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0 09:08:55

FC.12

제2차 세계 대전의 이탈리아군 항공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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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기 <colcolor=#373a3c><colbgcolor=#b0e000> 복엽기 CR.30, CR.32, CR. 42 팔코, Ro.44
단엽기 C. 20x 시리즈, Re. 200x 시리즈, G.50 프레치아, G.55 첸타우로, D.520F, Bf 109G, 카프로니 캄피니 N.1z
중전투기 Ca.331, SM.91, SM.92, G.58, Bf 110G, Do 217NG, 보파이터 Mk.IFC, P-38C
폭격기 경폭격기 블렌헤임 Mk.IVC
中폭격기 Ca.311, Ca.135, BR.20 치코냐, SM.79 스파르비에로, SM.84, SM. 81 피피스트렐로, Z.1007 알치오네, Z.1018 레오네, Z.515, Ca.331
重폭격기 SM.82, P.108B, P.133, Z.506, Z.511, Z.516, Z.1011, B-24C
급강하 폭격기 Z.501, SM.85, SM.93, FC.12, Ca.355, Ba.201, Ju 87 피치아텔로G
공격기 Ba.65, Ba. 88, Ca.335, P.108A
수송기 SM. 79, SM. 75, SM. 82, SM. 95, P.108T, AL-12P, Ju 52G
정찰기 Fi 156G
※ 윗첨자 F: 프랑스 기체, G: 독일 기체, Z: 제트기, 취소선: 프로토타입 및 페이퍼플랜, C: 노획기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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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ANSA FC.13.png
CANSA FC.12

1. 제원2. 인수합병의 결과3. 가격과 성능을 모두 잡아라4. 재심사와 퇴출5. 용도 변경6. 평가

1. 제원

형식 : 단발 복좌 지상 공격기
개발 및 생산 : Construzioni Aeronautiche Novaresi S.A.
초도비행 : 1940년
승무원 : 2명
전장 : 7.52 m / 전폭 : 10.00 m / 전고 : 2.31 m
익면적 : 19.8 m2
중량 : 1,796 kg~2,320 kg
동력 : 피아트 A.30 R.A. 12기통 액랭식 엔진 (600 hp) 1기
최대속도 : 452 km/h
순항속도 : 365 km/h
항속거리 : 1,339 km
상승한도 : 7,120 m
무장 : 12.7 mm 브레다-사파트 중기관총 5정 (날개 4정 / 후방 총좌 1정) / 50 kg 폭탄 4발
생산수 : 11대

2. 인수합병의 결과

이탈리아 밀라노 부근의 카메리(Cameri)란 마을에서 영업하던 작은 비행기 공방인 CANSA(Construzioni Aeronautiche Novaresi S.A.)는 1939년 초에 피아트 그룹에 흡수되어 재벌 기업의 지점으로 영업을 계속하게 된다. 항공 엔지니어인 쥬세페 가바르디니(Giuseppe Gabardini : 1879~1936)가 1918년에 세운 이 업체는 규모는 작더라도 가바르디니 시리즈 같은 괜찮은 경비행기를 자체 개발해 생산하고 있었다. 그 무렵 전쟁 특수로 인해 군용기 증산에 바빠진 피아트 사는 이탈리아 공군훈련기 같은 소형기까지 팔아먹기 위한 포석으로 CANSA를 합병시킨 것이다.

피아트 산하에 들어간 CANSA 기술진들은 군용 훈련기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여 1939년 6월 19일에 항공성(Ministero Aeronautica)에 프로젝트 FC.12를 제시했다. 이 설계안은 탠덤 조종석과 단발 엔진을 갖춘 저익 단엽기로, 당시 훈련기라고 하면 대부분 고색창연한 복엽기가 대부분인 시절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꽤나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공군 현대화에 힘을 쏟던 이탈리아 군부는 이 제안에 흥미를 느꼈고, 구매 이전에 한 가지 단서를 내걸었다. 현재의 기본 설계를 유지하되,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써서 생산이 간단하고 가격을 낮추는 제작 방식에 초점을 맞추라는 내용이었다.

3. 가격과 성능을 모두 잡아라

이탈리아 공군이 전투기와 정찰기로 채용했던 피아트 CR.32와 이맘 Ro.37프로토타입은 715마력의 롤스로이스 케스트렐 수랭식 엔진을 장착하고 있었고, 이에 발맞추기 위해 설계된 FC.12는 최고속도 432 km/h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훈련기로 선전되었다. CR.32 같은 일선 전투기와 같은 엔진인 600마력 FIAT A.30 액랭식 엔진을 공유하기로 고안된 이 훈련기는 부품 일원화로 유지 보수 및 생산 전환에 장점을 줄 수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12기통 A.30 엔진을 장착한 FC.12는 최고속도 425 km/h에 365 km/h의 순항 스피드로 1,100 km를 비행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기체는 가문비나무미루나무를 깎아 만든 프레임에 합판을 덮어 만들어졌다. 원래 설계에 따르면 이 목제 항공기는 4개의 파일런에 각각 50 kg 폭탄을 장착할 수 있었고, 고정 무장으로 12.7mm 중기관총도 설치할 수 있게끔 고안되어 있었다. 거기에 그 무렵 훈련기로서는 의외로 무전기를 탑재하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기체의 레이아웃이 피아트 CR.30의 복좌형과 유사한 이 훈련기는 대량 생산에 들어가게 되면 대당 가격은 200,000 리라가 될 것으로 추정되었다.

4. 재심사와 퇴출

7월 13일에 국방성 산하의 항공조달청(Direzione del Genio e delle Costruzioni Aeronautiche : DGCA)은 프로젝트 FC.12를 추천했고, 16일에는 항공성을 통해 기술 정보를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이를 받아 본 설계위원회는 FC.12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제작사인 CANSA의 고집으로 훈련기 사양의 요구사항을 준수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국방성의 총참모부는 FC.12의 엔진과 성능이 훈련기치고는 지나치게 전투기와 중복된다고 밝혔다. 게다가 이런 고출력 전투기 엔진을 사용하면 연비가 나빠져 경제적 이점이 없어질 것은 분명했다. 군 수뇌부의 계산으로는 FC.12를 새롭게 생산하느니 2선급이 된 CR.32 전투기를 훈련기로 전환하는 것이 더 저렴한 옵션이 될 것이라고 결론내린 것이다.

사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Ambrosini SAI S.7과 Nardi FN.315 같은 작은 단발 단엽기는 훨씬 약한(225마력 및 205마력) 엔진으로도 충분한 성능을 보이고 있었던 탓에, 항공성의 호화판 훈련기 계획을 거절한 총참모부의 이런 판단은 실로 당연한 것이었다.

5. 용도 변경

DGCA는 비싸고 연료도 많이 먹는 전투기 엔진 대신 피아트 BR.20 폭격기를 파워업하는 과정에서 빼낸 450마력 A.20 엔진을 얹는 개수를 CANSA 측에 제안했다. 프로젝트의 존폐 위기에 몰린 CANSA로서는 이 대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원래 차지하려던 제식 훈련기 자리는 암브로시니 사에게 밀려나면서 반강제적으로 다른 용도로 바뀌게 된다.

1940년 10월 16일에 CANSA FC.12의 원형 1호기는 민간인 조종사인 파우스토 모로니(Fausto Moroni)가 조종해 첫 비행에 나서 순조롭게 날았다. 1대만 제작된 이 프로토타입은 처음에는 개방형 조종석이었으나 곧 옆으로 열리는 캐노피가 씌워졌다. 그런데 문제는 곧 채용해줄 것으로 믿고 있던 공군이 추가 발주를 하지 않은 채 등록번호조차 부여해주지 않고 있었다. 결국 CANSA는 민간 등록기호인 I-TUFF 번호를 받게 되는데, 여기에는 사정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실권을 쥐고 있던 무솔리니는 4개월 전인 6월 10일에 나치 독일의 동맹으로서 영국프랑스선전포고를 하면서 유럽 전쟁에 뛰어든 참이었고, 초도비행에 성공을 거둔 날에 이탈리아 군부는 그리스 침공 작전을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즉 훈련기 선정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게 된데다가, 전선에서는 더 많은 전투용 군용기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원래라면 퇴출되었을 FC.12는 지상 공격기로 고쳐서 만들도록 명령이 떨어졌다.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은 CANSA는 FC.12를 급강하 폭격이 가능한 공격기로 재설계하게 된다. 다행히 원래 무장 장착이 고려된 구조여서 급강하 브레이크와 4개의 폭탄 파일런, 그리고 브레다-SAFAT 중기관총이 양 날개에 각각 2정씩 설치되었다. 2호기의 재시험도 파우스토 모로니가 맡아서 6,000 m에서 2,000 m 고도에서 급강하와 수평 폭격 실험을 했고, 기총 소사도 테스트를 받았다. 테스트를 받는 동안 작고 나무로 만들어진 이 비행기는 뜻밖에 좋은 비행 특성과 터프한 내구성을 보여주었고, 이는 항공성으로 하여금 FC.12를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다시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추가 발주된 2호기는 귀도니아 테스트 센터로 옮겨져 공군의 유명한 테스트 파일럿인 아르투로 페라린(Arturo Ferrarin : 1895~1941)이 다시 몰았는데, 그 성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종합적으로 이 기체는 엔진 출력비가 뛰어나고 충분한 강도를 지니고 있으며, 비행 성능도 좋은 데다가 이 체급으로서는 상당히 큰 페이로드를 가진다는 것을 인정받았다. 이에 의기양양해진 개발주임 쟈코모 모쏘(Giacomo Mosso : 1908~1988) 이하 CANSA 개발진들은 동조장치를 붙인 12.7 mm 기관총을 기수에 2정, 날개에 2정을 단 경량 전투기 형식도 제안했으나 이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쨌든,드디어 양산 허가를 받은 FC.12는 무솔리니가 외국의 대표단들과 피아트 본사를 방문했을 때 시범비행을 하는데 이용되기도 하는 등, 장밋빛 미래가 펼져지는듯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공군은 이미 너무나 많은 종류의 전술기를 운용하고 있어 전선에서 빠르게 소모되는 군용기를 제때에 보충하려면 생산 기종들을 통일시킬 필요가 있었다. 방만하게 일을 벌려놓은 공군 사령관 프란체스코 프리코로(Francesco Pricoro :1891~1980)의 후임자 리노 코르소 푸지에(Rino Corso Fougier : 1894~1963) 장군은 뒤늦게서야 실수를 깨달아 기종 정리에 들어갔고, 이 난리통에 발언권을 얻기 힘들었던 CANSA는 그대로 정리대상 기종의 낙인이 찍혀 생산이 중지되고 만다. FC.12는 그때까지 원형기를 포함해 겨우 11대가 만들어져 있었을 뿐이다.

6. 평가


이탈리아 공군은 FC.12 같은 저렴하고 우수한 기체를 일찌감치 채용하여 서전에 투입할 기회가 분명히 있었다. FC.12는 정확한 용도조차 정해지지 않은 채 치른 초도비행에서도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군이 서둘렀다면 1941년 초에는 전선에 투입될 준비를 마쳤을 것이고,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실전에 데뷰했을 수도 있다.
가정에 불과하지만, 만일 그랬다면 구식 공격기와 경폭격기밖에 없어 고생하고 있던 이탈리아 공군에게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FC.12는 엔진만 강화되었다면 1943년에야 등장한 암브로시니 SAI. 403(Ambrosini SAI. 403)과 같은 작고 민첩한 경전투기로 발돋움할 가능성도 충분했고, 그 상태 그대로도 공격기로써 제 몫을 해냈을 것이다. 적어도 전쟁의 향방을 바꾸지는 못했더라도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을 괴롭히는 존재감은 드러내었을 것이고, 2차 대전 전사에 그 이름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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