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학자의 이름을 딴 독일의 연구 기관에 대한 내용은 막스 플랑크 협회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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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뢴트겐 | 헨드릭 로런츠 | 피터르 제이만 | 앙투안 베크렐 | |
<rowcolor=#cd9f51> 1903 | 1904 | 1905 | ||
피에르 퀴리 | 마리 퀴리 | 존 라일리 | 필리프 레나르트 | |
<rowcolor=#cd9f51> 1906 | 1907 | 1908 | 1909 | |
조지프 톰슨 | 앨버트 마이컬슨 | 가브리엘 리프만 | 굴리엘모 마르코니 | |
<rowcolor=#cd9f51> 1909 | 1910 | 1911 | 1912 | |
카를 브라운 | 요하너스 판데르발스 | 빌헬름 빈 | 닐스 달렌 | |
<rowcolor=#cd9f51> 1913 | 1914 | 1915 | ||
헤이커 오너스 | 막스 폰 라우에 | 헨리 브래그 | 윌리엄 브래그 | |
<rowcolor=#cd9f51> 1917 | 1918 | 1919 | 1920 | |
찰스 바클라 | 막스 플랑크 | 요하네스 슈타르크 | 샤를 기욤 | |
<rowcolor=#cd9f51> 1921 | 1922 | 1923 | 1924 |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닐스 보어 | 로버트 밀리컨 | 만네 시그반 | |
<rowcolor=#cd9f51> 1925 | 1926 | 1927 | ||
제임스 프랑크 | 구스타프 헤르츠 | 장 페랭 | 아서 콤프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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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윌슨 | 오언 리처드슨 | 루이 드 브로이 | 찬드라세카라 라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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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하이젠베르크 | 폴 디랙 | 에르빈 슈뢰딩거 | 제임스 채드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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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헤스 | 칼 앤더슨 | 클린턴 데이비슨 | 조지 톰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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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코 페르미 | 어니스트 로런스 | 오토 슈테른 | 이지도어 라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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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파울리 | 퍼시 브리지먼 | 에드워드 애플턴 | 패트릭 블래킷 | |
<rowcolor=#cd9f51> 1949 | 1950 | 1951 | ||
유카와 히데키 | 세실 파월 | 존 콕크로프트 | 어니스트 월턴 | |
<rowcolor=#cd9f51> 1952 | 1953 | 1954 | ||
펠릭스 블로흐 | 에드워드 퍼셀 | 프리츠 제르니케 | 막스 보른 | |
<rowcolor=#cd9f51> 1954 | 1955 | 1956 | ||
발터 보테 | 윌리스 램 | 폴리카프 쿠시 | 윌리엄 쇼클리 | |
<rowcolor=#cd9f51> 1956 | 1957 | |||
존 바딘 | 월터 브래튼 | 리정다오 | 양전닝 | |
<rowcolor=#cd9f51> 1958 | 1959 | |||
파벨 체렌코프 | 일리야 프란크 | 이고르 탐 | 오언 체임벌린 | |
<rowcolor=#cd9f51> 1959 | 1960 | 1961 | ||
에밀리오 지노 세그레 | 도널드 글레이저 | 로버트 호프스태터 | 루돌프 뫼스바우어 | |
<rowcolor=#cd9f51> 1962 | 1963 | |||
레프 란다우 | 유진 위그너 | 마리아 메이어 | 한스 옌젠 | |
<rowcolor=#cd9f51> 1964 | 1965 | |||
찰스 타운스 | 니콜라이 바소프 | 알렉산드르 프로호로프 | 리처드 파인만 | |
<rowcolor=#cd9f51> 1965 | 1966 | 1967 | ||
줄리언 슈윙거 | 도모나가 신이치로 | 알프레드 카스틀레르 | 한스 베테 | |
<rowcolor=#cd9f51> 1968 | 1969 | 1970 | ||
루이스 앨버레즈 | 머리 겔만 | 한네스 알벤 | 루이 네엘 | |
<rowcolor=#cd9f51> 1971 | 1972 | |||
데니스 가보르 | 존 바딘 | 리언 쿠퍼 | 존 슈리퍼 | |
<rowcolor=#cd9f51> 1973 | 1974 | |||
에사키 레오나 | 이바르 예베르 | 브라이언 조지프슨 | 마틴 라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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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휴이시 | 오게 보어 | 벤 모텔손 | 제임스 레인워터 | |
<rowcolor=#cd9f51> 1976 | 1977 | |||
버턴 릭터 | 새뮤얼 팅 | 필립 앤더슨 | 존 밴블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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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빌 모트 | 표트르 카피차 | 아노 펜지어스 | 로버트 윌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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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와인버그 | 무함마드 살람 | 셸든 글래쇼 | 제임스 크로닌 | |
<rowcolor=#cd9f51> 1980 | 1981 | |||
벨 피치 | 니콜라스 블룸베르헌 | 아서 숄로 | 카이 시그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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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윌슨 |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 | 윌리엄 A. 파울러 | 카를로 루비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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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판 데르 메이르 | 클라우스 폰 클리칭 | 에른스트 루스카 | 게르트 비니히 | |
<rowcolor=#cd9f51> 1986 | 1987 | 1988 | ||
하인리히 로러 | 요하네스 베드노르츠 | 카를 뮐러 | 리언 레더먼 | |
<rowcolor=#cd9f51> 1988 | 1989 | |||
멜빈 슈워츠 | 잭 스타인버거 | 한스 데멜트 | 볼프강 파울 | |
<rowcolor=#cd9f51> 1990 | 1991 | |||
제롬 프리드먼 | 헨리 켄들 | 리처드 테일러 | 피에르질 드 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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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샤르파크 | 러셀 헐스 | 조지프 테일러 | 버트럼 브록하우스 | |
<rowcolor=#cd9f51> 1994 | 1995 | 1996 | ||
클리퍼드 슐 | 프레더릭 라이네스 | 마틴 펄 | 데이비드 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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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오셔로프 | 로버트 리처드슨 | 윌리엄 필립스 | 스티븐 추 | |
<rowcolor=#cd9f51> 1997 | 1998 | |||
클로드 코엔타누지 | 대니얼 추이 | 로버트 러플린 | 호르스트 슈퇴르머 | |
<rowcolor=#cd9f51> 1999 | 2000 | |||
헤라르뒤스 엇호프트 | 마르티뉘스 펠트만 | 조레스 알표로프 | 허버트 크뢰머 | |
<rowcolor=#cd9f51> 2000 | ||||
잭 킬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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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FRS 막스 카를 에른스트 루트비히 플랑크 Max Karl Ernst Ludwig Planck | |
출생 | 1858년 4월 23일 |
독일 연방 홀슈타인 공국 킬 | |
사망 | 1947년 10월 4일 (향년 89세) |
독일국 괴팅겐 | |
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이론물리학자 |
학력 | 막시밀리안 김나지움 (1874년 졸업) 뮌헨 대학교 (물리학 / 1879년 박사) 뮌헨 대학교 (1880년 하빌리타치온) |
수상 | 노벨물리학상 (1918) NAS 회원 (1926) 로런츠 메달 (1927) 코플리 메달 (1929) 막스 플랑크 메달 (1929) 괴테상 (1945) |
소속 | 베를린 대학교 괴팅겐 대학교 카이저 빌헬름 학회 |
종교 | 루터회[1] 혹은 이신론에 가까움[2] |
배우자 | 마리 메르크 (1887년 결혼 – 1909년 사별) 마르가 폰 호슬린 (1911년 결혼) |
자녀 | 5명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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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물리학자.흑체복사에 대해 연구하다가 양자역학의 성립에 핵심적 기여를 했으며(즉 에너지는 양자단위다), 플랑크 상수의 발견자이다. 191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을 했다.
2. 생애 전반기
1858년 4월 23일 북독일의 한 작은 도시인 킬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플랑크의 아버지는 법학 교수였으며, 그의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모두 괴팅겐 대학교의 교수였고, 친척들 중에 변호사, 학자, 목사 등이 많은 소위 말하는 인텔리 집안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배움에 대한 열의가 남달랐다.1867년 가족들이 킬에서 바이에른 왕국 수도인 뮌헨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플랑크는 그곳에서 막시밀리안 김나지움에 입학한다. 이때 학교 교사를 통해 에너지에 대해 처음 접했다. 그때부터 물리에 푹 빠진 그는 그 후 1874년 뮌헨 대학교 철학부[3]에 입학해 학업을 시작했다.
지도교수 필립 폰 욜리(Philipp von Jolly)는 플랑크에게 이론 물리학은 이제 더이상 밝혀낼 것이 없다고 하며 물리학 지원을 만류하였지만, 플랑크는 그 말을 듣지 않고 기어이 물리학으로 진로를 결정했다고 한다. 이 일화에 대해 부연설명하자면, 19세기 말 물리학자들은 전자기학 이론이 집대성된 이후 인류는 이제 물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어 더이상 물리학은 연구할 필요가 없다는 오만한 착각에 빠져있었다. 수성의 근일점 이동이나 흑체복사 등 소수의 현상들에서 기존의 물리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소한 문제들이 있었지만, 그것도 차츰 해명되리라고 여겼다. 지도교수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저런 조언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플랑크가 그 밝혀지지 않은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 연구하다가 양자의 개념을 발견해내면서 더이상 물리학은 밝혀낼 것이 없다는 물리학자들의 착각을 깨부수고 현대물리학이라는 새로운 장을 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플랑크의 결정은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탁월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이후 1878년 베를린 대학교에서 헤르만 폰 헬름홀츠(1821–1894)와 구스타프 키르히호프(1824–1887)[4]에게 배우고, 다음해 6월 뮌헨 대학교에 '열역학 제2법칙에 관해'라는 논문을 제출, 최우등 성적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연이어 1880년에 교수자격 학위를 받고 강사로 지내다 1885년 킬 대학 수리물리학부 부교수에 부임했다. 1889년 사망한 키르히호프의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 부교수가 되었고, 이후 1892년에 정교수로 승진하였다.
3. 흑체복사 연구의 배경
그가 교수가 될 무렵 물리학에서는 막 새로운 개념이 쏟아지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맥스웰의 전자기학 이론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했던 것. 하인리히 루돌프 헤르츠가 맥스웰이 예언한 전자기파의 존재를 발견한 것은 고작 1888년의 일이었다.한편, 1864년 존 틴들이 가시광선과 적외선의 복사와 관련한 실험 데이터를 발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879년 슬로베니아 출신의 요제프 슈테판[5]이 복사의 세기가 절대온도의 네제곱[math({\left(T^4\right)})]에 비례한다는 것을 귀납적으로 주장했고, 1884년 오스트리아의 루트비히 볼츠만이 통계학을 열복사에 적용하여 놀랍게도 이론적으로 증명에 성공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슈테판-볼츠만 법칙(Štefan-Boltzmann-Gesetz)"이다.
1886년에는 미국의 천문학자 랭글리(S. P. Langley, 1834–1906)가 흑체(에 근사한) 구리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와 태양을 비교하는 실험을 통해 열복사의 실험적 정확한 측정에 성공했다.[6] 다음해인 1887년, 랭글리의 볼로미터 실험에 이론적 근거를 더해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마이켈슨(Wladimir Michelson, 1860–1927)의 이론이 창안되었고, 취리히 공대의 H.F. 베버를 거쳐 1892년 베를린 대학의 빌헬름 빈(Wilhelm Wien, 1864–1928)이 통계역학적으로 '빈 법칙(Wiensches Strahlungsgesetz)'과 '빈 변위 법칙(Wiensches Verschiebungsgesetz)'을 발견하게 된다.
빈의 법칙에 따르면, 최대 세기의 파장과 온도의 곱이 상수값으로 나타나므로, 파장과 온도는 반비례한다. 즉 온도가 높아질수록 흑체에서 방출하는 전자기파 중 세기가 가장 큰 전자기파의 파장이 짧아진다.[7]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빈의 발견 이후 3년 뒤, 1895년 프리드리히 파셴(Friedrich Paschen, 1865–1947)[8]이 좀 더 정확한 실험으로 새 유도식을 만들어내는데, 이 과정에서 빈의 데이터를 약간 수정하게 된다. 그러나 빈은 이런 파셴의 변형이 슈테판-볼츠만 식과 정면 충돌한다는 걸 인식하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9] 이런 혼란기에, 빈의 발견으로 흑체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플랑크가 등장하게 된다.
4. 양자의 개념을 발견하다
플랑크는 다음과 같은 수식을 발견한다. 이 수식은 실험결과와 일치하며 기존의 빈, 파셴이 발견한 두가지 수식 모두를 설명 할 수 있다.[10] 아래 식에서 [math(c_{1L})]은 제1 복사 상수로 [math(c_{1L} = 2hc^2{\rm\,sr^{-1}})]이며, [math(c_2)]는 제2 복사 상수로 [math(c_2 = \cfrac{hc}{k_{\rm B}})]이다.[math(E = \dfrac{c_{1L}\lambda^{-5}}{e^{\frac{c_2}{\lambda T}} - 1} )] |
빛이 파동이므로 에너지가 연속적으로 존재할 것이라는 기존의 상식과 위배되는 가정이다.
이러한 에너지의 양자화는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로 이어지게 된다.
5. 말년과 사후
노년기의 막스 플랑크 |
플랑크는 하버를 변호할 당시, 히틀러에게 "독일 문화를 만드는데 기여한 쓸모있고 똑똑한 유대인들은 제발 보호해달라"며 탄원했지만 히틀러는 "아무리 똑똑해도 유대인은 유대인일 뿐"이라며 완고하게 거절했는데, 플랑크는 히틀러의 인종주의적 완고함이 결국 독일을 무너뜨릴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는 일화가 있다. 결국 플랑크의 말 그대로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고 말았다.
연합군에 의해 독일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이는 연구기관인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가 이름을 변경하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막스 플랑크 협회가 되었다. 현재 포스텍에 아시아 지부가 있다. 그런데 이 연구소는 단순히 물리학 연구소가 아니라 독일의 기초 과학 전 분야를 망라하는 연구 협회 산하 연구소들의 집단이다. 더 중요한 것은 여기서 말하는 기초 과학이라는 것이 흔히 생각하는 자연과학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응용과학(공학), 사회과학, 인문과학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 총망라되어 있다. 덕분에 막스 플랑크 조세 재정 연구소, 막스 플랑크 종교 및 인종 다양성 연구소, 막스 플랑크 미술사연구소 같이 언뜻 보면 왜 앞에 막스 플랑크라는 물리학자 이름이 붙어있는지 잘 이해가 안가는 연구소도 있다.
6. 기타
6.1. 후학들의 구세주?
양자역학의 천재들이 등장하는 세대의 앞세대 격이다. 태어난 시기도 최소 20년(아인슈타인의 경우) 이상 차이 났다. 그래서 플랑크 본인은 보수적 학자로, 사실 양자라는 개념을 믿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왕따를 당했던 프리츠 하버의 재능을 인정해주었던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특허청 공무원 신분으로 논문을 작성하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발굴해낸 공로도 높게 평가된다. 아인슈타인이 특허청 공무원 시절에 쓴 논문 3편은 한편한편이 각각 물리학의 새로운 과목을 만들어낸다. 상대성 이론, 광전효과(양자역학), 브라운 운동(카오스역학). 그것도 세 논문 모두 1905년 한 해 동안 발표했다. 1905년 '물리학 연보'의 편집자였던 플랑크는 아인슈타인이 쓴 논문의 진가를 알아보고 논문에 대한 세미나를 주최했다. 1908년 아인슈타인이 교수자리를 얻는 과정에서 플랑크가 도움을 준다. 아인슈타인이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을 때에도 플랑크는 이론이 아름답다며 적극 추켜세웠다. 플랑크의 실증주의에 대한 관점도 아인슈타인의 관점과 매우 유사했다. 플랑크는 1880년대 20대 시절 마흐 실증주의의 추종자였으나 이후 돌아섰으며, 아인슈타인도 한때는 마흐의 관점에 동의했다. 플랑크와 아인슈타인 모두 코펜하겐 해석은 과도한 실증주의의 함정에 빠져서 물리학적으로 중요한 요소들을 놓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스갯소리로 "막스 플랑크는 두 가지 위대한 발견을 했다. 하나는 양자역학이고 다른 하나는 아인슈타인이다."라는 말도 돌아다닐 정도다.
6.2. 플랑크 원리
A new scientific truth does not triumph by convincing its opponents and making them see the light, but rather because its opponents eventually die and a new generation grows up that is familiar with it ...
새로운 과학적 진실은 자신의 반대자들을 설득해 계몽시키면서 승리하기보단 그 반대자들이 결국 죽고 자신에게 친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면서 승리한다.
An important scientific innovation rarely makes its way by gradually winning over and converting its opponents: it rarely happens that Saul becomes Paul. What does happen is that its opponents gradually die out, and that the growing generation is familiarized with the ideas from the beginning: another instance of the fact that the future lies with the youth.
중요한 과학적 혁신은 반대자들을 천천히 지지자로 만들면서 성장하지 않는다: 성경에서처럼 사울이 바울로가 되는 현상은 보기 어렵다.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은 반대자들이 서서히 죽고, 처음부터 그 혁신에 친숙했던 세대가 성장하면서 생긴다: 이것은 미래가 젊은이들에게 속한다는 또 다른 예시일 것이다.새로운 과학적 진실은 자신의 반대자들을 설득해 계몽시키면서 승리하기보단 그 반대자들이 결국 죽고 자신에게 친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면서 승리한다.
An important scientific innovation rarely makes its way by gradually winning over and converting its opponents: it rarely happens that Saul becomes Paul. What does happen is that its opponents gradually die out, and that the growing generation is familiarized with the ideas from the beginning: another instance of the fact that the future lies with the youth.
중요한 과학적 혁신은 반대자들을 천천히 지지자로 만들면서 성장하지 않는다: 성경에서처럼 사울이 바울로가 되는 현상은 보기 어렵다.
플랑크가 과학혁명에 대한 구조를 얘기하면서 남긴 말이 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과학자들은 자신이 믿는 이론을 잘 바꾸려 하지 않는다'라고 할 수 있다. 토마스 쿤은 이를 '과학 발전은 진실과 사실로 이뤄지기보다는 다소 비이성적이다.' 고 주장할 때 활용했다.
6.3. 불우한 개인사
학자로서의 화려한 업적과는 대조적으로, 개인으로서는 매우 불행한 일들을 여러 차례 겪었다. 그의 아내인 마리 메르크와는 22년 만에 사별하고(그나마 재혼은 했다. 24살 연하하고), 첫째 아들은 제1차 세계 대전 때 전사하며, 두 딸들은 모두 출산 중에 사망한다.그 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이번에는 그의 둘째 아들 에르빈이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었다. 막스 플랑크는 그 소식을 듣고 히틀러에게 자신의 지위를 빌어 아들을 용서해달라고 청원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에르빈은 결국 1945년 1월 23일 처형되고 만다. 그리고 주변의 물리학자들은 핍박과 전쟁을 피해 모두 떠나갔으며 베를린에 있는 자신의 집은 폭격으로 쑥대밭이 되어 자신의 각종 물리학 실험 데이터들과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리고 재혼한 부인도 막스 플랑크가 죽은지 1년후에 죽었고, 재혼한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도 1954년 43세로 사망했다.
이러한 불행들 때문에 어찌나 힘들었는지, 플랑크는 말년에 "죽음만이 구원이 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7. 참고문헌
[1] 여러 자료에서의 설명이다.[2] J. L. Heilbron, The Dilemmas of an Upright Man: Max Planck and the Fortunes of German Science, With a New Afterword (Harvard University Press, 2000), 198.[3] 당시 이과는 철학부 소속이었다. 19세기만 해도 과학과 철학의 분리가 명확치 않았다.[4] 흔히 이과생에겐 키르히호프의 회로 법칙으로도 유명하지만 플랑크의 지도교수로서는 "키르히호프의 흑체 복사 법칙"과 연결이 된다. 이 법칙은 흑체의 복사강도 분포가 온도와 파장에만 의존한다는 것이다.[5] 요제프 슈테판은 볼츠만의 스승, 참고로 아레니우스는 볼츠만의 제자.[6] 천문학자가 왜 흑체를 연구하냐면, 당시만 해도 항성이 바로 전형적인 흑체로 가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다 그런건 아니지만 초보적 천체물리에서는 유용한 가정이라고 한다.[7] 이것은 별이 온도가 높을수록 푸른색을 띄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8] 수소 원자 방출 스펙트럼 파셴 계열의 그 파셴이다.[9] 결론부터 말하면 빈이 틀렸으며, 빈의 가정에 따라 에너지 식을 유도할 경우, 분모에서 1을 빼야한다는 사실을 이끌어낼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우변의 한 항을 [math(\cfrac1{e^{\frac{h\nu}{k_{\rm B}T}}-1}\approx e^{-\frac{h\nu}{k_{\rm B}T}})]로 잘못 유도한 것인데, 실상은 플랑크가 유도한 [math(E=\cfrac{c_{1L}\lambda^{-5}}{e^{\frac{c_2}{\lambda T}}-1})]이 맞다. 물론 빈의 실험 자체에서는 1은 의미있는 값이 아니었지만, 이 작은 차이가 양자역학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래도 빈은 1911년 빈의 법칙 발견만으로도 노벨상을 수상하였다.[10] [math(\lambda)]가 매우 작을 때와 매우 클 때를 기준으로 근사하면 각각의 공식이 유도된다.[11] 물론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기 전 히틀러는 과장 조금 보태서 모든 독일인들이 지지한다고 해도 될 정도로 압도적인 지지율을 등에 업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나치가 독일내에서 벌인 깽판들, 유대인 및 소수민족 학살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삽질 때문에 지식인들은 히틀러의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고, 나치에 부역하던 베르너 폰 브라운이나 레니 리펜슈탈 같은 인물들도 훗날 문제가 될 수도 있는 흉악범죄는 저지르지 않는 선을 지키며 히틀러 및 나치당과 손절할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12] 결론부터 말하면 전기 산업가 지멘스(시멘스, Werner von Siemens)가 후원한 제국물리기술연구소(PTR)와 샤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 베를린 대학의 국가지원 산학협동 연구 때문으로, 당시 백열등의 필라멘트 성능을 위한 측면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