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24 03:24:40

학익진


1. 개요2. 어형3. 오해4. 개념5. 사례
5.1. 한산도 대첩5.2. 미카타가하라 전투5.3. 칸나이 전투?
6. 대중매체에서7. 여담8. 관련 문서

1. 개요

학익진은 진법의 일종으로, 날개를 펴는 모양을 본뜬 진형이다. 말 그대로 상대를 원을 그려가면서 둘러싸는 형태이다. 동서양 모두 널리 사용된 전술대형이다.

2. 어형

언어별 명칭
한국어 학익진()
중국어
일본어 [ruby(鶴翼の陣, ruby=かくよくのじん)]
영어 crane wing formation

동아시아권에서는 일찍이 손자병법에도 나왔을 정도로 오래되고 널리 알려진 진형이다보니 모두 비슷하게 학익진이라고 부른다. 영어권에서는 이와 완벽하게 동일한 개념어는 없고, 보통 이를 직역하여 crane wing formation 정도로 옮긴다.

영어에서는 "Pincer movement" 혹은 "Pincer attack", "Double Envelopment"을 활용한 전술이 이와 가장 유사한데, 이들을 직역하면 각각 "집게 기동", "집게 공격", "이중봉함"이라는 뜻이며, 실제 한국어에 맞는 표현으로 옮기면 전자와 차자는 "협공"이나 "협격", "양면 공격", 말자는 "이중포위" 혹은 "양익 포위"이다. 원래 한 덩어리인 군대로써 하나의 전열을 유지한 채 싸우는 학익진과는 달리 이들 개념은 군대나 전열을 둘 이상으로 나누는 경우에도 해당한다.

3. 오해

한산도 대첩이라는 한국사 희대의 전투에서 활약한 탓에, 한국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고안해낸 진법이라는 오해를 많이들 하지만, 학익진은 손자병법을 통해 이미 이전부터 동양 각국에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진법이었다. 당연히 이순신도 중세 동양의 여느 장수들처럼 손자병법을 비롯한 여러 병법서를 참고하였고, 당시 조선 수군에 가장 적합한 진형임을 꿰뚫어 보고 활용하였던 것이다. 참고로 이순신이 이 진법을 사용한 데에는 화력의 우위가 영향을 주었을 거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같은 이유로 한국에서는 해상전 진형으로서 유명하지만, 원래는 지상전 전술대형으로서 출현하였다. 또다른 유명한 실전 사례 중에는 일본에서 벌어진 육전인 미카타가하라 전투가 있는데, 육상전에서의 학익진 사례이자 학익진의 약점도 보여주는 전투이다. 손자병법의 애독자로 유명했던 다케다 신겐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어설프게 학익진을 펼친 것을 보고 어린진, 즉 쐐기대형으로 부대를 편성해[1] 전투력을 일점에 집중하는 해법으로써 깨뜨려서 도쿠가와가 똥까지 싸면서 튀게 만들었다.[2][3]

4.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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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학익진의 전개 과정

육전에서는 대형을 횡렬로 형성하는 일자진의 형태이며, 해전에서는 단순한 학익진보다는 초승달 형태의 어린학익진(鶴翼陣)을 쓰게 되어 있고, 실제로도 이순신은 어린학익진을 사용했다. 어린학익진은 물고기의 비늘이 벌려진 것 같은 대형인 어린진과 학이 날개를 편 모양과 같은 학익진이 결합된 전술을 말한다. 어린은 물고기 비늘처럼 잇대어 있는 진형인데, 이를 첨자찰()이라고도 한다. 본 문단 상단 사진에서 언급되는 첨자찰진이 바로 이것이다.[4]

학익진의 핵심은 화력의 집중으로, 화력(특히 사격전) 중심의 군대에 적합한 진법이며 특히 해상전처럼 란체스터 법칙이 잘 적용되는 전투일수록 화력의 집중과 우세가 매우 중요하여 이러한 부류의 진형이 나타나기 쉽다. 리델 하트는 "최대 횡진이 최대 화력을 보장한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그렇게 횡진을 짜고서 화력을 일점에 집중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학익진과 같은 대형을 취하게 된다. 다만, 전근대에는 화기가 충분히 발전하기 전까지는 화력이 방진을 압도할만큼 우세하지 못하였으므로 기동과 방호, 조직력 등도 중요한 전투력의 구성요소였고, 적절한 방호와 기동으로써 화력 투사를 버티거나 피하고 학익진을 격파하는 경우도 있었다.

방법적으로는 전군의 진형을 좌·중·우 셋으로 나누어 중군이 적의 주 공세를 받아내는 동안 상대적으로 압력을 적게 받는 좌우군이 적의 "측면"을 공격하는 것이 학익진의 운용법이다. 이는 화력을 일점에 집중하도록 만들어 그 위력을 극대화할 뿐만 아니라 적이 방호하기 어려운 측면을 포함하여 전방위 집중 공격으로써 병력 피해와 사기 저하를 꾀하는 것으로, 특히 사격 전술에 적합한 방식이지만 근접전에서도 정면보다 측면이 더 취약한 것은 동일하므로, 냉병기 시대부터 곧잘 쓰였으며 화기가 발달하면서부터는 더 강력하고 정교한 화망(십자포화)을 구성하면서 이러한 이점이 더욱 극대화되었다. 이를 망치와 모루 전술로 환원해보면, 내려치는 망치를 2개로 하여 우회와 포위를 겹으로 구사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학익진은 넓은 횡대 진형이므로 각 부분들끼리 서로 멀어지고 진형의 종심이 얇아지는 것을 감수해야 하는데, 이렇게 병력이 분산된 상태에서는 전군을 통제하고 적시에 전술행동을 시키기도 어렵고 개별 부대가 서로 호응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소모된다. 그 결과 적의 각개격파기습 시도를 허용하기 쉬워진다.

회전에서 학익진에 대처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일점을 집중 공격하여 패주시키거나 돌파하는 것이다. 중앙돌파 혹은 중군 궤멸 후 분단된 양익의 적을 섬멸할 수도 있고, 양익 중 어느 한쪽부터 꺾어나가는 경우도 있다. 특히 지휘부로부터 떨어져 있는 좌우 날개는 분견대를 빼서 기습을 가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학익진은 자신이 준비된 상태에서 적이 의도한대로 중앙에 들이받아줘야 효과를 보므로, 직접적인 공략이 여의치 않아 보인다면 전투를 회피하여 교착상태를 유지하면서 적의 다른 취약부를 노려서 오히려 상대가 학익진을 구사할 최적의 상태를 포기하고 먼저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물론 학익진이 반드시 이러한 돌격이나 충격에 무력한 것은 아니다. 학익진은 화력의 집중으로써 이득을 보는 진형으로, 적이 전술적으로 무언가 시도하기도 전에 무력화할만큼 화력이나 병력이 우세하거나 적의 기동과 충격을 봉쇄할 수 있는 적절한 방호 수단이 마련된다면 적의 공격을 돈좌시키고 오히려 포위 후 섬멸을 노릴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적이 학익진을 쓰려는 의도를 알지 못하도록 위장하거나 알아도 이를 노리기 어렵도록 다양한 수단이 동원되었다. 대표적으로 처음에는 다른 위장 진법을 쓰다가 적과 본격적으로 싸움이 시작될 때 신속히 학익진으로 전환하는 방법, 중앙에 미끼를 두어 시선을 사로잡고 행동을 유도하는 방법, 양익을 은폐/매복해두는 방법, 날개를 먼저 노리거나 중앙을 빠르게 밀어버리기가 곤란하도록 지형적 우위를 선점하거나 말뚝과 방책 등 장애물로써 적 기동로를 제한하는 방법 등이 있다. 이러한 방법들을 활용하려면 병사들의 숙련도가 정예하고 평소 전술 훈련이 충분하거나 충분한 자원적·시간적 여유가 있거나 지형조건이 잘 따라주어야 한다.

5. 사례

5.1. 한산도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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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의 성⋯!”
― 원균, 《한산: 용의 출현》 중에서
한국사에서 학익진을 쓴 대표적인 예로 유명하다. 흔히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이 최초로 했다고 말하는 것은 학익진을 해군에 최초로 적용했다는 것을 가리킨다.[5]

한산도 해전의 무대인 견내량은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아 대형선 운용과 함포전에 불리한 곳이었다. 조선 수군은 그곳에서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적들을 유인한 뒤, 학익진을 펼쳐 적선을 포위하였다. 왜선은 날개와 같은 진형 안에 갇혀 47척이 격침, 12척이 나포되었으며 수많은 왜병이 실종되거나 익사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50척의 판옥선이 모두 포위망에 투입되어 예비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즉, 일반적으로는 진형이 조금이라도 무너지거나 화력이 부족하여 한 척이라도 포위망을 빠져나가거든 후방이 노출되어 망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가용전력을 모두 전열에 투입한 이유는 판옥선의 특성 덕인데, 우선 배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으로서 선회력이 우수하므로 한 쪽에 화포를 사용한 후 제자리에서 선회해 그 동안 장전을 마친 반대편의 화포를 사용하여 화력을 지속 투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선상 백병전 중심인 일본군의 선박보다 훨씬 크고 튼튼하여 백병전 상황에서도 해상 수성전과 다름없는 유리한 조건에 놓였으므로 설령 적이 근접하여도 크게 불리해지지는 않았다.

요컨대 조선군의 화포가 가진 우수한 사거리와 화력, 판옥선의 선회능력과 요새 수준의 견고함, 그리고 자신이 길러낸 조선 수군의 단합력을 고려하면 굳이 예비대를 따로 빼둘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 상대로 지닌 가장 큰 강점인 화력 우세를 최대한 활용하기에는 학익진이 가장 적합하였으므로, 학익진법은 한산도 해전 외에 당항포 해전, 안골포 해전, 율포 해전 등 여러 전투에서 사용되었다.

다만, 학익진이 특히 유명하고 자주 쓰이기는 했어도, 이순신은 학익진 하나만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 어린학익진과 팔진기문법(八陣奇門法), 장사진(長蛇陳)[6] 등 다양한 전술을 상황에 맞추어 사용했다. 이러한 전투진은 지리와 수의 우세한 위치, 또는 그 형세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시켜 운용하였다.

이순신이 주목받고 높이 평가받는 부분은 이렇게 중세 당시에 현대전에서 전쟁원칙으로 자리잡은 화력 집중과 포위 섬멸 전술을 완벽하게, 그것도 육상보다 개별 성분(함선)을 통제하기가 더 어려운 해상에서 해냈다는 것이다.

5.2. 미카타가하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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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익진의 약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학익진을 잘못 운용했을 때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보여주는 전투이다. 병력도 열세이고 연합군이라서 지휘통제도 어려운 상황에서 무리하게 공세에 나섰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학익진을 대놓고 썼다가 당대 일본 최고의 무장 다케다 신겐에게 처절하게 패배했다.

5.3. 칸나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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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서양사에서의 학익진 사례로서 칸나이 전투를 거론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로는 좀 더 복잡한 양상이었고, 한니발 바르카의 의도는 단순히 학익진으로써 적을 포위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학익진과 같은 양익포위 혹은 이중포위 양상은 전투가 전개되는 도중에 나타난 것으로, 최초에 카르타고군은 오히려 중앙이 측면보다 더 돌출된 진형으로 전개하여 로마군을 상대하였다. 이후 먼저 접전을 개시한 중앙이 서서히 뒤로 밀려나면서도 한니발 본인의 직접적 지휘통제와 정예병의 후방 증원에 힘입어 패주하지는 않고 전열을 유지하면서 학익진처럼 중앙이 들어가고 양익이 돌출된 형태가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로마군의 돌격에 의한 충격력을 최소화하여 흡수해내고 양익의 측면 공격과 기병대의 후방 공격으로써 병력 차 탓에 물리적으로는 포위하지 못하였더라도 "심리적 포위 상태"를 만들어내어 사실상 포위 효과를 거두어 승리하였다.

즉, 당시 카르타고군은 일반적으로 학익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진형 전술을 의도하거나 사용한 것이 아니다. 카르타고군 보병 대형에 사용된 원리는 시간차를 이용한 지연과 가장된 취약점을 이용한 유인으로서 도리어 사선대형의 그것과 상통하며, 선봉 전열 뒤편에 주력 정예부대로 구성된 예비전열을 하나 더 두는 부분은 종심방어를 비롯한 현대전의 여러 방어전술들에서 나타나는 다층방어에 가까운 개념이다.

6. 대중매체에서

임진왜란을 다룬 창작물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비롯한 일본군 장수들이 "저게 대체 무슨 진형이냐?"라고 생전 듣도 보도 못했다는 식으로 놀라는 것으로 묘사하는 작품들도 있는데, 이는 사실상 고증오류에 가깝다. 손자병법에도 나올만큼 오래되고 널리 알려진 개념이므로, 육지냐 바다냐는 다르지만 학익진이란 진형 자체를 모를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육지가 아니라 바다 위에서 함대로 학익진을 펴다니, 저게 가능하단 말인가?"라는 식의 탄식이 더 어울린다.물론 칠천량해전 이후에는 얄짤없이 숫자도 모자란 주제에 도망도 제대로 칠 줄 몰라서 우왕좌왕한다고 놀렸을 수도 있다.
  • 영화
    • 한산: 용의 출현
      조선 함대가 유인을 위해 견내량 코앞까지 전진하다가 후퇴하면서 학익진을 짜는 것을 본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지난 전국시대 시절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다케다 신겐이 기병대의 측면 급습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학익진을 괴멸시켰다는 사실을 회상하며 전 군을 진격시켜 조선군을 섬멸하려 하나 조선군 함대가 초근거리에서 함체를 급선회시켜 함포 교차사격을 가하며 오히려 와키자카군이 괴멸되는 것으로 묘사했다.[7]

      이 영화에서 나오는 이순신은 모범적으로 자신을 단련하고 고뇌하면서 해법을 찾아나가는 인물상으로 그려지며, 와키자카도 단순히 이순신에게 털리는 B급 악역이 아니라 나름 지능적으로 이순신을 공략하고자 했던 적수로 나온다. 한산 대첩 전에 이순신이 바다 위의 학익진을 떠올리게 된 계기와[8] 연습 과정 등도 묘사됐으며, 거북선의 약점을 두고서 고민하다가 나대용의 보완 시도를 신임하기로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와키자카의 밀정이 학익진 연습 과정을 목격하면서 와키자카는 이순신이 가진 수 중 학익진이 있다는 걸 알았고, 상술했던 것처럼 진법 공략법도 알고 있던 데다가 밀정으로 하여금 거북선 설계도를 훔쳐내고 거북선과 한 번 붙어본 자의 증언과 설계도를 통해 거북선 대책도 짜는 등 만만찮은 싸움이 될 것임을 보여준다. 문제는 불운하게도 이순신은 앞선 전투를 바탕으로 알게 된 거북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새로 개량된 거북선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을 몰랐기에 대책이 깨졌고, 학익전 공략도 상술했듯 간발의 차로 실패했다.
  • 소설
    • 오버로드(소설): 바이네 델비가 필립을 속이기 위해 학익진을 펼쳤다고 말한다.
    •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
      의화단 운동에 참가한 대한제국군 기병대와 청군 기병대의 전투 과정에서 청군 기병대가 학익진을 시도한다. 그러나 대한제국군 기병대는 제대로 근대화되어 있던 까닭에, 청군의 예상을 훨씬 상회하는 기동력과 지구력으로 쐐기대형 돌격을 감행하면서 제대로 양익을 전개해보기도 전에 중군부터 붕괴되어 버린다.
  • 게임
    • 센고쿠히메 시리즈: 3:3 또는 5:5 야전이 펼쳐졌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진형으로 등장하는데, 필드가 바둑판 형태이다보니 배열이 V자 모양이 된다.

7. 여담

  • 호날두가 아주 좋아하는 단골 멘트다.
  • 추월하기 어려울 만큼의 인도 면적을 여럿이서 1열 횡대에 느린 속도로 걷으며 길을 막는 것을 일컫는 은어로도 쓰인다.

8. 관련 문서


[1] 다만, 엄밀하게 말해서 어린진과 쐐기대형(wedge formation)은 다른데,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쐐기대형에 해당하는 진법은 추행진(陳)이라고 하였다. 둘 다 형태가 비슷하고 공격적인 대형이기는 하여도, 어린진은 기병과 보병이 제병연합을 하는 진법으로서 돌파 일변도라기보다는 돌파와 충격을 시도하면서도 유사시 방어적 재배치 등 안정성에 더 중점을 둔 대형이다. 이러한 유연성은 방어적 대형이면서도 기회가 왔을 때 다른 진형으로 신속하게 변환할 수 있는 구행진(行陣)과 비슷한 편이다. 참고로 이와 유사하게 돌파력 강화를 위해 아예 종심 깊은 화살 모양을 취하는 봉시진(陣)이라는 진법도 있다.[2] 이를 의식해서인지 사극 불멸의 이순신의 한산도 해전에서도 와키자카가 이순신의 학익진을 바로 알아보고 측면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뒤이어 양옆에서 원균, 이억기의 함대가 나타나 와키자카의 함대를 완전하게 싸먹었기 때문에 대패한다.[3] 한산: 용의 출현에서도 똑같이 와키자카가 미카타가하라 전투를 예시로 들며 공략하려고 하는 독백이 있다. 이쪽은 와키자카가 밀정을 통해 이순신이 바다 위에서 학익진 연습을 하고 있다는 걸 이미 알아낸 상태라 처음부터 공략할 생각이 있었고, 실제로도 공략 직전까지 갔다. 막판에 미리 앞에서 나와 싸우고 있던 거북선 한 척이 와키자카의 배를 가로막으면서 실패했다.[4] 다만, 사료들에서는 대체로 축약하여 그냥 학익진으로 표기하는데, 이는 어린학익진에서 어린진은 최종적으로 학익진을 전개하기 위해 필요한 중간단계이므로 생략하는 것으로 보인다.[5] 사실 다른 나라들에도 해전에서 학익진을 활용한 듯한 기록들은 있다. 한 예로 백강 전투에서도 유인궤가 이끄는 당나라 수군이 돌진해오던 왜군을 끌어와 좌우로 포위한 후 섬멸한 듯한 뉘앙스의 기록이 일본서기에 남아있다. 다만 이순신은 자신이 의도한대로 학익진을 펼친 것인데, 다른 기록들에선 의도한 것인지 우연에 의한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6] 부산포 해전에서 사용.[7] 와키자카군의 진격 속도가 상당히 빨라 학익진을 펼친 조선군 함대가 선회하기 전에 월선에 성공할 뻔했으나, 준사의 항왜 부대와 모의연습을 하며 혹독한 훈련으로 단련된 조선군 함대가 아슬아슬하게 선회하여 포격한다. 와키자카 함대가 조선군 함대에 거의 근접하였을 때 어린진을 풀고 각개 기동해서 피해가 더 컸다. 마지막 발악으로 돌진한 와키자카의 대장선은 거북선에 막힌다.[8] 이순신은 '수성(守城)하지 않고' 적군을 직접 쳐서 '수성에 성공한' 일본군 이야기를 들었고, 꿈에서 말을 타고 적을 쫓다가 거대한 성벽에 가로막히는 상황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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