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한씨 족보에 등장하는 애왕에 대한 내용은 애왕(기자조선)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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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 건마국 초대 군주 한왕 | 韓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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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 (음력) | 단군조선 말대 국왕 | ||
기원전 210년 ~ 기원전 194년 | |||
마한 건마국 초대 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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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조선의 군주. 기자조선설을 따른다면 기자조선의 마지막 군주다.주요 사료나 연구 결과 등을 종합해보면, 기원전 3세기 후반부터 기원전 3세기 초엽까지 연나라에게 요녕 지역을 빼앗기면서 한반도 서북부 일대만을 관할하는 소국으로 전락하고, 또한 진나라 시기까지 큰 존재감 없이 지내던 고조선을 초한쟁패기라는 난세를 이용해 영토를 크게 늘리는 등 중흥시켰지만, 수하였던 위만의 정변으로 무너진 군주이면서도 새 나라의 군주가 된 의지의 사나이라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항우가 한때 중국전역을 재패했음에도 결국 권토중래를 단념하고 자살한 것을 생각하면 정반대 길을 걸은 셈이다.[2] 다만 재위 중에 어떤 정책을 펼쳤는지에 단편적으로 전해지는 수준에 그치며 그 이외 일에 대해서 그다지 자세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2. 고조선 시절
《삼국지》에 따르면 기자의 40여 세손이라고 한다.[3] 부왕(否王)의 아들로 기원전 210년경 즉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진시황 대에 부자 세습을 이루었다는 것 외에는 명확한 연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염철론』에 따르면 부왕이 진·한 교체기에 능동적으로 움직여 패수(일반적으로 압록강에 비정)까지 진출하여 어느 정도 영토 회복을 이뤄냈다고 한다.大夫曰 往者 四夷俱强 幷爲寇虐. 朝鮮踰徼 劫燕之東地 東越越東海 略浙江之南 南越內侵 滑服令 … (후략) ….
대부가 이르기를 "지난날 사방의 오랑캐가 함께 강해져, 나란히 노략질과 포악을 저질렀습니다. 조선은 요새를 넘어 연의 동쪽을 겁박했고, 동월은 동해를 넘어 절강의 남쪽을 약탈했습니다. 남월이 내침하여 복령을 어지럽혔습니다. … (후략) …"
《염철론》 비호편
대부가 이르기를 "지난날 사방의 오랑캐가 함께 강해져, 나란히 노략질과 포악을 저질렀습니다. 조선은 요새를 넘어 연의 동쪽을 겁박했고, 동월은 동해를 넘어 절강의 남쪽을 약탈했습니다. 남월이 내침하여 복령을 어지럽혔습니다. … (후략) …"
《염철론》 비호편
다만 이렇게 획득한 지역을 놓고 '진의 옛 공지(秦故空地)', 즉 비어있는 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중국이 엄격한 군현 지배를 한 지역 같지는 않다. 아마도 진이 전국 각지의 반란으로 무너진 혼란기에 중국 정부의 통제가 닿지 못한 지역에 깃발을 꽂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나마도 직접 통치가 아니라 중국계 유민을 받아들여 모여살게 하면서 간접 통치 구조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二十餘年 而陳 項起 天下亂 燕 齊 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20여 년 뒤 진승과 항우가 봉기하고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 · 제 · 조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겪어 서서히 준에게 망명하니, 준은 이에 이들을 서방에 거처하게 했다. 한 대에 이르러 노관이 연왕이 되자, 조선과 연은 패수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위략》
20여 년 뒤 진승과 항우가 봉기하고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 · 제 · 조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겪어 서서히 준에게 망명하니, 준은 이에 이들을 서방에 거처하게 했다. 한 대에 이르러 노관이 연왕이 되자, 조선과 연은 패수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위략》
기원전 195년에는 과거 연나라 땅에서 망명해 온 위만에게 서쪽 변방을 지키게 했는데, 이때 박사(博士) 직과 홀[圭], 100리의 땅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100리의 땅'은 맹자에서 말한 제후국의 땅('사방 100리의 땅')과 이미지가 많이 겹친다. 아마도 일종의 영주를 책봉하는 식으로 서쪽 지배권을 확립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중국 쪽과 딱히 관계를 맺은 기록은 나오지 않는데, 부친이었던 부왕과 이후 위만이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특이한 케이스. 물론 상기된 유망민 문제가 신경쓰여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님 단순히 기록이 누락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기원전 194년, 위만은 반란을 일으켜 왕검성[4]을 공격했다(《위략》에 따르면 한나라가 쳐들어온다고 거짓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준왕은 맞서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않아 측근들과 함께 남쪽 한 땅(韓地)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한지에 정착한 뒤 나라를 건국하고 한왕(韓王)을 자칭하였으며, 빼앗긴 고향 위만조선과는 교류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의 생애는 기록에 없다.
3. 마한 정복?
자세한 내용은 준왕의 마한 정복 문서 참고하십시오.4. 삼한정통론
삼한 정통론은 마한정통론이라고도 불린다. 이 이론은 조선 후기 국학 계열의 실학자들에 의해 발흥한 이론으로 기자조선이 위만조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이론이다. 이유는 위만은 찬탈자로 유교적 사상에 근거하면 적통으로 볼 수 없고 적통인 준왕이 쫓겨 내려가 마한의 군주가 되었기 때문에 기자조선의 적통은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족보들의 내용으로는 준왕의 씨족은 기씨(箕氏)에서 한(韓氏)로 바뀌었다는 내용들이 있다. 그래서 기자의 혈통과 유지는 마한, 더 넓게는 삼한으로 계승되었고 삼한은 한국사로 이어진다고 보았다.이러한 역사관은 조선시대 사서들의 정통론적 사관에 기초한 것으로[5], 현대적인 역사학 방법론 도입 이전에 발흥해 전해온 것이다. 이후 2010년대에 건마국 유적이 발굴되고, 백제에서 건마국 출신 귀족들을 높게 대우해주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무왕이 그들을 친위세력으로 삼고 익산으로 천도하려고 했던 점, 고구려에서 기자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점, 신라의 경우는 언급이 거의 없지만 최치원이 당나라에 쓴 <양위표>(讓位表)에 고조선의 8조법을 의미하는 기자의 팔조지교(八條之敎)를 이어받았다는 언급이 있는 걸로 볼 때 아직 공통조상으로 여겼다고 보기는 어려워도 적어도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왕조로서 고조선이 존재했었다는 사실 자체는 삼국시대 당대부터 인식하고 의식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이후 고려시대에 가면 본격적으로 유학 교육과 지식이 확산되면서, 또 여몽전쟁기 및 원간섭기에 들어 유구한 역사에 대한 자존심을 강조하게 되면서 고조선 왕조는 한반도의 공통조상으로서 위상이 올라가게 된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는 마한을 한국사의 정통 왕조 중 하나로 보았다. 정통 왕조로 간주하던 고조선의 군주였던 준왕이 찬탈자 위만에게 쫓겨와 여기서 마한왕이 되어 이어졌기 때문. 그리고 마한 멸망 이후의 삼국시대는 신라 문무왕이 통일할 때까지는 하나의 정통 국가가 없는 무통(無統)의 시대로 보았다.
5. 기자 및 준왕을 시조로 삼는 성씨 목록
- 청주 한씨
《위략(魏略)》과 《위지(魏志)》의 글을 토대로 하여 한국 고유의 성씨인 한씨(韓氏)의 시조로 여겨져 왔다. 이를 바탕으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6]의 씨족대전(氏族大全), 《열성왕비세보(列聖王妃世譜)》등 많은 문헌에서 나타나고 있으나, 현재로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 부정되고 있고, 임진왜란 이후의 사료들만이 있는 상황이므로 확실치 않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7]마한 말기에 잔약(孱弱)한 자손 세 사람이 있었는데, 친(親)이라고 하는 사람의 후예는 한씨(韓氏)가 되고, 평(平)이라고 하는 사람은 기씨(奇氏)가 되고, 양(諒)이라고 하는 사람은 용강(龍岡)의 위석산(烏石山)으로 들어가서 그 후예가 선우씨(鮮于氏)가 되었다.《증보문헌비고》 제계고 마한의 씨족편
비록 임진왜란 이후의 사료만이 현재 전해오고 있으나 구전으로는 이미 그전부터 인식되고 있었던것으로 나타난다상이 이르기를, "기자의 자손은 후세에 아는 자가 없으니 매우 서운하다...(후략)..." 근수[8]가 아뢰기를, "세상에서 전하기로는 청주 한씨(淸州韓氏)가 기자의 후손이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까닭인가?”하자, 영경이 아뢰기를,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이 삼한(三韓)이 국호이었으므로, 한을 가리켜 기자의 후손이라 합니다." 하고, 근수는 아뢰기를, "공가(孔哥)·인가(印哥)·선우가(鮮于哥)도 다 기자의 후손입니다. 대개 기자의 작은 아들이 우(于)에 봉해졌으므로, 선우라 합니다. 고시(古詩)에 '기자의 후손에는 털북숭이가 많다.(箕子枝裔多髯翁)' 하였는데, 대개 선우추(鮮于樞)를 가리킨 것입니다." 하고, 윤휘는 아뢰기를, "평안도에서는 선우가가 대대로 기자전(箕子殿)의 참봉(參奉)이 된다 합니다."《선조실록》 36년 8월 13일(병신일)
- 이천 서씨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의하면 "준왕이 나라를 뺏긴 후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정착을 했는데 그곳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라고 하는 기록이 있어 대한민국의 성씨 중 이천 서씨의 시조로 나타나기도 한다. 다만 이쪽은 대체로 백제 왕가 출신일 가능성을 더 높게 본다.
- 태원 선우씨
중국측의 기록에서도 선우씨는 기자의 후예로 기록되어 있는 한편, 선우씨의 동래에 대해서는 삼국시대(중국) 조위의 황제 조예에 의해 238년 낙랑태수에 임명되어 대방태수에 임명된 유흔과 함께 몰래 바다를 건너 동연의 낙랑군을 점령한 선우사(鮮于嗣)의 기록이 있다. 따라서 선우씨는 정사와 교차검증이 되는 한편, 굳이 준왕을 매개로 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정말로 기자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 행주 기씨
청주 한씨의 경우와 비슷하다.
- 답본(答㶱)씨
답본씨는 '백제국 조선왕 준'의 후손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인물로는 답본춘초(答㶱春初)와 답본양춘(答本陽春)이 기록되어 있다. 답본춘초는 백제 멸망 당시 관등이 2품 달솔(達率)로, 병법에 능한 인물이었으며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하다가 부흥운동이 실패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나가토국(長門國)에서 축성에 힘쓴 공로로 종6위하 대산하(大山下)의 관등을 받는다. 답본양춘은 답본춘초의 가까운 친족으로 추정된다.
6. 기타
- 신찬성씨록에 왜국으로 망명한 백제의 장수 답본춘초(答㶱春初)가 준왕의 후손이라고 적혀있다. 특이한 게 '백제국 조선왕 준'의 후손이라 하여 조선왕이 백제에 종속되었던 듯한 모양새로 적혀있다. 이후 자손 혹은 친척으로 보이는 답본양춘(答本陽春)이 724년 아사다노무라지(麻田連)씨[9]를 받았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 문화 류씨 족보에 의하면 준왕이 마한을 세운 후 당시 <일토초가자왕(一土草家者王)>이라는 동요가 나라안에 떠돌자 이를 두려워해 일토산 아래에 살던 왕씨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왕씨 후손 왕몽이 화를 피해 도망간 후 신인이 꿈에 나타나 성을 세 번 변성하여야 후손들이 크게 번성한다고 하자 왕(王)자의 변형인 전(田)ㆍ신(申)으로 고쳤다가 다시 차(車)로 바꾸고 자기 이름을 무일(無一)로, 아들 임(琳)은 신을(神乙)로 고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전개 자체가 조선 건국 후 왕씨 몰살 과정에서 파생된 성씨 유래들과 비슷하고, 이 당시에 한반도 내에서 성씨를 쓰는 사람들도 중국계 이주민 등 소수에 불과했으므로 이는 후대의 윤색으로 보인다.
7. 같이보기
[1] 다만 당시에 성씨가 있었을 가능성은 회의적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이들은 기씨나 한씨로 표현된 것이 대개 후대에 족보를 만들거나 유교적 관점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가져다 붙인 것이라고 추측한다. 특히 기자조선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기도 하는 마당에 기씨를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준왕 또는 그 후손이 한씨를 칭했다는 기록이 이미 3세기 문헌인 삼국지에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이때의 기록 자체가 불확실하다는 사실 또한 감안해야 한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에 따르면 아예 준왕의 후손이 끊겼다는 기록이 있으나, 백제부흥운동기에는 준왕의 후손이라는 답본춘초라는 인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원전이 될 말한 당대 기록 자체가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데, 위만이 찬탈한 건 기원전 2세기 무렵 사건인 반면 우리가 알고있는 문헌들이 작성된 건 기원후 3세기의 일로 약 500년 뒤의 일이고 출처가 된 정보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현재로썬 알 수 없다.[2] 물론 항우가 자살한 것은 남방의 민월과 동구가 유방편이었다는 이유도 있었다. 남방이라도 우호세력이 있다면 버틸수가 있었지만, 사방으로 죄다 적대세력이니 아무리 항우가 군사적으로 천재라 한들 버틸 수가 없었다.[3] 其後四十餘世, 朝鮮侯淮僭號稱王. 기자의 40여 세 후손인 조선후 회(준의 오기)가 칭왕했다.[4] 고조선의 수도. 학계에서는 현재의 평양 지역에 해당한다고 보고있다. 다만 준왕의 도읍이 왕검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5] 참고[6] 동국문헌비고의 증보판.[7] 기자 시조설을 제외해놓고 봐도 어느 특정한 마한 왕실 혹은 지배층의 후예라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불확실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마한이라는 정치공동체 자체가 단일한 나라가 아닌 연맹체였기 때문. 일반에 잘 알려진 목지국, 백제국은 물론이고 네임드만 해도 건마국, 연맹체 침미다례의 중심이 된 신미국, 기리영 전투의 주체였던 신분활국 등을 비롯해 다양한 구성국들이 나타는데 이들의 지배층에 대해서는 후대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으므로, 설령 이러한 마한 구성국들의 후예인 호족 집단이라 할지라도 당시 잘 알려져 있었고 위상도 높았던 준왕을 시조로 소급했을 가능성이 높다.[8] 윤근수(尹根壽, 1537년(중종(조선) 32년) ~ 1616년(광해군 8년). 광해군대의 영의정인 윤두수의 동생이다.[9] 정확히는 아사다가 성씨에 해당하는 우지(氏), 무라지는 가문의 격을 나타내는 카바네(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