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5 19:52:30

순화군

조선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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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호가 있거나 문서가 등재된 사람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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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선조의 왕자
순화군 | 順和君
파일:순화군묘.png
순화군묘 전경
출생 1580년 11월 16일
조선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일대)
사망 1607년 4월 14일 (향년 27세)
조선 한성부 유배지
(現 서울특별시 일대)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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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보(𤣰)
부모 부왕 선조
모친 순빈 김씨
형제자매 14남 11녀 중 6남
배우자 군부인 장수 황씨
자녀
슬하 3녀 [ 펼치기 · 접기 ]
적장녀 - 이계여(李桂餘, 1598 ~ ?)
서장녀 - 이업이(李業伊, 1601 ~ ?) 측실 천덕(天德) 소생
서차녀 - 이중이(李衆伊, 1603 ~ ?) 측실 천덕(天德) 소생
양자 - 진릉군 이태경(晉陵君 李泰慶, 1594 ~ 1612)
양자 - 해안군 이억(海安君 李億, 1613 ~ 1655)
작호 순화군(順和君)[1]
시호 희민공(僖敏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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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과 악행의 시작2.2. 궁녀 겁간 사건2.3. 수원으로의 귀양과 여전한 악행들2.4. 서울로 다시 잡혀오다2.5. 최후
3. 평가4. 여담5. 가족 관계

[clearfix]

1. 개요

조선왕자이자 연쇄살인범. 선조의 아들이자, 광해군의 이복동생이다.

선조의 아들들 중에 임해군, 정원군과 더불어서 인간 말종 왕자 3인방으로 악명높은 사람 중 하나이다. 사람을 잡아다 폭행하고 살해하기를 즐기면서 일반인이라면 정상참작은 커녕 곧바로 수십 번 죽어 마땅한 악행을 수도 없이 저질렀지만 왕자이기 때문에 의 심판을 받지 않았던 터라 왕실의 골칫덩이가 되었다. 모친의 신분이 미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악행을 밥 먹듯 벌인 것을 보면 아버지의 편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듯하다.[2] 기록들을 요약하면 '온갖 범죄를 대놓고 저지르는 사이코패스가 타고난 핏줄과 압도적인 힘의 보호를 받을 경우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그나마 천만다행인 점은 이 되지는 못했다는 점이고[3] 계속된 악행으로 나중에 가면 선조도 도저히 봐줄 수가 없어 사실상의 종신형을 선고받고 28세의 나이로 요절했다는 점. 마지막 처벌은 가택연금이었지만 이는 왕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한 것으로 문 밖으로 일절 나가지 못하게 감금했으니[4] 징역살이나 다름없었다.

이와 비슷한 쾌락살인 황족 케이스로 순화군보다 11세기 전 사람인 5세기 중국 유송유욱(劉昱)이 있는데, 이쪽이 좀 더 심하긴 하다. 10살에 진짜 황제가 되어 이후 초등학교 5학년 나이에 쾌락살인을 시작했지만,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라 살인을 시작하고 3년만에 신하에게 살해당했고 반정으로 유송도 곧 없어졌다.

2. 생애

2.1. 어린 시절과 악행의 시작

선조후궁 순빈 김씨(順嬪金氏) 사이에서 태어난 6남[5]으로, 본명은 이보(李𤣰)이다. 순화군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짐승처럼 상당히 잔혹한 성품의 소유자였는데, 후술할 경기도 수원부에서 벌인 살인 사건을 두고 아버지 선조는 "순화군이 어려서부터 동물을 잔인하게 학대하거나 죽였다."고 회상했다.
내(선조)가 말하는 것은 미안하긴 하나[6], 내가 만약 말하지 않으면 조정이 어떻게 알겠는가. 그(순화군)의 성기(性氣)는 극히 이상하여, 어릴 때부터 천성적으로 잔인하였다. 이제 저곳에서 하는 일이 모두 사람을 때려 죽이는 짓으로 잔혹하기 그지없으니, 더욱 괴롭기만 하다. 비록 주색잡기(酒色雜技)와 같은 것에 광패(狂悖)한 사람이라면 그래도 괜찮겠으나 이 사람은 그렇지 않다. 어릴 때부터 새나 짐승일지라도 반드시 잔인하게 상해시켜야 만족해 하였다.[7] 대체로 이 또한 나 때문이니, 조정 대신과 얼굴을 마주하고 말할 수가 없다.
선조실록 선조 34년(1601) 2월 10일 3번째 기사

현대의 연쇄살인범들을 분석한 자료들을 보면 항상 어렸을 적 동물 학대가 빠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16세기 순화군의 행동이 정확히 들어맞는다. 따라서 순화군은 천성적인 사이코패스이자 극한의 새디스트에 가까운 인물이었던 듯 하다. 현대 의학의 분석과 과거의 기록이 정확하게 서로 교차검증되는 신뢰도가 높은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차라리 주색잡기나 탐하면 걱정이라도 안 하는데 아비가 되어 면목이 없다는 말을 왕이 신하들에게 해야 할 정도면[8] 순화군의 포악하고 잔인한 성품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상류층이 여자와 술과 노름에 빠져 산다면 어떤 눈총을 받을지 뻔한데[9] 그걸 모를 리 없는 부친 선조가 이런 말을 할 정도면 말 다 한 것이다.

13살 때이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원도에서 의병 운동을 지원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강원도는 이미 함락되어 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함경도로 가서 미리 파견되어 있던 형 임해군을 만나 함께 회령에 주둔하였는데, 병사를 모집할 생각은 안 하고 허구헌날 술타령이나 하거나 자신이 왕자임을 내세워 함경도민에게 행패를 부리는 등 막 나갔다고 한다. 결국 마침 단단히 열받은데다 이 자들에게 불만이 상당히 많았던 국경인국세필가토 기요마사와 내통해서 임해군과 함께 일본군에게 넘겨버렸다[10]. 오죽했으면 일본군조차도 이들의 막장 행각을 듣자 혀를 차며 국경인 형제와 함경도 백성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이 인간들을 사람 취급도 전혀 하지 않았을 정도.[11]

이후 약 1년 넘게 포로 생활을 겪고 형 임해군과 함께 풀려났는데, 포로 생활이 원인이었는지 안 그래도 막장이던 성격이 완전히 더 개막장으로 진화(?)했다. 황해도 신계군에 머물 때는 10대 중반의 미성년자가 신계 주민들에게 트집을 잡아 하루에 여러 명씩 형장을 때릴 정도로 대단히 잔학해서 이이첨의 건의로 삭탈관직을 당할 정도였다. 전쟁 말기에는 여러 차례 살인을 저질렀는데, 아래 아버지 선조의 발언을 보면 알겠지만, 한창 임진왜란이 진행중인 시기, 다시 말해 스무살이 되기도 전에 확인된 피해자만 여러 명일 정도로 완벽한 빼박 연쇄살인마가 되고 만다.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1598년 12월에 원손[12]의 탄생을 축하하는 대사령으로 어찌어찌 살았지만, 4달도 안 지난 1599년 3월 25일, 또 사람 하나를 때려 죽이는 사고를 치고 만다. 연쇄살인마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쾌락 살인'과 살인 중독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 이후로는 매년 사람을 10명 가까이 죽이는 학살범이 된다. 얼마나 인간쓰레기였는지 오죽하면 임해군마저도 그래도 이랍시고 순화군의 행실을 꾸중하자 순화군은 "전 남을 패기만 하지만 형님은 집과 전답까지 빼앗지 않습니까?"라는 되도 않는 말이나 지껄였다. 자기 변명이랍시고 한 말이지만, 폭행에서 그치지 않고 사람을 여러 차례 살해했다는 점에서 완벽한 궤변.

순화군이 임해군에게 한 변명은 이렇게 해석해 볼 수도 있다. 임해군의 약탈은 주로 그럴 듯한 집과 전답과 재산을 가진 부유층 및 중산층에 집중되었지만, 순화군의 강간, 폭행, 살인 등의 범죄는 주로 가난하고 힘 없는 하인, 평민, 천민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임해군이 권력형 부정 축재자라면, 순화군은 소위 '아랫것'들에게 저지른 것이니 지가 그래도 더 나쁘지는 않다고 발언한 것이다.[13] '살인'에 대한 처벌은 아무리 당시라도 전혀 스케일이 약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당시 관점이든 지금 관점이든 말도 안 되는 개똥같은 소리라고 볼 수 있다. 웃긴 건 그렇다고 임해군도 강간, 폭행, 살인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거다.

2.2. 궁녀 겁간 사건

이렇게 쾌락살인마가 되었으나 아버지 선조의 비호 아래 임해군처럼 막 나가고 있던 순화군은, 마침내 궁궐에서 한 궁녀겁탈하는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1600년 6월 27일 선조의 첫 번째 중전인 의인왕후 박씨가 죽어서 장례를 치르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7월 16일, 순화군은 과거 의인왕후를 모시던 궁녀를, 대낮에 의인왕후의 관이 모셔져 있던 빈전(殯殿)[14] 옆 여막에서 강제로 붙잡아다가 겁탈했다. 순화군이 사람을 죽여도 눈 감고 봐주던 선조도, 이것만은 참을 수 없었는지 비망기로 크게 실망하며 순화군의 처벌을 지시한다.
순화군(順和君) 이보(李𤣰)가 어려서부터 성질이 괴팍하여 내 이미 그가 사람 노릇을 못 할 줄 알아 마음 속으로 항상 걱정하였는데 성장하자 그의 소행은 차마 형언할 수 없었다. 앞서 여러 차례에 걸쳐 살인을 하였으나 부자간의 정의로 아비가 자식을 위해 숨기며 은혜가 의리를 덮어야 하기 때문에 그때 나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유사(有司)의 조처에 맡겨두고서 오직 마음을 태우고 부끄러워할 뿐이었다. 그 후 대사령으로 인하여 다행히 죽음을 면하였으나 패악한 행동은 더욱 기탄하는 바가 없었다.

오늘 빈전(殯殿)의 곁 여막에서 제 어미의 배비(陪婢: 궁녀)를 겁간하였으니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내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하겠으나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의 치욕과 내 마음의 침통함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자식을 둔 것은 곧 나의 죄로서 군하(群下)를 볼 면목이 없다. 다만, 내가 차마 직접 정죄(定罪)할 수 없으니 유사로 하여금 법에 의해 처단하게 하라.
선조실록 선조 33년(1600) 7월 16일 1번째 기사

조선시대에는 강간에 대한 처벌이 현재와 비교 불가할 정도로 훨씬 강력했으며 부모에 대한 효를 숭상하는 유교국가 조선에서 이러한 행동은 도를 넘은 심각한 범죄였다. 왕실의 율법뿐 아니라 유교의 법에 따르면 모든 서자는 명목상 정실부인의 아들이 되고 정실부인은 서자들에게 적모, 즉 어머니가 되는데, 말하자면 순화군은 정실로서 어머니의 관 앞에서 어머니를 모시던 사람에게 강간을 저지른 천하에 둘도 없는 불효자 짓을 한 것이다.[15] 또한, 궁녀는 단순히 궁에서 일만 하는 일개 노동인력이 아닌 후궁, 그를 뛰어넘어 일국의 왕비가 될 수도 있는 문자 그대로의 왕의 여자이다. 즉 이 인간은 자기 아버지의 여자이자 넓게보면 어머니를 건드리는 패륜마저도 저지른 셈이 된다.

이후 왕명에 따라 종부시(宗簿寺)[16]에서 순화군의 처벌을 보고했는데, 당시 법률에 따라 강간범인 순화군은 짤없이 사형이었다. 그나마 종부시도 왕자를 사형시키기는 곤란했는지 화간(불륜)의 예를 들어 형을 낮출 여지를 찾는다. 이래도 곤장 80대 이상에 유배형이고, 말이 곤장이지 장 80대에 덤으로 유배는 웬만하면 맞아죽고 살아도 유배길에 죽어라 수준이었다. 이 보고를 받은 선조는 바로 순화군을 한성에서 엄청 가까운 경기도 수원으로 유배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종부시가 아뢰기를, "순화군(順和君)의 죄목을 의논하여 아뢸 것을 전교하셨습니다. 《대명률(大明律)》의 거상급승도범간조(居喪及僧道犯奸條)에 '부모의 상중에 있으면서 범간한 자는 평상의 범간보다 2등을 가중한다'고 하였는데 평상의 범간은 화간(和奸)이 장 팔십(杖八十)이며 유부녀 화간이 장 구십이니 이 죄목에 2등을 가중하는 것입니다. 동률(同律) 범간조에는 '모든 강간한 자는 교살한다' 하였으며 명례율(名例律)의 십악조(十惡條)에서는 '불효(不孝)란 부모상에 있으면서 스스로 가취(嫁娶)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대전속록(大典續錄)》에는 '강상(綱常)의 범죄[17]로서 그 정상이 심히 중한 자는 전가사변(全家徙邊)[18]한다' 하였고 수교(受敎)에는 '사족(士族)으로서(양반) 전가사변에 해당되는 죄를 범한 자는 차율(次律)로 논죄하여 장 일백 유 삼천리로 한다' 하였으며 《대전》 금제조(禁制條)에는 '사인(士人)으로서 윤상(倫常)을 무너뜨린 자는 녹안(錄案)한다[19]' 하였습니다. 오직 이 율문밖에 달리 상고할 만한 율문이 없으나 빈소 곁의 여막에서 겁간한 죄는 더욱 중대한 것입니다. 아래에서 감히 함부로 의논하지 못하겠습니다. 종부시 공무원들의 고뇌가 느껴진다.[20] 삼가 성상의 재결을 바랍니다."

하니, 비망기로 이르기를, "순화군(順和君) 이보(李𤣰)를 외방으로 귀양보내고 법대로 녹안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33년(1600) 7월 20일 5번째 기사

2.3. 수원으로의 귀양과 여전한 악행들

이때부터 순화군은 완전히 미친놈+정신병자로 취급되어 궁궐의 골칫덩어리가 되면서 결국 부친 선조도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어서 상시 감시를 위해 한성에서 그나마 가까운 수원부(지금의 화성시 화산동)로 귀양을 가게 되면서 궁궐에서도 추방당하고 홀로 떨어져 살게 된다.

하지만 거기에서까지도 순화군은 반성하는 모습을 전혀 안 보이고 도리어 왕자임을 내세워 위세나 부려댄 탓에 수원 부사조차도 어떻게 단속할 도리가 없었다. 형구를 마음대로 꺼내가서 하인들에게 멋대로 형벌을 가하도록 해서 향리들이 죽을 지경으로 맞았으며, 관리들도 순화군이 무서워서 도망쳐버린 탓에 수원부의 행정업무가 완전히 마비되고, 심지어 부사마저 도망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이를 보고받은 선조와 조정에서는 단순히 유배시켜 놓기만 하는 걸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위리안치를 지시했다.[21] 하지만 이랬는데도 불구하고 순화군은 금부도사가 담장을 쌓을 때도 사람을 두들겨 패고, 문을 잠그자 자기 손으로 어떻게든 집요하게 직접 열고 나오는 등 여전히 제멋대로 굴었다.

처음 왔을 때 수원부사 최산립(崔山立)[22]은 다른 데로 옮겨지고, 권경우(權慶佑)가 새로이 부임해왔으나, 부임하는 날 즉시 순화군에게 먼저 인사를 하지 않고 출관부터 하자, 부사 권경우를 미워한 나머지 패악한 짓을 저지른다. 긴 을 차고 을 타고 달려와서는 기둥을 칼로 치면서 "부사(府使) 몸에서는 피가 나오지 않는다더냐?"라고 협박을 하고 그 다음에는 하인에게 도장을 찍은 봉지 하나를 가져가게 했는데, 그 안에는 먹으로 사람 머리를 그려놓고 '부사 권경우의 잘린 머리통이다.'라고 써 있었다. 이를 받은 권경우는 겁에 질려 출근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고, 결국 이게 문제가 되어 수원부사 자리에서 짤렸다.

이후 수원부사는 또다시 박이장(朴而章)으로 교체되었으나, 그라고 해서 딱히 순화군을 감당할 형편은 되지 못했다. 순화군의 집 궁문을 봉쇄해버렸으나, 순화군은 오히려 담장을 헐고 밖을 맘껏 나다니면서 백성들에게 온갖 행패를 부렸다. 어찌나 포악하게 행동하는지 당시 굵직한 상황을 보면 나물이 맛이 없고 채소가 신선하지 않다는 사소한 사유로도 채소밭을 맡고 있는 노(奴) 임동(林同)의 숙모를 잡아다가 직접 몽둥이로 20여 차례 두들겨 팼으며, 읍내에 사는 김영수(金永水)가 궁에 상직하러 나갔을 때 그냥 잡아다 들여서 두들겨 패고 옷을 불태웠다. 심지어 쇠고기생선을 올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창고지기 노비 어리손(於里孫)의 가옥을 불태워 없애기도 했고, 초의 상태가 불량하다는 이유만으로 화공(畫工) 정업수(鄭業水)를 잡아다가 40차례 직접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또한 약주를 가지고 간 원금(元金)이라는 사람을 무수히 구타하거나 역시 약주를 가지고 온 계집종 주질재(注叱介)를 붙잡아 옷을 전부 벗겨 결박하고는 날이 샐 때까지 풀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는 장석을시(장돌똥) 사건으로 결정타를 콕 찍는다. 군사(軍士) 장석을시(張石乙屎)는 집에 질병이 돌아 맹인 윤화(允化)의 아내 맹무녀(盲巫女)를 데려다가 역신(疫神)을 쫓는 굿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순화군이 이들을 잡아가서는 한 차례 형문을 한 뒤에 밤새도록 붙잡아 두었다. 그리고 맹무녀를 폭행하고는 그녀의 위아래 치아를 1개씩, 장석을시의 위아래 치아를 9개씩 쇠뭉치로 때려서 깨부수고 집게로 잡아 빼버렸던 것이다. 무녀는 궁 안에서 얼마 못 가 숨을 거두었으며[23], 장석을시는 이튿날 풀려났지만, 워낙 죽을 정도의 상처를 입었던 터라 역시나 곧 사망했다고 한다.

결국 수원 사람들이 순화군을 피해 앞다투어 고을을 떠나 도망쳐서 수원이 망할 지경이 되었는데[24], 오죽하면 수원에 있는 사또들이 죄다 도망가자 백성들도 따라서 도망갔을 정도였다. 이는 삼국지에 나오는 삼보의 난에 비견될 정도로 한 두 사람의 만행으로 대도시가 허허벌판이 된 사례이다. 이에 선조는 어쩔 수 없이 순화군을 다시 한양으로 불러들여 가택 연금해 두었다. 하지만 여전히 담을 허물고 나가 사람을 붙잡아다가 곤장을 치는 등 여전히 개망나니짓을 멈추지 않았다. 이때 임해군과 순화군의 악명들이 하도 높아서 이들을 사칭하면서 소란을 피우는 놈들까지도 다 나왔을 정도였다. 결국 사헌부를 비롯해서 순화군을 잡아 죽이라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선조는 아들의 이런 행각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계속 두둔하며 처벌은 하지 않았다. 실록 기사. 하지만 순화군은 성격이 워낙 흉포하여 고쳐질 생각이 전혀 없고 계속해서 폭력을 일삼는 등 막가파의 모습은 여전했다. 결국 이런 보고를 계속 받게 되어 입장이 난처해지며 손도 도저히 쓸 수 없게 된 선조는 결국 순화군을 폐하고 서인으로 강등시켜버려 순화군을 도성으로 압송했다.

2.4. 서울로 다시 잡혀오다

순화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었으나 아비인 선조의 배려로 왕족 대우를 받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순화군은 이를 역이용하여 서울에 잡혀와서도 조용히 살지 않고 훈련 도감 소속의 포수와 무뢰배를 모아서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그들을 몰아 사람을 붙잡아서 두들겨 패고 죽이는 사건을 일으켰다.
순화군 이보가 사람을 죽였다.

사관의 주석: 순화군 이보가 위리(圍籬)에서 벗어난 뒤부터 더욱 흉학(凶虐)한 짓을 마구하여 거리를 드나들면서 사람을 만나면 번번이 죽였었는데 이날에도 두 여인을 죽여 참혹한 독기를 뿌린 것이 극도에 달하였으므로 조야(朝野)가 진동하여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때 임금은 바야흐로 왕자(王子)들을 비호하기만 하여 감히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만 중한 배척을 가하였으므로 대관도 감히 논계하지 못하고 재상들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37년(1604) 5월 25일 기사

특히 순화군은 아버지 선조가 감싸주니 상태가 더 심해져, 급기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집을 뛰쳐나와 길거리를 쏘다니며 사람을 죽이고 곤장을 치길 먹듯이 했다. 순화군이 온다는 말만 들어도 사람들이 도망치고 숨고, 순화군 밑의 무리들은 이 틈을 타서 도적질을 해댈 정도. 이쯤 되면 완전한 도적떼다. 이때문에 관리들이 그를 다시 잡아 가두려 했는데 문 앞에 앉아서 닫지 못하게 시위를 벌이고 폐문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에게 죽이겠다고 협박해댔다. 당시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순화군(順和君) 이보(李𤣰)를 안치(安置)시킨 곳의 수리가 끝났으므로 봉쇄하려는데 보가 문에 버티고 앉아서 봉쇄하지 못하게 합니다. 반복하여 타일러도 끝내 듣지 않으니 본부에서 처치할 수가 없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선조가) '알았다'[25]고 전교하였다.

사관은 이같이 논한다. 임금도 이를 억제하지 못하니 다른 사람이야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하나의 왕자(王子)를 죽이는 것은 진실로 차마 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백성은 무슨 죄인가. (죄 없는 백성을 위해 잡아서 죽여야 한다는 뜻)
선조실록 선조 37년(1604) 8월 7일 기사

이 정도로 순화군의 악행이 너무 심각해 대신들은 "이러다가 진짜 도시가 여럿 망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순화군의 처벌을 허락해 주십시오! 사형까지 바라진 않습니다. 군호를 빼거나 서인으로 강등시키게 해 주십시오!"라고 필사적으로 간청했지만 선조는 그때마저도 "절대 윤허하지 않는다!"와 "전적으로 관리 못하는 네 놈들 책임이야!"라고 화를 냈다. 이 때문에 제대로 화가 난 대신들이 "어떻게든 간에 방도를 생각해주십시오! 아무리 방법을 써도 통 말을 듣지 않으니 어떡하란 말입니까?!"라고 엄청나게 화를 내며 간언해도 대충 인사치레로 "알았으니 더 이상 묻지 마."라고 답만 내놓을 뿐이었다.

이로 인해 대신들도 기가 제대로 차서 '아니, 다른 건 바라지 않고 처벌만 허가해달라는 것도 과한 요구인 거야? 게다가 자기 손으로 죽이기 싫으니 대충 인사치레에 책임을 전가해..? 우리가 얼마나 불을 켜고 감시하는데도 말을 듣지 않는데!'라고 화를 낼 정도였으니.... 사관도 순화군의 악행과 함께 선조의 우유부단과 책임 회피를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2.5. 최후

결국 부친 선조도 눈감아주긴 했지만 계속된 아들의 범죄를 아무리 아들이라도 더는 참아줄 수가 없어, 금군 무사들을 보내서 순화군을 붙잡아 단단히 가택 연금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여러 추태가 이어졌는데, 안치하는 과정에서 순화군이 난동을 피우고 일을 맡은 관리들은 왕과 왕자 사이에서 눈치를 보느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사실 왕조 국가에서 이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나지만, 어쨌거나 엄연한 최고 결정권자는 군주이므로 선조가 똑부러지게 한 마디로 결단만 내려줬으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겠지만, 선조는 끝끝내 자기 손으로 끝을 내긴 싫었는지 "해야 할 일을 하라."는 식으로 애매하게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투의 전교만 반복한다. 오죽 답답했는지 이 과정에서 사관도 주석을 달아 선조를 비난하고 있을 정도다.
순화군을 안치한 곳을 수축(修築)하는 일로 감역관(監役官)이 이보(李𤣰)에게 고하니, 즉시 노발 대발하며 ‘만약 더 축조하여 폐문(閉門)시킨다면 해관(該官)은 무겁게 다스리고 군인은 살해하겠다.’고 하였다. 공조가 계문(啓聞)하니, 상이 일렀다.

"어쨌든 유사(有司)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라."

사신은 논한다. 국가에서 한 왕자를 용서하여 남교(南郊)에다 함정을 만들고는 패역스런 짓을 저질러도 자제시키지는 못하고 늘 유사에게 미루니, 가령 유사가 고요(皐陶)처럼 법대로 집행할 경우 국가에서 과연 법대로 논단(論斷)해서 뒷재앙이 없게 할 수 있겠는가.
선조실록, 선조 37년(1604) 10월 4일 4번째 기사
순화군(順和君) 이보(李𤣰)를 안치한 곳의 담장과 자물쇠를 수리하는 등의 일을 해사에서 손을 댈 수가 없어 제때에 거행하지 못하자, 의금부에서 급급히 거행하게 할 것을 청하는 한편 낭청을 추고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사관의 주석: 국법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한심스럽다.
선조실록, 선조 37년(1604) 10월 5일 4번째 기사

어쨌거나 이번에는 정말 단단히 갇혔는지, 순화군은 이 이후 집밖으로 나오지도 못했고 몇 년간 살인을 저지르지 못했다. 이렇게 지내다가 풍(風)을 맞아 쓰러져 움직일 수 없게 되었는데, 실록에 적힌 정황을 보면 별다른 치료도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1606년 실록 기사에 '풍병을 앓은지 오래'라는 말이 나오는데, 아버지 선조의 귀에 들어갔음에도 별다른 후속대처는 없었다. 그래도 포악한 짓은 여전해 노비들을 시켜 사람을 잡아 구타하고 고문하는 짓을 대행시켰다.

어머니 순빈 김씨의 일족이자 자기 외삼촌인 김언희를 잡아서 노비들을 시켜 구타하게 하여 그의 가족들이 의뢰를 해서야 겨우 사태가 진정될 정도였으니... 그 사악함은 이루 말 할수 없었다.

물론, 선조는 순화군의 직접적인 처벌은 회피하고 있긴 했지만 순화군을 정말 대충 대했다. 밥도 대충 줘서 순화군이 밥을 거르기도 했고 순화군이 아프면 일절 치료해주지 않았다.

이후 순화군은 1년 뒤인 1607년, 26세의 나이로 죽는다.[26] 순화군이 풍을 맞았는데 치료하면 살 수 있었음에도 선조는 일절 치료해주지 않아서 순화군은 사망했다. 저지른 패악질 때문에 이미 폐서인된 상태였지만, 사후 '순화군'으로 복권되었다. 후사가 없어서 익성군(益城君)[27] 아들 진릉군(晉陵君) 이태경(李泰慶)이 후사를 이었으나[28] 왕위 추대로 인한 역모로 파양되었고, 대신 이복동생 인성군의 차남 해안군(海安君)이 후사를 이었다. 또한 그에게는 정실 부인 소생의 이계여(李桂餘)라는 딸이 있었다고 한다. 순화군의 부인은 인조 때까지 살았던 듯 하다.

정조 때 희민(僖敏)이라는 매우 분에 넘치는 시호를 받았다. 비슷한 짓을 저지른 후폐제는 시호도 못 받은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분에 넘치는 시호인지 잘 알 수 있다.

3. 평가

비록 임해군정원군의 행패보다는 덜했음에도, 무고한 사람을 죽인 숫자가 해마다 10여 명을 헤아리기에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호환을 피하듯 했다.

<선조실록>의 순화군 졸기(卒記)에 기록된 다음 문장이 그의 생애를 한마디로 압축해 보여준다. 이를 통해 그보다 더하다는 형 임해군정원군이 얼마나 개차반인지를 짐작케 한다. 물론 임해군과 정원군의 범죄는 살인강간도 있기는 했지만 주로 폭행이나 협박을 통한 고위층 및 중산층 재산 강탈이라서 피해자들이 하나같이 고위직들인 데다가 대부분 살아 있었기 때문에 할 사람이 더 많았다. 반대로 순화군은 주로 평민층 피해자들이 많았고 대부분 죽었기 때문에 욕할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행패가 덜한 것처럼 여겨졌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순화군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나 사회적 약자들만 골라서 죽였다는 점에서 임해군과 정원군보다 더한 악질이다.

졸기라는 기록 특성 상 '죽은 마당에 좋은 말이라도 좀 해주자'는 식으로 미화한답시고 써 놓았을 여지도 있다. 적어도 임해군이나 정원군은 순화군처럼 고을 하나를 풍비박산내거나 아버지 선조에 의해 위리안치 및 가택연금을 당하진 않았고, 최후 역시 끝끝내 아버지에게서 외면받고 방치당하면서 사망한 순화군보다는 나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둘 역시 말년이 좋진 않았다. 임해군은 동생 광해군이 집권하자마자 역모 혐의로 귀양에 처해진 후 의문사했고,[29] 정원군은 큰 벌을 받진 않았으나 아들 능창군이 역모 누명으로 죽고 집도 궁궐 부지로 징발되어 뺏긴 후 술에 찌들어 살다 생을 마감했다.[30]

순화군이 선조의 비호 아래 살인 행각을 계속 벌여온 것이 답답해 보일 수는 있으나 당시 의학적 지식의 한계와 전제군주제라는 특수성을 생각해보면 그러한 사정을 전혀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순화군은 명백한 사이코패스 성향을 띠고 있으며 '살인 중독'에 빠진 상태이므로[31] 격리하는 게 최우선인 상황이었으나, 선조 입장에서는 살인을 취미로 즐긴다는 생각은 꿈에도 할 수 없었고 순간 욱해서 저지른 실수이겠거니 하며 이번만 넘어가면 다음에 또 저지르지는 않으리라 여긴 듯 하다. 결국 순화군이 5년간 살인을 비롯한 각종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자 참고 참은 끝에 선조도 혈육이지만 더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사회로부터 격리해버리고 집안에서도 아예 없는 사람으로 취급해 버렸다.

단,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임을 감안하더라도 선조의 초기 대처가 매우 미흡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비록 쾌락살인마라는 개념이 알려져있지 않았다고 해도 선조의 조치는 당대 기준으로 봐도 심각하게 안이했다. 아무리 왕족, 그것도 왕의 자식이라도 사람을 계속해서 재미로 죽이거나 겁탈하는 미친 자가 멀쩡히 돌아다니는데 임금이 나서서 벌을 주거나 사회로부터 격리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겨우 유배형에 그쳤고, 관리라도 똑바로 해야 함에도 수원이라는 거대한 고을 하나가 망할 지경이 되도록 아무 조치도 안 취하고 방치만 했다. 단적으로 당시 사회적 기준으로 선조의 행동에 큰 문제가 없었다면 사관들이 앞다투어서 '국법이 한심하다'느니 '백성은 무슨 죄인가'라느니 주석들을 달면서 간접적으로 선조를 비난하진 않았을 것이다. 즉, 순화군의 살인 행각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던 고위 신료들 기준에서도 선조의 대처엔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다.[32]

4. 여담

  • <숙종실록>에는 최유연(崔有淵)이라는 9살 어린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최유연네 집안의 계집종이 순화군에게 를 지었는데[33] 이에 순화군은 성을 내며 최유연의 아버지를 잡아가 버렸다. 이에 어린 최유연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순화군을 찾아가 빌었고 순화군은 화를 풀어 그의 아버지를 풀어주었다. 그 덕분에 최유연이 효자로 칭송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34][35]
  • 비슷한 인물로 유송후폐제고려충혜왕이 있는데 행여나 후계 문제가 꼬여 순화군이 왕이라도 됐으면 거의 높은 확률로 비슷한 길을 걸었을 것이다.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와 별내동(舊 덕송리)의 경계에는 이 사람과 모친인 순빈 김씨의 묘소가 같이 있다. 그래서 근처 고개 이름이 순화궁고개가 된 것은 물론, 청학리에서 출발하여 별내신도시를 크게 한 바퀴 도는 간선도로의 이름도 순화궁로가 되었다.

5. 가족 관계

  • 정부인: 군부인 장수 황씨(郡夫人 長水 黃氏, 1577 ~ 1645) - 황혁[36](黃赫)의 딸
    • 적장녀: 이계여(李桂餘, 1598 ~ ? )
    • 사위: 판서 이경증(判書 李景曾, 1595 ~ 1648)
    • 양자: 진릉군 이태경(晉陵君 李泰慶, 1594 ~ 1612) - 덕흥대원군의 증손자, 옥사로 사망한 후 파양.
    • 양자: 해안군 이억(海安君 李億, 1613 ~ ?) - 인성군의 차남
    • 며느리: 제주 고씨(濟州 高氏) - 고상의(高尚義)의 딸
      • 손자: 영창군 이침(瀛昌君 李沉)
      • 손자: 영래군 이속(瀛萊君 李洬)
      • 손녀: 군수 권덕윤(郡守 權德潤)의 처
      • 손녀: 진사 변광식(進士 邉光軾)의 처
      • 손녀: 군수 류단(郡守 柳摶)의 처
    • 며느리(첩): 성씨 미상
      • 손자: 탐계군 이면(耽溪君 李冕)
      • 손자: 탐릉군 이인(耽陵君 李(小/曰/儿))
      • 손자: 탐산군 이극(耽山君 李克)
  • 첩부인: 천덕(天德)
    • 서장녀: 이업이(李業伊, 1601 ~ ?)
    • 사위: 첨사 이인로(僉使 李仁老)
    • 서차녀: 이중이(李衆伊, 1603 ~ ?) - 조졸

[1] 봉호는 평안남도 순안의 옛 이름인 순화(順和)에서 유래했다.[2] 사실 조선 왕조중종 치하 이후로부터 인종, 명종을 거치면서 왕실의 자손이 갈수록 귀해졌기 때문에 조선 중후기로 가면 적서, 성별, 모친의 출신 등을 막론하고 왕의 자손으로 태어나기만 하면 금지옥엽 귀하게 자라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평균 수명이 짧고 의학기술이 미천한 당시 조선에서, 현실적으로 왕의 직계자손인데 모계의 신분이 미천하다고 진짜로 천출 취급을 하기는 힘들 것이다. 결국에는 헌종, 철종 때 대가 완전히 끊겨 몆십촌이 넘는 사실상 남남이나 다름없는 흥선대원군의 아들 고종을 데려와야만 했다. 혹자는 이 때문에 조선왕조의 운명은 일제강점기가 아닌 철종이 사망했을 시점에 이미 끝났다고 하기도 한다.[3] 사실 행적을 보면 알겠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순화군을 왕으로 세울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하다 못해 선조조차 비호만 했고 그를 세자로 삼을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다. 물론 순화군이 장남도, 간택 후궁 소생도, 어마어마하게 총애받는 후궁 소생도 아니어서 그런 것에 더 가깝지만 말이다. 만약 순화군이 선조의 적자/서자 포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면 순화군이 세자가 되지 못한 이유가 언급할만한 가치가 되겠지만.[4] 평범한 귀양도 여러차례 당했으나 귀양가서도 패악질을 저지르자 선조가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문을 봉쇄했음에도 담장을 허물고 나가서 막장 행각을 벌였다. 죽기 전 3년간은 이런 행위도 못한 것으로 봐서 아예 방 안에 가두고 감시를 엄격하게 하며 탈출할 수 있는 도구를 일절 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5] 생년은 정원군과 같지만, 순화군이 조금 늦게 태어났다.[6] 궁중용어라 '무안하다', '창피하다'로 해석해야 한다. 즉 아버지인 본인이 생각해도 아들인 순화군의 행실이 영 창피하단 뜻.[7] 태어날 때부터 사이코패스적인 성향이 강하게 드러났다. 후천적 영향이 아니라는 얘기.[8] 출세는 할 수도 없고 재산은 많은데 쓸데없이 똑똑하면 자기도 모르게 역모에 엮여 영문도 모르고 저승으로 가야 했던 조선시대 왕족들의 잔혹사를 감안하자. 제왕학을 배울 국본이 아니라면 차라리 주색잡기에나 빠져 사는 게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가장 안심될 만도 하다. 그래서인지 왕실에서는 총명한 늦둥이는 일찌감치 방계 왕족의 봉사손으로 지명함으로써 후계구도에서 배제시켜 입양된 가문과 본가로부터 물려받는 자산을 바탕으로 풍류를 즐기며 유유자적케 했고, 놀기만 좋아하고 학문을 질색하는 멍청한 왕자들은 아예 글도 제대로 안 가르쳐서 문맹(한자를 모르는 것)급으로 무식한 왕자도 많았다고 전해진다. 종실 제사 등의 문제로 임금에게 제출해야 할 상소를 언문으로 작성하느라 실무자들을 난감하게 했다는 일부 왕족들의 일화도 다 전해질 정도.[9] 다만 평범한 사대부 가문이라면 몰라도 왕자라면 그 정도 눈총은 부왕이 얼마든지 덮어준다. 부왕이 작고하고 큰형이나 조카가 왕위를 이어받아도 어지간한 큰 일이 아니면 선왕의 은혜를 입은 아우/어르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고 실드는 이어진다. 150년 후 청나라에서도 보인 사례인데, 화친왕 홍주는 형인 건륭제가 너무 유력한 황제 후보라 뒷방으로 밀려나 망나니 노릇을 하였다. 대낮에 궁에서 대신을 폭행하는 등의 난행을 저질렀음에도 건륭제는 신하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홍주에게 관용을 베풀었다.[10] 정확히 말하자면 국경인은 일본군을 도우려 왕족들을 바치려 한 것인데, 백성들이 그것을 도왔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11] 다만 함경도에서도 이후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과 조선인 순왜들의 횡포로 나중에는 정문부의 북관대첩으로 대표되는 의병 투쟁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게 된다.[12] 이복형 광해군의 아들인 폐세자 이지를 말한다.[13] 그리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순화군의 행적은 두 형들(임해군, 정원군)보다도 악랄한데, 정작 사관들은 순화군이 임해군, 정원군보다는 그나마 나았다고 기록했다.[14] 매장되기 전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안치하던 건물.[15] 심지어 당시에는 부모의 초상 중 최소한 3년은 아예 합방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즉, 정상적인 부부간의 관계도 욕먹을 행동일 정도였다.[16] 왕족을 처벌하는 기관[17] 반역이나 패륜 관련 범죄; 부모와 자식, 군주와 신하, 남편과 아내, 주인과 노복 등 상하관계에서 아래가 위를 범하는 중대 범죄[18] 먼 외지로 귀양 보내는 것. 여기서 먼 외지는 주로 함경도, 평안도 등 변방이었다.[19] 녹안이란 일종의 블랙리스트로, 현대의 명단 공표나 성범죄자 알림e 같은 걸 생각하면 된다. 조선시대엔 용도에 따라 문서명이 달랐는데, 패륜이나 강상죄는 패상안(敗常案), 부정부패는 장리안(贓吏案) 등에 기록했다.[20]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왕자라 감형을 하긴 해야겠는데(…) 법전을 뒤져보니 목 졸라 죽이거나(강간은 당시에도 중범죄로 사형을 했다고 한다.) 을 때려서 유배보내는 것밖엔 답이 없으니 말을 꺼내기 어려울 것이다.[21] 유배는 그나마 정해진 구역까지는 돌아다닐 수 있지만, 위리안치는 이보다 더 강도가 높은 형벌로, 집을 가시울타리 담장으로 둘러싸 출입을 일체 막고 허락 없이는 야외로 출입이 일절 금지였다.[22] 의인왕후 상중에 순화군에게 고기를 바치고 방관한 죄를 물었다는데, 사실 최산립은 겉으론 순화군에게 뇌물을 바치고 속으로는 순화군의 악행을 빠짐없이 적었다.[23] 사인이 아주 기가 막혔다. 워낙 고문이 심해서 피가 기도를 막아 질식사했다.[24] 현재의 수원시가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경기도 내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는 것과 동일하게 당시에도 수원은 조선의 행정구역(부목군현) 중에서도 제법 크고 발달도 잘 되고 인구도 많은 지역이었다. 그러니까 현대로 치면 광역시급 도시 하나가 대통령 영식 단 한 명의 악행으로 한순간에 멸망 일보 직전이 돼버린 것이다.[25] 해결하겠다는 뜻이 아닌 그냥 인사치레에 가깝다.[26] 이듬해 아버지 선조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27] 덕흥대원군의 손자이자 하원군의 차남.[28] 숙종 7년(1681)에 편찬한 선원록(璿源錄)을 보면 여전히 계후(繼後)라는 표시가 있다.[29] 광해군에 의해 살해당했음은 유력했으나, 광해군의 손에 어린 나이에 아무런 죄 없이 죽은 영창대군과는 달리 임해군은 워낙 패악질이 심했기 때문에 동정 받지 못하고 있다. 실록과 승정원 일기의 기록을 보면 인조가 왕위에 오른 뒤 임해군 옥사를 주도한 이들의 관작을 삭탈하며 벌을 주고 영창대군과 함께 억울하게 살해당한 왕자로 취급하는 등 조선 조정에서는 임해군 살해를 엄연히 문제 있는 일로 여겼다. 다만 생전에 임해군을 처형하려는 상소가 빗발친 걸 감안하면 정식 재판 없는 비공식적인 처형을 문제삼은 것에 가까울 것이다.[30] 다만 아들 능양군이 훗날 인조로 왕이 된 뒤, 원종이란 칭호를 받고 미화됐다. 물론 어디까지나 왕의 아버지의 정통성 문제를 보완하려는 이유 만으로 추존된것이고 당대 사람들에게 평가가 좋지 않았다.[31] 순화군은 목적이 있는 살인이 아닌 살인 그 자체를 즐기는 타입이었다.[32] 당장 장자였던 임해군도 임진왜란-정유재란 시절 동안 벌인 만행에 한정하더라도 워낙 개판이라서 사관들이 선조에게 임해군을 사형 시켜서라도 바로잡으라는 상소를 올린 적이 여럿 있으며, 심지어 선조의 먼 조상인, 조선 초기인 세종 시절 때만 해도 선왕께서 부고하셨으니, 더 이상의 후환을 막기 위해 양녕대군을 처형해야하지 않냐는 상소도 여럿 나왔었다.[33] 앞서 서술된 순화군의 온갖 막장행각을 감안하면, 사실 이 '죄를 지었다'라는 것도 어쩌면 그저 사소한 실수였거나 혹은 말도 안 되는 일로 억울하게 트집을 잡힌 것일 가능성도 있다.[34] 부모에 대한 효를 중시했던 조선 시대에서 효자는 많은 특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만큼 선정되기도 어려웠다. 즉 순화군 같은 인간말종으로부터 자기 아버지를 살려냈다는 것이 당대 기준으로 충분히 효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 만큼 기적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 정도로 순화군의 막장행보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그리고 당대 사람들이 그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라고 볼 수 있다.[35] 순화군의 포악함과 잔혹함을 감안해보면 어린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찾아와 빈다고 해서 아버지를 풀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어린아이까지 모조리 죽여버렸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인간이다. 그런 그가 이례적으로 대단히 자비로운 태도를 보이니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36] 황정욱(조선)의 장남이고 황희의 7대손이다. 진릉군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