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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미어 리그 팀 뉴캐슬 유나이티드 FC가 2005-06 시즌에 기용하던2. 상세
2.1. 해당 시즌 뉴캐슬의 상황
원래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90년대 초반부터 공격적인 투자를 시작해 90년대 중반부터는 리그 상위권팀으로 도약, 2000년대 초반에는 매년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노리던 리그 상위권 팀 중 하나였다.하지만 04-05 시즌에는 그 동안의 투자로 쌓인 거대한 부채[2], 시즌 초반 갑작스러운 바비 롭슨감독의 경질과 그렇게 부임한 그레이엄 수네스의 능력 부족[3], 선수들과의 불화[4] 등이 겹치며 리그 14위로 대차게 망했고, 05-06 시즌에는 직전 시즌의 문제 중 하나였던 빈곤한 득점력을 해결하기 위해[5] 이적시장에서 스콧 파커, 엠레 벨뢰졸루, 알베르트 루케, 클럽 레코드를 갱신하면서 마이클 오언을 영입하는 등 미드필더와 공격진을 보강했다.
하지만 수비진에는 별 다른 영입이 없었기에 05-06 시즌 뉴캐슬 유나이티드 주전 4백은 바바야로 - 붐송 - 브램블 - 스티븐 카로 구성되었는데.. 3B가 너무나 눈부신 활약을 펼친 탓에 수비진은 막장이 되었고, 라이트백이었던 스티븐 카는 그대로 묻혀버릴 정도였다.[6]
어떤 공격수가 와도 숭숭 뚫리는 바람에 많은 골을 허용했으며, 같은 팀 선수의 진로를 막는가 하면 상대편을 대신해서 자책골을 넣어주는 등 한심한 활약을 펼쳤다. 개인 기량이 부족하면 호흡이라도 맞아야 하는데 서로 호흡도 안 맞았다. 스포츠 인터랙티브도 이러한 상황을 파악해 풋볼 매니저에서 세 선수의 집중력 능력치를 낮춰버렸다.
3B가 너무 못한 탓에 골키퍼였던 셰이 기븐만 고생이었다. 쉴 새 없이 파고드는 상대편 공격수들을 상대로 선방에 선방을 거듭해야 했고 적보다 무서운 아군이라고 때때로 날아오는 3B의 멍청한 클리어링도 막아야 하는 처지였다. 셰이 기븐이 없었으면 이 해 뉴캐슬은 강등권까지 추락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간 3B의 막장 행보 덕에 셰이 기븐의 주가는 치솟을 대로 치솟았고 뉴캐슬 팬들은 물론 타 축구팬들에게도 기븐신이라 추앙받으면서 순식간에 월드클래스 골키퍼 대열에 오르게 되었다.[7]
이러다보니 팀은 지난해보다 더 심각한 모습을 보이며 반등은 커녕 강등권 근처까지 추락했고, 2006년 2월 늦게나마 수네스를 경질 한 후 수석 코치였던 글렌 로더를 임시 감독으로 선임했는데 글렌 로더가 팀을 수습하는데 성공했고, 수비는 막장이어도 기븐이 워낙 잘 막아준데다 미드필더진과 공격진의 퀄리티는 준수한 편이었기에 이를 바탕으로 반등에 성공해 수네스 경질 후 10승 2무 3패의 호성적을 기록하면서 순위를 크게 끌어올리고 리그 7위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무리. 90년대 중반부터 매년 목표였던 챔피언스 리그 진출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성적이었지만 지난해와 05-06 시즌 중반까지의 극심한 부진에서는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2.2. 해체와 그 이후
05-06 시즌을 7위로 마무리했고, 실점도 42실점으로 04-05 시즌의 57실점보다는 줄어들긴 했으나 이는 3B가 잘 해서가 아닌 기븐의 활약으로 인한 것이었기에 3B의 처분과 수비진 개편은 뉴캐슬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고.. 결국 그 다음 시즌인 06-07 시즌 장 알랭 붐송이 유벤투스 FC로 이적하면서 3B는 해체되었다,하지만 스티븐 카가 노쇠화 및 부상 여파 등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부진하면서 BBC(...)로 남아있다가 07-08 시즌, 3B의 남은 두 명 모두 다른 팀으로 이적하면서 3B는 완전히 뉴캐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3B로 시작된 뉴캐슬의 수비 불안은 3B를 방출한 후 매년 대대적인 영입들을 진행했음에도 해당 선수들이 모조리 폭망해버리는 참사가 터지면서 해결되지 못했고, 결국 08-09 시즌 겨울 이적시장에서 팀의 핵심 자원이었던 기븐까지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해버리자 리그 18위로 강등을 당하면서 풋볼 리그 챔피언십으로 나들이를 떠나야 했다.
2.3. 구성원
2.3.1. 장 알랭 붐송 (Jean-Alain Boumsong)
3B의 핵심이자 3B 중에서 가장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는 선수로 3B 시절에는 앙리에게만 강한 면모를 보였다. 2005년 1월 거금 800만 파운드에 레인저스에서 뉴캐슬로 이적했으며, 1년 반 동안의 뉴캐슬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당시 세리에 B로 추락했던 유벤투스로 330만 파운드에 이적했다. 프리미어 리그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유벤투스 시절에는 상당한 벽이었다. 물론 세리에 B였으니 그러려니 하는 사람도 많다. 유벤투스가 세리에 A로 승격 후 부상 때문에 세리에 A에서는 뛰지 못하고[8] 컵 경기만 뛰다가 올랭피크 리옹으로 이적, 2010년부터는 그리스의 파나티나이코스에서 뛰다가 2013년 은퇴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선수가 붐송으로 뉴캐슬에서의 임팩트가 너무 컸을 뿐 국대와 유벤투스(세리에 B 시절), 리옹에서는 벽이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붐송이 프랑스 국대와 프랑스 클럽에서만 잘한다고 애국자 칭호를 붙이는 실정.[9] 리옹에서 파나티나이코스로 이적한 이후 데뷔전인 FC 바르셀로나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경기를 시원하게 말아먹고 시작하더니 파나티나이코스에서도 열심히 문을 열어주다가 경기력을 되찾은 이후 호평을 받고 있다. 33경기에서 넣은 6골은 커리어에서 제일 많은 골이기도 하다(...).
사실 뉴캐슬에서의 부진에는 이유가 있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당시 아내가 암투병 중이어서 간호를 위해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매일같이 왕복했기 때문에 컨디션이 좋을 리 없었다.
3B 당시의 활약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은 게임 리딩도 좋고 분석력과 언변도 훌륭한 선수였다는 비밀(...)이 있다. 선수 시절에도 월드컵 시즌 해설자로 활약했으며, 영국 잡지에 '베르캄프 대 붐송'이라는 축구 칼럼을 정기적으로 기고한 적도 있다. 은퇴 후에도 해설자로 활약 중.
14-15 시즌 3월 16일에 열린 맨유 vs 토트넘 전에서 3번 실수로 3골을 헌납한 에릭 다이어를 보고 김동완 해설이 붐송을 예로 들며 명성을 과시했다.
2.3.2. 타이터스 브램블 (Titus Bramble)[10]
입스위치 타운에서 미래의 잉글랜드 수비진을 이끌 재목으로 불리며[11] 2002년 600만 파운드에 뉴캐슬로 왔지만, 영 좋지 못한 성장세를 보이며 실망만 안겨 주었다. "뉴캐슬을 위해 충성을 바칠 자신이 있다."라는 인터뷰를 한 직후에 위건 애슬레틱으로 이적당했다.동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수비수라는 별칭까지 있었으나 이 선수가 한 가지 유별난 것은 유독 디디에 드록바, 아니 첼시 FC에게만 강한 수비수라는 것. 단독 드리블로 첼시 진영을 돌파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첼시전 득점 기록까지 가지고 있는데, 엄청 높은 타점의 시저스 킥이었다. 위건에서는 초반에는 불안했지만 이 후 벽으로 각성해 수비수다워졌고 쏠쏠하게 득점도 몇 번 해주기도 했다. 위건 팬들이 선정한 성공적인 영입으로 꼽히기도 했으며 위건 시절 자신을 영입한 스티브 브루스 감독을 따라 2010년 뉴캐슬의 최대 라이벌인 선덜랜드로 이적하였다.[12]
참고로 위건이 뉴캐슬과 시합을 했을 때 헤딩골로 뉴캐슬 골망을 가른 적이 있다. 덕분에 뉴캐슬 팬들은 분노 폭발. 혹자는 '늘 하던 거라 자기도 모르게 뉴캐슬의 골망을 출렁이게 했다'라고 표현하기도. 이적당한 후, 현지의 잡지에서 브램블(out)이 뉴캐슬 전력 상승의 원인으로 꼽힐 정도였으니... 오죽하면 뉴캐슬 팬들은 '브램블을 국대로!'라고 외쳤다. 물론 반어법.
그래도 나름 뉴캐슬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인지 2010년 10월 31일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열린 타인웨어 더비에서 퇴장당하면서 선더랜드의 5 대 1이란 스코어의 대패를 이끌었다.[13] 정말로 수비의 핵심으로 활약했는지 브램블 퇴장 후 선더랜드 수비진은 형편없이 털렸다.
2011-12 시즌에 성폭행 혐의로 체포되었다.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지만 징계를 먹어 3개월간 뛰지 못한다. 그와 함께 선더랜드 수비진은 시망이 되었다. 그리고 12월에 돌아온 뒤 선더랜드 성적이 함께 좋아지며 호평을 받았으나...이전의 혐의가 성폭행, 마약, 폭행으로 3개로 불어나버리면서 기껏 좋아졌던 팀 분위기에 찬물을 부어버렸다. 2013년 선더랜드와 계약이 만료된 후 새 팀을 찾지 못하고 은퇴했으며, 2014년 고향 팀 입스위치 타운의 11세 이하 팀 코치로 재직 중인 것이 확인되었다.
2.3.3. 셀레스틴 바바야로 (Celestine Babayaro)
1994년 RSC 안데를레흐트에서 프로에 데뷔했으며 16세 87일이라는 챔피언스리그 데뷔 세계 2위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하다.[14] 이후 첼시 FC에서 오랫동안 준수한 활약을 하다가 웨인 브리지의 영입으로 자리를 잃어 2005년 뉴캐슬로 이적했다.사실 바바야로는 97-98시즌에 첼시에 입단한 이후 뛰어난 오버래핑 능력과 피지컬 때문에 꽤나 촉망받던 윙백 유망주였다. 04-05 시즌의 첼시가 스쿼드를 강화하기 위해서 웨인 브리지를 질러버렸던 상황이지만 첼시 팬들 입장에서는 웨인 브리지와 로테이션으로 공존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컸고, 팬들 입장에서는 오래 팀에서 키워오던 유망주들에 대해 기대를 크게 가지던 경우가 많았던 만큼, 이 당시 바바야로의 이적을 꽤나 아쉽게 보았던 편.
뉴캐슬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마지막 3B다. 보다 못한 TV 캐스터가 '경기 도중 졸고 있는 거냐'고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05-06 시즌 이후로는 벤치로 밀려났으나 잦은 부상으로 인해 완전히 전력 외로 판정 받고 2007년 12월에 2010년까지 예정된 주급을 모두 일시불로 받고 방출당했다. 뉴캐슬이 바바야로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방출당한 이후 미국 MLS의 LA 갤럭시로 이적했는데 여기서도 방출당했다.[15]
본의 아니게 나이지리아 리그를 초토화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바바야로가 첼시 FC로 이적하면서 나이지리아에 프리미어 리그 붐이 일었고 그 바람에 나이지리아 리그의 인기가 바닥을 치게 됐다고.
참고로 1978년생인 그는 1984년생인 오바페미 마르틴스와 청소년 대표 동기라고 주장하여 충격을 안겨주었다. 당시 마르틴스의 소속 팀이었던 인테르 구단과 마르틴스 본인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반박했다. 사실 아프리카 유망주들의 나이 속이기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지만, 누가 과연 거짓말을 했을 지는...
나이지리아의 96 애틀란타 올림픽 금메달과 98 월드컵 16강의 주역 치고는 크게 몰락했다. 은퇴 후에는 영국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는데, 2011년 파산을 신고했다고 한다. 한때 주급 2만 5천 파운드를 받던 선수가 어쩌다가...
국내 팬들에게 '엘라스틴 빠가야로'라고 불렸다.
2.4. 영입 당시 기사
지금은 이렇게 놀림받는 선수들이지만 영입 당시에는 뉴캐슬 팬들의 기대를 한몸에 모았던 선수들이다. 두근거리며 기대했을 뉴캐슬 팬들 참 불쌍하다. 아래는 이 선수들 영입 당시 기사.뉴캐슬 이적을 완료한 브램블 2002년 7월 12일 금요일 13:08 GMT 입스위치의 타이터스 브램블은 메디컬 테스트를 통과하여 £5m의 이적금을 지불한 뉴캐슬로의 이적을 완료했다. 영국 U21 국가대표인 이 선수는 발목 문제 때문에 뉴캐슬로의 이적이 지연되고 있었다. 하지만 뉴캐슬은 금요일 오전에 브램블의 영입을 마침내 완료했음을 밝혔다. "입스위치를 떠나 슬프긴 하지만 뉴캐슬과 같은 거대한 클럽에 합류하게 되어 흥분됩니다. 여기에는 굉장한 선수들과 대단한 감독이 있어서 새로운 시즌이 매우 기대됩니다."라고 브램블은 뉴캐슬 공식 홈페이지 인터뷰에서 밝혔다. 브램블은 뉴캐슬에서 前 입스위치 팀동료인 키에론 다이어와 재회하게 되었다. 뉴캐슬의 감독인 바비 롭슨 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타이터스가 다음 시즌 우리 스쿼드에 합류하게 된다니 기쁩니다. 그는 피지컬이 훌륭한 선수로 대단한 일을 이루어낼 포텐셜을 가지고 있어요." |
바바야로 영입을 발표한 뉴캐슬 2004년 12월 30일 목요일 08:41 GMT 뉴캐슬은 첼시 풀백 셀레스틴 바바야로가 새해 첫날 뉴캐슬로 이적하며 수네스 감독의 겨울이적시장 첫 영입이 될 것이라 발표했다. 올 시즌말 계약이 만료되는 26세 선수의 이적금은 공개되지 않았다. 바바야로는 예딩과의 FA컵 3라운드 경기에서 데뷔할 것으로 보인다. 이 왼쪽 풀백은 첼시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으므로 뉴캐슬의 UEFA컵 경기에 출전할 수 있다. 뉴캐슬의 대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바야로의 이적은 비공개된 금액으로 1월 1일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바바야로는 첼시의 챔피언스리그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으므로 FA컵뿐만이 아니라 UEFA컵 경기에도 출전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바바야로는 첼시에서 7년반 동안 활약하며 첼시의 FA컵, 리그컵, 채리티쉴드, 유럽 슈퍼컵 우승과 함께 했으나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지원 하 첼시가 무한영입을 시작하자 벤치로 밀려나 있었다. 한편 바바야로의 이적은 같은 포지션인 뉴캐슬의 올리비에 베르나르의 미래에 의문을 던졌다. 베르나르는 이번 시즌 후 계약이 만료되지만 아직 재계약에 동의를 하지 않았다. 한편 뉴캐슬의 수네스[16] |
붐송 영입을 완료한 뉴캐슬 2005년 1월 2일 일요일 10:36 GMT 뉴캐슬은 £8m 근처로 추정되는 금액으로 레인저스의 수비수 장 알렝 붐송을 영입했다. 이 25세의 프랑스 국가대표 선수는 5년반 계약에 서명했으며 다음 주말 FA컵의 예딩과의 경기에서 데뷔할 것으로 보인다. 붐송은 지난 여름 자유계약을 통해 오셰르에서 레인저스로 이적했으며 단지 레인저스에서 28번 출장한 후 뉴캐슬로 이적한다. "또 다른 거대한 클럽에서 뛰는건 기쁜 일이며 뉴캐슬과 계약한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입니다. 시즌 전 친선경기 토너먼트에서 앨런 시어러와 맞붙은 적이 있는데 이제 그와 같이 뛰게 된다니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렇게 금방 떠나게 되어 레인저스 팬들에게 미안합니다. 저한테 화내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뉴캐슬은 내년 여름에 레인저스와 친선경기를 가질텐데 그 때 너무 저에게 화내지 않았으면 합니다."라고 붐송은 뉴캐슬 공식 홈페이지 인터뷰에서 밝혔다. 뉴캐슬의 수네스 감독은 앞선 2번의 영입제의가 거절된 후 드디어 붐송을 영입하자 흥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기적으로나 단기적으로나 붐송이 뉴캐슬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최고가 되려는 의지를 가진 선수입니다. 경기장에서 붐송은 의사표현을 많이 하는 선수로 우리가 지금 딱 필요한 선수죠. 붐송이 선수들 간의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 믿으며 또한 팬들이 그의 활약을 보며 기뻐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뉴캐슬의 수비를 강화하려는 수네스는 첼시의 셀레스틴 바바야로에 이어 붐송을 영입하며 그의 2번째 선수영입을 완료했다. |
여담으로 당시 바바야로 영입 원본 기사에 '이 거래는 아무리 봐도 첼시의 손해네요. 아깝습니다.'라는 댓글이 달려있었는데, 상술했듯이 첼시에서 장기간 기대할 만한 모습을 보였던 유망주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비 롭슨 감독이 기초를 세우고 그레이엄 수네스 감독이 완성시켰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 전설의 3B 라인, 공포의 3B 라인, 자동문 Three Brothers(3형제)라고도 불린다.[2] 매년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목표로 많은 투자를 했고, 97-98 시즌 챔피언스 리그에 데뷔하면서 드디어 성과를 내는 듯 했으나 이후에는 01-02 시즌 조별리그에 진출 한 것 외에는 리그 내 순위 경쟁에서 밀리거나 챔피언스리그 3차 예선에서 탈락하는 등의 일이 반복되면서 여러차례 본선 진출에 실패. 04-05 시즌 즈음에는 부채가 상당히 누적된 상태였다.[3] 중앙 공격수로 뛰던 아메오비와 벨라미를 발이 빠르다는 윙어로 기용하고, 로랑 로베르, 저메인 제나스 등의 기존 선수들을 일방적으로 팀에서 배제시키는 등 선수 기용도 개판이었고 그렇게 억지로 만든 전술도 엉망이라 경기력도 개판이었다.[4] 수네스 부임 당시 뉴캐슬에는 한 성깔 하는 선수들이 다수 있었는데, 해당 선수들을 잘 통제하기는 커녕 팀에서 일방적으로 배제시키거나 엉뚱한 포지션으로만 기용하면서 해당 선수들과 모조리 불화를 겪었다.[5] 04-05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리그 최다 득점자가 7골 이었을 정도로 빈공에 시달렸었다.[6] 카도 전성기의 퍼포먼스를 보이진 못했지만 이들보단 나은 활약을 보였고, 오히려 묶여서 비판당한다는 평도 있었다. 3B의 활약이 워낙 넘사벽이라...[7] 사실 기븐은 3B 이전에도 선방 능력 하나만큼은 출중했지만 과거의 명성을 잃어가던 뉴캐슬 소속이었기 때문에 비슷한 실력의 여타 명문 팀 골키퍼들보다 주목도가 떨어졌었다.[8] 게다가 유벤투스가 야심차게 영입한 조르제 안드라데는 붐송보다 더한 유리몸이 되어 2년 동안 네 경기밖에 뛰지 못 할 정도였다. 이렇게 센터백이 부족하다보니 유벤투스는 센터백을 당시 레프트백으로 뛰던 조르조 키엘리니로 메꾸었고 키엘리니는 이 때부터 훌륭한 실력의 센터백으로 성장한다.[9] 05-06 시즌에서 심각한 부진을 겪었음에도 독일 월드컵 국가대표 명단에도 들 정도였다. 물론 이 당시 감독인 레몽 도메네크가 워낙 괴짜이긴 하지만.[10] 1981년 7월 21일, 잉글랜드 국적[11] 당시 언론에서 함께 언급된 3명의 선수가 맨유의 웨스 브라운, 첼시의 존 테리, 리즈의 리오 퍼디난드였다.[12] 그리고 브루스는 9년 뒤에 뉴캐슬의 감독이 된다.[13] 케빈 놀란 해트트릭, 숄라 아메오비 2골. 선더랜드는 대런 벤트가 94분에야 겨우 득점했다.[14] 1위는 2020년 12월 유수파 무코코의 16세 18일.[15] 딱 한 경기 45분 뛰고 방출당했는데 그 경기는 FC 서울과의 친선 경기.[16] 유럽 축구 팬들 사이에서 무능한 감독의 대명사. 뉴캐슬 팬들 사이에서 금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