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버스터 전쟁 Filibuster War[1] | |
1855년 6월 1일 ~ 1857년 5월 5일 | |
장소 | |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 |
원인 | |
니카라과의 내전과 윌리엄 워커에 대한 자유당의 개입 요청 명백한 운명론에 따른 필리버스터의 제국주의 | |
교전국 및 교전 세력 | |
필리버스터 용병단 | 중앙아메리카 연합군[2]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
지휘관 | |
윌리엄 워커 프란시스코 카스테욘 호세 트리니다드 무뇨스 찰스 프레데릭 헤닝센 버킷 데벤포트 프라이 콜리어 C. 혼스비 도밍고 고이코우리아 바이런 콜 | 토마스 마르티네스 게레로 페르난도 차모로 알파로 막시모 헤레스 테예리아 후안 라파엘 모라 포라스 호세 호아킨 모라 포라스 플로렌시오 샤트루크 호세 빅토르 사발라 라몬 베요소 호세 마리아 카냐스 찰스 H. 데이비스 |
병력 | |
용병 5,213명(1855~1857)[3] | 코스타리카군 2,500명 중앙아메리카 연합군 4,000명[4] |
피해규모 | |
1,000명 사망 | 1,202명 사망 |
코스타리카에서 콜레라로 1만 명 사망 | |
결과 | |
중앙아메리카 연합군의 승리 윌리엄 워커 휘하의 필리버스터 용병단 패배 | |
영향 | |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의 민족주의 운동 강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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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버스터 전쟁은 1855~1857년 니카라과의 주권을 두고 벌어진 필리버스터와 중앙아메리카 연합군[5] 사이의 전쟁이다. 미국인 용병 윌리엄 워커가 지휘하는 소규모 부대가 1856년 니카라과를 점령했으나 이듬해 축출되었다.이 문서에 쓰인 필리버스터의 의미는 오늘날과 다르다. 영어에 갓 추가된 당시에는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무장집단, 특히 무허가 용병 단체를 의미했다.
2. 배경
1838년 니카라과는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으로부터 독립하였지만 외세의 개입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미국은 1850년대 골드 러시의 영향으로 캘리포니아로 인구가 몰리자 자국의 서해안과 동해안을 이어줄 최단거리의 해상통로를 찾는 일이 급해졌다.[6] 파나마 운하가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 가장 주목받는 나라가 바로 니카라과였다. 미국은 거대한 니카라과호를 경유하여 서해안과 동해안을 잇는 방법을 구상했다. 미국은 1850년 영국과 클레이튼-불워 조약(Clayton-Bulwer Treaty)을 체결하여 중앙아메리카의 중립화, 군사 요새와 식민지 건설 포기, 양국 간의 대등한 통상권을 보장하였다. 또한 미국 서해안으로 가려는 동해안의 노동자들은 코닐리어스 밴더빌트가 세운 액세서리 운수회사(Accessory Transit Company)를 통해 니카라과를 경유하여 서해안으로 갔다. 즉,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미국은 이미 니카라과를 교통 목적으로 잘만 이용하고 있었다.윌리엄 워커 |
3. 필리버스터-자유당의 공세와 정권 수립
니카라과의 지형도 | 니카라과의 도시와 주요 지명 |
10월 13일 워커의 군대는 보수당의 중심지 그라나다에 입성하여 사실상 니카라과 전역을 제패했고[8], 23일 보수당에 자기가 제시한 평화조약을 관철하여 내전을 종식하였다. 워커는 파트리시오 리바스를 괴뢰 대통령으로 앉히고 자신은 니카라과군의 총사령관으로서 니카라과를 통치했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는 1856년 5월 20일 워커가 세운 괴뢰정권을 니카라과의 합법정부로 인정했다.
4. 제국(諸國)의 역습
니카라과를 사실상 점령한 윌리엄 워커는 인접국을 추가로 정복하겠노라고 큰소리를 쳐 중앙아메리카 제국(諸國)의 지대한 어그로를 끌었다.[9] 코스타리카 대통령 후안 라파엘 모라는 일체의 교섭을 거부하고 선전포고를 날렸다. 워커는 코스타리카가 본격적인 군사행동을 벌이기 전에 먼저 침공하여 선수를 쳤다. 코스타리카 침공군을 지휘한 루이스 슐레진저는 1856년 3월 산타로사에서 압도적인 전력차에 밀려 패배했다. 코스타리카군은 4월 월경하여 리바스에서 다시 필리버스터에 패배를 안겼다.[10] 연패 소식에 완전히 맛이 가버린 것인지, 워커는 7월 12일 리바스 대통령도 갈아치우고 대선에 단독출마하여 니카라과 대통령이 되었다.[11] 자칭 대통령 워커는 갖가지 기이한 정책을 추진했는데 미국 남부 주들의 지원을 얻을 목적으로 노예제를 재도입하고[12], 영어를 공용어로 삼았다.[13] 또한 미국으로부터의 이민을 촉진하기 위해 니카라과의 통화 및 재정 정책을 개편했다.워커가 뻘짓을 하는 동안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과테말라는 1856년 7월 18일 과테말라 시티에 모여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이때 코스타리카는 콜레라로 전국민의 1/2이 감염되고 1/11이 사망하는 헬게이트가 벌어지고 있었으므로 내정수습을 위해 나중에 참여했다. 또한 파트리시오 리바스를 니카라과의 합법 대통령으로 인정했다. 9월 12일에는 리바스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데 뭉친 자유당과 보수당 파벌들이 워커에게 선전포고하였다. 9월 14일 북부군(당시 중앙아메리카 연합군의 명칭)은 산하신토에서 필리버스터에게 다시 한번 승리를 거두었다. 워커는 11월 마사야를 다시 공격했지만 이번에도 병력의 1/3을 잃는 대패를 당했다. 비슷한 시기 코스타리카도 필리버스터와 전쟁을 재개했다. 11월 말 중앙아메리카 연합군 4,000명은 그라나다까지 포위공격했다. 워커는 그라나다 수비를 포기하고 달아났지만 그 전에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2월 14일 도시를 접수한 연합군이 본 것은 처참히 파괴된 도시와 워커 측이 남긴 여기는 그라나다였다(Aquí estuvo Granada)는 표지판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발악으로도 전세를 돌릴 순 없었다. 코스타리카군은 1857년 1월 워커가 신병과 물자를 공급받던 남동부 산후안강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코닐리어스 밴더빌트가 코스타리카를 도왔다. 같은 미국인인 밴더빌트가 왜 워커를 적대했냐면 이 자칭 대통령이 액세서리 운수회사의 자산을 압류하고 회사 소유 증기선을 용병과 물자를 실어나르는데 전용했기 때문이다. 즉 이것도 워커가 저지른 일의 업보였다. 한편 중앙아메리카 연합군에 신명나게 털리던 워커는 1857년 4월 리바스를 다시 점령했다가 연합군에게 포위되었다. 완전히 고립된 워커는 연합군 측에 항복할 순 없다고 아득바득 우겼다. 놀랍게도 워커는 다시 한번 무쌍을 찍으며 연합군에게 여러번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이런 전술적 성공으로도 전략적 열세를 만회할 순 없었고 1857년 5월 1일 미해군 대령 찰스 H. 데이비스에 항복했다. 당시 무장해제된 필리버스터는 463명이었다. 워커는 5일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5. 이후
윌리엄 워커는 본국으로 송환된 후로도 정신을 못 차리고 니카라과 지배를 획책했으나 연이어 실패했다. 그러자 워커는 온두라스로 할양될 예정이던 영국령 이슬라스데라바이아의 로아탄 섬의 영국인 개척민들의 요청을 받아 용병을 이끌고 온두라스로 갔다. 트루히요 시를 점령하여 깽판을 치던 워커 일당은 영국군에 토벌되었고 워커 자신은 온두라스군에 넘겨져 총살되었다.한국에서 윌리엄 워커가 유명해지게 된 계기다. 다만 어쩌다보니 정보에 군살이 붙어서 아예 황제를 자칭했다는 오정보도 유포되었다.
6. 참고 문헌
- Filibusters and Financiers: The Story of William Walker, and His Associates(1916), William O. Scroggs, The Macmillan Company
- Battle Cry of Freedom: The Civil War Era(1988), James M. McPherson, Oxford University Press
- The diplomacy of trade and investment: American economic expansion in the Hemisphere, 1865–1900(1998), David M. Pletcher, University of Missouri Press
- A Brief History of Central America(2007), Lynn V. Foster, Checkmark Books; 2nd edition
[1] 워커 사건(Walker affair)이라고도 한다. 니카라과에서는 1856~1857년 기간만 묶어서 니카라과 국가전쟁(Guerra Nacional de Nicaragua)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 스페인어로 Ejército Aliado Centroamericano.[3] 누적 인원이며, 일시 병력은 3,500명을 넘은 적이 없다.[4] 누적 인원은 21,000명이다.[5]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6] 물론 미국은 동서로 이어지는 장대한 철도를 건설하긴 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물류는 해상이 제일 저렴하다.[7] 사실 니카라과는 독립 이래 이념차로 쿠데타와 내란을 상시 겪고 있었다.[8] 니카라과는 건국 당시부터 보수주의 성향의 그라나다와 자유주의 성향의 레온으로 나뉘어 갈등을 벌였다.[9] 당시 니카라과를 비롯한 중앙아메리카 제국의 국력을 보면 워커의 위협은 단순한 허풍이 아니었다. 워커가 현지인 병력까지 모두 합쳐도 330명밖에 안되는 군대로 니카라과를 제패한 이유는,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에르난 코르테스나 잉카 제국을 정복한 프란시스코 피사로처럼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로 분열된 니카라과의 상황을 잘 활용한 것도 있지만, 애초에 중앙아메리카 제국의 인구가 워낙 적었기 때문이다.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 시절인 1823년 니카라과 인구는 17만 4,213명이었고 1865년 인구도 25만 명밖에 안 되었다. 수도라는 마나과도 1860년대 인구가 1만 명밖에 안 되었다. 니카라과 옆나라 코스타리카는 한술 더 떠서 1823년 인구가 6만, 1856년 인구가 11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 정도면 상황에 따라 330명도 무시 못 할 전력이 된다. 게다가 워커는 미국인의 모병을 계속 받아 병력을 확충했고 니카라과를 손에 넣어 그 자원과 인구도 일부나마 부릴 수 있게 되었다.[10] 이때 필리버스터가 있는 곳을 불태우는 과정에서 순국한 코스타리카 군인 후안 산타마리아는 전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다.[11] 리바스 대통령은 굴복하지 않고 워커를 반역자라고 공개 디스하는 패기를 보여줬다. 그는 서부에 남아 다른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의 지원군을 받았다.[12] 니카라과는 1824년 노예제를 폐지했다.[13] 니카라과인 대다수는 스페인어를 모어로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