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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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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대사의 배경
2.1. 가톨릭의 고해성사2.2. 잠벌과 보속2.3. 잠벌과 보속에 대한 개신교의 주장
3. 대사란 무엇인가?4. 가톨릭 교회의 개혁

1. 개요

라틴어 Indulgentia
영어 Indulgence
한국어 대사(大赦)
가톨릭에서 잠벌[1]을 면해 주는 것을 말한다. 전대사(잠벌을 완전히 사하는 것)와 한대사(잠벌을 일부 사해주는 것)가 있다. 교황청에서 선포하며, 선포한 대사에서 지시하는 선행을 완수하면 지정된 범위의 잠벌이 면제된다.

아래의 설명이 자세하고 유용하지만, 대사개념을 알고 싶은 제 3자에게는 다소 분량이 길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대사는 잠벌을 면하는 것이므로, 잠벌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와 함께 지은 죄를 회개하라고 가르친다. 고해성사를 하면 죄는 용서가 되지만, 지은 죄에 따라서 받아야 할 벌은 그대로 남는다. 이러한 벌은 지옥에서 영원히 받는 벌이 아닌 지은 죄에 따라 연옥에서 받는 일시적인 것이고, 보속을 통해 사면될 수 있다. 이 벌을 '잠벌'이라고 부른다. 사제는 고해성사 중에 신자에게 보속을 줄 수 있으며, 그 종류는 '묵주기도 5회', '성모송 3번' 등 간단한 것일 수도 있고 신체적/사회적으로 강한 고통이 따르는 벌일 수도 있다. 신자는 보속을 통해 잠벌을 용서받지만, 보속이 항상 완전하게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살아서 보속을 통해 완전하게 없애지 못한 잠벌이 남는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 신자는 대사를 통해 보속하지 못한 잠벌까지 모두 면제받을 수 있다.

2. 대사의 배경

2.1. 가톨릭의 고해성사

가톨릭에서의 대사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톨릭 교회에서의 고해성사에 대한 기본적 가르침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으므로 먼저 이를 설명한다. 가톨릭구원하느님의 은총으로 받는다고 가르치며, 신앙과 행동이 일치된 삶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에 인간의 자유의지로 응답하는 독실한 믿음과 선행의 삶을 살면서 은총을 보존할 것을 요구한다. 즉 신앙을 가진 자라도 믿음을 잃거나 자신의 행동으로 여러 대죄[2]를 지으면 하느님과의 은총을 잃게 되며, 죄로 더럽혀져 세례성사로 맺어진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고 본다.

결국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세례성사 이후에도 신앙에 걸맞게 올바른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동시에 지상에서 사는 동안 짓는 죄는 꾸준히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 화해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런 관점에서 고해성사를 '화해의 성사'라고도 부르는데, 죄인인 자신이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과 화해한다는 의미이다.

죄를 지음은 하느님의 은총을 버린 행위이므로,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진다는 것이 가톨릭의 관점인 것.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자기 죄를 뉘우치고,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받음은, 하느님과 화해하고 다시 관계를 가깝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나 큰 죄(대죄)일 경우에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가톨릭에서는 지상에서는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교회가 그러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의 이러한 특별한 권한은 사제만이 행사할 수 있다고 유보해두는데, 이 권한 행사가 바로 고해성사이며, 이를 통해 명시적으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이 말은 오직 고해성사를 통해서만 죄를 용서받는다는 개념은 아니다. 하느님은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으므로 고해성사라는 '도구'를 통하지 않고서도 용서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론적으로는 자기의 죄를 절실히 뉘우치고, 거기다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모독한 것까지 슬퍼하는 회개(상등통회) 만으로도 죄를 용서받을 수 있지만, 그래도 자신이 지은 죄악이 대죄라면 완전한 마음으로 회개한 후라도 고해성사는 나중에라도 필수적으로 보아야 한다. 자신이 모르고 지은 죄, 그리고 대죄보다는 가벼운 일상에서의 여러 잘못들인 소죄는 고해성사로도 용서받을 수 있지만, 고해성사 없이 하나하나 진실로 뉘우치는 마음으로 미사에서 고백기도를 같이 바치고, 영성체를 해도 용서받긴 한다. 물론 보속은 알아서 열심히 기도와 선행으로 해야겠지만.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통회로는 그 후의 삶이 바뀌지 않을 수도 있지만, 성사를 통해 죄에서 벗어나 변화될 수 있는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만 혼자 속죄를 해도 하느님이 용서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알 길이 없으니, 고해성사를 통하면 확실하게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 때 정말 합당하게 뉘우치고 회개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입으로만 죄를 나불나불대고 용서받을 생각을 하거나[3], 고백하기가 부끄러워 자기 죄를 상세히 완전하게 고백하지 않고 가려 말하거나 숨기는 등의 죄를 일명 '모고해'라고 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우롱한 대죄, 즉 하느님에게 거짓말을 한 죄로 여긴다. 예를 들어 사제에게 이야기하기 부끄러운 죄를 지은 사람이 고해성사거짓말을 하는 경우. 고해소에서 사제는 그저 인간의 오감을 위한 대리자일 뿐이며 그곳에 있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로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해 있는데, 이 거룩한 순간조차도 숨김이 있는 채로 고백을 하는 것은 주님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대죄라고 여겨 모고해는 절대 하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모고해를 했으면, 미사영성체나 다른 성사에 참여하지 말고, 다시 이에 대해 절실히 회개하는 마음으로 빨리 고해성사를 다시 받아야 한다. 이 점에서 개신교와의 차이점이 드러나는데, 개신교에서는 사제에게 죄를 사해줄 권한이 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죄의 용서는 죄인과 하나님과의 일대일 회개를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다고 보는 반면,[4]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를 포함한 7성사를 집전할 권리가 사제에게 주어진다.

2.2. 잠벌과 보속

그러나 그 죄로 인한 은 그대로 남는데, 이 벌을 죽은 후 연옥에서 영혼의 상태로 고통받으며 때워야 한다. 편의상 벌이라고 표현하긴 하지만 단순히 고통을 가함으로써 끝나는 장소는 아니며, 자기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나면 좀 더 하느님을 뵙기에 합당한 상태가 된다고 한다. 죄로 인한 오점을 씻어낸다는 점에서 연옥을 '정화하는 장소(purgatorium)'라고 한다. 물론 성인과 같은 삶으로 현세에서 지극히 고통을 받으면서도 독실히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정의와 선을 위해 노력했다면 연옥에 가지 않거나, 연옥에 아주 조금만 있고 바로 천국에 가서 살며 영원한 행복과 복락을 누리며 기쁨 속에 영생을 얻고, 하느님을 뵐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문제는 신자들 절대다수는 결코 성인이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고해성사를 보면 사제는 보속(satisfactio)이라는 것을 준다. 이것은 "앞으로는 죄 안 짓고 좀 조심하시며 사셔야죠? 자, 그걸 몸과 마음에 새기고자 이렇게 하도록 합시다" 하는 교육적 의미, 벌을 준다는 의미, 그리고 죄로 인한 상처를 신자의 노력과 믿음으로 갚으라는 의미다. 예를 들어 의 먹을 식량을 훔쳐서 을이 한 끼를 굶주렸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갑은 그 죄를 회개와 고해성사를 통해서 용서받는다고 해도 갑의 죄 때문에 을이 한 끼를 굶어야 했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것이 '죄의 상처'로서 남는 것이다. 이것을 채워야 하는 것이 신자가 받는 잠벌이다. 이는 현세의 기도나 고행으로 채우거나, 사후 연옥에서 고통을 겪으며 치르게 된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흔히 고해성사에서 사제가 정해주는 보속은 그것을 행하더라도 해당 죄에 대한 벌을 다 치러 죽더라도 연옥에도 거치지 않고 천국으로 갈 수 있기에는 부족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교리다.

즉 고해성사를 꾸준히하고 사제가 말해주는 보속을 모두 제대로 행한다면 연옥에서의 잠벌을 받지 않고 바로 천국으로 가게 되어야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러한 저지른 죄의 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보속행위만으로 벌을 온전히 다하고 연옥을 피해 천국에 가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967년까지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 교리서로 사용된 천주교요리문답 273번을 보면, '고해성사에서 신부가 주는 보속만으로 그 고해성사에서 용서받은 죄의 모든 잠벌들도 사해지는가?' 라는 질문에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스스로 다른 보속 될만한 신심[5]을 찾아 행하든지, 대사를 얻어 잠벌의 부족함을 채우라고 분명히 명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저지른 죄의 크고 작은 심각성에 비해 기도 몇 번이나 고행 정도로 벌을 다 치른다는 것은 지나치게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흔히 보속으로 잘못 생각되는 남에게 손해끼친 것에 대한 보상은 보속과는 별개로 고해성사 이전에 가급적 당연히 해야 하며, 이는 보속보다는 고해 전에 분명히 있어야 하는 회개에 가깝다. 남에 피해에 대한 갚아줄 의지도 없이 고해성사를 본다는 것 자체가, 죄의식의 결여로 인해 모고해의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또한 가벼운 보속조차도 실질적으로는 완벽히 행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를테면 '성모송 3번' 급의 매우 가벼운 보속을 사제가 말했다고 하더라도, 신자 자신이 그 보속을 진심으로 행했다고 확신하기는 매우 어려운 법이다. 과연 자신은 성호경을 긋고 성모송을 외는 1~2분의 시간 사이에 잡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확언할 수 있을까? 진심으로 하느님께 마음을 의탁하며 죄 보속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은 이 부분을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즉 신자 자신도 자신이 보속을 제대로 했는지 장담이 어렵고, 그걸 제대로 아는건 하느님뿐이다. 또한 신자에 따라서 보속을 행하는게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사제가 신자에게 "올해 대림 시기묵주기도 5단을 바치세요"라고 보속을 주었는데, 신자가 실수로 보속을 까먹었고 사제마저도 까먹었다면 해당 신자는 나중에라도 그 보속을 바치는게 매우 어려워진다. 즉 이론상으로는 매우 간단하고 쉽지만, 죽을 때까지 보속을 하나하나 모두 성실하게 행하는건 의외로 매우 어렵다.

이 문제는 과거에는 더 심각했다. 요즘이야 "성경 로마서 몇 장 읽고 묵상하세요" 혹은 "묵주기도 몇 단 바치세요" 또는 "참회하는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의 기도성모송 몇번 하세요!" 등으로 끝나는 게 보속이지만[6], 과거에는 "몇개월 ~ 수년동안 성당 입구에서 나는 죄인이오 하는 식으로 고행하며 보속하세요"라거나 "당장 멀리 떨어진 성지로 순례 다녀오세요" 식의 무지막지한 보속이 대부분이었다. 서유럽에서 전해지는 옛 이야기에 따르면, 양말에 을 넣고 순례 갔다 오라고 했다는 이야기마저 있을 정도니, 이야기가 과장되었다 해도 대충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모래알이든 바위든 가라앉는 건 마찬가지"라는 식의 논리로, 모든 죄는 그에 무거운 대가를 치러야 다시는 안 짓는다는 논리였다. 물론 맞긴 하지만 당연히 이러한 보속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영주기사 계급도 아닌 일반 평민이나 농노성지까지 갈 재력이 어딨으며, 어디 감히 영주에게 "성지순례해야 하니까 영지를 잠깐 나가게 해 주세요"라고 요청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북아프리카 해적들과 아랍 군주들에게 "성지순례해야 하니까 노예로 잡아가지 말아주세요"라고 요청할 수 있었을까?

이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별 거 아닌 죄에 대해서도 혹독한 보속을 내리는 풍조는 점점 줄어들어서 조선에 가톨릭 교회가 처음 생겨났을 무렵에는 종아리 몇 대 하는 식으로 위의 말도 안 되는 보속까지는 가지 않았고, 천주경(주님의 기도)을 1,000번 외우게 하는 보속은 있었다고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사라진다. 실제로 19세기 말에 태어난 카푸친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 신부 성 '레오폴도 만딕(Saint Leopold Bogdan Mandić, 축일 7월 30일)'[7]은, "어릴 때 별 거 아닌 죄를 동네 성당의 신부에게 고해했더니, 보속으로 성당에서 몇 시간 동안이고 서 있게 했다"고 회고했다. 성 레오폴도 만딕은 당시 어린 마음에도 "이건 부조리하다!!"고 생각했다 하며, 훗날 카푸친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해 수도사제가 된 후, 수도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줄 때 늘 온화하고 따뜻하게 대했다고 한다. 원래 카푸친 프란치스코회는 분위기가 엄격한 곳이기 때문에, 성 레오폴도 만딕의 행동이 잘못이라고 비판한 같은 수도회 회원들도 제법 있었다고 한다.[8]

사제가 사죄경을 내리면 고해성사는 유효하므로 보속을 하지 않는다고 고해성사가 취소되거나 무효가 되지는 않지만, 자기가 지은 죄를 끊고자 한다는 의지가 결여되었다는 뜻은 될 수 있다. 선행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착한 삶을 살아가면 모르겠지만, 안 그래도 가볍게 주는 보속조차 행하지 않는 사람이 일상생활이라고 성인들과 같은 신실함으로 살아갈 리가 있나.

2.3. 잠벌과 보속에 대한 개신교의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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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사란 무엇인가?

그런데 위와 같은 상황들이 누적되면 신자들은 점차 고해성사도 보지 않게 되고 신앙에도 멀어진다. 그래서 "지금 대사를 받으면 잠벌(보속)도 면제된다!" 하면서 신자들을 독려하게 되었다.[9][10][용어주의]
(중략)
“대사란, 이미 그 죄과에 대해서는 용서받았지만, 그 죄 때문에 받아야 할 잠시적인 벌[暫罰]을 하느님 앞에서 면제해 주는 것인데, 선한 지향을 가진 신자가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 교회의 행위를 통해 얻는다. 교회는 구원의 분배자로서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보속의 보물을 자신의 권한으로 나누어 주고 활용한다.”
(중략)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71항.
죄를 지은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에게 교회는 고백성사를 통하여 죄는 사면되었다 할지라도 그 죄에 따른 벌, 즉 잠벌(暫罰)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잠벌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보속(補贖)을 통하여 사면될 수 있는데, 현세에서 보속을 하지 못한 경우 연옥에서 보속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이 보속을 면제해 주는 것을 대사라고 한다.
『가톨릭 대사전』, '대사' 항목.

이에 교회는 성경에 의거,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천국문의 열쇠를 받았다고 전해지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의 권한으로 천국의 곳간을 열어 성인들의 공로를 나누어 베풂으로써 일정한 전체 보속을 바치면 연옥의 잠벌을 면제받을 수 있다고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는 연옥 벌을 모두 면제받을 수 있는 전대사와 일부를 면제받을 수 있는 한대사로 나누어진다. 쉽게 말하자면, 특정한 퀘스트 조건의 만족 여하에 따라서 보속을 일부 혹은 전부 면제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전대사도 실제로 누군가가 실제로 전대사를 받았는지는 오직 하느님만이, 혹은 해당인물이 사망한 뒤에 본인의 영혼만이 알 수 있다. 가톨릭 교회가 정한 '전대사를 받는 조건'을 모두 채웠다고 해도,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평가하여 불합격하면 한대사만 허락하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대사가 얼마나 효력이 있을지에 대한 평가도 역시 하느님만이 하시므로, 전대사를 받는 조건을 채웠다고 자기가 연옥에서 받을 벌이 모두 사라졌다고 장담할 수가 없다. 따라서 대사를 받았다고 안심하지 말고, 삶 속에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유지함이 중요하다. 하지만 보속이든 대사든 역사 속에서 가톨릭 교회가 만들어낸 규칙들이라 전능하신 하느님을 인간이 만든 프레임에 가둔다는 얘기가 진보적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 가톨릭 교회에서 대사의 조건은 보통 기도와 성지순례 등이 가장 흔하다. 그러나 과거에는 십자군에 참여, 헌금(봉헌) 등의 형태로도 선포되곤 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강조한 헌금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다. 당시 대사령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지은 죄를 회개하고 다시 죄짓지 않기로 마음먹은 뒤 사제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
1. 적어도 지정된 7개 성당을 순례하여야 하며, 순례할 때마다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여 주신 주 예수의 오상(양손, 양발, 옆구리)을 기념하고 공경하는 뜻으로 주의 기도와 성모송을 5번씩 열심으로 바치거나 또는 "하느님, 자비하시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0)을 바쳐야 한다.
1.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비로 응분의 헌금을 바치는 것이 좋다. 그러나 하늘 나라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다 같이 갈 수 있도록 열려 있으므로, 돈이 없는 사람들은 헌금 대신 기도와 대재로 대사를 받을 수 있다.
제임스 기본스 추기경, 『교부들의 신앙』.

여기서 3번 항목을 먼저 이행한 자는, 어느 사제에게나 고해성사를 볼 수 있다는 증명문구가 라틴어로 씐 증서를 나누어 주었다. 이 증서가 속칭 면죄부이다. 이는 옛 사람들은 흔히 자기 사는 동네를 벗어나기 어려운 현실 때문인데, 신부들과 계속 얼굴을 맞대다 보면 사이가 나빠질 수도 있고, 아무리 신부가 비밀을 지킨다고 해도 고해성사를 하기 싫어진다. 게다가 다른 신부가 자기 동네에 온다고 해도 주교에게 허락을 받지 않으면 합법적으로 고해성사를 줄 수 없다. 또한 아주 심각한 대죄(낙태를 공공연히 행한다거나)일 경우 일반 사제에게 고해성사할 권한이 없었다. 이런 죄들은 고등 성직자에게만 권한이 있었다. 하지만 이 증서가 있으면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아무 사제에게나 가서 고해성사를 볼 수 있는 것이다.[12]

하지만 바로 이 3번이 동시에 논란의 핵심이었다. 분명히 돈이 없는 사람은 헌금 대신 기도와 대재[13]로 대체가 가능하다고 명시했고, 교황의 교서에도 "헌납자는 각자의 형편에 따라 헌납해야한다."고 언급했다. 또한, 고해성사를 통해서 진정으로 죄를 참회하고 뉘우치지 않으면 전대사는 받을 수 없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부패는커녕 훈훈하기 짝이 없는 조건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FM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당연히 자신이 헌금을 냈다고 목에 힘을 주는 신자와, 대사의 조건에 개인 의견을 붙여서 선동하는 판매원이 등장한 것이다.[14] 또한 헌금은 종교적 관점에서는 그렇다쳐도[15], 종교적 관점을 배제한다면 자칫 유전무벌 무전유벌로 보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게, 중세시대 문맹률은 최소 90%를 넘어간다. 더군다나 증명문서는 자국어도 아니고 라틴어. 농부들 입장에서 종이에 적힌 라틴어 알파벳 따위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이 상황에서 문서에 쓰인 대로 사람들이 행동하기를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가장 큰 문제는 '개인 의견을 붙여서 선동하는 판매원'의 대표주자가 바로 종교개혁 직전에 활동한 요하네스 테첼이라는 점이다. 테첼은 대사를 판매하면서 주옥 같은 개드립들을 펼쳤다. 당시의 대사 조건은 라틴어로 선포되었기에, 테첼과 같은 자들이 선동을 하면 얄짤 없이 왜곡되는 취약함이 있었다.

4. 가톨릭 교회의 개혁

가톨릭 교회에서는 트렌토[16] 공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함으로써 가톨릭 내부적으로는 헌금형 대사의 폐단을 근절한다.
대사를 수여하는 권한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것이고, 이렇게 신적으로 수여된 권한은 교회의 시초부터 행사되어왔다. 본 거룩한 공의회는 그리스도 백성에게 매우 유익하고 거룩한 공의회들에서 승인된 이 관행을 교회 내에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명하는 바이다. 또한 대사가 무용하다고 규정하거나 교회에 대사를 베풀 권한이 없다고 부인하는 자들을 파문에 처한다. 하지만 대사를 수여함에 있어서 너무 쉽게 베풀어서 교회의 규율이 약화되지 않도록 교회가 인정한 오랜 관행에 따라 절제하기를 바란다. 아울러 대사라는 아름다운 단어가 이단들에 의해서 모욕당하게 하는 남용 행위를 교정하고 개선하기를 원하면서, 본 교령을 통해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바, 대사를 얻기 위해 자행되었고 그리스도 백성에게 끝없는 남용의 원인이 되었던 모든 부적절한 금전의 유통을 완전히 완전히 폐지한다. 미신과 무지와 존경심 부족과 여타 이유에서 기인하였고 여러 관구들과 지역들에서 그 형태가 다양하기 때문에 특정한 방법으로 쉽게 금지시킬 수 없는 여타의 남용들에 대해서, 본 거룩한 공의회는 모든 주교에게 자기 교구에서 이런 남용들의 소식을 부지런히 수집하고 그에 대해서 먼저 관구 시노드에 보고하며, 다른 주교들의 의견도 청취한 다음 즉시 로마 교황에게 보고하라고 명령하는 바이다. 교황은 거룩한 대사의 은총이 모든 신자들에게 자비와 거룩함과 순수함과 함께 나누어지도록 자신의 권위와 지혜로 전체 교회에 유익이 되는 결정을 내릴 것이다.
트렌토 공의회 제25차 회기 中
제9조 (자선 기부금 모집 제도의 폐지)
예전의 여러 공의회들, 즉 라테란 공의회, 리옹과 비엔 공의회를 통해서 자선 기부금 모집자들의 사악한 직분 남용에 반대하는 많은 대책이 동원되었지만, 나중에는 소용이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악의가 날로 증가하여서 모든 신자들에게 큰 추문과 불만이 되고, 개선에 대한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므로 본 공의회는 앞으로 모든 그리스도교 지역에서 자선 기부금 모집자란 명칭과 실천을 완전히 폐지하고, 이런 식의 직무 수행을 앞으로는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바이다. 그 어떤 교회나 수도원, 구호소, 성지 그리고 계층, 신분, 품위를 불문하고 개인들에게 주어진 특전이나 관습도, 비록 그것이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도, 이를 거스르지 못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대사나 여타 영적인 은전이 그리스도교 신자들로부터 박탈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본 거룩한 공의회는 앞으로 교구 직권자가 참사회의 구성원 2명을 참여시켜서 적절한 시간에 백성들에게 대사나 은전에 관해 공지하도록 결정하는데, 이 두사람에게는 무보수로 자선 기부금과 이웃 사랑을 위한 봉헌물을 충실하게 거두는 권한이 주어진다. 마침내 모든 사람들이 교회의 천상적 보하는 돈벌이가 아니라 신심을 위하여 집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듣기를 바라는 바이다.
트렌토 공의회 제21차 회기 개혁교령 中

현대 가톨릭 교회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제992조 대사는 죄과에 대하여는 이미 용서받은 죄에 따른 잠시적 벌에 대한 하느님 앞에서의 사면이다. 합당한 마음 자세로 규정된 일정한 조건들을 채우는 그리스도교 신자는 구원의 교역자로서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보속 공로의 보고를 권위 있게 분배하며 적용하는 교회의 도움으로 대사를 얻는다.

제993조 죄에 따른 응분의 잠시적 벌에서 일부만 풀리는가 또는 전부 풀리는가에 따라서 부분 대사이거나 전면 대사이다.

제994조 어느 신자든지 부분 대사거나 전면 대사거나 자기 자신을 위하여 얻을 수도 있고 또는 죽은 이들을 위하여 대리 기도의 방식으로 얻어 줄 수도 있다.

제995조 ① 교회의 최고 권위 이외에는, 대사 수여권을 법률로 인정받거나 교황에게서 부여받은 이들만이 대사를 줄 수 있다.
② 교황 이하의 권위는 대사 수여권을 타인들에게 위탁할 수 없다. 다만 사도좌가 그에게 이를 명시적으로 윤허하였으면 그러하지 아니하다.

제996조 ① 대사를 얻을 능력이 있기 위하여는 영세자로서 파문 처벌자가 아니며 적어도 규정도 선행이 끝나는 때 은총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② 대사를 얻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 실제로 대사를 얻기 위하여는 적어도 대사를 얻겠다는 의사가 있어야 하고 또한 대사 수여의 취지에 따라 지정된 선행을 정해진 시기에 합당한 방식으로 이행하여야 한다.

제997조 대사의 수여 및 그 사용에 관하여는 이외에도 교회의 특별법에 들어 있는 그 밖의 규정들도 지켜야 한다.
『교회법』 992~997항.

이제는 루터 시기에 문제가 되었던 헌금형 대사는 선포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 자체적인 개혁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서, 현대에는 대사를 두고 신자들이 불만을 품지 않는다. 21세기 들어 교황청 차원에서 선포되었던 전대사로는 2008년 사도 바오로 탄생 2000주년 전대사와 2009년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 선종 150주년을 맞이해 선포한 사제의 해 전대사, 2012년 신앙의 해 전대사 등이 있다. 매년 부활 · 성탄 때 교황의 담화를 발표하거나 교황 선출 후 첫인사를 하는 행사 '우르비 에트 오르비(Urbi et Orbi, 로마 시와 전 세계에)' 때 교황의 장엄 강복을 직접, 혹은 라디오나 TV 생중계로 받아도 전대사를 얻는다. 2013년에는 새 교황의 첫 강복#, 부활, 성탄 대축일 총 3번이 있었다. 이 전대사들은 대략 참회하는 마음으로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하며, 모든 죄악들을 아무리 작은 죄라도 끊어버릴 심정을 굳히고, 교황의 지향[17]에 따라 기도목표를 두고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기도하면(이 세 조건을 전대사 통상 조건이라 함) 받을 수 있는 것들이다. 일단 헌금봉헌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2014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한국 124위 순교복자 시복식을 맞아 한국의 16개 교구(군종교구 포함)에서 교구별로 전대사를 주고 있다. 성지순례를 포함하여 교구별로 조건이 조금씩 다르니 미리 알아볼 것. 2017년에는 평신도 희년 맞아 교황청에서 전대사를 주었다. 2018년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아 프란치스코 교황장엄 강복을 통해 전대사를 주었다.

천주교의 옛 자료를 살펴보면, 대사를 받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며 'xxx일 한대사'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것은 과거에 대사가 신부에게 받은 보속 기간을 줄여주는 방법이었을 때의 흔적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신부에게 30일간 단식하란 보속을 받았는데 10일 대사를 얻었다면 20일만 단식하면 되었다. 그러나 대사가 연옥에서 받을 잠벌을 줄이는 것이 된 이후로도 이러한 표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대신, 그만큼의 보속 생활을 한 만큼 잠벌이 감해진다 생각하였다. 가령 30일 한대사를 받았다면, 30일간 엄한 보속생활을 했을 때와 같은 수준으로 잠벌이 감해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는 대사에 관한 규정을 다듬으면서 한대사의 'xxx일'이라는 부분을 삭제하였다. 이러한 구분이 무의미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의 자료들 때문에 신자들이 착각하곤 한다.

위에서 말한 대사 통상조건을 이행하며, 미사 중 성체 거양 중 성체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Dominus meus et Deus meus)'[18]이라고 진심으로 고백해도 한대사를 얻을 수 있다. 옛 신자들 중 성체신심이 과해서 성체를 쳐다볼 수도 없다고 생각한 이들이 많아서 생긴 규정이라고 한다.


[1] 지옥으로 떨어지는 영원한 벌인 영벌에 대하여 잠시 당하는 벌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 보속으로 갚고 다 못갚은 것은 연옥에서 치른다. 절대 오해해선 안 되는 것은, '죄를 사해주는 것'이 아니라 '벌을 사해주는 것'이라는 점이다. 신학에서 죄와 벌은 다른 개념이다.[2] 보통 죄를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악한 자유의지로 지으며, 십계명을 거스르기 때문에 짓고 회개하지 않고 죽을 시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죄를 대죄라고 한다. 즉, 살인, 도둑질, 지나친 탐욕, 강도질, 간음이나 혼전성관계 및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일체의 동성애 행위, 수음 및 자위행위, 냉담 및 주일미사를 소홀히하고 참례 안 함, 신성모독과 배교 등등.[3] 이 말은, 최소한 죄를 고백하면서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겠다는 강한 결심(상등통회)이나 적어도 하느님의 형벌을 두려워하는 마음(하등통회)을 가지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4] 성공회7성사를 인정하나, 고해성사가 죄를 용서받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다른 개신교 교파에서는 세례성사와 성찬성사(성만찬)만을 인정하며, 그냥 '세례', '성만찬' 이라고만 부른다. 영어로는 구별되지 않는다.[5] 기도, 선행, 삶의 고통을 참아받음 등등[6] 물론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이렇게 보속이 가벼워졌다고 해서 죄악에 따른 벌을 적게 치러도 된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보속이 가벼워진 건 신자들에게 더 자비를 베풀어 죄의 고백과 회개를 자주, 많이 할 수 있게 이끄는 목적이 있으므로, 만일 신자 본인이 절실히 회개하고 고해성사로 죄를 용서받았다면, 사제가 주는 보속만 하고 땡이라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되며, 이후의 삶에서 자기가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죄를 다시 짓지말고 끊임없는 기도와 믿음과 선행으로 자신의 악행의 상처를 기워갚는 생활을 해야 마땅할 것이다.[7] 이 성인의 이름은 한국어로 여러 가지로 음역된다. 보통은 '레오폴도 만딕', 혹은 '레오폴드 만딕'이라고 한다. 그러나 카푸친 프란치스코 수도회 한국관구는 이를 '레오폴도 만디츠'라고 음역한다. 하지만 이 성인의 모국어인 세르보-크로아티아어 표기법에 따라 음역하면 만디치라고 해야 옳다. 세르보-크로아트어에서 'ć'는 치경구개음으로 발음되기 때문.[8] 별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카푸친(Cappucin)은 이들이 쓰고 다니던 망토의 일종이었는데, 이 단어는 훗날 카푸치노(Cappucino)라는 단어로 바뀐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그거 맞다. 카푸치노 커피의 색깔과 카푸친 수도복의 색깔이 비슷하기 때문에.[9] 실제로 효과가 있다. 2008년에도 베네딕토 16세가 내린 전대사 기간 중에 미국유럽 등지에서 여러 냉담자들이 용기를 얻고 다시 성당에 돌아온 사례가 보고되었다.[10] 2000년대 들어서는 대사가 자주 주어지는 편이다. 2000년에 대희년을 맞아 전대사가 수여된 이후로는 거의 2~3년 주기 라고 하고 매년이라 읽는다 로 대사가 계속 주어지고 있다.[용어주의] 아래 내용에서 '교회'는 '천주교회'를 뜻한다. 한국에서는 천주교 혹은 가톨릭개신교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기독교 계열의 종교가 한국에 수입되었기 때문이다. 유럽처럼 기독교의 영향이 오래된 곳에서는 'church'라고 하면 천주교/개신교 구분하지 않고 교회를 뜻한다. 16세기 이전에 개신교 교파는 있지도 않았고, 종교개혁 시기에도 천주교 신학자들과 천주교 용어를 기초로 논쟁하며 갈라져 나왔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개신교와 천주교가 각각 수입되어 '교회'와 '성당'이라는 말이 사용되는데 사실 모두 다 'church'로 번역할 수 있다. 'Cathedral'을 '성당'으로 번역하지만 정확히 말해 주교가 있는 주교좌성당이 맞는 말이다. 덧붙여 우리말로는 '교회'와 '성당'이라는 말로 건물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으나, 사실 교회의 신학적 의미는 성도의 모임이다. 아래 인용문의 교리서에서 '교회'라고 스스로를 지칭하는데 이 역시 '신자들의 모임, 공동체' 으로 보면 자연스럽다. 아니 뭔 일이 있었길래 신학적 의미랑 일반 신자가 이해하는 거랑 이렇게 차이가 나지??[12] 이 증서의 라틴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Potestatem habet eligendi sibi confessorem presbyterum idoneum religiosum vel saecularem, qui audita diligenter eius confessione, absolvere eum possit auctoritate predicta (Papa) ab omnibus peccatis ac semel in vita et in mortis articulo plenariam omnium peccatorum suorum indulgentiam et remissionem impendere. 해석은 이러하다. 즉 이(증서를 가진 자)는 뜻에 맞는 죄의 고백을 들어줄 사제를 선택할 특전이 있으니, 이 사제는 수도사제이거나 세속사제이거나 그 고백을 유심히 들은 뒤, 위에서 말한 (교황의) 권능으로 모든 죄를 사할 수 있다. 또 일생에 한 번과 임종의 위험이 있을 때 그의 모든 죄를 완전히 사하여 주고, 또 전대사를 베풀 수 있다. 출처는 H.C. Lea의 <고해와 대사>[13] Jejunium. 재의 수요일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금육, 금식을 하는 것. 소재는 금요일에 금육을 하는 것이다.[14] 당시 흑사병 때문에 교육 받은 성직자의 파견 또한 적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흑사병의 시작이야 13세기부터지만 19세기까지도 산발하였고, 인구증감이 흑사병의 영향을 받지 않게된 것도 17세기는 돼야했기 때문.[15] 모세도 성소를 짓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헌금을 요구했다.[16] 독일어로 트리엔트라고도 한다. 현재는 이탈리아령이며, 가톨릭출판사에서 펴낸 <보편 공의회 문헌집>에서는 이탈리아어 '트렌토'를 쓰고 있다.[17] 전통적인 지향은 가톨릭 교회의 번성과 이단의 소멸, 현대의 지향들은 가톨릭 미사책인 <매일미사> 앞쪽에 월마다 갱신되어 올라온다.[18] 예수부활을 의심하던 사도 토마스가, 예수의 손과 발과 옆구리의 상처를 직접 보고 만져본 후 했던 신앙고백. 자세한 이야기는 사도 토마스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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