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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법정 (法頂) |
속명 | 박재철(朴在喆) |
출생 | 1932년 11월 5일(음력 10월 8일)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리 |
사망 | 2010년 3월 11일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북구 길상사 (향년 78세, 법랍 55세) |
학력 | 목포고등상업학교 전남대학교 상과대학 상학과 3학년 중퇴 |
종교 | 불교 |
1. 소개
대한민국의 불교 승려. 무소유의 정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54년, 22세에 효봉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남방불교 경전 숫타니파타를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번역하기도 했다.
2. 생애
193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했는데, 하필 1950년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삶과 죽음에 대해 고뇌하게 되었고, 1955년 통영 미래사로 입산해 이듬해 승려 효봉을 은사로 출가, 사미계를 받고 1959년에 28세 되던 해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이후 쌍계사, 해인사, 송광사 등의 선원에서 수행했고, 불교신문] 편집국장과 역경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등을 지냈다.이후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 살면서 운허 스님과 함께 불교 경전 번역 일을 하던 중[1] 함석헌, 장준하 등과 함께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법정은 종교적이고 피안적인 글만 썼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당시 불교계 인사들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나섰던, 불교 승려로써 그 시절에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2] 생에 주로 암자나 산골에서 살았던 것은 맞지만,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개신교인이자 사회운동가였던 함석헌이 만든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나 강원용 목사 등 타종교인들과 종교간 대화에 앞장서며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인물이었다.
그러다 1974년 인혁당 사건 이후에 송광사 불일암에 틀어박혔고, 그곳에서 <무소유>(1976년) 등을 통해 돈과 권력이면 다 된다는 조류와는 다른 삶의 길을 끊임없이 제시했다. 또한 송광사에 ‘선수련회’를 만들어 산사의 수행법을 대중들에게 전했는데, 오늘날의 템플 스테이의 원조가 됐다. 법정이 머무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지 전통과 현대, 불교와 대중의 소통이 있었다. 그는 관계의 단절자가 아닌 가교자였다.
무소유 외에도 여러 저서로 일약 유명해지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자, 1992년 어느날 갑자기 강원도 어딘가로 이사를 가버리곤 법회 때나 가끔 산을 내려왔고 어디에 사는지는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상당한 인세를 유럽, 인도 여행을 다니는데 사용한다는 소문도 있으나 사실무근으로, 유럽의 경우 프랑스 파리에 송광사 분원이 있어 법문을 위해 갔다오는 것으로 여비는 종단에서 내주고, 인도의 경우 기행기를 신문에 연재한다는 조건으로 조선일보에서 대줬다.[3] 정작 인세는 모두 장학금이나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부했다고 한다.[4]
사실 제5공화국 때는 시국, 특히 군사 독재를 비판하는 글도 신문에 기고한 바 있다.[5] 그런 것치고는 별 일 없었는데... 워낙 존경받는 사회 인사라 당시 악명높은 5공도 건드리지 못한 것 같다.
1994년부터 시민운동 단체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었으며, 1996년 서울 도심의 요정 대원각을 시주받아 이듬해 길상사로 고치고[7] 회주가 되었다. 기생 출신으로 백석 시인의 연인으로도 알려진 김영한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스님에게 대원각 부지 7천여 평을 희사해 절로 삼겠다고 요청했던 것. 이것도 일부는 "무소유라더니 땅은 덥석 받았네?"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하는데, 법정 스님 본인은 10년 동안 안 받고 버티셨다. 그러다 1996년에야 시주를 받아들인 것. 단월(檀越)인 김영한은 2년 뒤인 1999년 세상을 떠났다. # [* [ "천억대의 대원각을 어떻게 다 시주로 내어줄 수 있느냐"는 물음에 "그까짓 천 억의 돈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대답한 일화는 특히 유명하다.]
법정 스님은 생전 불교계 뿐 아니라 기독교 등 다른 종교인들과도 교류를 가졌으며, 그 덕분에 종교를 불문하고 많은 존경을 받았다. 특히 천주교와의 관계는 남달랐는데, 군사독재 시절 같이 민주화 운동을 하기도 했고 또 자주 교류했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선종하였을 때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와 함께 애도를 표하였고, 입적하였을 때는 이해인 수녀가 애도를 표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법정이 1984년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 기념 미사 때 김수환 추기경의 초청을 받고 명동성당을 방문해 설법을 한 적이 있었는데,[8] 이 인연으로 법정은 길상사 낙성법회 때 김수환 추기경을 초청하기도 했다.[9]
"믿지 않는다 하여 자신의 자식이라 하는 인간들을 지옥불에 던져버리는 당신네들의 신을 난 당최 이해 할 수가 없다... 차라니 난 지옥에 가서 당신네 신에게 버림받은 그 억울한 영혼들을 구제하겠다"라는 출처불명의 말 때문에, 기독교에 비판적이라는 소문이 돌았었다. 불교 외의 다른 종교에 대한 포용력이 부족하다며 그에 대한 비난도 많이 일어났었다.주로 도는 짤방 그러나 이는 반기독교 세력들이 인용하던 '한 스님' 이야기를 디시인사이드 종교 갤러리에서 짤방으로 합성해서 유포한 것이고, 법정의 발언이라는 근거는 없다. 저 경우처럼 속지 말자. 오히려 법정 본인은 천주교에서 불교로 개종하려는 사람에게 "천주교나 불교나 사랑의 근본은 모두 같으니 개종하지 말라"고 권유했다. 또한 크리스천인 함석헌 선생을 존경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실제로 법정이 진짜로 저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일어나자, 길상사에서 직접 사실이 아니라고 공문을 올리기도 했다. 길상사의 해명 공지. 다만 성철의 열반송을 두고 개신교계에서 일방적인 해석을 들이대자 법정이 "진정한 참회와 함께 지옥에 가서라도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커다란 서원"이라고 풀이했는데, 1994년 하이텔 상담실에 올라왔다는 이 해당 질의응답이 불교신문에 게재된 적이 있는데# 이게 어찌어찌 와전되어 전해진 결과일 수도 있다.
"이 몸뚱아리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소중한 나무들을 베지 말라. 내가 죽으면 강원도 오두막 앞에 내가 늘 좌선하던 커다란 넙적바위가 있으니 남아 있는 땔감 가져다가 그 위에 얹어 놓고 화장해 달라."
"수의는 절대 만들지 말고 내가 입던 옷을 입혀서 태워 달라. 그리고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달라. 그것이 내가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어떤 거창한 의식도 하지 말고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
"수의는 절대 만들지 말고 내가 입던 옷을 입혀서 태워 달라. 그리고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달라. 그것이 내가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어떤 거창한 의식도 하지 말고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
입적 전날에 남긴 법어.
입적 전날에 남긴 법어.
2010년 3월 11일에 법정 스님은 입적했다. 향년 78세. 법랍 55세였다.
입적 이후 원적(圓寂)과 함께 자신 이름으로 출간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판하지 말고 머리맡에 남아 있는 책을 자신에게 신문을 배달하던 사람에게 전해 달라는 법정의 유지가 공개되었다.
이에 고인의 뜻을 따라 일체의 장례 의식을 거행하지 않고 2010년 3월 13일에 전남 순천시 송광사[10]에서 다비를 진행하며, 조화나 부의금을 받지 않았다.(관련기사) 다비식 이후 나오는 사리는 물론 유골도 49재까지 송광사와 길상사에 안치했다가 조계산 불일암과 강원도 수류산방[11] 인근에서 비공개로 산골하였다. 길상사에 생전 승려가 사용하던 유품과 영정을 모아두고 있다.
절판해 달라고 한 출판물들에 대해 고인의 유지를 받들려는 이들과 출판사간의 분쟁이 있었으나, 결국 합의를 봐서 2010년 12월까지만 발매된 후 절판되었다. 이후 팔고 있는 법정의 책은 전부 공저거나, 다른 사람들이 법정에 대해 쓴 서적이다. 법정의 유지가 알려지자 법정 책 붐이 순간적으로 다시 일어서,[12] 도서관이 아니면 간혹 아주 드물게 동네 책방이나 불교상, 헌책방 한 구석에 약간 남아 있는 경우를 빼면 구하기 힘들다. 심지어 도서관에서도 찾기 힘든 경우가 많다. 고인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빼 놓는 경우도 있고, 배가 연한이 다 되어서 보존서고로 보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한동안 골치아팠는지 가장 유명한 수필인 무소유는 길상사의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내용을 볼 수 있다. 링크 참조.
법정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도 소수 있는데, 이건 그의 병명이 폐암이고 병원에 입원한 것에 대해 안 좋은 추측이 돌았기 때문인 듯 하다. 대개 폐암의 원인은 담배라는 인식 탓인데, 폐암의 원인은 절대 흡연만 있는 게 아니며 실제로 전체 폐암 환자의 15% 정도가 비흡연자임에도 폐암에 걸린다. 실례로 평생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는 최영의도 사인은 폐암에 의한 호흡부전이었다. 이에 대한 말을 많이 들었는지 자신이 폐암에 걸린 건 집안 내력이라 따로 말하기까지 했다. 링크.
흡연 외에도 결핵 등 폐질환 병력이 있을 시 폐암 발병률이 높으며, 육식과 오신채를 금하는 식생활의 불균형과 무리한 수도 생활 역시 폐암의 원인이 될 수도 있고 의외로 폐암의 원인은 상당히 다양하다. 심지어 비흡연자인 여성임에도 폐암에 걸린 환자가 많아서 연구해보니 요리하면서 발생하는 미세먼지도 원인이라고 한다. 향불에서 나오는 독한 연기가 그 원인 중 하나였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법정이 생전 17년을 머물렀던 송광사의 불일암은 법정 스님의 맏상좌[13] 덕조(德祖)가 지키고 있다. #
3. 이야깃거리
- 타인에 대한 친절을 최고 덕목으로 보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무엇인가? 불교도 기독교도 혹은 유태교도 회교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바로 친절이다. 친절은 자비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2004년 하안거 해제 법문
2004년 하안거 해제 법문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친절이다. 이웃에 대한 따뜻한 배려다. 사람끼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에 대해서 보다 따뜻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친절과 따뜻한 보살핌이 진정한 대한민국을 이루고, 믿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
아름다운 마무리,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
- 김영한[15]과의 인연이 유명하다. 서울특별시에서도 가장 이름 높았던 요정이었던 대원각을 김영한이 법정에게 시주했다. 법정은 10년 동안이나 사양했지만 결국 김영한의 고집에 못이겨 1997년 대원각을 시주받아 길상사라는 사찰로 바꾸어 창건하였다.
- 대광고등학교와도 인연이 깊게 되는데, 원음이란 법명을 지어준 김광석이라든가, 위 길상사를 시주한 김영한의 연인 백석을 시인으로서 롤모델로 삼은 윤동주, 시 연구의 끝판왕인 마광수 교수도 대광고 출신이다. 더욱이 이 두 사람은 불교에서 인연 깊은 일이 있는데,1992년 불교방송에서 송출된 라디오 프로그램인 <밤의 창가에서> 마광수 교수가 방송의 게스트로 출연하여 방송 수위를 넘는 발언을 한 것이 화제를 불러 일으키면서 오늘날에는 오히려 불교방송이 수구적이지 않은 이미지를 갖춘 꼴이 되었다.
야갤에서는 야짤을 올리는 척하면서 법정의 사진을 올리고 "또 속냐!!"라고 하는 글이 유행하고 있다.
- 국수를 엄청나게 좋아해서, 남들이 몇 생에 걸쳐 먹을 수 있을 정도의 국수를 먹었다고 한다. 입적 직후 나온 다큐멘터리에서 법정의 평소 식생활을 간략하게 설명한 적이 있는데 아침엔 빵 두 쪽, 점심은 제대로 차려먹고, 저녁엔 늘 국수를 찾았다고 한다. 법정이 최고로 치던 국수 레시피는 금방 탁 삶아서 우물물에 면을 씻은 뒤 간장에 비벼 먹는것. 최악으로 친 건 고속도로 휴게소의 우동이었다.
- 의외로 아이스크림도 좋아하셔서, 자주 드셨다고 한다. 특히 바밤바를 좋아하셔서 법정 스님 수필집을 보면 다른 스님들과 목욕갔을 때 간식으로 드시곤 했다는 데 한 번에 3개를 드신 적도 있다고...
- 이명박 전 대통령과 4대강 정비 사업을 두고 마찰을 빚는 모습도 보였다. 종교인으로서 평소 자연보존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법정은 4대강 사업 소식을 듣고 산에서 은거 중인 와중에도[16] 즉시 사대강 사업 반대성명에 동참했다.
이후 법정의 건강이 악화되고 말년에 병석에 들자, 사회 각계인사들의 격려가 쏟아졌는데, 이 전 대통령은 난초를 선물로 보냈다. 그런데 그의 대표저서인 무소유에도 나와 있듯이 난은 법정에게 집착의 해로움을 알게해준 상징물로 집착을 떨치고자 그토록 아끼던 난을 지인에게 보내고 깨달음을 얻었던 바 있다. 법정의 입적 직후, 무소유를 자신의 인생 최고 서적이며 닳고 닳을 때까지 읽었다고 애도했던 그의 말과 반대다. 립서비스였고 사실은 안읽었거나 별 생각없이 처리한 모양.읽었다면 그 따위 짓을 했겠나
- 해인사 선방에 있을 때 절에 온 어떤 아줌마가 장경판전에 있는 팔만대장경을 보고 "아, 빨래판 같은 거요?"이라고 한 데에 충격을 받아서[17] 한글 역경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이후 운허 스님을 도와 『불교사전』을 편찬하고 봉은사의 다래헌에 머물며 한자로 된 불경의 번역에 힘쓰게 되었다고 한다.#
[1] 운허 스님이 불경 번역에 나서게 된 계기는 팔만대장경 항목 참조.[2] 말 좀 험하게 보태면 법정 스님이 없었다면 당시 주로 기독교계(가톨릭, 개신교 포함)가 주도했던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서 불교는 제대로 고개도 못 들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불교 승려들은 극우 개신교 목사들처럼 교단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독재에 편승해 영합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나서지도 않았다.[3] 이 기행기는 <법정 스님의 인도 기행>이라는 제목으로 책으로 나와 있다. 이것을 보면 80년대 후반의 인도, 네팔 배낭여행이 어땠는지를 대략적으로 볼 수 있다.[4] 그 때문에 자신의 병원비를 댈 돈이 없었으나, 독실한 원불교 신자였던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부인 홍라희 씨가 법정의 임종 직전 밀린 치료비 수천만 원을 대납했다.[5] 군사정권에 항의하는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이 부당한 것이라거나,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있다.[6] 그런데, 전두환이 백담사에 칩거할 당시 찾아가 보고서 '전두환이 진심으로 참회하고 있더라'라는 요지의 글을 조선일보에 기고한 바 있다(1989년 1월 20일자. 법정 백담사 설중행, 전두환씨 생일날 1박 2일 면담기, 누비승복 입고 예불 "내 허물이 컸읍니다"). 아는 사람만 아는, 법정의 흑역사이다. 사실 과거 군사정권에 대한 과거사 청산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으로 빛을 발하면서 부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저런 흑역사가 연출되었다.[7] 재미있게도 법정 스님 본인이 사셨던 송광사의 옛 이름이 길상사이기도 하다. 알고 지은 이름인지는 불명.[8] 이 때 법정이 '저 같은 미약한 사람을 이 제단에 세워주신 천주님 은혜에 깊이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하여 좌중의 박수를 받았다. 이 때가 1984년으로 아직 우리 사회에 종교화합의 분위기가 미약할 때였기에 사회적으로도 큰 화제가 되었다.[9] 김수환 추기경도 성균관대학교에서 주는 심산상을 수상했을 때 관례에 따라 기꺼이 심산 김창숙의 묘소를 찾아 묘 앞에서 절을 올리고, 제사 후에 음복으로 나오는 술을 받아 마시는 등 포용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길상사 낙성법회에서는 “아름다운 사찰이 도심 한 가운데 들어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길상사가 맑음과 평안의 향기가 솟아나는 샘터로 모든 이에게 영혼의 쉼터와 같은 도량이 되기를 기원합니다”라는 축사를 남겼다. 봉은사에 가서 도심 한복판에 이런 사찰이 있다는 건 말도 안 된다며 사찰 무너지라면서 땅 밟기 시전하던 누구와는 참 비교되네![10] 법정이 처음 출가하여 불법을 공부한 본사이다.[11] 불일암은 송광사와 같은 산의 지척거리에 위치해 있긴 하지만 둘 모두 법정이 수행을 하던 작은 암자 혹은 오두막이다.[12] 이 때 책값을 몇 배로 올려 경매 사이트 등에 파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당연히 법정의 정신을 모욕하는 자들이라는 비판을 받았다.[13] 첫째 제자. 이밖에 법정 스님의 다른 제자들도 제자들을 덕인, 덕문, 덕현, 덕운, 덕진, 덕일 등 ‘덕 자’ 돌림으로 했다.[14] 시기는 1982년 1월 1일. 아마 법정스님이 원한 것은 아니고 당시 성철스님이 종정이 된 이유로 이루어 진 것 같다. 여기서 법정 스님이 질문하고 성철스님이 대답하는 것으로 이어졌는데 통일 문제, 경제 문제, 문제의 성철스님의 3천배, 지도자가 가져야 할 자세라던지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거론되었다.[15] 기생으로, 시인 백석이 '자야'라는 필명을 지어주었다는 백석의 연인.[16] 보통 대외활동을 극도로 꺼리시던 그의 행적상, 한번 은거에 들어가면 종단의 법회 등 큰 행사나 책 출판 문제 등이 아니면 길게는 몇년씩 나오지 않았다. 그런 법정이 사대강 사업이 구체화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반대성명을 발표했을 정도로 심각히 여겼다.[17] 일부러 불교를 폄하하려고 이렇게 말한 것은 아니고 절에 와서는 고려대장경이 어디 있느냐고 자기는 아무리 찾아도 모르겠다고 하는 아줌마에게 법정이 장경판전 안에 모셔져 있는 것이 바로 고려대장경이라고 가르쳐 주니까 그제서야 알았다고 답하면서 나온 말이 저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