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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고등학교 慶北高等學校 Kyeongbuk High School | |
<colbgcolor=#00824c><colcolor=#fff> 개교 | 1899년 7월 달성학교 |
유형 | 일반계 고등학교 |
성별 | 남학교 |
형태 | 공립 |
교장 | 류시태 |
교감 | 신경수 |
이념 | 신문화(新文化) |
교훈 | 아는 사람(知), 생각하는 사람(思), 행하는 사람(行) |
교화 | 목련 |
교목 | 느티나무 |
학생 수 | 849명[기준] |
교직원 수 | 80명[기준] |
관할 교육청 | 대구광역시동부교육지원청 |
주소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300 (황금동) |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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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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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민주화운동 결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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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민주화운동 결의문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피 끓는 학도로서 최후의 일각까지 부여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련다."
1. 개요
경북고등학교는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에 위치한 공립 남자고등학교다.2.28 학생민주의거에 참여하였으며,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3부 요인을 배출한 학교이다. 또, 스포츠계에서도 많은 스타들을 배출하는 학교이기도 하다. # 또한, 비평준화 시절 경기고, 서울고와 더불어 대한민국 최고의 공립 명문고들 중 하나였다.
2. 역사
경북고등학교의 전신인 사립 달성학교는 영남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으로서 1899년 최극창, 윤필오 등 10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대구의 여러 유지들이 모금에 참여한 사립학교로 경상감영 자리에 문을 열었다. 조선인 자제들에게 일본어로 선진 학문예술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히자츠게 마스키치(膝付益吉)는 한일친교를 증진시키고, 상호간의 오해를 푸는 것은 교육 외에는 없다는 것을 간파한 뒤,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고 학교의 창립에 전력을 쏟았다.
1899년 7월, 히자츠케를 도와서 함께 학교를 위해 힘쓴 사람으로 신타니마츠스케(新谷松助)도 있었다. 대구의 명사 윤필오(尹弼五)씨도 앞장서서 이를 응원하며, 관찰사 김직현(金稷鉉)씨를 움직여, 창립비(創立费) 중 백원을 기부하게 하고, 700여평의 학교 부지와 관사 1동을 할애 받았다. 달성학교가 기반을 이루자 조선인 유지들이 금품을 기부하는 것이 많아져 그 금액이 700원을 넘어서, 학교의 기초가 정해진다.
교사를 초빙하여 오래도록 이를 유지하는 방법에 고민하던 히자츠케는 스스로 본인재산 일체를 처분해 교비로 제공하자, 그 뜻을 듣게된 한국학부(韓國學部)에서 1900년부터 연간 120원을 지원하고, 부산의 다섯군데 사찰에서 매월 15원씩 기증했다. 또한 1901년 4월부터 동아동문회(東亞同文會)는 해마다 420원의 보조금을 주기에 이르렀으며, 부산의 일본영사관에서도 보조를 얻어서 부산사찰의 보조는 1901년 4월부터 중지 되었다.
기타 목포지역의 유지와, 한남교육장려회(韓南敎育奬勵會)에서도 가부금을 보냈고, 1901년 9월에는 경부철도회사(京釜鐵道會社)로부터도 기부금이 있었다.이로써 달성학교는 대구유지 소수가 좌지우지 할 수 없는 명실상부한 한강이남의 교육기관이 되었다.
심상과와 고등과를 둔 달성학교는 4년제 교육기관으로 뒤에 심상과는 대구공립소학교[3]로 인계되었고, 고등과는 1907년 개교한 협성학교[4]에 흡수되었다. 이후 일제는 협성학교를 관립 대구고등보통학교에 병합하고, 대구고등보통학교는 협성학교의 재학생과 물품을 인수하여 1916년 개교했다.[5] 그 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1925), 경북공립중학교(1938), 대구고등학교(1950.5), 경북고등학교(1950.6), 대구고등학교(1951)를 교명으로 쓰다가 경북고등학교(1953.9)로 교명을 변경한 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으며 2016년 2월 대구고보 기준으로 5076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경북고등학교는 경기고등학교[6], 평양제이중학교(폐교)[7]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3번째로 설립된 공립고등학교(제3고)[8]이며 이는 교표, 교복 소매의 삼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단 1899년 7월에 개교한 사립 달성학교가 전신이므로 학교역사는 경기고나 평양제이중보다 길다.
경성제일고보(現 경기고) 교표 | 평양고보(舊 평양제2중학교) 교기 |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나라를 지키기 위해 경북중 32~34회 학생들이 학도의용군에 지원하여, 안타깝게 전사한 학도병이 53명에 이른다. 특히 1945년에 입학한 32회는 동기생 20여 명을 잃었다. 이는 대구경북지역 중학교 중에서 가장 많은 희생이었고, 전국에서도 두 번째로 많은 학교로 꼽힌다. 이 학도병을 기리는 조형물이 2.28 민주화운동 기념공원 옆 호국동산이라는 이름의 공원에 세워져 있다.
1960년 2.28 학생민주의거의 발상지다. 당시 이대우 학생회장의 주도로 여러 학교와 연합하여 일으킨 이 운동은 대한민국 최초의 학생 자발적 운동이며,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 민주의거를 기념하는 기념비와 기념 조형물이 교정에 세워져 있다.
2.1. 연혁
- 1899-07 : 경상 감영 북문 안 관아터에서 영남 최초의 근대학교인 달성학교로 개교 (초대 교장 경상도 관찰사 김직현)
- 1905-08-27 : 달성학교 심상과가 대구관립보통학교(현 대구초등학교)에 흡수
- 1906-02 : 대구향교 명륜당 내에 협성학교 설립
- 1909-04 : 달성학교 고등과가 협성학교에 흡수, 대구향교 명륜당으로 이전
- 1916-04-07 : 대구고등보통학교 개교 준비를 위한 최초 입학시험 실시, 1학년 58명, 2학년(협성학교 재학생) 63명 합격
- 1916-04-18 : 대구고등보통학교 수업 개시
- 1916-05-16 : 대구고등보통학교 관제 반포 관립고등보통학교로 정식 개교, 학교 위치를 대구부 동본동으로 정하고 구 협성학교이던 대구 향교 명륜당을 수리하여 개교식 거행(학생수 : 1, 2학년 121명)
- 1917-12-16 : 대봉동 신축 교사로 이전
- 1919년-03-08 : 서문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200여명 참가, 20여 명 처벌 받음
- 1920년 10월 : '강유문 사건'으로 동맹 휴학, 8명 퇴학
- 1925-04-01 : 교명을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로 개칭(관제 변경으로 학교운영이 경상북도로 이관됨)
- 1928-09 : 교내외의 언론•집회의 자유, 교장 경질, 퇴학생 복교, 불량 일본인 교사 경질 등을 요구하여 동맹휴학. 52명 퇴학당함
- 1929-10 : 한글연구회 조직. 20여일만에 해산당함.
- 1938-04-01 : 교명을 ‘경북공립중학교’로 개칭
- 1943-04-01 : 수업 연한 4년으로 단축(일제 징병제 실시)
- 1946-09-01 : 학제 변경으로 수업 연한 6년으로 됨
- 1946-12-01 : 경북 도립 사범과 부설, 교가 제정
- 1947-07-20 : 부설 사범과 졸업과 동시 폐지
- 1950-05-30 : 교명을 ‘대구고등학교’로 개칭하고 경북중학교와 분립
- 1950-06-24 : 대구고등학교 개교식 거행, 조귀순 교장이 대구고등학교 교장 겸임
- 1950-06-25 : 교명 ‘대구고등학교’를 ‘경북고등학교’로 개칭
- 1950-07 : 6.25전쟁 종군지원학생 송별식 거행. 학교는 미국 제5공군에 징발되었고 전교생은 임시 휴교
- 1950-10 : 중단되었던 수업 재개
- 1951-04-01 : 교명 ‘경북고등학교’를 ‘대구고등학교’로 변경
- 1951-07-13 : 학제 변경으로 중학 6, 4, 3년생이 동시 졸업
- 1951-09-01 : ‘경북중학교’를 ‘대구제일중학교’로 변경(수업 연한 6년제를 3년제로 변경)
- 1951-09-17 : 조귀순 대구고등학교 초대 교장 취임
- 1953-09-04 : 교명 ‘대구고등학교’를 ‘경북고등학교’로 변경
- 1954-06-05 : 고등학교는 대명동의 현 대구고등학교의 위치로 교사 신축 이전
- 1954-07-01 : 교지 ‘경맥’ 창간호 발간
- 1959-04-10 : 경북중학교 교사(대봉동 소재지)로 입교.[9] 경북중학교와 합교식 거행.
- 1960-02-28 : 2.28 학생민주의거
- 1967-05-02 : 제1회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 우승(본교 야구부의 황금기 개막)
- 1972-02-29 : 경북중학교 최종 제3학년 졸업(중학교 입시 폐지 조치로 경북중학교 폐교[10])
- 1975-04-05 : 경북고등학교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개교
- 1982-08-02 : 대붕기쟁탈 전국 고교야구대회 우승
- 1984-12-20 : 신축 교사 준공
- 1985-01-15 : 신축 교사(수성구 황금동 9번지)로 이전
- 1985-10-15 : 제66회 전국체육대회 야구부 우승
- 1986-01-25 : 전천후 야구 연습장 준공(130평)
- 1986-10-15 : 제67회 전국체육대회 야구부 우승
- 1993-06-12 : 제48회 청룡기쟁탈 전국 고교야구대회 우승
- 2001-11-15 : 야구부 합숙소 개관식
- 2002-11-15 : 제83회 전국체전 남자 고등부 양궁 단체전 금메달 획득
- 2003-05-11 : 역사관 개관
- 2006-10-01 : 제87회 전국체육대회 검도 단체부 우승 및 양궁부 2관왕
- 2015-04-28 : 제43회 봉황대기 전국 고교 야구대회 우승
- 2019-02-08 : 제100회 졸업식 거행(501명)
- 2019-05-16 : 경북중고등학교 제120주년 개교기념식
- 2019-12-20 : 제101회 졸업식 거행(402명, 졸업생 누계 52,687명)
- 2020-03-02 : 제104회 입학식 거행(328명)
- 2021-02-04 : 제102회 졸업식 거행(345명, 졸업생 누계 53,032명)
- 2021-03-02 : 제105회 입학식 거행(259명)
3. 상징
3.1. 교표
3.2. 교훈
知(지) 아는 사람, 思(사) 생각하는 사람, 行(행) 행하는 사람
3.3. 교목
느티나무 : 느티나무를 교목으로 삼은 뜻은 느티나무의 강인하고 넉넉하고 단정한 모습처럼 큰 기상과 조화로운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의 전당이라는 의미이다.
3.4. 교화
목련 : 목련을 교목으로 삼은 뜻은 목련꽃의 맑고 깨끗한 모습처럼 순수한 이상을 지니고 훌륭한 인재로 성장하여 남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돼라는 뜻이다.
3.5. 교가 및 응원가
교가는 1학년 음악시간에 외우며, 가창 평가를 교가로 하기도 했다. 반면, 응원가는 특이하게도 체육시간에 배운다.[12]
4. 교복
4.1. 교복 자율화 실시 전
경북고등학교 모자. 비평준화 시기 또래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
교복 자율화 전 동복(1957) |
교복 자율화 전 하복(1955) 이 사진에선 알아볼 수 없지만 흰색을 베이스로 하늘색이 카라 등에 배색되었다. |
4.2. 교복 자율화 폐지 후
교복자율화 폐지 후 교복(1986.8~현재) |
동복은 남색 자켓의 소매에 학교의 상징인 삼백선이 새겨져 있다. 대체로 무난한 교복이지만 자켓 핏이 정장처럼 나와 대체로 이쁘다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90년대 말에는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강요당했기 때문에 귀찮은 문제도 있었다.
여담으로, 졸업할 때쯤이면 동복 소매의 삼선이 낡아서 떨어지려고 한다. 또, 소매에 단추가 양팔에 3개씩 달려있는데 굉장히 거슬린다. 단추가 책상에 부딪히면서 생기는 소음이 본인은 물론이고 상대방에게도 매우 거슬린다.
하복은 흰색과 회색으로 배색했으며 흰색 상의 포켓에 삼선이 그어져 있다. 하의는 상의랑 같은 회색의 면바지.
원래 체육복이 존재했으나 현재 체육복은 사라졌고, 체육시간엔 사복을 입고 수업을 한다.[14]
2016년부터 생활복도 나왔는데, 타 학교의 디자인에 비하면 정말 촌스럽다. 얼핏보면 배드민턴 운동복 같이 생겼다.
촌스러운 디자인탓에 생활복을 입는 학생들도 거의 없다.[15]
생활복 디자인은 공모전으로 탄생했는데 수상자의 디자인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공모전 참여자 모두의 공동 디자인으로 생활복이 디자인되었다.
생활복의 특징으로는 바지의 소재가 방수라는 점이 있다.
2023~현재 |
2023년부터 생활복 디자인이 새롭게 바뀌었다.
몇 차례의 학생 선호도 조사 및 교복선정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최종 확정되었다.
2022년 경 부터 주변 학군지 일반고에 유행처럼 퍼진 야구잠바의 경우, 경북고는 2022년 경맥제 축준위들에 한해 시범 제작한 후,
2023년 학생회 회의를 통해 최종 디자인을 결정, 판매하였다. 주기적으로 추가구매 신청을 받으니 참고 바란다.
5. 학교 시설
건물과 학교 부대 시설도 나쁘지 않다.[17] 1990년대까지는 매우 좋은 편에 속했으며, 예로 들어 그 당시 대부분의 공립학교들이 선풍기만 갖추고 있을 때, 이 학교는 교실에 에어컨을 비치해 두고 있었다.[18]
2016년 기준으로 황금동 교사를 지은 지 약 30년밖에 되지 않아 그렇게 낡지는 않았지만, 석면 천장, 냉난방, 화장실 변기 등의 노후설비가 남아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개선 공사와 관련해 대구교육청에서 공고를 냈다.
2017년 1월 겨울방학 중 석면제거 공사를 진행하여 석면제거를 완료했고, 2017년 여름방학 이후에 노후화된 화장실을 보수공사하였다. 여기에 시청각실도 리모델링되었으며, 최신형 TV가 교실에 설치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경북고등학교/시설 문서 참고하십시오.
6. 교내 행사 및 경맥제
체육대회는 따로 다른학교들처럼 다양한 종목으로 진행되는것이 아니라, 1학기 말에 오직 반대항 축구 및 풋살 리그로 진행된다.경북고등학교 재학생 축제는 경맥제[19]로, 보통 2학기 말(가을~겨울 시기)에 열리며 동아리 부스와 공연을 각각 나누어 이틀간 진행한다. 체육대회와 마찬가지로, 2020년대 초반 몇 년간은 코로나 때문에 열지 않았으나, [20] 2022년에 다시 경맥제가 열렸다! 22년도 경맥제는 당시 축제준비위원회의 능력으로, 코로나19 이전 경맥제의 기록을 하나하나 다 참고하여 반영하였으며, 상부 권력의 일부 교사 측에서 찬조공연팀을 2팀으로 제한하였으나 이또한 당시 축준위 재량으로 4팀을 초청하는것을 성공하여 나름대로 뜨거운 반응을 얻어냈다.2023년에는 12월에 경맥제가 열렸다. 당시에는 방과후에 축제를 진행하지 않고, 오전 학교일과시간에 축제를 진행한 관계로 외부학생이 출입하지 못하였고, 외부 찬조팀도 2팀으로 제한되어 학생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결국 2024년 경맥제는 외부학생 출입이 허가되었다. 10월에 열려서 고3들은 거의 참여하지 못했고, 준비과정에서 여러 논란과 말이 오갔지만, 학생들의 노력으로 성공적인 축제를 마칠 수 있었다. 부스의 경우, 학생 부스에서의 음식 조리와 판매가 제한되어 동아리 대다수가 참여를 하지 않았고, 할거리가 많진 않았으나 최종적으로 소수의 부스에서 음식 및 음료 제공이 가능하게 되었고, 외부학교 학생들이 무려 천 여명 이상 방문하여 성공적으로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익일 공연의 경우 앞부분의 루즈하고 평가가 매우 좋지 않은 조악한 뮤지컬을 제외하면, 찬조팀도 4팀으로 증가했고, 교내 재학생들의 무대도 다채로웠어서 1,2학년 학생들에게 뜨거운 반응을 얻어냈다.
주변 고등학생들이 많이 찾는 편이며 다른 학교들과 큰 차별성이 있는 축제는 아니지만 축제의 인기는 이상하리만큼 높다. 심지어 수성구뿐만 아니라 중구, 남구, 동구에 있는 학교에서 오는 학생들도 더러 있는 만큼 유서깊은 축제다. 2024년 경맥제에서도 경북고등학교와 꽤 먼 거리의 학교들(예를들어 동문고, 중앙고 등)과, 심지어는 동구의 학교인 동부고에서까지 학생들이 찾아왔으며, 그 학교에선 댄스부가 축제 찬조 팀으로 초청받아 여전히 경맥제의 명성과 인기는 현재 진행형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7. 운동부
- 야구부
1920년에 창단한 야구부는 전국대회 최다 우승학교(22회)이자, 국민타자 이승엽을 비롯한 류중일, 김성래, 배영수, 김상수(타자), 원태인 등 삼성 라이온즈의 기둥을 배출했다. 1971년 경북고등학교를 역대 최고의 야구부로 꼽는 야구인들이 많으며,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70주년 기념 OB All-Star로 선정된 10명 중 3명이 경북고 출신이다.[21]
- 검도부
1980년에 창단한 검도부는 1992년 제9회 전국 추계 고교검도대회 우승 이후 2009년 제38회 문화체육부장관배 815 전국학생 검도대회도 우승하였다.
- 양궁부
1985년에 창단한 양궁부는 1987년 양궁시범학교로 지정되면서 1991년 제 36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폴란드) 단체 우승 및 개인 3위의 성과를 거두었고, 1992년 8월에는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양궁 개인(정재헌) 은메달을 획득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2007년 5월 양궁종별 선수권대회 종합우승을 하였다.
8. 총동창회
학교 동문과 관련된 굵직한 행사를 진행하며, 학교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상당히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남녀공학으로 전환하는 걸 동창들 뿐만 아니라 경북고 교사들, 학부모들, 학생들, 지역주민들 모두가 격렬하게 반대한다. 여튼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자동으로 총동창회원이 된다. 주관하는 행사 중에 큰 행사로는 경맥제(대구)와 경맥 가을 축제(재경)이 있다. 그 외에도 경맥기념춘추 출간이나 각종 동문 행사를 주관하며 경맥OB합창단, 경맥 산악회, 경맥 문학회, 수경회 등 동창 모임도 활발하다.9. 출신 인물
자세한 내용은 경북고등학교/동문 문서 참고하십시오.10. 이용 가능한 대중교통
10.1. 버스
학교 뒷편 청수로 쪽에는 234번과 425번이 버스 종점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종점에서 학교로 통하는 직통 통로가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 경북고까지 가려면 최소 15분 정도는 걸어야 한다.10.2. 도시철도
- 대구 도시철도 3호선 : 황금역
참고로 황금역에서 학교까지는 거리가 꽤 머니 헬로TV대구방송건너 정류장에서 시내버스로 환승할 것을 권장한다. 단 수성4번, 순환3-1번은 황금우방1차 정류장 하차 후 도보로 이동해야 하며, 청도 0번은 환승할인이 적용되지 않으니 주의.
11. 기타
여기서부터 나오는 경북고등학교의 문제점들은 고교평준화에 따른 문제점들이라 보면 될 것이다. 고교 평준화 이전과 이후의 경북고를 모두 겪어본 교사들은 경북고 쇠락의 원인으로 고교 평준화로 학생의 질이 떨어진 것도 크지만 가장 큰 원인은 고교 평준화 이후 교사들의 질적하락이라고 말한다. 실제 1970년대 고교 평준화 이후로도 한동안 명문고등학교에는 우수한 1급 교사들만 돌아가며 배치되는 시절이 있었고 그로 인해 한동안 경북고등학교도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교직원들에 대해서도 완전 평준화가 진행되었고 결과는 오늘날과 같다.11.1. 1985~2000
- 1990년대 초ㆍ중반 당시, 주변에 있는 학교에 비하면 실업계를 연상케 할 정도로 공부를 강제로 시키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다른 학교들은 강압적으로 공부를 시켰는데, 각 과목별 숙제 외에 담임 선생님도 매일 숙제를 부여하였고, 거기다 주말마다 해야 하는 숙제가 영단어/숙어 빡빡이 10장, 수학문제 50개 풀기 등 이런 식으로 있었다. 반면에 경북고는 그런 게 없었다. 오죽하면 초등학교, 중학교 때보다 숙제가 없었다. 그래서 경북고 가는 걸 강력하게 반대하는 학부모들과 학원 교사들도 더러 있었다. 문과반은 일체 없었으나, 이과반도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공부는 할 놈은 하는 분위기여서 당시까지 학교 서열의 지표였던 서울대 합격자 수는 1위인 경신고에 비해서도 그리 뒤쳐지지 않았다. 1990년대 중ㆍ후반 문과 졸업생 기준으로 반에서 20등 정도면 수능(인문계) 상위 10% 정도 수준이었다.
- 수능을 치고 나면 사물함에 문제지와 교과서ㆍ프린트ㆍ모의고사 시험지들을 채워서 고청원에 빠트리는 무개념의 학생들이 있었다. 사실 이 시절 이런 학생들이 많은 데는 학생들 본인의 태도도 문제지만 툭하면 프린트나 문제지를 배부하며 성의없이 수업을 하던 교사들의 책임도 크다.
- 다른 학교도 그랬겠지만, 교과서 잊어먹고(때론 귀찮아서) 가져오지 않은 학생들은 다른 반 친구들에게 빌려서 썼다. 이런 불량한 태도를 바로잡기 위해 수업 전에 학생 본인의 교과서가 맞는지, 수업할 부분에 이미 필기가 되어 있진 않은지 철저하게 검사하는 교사들도 있었다. 교과서에 필기할 게 많았던 국ㆍ영ㆍ수ㆍ사ㆍ과 교사들이 특히 검열에 철저했다. 아울러 교과서 낙서나 튜닝이 지나친 경우 담임 선생님이나 교과 담당 선생님께 불려가거나 그 자리에서 체벌을 받았다.
- 탁구부는 없는데 강당에 탁구대는 많아서 점심시간마다 학생들이 탁구를 치며 놀았다.[22] 교사들은 권장했는데, 흡연하거나 떠들거나 야자ㆍ보충수업 째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느 날 청소하다가 비품 창고에서 과거 교련 수업 때 쓴 것으로 보이는 플라스틱 목총이나 교련복이 잔뜩 발굴되기도 했다.
- 1990년대 말 수학여행 코스가 국토대장정 스타일이었다. 첫날에 대구에서 광주까지 갔다가 다음날 독립기념관을 들린 후 서울로 북상, 3일째 오전에는 설악산 울산바위 찍고 대구로 귀환했다.
- 체육대회 경기 종목도 남고인 관계상 현재보다 더 많았다. 그리고 종목에서 성적을 거두는 것보다 응원전 성적이 더 높았기 때문에 아예 작정하고 응원에 몰빵하는 경우도 있었다.
- 학교 뒤편에 도로가 새로 생기기 전에는 산에서 가끔 야생동물들이 내려오기도 했다. 다람쥐가 복도에 들어온 적이 있으며, 뱀이 발견된 적도 있었다.
- 2000년 6월 16일에 방송된 38회 "도전 골든벨 : 경북고등학교 편"에서 당시 학생회장이면서 2학년이었던 권보원 학생이 13번째로 골든벨을 울렸다. 대구ㆍ경북 첫 골든벨 주자이다. 지금은 판사로 있다. 유튜브에 동영상 풀버전이 올라왔다. 보게 되면 학생들 함성이 대단한 걸 느낄 것이다. 방송될 당시 대한민국은 2000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슈를 타고 있는 분위기였다.
- 그 뒤 2000년 12월 29일에 방송된 도전 골든벨 2000년 하반기 왕중왕전이 여의도 KBS에서 열렸었는데, 거기서 6월에 골든벨을 울린 권보원 학생이 왕중왕 타이틀도 차지했다. 왕중왕전도 풀버전으로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하지만 상반기 왕중왕전에서는 15대 골든벨인 이천고 이창순에게 패배해 준왕중왕에 머물렀는데 설욕을 한 셈이다. 또한 장학퀴즈에도 출연해 준왕중왕을 하였다.
11.2. 2001~현재
- 2009년까지 교문에서 복장과 두발이 불량하거나 지각으로 걸렸을 때 위 사진과 같은 진풍경을 많이 볼 수 있었으며, 교사들이 분수대나 교문에 잡아세운 뒤 엎드려 뻗쳐나 어깨동무 + 앉았다 일어나기, 오리걸음 등 체벌을 가했다. 남학교 체벌의 진풍경이다. 사실 사립이 이런 진풍경이 강하다. 이 장면을 찍은 사진이 한 때 유명했다. 어쩜 두발자유화 논쟁이 절정이었던 2005년에 찍었을 가능성이 크다. 예전에는 대륜고ㆍ경신고ㆍ오성고 등 주변 사립학교에 많이 갔었다. 유독 당시 (수성구 학군에 속하는) 학생들 기준으로 비교적 두발이 더 길거나 (민경훈의 영향이 크다.), 노는 것을 좋아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주변 학교보다 많다 보니 당연히 교사들과 학부모들은 잡을 수밖에 없다.
- 2009 ~ 2010년에 몇몇 국어 교사들의 주도로 1ㆍ2학년 1인 1책 쓰기 수행평가가 벌어졌다. 그러나 수행평가로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글쓰기의 고통으로 국어 내신 등급을 날리면서 포기하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학생들이 정성들여 쓴 책들도 있었으나, 결정적으로 공립학교인 탓에 이 활동을 주도한 교사가 다른 학교로 가면서 2011년부터 폐지했다. 이명박 정부 당시 절정에 달했던 입학사정관제 대세에 편승하는 좋은 전략이었으나 학생들의 역량을 과대평가했고, 그 당시 근무했던 국어교사들도 도와주지 않았다.
- 이명박 정부 들어 모의대회가 스펙으로 각광받던 시점에 무료 외부활동의 패러다임을 선도했다. HADMUN은 대구에서 꽤나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으며, 뒤이어 DAMT가 생겼다. 지방 학교에서 이런 커다란 외부 활동을 둘이나 주최하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고무적이다. 학생들의 창의적인 시도와 공립학교라 여러 가지 미친 아이디어를 허용해 주는 학교 덕도 크다.
- 2011년부터 자랑스런 경고인을 뽑는다. 학교 생활에 모범이 되는 학생에게 이 상을 부여한다.[23] 상위권 학생의 스펙 쌓기용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꼭 공부를 잘하는 학생만 받는 게 아니라 학교 생활을 성실히 한 학생도 받을 수 있다. 빨간 바탕에 경고 마크가 붙은 배지도 받는다. 2017년, '자랑스런 경고인'이 ‘자랑스런 경맥인’으로 바뀌었으며, 명칭만 바뀐 게 아니라 상을 주는 기준도 달라졌었다.[24] 2022년 기준으로는 ‘자랑스런 경맥인’에서 ‘자랑스러운 인재상’으로 바뀌었으며 배지 디자인도 남색 계열 바탕에 경고 마크가 붙은 디자인으로 바뀌었다. 한 학급에서 3명에게 수여하며, 각 반의 담임 선생님이 직접 선정하거나 학급 투표로 선정하기도 한다.
- 현재 두발규정은 파마, 염색, 장발[25], 스크래치 등을 제외하고 모두 가능할 정도로 과거에 비해 많이 완화된 지는 오래되었지만 2012년까지만 해도 두발단속이 있어서 아침 등교 시간 때 교문지도를 하고 있는 교장과 교감, 학년 담임 교사들, 학주, 휘하 학생부 교사들한테 걸려 엎드려 뻗쳐나 오리걸음, 앉았다 일어나기로 체벌을 받는 학생들이 많았다.[26][27]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남교사들이 많았던 관계로 경북고 두발규정은 대륜ㆍ경신 등 사립학교처럼 빡빡이일 정도로 교칙이 엄했고 체벌도 심했다. (골든벨 영상에서도 전교생들 두발이 빡빡이여서 전교생들 중 참가한 학생 100명이 모자를 쓰고 출연했고, 남교사들이 거의 출연하셨을 정도다. 일부만 출연하셨지 다는 출연하시지 않았다.) 과거에는 능인고ㆍ영남고ㆍ대륜고처럼 교내에 이발소도 있어서 두발이 잡힌 학생들이 교사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기도 했다. 2009년에 경기도에서 학생 인권조례가 발표되자 경신고, 대륜고, 능인고, 협성고를 비롯한 근처의 악명 높은 사립고들은 잔말 말고 공부나 해라는 식으로 차단했지만, 공립학교인 관계상 인권조례를 무시할 수도 없어서 학교에서 두발 자유에 관한 온라인 토론방이 열렸다. 당연히 두발 자율화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학교에서는 오프라인 두발 자율화 토론회를 열었고, 보충수업을 하고 있는 3학년들을 제외한 1ㆍ2학년들이 9월 어느 날 오후 강당에 모여 토론회를 참관했다. 두발자유 토론방은 과거 홈피에 있었으나 홈페이지가 바뀐 관계상 없어졌다.
- 2012년에 와서 전국체전을 기념해서 야구장에 인조 잔디가 깔렸을 때, 관중석과 야구장 사이에도 같이 깔았는데, 그 후로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만 되면 그곳에서 원바운드를 하거나 캐치볼을 하며 노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원바운드를 하는 학생이 캐치볼을 하는 학생의 공을 맞아 다치기도 한다.
- 2013년까지만 해도 쉬는 시간에 학교 급식실 뒤에 가면 담배를 피다가 교사들에게 걸려 혼나는 학생들이 있었다.[28] 그래서 2014년부터는 교사들이 매 시간마다 잡으러 가서 그 뒤로는 담배를 잘 피지 않는다.
- 8•9교시 보충수업을 학생들이 들을 과목을 신청할 수 있으며, 선택의 폭도 넓다. 국•영•수는 물론이고 사탐 및 과탐도 있다. 리로스쿨을 통해 신청이 가능하며 8•9교시를 원하지 않는다면 신청을 안 해도 상관이 없다.
- 2016년에 갑자기 의정부고 졸업사진을 모방한 코미디식 졸업사진이 등장했다. 하루동안 대구 어린이회관에서 야외촬영을 했는데 그날 광경이 텔레토비에 맥크리에 농부에 수영장 파티 그레이브즈까지 참 장관이었다. 이과보다는 문과 쪽에서 병맛컨셉 졸업사진이 많았던 편. 2017년 졸업사진도 페이스북을 통해 알려진 바가 있다.
11.3. 여담
- 명찰은 탈부착이 불가능하며, 초록색 - 하늘색 - 군청색의 순서로 순환한다.[30]
- 과거에는 상술했듯이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립학교처럼 남교사들이 더 많았지만, 현재는 여교사가 더 많다. 예전에 경북고에서 근무하고 다른 학교에 있었다가 다시 경북고에서 근무하는 교사들도 많이 있다. 경북고에서 퇴직하는 교사들도 있다.
- 고등학교 개교일이 1916년이라 빠른년생을 제외하고 대다수 학생들의 생년이 기수와 일치하기에 외우기가 쉽다. 1899년 달성학교 기준으로 17년의 역사가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기수에 17을 더하는 데에 동문들의 반응은 역사 자체에 대한 축하와는 별개로 영 시큰둥하고, 공식 행사에서도 100주년 쪽에 훨씬 의미를 많이 두고 있다. 당장 2016년 동창회에서 새 학교장이 17년 역사 발굴 이야기를 치적이랍시고 했으나 동창들 반응은 뭔 호들갑이냐는 식이었고, 아주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2000년대 이후 출생한 학생들이 동문회 주도권을 잡는 아주 먼 미래가 아닌 이상 대구고보 기준 기수가 오랫동안 쓰일 듯.
- 캐슬골드파크, 황금동 힐스테이트, 태왕아너스(구. 덕원중고 있던 곳)가 근처에 있어서 이 아파트에 사는 학생들이 많이 있다. 맞은편에 국립대구박물관과 농협 성동지점과 학원, 병원들도 있어서 박물관, 은행, 학원, 병원에 근무하는 경북고 출신 직원들도 있고 그들의 아들들도 경북고에 재학하기도 한다.
- 경복고등학교와 비슷한 이름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 많다. 특히 aespa 경복고등학교 행사 논란 때문에 애꿎은 경북고등학교가 욕을 먹은 적이 있다(…). 이외에도 경복고 유승민, 경북고 이재용 등의 사례가 있다.[33]
[기준] 2024년[기준] [3] 현 대구초등학교[4] 대구 국채보상운동 모금액 중 일부가 설립 자금에 쓰였다.[5] 2015년까지 경북고등학교는 달성학교가 전신이라는 사실을 몰랐으므로 대구고보의 개교년도를 개교기준으로 삼았었다. 그러나 2016년 대구고보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다가 달성학교가 효시였음을 알 수 있는 고문서를 발견하였고, 2017년에 개교년도를 1916년에서 1899년으로 앞당겼다.[6] 1900년 관립중학교로 개교[7] 1909년 관립평양고등학교로 개교, 1911년 평양고등보통학교로 교명 변경. 이후 평양제이중학교로 개명. 6.25 전쟁 이후 폐교된 것으로 추정됨.[8] 폐교된 평양제이중학교를 제외하면 두 번째다.[9] 대명동 교사에는 대구고등학교가 들어왔다.[10] 경운중학교(대구)(1970년 개교)가 경북중 계승[11] 1950년 5월 30일~6월 24일, 1951년 4월 1일~1953년 9월 3일[12] 요즘에는 응원가를 안 배운다.[13] 과거에는 응원하러 가기 위해 직접 버스를 대여해 가기도 했다.[14] 등교를 할 때에는 교복을 입고 등교해야 하기 때문에 사복을 따로 들고 와서 갈아입어야 한다. 단, 일과시간에는 사복을 입어도 상관이 없기 때문에 체육 시간이 없는 날에도 사복을 들고 오는 학생들이 있다.[15] 덕분에 교복을 입는 학생들이 많다.[16] 원래는 현재보다도 넓었지만 동창회관을 개보수하여 교육청이 쓰고, 테니스장을 밀고 황금유치원을 지어 예전보다는 약간 좁아졌다. 또한 학교 담벼락과 교문을 허물고 공원으로 만든 것도 좁아진 원인이다.[17] 아래에 언급되듯 졸업생들이 빵빵하다 보니 학교에 신경을 많이 써줬다.[18] 3학년 교실은 1997년, 1ㆍ2학년 교실은 1999년에 에어컨을 설치했는데, 이는 인근의 사립학교에 비하면 늦은 편이다.[19] 총동창회 체육대회와 이름이 같다. 당연히 전혀 다른 행사.[20] 정확히는 전시회만 했다.[21] 류중일(SS), 김성래(2B), 남우식(P)[22] 현재는 점심시간에 탁구장 사용이 불가하다. 다만 방과후에는 배드민턴 동호회로 인해 강당이 열려 있어 마음만 먹으면 탁구장을 사용할 수 있다.[23] 모범 학생에게 수여하는 상이지만 모범상과는 별개의 상이다.[24] '자랑스런 경고인'이 성실한 학교 생활로 받는다면 '경맥인'은 마일리지 제도를 따르는데, 마일리지 제도는 학교 교훈인 지•사•행에 따라 3가지로 나누어지며 마일리지를 쌓는 방법은 야간 자율학습 참여도와 방과후 활동 참여도이다.[25] 규정은 있지만 교사들이 예전처럼 막 잡지 않아 사실상 길이는 자유다. 이 때문에 장발남들이 꽤 많아졌다. 하지만 긴생머리 학생들은 없다.[26] 현재 규정은 2013년부터 적용했고, 북쪽 경신고도 두발규정이 완화되었다.[27] 2012년에 두발이 완화되어도 전교생들이 환호하지 않았다. 특히 3학년들의 경우 1ㆍ2학년들에 비해 학주와 담임 교사들의 단속이 많이 심했다. 가끔 머리 긴 1ㆍ2ㆍ3학년이 교장, 교감, 학주, 학생부 교사들은 물론이고 담임 교사들한테 걸리기도 했다.[28] 하지만 정말 전문적으로 피는 학생들은 딴 데서 폈다. 북쪽 담벼락 밑이 전문범들의 주요 접선 및 활동 장소였는데, 바로 뒤에 사는 고층 아파트 주민이 목격하여 학교에 신고하는 바람에 매복한 학주가 검거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화장실에서 피다가 걸리기도 했다.[29] 주로 나이가 좀 있으신 분들이 그렇게 부르신다.[30] 예를 들어 군청색을 사용하는 3학년이 졸업하면 다음 해 1학년이 군청색을 사용하고, 초록색을 사용하던 1학년은 2학년이 되고, 하늘색을 사용하던 2학년은 3학년이 되는 방식.[31] 요즘에는 황금중은 물론이고 대륜중, 오성중에서도 많이 오는 편이다.[32] 경운중 출신 학생(주로 야구부)이 경북고 하복을 사지 않고 경운중 하복을 입고 그대로 등교하기도 했다.[33] 유승민은 경북고, 이재용은 경복고 출신이다. 주로 언론에서 이런 실수를 많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