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2:39:06

루돌프 피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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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의사로서의 피르호3. 인류학자로서의 피르호4. 정치가로서 피르호5. 흑역사6. 기타

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udolf_Virchow_NLM3.jpg
Rudolf Ludwig Karl Virchow
(1821년 10월 13일 포메른주 시펠바인(現 폴란드)~ 1902년 9월 5일 베를린)

프로이센 왕국 · 독일 제국의사이자 병리학자 · 인류학자 · 정치가.

병리학 연구의 선구자로서 현대 의학의 기틀을 다졌을 뿐 아니라 공중위생과 보건복지 정책을 적극 도입하여 빈민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때문에 오늘날에는 흔히 병리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피르호는 당대 독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가 죽자 신문에 "독일은 위대한 인물 4명을 잃었다. 위대한 의사, 위대한 자유주의자, 위대한 인류학자, 위대한 위생학자"라는 논고가 실렸을 정도였다. 그는 의학자연과학의 꽃이자 가장 중요한 사회과학으로 여겼으며 실제로 두 분야[1]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의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대변인이다."라는 신념 하에 수많은 정책을 실시하였고, 일생 내내 사치를 하지 않았다.

2. 의사로서의 피르호

아이작 뉴턴 이후 과학적 방법론이 모든 학문을 휩쓸며 큰 영향을 미쳤다. 의학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여전히 의학은 의사[2]의 반발에 의해 형이상학에 치우쳐져 있었다. 그러나 젊은 의사들을 중심으로 과학적 방법론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르네 데카르트의 근대 철학에 영향을 받아, (현재의 의학과 이전 세대의 의학이 가장 큰 차이가 나는) 과학적 근거에 따른 의학이 받아들어 졌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피르호라고 할 수 있다. 즉, Evidence Based Medicine은 서양 의학에서도 19세기에 와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피르호는 학창시절 데카르트와 근대철학[3]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에 "세포의 병이 신체를 병들게 한다."라고 생각, 세포병리학 연구의 장을 열었다. 이는 피르호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는데, 세포병리학 연구 이후로 자신은 색전증과 백혈병 연구로 명성을 쌓았고, 후대의 많은 의사와 의학자들이 피르호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빛나는 업적들을 이뤄냈다. 실제로 피르호의 위 업적 덕택에 의학은 과거의 형이상학에서 벗어나 현대 의학이라 불릴 수 있게 되었으며 드디어 과학이라는 범주에 들 수 있게 되었다. 사실 피르호 사후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의학의 패러다임은 그가 창시한 그것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 당장 의 진단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최종 단계의 확진은 암으로 추정되는 부분을 생검해 세포병리학적으로 암세포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가 의학에 남긴 족적은 염증의 삼대 임상 소견[4]을 일컫는 피르호의 삼증상 등의 명칭에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피르호의 가장 큰 의학적 업적은 세포병리학이지만, 예방의학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예방의학의 선구자로는 영국의사 존 스노우가 있었다. 19세기영국을 강타한 콜레라의 피해를 역학적 연구방법을 통해 막아낸 인물로, 당시 의학 수준은 높지 않았지만, 명망 있는 마취과 의사였던 존 스노우 덕분에 런던의 콜레라는 진정될 수 있었다. 피르호 역시 위 사건에 대해 알고 있었고, 공중위생이 질병예방에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 공중보건운동을 직접 진두지휘 했다. 덕분에 독일의 공중보건은 진일보 하였으며, 실제로 전염병을 크게 예방하였다. 이는 전염병이 의학적 현상으로만 여겨질 것이 아니라 공공보건과 같은 사회경제적 요건에 의해 크게 구애받는다는 것을 파악한 피르호의 혜안에 힘입은 바가 컸고, 질병의 사회적 성격이라는 아이디어는 피르호의 정치적 입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보건학 및 사회의학과 병리학에 큰 족적을 남긴 세계사적인 인물이지만 한국에서는 세포병리학을 포함한 그의 저작들이 단 한 권도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3. 인류학자로서의 피르호

당대 피르호는 의사로서 가장 유명했지만 역시 저명한 인류학자였다. 의학적 지식이 뛰어났던 피르호는 각 유럽의 민족들의 해부학적 비교 연구를 실시하였다. 이는 각 지방마다, 민족마다 유골들을 비교연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독일인이 타 인종에 비해 우월하지도 않으며, 순수민족이란 증거가 없다.'였다. 이 연구 결과를 받아 들이지 못한 아돌프 히틀러는 피르호를 후대에 깎아내렸다. 이 외에도 1,180편의 인류학 논문을 썼으며, 하인리히 슐리만과 더불어 트로이 발굴에 참가하였다. 덕분에 베를린 박물관이 풍족해졌다.

그는 인류학자로서 인종 간의 차별을 반대하는 진보적인 성향도 지니고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진화론을 부정하는 성향도 지니고 있었다. 후술하겠지만,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을 단순 현생인류의 화석이라 단정지은 것도 이 때문었다.

4. 정치가로서 피르호

1859년 베를린 시의회를 거쳐 1862년 프로이센 왕국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했다. 그리고 1880년부터 1893년까지 제국의회(Reichstag) 의원이었다. 당대 가장 유명한 좌파 정치인이었던 피르호는 군 예산 증액을 항상 반대하였고, 대신 공중보건 및 위생 쪽으로 예산 집행을 하려 하였다. 이는 그가 의사로 활동하면서 빈민들의 전염병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중위생과 의료복지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강한 신념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철혈재상으로 유명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는 정치 생활 내내 대립하였다. 군 예산 증액을 언제나처럼 거부한 피르호에게 격노한 비스마르크는 1865년에 이르러 피르호에게 결투를 신청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당시 프로이센에서는 결투가 이미 낡은 구습으로 치부되고 있어서 의회에서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피르호 또한 정중하게 거부의사를 밝히면서 두 사람의 결투는 무산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도 시정잡배들도 아닌 거물 정치가들이 서로 목숨을 걸고 결투를 벌인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인지 이 사건은 피르호 개인의 명예와 명성에는 아무런 누가 되지 못했다.

몰상식의 영상.

오늘날에는 이 결투 사건에 대해 잘못된 정보가 돌아다니고 있다. 그에 따르면, 당시 피르호가 비스마르크의 결투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무기는 자신이 선택하게 해 줄 것을 요구했고, 실전 경험이 없는 의사 한 사람 정도는 쉽게 이길 자신이 있었던 비스마르크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결투 당일에 피르호는 결투 무기로 두 개의 소세지를 들고 왔다. 그 소세지 중 하나는 멀쩡했지만, 또 하나는 선모충이 들어 있어서 먹을 경우 치명적인 장염을 일으켜 죽을 수도 있었다. 피르호는 비스마르크에게 "각하가 먼저 소세지 하나를 선택하시면 제가 나머지 하나를 선택하겠습니다."라 말했고, 예상치 못한 방식에 어안이 벙벙해진 비스마르크는 결투를 포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피르호가 재치를 발휘해 비스마르크를 골탕 먹인 이야기는 비록 극적이고 코믹하기는 하지만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가십에 불과해 보인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결투 신청이 있었던 1865년으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후인 1893년, 미국의 의학잡지인 《A Monthly Homœopathic Medical Journal》 22호에 실려서 유포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피르호가 비스마르크의 결투신청을 거부하면서 보냈던 편지의 내용은 아직도 남아 있는데, 둘 중 어느 쪽이 더 신뢰성이 있을 지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5. 흑역사

독일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후두암을 잘못 진단하여 치료 시기를 놓치고 결국 이른 죽음을 맞게 한 흑역사가 있다. 프리드리히 3세가 좀 더 오래 재위했다면 그 아들 빌헬름 2세의 온갖 삽질을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었고, 제1차 세계 대전도 어쩌면 실제보다 덜 참혹하게[5] 일어났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피르호의 오진은 흑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프리드리히 3세의 암이 당대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종류의 암이었다는 사실, 제1차 세계 대전과 같은 역사적 대사건이 단지 일국의 군주의 성향에 의해서 좌우될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이 부분에서 피르호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 수 있다.

제일 심각한 잘못은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이 발견되었을 때, 이것은 관절염을 앓은 현생 인류의 화석이라 주장하며 연구를 막은 것이다. 피르호가 바로 독일이 그러한 현장을 두고도 고인류학 학문 주도에서 낙오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가 오판했던 이유는 피르호가 입수했던 화석이 하필이면 생존 당시에 심한 관절염을 앓은 개체였기 때문... 그래도 추가 연구까지 막은 것은 흑역사가 명백하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피르호가 진화론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도 이런 오판의 큰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6. 기타

라몬 막사이사이와 함께 필리핀의 양대 국부로 숭앙받는 호세 리잘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스페인에서 의학 공부를 하던 유학생인 그를 만나 그 천재성을 알아보고는[6], 그를 독일로 초청해서 베를린 아카데미에 가입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당시 그는 리잘이 독일에 입국한지 고작 2개월 만에 독일어를 마스터하고 유창하게 강의까지하는 모습에 크게 감탄했다.

von작위를 받으라는 제안을 거절했다.

1910년 베를린에 동상이 세워졌다.
[1] 자연과학으로서의 의학, 사회과학으로서의 의학[2] 특히 귀족 출신의 엘리트[3] 특히 기계론[4] 발적, 통증, 부종[5] 비스마르크가 갑작스럽게 물러나지 않고 후대를 준비할 수 있었다면 독일 제국의 외교 정책도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에, 독일 제국이 1차대전에 참전하지 않거나 전쟁이 국지전에 그칠 가능성도 찾을 수 있다.[6] 호세 리잘은 살아생전에 22개의 언어를 구사했으며, 전공인 의학 이외에도 자연과학에 조예가 깊고 여러 언어로 시를 쓰기도 한 희대의 천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