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본엄 스미스 Roger Bonham Smith | |
<colbgcolor=#000><colcolor=#fff> 출생 | 1925년 7월 12일 |
오하이오 주 콜롬버스 | |
사망 | 2007년 11월 29일 (향년 82세) |
미시간 디트로이트 | |
경력 | 제너럴 모터스 회장 (1981 ~ 1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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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기업인.#2. 생애 및 상세
1925년 7월 12일에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Besse Belle와 E. Quimby Smith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42~1946년 사이에 해군으로 전역했으며, 1947년에 미국 미시간 대학교에서 학사 과정을 졸업한 뒤, 1953년에 같은 학교의 Ross School of Business 과정을 졸업해 경영학 석사(MBA)를 따 냈다. 1949년에 GM에 입사한 그는 회계 직원으로 일했고, 1970년에 회계 담당자로, 1974년에는 재무팀과 대중홍보(PR), 대정부관계 업무를 담당하는 부회장으로 임명되었다.1981년부터 GM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1980년대를 혼란기로 맞이하던 회사를 이끌기 시작했다. 스미스는 GM의 회장으로서, 임기 초반에는 비용 절감에 주력했다.
1981년에는 GM의 트럭과 버스 개발 부서를 하나로 통합시켰고, 1982년과 1983년 사이에는 공장 임원들의 임금을 삭감해 경영진들에게 배당했으며, 1980년대 내내 미국 내에 있는 공장들을 상당수 폐쇄하고 노동자들도 대량으로 해고했다. 나아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디비전"이라는 이름 하에 반쯤 자율적으로 운영되던 폰티악, 쉐보레, 뷰익, 올즈모빌, 캐딜락 등의 계열사들의 상황을 근본적으로 개편하여 한동안 GM에서 진행되던 부분 자발적인 회사 운영 체제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이어 1984년부터는 차체를 납품하던 피셔 바디(Fisher Body) 공장과 다른 GM 조립공정들을 분리하고, 아예 이 마케팅 부문을 뺀 디비전 내의 나머지 부서들을 쉐보레-폰티악-캐나다 지부(Chevrolet-Pontiac-Canada, 이하 CPC)와 뷰익-올즈모빌-캐딜락(Buick-Oldsmobile-Cadillac, 이하 BOP)의 두 팀으로 묶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18개월간 회사 가동을 중단시켜야 했던 것은 물론 오히려 신규채용까지 하느라 운영 비용만 늘리고 회사 내의 혼란까지 가중시켰다는 평가를 들었다. 게다가 재임 기간 동안에는 비용 절감을 이유로 뱃지 엔지니어링을 남발하는 바람에 당시 시판된 신차들이 거의 붕어빵으로 전락해서 제품의 경쟁력까지 떨어졌다.[1] 신차개발과정도 재무부와 엔지니어들의 입김이 커지면서 디자인 팀을 비롯한 개발진들이 제대로 된 신차를 개발할 수 없는 수준까지 경직되고 절차도 복잡해졌다.[2]
그리고 1982년에는 폰티악, 쉐보레, 올즈모빌, 뷰익 브랜드를 위한 중형차 개발 프로젝트인 GM10 프로젝트를 계획, 지휘했는데 일곱 공장에서 공장당 25만대를 생산한다는 야심찬 계획에 당시로서는 엄청난 개발비인 70억 달러를 투입했다. 하지만 개발 과정에서 삐걱거리는 부분들이 많은데다가 1984년의 디비전 통합과 공장 분리 때문에 일이 더 꼬였고, 나아가 공장 설비들을 완전히 새로 짜야 하는 바람에 출시된 차들[3]은 차 1대가 생산될 때마다 2천 달러 손해가 생긴 데다가 출시된 신차들의 경쟁력까지 떨어져 "미국 자동차 산업 최악의 재앙"으로 평가되었다. 여기에 전임 회장 피트 에스테스의 방침을 계승하여 가로배치 전륜구동의 세계화, 연비규제 강화 대응 등을 이유로 1980년대 중반 호황기에도 대형차급의 다운사이징 전륜구동화를 밀어붙여 대형차 고객들을 국내, 해외의 경쟁사에게 뺏기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또한 스미스는 GM을 급진적인 속도로 현대화한다는 비전 하에 노동자 없이 로봇과 컴퓨터로만 자동차를 만드는 공장 라인을 구상했고, 일본 후지쯔와 기술 제휴를 맺은 뒤 1980년대 내내 9백억 달러를 들여 세계 최대 규모의 자동화 공장을 지었다. 하지만 로봇 자체부터가 서로에게 페인트 칠을 할 정도로 문제가 많았고, 이미 비용 절감을 위해 미국 내 기존 공장들을 폐쇄하고 멕시코와 같이 노동력이 저렴한 곳으로 공장을 옮겨 버리는 바람에 노동조합과의 노사관계도 사실상 파탄 수준이었으며 로봇들의 유지보수 비용, 노조원들의 퇴직 비용처럼 간접적인 투자비용이 더 들어 오히려 제품의 제조 비용만 최고 수준으로 높아져 버렸다. 또한 이렇게 대대적인 구조조정 과정에서 본인의 연봉은 1,620달러만 줄여 구조조정을 설득하기 위해 연봉을 1달러만 받기로 선언하고 노조위원장을 이사회에 참여시킨 리 아이아코카와 대조를 보였다.#
그 외에도 스미스는 일본 업체들에 대응하고자 새턴 코퍼레이션을 새 브랜드이자 독립 업체로 설립했고,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본사와 다르게 짠 이 프로젝트는 그저 그런 제품으로도 높은 수준의 고객 서비스와 회사 내부의 노사관계, 초기 제품의 납득할 만한 신뢰성 등으로 어느 정도 호응을 얻어 그가 단행한 다른 정책들에 비하면 비교적 설득력 있는 성과를 보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이스즈로 시작한 일본 자동차 메이커들과의 기술제휴가 확장되어 기존의 이스즈만이 아니라 스즈키, 토요타도 파트너로 같이 두었다. 이 과정에서 GM이 취약했던 부문인 일본산 컴팩트카들과 직접 경쟁하는 소형차 및 준중형차 라인업을 일시적으로 확보하고, 특히 토요타와는 합작법인인 NUMMI를 1984년에 공동설립해 토요타 기술에 기반한 신차를 공동생산하고 토요타의 기업문화를 NUMMI에서 배워 GM 내부에 이식하고자 했다. 쉐보레 딜러를 통해 일본차를 배급한 서브브랜드 지오도 로저 스미스 재임기간 후반에 도입되었다.
나아가 로저 스미스는 1987년의 세계 최초 태양열 자동차 대회인 "월드 솔라 첼린지(World Solar Challenge)" 참가를 결정했으며, 이후 GM이 해당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이때 얻은 노하우는 곧장 전용전기차 모델인 GM EV1의 개발 과정에 고스란히 반영되기도 했다. 일렉트로닉 데이터 시스템스(Electronic Data Systems, 이하 EDS)나 휴즈 일렉트로닉스를 비롯한 타 분야의 회사를 인수해 GM의 현대화라는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면서 본업에서의 금전적 손실을 매꾸기 시작한 것도 로저 스미스 시절의 일이었다.
이후 스미스는 1991년에 테네시 주의 새턴 본사를 둘러보는 것으로 은퇴식을 치르며 42년 동안 몸담은 GM을 떠났다. 이후 2007년 11월 29일에 자신의 침대에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아들 둘과 딸 둘, 손자 손녀 여섯을 두었다.
재임 기간동안 시장 점유율을 46%에서 35%로 급락시키고 근본적으로 경쟁력 있는 신차개발이 불가능한 꽉 막힌 회사문화를 2000년대까지 고착화시키는 등, 1980년대 내내 뻘짓들로 GM과 미국 자동차산업을 말아먹은 무능력한 상사라는 평이 중론이다. [4]
3. 여담
- 1990년에는 마이클 무어 감독이 만든 "로저와 나(Roger & me)"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스미스의 광범위한 미국 현지공장 및 인원 정리로 인한 지역 사회에 미친 악영향들을 소재로 다룬 바 있다. 마이클 무어 본인이 스미스를 만나러 가는 내용을 담은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미시간 주 플린트 시의 뷰익 공장 폐쇄로 인해 지역 주민들이 토끼까지 잡아먹을 정도로 지역 사회가 파탄났다고 묘사했는데, 스미스 본인은 다큐멘터리에 대해서 "구역질나는 유머가 별로며 가난한 사람을 이용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평한 바가 있다.
- 스미스와 같은 회사 동기었던 GM의 전 부회장인 밥 루츠는 자서전을 통해 "기업가로서는 오만했으며, 한번 결심하면 끝까지 간다는 성격을 잘 보여줬다"고 스미스를 평가한 바가 있다. 자서전 "빈 카운터스"에서는 포드 유럽 지사의 회장을 지내던 시절, 스미스와 만나서 대화하다가 자신이 개발에 관여한 중형차 라인업인 포드 시에라가 후륜구동이라는 이유로 스미스로부터 지적을 받았다는 일화가 담겨 있다. 스미스는 회사 내의 반발이 있었지만 쉐보레 콜벳 외의 모든 라인을 전륜구동으로 바꾸겠다고 선언한 바이며, 루츠와 작별할 때도 "전 세계는 전륜구동으로 갈 것이고, 시에라도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며 나무랬다고 한다.
전륜구동이 큰 엔진과 매칭이 잘 안 된다는 기계적인 특성을 모르나? - 스미스가 타계했을 당시 GM의 회장이었던 릭 왜고너는, “변화가 심한 시기에 회사를 이끌었으며 변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줄 알았다”고 추모사를 올렸다.(#)
- 사후 메리 배라가 급진적인 전동화 전략을 위해 미국으로 역량을 총집결하려고 전세계 상당수 사업장을 폐쇄, 매각하는 삽질을 한 탓에 로저 시절 GM보다 경영악화가 가속화 되면서 일각에서 재평가를 하는 이들도 있다.
4. 같이 보기
5. 둘러보기
[1] 특히 이 시기에는 보급형 브랜드였던 쉐보레가 그룹 판매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고객들도 GM의 승용차 라인업을 사실상 뱃지만 다른 같은 차 돌려막기로 취급하는 여론이 강했다.#[2] 밥 루츠의 자서전 "빈 카운터스"에 인용된 전 GM 재무담당임원 잭 헤이즌(Jack Hazen)의 회고에 따르면, 차세대 캐딜락 드 빌과 플리트우드를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해당 시안으로는 연비규제를 맞출 수 없다는 이유로 엔지니어링 팀이 10cm 가량의 전장을 도려내어 디자인 완성도를 망가뜨렸고 잠재고객들도 이 신차들을 외면했다는 내용이 있다. 당시 총괄 수석 디자이너였던 어빈 리비츠키도 이 결정을 순순히 따랐기 때문에 캐딜락 외장 부문 수석디자이너였던 웨인 캐디 등의 디자인 팀원들도 불만을 표했고, 판매담당자와 마케팅 담당들도 소형화에 대한 집착에 우려를 표했을 정도였다.[3] 뷰익 리갈, 쉐보레 루미나, 올즈모빌 커틀라스 수프림, 폰티악 그랑프리. 네 차량 모두 GM W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다.[4] 이 때문에 미국에서도 사후 그를 추모하는 쪽과 고인모독을 시전하는 쪽으로 호불호가 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