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1-19 23:51:51

국중일

파일:국중일.png
1942년 10월 1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키쿠타 주키치(菊田重吉)
본관 담양 국씨[1]
출생 1922년 3월 1일[2]
황해도 평산군
원적 전라남도 담양군 월산면 광암리[3]
사망 2015년 10월 14일
서울특별시
가족 부인 남양 홍씨[4]
장남 국윤호(鞠允鎬)[5], 차남 국주호(鞠椆鎬)[6]
딸 국신호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467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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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국중일은 1922년 3월 1일 황해도 평산군에서 아버지 국문환(鞠文煥, 1902. 2.8 ~ 1947. 6. 28)[7]과 어머니 울산 김씨 김영수(金榮洙)의 딸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강원도 철원군 서변면 관전리(현 철원읍 관전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철원남공립심상고등소학교(현 철원초등학교) 고등과 졸업 후 평양사범학교에 응시하여 합격했으나, 당시 5촌 당숙이 독립운동 관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바람에 신원조회에서 불합격을 받았다. 이에 차선책으로 상경하여 철도종사원양성소 전기과에 입학한 뒤 경기도 경성부 한강통(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동) 철도양성소 기숙사로 주소지를 옮겼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941년, 1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이희남(李熙男)[8]·임정호(任程鎬)[9]·이상배(李相培)[10]·이상운(李相運)[11] 등 친구들과 함께 역사 서적을 읽고 주위에 권유하는 한편, 병으로 귀향한 친구 이희남에게 '조선민족임을 자각하라'는 편지를 보냈는데, 이것이 1941년 1월 25일 재경유학생동맹(在京留學生同盟)[12]을 조직하고 신사참배 반대 및 내선일체 반대 등의 항일투쟁을 한 것으로 부풀려져 1942년 3월 8일 용산경찰서 고등계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 뒤 같은 해 5월 8일 서대문형무소에 이감되었다가, 1943년 2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에서 장기 3년, 육·해군형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차례로 선고받았고, 1943년 5월 2일 정식으로 수감되었다. 그렇게 총 2년여 간 옥고를 치르다가 8.15 광복으로 석방되었다.[13]

8.15 광복 후 귀향했다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월남하여 경기도 용인군에 정착하였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뒤 용인 태성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치러진 고등고시 행정과에 366명 중 수석으로 합격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 재건국민운동본부 행정과장(서기관)에 발령받아 근무했다.# 이후 민주공화당에서 용인군 지부장, 경기도당 선전부 담당 등을 역임하면서 잠시 정계에 몸 담기도 했으나, 1969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3선 개헌을 추진하려 하자 이에 반대 의사를 굽히지 않아 다시 교육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1974년부터 1978년까지 의정부고등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하고 이어 성남서고등학교 교장, 안성고등학교 교장, 의정부공업고등학교 교장 등을 지내고 의정부여자중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퇴직 하였다.

퇴직 후에는 광복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서울특별시에 거주하다가 2015년 10월 14일에 작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국중일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15년 10월 16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했다.

3. 여담

  • 생전인 1941년 6월 철도양성소 기숙사에서 자신의 성씨인 국씨(鞠氏)에 대해 짧은 글을 쓴 적이 있다.
● 아라이 히로토시(新井啓逸)[14] 도순사 : 같은 쪽지의 뒷면에 「지상에서 귀한 鞠씨가 나의 성이다」 운운은 어떠한 취지에서 쓴 것인가.
● 국중일 : 나의 조상에 鞠景仁씨가 있었는데 李朝시대에 중신이었던 것 같다. 나의 조상인 국경인씨는 당시 두 명의 왕자를 사로잡아 왜군(일본군)에게 왜 인질로 넘겼을까 하면서 나 자신의 조상인 국경인씨를 원망한 것이다.
- 1942년 4월 1일 경성부 용산경찰서에서, 경성부 용산경찰서 사법경찰관사무취급 도순사 아라이 히로토시(新井啓逸)와의 신문 중 일부.#


[1] 장성-선전공파 33세 중(重) 항렬.[2] 1942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27년 3월 21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국중일 본인이 1942년 4월 5일 경성부 용산경찰서에서 부친이 출생신고를 늦게 해서 그런 것 같다고 해명한 바 있다.#[3] 1942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전라남도 담양군 월산면 광암리가 출생지로 기재되어 있으나, 2001년 용인시민신문 인터뷰에 본인이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어났다고 밝혔기 때문에 전라남도 담양군 월산면 광암리와 기존의 출생지로 알려졌던 강원도 철원군 서변면(현 철원읍) 관전리 모두 출생지가 아니다. 다만 그의 조부 국동옥(鞠東玉, 1883. 4. 2 ~ 1902. 10. 5)을 비롯해 증조부 국제인(鞠濟仁, ? ~ ?. 3. 6)과 고조부 국성윤(鞠成允, ? ~ ?. 1. 17) 등 3대의 묘소가 담양군 월산면 광암리에 있는 것으로 보아 아버지 국문환 또는 조부 국동옥 이전까지는 담양군 월산면 광암리에 살았음은 확실해 보인다.[4] 1933년 2월 17일생으로, 홍길후(洪吉厚)의 딸이다.[5] 1955년 12월 16일생.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미생물학교실 명예교수이다.[6] 1957년 12월 1일생. 족보명 국조호(鞠稠鎬).[7] 창씨명 : 키쿠타 분카이(菊田文海).[8] 창씨명 : 다케하라 히카루(竹原熙).[9] 창씨명 : 도요카와 키요(豊川淸).[10] 창씨명 : 요시다 유키히로(義田幸弘).[11] 창씨명 : 이와모토 마사(岩本正).[12] '경성유학5인조'라고도 한다.[13] 원래 형기는 최소 1944년 9월 2일, 최장 1946년 3월 2일까지였기 때문에, 8.15 광복으로 석방되지 못했다면 반 년 이상을 더 수감되어 있었어야 했다.[14] 이름으로 보아 창씨개명한 조선인으로 보인다. 당시 밀양 박씨였던 조선인들이 신라(羅)의 시조인 박혁거세우물() 곁에서 태어난 것을 빌어 아라이(新井)로 많이 창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