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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6대 | ||||||||||
프란치스코 | }}}}}}}}}}}} |
가톨릭 교회의 교황 | ||||
제261대 성 요한 23세 | → | 제262대 성 바오로 6세 | → | 제263대 복자 요한 바오로 1세 |
<colbgcolor=#ffe100><colcolor=#670000> | |||
본명 | 조반니 바티스타 엔리코 안토니오 마리아 몬티니 (Giovanni Battista Enrico Antonio Maria Montini) | ||
출생 | 1897년 9월 26일 | ||
이탈리아 왕국 롬바르디아주 브레시아 | |||
사망 | 1978년 8월 6일 (향년 80세) | ||
이탈리아 라치오주 카스텔 간돌포 | |||
재위기간 | 제262대 교황 | ||
1963년 6월 21일 ~ 1978년 8월 6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e100><colcolor=#670000> 부모 | 아버지 조르조 몬티니 어머니 지우데타 알기시 | |
학력 | 밀라노 대학교 (교회학 / 박사) | ||
축일 | 5월 29일 | ||
문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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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톨릭의 제262대 교황이자 성인.성품이 소심해서 선임교황 요한 23세가 후에 자신의 후임자가 되는 그에게 우리 시대의 위대한 햄릿이라는 별명을 지어줄 정도였다. 성직자 생활의 대부분을 바티칸에서 보냈다.
2. 초기 생애
1897년 9월 26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브레시아 주에 있는 마을 콘체시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르조는 변호사, 기자, 이후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인물이었다.19세인 1916년 5월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1922년 25세의 나이로 교황청 국무원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바티칸에서의 경력이 시작되었다.
이듬해 폴란드에서 교황 대사로 근무했는데, 바티칸 외에서의 유일한 외교 경력이었다. 당시 신생 독립국이었던 폴란드는 같은 시기에 특히 동유럽 국가들에서 주로 두드러진 배타적 민족주의가 팽배했고, 이로 인해 그도 어려운 입장에 처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교황청으로 복귀할 때 매우 기뻐했다고 하며, 훗날 "내 생애에서 유용하긴 했지만, 단 한 순간도 즐거운 일이 없었던 시절"이라고 회상했을 정도였다.
교황 비오 12세 재위 시절, 그는 바티칸의 외교를 담당하는 국무원의 주요 인물이었고, 비오 12세의 개인 비서로서도 많은 활동을 했다. 특히 2차 대전 당시 비오 12세에게 전달되는 청원, 기도을 받고 이에 대한 답신을 교황의 명의로 보내는 업무를 담당했다. 아울러 비오 12세의 지시에 따라 2차대전 당시 실종된 이들(주로 포로, 난민)에 관한 정보 요청을 받고 답변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1948년 제3차 유엔 총회에서는 교황 비오 12세의 명을 받들어, 교황청 외교 업무 총괄 책임자로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국제적 합법성 승인을 위해 장면을 정부 수석대표로 하는 한국 정부 대표단을 지원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3. 주교 시절
1954년 밀라노 대교구장이었던 알프레도 일데폰소 슈스테르 추기경이 임종하자, 비오 12세는 당시 몬시뇰이었던 몬티니를 후임자로 지명했다. 동시에 그는 대주교로 서품되었다. 사목표어는 'Cum Ipso in Monte(동산에서 그 분과 함께)'. 비록 밀라노가 로마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밀라노 대교구는 이탈리아 내 최대의 가톨릭 교구였고,[1] 당시 비오 12세는 자신의 비서로 오랫동안 수고한 몬티니의 밀라노 대주교 임명을 "밀라노에 대한 나의 개인적 선물"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자신의 배려를 강조했다.그럼에도 이러한 외견상의 직위에 비하면, 밀라노 대주교 시절 그의 발언권은 그다지 강한 편이 못되었다. 이는 당시 비오 12세의 강력한 신임을 얻고 있던 측근 파스칼리나 수녀, 스펠만 추기경[2] 등 당시 바티칸 내 전통주의 진영의 존재 때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 예로 몬티니 주교는 파스칼리나 수녀와 같이 일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기막히게도 몬티니 '주교'가 일개 '수녀'인 파스칼리나에게 갈굼을 당하는 관계였다. 가톨릭의 보수적인 상하관계상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당시 파스칼리나 수녀는 교황을 등에 업은 데다가 괄괄하고 깐깐한 성격에 워킹머신이라 불릴 만큼 빠르고 완벽하게 일처리를 하였지만, 몬티니 주교는 정반대로 소심한 성품에 느긋한 일처리 스타일이었는지라 파스칼리나 수녀에게 참 많이도 갈굼당했다고 한다. 비오 12세도 그런 몬티니 주교를 답답하게 여겨 "파스칼리나 수녀님에게 ABC부터 다시 배워오라." 하고 핀잔하기도 했다. 앞서 서술했듯 몬티니도 바티칸에서 오래 근무하며 비오 12세의 개인 비서로 재직하는 등 나름 가까이서 근무한 인물이었지만, 교황 이전부터 근무했던 파스칼리나 수녀보다는 아무래도 신임을 덜 받았음은 부정하기 어려울 듯.
게다가 몬티니가 밀라노 대주교로 임명될 당시의 대우에 대해서도 말이 많았다. 몬티니의 전임자를 포함해서 역대 밀라노 대교구장은 임명과 함께 추기경으로도 서임받음이 관례인데도 불구하고, 몬티니는 대주교에 서임되는 것으로 그쳤던 것이다.[3][4] 이 부분도 파스칼리나 수녀의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몬티니가 비오 12세 시절 찬밥 신세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 역시 비오 12세와 오랫동안 가까이 근무했던 인물로서 바티칸 내에서 주류는 아니었을지언정 꾸준한 신임을 얻으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단지 같은 시절에 활동한 파스칼리나 수녀의 발언권, 영향력이 과장된 형태로 알려지면서 가려진 측면이 있을 뿐.
성격이 소심하지만 특유의 매력과 카리스마 때문에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요한 23세도 자기가 죽은 뒤에 콘클라베에서 몬티니 추기경에게 표가 모여 교황으로 당선되리라 예상하였고,[5] 그 예측은 정확히 맞았다.
4. 재위기간
4.1. 교황 선출
교황 선출 이후 첫 번째 강복 영상 |
밀라노 대교구장으로 재직하던 1963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으로서 바오로 6세가 처음 한 일은 요한 23세가 사망함으로써 중지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속개하라 명한 것이다. 이후 공의회가 폐막하자, 바오로 6세는 남은 재위기간 동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과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기울였다.
첫 번째 노력은 전례 개혁 중 하나로서 바로 Novus Ordo(노부스 오르도) 반포이다. 기존의 트리엔트 미사의 외적 특성(라틴 말로만 거행, 회중이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적음)은 미사의 회중이 손님으로 머무르기 쉬웠다. 바오로 6세는 트리엔트 미사의 기본 골격은 그대로 두되 많은 부분을 대대적으로 개정했으니, 이것이 Novus Ordo이다. 이 미사는 모국어 사용을 허용하고, 미사 중 평신도가 참여할 기회를 확대함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으뜸 전례인 미사에 그간 손님으로 머물렀던 평신도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냈다고 평가받는다. (예전 미사의 요소였던 라틴어와 벽 제대를 지금도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미사 문서의 라틴어 미사는 금지되었는가? 문단과 벽 제대는 트리엔트 미사만의 요소인가? 문단을 각각 보라.)
이때 영국 가톨릭 교회에서 반발이 일어났는데, 성공회의 탄압 속에서 트리엔트 미사는 국가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순교를 마다하지 않는 영국 가톨릭 교회의 상징이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트리엔트 미사의 유지를 위해 영국의 가톨릭 저명인사들은 교황에게 전통 미사를 유지해 달라는 청원서를 냈다. 시큰둥한 반응으로 청원서를 읽어 내려가던 교황은 서명자 중에 영국 탐정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애거서 크리스티의 이름을 발견하고, "아, 애거서 크리스티!"라고 갑자기 외치더니 특전을 허가하는 교서에 서명을 했다고... 이건 그가 그녀의 추리소설의 광팬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71년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역의 가톨릭 교구에서 트리엔트 미사가 예외적으로 실시될 수 있도록 특별히 내려진 이 특전을 애거서 크리스티 특전(特典)이라고 한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지만 트리엔트 미사의 예외적인 예술 문화 유산에 주목했고, 많은 비가톨릭 유명인사들도 이 청원의 서명했다. 대표적으로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저명한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 작가 로버트 그레이브스, 예후디 메뉴인, 소프라노 조앤 서덜랜드 등이 있다. 또 성공회 주교들도 서명했다.
4.2. 교회 개혁
1963년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경기도 남부를 분할하여 수원교구를 설정, 윤공희 빅토리노 신부를 초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했다. 1965년에는 원주교구, 1969년에는 안동교구, 1977년에는 제주교구를 설정했다.
1966년에는 천주교 부산교구 서부를 분리하여 마산교구를 신설하고, 초대 교구장으로 대구대교구 김수환 스테파노 신부를 임명했다. 2년 뒤인 1968년에는 김수환 주교를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했고, 1년 후인 1969년에는 김수환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한국인 최초의 추기경).[6]
콘클라베에 참여해 교황에 피선될 수 있는 추기경의 연령을 80세 미만으로 제한했고, 바티칸의 요직에 이탈리아인 이외에도 독일인, 아일랜드인, 미국인 등을 대거 등용하였다. 또한 검은 귀족[7]들이 구성한 귀족 근위대와 평신도 팔라딘을 해체시킨 것도 바오로 6세의 업적이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조.
4.3. 순례자 교황
바오로 6세는 재위기간 동안 장거리 여행으로 외국을 순방하며 정력적으로 사목 활동에 전념해 '순례자 교황'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2대 뒤에 즉위한 교황이 이 기록을 가뿐하게 갈아치웠다(…). 교황은 예루살렘, 인도, 콜롬비아, 포르투갈, 프랑스, 필리핀 등지를 찾았으며 1965년에는 역대 교황 가운데서 처음으로 방미하기도 했다.교황은 당시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에 의해 말려들어 점차 확대되어 가던 베트남 전쟁을 염두에 두고, 유엔에서 평화를 주제로 한 연설문을 발표하였다.
더이상 전쟁은 안 됩니다.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평화, 우리 인류의 운명을 이끌어야 하는 것은 바로 평화입니다.
1970년 11월 27일 필리핀 방문시에 신부복을 입은 볼리비아인 화가에게 칼로 피습당할 뻔했으나, 경호원들의 제지로 다치지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교황이 필리핀을 방문할 때 우리나라에도 와주실 것을 청했지만, 바오로 6세는 "남북간의 첨예한 대립 때문에 오해를 살 여지가 있다"며 고사했다고 한다.
4.4. 교회 일치 운동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전후하여 바오로 6세는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우선 그는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 지도자들을 ‘갈라진 형제’라고 부르며 공의회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시켰다.바오로 6세는 9세기 이래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자녀이자 자매 교회인 동방 교회들을 방문하였으며 수세기 이래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동방 정교회의 여러 종교 지도자들과 만남을 가지기도 하였다.
특히 1964년 예루살렘에서 1054년 동서 대분열로 상호 파문한 이래 처음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아티나고라스(Ἀθηναγόρας, Athenagoras)와 만났고, 이를 바탕으로 가톨릭교회와 정교회 양측은 1965년 12월 7일 동서 대분열로 900여년간 이어온 상호 파문을 취소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하는 등 동서 교회 관계 회복에 힘썼다.
바오로 6세는 영국 성공회의 지도자인 캔터베리 대주교와 공적으로 만난 최초의 교황이기도 하다. 캔터베리 대주교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와 공식적인 면담을 가지고 가톨릭 교회와 성공회 간에 상호이해를 위한 길에 나서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1975년과 1976년에 캔터베리 대주교 도널드 코건(Donald Coggan)과 교환한 4통의 서신에서 성공회가 여성을 성직자로 서품하는 것을 허용한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그러한 행위는 가톨릭 교회와 성공회 양자간의 화해를 위한 노력을 중대한 난관에 빠뜨릴지 모른다고 유감의 뜻을 표명하였다.
1965년, 바오로 6세는 세계 교회 협의회와 함께 상호간에 긴밀히 대화하고 협력하기로 하였다. 3년 후, 교황청과 세계교회협의회는 여덟 차례 모임을 가졌으며, 1월 18일부터 25일까지를 그리스도인 일치 주간으로 기념해 공동 기도회를 갖기로 결정하였다.
바오로 6세는 루터교회, 개혁교회[8], 성공회, 감리회와 각각 1964년 9월, 1968년, 1960년 12월 2일, 1965년 10월에 대화를 시작했다.
이 교회 일치 운동은 다소 이상한 방향의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는데, 요한 23세 시절에 크게 개선되었던 교황청-소련 관계가 크게 악화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었다. 소련은 요한 23세의 가톨릭 개혁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러시아 정교회 대표들이 참가하는 것도 허용하였다. 그런데 바오로 6세의 적극적인 정교회와의 일치 운동은 소련 공산당 지도부에게 가톨릭 교회가 우크라이나와 발트 지역의 가톨릭 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 더 나아가 정교회와 힘을 합쳐 공산주의를 몰아내려는 일종의 영적 전쟁으로 해석되었다. KGB 주석 안드로포프는 교황청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고, 소련의 대교황청 적대감은 이후 사회주의 국가의 시민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 즉위 이후 폭발하게 된다.
4.5. 생명 수호에 힘쓰다
1968년 7월 25일에 교황의 상당히 유명한 회칙 중 하나인 '인간 생명(Humanae vitae)[9]'을 발표했다. 이 회칙은 사회적으로 비중있게 다뤄지기 시작한 산아제한 등의 문제에 대한 것으로, 인공적인 산아제한과 피임은 반생명적인 것이며 낙태는 야만적인 살인행위임을 주장하는 가톨릭 교회의 기존의 가르침을 고수하였다. 이 회칙이 반포되자마자 가톨릭 교회 안팎으로 비난여론이 들끓은 건 당연지사. 당시 반대론자들은 전근대적인 발상이라며 강하게 비난하였으며[10] 독일 주교들은 이 회칙이 무오류의 가르침이 아니며 각 개인은 자신의 양심을 따라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쾨니히스타인 선언”(Declaration of Konigstein)을 발표하여 피임법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를 평신도들 개인의 양심에 맡겼다.[11]언론계의 인식은 크게 달라졌다. 그의 시복식과 세계 주교 시노드 임시총회 전까지만도 언론은 그를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인물'로 묘사해왔는데, 시노드 이후에는 동성애 & 이혼 인정 여론에 편승해서[12] '교회 개혁에 앞장선 진보주의자'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바오로 6세가 교회 개혁에 힘쓴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교리 등을 바꾸려 한 것은 아니었고,[13] 오히려 윤리 도덕면에서는 전형적인 가톨릭의 입장을 그대로 계승하여 세속 여론의 질타를 받기까지 한 인물인데, 이제와서는 되려 언론에서 개혁가로서의 면모만 부각시키니 아이러니. 물론 이러한 부분은 요한 바오로 2세 같은 인물의 경우에도 벌어진 일이었지만.
5. 사망
교황과 알비노 루치아니 추기경 | 교황과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 | 교황과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 |
"나에게는 당신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없으며,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나는 그를 위대한 인류의 동포로서 그리고 학창 시절의 친구로서 -더 특별하게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형제로서 그리고 그리스도 교회의 한 아들로서 그를 사랑합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이렇게 간청합니다. 제발 모른 척 하지 말아 주십시오. 내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빕니다. 부디 알도 모로를 아무 조건 없이 무사히 풀어 주십시오. 나의 이 겸손하고 선의에 찬 간청을 봐서가 아니라, 그저 그가 당신들과 똑같이 존엄성을 가진 인류의 한 형제라는 점을 생각하시고 꼭 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붉은 여단 형제 여러분, 나한테,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대신 전하는 나한테 당신들의 가슴 속에서 박애 정신이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을 내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기도하면서 여러분으로부터 좋은 대답이 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ㅡ 항상 여러분을 사랑하는 교황 바오로 6세 올림.
ㅡ 항상 여러분을 사랑하는 교황 바오로 6세 올림.
위 내용을 보면 "내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빕니다." 라는 대목이 있을 만큼 정말 필설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 보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테러분자에게 저자세로 나갔다는 일부의 비난을 무릅쓴 교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로는 5월 9일 로마의 한 자동차 안에서 총을 맞은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80세의 고령이라 건강이 좋지 못했던 교황은 친구를 잃은 정신적 충격으로 더욱 쇠약해졌다. [14]
이후 바오로 6세는 1978년 7월 14일에 바티칸을 떠나 20km 떨어진 카스텔간돌포에 있는 교황의 여름 별궁에 갔다.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그는 이탈리아의 새 대통령 산드로 페르티니와 두 시간 동안 만나는 것을 허락하였다. 저녁 시간에 텔레비전을 시청하면서 “말은 하느님께서 지으신 창조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동물이다.”라고 말한 때가 바오로 6세가 평온했던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는 곧 호흡에 문제가 생겨 산소를 요청하였다. 다음날 일요일,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 날, 그는 피곤하였지만 삼종기도를 하였다. 체온이 급격히 올라가면서 거동이 힘들어진 바오로 6세는 침실에 드러누웠다.
침대에 누운 채로 그는 주일 미사에 참례하였다. 노자성체를 모신 후, 교황은 3시간 동안 심근경색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으며 병마와 싸웠다. 1978년 8월 6일 밤 9시 40분(한국 시간 8월 7일 오전 4시 40분) 교황 바오로 6세는 카스텔간돌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교파를 불문하고 모든 크리스천을 포용하신 분
ㅡ 헬무트 슈미트 서독 총리
ㅡ 헬무트 슈미트 서독 총리
교회의 가장 모범적인 사도
ㅡ 빌리 그레이엄
ㅡ 빌리 그레이엄
바오로 6세의 시신은 카스델간돌포에서 2일간 7만여 명의 참배를 받은 뒤, 8월 9일 오후 6시 아무런 장식도 되지 않은 소박한 삼나무 관에 실려 로마까지 가도에 늘어선 조문객들 사이를 지나 운구되었다. 그리고 8월 12일 생전의 유언에 따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경건하고 간소하게 장례 미사가 거행되었으며, 다른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유해는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무덤에 안장되었다.
바오로 6세의 시신 | 바오로 6세의 무덤[15] |
5.1. 시복
15년 뒤인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했으며 2012년 12월 20일에는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바오로 6세의 영웅적 덕행을 인정하여 그를 가경자로 선언하였다.2013년 12월 바티칸은 1990년대에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낙태가 불가피했던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여성이 다행히 아이를 무사히 출산하여 산모와 아이 모두 목숨을 부지했는데, 이를 바오로 6세의 전구를 통한 기적이었다고 발표했다. 의사에게 낙태를 종용받던 산모는 가톨릭 수녀에게 기도를 부탁했는데, 그 수녀가 바오로 6세의 상본과 제의 조각을 여성의 배에 올려놓고 기도를 바쳤기 때문이다. 이 소식에 교황 프란치스코가 이 기적을 가까운 미래에 승인할 것으로 기대되었으며, 따라서 바오로 6세가 조만간 시복되리라 전망되었다. 2014년 2월 교황청 시성성에 자문하는 가톨릭 신학자들은 바오로 6세의 전구로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보고하였다.
2014년 4월 24일 이탈리아 잡지 《크레데레》는 2014년 10월 19일에 바오로 6세가 시복될 것으로 전망된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잡지는 일부 추기경들과 주교들이 이미 인정받은 기적을 재차 확인해서 교황에게 승인을 요청하기 위해 5월 5일에 그를 알현할 것이라고 추가적으로 보도하였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바오로 6세의 전구를 통한 기적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면 뒤이어 시복 교령에도 서명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시성성은 회의를 열어서 바오로 6세의 전구를 통해 일어났다고 보고된 기적이 사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에 대한 보고서를 곧 교황에게 제출하기로 하였다.
2014년 5월 9일 교황 프란치스코는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을 만나고 바오로 6세의 전구에 의한 기적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그리고 2014년 10월 19일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3차 임시 총회 폐막 미사에서 바오로 6세의 시복식을 거행하여, 그를 복자로 공식 선언하였다.
5.2. 시성
2018년 2월 17일, 교황 프란치스코가 로마 교구 사제들과 만난 자리에서 올해 안으로 바오로 6세를 시성할 계획이라고 밝혔으며, 3월 7일, 바오로 6세와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전구로 인한 기적을 인정하는 교령을 발표했다. 시성식 날짜가 10월 14일(일요일)로 정해졌다. 그리고 예정대로 이날 로메로 대주교와 함께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1] 이에 따라 몬티니는 밀라노 대교구장 서임으로 이탈리아 주교회의 의장까지 겸하게 되었다.[2] Francis Spellman, 생몰 1889-1967. 당시 미국의 추기경으로서 일명 미국의 교황으로 불릴 만큼 미국 가톨릭계에서 권력이 막강했으며, 비오 12세의 신임을 바탕으로 바티칸에서도 상당한 권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말년에 여러 가지 좋지 못한 행보를 보이다 결국 금전 스캔들에 휘말려 은퇴했다.[3] 결국 몬티니는 요한 23세가 교황에 즉위한 1958년에야 비로소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4] 굳이 변명을 하자면 몬티니는 밀라노 대교구장으로 지명될 당시 몬시뇰(명예 직함으로 공식 직위는 평사제)이었고, 아직 주교도 아니었다. 만약 추기경으로 서임하려면 무려 3계단(주교 → 대주교 → 추기경)을 한꺼번에 승진하는 것인데, 이러면 도리어 무리한 승진이라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었다.[5] 요한 23세는 바티칸에서 오래 근무한 몬티니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왔고, 교황으로 당선된 후 발표한 추기경 임명에 몬티니를 포함시켜 자신의 신임을 드러냈다.[6] 참고로 후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67년, 그 다음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1977년에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7] 이름만 들으면 무슨 악의 조직 같지만 당연히 아니고, 전통적으로 교황을 지지한 귀족 가문들을 말한다.[8] 장로회, 회중교회 등[9] 출처[10] 엄밀하게 말하면 현재도 이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신자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참조[11] 관련 링크[12] 알다시피 시노드 동안 동성애를 수용하느냐 마느냐 등의 문제로 시끌벅적했다.[13] 그와 같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 그런 오해를 흔히 받는다.[14] 이는 붉은 여단에게 악수 중의 악수가 되었다. 이후 5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나자 여론이 극도로 악화 되어 버렸고 스스로를 구석으로 몰아넣어 버렸다. 그 상태에서 미 육군 도지어 장군을 납치하는 일까지 벌이자 미국도 붉은 여단 박멸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고, 도지어 장군 구출작전 때 핵심 멤버들이 다수 사살, 체포당하면서 조직이 유명무실한 상태로 몰락하였다.[15] ‘BEATVS(복자)'로 적혀 있는 것을 보아 2018년의 시성 이전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