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 | Heidelberger Katechismus |
1. 소개
16-17세기 종교개혁이 꽃을 피우면서 유럽 전역에서는 가톨릭에 대항하여 개신교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스위스, 독일, 트란실바니아 공국[1], 스코틀랜드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2] 등지에서 수많은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이 작성되고 출판되었다. 각 나라가 처한 상황에 따라 교회가 반드시 붙잡아야 할 진리의 핵심 내용을 문서로 정리하고 가르치며 공유하기 위하여 작성된 이 문서들은 각각 고유의 특징은 가지고 있되, 핵심은 전부 일치하고 있다.개혁교회가 가진 신앙에 대한 가장 명확한 해설이 바로 고백문서들이라는 점은 16세기 종교개혁 시대를 거치며 개혁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나타내주고 있다.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의 불씨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어감에 따라 교황과 가톨릭은 종교개혁 정신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영원한 지옥에 빠질 자들로 저주했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결코 이단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반으로 하여 세워진 신앙임을 명확히 드러내기 위하여 신앙고백서들을 작성하였다. 특히 1560년대에는 종교개혁의 1-2세대들의 영향을 받은 신앙고백서들이 작성되었는데 스코틀랜드 신앙고백(1560), 벨직 신앙고백(1561), 제2 스위스 신앙고백(1566)등이 대표적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역시 당시 동시대의 개혁에 대한 요구 가운데 팔츠 선제후국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3]의 주도로 1563년 우르시누스에 의해 작성되었다.
2. 팔츠 선제후국의 종교개혁
2.1. 인물들
2.1.1.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Friedrich III, von der Pfalz 1515~1576)
자세한 내용은 프리드리히 3세(팔츠) 문서 참고하십시오.2.1.2.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Kaspar Olevianus, 1536~1587)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는 독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중심도시 트리어[4]에서 태어났다. 그는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14세에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 왕국으로의 유학길에 올랐다. 파리에서 종교개혁의 현장을 경험하고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사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가운데 개신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장 칼뱅의 글을 열심히 공부했고 후에 제네바에서 칼뱅에게 직접 배우고 테오도르 베자와 평생지기로 인연을 맺었다.대학 생활 중에 헤르만 루트비히(Hermann Ludwig)라는 친구를 사귀었는데 1556년의 어느날 강가에서 루트비히가 탄 배가 뒤집힌 것을 보았다. 올레비아누스는 친구를 구하기 위하여 강물에 뛰어들었지만 그 역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급박한 상황에서 루트비히의 시종은 두 사람 중에서 올레비아누스를 자신의 주인으로 착각하여 구해냈고, 정작 헤르만 루트비히는 죽고 말았다. 이 일로 인해 올레비아누스는 평생 설교를 하며 살겠노라 하나님께 서원했다.
고향으로 돌아간 올레비아누스는 불과 몇 개월 만에 훌륭한 설교자로 이름을 떨쳤다. 마치 도시 전체가 개신교로 개종할 듯이 열띤 분위기가 이어지자, 가톨릭 교회의 핍박이 시작되었다. 올레비아누스는 곧 감옥에 갇히는 처지가 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어떤 개신교 영주'가 보석금을 내주고 그를 감옥에서 구해내었고 자신의 영지에서 개신교 신앙이 확실하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종교개혁 작업을 도와달라고 제안을 해왔다. 그 개신교 영주는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올레비아누스가 대학 시절 사귀었다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던 헤르만 루트비히가 프리드리히 3세의 둘째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2.1.3. 자카리우스 우르시누스(Zacharius Ursinus, 1534~1583)
우르시누스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하던 보헤미아 왕국 산하 슐레지엔의 중심지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우르시누스가 태어나기도 전에 브레슬라우를 관통했고, 우르시누스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루터의 영향을 받아 루터파 신앙을 갖게 되었다. 우르시누스의 집은 가난했지만 부친의 직업이 가정교사였기 때문에 교육적으로 좋은 환경을 경험하고 부유한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16세에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 비텐베르크로 유학을 갔고 여기서 루터의 친구이자 동료인 필리프 멜란히톤을 만나게 된다.우르시누스는 보름스와 신성 로마 제국, 스위스 연방, 프랑스 왕국 등 종교개혁의 중심도시들을 돌며 종교개혁의 주요 인물들을 만나고 또 공부하며 개신교 신앙에 대한 연구를 계속 했다. 특히 제네바에서 칼뱅을 만나 교제를 나누기도 했으며 취리히에서는 하인리히 불링거와 이탈리아인 칼뱅주의자였던 피에트로 마르티레 베르밀리 등의 종교개혁자들과 친분을 맺었다.
유학을 마치고 고향 브레슬라우로 돌아와 교사로 일한 우르시누스는 성찬에 대한 사상이 루터파와 다르다는 이유로 의심과 추궁을 받았고 결국 브레슬라우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얼마 되지 않아 피에트로 마르티레 베르밀리는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초청으로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강의할 것을 요청받았는데 나이가 많은 그는 이 요청을 거절하고 대신 젊은 우르시누스를 추천하게 된다.
2.2. 역사적 상황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팔츠 선제후국의 교회를 개혁하기 위하여, 개혁파 교회의 신앙에 따른 철저한 개혁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의 교회개혁 운동은 전반적으로 루터파가 우세하였고, 따라서 프리드리히 3세의 개혁은 루터파와의 대립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프리드리히 3세의 개혁파 성향은 1560년, 작센[5]의 여러 제후로부터, 또한 1561년에는 나움부르크에서 개최된 제후회의에서도 비난받은 바 있다.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는 팔츠 선제후국에서 개혁파 교회의 신앙이 주도권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교수인 자카리우스 우르시누스와 궁정 설교가인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로 하여금 간단한 요리문답의 지침서를 만들도록 부탁했다. 그 결과 나온 요리문답을 선제후와 칼뱅주의에 정통한 사람들에 의해 승인을 얻어 1563년 초에 발간된 것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다. 이 책은 그해에 세 판이나 더 찍어낼 정도로 대중에게 급속히 알려졌다. 또한 주일에 간단히 교리를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52부분으로 엮어져서 이 요리문답을 일년에 걸쳐 전부 배울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
그러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발행으로 제국의 루터파와 개혁파의 대립은 격한 양상을 띄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6]는 1563년 7월 13일 날짜로 프리드리히 3세에게 편지를 보내어, 개혁파 신학(특히 성찬론)은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아우크스부르크 화의(Augsburger Reichs und Religionsfrieden)를 위반한 팔츠 선제후국은 제국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황제의 이러한 결정에 대하여 프리드리히 3세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변명하기 위하여 불링거에게 조언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갔다. 다음 황제였던 막시밀리안 2세[7]는 1566년 1월 14일에 아우구스부르크 제국의회를 소집하는 소집장을 보내어 이번 제국의회에서는 “사람을 유혹하는 분파”에 대하여 엄중하게 처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 분파는 다름 아닌 팔츠 선제후국을 말하는 것이었다.
선제후는 불링거에게 개혁신학을 설명하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를 변호하기 위한 기초로 7항목을 준비하여, 해설을 요청하였다. 불링거는 1565년 12월 18일에 “신앙해설(confessio et expositio simplex orthodoxae fidei)를 보냈다. 선제후는 불링거가 보낸 “신앙해설”을 1566년에 아우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루터주의자들 앞에서 발표[8]하였다.한편 네덜란드에서는 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출간되자마자 이것을 네덜란드어로 번역하고 이 번역판을 1566년에 출판된 제네바 시편집의 네덜란드어 역본에 첨가한 다테누스(Petrus Dathenus)의 노력으로 많은 호응을 얻게 되었다. 그 해에 가브리엘(Peter Gabriel)은 암스테르담에 있는 그의 교회에서 주일 오후 설교에 이 요리문답을 설명하면서 이를 시도해보았다.
1577년, 프리드리히 3세가 세상을 떠나자 맏아들 루트비히 6세가 선제후로 즉위하였다. 그는 어머니 마리아의 영향으로 루터파 신앙을 가진 인물로 아버지가 행했던 개혁작업을 중지시켰으며, 아버지가 등용한 사람들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루터파 인사들로 대체했다.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등 개혁파 신앙을 가진 이들 역시 더 이상 하이델베르크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루트비히 6세에게 해고당하고 쫓겨난 사람들은 각 곳에 흩어져 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우르시누스는 루트비히 6세의 동생 요한 카지미르의 부름으로 노이슈타트안데어바인슈트라세로, 올레비아누스는 헤르보른으로 거쳐를 옮겨 연구와 가르치는 일을 계속 하였다. 이들은 교회와 학교를 통해 진리를 전파하고 보호하는 일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비롯되는 풍성한 지식들을 통해 학문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600년에 있었던 국가 종교회의에서는 이 요리문답을 교회의 통일된 교리 규범의 하나로서 채택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교회의 책임자는 이에 서명하고 모든 목사는 교회에서 이 요리문답을 설명해 주는 것을 의무화하도록 규정했다. 이 규정은 1618-19년에 있었던 도르트 종교회의에서 강하게 강조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기독교 개혁교회와 그 밖의 개혁교회에서 강조되고 있는 바이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종교개혁 시대의 여러 요리문답 중에서 가장 영향력있고 널리 인정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주요 내용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이 요리문답서의 1문은 “살아서나 죽어사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로 시작된다. 참된 위안에 관한 질문은 이어서 “우리의 죄와 비참에 대하여”로 이어진다. 이러한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우리 신앙에 중요한 내용들을 계속해서 공격하고 방어하는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요(요)한 교리(리)에 대한 질문(문)과 대답(답), 곧 요리문답이 이어지는 형식이다.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하므로 그의 성령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하므로 그의 성령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1문에서 먼저 하나님 편에서 인간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통해 우리의 위로를 말한다. 이어서 다음과 같은 2문과 2문에 대한 세 가지 대답이 나온다.
위로 가운데 ‘복된 인생’으로 살고 죽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의 죄와 비참함에 관하여 아는 것,
둘째, 이러한 죄와 비참함 가운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하여,
셋째, 이러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 세 가지 대답을 다시 확장시켜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우리 신앙을 설명한다.첫째, 우리의 죄와 비참함에 관하여 아는 것,
둘째, 이러한 죄와 비참함 가운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하여,
셋째, 이러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3.1. 우리의 죄와 비참함
우리의 죄와 비참함에 대하여 말하는 첫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과 우리가 이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본성의 타락’을 말한다. 이 상황이 바로 우리의 비참함인 것이다. 독일어로 비참이라는 단어는 'elend'라고 하여 '땅에서 추방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마치 낙원에서 추방당한 아담을 연상시킬 수 있다. 또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을 가리켜 본 요리문답서는 비참이라는 표현으로 죄 가운데 놓여있는 우리의 처지를 묘사한다.그러나 우리의 이런 비참한 처지는 결코 하나님의 뜻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하고 불순종한 데서 시작되었으며 우리는 거듭나지 않으면 이러한 비참한 처지를 벗어날 수 없음을 밝혀 중생의 필요성을 말한다.
3.2. 이러한 죄와 비참함 가운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앞부분에서 분명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지만 또한 의로우신 분이심을 말하여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결코 간과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말한다. 본 요리문답은 이어서 우리가 이 형벌을 피할 방법에 대하여 말한다. 우리의 중보자에 관하여 설명하는 본 대목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방법, 곧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만이 우리에게 유일한 위안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설명한다.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에 이어 구원의 방법 ‘참된 믿음’에 관하여 언급한다. 참된 믿음이란 확실한 지식과 굳은 신뢰를 말하는데 이 지식은 ‘복음에 약속된 모든 것으로 사도신경이 요약하여 가르쳐 준다’는 대답으로 사도신경으로 넘어간다.우리의 보편적 믿음의 고백인 사도신경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요약이라 할 수 있다. 성부 하나님과 우리의 창조에 관하여, 성자 예수님과 우리의 구원에 관하여, 성령 하나님과 우리의 성화에 관하여 질문과 대답을 한 후 이어서 이 지식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을 설명한다.
이 모든 것을 믿는 것은 우리에게 의를 얻게 하고, 또한 영생의 상속자가 되게 한다. 이러한 신뢰의 수단으로 우리에게 마련된 은혜의 방편인 세례와 성찬, 말씀과, 권징에 대하여 문답하는 것으로 두 번째 파트가 마무리된다.
3.3. 이러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
앞서 우리가 얻는 유익에 대하여 말할 때 선행은 하나님 앞에 의가 되지 않고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아무 공로 없는 것으로 설명되어 지기에 한편으로 선행이 필요없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 따라서 본 요리문답은 선행의 필요를 묻는 과정을 거친다. 선행은 공로가 아니지만 선행은 반드시 해야하는 것이다. 본 요리문답은 91문에서 선행의 정의를 ‘참된 믿음으로 율법에 따라서’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이 율법에 따라 행하는 것을 알기 위하여 십계명에 대하여 묻고 답하는 부분으로 넘어간다.십계명에 대한 질문의 마지막은 처음 인간의 죄와 비참함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같다. 우리는 이 율법의 요구를 모두 수행할 수 없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율법을 주신 것인가? 드디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할 차례가 된 것이다. “우리는 평생동안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죄와 의로움을 더욱더 간절히 추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목적지인 완전에 이를 때 까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더욱 더 변화되기를 끊임없이 노력하고 하나님께 성령의 은혜를 구하기 위함이다.”
115문에 대한 대답
115문에 대한 대답
따라서 율법의 요구는 우리로 하여금 성화를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하여 영혼과 몸에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구해야 할 모든 것을 이미 주님께서 알려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이다. 따라서 본 요리문답은 마지막 부분을 주기도문에 할애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성화의 삶을 위하여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통해 날마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삶을 살도록 요구받는다.
4. 관련 문서
[1] 중세 헝가리 왕국이 모하치 전투의 패전으로 붕괴되고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패권 다툼 속에서 생겨난 동헝가리 왕국의 후신으로, 헝가리인의 자치 공국이었다.[2] 자체적으로 만든 '벨직 신앙고백서', '도르트 신조'와 함께 하나 되는 세 고백서(Drie Formulieren van Enigheid)로 묶어서 칭한다.[3] 재위 1559-1576[4] 트리어 대주교는 신성 로마 제국의 3대 성속 선제후 중 하나였다.[5] 베틴 가문이 통치하는 작센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곳이었기 때문에 당대 루터파의 맹주를 자처하였다.[6] 골수 가톨릭이었던 형 카를 5세와 달리 페르디난트 1세는 자신이 통치하는 헝가리 왕국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독일 제후들과 타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개신교 제후들에게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보였다. 다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직할령인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보헤미아 왕국에서는 예수회를 초빙하는 등 알음알음 대항종교개혁을 실시했다.[7] 젊은 시절, 루터파 성향의 가정교사들에게 교육받았고 슈말칼덴 전쟁에서 작센-마이센 공작 모리츠와 함께 싸운 영향으로 가톨릭을 믿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군주 가운데서는 거의 유일하게 루터파에 온화적이었으나 칼뱅파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8] 불링거의 신앙해설은 후에 독일어와 라틴어로 공포되어 1566년 스위스의 많은 교회와 개혁파의 모든 교회, 스코틀랜드 개혁파 교회에서 승인되었고, 1567년에는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개혁파 교회, 1571년에는 프랑스 개혁파 교회, 1578년에는 폴란드 개혁파 교회로부터 승인을 받게 되는데 이 문서가 바로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