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94년 6월 서울지하철노동조합, 부산교통공단노동조합과 대한민국 철도청 내의 임의단체 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파업.2. 배경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기점으로 지하철 업계에도 민주노조 건설운동의 바람이 불어닥쳤고 1987년 12월 서울지하철노동조합, 1988년 2월 부산지하철노동조합[1]이 설립됐다. 해당 노조들은 전국지하철노조협의회(전지협)을 결성해 활동했다.한편 일반철도 운영을 독점하고 있었던 대한민국 철도청에는 한국노총 소속의[2] 전국철도노동조합이 자리잡고 있었고 위원장 간선제[3]로 인해 사실상 어용 노조로 운영되고 있었다. 1988년 철도청이 일방적으로 기관차 승무구간을 늘리면서 전국의 기관사들이 들고 일어나는 우발적 총파업이 벌어졌으며 파업은 공권력 투입으로 진압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철도노조 민주화 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1988년 파업에 참가했던 기관사들은 1989년 전국기관차분회장협의회를 결성했고 이는 1991년 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로 재편되었다. 1994년에는 전기협은 회원 7천여명, 철도노조 지부장 20명을 확보한 철도 내의 대형 압력단체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3. 경과
3.1. 교섭 결렬
1994년 6월 서울지하철노동조합과 부산교통공단노동조합은 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등 처우 개선 요구를 내걸고 교섭에 들어갔으나 사측인 서울특별시지하철공사와 부산교통공단은 해당 요구들을 전면 거부, 현상 유지를 요구했다. 결국 6월 중순 두 기업의 교섭은 결렬됐고 양 노조는 파업 준비에 돌입했다.한편 1994년 5월 말 전기협은 일 8시간 근무제, 1988년 파업 당시 해고자 복직 등의 요구안을 내고 교섭 후 합법적 쟁의권을 확보하자고 철도노조에 요구했으나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되었다. 이에 전기협은 6월 14일 파업 찬반투표에 돌입하였고 철도청과 철도노조는 노사협의회에서 전기협의 일부 주장을 수용한 기능직 처우개선 방안을 의결했으나 전기협은 자신들의 주장을 왜곡했다며 반발했다. 전기협은 철도노조에 50:50으로 특별교섭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했으나 철도노조는 거부했다.
두 지하철노조와 전기협은 6월 27일부터 동시파업을 시작하기로 약속되었으며 전노협과 대기업 노조로 구성된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4]도 연대를 선언하면서 정국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3.2. 쟁의행위 돌입
1994년 6월 23일 서울지하철노조가 준법운행을 선언하면서 열차가 심각하게 지연되기 시작했다. 한편 당일 새벽 용산역 전기협 사무실에 경찰력이 투입되었고 전기협은 이에 반발해 총파업에 돌입했다. "전기협 침탈 시 총파업 돌입"을 공언해 왔던 서울지하철노조는 다음날인 24일 총파업에 돌입했으며 부산교통공단노조도 6월 25일 총파업을 시작했다.파업의 방식은 가지각색이었는데 아예 출근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었고 열차를 중간까지만 운행한 뒤 도망가 버리는 임의 단축운행을 주로 벌였다.
쟁의 첫날이었던 23일에는 각 역사와 열차에 엄청난 혼잡이 벌어졌지만 각 기관들이 비노조원과 기관사 출신 간부들을 투입하면서 24일부터는 철도의 혼란이 잦아들었다. 대신 뉴스를 본 사람들이 자가용과 버스로 몰리면서 심각한 교통 체증이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일요일 외출을 자제하고 교통체증도 없었으며 승용차가 많이 줄어들었고 집에서 놀고 있는 상황이 펼쳐졌다.
6월 24일 철도청은 파업 가담자들을 직무유기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5]
3.3. 민심 이반과 공권력 투입
계속되던 출퇴근 혼란에 6월 26일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90%가 파업의 즉각 중단을 요구하는 등 민심이 돌아섰으며 자신감을 얻은 정부는 노조원들이 농성 중이던 경희대학교와 동덕여자대학교에 전투경찰을 투입해 그들을 연행하면서 파업이 와해 수순에 들어섰다.한편 민심 이반을 본 전노대 측은 동조 파업을 백지화했다.
3.4. 종료
6월 27일 지하철 운영사들은 선처를 내세워 파업 가담자들의 복귀를 종용하였고 철도청은 복귀 후 전기협 탈퇴 각서를 제출한 파업 가담자들의 고발을 취하하기로 했다. 이에 대다수 파업 참가자들이 복귀하기 시작해 6월 30일 서울지하철노조의 파업 중단 선언을 끝으로 파업이 마무리되었다.4. 영향
전기협 집행부 약 40여명을 포함한 파업 주동자들은 철도청에서 파면되었고 구속 및 사법처리되었다.약 일주일의 교통 불편으로 국민들의 노조 혐오가 깊어졌고 궤도 노동자들은 애초에 원했던 처우 개선은 하나도 이뤄내지 못한 체 국민들의 싸늘한 시선을 견뎌야 했다.
한편 전기협의 열성 회원들은 자신들의 파업 실패 이유를 합법 노동조합이 아니어서라고 규정해 철도노조 민주화 움직임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소송전을 시작해 2001년 대법원으로부터 철도노조 위원장 직선제 결정을 얻어냈다.
5. 여담
- 21세기의 온건해진 철도파업과는 달리 상당히 과격하게 진행되었는데 위에도 서술된 임의타절 사보타주가 대표적이며 파업 참가자들은 대학과 명동성당 등에서 노숙농성을 했다.[6] 이 과정에서 재미있는 일화도 있는데 명동성당에서 경찰과 서울지하철노조가 살벌하게 대치하는 와중에 야쿠르트 아줌마가 "추기경님 요구르트 배달해야 한다"며 비킬 것을 요구하자 경찰과 노조 모두 수긍하고 길을 터 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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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년 8월 부산교통공단노동조합으로 개칭[2] 2001년 위원장 직선제로 투쟁 성향 집행부가 들어선 후 2002년 민주노총으로 상급단체 변경[3] 조합원이 지부 대의원을, 지부 대의원이 중앙 대의원을 선출하고, 중앙 대의원대회에서 위원장 선거를 했다. 이런 간선제로 인해 철도청이 마음만 먹으면 공작을 벌여 각 지부 의석 절반을 확보해 어용 위원장으로 앉힐 수 있었다. 특히 역 지부의 경우 철도청이 각 근무조에 친사측 비조합원인 일반직(국립철도학교, 공개경쟁시험 출신)을 꽂어놓아 조합원인 기능직 역무원을 감시하였고 그 덕에 아주 손쉽게 어용 지부장과 대의원을 앉혔다.[4] 민주노총의 전신격인 기구다.[5] 당시 철도 노동자들은 교통부의 외청인 철도청 소속 기능직 공무원이었기에 직무유기 혐의를 적용할 수 있었다. 2005년 공사화와 함께 민간인이나 다름없는 공기업 직원 신분으로 전환되어 이제 직무유기죄로는 처벌받지 않는다.[6] 이 시절 파업은 단일대오 유지와 공론화를 위해 전 조합원이 집에 안 들어가고 절이나 성당, 대학에서 농성을 벌이는 게 기본이었다. 종교시설은 성역으로 간주되어 공권력 투입을 안 하는 게 불문율이었기 때문이고 대학에서 농성하면 운동권 학생회가 농성자들을 지켰다. 농성이 시작되면 노동조합과 학생운동권, 연대단체가 조직한 '선봉대' 내지는 '파업사수조'가 입구를 지키고 경찰과 대치했다. 1995년 한국통신 파업 당시 경찰이 조계사와 명동성당에 진입해 농성을 진압하면서 성역이 깨졌고 2000년대 학생운동이 몰락하면서 이후의 파업은 "집에서 쉬다 합법 집회에 나가는" 온건한 양상으로 변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