. 특히 비극적인 마지막 장면에서 신파조로 흐르지 않으면서 슬픔을 표현하는 도밍고의 노래는 가히 압권이라 할 수 있다.[6]

피에로 카푸칠리의 루나 백작은 그를 소개하는 해당항목에서도 얘기했지만, 역대 바리톤들 중에서 가장 미성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성악적으로 가장 안정되어 있고 연기에서도 확실한 발군으로 꼽히고 있다.[7] 절제해야할 부분은 확실하게 절제하고, 감정을 표현해야할 부분을 제대로 처리해주니 과연 성악도들의 모범이 될 만한 노래를 들려준다. 루나 백작의 카바티나 "그녀의 빛나는 미소(Il balen del suo sorriso)"를 들어보면 카푸칠리의 진가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데다, 간지와 스토킹의 제왕 포스가 절절히 솟아오를 정도로 소름이 쫘악 돋는다.[8]

6. 여담

  • 국내에서 잘 올려지지 않은 이유는 인지도 탓도 있겠지만, 주연 배역을 잘 부를 수 있는 소프라노, 테너, 바리톤, 메조 소프라노가 국내에서는 많이 없어서라고 할 수 있다.[9]
  • 80년대 중반 국제오페라단 국내공연 때, 배경을 베르디 활동 당대의 것으로 고친 연출이 등장했다. 집시소굴에는 이탈리아의 삼색기가 걸쳐져 있었고, 루나 백작과 그의 군대는 오스트리아 군복 비슷한 디자인의 의상을 입고 나왔다.
  • 이 오페라 2막 서두에 나오는 합창곡 '집시의 날은 누가 밝히나'는 흔히 '대장간의 합창'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국 프로야구 올드팬들에게는 아주 익숙할 것이다. 과거 빙그레 이글스 선수가 대전야구장이나 청주야구장에서 안타를 치면 장내에 울려 퍼지던 노래가 바로 이 곡이다. 구단명이 한화 이글스로 변경된 후에도 한동안 안타 축하송으로 이 노래가 울려퍼졌지만 2000년대부터는 사라졌다.[10]
  • 옛날에는 루나 백작에게 주목하는 여성관객들이 거의 없었으나[11] 러시아바리톤 드미트리 흐보로스톱스키가 2000년 초반부터 이 역을 맡으면서 여성팬이 많이 늘어났다고 한다. [12] 국내든 외국에서든 모두 해당되는 사항. 이유인즉슨 그의 기품있고 섹시한 은발 미모와 광기마저 느껴지는 뛰어난 연기 덕분이라고. 물론 외모빨만 날린다는 건 아니고 중후하고 묵직한 음성으로 훌륭한 노래도 들려준다. 메트에서 잘생겼다고 아무나 세우는 게 아니니까... 결정적으로 2002년도 메트에서 적자 타개를 위해 공들여 기획한 영화관 상영용 프로덕션에서 흐보로스토프스키와 루나 백작의 존재감이 전세계 오페라 팬들에게 야무지게 자리잡았는데, 간지 폭발하는 장교 의상을 입고(만리코 역의 호세 쿠라는 체 게바라 스타일) 꽤 격렬한 결투 액션[13]을 소화하는 등 가히 전설로 남을 만한 멋진 무대를 보여주었다. https://youtu.be/4Qo7bBSJKqM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돈 카를로 다음으로 좋아했던 주세페 베르디오페라라고 한다. 1956년과 1977년 두 번에 걸쳐 EMI에서 음반 녹음한 것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극장과 빈 국립 가극장에서 일 트로바토레를 무대위에 꽤 많이 올렸다는 것이 그 증거.[14] 뿐만 아니라 돈 카를로에서 그랬던것처럼 연출과 무대 디자인도 카라얀 자신이 직접 담당했으니 이 작품에 얼마나 애착이 깊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참고로 위의 영상물에서 원래는 카라얀이 프랑코 보니솔리를 기용하기로 했었으나 리허설 때 보니솔리가 카라얀에게 칼을 던지고 뛰쳐 나갔고, 대타로 도밍고가 와서 만리코 역을 부른 일화가 있다. 국내에서는 성악가가 카덴짜를 남발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카라얀이 보니솔리에게 "Di quella pira"에서 하이 C를 부르지 말도록 해서 보니솔리가 화가 나서 칼을 던지고 나갔다는 일화로 알려져 있고 나무위키 이 문서에도 그런 내용이 장황하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기존에 서술된 내용과 해외 매체에 소개된 실상은 많이 다르다.
일단 카라얀이 보니솔리를 비롯한 여러 성악가들에게 하이 C를 부르지 말도록 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보니솔리는 이전에도 카라얀과 일 트로바토레를 공연했었고 EMI에서 공식 녹음도 남겼고, 비공식 실황 음원도 유튜브에 있다. 보니솔리가 카라얀과 함께 한 공연에서 모두 멀쩡하게 마음껏 하이 C를 부른다. 카라얀이 지휘한 1977년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 실황 녹음과 EMI 정규 음반을 들어보면 보니솔리는 평소에 그가 부르는 스타일 그대로 하이C를 길게 변형하여 부른다.[15]
해외 매체 및 빈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카라얀은 해당 영상물 공연 전에 공개 드레스 리허설을 했다고 한다. 영상물 촬영을 위한 사전 예행연습의 목적이 가장 컸다. 이때 많은 빈 청중들이 드레스 리허설을 보기 위해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보니솔리는 그때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Di quella pira" 앞서 "Ah, sì, ben mio"를 불렀는데, 이때 빈 청중들이 야유를 했고, 이에 보니솔리가 격앙되었다고 한다. 이어 "Ah, sì, ben mio"에서 "Di quella pira"로 넘어가는 이행 구절에서 카라얀의 지시에 보니솔리는 격분하여 카라얀에게 칼을 던진 후 무대에서 뛰어나갔다고 한다.[16] 이후 도밍고가 카라얀의 연락에 응해 급히 대역으로 출연하게 되었다고 한다.

[1] 바리톤 배역의 루나 백작과 메조 소프라노 배역의 아주체나는 일 트로바토레 최고의 인기 캐릭터로 꼽힌다. 그에 비해 만리코와 레오노라는 인기가 앞의 둘에 비해 확실히 떨어지고, 특히 만리코는 "전혀 주인공 답지 않은 주인공"이라는 평가까지 있다.[2] 여기서 루나(Luna)라는 뜻은 이탈리아어로 달을 의미한다.[3] 그라모폰지는 위의 카라얀 구반에 이어 이 음반을 베스트 초이스 2위로 꼽은 바 있다.[4] 여담으로 이 레코딩은 '더블 데카'라는 염가 보급판으로도 재발매된 적이 있다.(현재 더블데카 시리즈는 절판) 이 시리즈의 오페라 음반들은 내지에 만듦새가 굉장히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해설이 들어 있는데 이 음반에서는 루나 백작이 The evil Count di Luna로 소개되고 있다.[5] 이러한 캐스팅이 가능했던 이유는 60년대부터 70년대 후반까지 성악가 선택에 있어 반칙왕이라 불렸던 카라얀의 위세라는 추측이 대세. 참고로 이 프로덕션은 카라얀이 77년 빈에 귀환하면서 올렸던 프로덕션인데 그 때는 테너가 파바로티였다.[6] 덧붙이자면, 만리코역은 플라시도 도밍고가 아닌 프랑코 보니졸리가 부르기로 되어있었고, 보니졸리가 리허설 도중 카라얀에게 칼을 집어던지고 나가는 바람에 도밍고가 대타로 들어왔다. 그런데 이 대타가 오히려 비주얼과 연기, 그리고 Di quella pira를 제외한 나머지 노래에서 절창으로 보니졸리보다 더 큰 호평을 받았다. 실제로 영상에서도 Di quella pira에 앞서 부르는 카바티나 Ah! si, ben mio, coll'esser에서 도밍고는 빈 청중들의 열광적인 박수를 받고 있다. 해외의 한 비평가도 이 영상물에 대해서 보니솔리가 칼을 던진 덕분에 이 영상물이 비교할 수 없는 최고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찬사를 보냈다.[7] 물론, 너무 미성이라서 "레오노라를 전혀 스토킹하지 않을 거 같다."라는 감상까지 있다. 이는 미국과 일본쪽 얘기.[8] 루나 백작이 카발레타 부르기 전에 "레오노라, 그대는 나만의 것! 오로지 내 것이 되어야만 해!(Ah no, non fia D'altri Leonora!...Leonora e mia!)"라고 외치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 카푸칠리의 노래와 연기는 편집증적인 성향까지 느껴진다고 평가받는다.[9] 국내에서 루나 백작의 경우 고성현이 자주 맡는 편이다.[10] 2000년대 모 제약회사의 약 광고에도 이 합창곡이 쓰였다.[11] 옛날 바리톤들이 맡은 루나 백작은 비주얼이 너무 아저씨같아 보였다고 한다. 그나마 에토레 바스티아니니가 외적으로 루나 백작의 매력을 살렸다는 평가가 많은 편. 때문에 루나 백작이 단순한 악역이나 개그 캐릭터(...)로 본 관객들도 많았다고 한다.[12] 이 시기엔 마침 인터넷의 엄청난 발달로 전세계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바스티아니니가 아무리 멋졌다 해도 당시의 기술환경에서는 이만한 센세이션으로 이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13] 이 장면에 해당하는 1막의 3중창은 연출 정말 잘 하지 않으면 비주얼 개그가 될 위험이 몹시 큰 대목. 배나온 중년 아저씨들이 칼 쥐고 어정거리며 서로 장판교 장비마냥 소리만 지르는(...) 무대가 실제로 많다. 음악이 속도감 있고 불꽃튀는 명장면인만큼 그 모습은 더욱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14] 캐스팅도 초호화 성악진으로 구성했었다. 자세한 설명은 명반과 영상물 참조.[15] 카라얀은 성악가가 카덴차를 부르건 말건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플라시도 도밍고의 증언에 따르면 공연 전에 카라얀은 악보에 없는 고음 카덴차를 부를지 말지에 대해 아예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성악가가 하고 싶은대로 하도록 놔둔다고 한다. 심지어 카라얀은 성악가가 악보에 없는 고음 카덴차를 부르기 위해 이전 몇소절을 부르지 않는 일부 관행도 많이 허용한다. 유튜브에 있는 카라얀의 여러 음원에서 실제로 확인할 수 있다. 당장 문제가 된 일 트로바토레 1978년 영상물을 보아도 카라얀은 성악가들이 악보에 없는 고음 카덴차를 자유롭게 부르도록 하고 있다. 위 일 트로바토레 영상에서도 카라얀은 성악가들의 개인 컨디션과 기량을 배려해서 악보를 충분히 가감해서 연주하고 있다. 그래서 카라얀은 1년전 스튜디오 녹음과 다르게 실제 공연 관행에 맞추어 많은 부분을 삭제해서 연주하고 있다. 동시에 카라얀의 영상에서 성악가들은 여러 부분에서 악보에 없는 어느정도는 관례적인 고음 카덴차를 넣어 부르고 있다.[16] 어떤 증언에 따르면 이때 카라얀의 지시는 "Ah, sì, ben mio"에 대한 것이었다고 한다. 해외 문서에 따르면 보니솔리가 칼을 던지고 뛰어나간 시점은 "Di quella pira"를 부르기 전이었다고 한다. 해외 문서들 및 당시 카라얀이 지휘한 음원들을 보면 카라얀과 보니솔리의 갈등은 "Di quella pira"가 아닌 "Ah, sì, ben mio"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일 트로바토레하면 대장간의 합창과 저 타오르는 불꽃을 보라 두 곡만 유명한 편이라 이 곡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탈리아에서도 카발레타에서 성악가의 기교에 엄청난 관심을 두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진정한 오페라 팬들 중에서는 카발레타의 기교보다 진정한 아리아인 카바티나의 아름다움에 더 큰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다. 보니솔리 사건에서도 이점이 드러나는데 "Di quella pira"의 하이 C에 열광하고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이탈리아 팬들에 비해 빈 청중들은 서정적인 "Ah, sì, ben mio"를 얼마나 훌륭하게 부르느냐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스칼라에서 프랑코 코렐리가 훌륭하게 부른 공연에서 "Ah, sì, ben mio"가 끝나자 밀라노 청중들은 약 15초간 박수를 치고 저절로 박수가 사그러들자 오케스트라가 다시 연주를 시작하는데, 빈에서 도밍고가 "Ah, sì, ben mio"를 불렀을 때는 1분이 넘게 박수가 이어졌고 카라얀이 연주를 시작하면서 박수가 끊겼다. 게다가 본 문서에 적혀 있는 것처럼 보니솔리가 올려 부르는 것을 카라얀이 반대한 것이 아니라 정황상 아마도 "Ah, sì, ben mio"을 낮춰 부르길 원하는 보니솔리에 대해 카라얀이 "Ah, sì, ben mio"를 원키로 높여 부르길 원해서 생긴 갈등일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의 공연에서 "Di quella pira"는 마지막에 나오는 (악보에 없는) 고음 카덴차를 위해 키를 내려 부른다. 사람들이 흔히 플라시도 도밍고가 고음에 약해서 "Di quella pira"를 키를 낮춰부른다고 비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비난이야말로 말도 안되는 비난인 것이 도밍고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고음에서 최강자라 불렸던 파바로티, 보니솔리, 프랑코 코렐리 모두 리사이틀에서 원키로 부르는 경우가 있어도 풀 오페라 공연에서는 대부분 키를 낮춰 불렀다. 보니솔리도 이 사건 이전인 1977년 카라얀과의 실황에서도 키를 낮춰 불렀다. 문제는 "Di quella pira" 이전에 나오는 "Ah, sì, ben mio"다. 이게 대체로 "Ah, sì, ben mio"까지는 원키로 부르고, 이후 루이츠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중간에 전조되며 키가 낮아져 "Di quella pira"를 낮춰 부르는 경우가 많지만, "Ah, sì, ben mio"도 은근히 까다로운 곡이고, 중간에 전조되는 것도 애매하고 "Di quella pira"를 이어 부를 체력도 고려해야 하고 해서 "Ah, sì, ben mio"도 낮춰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77년 카라얀과 보니솔리의 공연이 그렇게 "Ah, sì, ben mio"부터 "Di quella pira"까지 3막 2장 전체를 통째로 키를 낮춰서 불렀다. 하지만 78년 영상물에서 도밍고는 "Ah, sì, ben mio"까지는 원키대로 올려 부르고, 이후 오케스트라가 키를 낮춰 "Di quella pira"를 부른다. 77년 잘츠부르크에서 보니솔리는 "Ah, sì, ben mio"도 키를 낮춰 불렀고 이때는 카라얀과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영상 녹화가 예정되어 있는 78년 녹화를 앞두고 "Ah, sì, ben mio"에서 사단이 난 것이다. 대타로 급히 투입되어 사실상 연습할 시간도 제대로 없이 투입된 도밍고는 보니솔리와 달리 실황에서 "Ah, sì, ben mio"를 원키대로 높여 불렀고, 빈 청중들에게 엄청난 박수 갈채를 받았다.[17] 2011년 9월 5일 근처에 일이 생겨 스쿠터 타고 나가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