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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핌 포르타윈 | 빌럼 1세 판 오라녀 | 빌럼 드레이스 | 안토니 판레이우엔훅 | 에라스뮈스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요한 크루이프 | 미힐 더라위터르 | 안네 프랑크 | 렘브란트 하르먼손 판레인 | 빈센트 반 고흐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알레타 야콥스 |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 아니 M. G. 슈미트 | 율리아나 여왕 | 요한 뤼돌프 토르베커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알리다 보스하르트 | 안톤 필립스 | 프레디 하이네컨 | 하니 스하프트 | 빌헬미나 여왕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바뤼흐 스피노자 | 톤 헤르만스 | 클라우스 폰암스베르크 | 요한 판올덴바르네벌트 | 마르코 반 바스텐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핏 피터르손 헤인 | 요프 던아윌 | 얀 레이흐바터르 | 파니 블랑커르스쿤 | 판코턴 언 더비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후고 그로티우스 | 요한 더빗 | 안토니 포커 | 에뒤아르트 데커르 | 리페비스터펠트의 베른하르트 공자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빔 콕 |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스허르 | 마르코 보르사토 | 에릭 하젤로프 룰프제마 | 티에스토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베아트릭스 여왕 | 티튀스 브란츠마 | 코르넬리스 렐리 | 한스 테이우언 | 요서프 륀스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레온틴 판모르설 | 빌럼 콜프 | 홋프리트 보만스 | 헨드릭 안톤 로런츠 | 아벌 타스만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요프 판던엔더 | 안드레 판다윈 | 요스트 판던폰덜 | 리누스 미헬스 | 미스 바우만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빌럼 바런츠 | 페르디난트 도멜라 니우언하위스 | 뤼트 뤼버르스 | 얀 틴베르헌 | 빔 소네벌트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요커 스밋 | 프리츠 볼케스테인 | 히에로니무스 보스 | 조니 크라이캄프 | 마르하 클롬페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요하너스 페르메이르 | 딕 브뤼나 | 알베르트 플레스만 | 요프 주테멀크 | 헬라 하서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토마스 아 켐피스 | 윌리엄 3세 | 케나우 시몬스도흐터르 하셀라어르 | 요하너스 디데릭 판데르발스 | 부보 오컬스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아나 마리아 판스후르만 | 헤르만 부르하버 | 루드 굴리트 | 모니크 판더번 | 프레이크 더용어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안톤 픽 | 바우데베인 더그로트 | 빌럼 프레데릭 헤르만스 | 피터르 옐러스 트룰스트라 | 알버르트 헤인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파울 더레이우 | 약 P. 테이서 | 얀 볼커르스 | 핏 몬드리안 | 시몬 스테빈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하윌라우머 흐룬 판프린스테러르 | 륏허르 하우어르 | 하리 뮐리스 | 아브라함 카위퍼 | 마르턴 트롬프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빔 칸 | 폴 버호벤 | 이자벨 드 샤리에르 | 람서스 샤피 | 아버 렌스트라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000><colcolor=#fff>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 |
| |
본명 | Vincent Willem van Gogh (빈센트 빌럼 반고흐)[1] |
출생 | 1853년 3월 30일 |
네덜란드 노르트브라반트 주 쥔더르트 | |
사망 | 1890년 7월 29일 (향년 37세) |
프랑스 센에우아즈 주 오베르쉬르와즈 (現 프랑스 일드프랑스 발두아즈 주) | |
묘소 | 프랑스 오베르쉬르와즈 묘지 |
국적 |
|
신체 | 170cm[2] |
직업 | 화가, 종교인[3] |
부모 | 아버지 테오도뤼스 반 고흐 어머니 아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4] |
형제자매 | 아나 코르넬리아, 테오, 리스, 빌, 코르 |
종교 | 개신교 (네덜란드 개혁교회)[5] |
서명 |
[clearfix]
1. 개요
네덜란드의 화가.2. 명칭
네덜란드어 표기법에 따르면 '핀선트 빌럼 판호흐'지만, 관용을 인정해 예외적으로 '빈센트 반 고흐'로 적는다. 관련 글.[8] 여기서 성씨인 반 고흐는 '고흐·호흐(Gogh) 출신'이라는 의미인데, 고흐·호흐는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뒤셀도르프 현 클레베군의 고흐(Goch)[9]라는 도시를 가리킨다.1980년대만 해도 국내 중학교 교과서를 비롯하여 여러 책자에서 '고호\'라는 이름으로 나온 바 있다.[10] 혀뿌리와 뒤쪽 입천장을 닿을락 말락 하게 만든 후 성대를 떨지 않으며 공기를 내쉬는, 무성 연구개 마찰음(흡사 가래 끓는 소리) [x]를 지금은 '흐'로 통일해서 쓰지만, 과거에는 앞의 모음이 'a, o, u'일 때 각각 '하, 호, 후'로 달리 썼기 때문. 일본식 표기법의 흔적이었는데, 일본에서는 지금도 이 방식에 촉음 표기까지 적용하여 'Bach(바흐)'는 'バッハ(밧하)', 'Gogh(호흐~고흐)'는 'ゴッホ(곳호)', 'Huch(후흐)'는 'フッフ(훗후)'로 쓴다.
그래서인지 1980년대 후반에 나온 표절 해적판 만화 <초인 킨타맨>에서 괴도가 훔쳐가려는 그림을 그린 화가 이름이 '방고호'라고 한국화하여 나온 적도 있다.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도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라는 가사가 나온다. 참고로 영국식 영어로는 '/ˌvæn ˈɡɒx, ˈɡɒf/(밴 고흐 또는 고프)'[11], 미국식 영어로는 '/ˌvæn ˈɡoʊ/(밴 고우)'로 읽는다.
3. 생애
4. 평가
빈센트 반 고흐는 일반적으로 렘브란트 다음으로 가장 위대하고 후기 인상파 중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작품의 두드러진 색채, 힘찬 붓놀림, 그리고 왜곡된 형태는 현대 미술에서의 표현주의의 흐름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반 고흐의 예술은 그의 죽음 이후 놀라울 정도로 인기를 끌게 되었고, 특히 20세기 후반에는 그의 작품이 전 세계 경매에서 기록적인 금액으로 팔렸으며 블록버스터급 순회 전시회에 출품되었습니다. 부분적으로 그의 광범위한 출판된 편지들 때문에, 반 고흐는 또한 전형적인 고통을 겪은 예술가로서 대중적인 상상력으로 신화화되었습니다.
―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5. 화풍
고흐가 화가가 된 방법은 순전히 자신이 존경하던 화가들의 그림을 보고 그것을 묘사하면서 기교를 익혀나가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이런 방식은 다른 화가들에 비해서 그 발전속도가 느려보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 덕분에 고흐는 독특한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 수 있었다. 만약 고흐가 처음부터 파리로 가서 인상파 조류를 접했다면 자신의 개성이 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흐가 일관적으로 자기 작품에 대해 '자신의 정념을 표현하는 것'을 하나의 화두로 아카데미즘을 계속해서 부정해왔고, 인상파를 접할 때도 훌륭하다고는 생각하나 자신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얘기했던 것을 생각하면 어찌 됐든 그는 개성있는 화풍을 획득했을 가능성이 높다.그리고 사실 그는 안트베르펜 아카데미에 소속되어 많은 것을 배우고자 주/야간 강의를 모두 수강하기도 하는 등의 시도를 한 적이 있으나, 그의 성격과 개성(아카데미즘을 거부하는)은 이번에도 역시 강사들의 분노를 사 얼마 안 가 퇴출당했다고 한다. 어지간히 대인배인 화가가 제자로 삼아주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그는 결국 독학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12]
초기 고흐에게 영감을 준 화가들은 렘브란트나 프란스 할스 같은 네덜란드의 옛 거장들로 이들에게서 기본적인 고흐의 스타일인 거친 붓 스타일[13]이라든지 음영이 뚜렷한 기법 같은 것을 배웠다.
|
고흐의 밀레 습작 |
고흐는 파리에 와서야 인상주의를 제대로 알게 되었고 비록 인상주의 스타일에 유보적이긴 했으나 그 영향을 받아들였다. 파리 이후로 고흐는 인상주의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인 색채의 활용에 능해졌고 쇠라와 들라크루아의 영향을 받았다. 쇠라에게는 점묘법의 영향을 받아 붓터치가 점 모양을 띄는 양상으로 나아갔고 들라크루아에게서는 대담한 색채의 활용이라는 영향을 받았다. 또한 일본의 우키요에에게서도 영향을 받아 그림자의 생략, 가는 선으로 둘러싸여진 얕은 채색, 풍경과 대비되는 거의 보이지 않는 크기의 인물 등의 일본적 스타일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
아를병원[14], 1889 |
6. 주요 작품 일람
6.1. 전기(1885년 이전)
- 경작하는 사람
- 스벤헤닝겐 바다 풍경
- 뇌넨의 교회에서 나오는 회중
- 눈속에서 장작 모으는 사람들
- 앉아있는 농부
- 뇌넨의 낡은 교회탑
- 감자 먹는 사람들
- 가래일하는 농부가 있는 집
- 누워있는 소
6.2. 파리 시절(1886-1888)
- 몽마르트의 풍차
- 구두 한 켤레
- 탕기 영감의 초상화
6.3. 아를 시절(1888년 2월-1889년 5월)
6.4. 생레미 시절(1889년 5월-1890년 5월)
6.5. 오베르쉬르우아즈 시절 (1890년 5월-7월)
7. 기타
|
20대 초반인 1873년에 찍은 것으로 알려진 사진 |
|
1886년, 친구이자 화가였던 에밀 베르나르와 함께 찍힌 사진 |
- 위의 사진에서 등지고 앉아 있는 사람이 고흐이다. 고흐는 생전에 사진은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하며 사진 촬영을 무척이나 싫어했는데 동생인 테오가 어머니의 사진을 보내주자 사진 속 어머니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든다며 자신이 그린 어머니의 초상화를 보내며 조화로운 색감으로 표현하고자 했다는 말을 덧붙이며 흑백 촬영밖에 안 되던 당시의 사진을 디스했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생전에 자신을 촬영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고 때문에 공인된 고흐의 사진은 위의 2장이 전부이다. 그 중에 하나는 뒷모습만 찍혀 우리가 흔히 아는 초상화 속 고흐의 모습은 실제 사진으로는 볼 수 없다. 다만 그의 아버지 테오도뤼스 반 고흐와 동생 테오의 사진은 남아 있어 그의 수많은 자화상과 함께 실제 모습을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는 있다.
|
실제 반 고흐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사진 |
- 1990년대에 한 상점에서 우연히 발견되어 법의학자들이 반 고흐의 사진이라 확인했지만, 출처가 불명확해 실제 그의 사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 그의 일생은 불운과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죽은 이후 가장 영예를 누린 화가이다. 1987년 3월 30일에 반 고흐의 그림 '아이리스'가 뉴욕의 소더비즈에서 5,390만 미국 달러라는 기록으로 팔렸다. 또한 1990년 5월 15일에는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이 크리스티즈에서 8,250만 달러(2020년 6월 기준 환율로 한화 약 1,003억 2천만 원)에 일본의 제지 사업가 사이토 료에이(齊藤了英, 당시 74세)에게 팔리며, 새로운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15] 그런데 사이토는 "내가 죽고 나면 그림을 관에 같이 넣고 화장해달라"는 말을 했다가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고 부랴부랴 농담이라고 변명했다. 악랄한 기업가로서 회사원들의 복지는 최악이었던 터라 노조에서는 '회사원들을 등쳐먹은 돈으로 그림 사서 장작으로 쓴다'는 비난이 쏟아졌다고... 이후 사이토는 1996년 세상을 떠났고, 그림의 행방은 한동안 묘연해졌다.[16] 그나마 확실한 것은 사이토의 말처럼 불에 태워 함께 묻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17]
그러다가 2007년에, '가셰 박사의 초상'이 1997~1998년 즈음에 오스트리아인 펀드매니저인 볼프강 플뢰틀(Wolfgang Flöttl)에게 팔렸다는 것이 확인되며 논란이 종결되었다. 상당수 명화를 소유한 이들은 언론이나 주변의 관심을 받는 것을 질색하거니와 그림을 걸어두고 홀로 감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경우도 많기에, 명화를 누가 사갔는지 일체 비밀에 부쳐지는 경우가 많아 진상이 늦게 밝혀졌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아예 다른 설을 소개하고 있다. 바로 위의 사이토 화장의 발언 자체가 와전된 말이었다는 것인데, 지나치게 높은 상속세에[18] 사이토가 불만을 표하며 "죽고 나서 가족들에게 천문학적인 상속세를 물게 할 바에는 그림을 나와 함께 화장하는 것이 더 싸게 먹히겠다"고 반 농담조로 한 말이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림을 구매했을 당시에도 관세와 특수소비세 등의 명목으로 미화 2,400만 달러에 달하는 세금을 지불해야 했다고.
- 고흐가 살아 생전 판 그림은 단 한 점, <붉은 포도밭>이라는 작품뿐이다.[19] 위에서 기술했듯, 전적인 생활비를 그의 동생 테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던 이 위대한 화가는 때때로 돈이 없어 물감을 먹기도 하였다.[20]
|
탕기 영감의 초상, 1887년 |
- 우키요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서양의 화가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림의 배경에 후지산과 벚꽃나무와 게이샤의 모습 등 다양한 소재의 우키요에로 빽빽이 들어차 있다. 우키요에를 본뜬 습작을 여러 편 남기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유달리 일본에서 고흐의 그림은 인기가 많고 연구도 많이 한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꿈》에서 괜히 주인공이 고흐의 그림으로 들어가서 고흐를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 게 아니다. 이 영화에선 마틴 스코세이지가 고흐를 연기하여 더 화제가 되기도 했다.
- 앞서 잠시 언급했다시피 그의 귀를 자른 건 고갱이었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아직 가설 단계이므로 그냥 '썰'에 불과하다. 그리고 고갱이 그랬을 가능성도 별로 없다는 반박이 있다. 고갱이 오만하고 자기 중심적이었던 인물인 건 분명하지만, 고흐가 귀 자른 사건은 고갱에게도 상당히 충격으로 남았다는 지적이 있다. 고갱이 파리로 도망치듯 돌아온 뒤에 만든 도자기 작품 중에 귀에서 피가 흐르는 듯한 형상의 도자기가 있는데 이는 고흐의 사건을 반영했다고 본다면 과연 고갱이 그랬을지는 의문.
- 고흐의 그림만을 대상으로 첫 전시회가 열린 것은 그가 죽은 지 2년 뒤의 일이었다. 1930년대부터 고흐는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만약에 그가 피카소처럼 91세까지 살았다면 1944년에 세상을 떠났을 텐데, 그랬다면 뒤늦게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후세인들에 의해 생시에 명성을 누렸을지도 모른다.
- 고흐와 생전 면식이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는 그가 종종 캔버스를 사러 방문했던 가게의 조카인 잔 루이즈 칼망(Jeanne Louise Calment, 1875~1997)도 있었는데, 그녀는 1997년에 122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전 세계 공식 최장수 인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칼망은 1994년 119세 생일 때 자신이 14세였던 1889년에 당시 35세였던 고흐를 만났던 기억을 회상했는데, 인상은 썩 좋지 않았던 모양이며 지저분한 옷차림에 불쾌한 인상(dirty, badly dressed and disagreeable)에 정말 못생기고 술 냄새를 풍기는 불평꾼(very ugly, ungracious, impolite, sick)이었다고 한다. 또한 칼망은 고흐에게 색연필을 판매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1991년 3월 11일 경향신문 기사에서도 당시 116세 생일을 맞은 칼망이 과거 고흐를 만났던 기억을 회상했는데, 열 세살 소녀 시절에 고흐를 처음 만났는데 고흐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다짜고짜 그날 밤 '아를의 다리 밑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하며 그 이후로도 종종 칼망과 길에서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고흐가 '나는 당신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라며 고백했다고 한다. 그녀가 고흐의 고백을 받아줄 수 없었던 이유는 자신보다 22살이나 많았던 데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고흐가 소위 '미친 사람'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평판이 나빴기 때문에 그의 고백을 받아 줄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고흐가 칼망에게 자신의 화실에 놀러 오면 초상화를 그려주겠다며 제안한 적도 있었는데, 이때 칼망은 호기심에 고흐의 제안을 수락할까 고민했으나 동네 사람들의 눈길 때문에 포기하고 말았다. 또한 그해 12월에 고흐가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잘랐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칼망은 고흐가 초상화를 그려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한 것을 후회한다는 꽤나 솔직한 감상을 남겼다. 앞서 서술한 대로 고흐가 자신보다 22살이나 어린 칼망에게 집적댔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고흐가 소아성애자였다는 의혹도 있다. 이게 노망인지,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애초에 당시 고흐의 주변 사람들은 주변에서 무슨 사건이라도 발생하면 일단 고흐를 범인이라고 여겼을 정도로 고흐를 미치광이 취급했기 때문에, 오해였거나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또한 저 당시에는 조혼이 가능했기 때문에, 진실이 무엇이든 오늘날의 관점으로 판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 2021년에 고흐가 스케치한 그림 1점이 발견되었다.#
- 고흐처럼 살아있었을 때는 작품을 인정받지 못하다 죽은 후에야 작품이 전설적인 명작으로 재평가된 경우는 당연히 많다. 같은 화가로선 같은 네덜란드 화가이던 요하네스 베르메르, 고흐랑 비슷한 30대로 요절한 모딜리아니가 있으며 작가로는 에밀리 브론테라든지 허먼 멜빌,프란츠 카프카같이 원작자가 죽고 나서 작품들이 세계적인 걸작으로 재평가된 경우이다.
- 2022년 7월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그는 생전에 궁핍한 생활을 하느라 캔버스를 뒤집어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그로 인해 여러 작품 뒷면에 또 다른 그림들이 발견되고 있는 중이다. #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소장한 유명한 고흐 자화상도 "감자 깎는 사람들"이라는 작품 뒷면에서 발견되어 현재는 양면 모두 볼 수 있게 전시되어 있다.
- 고흐가 정신병원에 있을 때 조카의 탄생 소식을 듣고 조카의 선물로 그린 아몬드꽃 그림이 있다. 링크 이른 봄에 피는 아몬드 꽃은 새 생명과 희망을 상징하며, 아몬드 나무는 부활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이 그림을 그린 후 5개월 만에 고흐는 세상을 등졌으며, 동생인 테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요절했다. 빈센트 반 고흐 주니어(1890~1978)는 삼촌과 아버지가 모두 정신질환을 앓다 요절한 불행한 가정사로 인해 처음에는 삼촌에게 거부감을 가졌으나, 삼촌이 자신에게 준 유일한 선물인 아몬드꽃 그림을 소중히 간직했고, 훗날 삼촌을 기리는 박물관을 세우게 된다. 삼촌과 아버지와는 달리 반 고흐 주니어는 88세까지 장수했으며, 자녀도 많이 두었으니, 어쨌든 그림에 담긴 고인의 바람이 이루어진 셈이다. 반 고흐 주니어의 자녀들, 즉 고흐의 조카 손주 중에 현재 유일한 생존자는 네덜란드 정부 비밀 요원으로 활동했던 요한 반 고흐이다. 요한 반 고흐의 아들, 즉 테오의 증손자인 테오 반 고흐는 네덜란드에서 유명한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는데, 2004년에 이슬람 관련 다큐를 촬영하다가 이슬람 무장단체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링크
7.1. 고흐는 정말 예멘 모카 마타리 커피를 좋아했나?
예멘 모카 마타리 커피에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고흐가 좋아하고 즐겨 마셨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멘 모카 마타리를 마셔야 고흐와 소통이 가능하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커피 애호가나 고흐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의견은 밥 한 끼 먹기 힘들 정도로 그림 1점 못 팔았던 고흐가 과연 그런 사치를 부렸기는 힘들다는 것이 중론이다. 오히려 커피를 먹었다면 싸구려 커피일 것이다. 이런 부분은 한국의 3대 커피 반열에 올리기 위한 사업적 마케팅이라는 설이 강하다. [22]많이들 언급되는 커피 떡밥으로 고흐의 편지를 언급하는데
계속 그림을 그리려면, 이곳 사람들과 함께하는 아침 식사에서 약간의 빵과 함께 마시는 커피 한 잔은 꼭 필요하다. 형편이 허락한다면, 야식으로 찻집에서 두 잔째의 커피를 마시고 약간의 빵을 먹거나 가방에 넣어둔 호밀 흑빵을 먹어도 좋겠지. (1권, pp.140-141)
테오에게 보낸 편지, 1885년 12월 28일
여기까지 보면 고흐가 호밀빵과 함께 커피를 즐겨 마셨다는 내용으로 볼 수도 있지만, 편지의 전체 내용을 보면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테오에게 보낸 편지, 1885년 12월 28일
상상하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내가 돈을 받을 때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무엇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비록 그동안 밥을 못 먹고 있었지만,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그림을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돈이 손에 들어오는 즉시 모델을 구하러 나가서는 돈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작업한다. 계속 그림을 그리려면, 이곳 사람들과 함께하는 아침 식사에서 약간의 빵과 함께 마시는 커피 한 잔은 꼭 필요하다. 형편이 허락한다면, 야식으로 찻집에서 두 잔째의 커피를 마시고 약간의 빵을 먹거나 가방에 넣어둔 호밀 흑빵을 먹어도 좋겠지. 그러나 모델이 떠나버리고 혼자 남게 되면 갑자기 나약한 감정이 나를 덮치곤 한다.
즉 고흐가 가장 원했던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며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그런 언급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닐 정도로 애용했던 호밀 흑빵을 먹는 것이 고흐를 가장 소통하고 이해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또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는 커피를 좋아해서 자신이 자주 애용하는 카페를 그렸다는 밤의 카페[23] 일화는 실제 편지 내용을 보면 고흐 입장에서는 카페라는 곳에 이미지가 부정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카페는 사람들이 자신을 파괴할 수 있고, 미칠 수도 있으며,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밤의 카페>를 통해 그런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다. 부드러운 분홍색을 핏빛 또는 와인빛 도는 붉은색과 대비해서, 또 부드러운 녹색과 베로네즈 녹색을 노란빛 도는 녹색과 거친 청록색과 대비해서, 평범한 선술집이 갖는 창백한 유황빛의 음울한 힘과 용광로 지옥 같은 분위기를 부각하려 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일본 회화 특유의 경쾌함을 담고 있다.
편지 677, 1888년 9월 9일[24]
편지 677, 1888년 9월 9일[24]
참고
7.2. 한국인 진품 소유 사건
고흐의 작품 중 <마차와 기차가 있는 풍경>의 진품을 한국인이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해 화제가 된 사건. 자세한 내용은 빈센트 반 고흐 진품 한국인 소유 사건 문서 참고.8. 대중매체에서
- 인기있는 화가인 만큼 많은 매체에서 다뤄진 미술가이기도 하다. 전기 영화도 몇 차례 만들어졌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영화를 꼽으라면 어빙 스톤(1903–1989)이 쓴 소설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원제:Lust for life)』를 영화화한 빈센트 미넬리(1903~1986)와 조지 쿠커(1899~1983) 감독(공식적으로는 미넬리 감독으로만 알려졌다.)의 열정의 랩소디(Lust for Life,1956)와 모리스 피알라의 반 고흐(1991)가 있다. 전자는 고흐의 생을 드라마틱하고 화려하게 그려냈다면, 후자는 그와 다르게 사실적이고 건조한 톤으로 그려냈다.
- 미국의 포크 가수 돈 매클레인은 1971년 고흐의 일대기를 읽고 그 해 고흐를 추모하는 곡 Vincent를 발표했다.[25] 이 곡은 그 해 UK 차트 1위를 차지했으며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100위 안에 반드시 들어가는 곡 중 하나다.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곡이지만 (영어라)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을 가사는 멜로디만큼이나 서정적이다.
- 스페인의 퓨전 라틴팝 그룹 라 오레하 데 반 고흐의 이름은 '반 고흐의 귀'라는 뜻이다. 2000년대와 2010년대에 이르러서는 라틴팝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 안정효의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보면 존 웨인은 고흐를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미쳐서 귀나 자른 정신병자라는 막말도 했거니와, 고흐를 다룬 영화 'Lust For LIfe(열정의 랩소디,감독-빈센트 미넬리. 1956년작)'에서 고흐 역으로 나온 커크 더글라스에게 "미치광이를 뭐하러 연기했나?"란 말까지 하여 더글러스나 고흐 매니아들에게 비난도 듣었다고 한다. 커크 더글러스는 고흐 역을 연기하고자 고흐에 대한 책을 무수히 읽어보고 정말로 내가 고흐가 되었다는 생각를 하며 명연기를 보여줘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받았던 만큼, 이런 비난이 대단히 불쾌했을 게 뻔했다. 또한 이 영화 Lust For Life에 고갱 역으로 출연하여 명연기를 보이며(화가인 퀸 역시 고갱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하고 타히티로 직접 가서 고갱의 흔적을 보는 등 그 또한 장난 아닌 노력을 하며 연기에 임했다.)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고 또한 화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였으며 고흐의 그림을 높게 평가하던 안소니 퀸은 이래서인지 존 웨인을 무척 싫어했다.
- <죠죠의 기묘한 모험> 6부에 등장하기도 했다.
- 듄 시리즈 후반부에 고흐의 <코르드빌의 오두막>이라는 작품이 등장한다. 익스의 기술로 보존되었다는 듯 하다. 작중 오드레이드가 이 그림이 자신의 인간성을 붙잡아 준다고 말했다.
- 고흐 특유의 화풍은 페인터 9.0부터 아티스트 브러쉬 중 하나로 들어갔다. 물론 제대로 재현하려면 나름대로 화풍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지만.
- 방탈출 게임 시리즈 <Rusty Lake 시리즈>의 컨셉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것이며, Cube Escape: Arles는 고흐를 주인공으로 하고 아를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에피소드이다.
- 2018년 개봉한 <고흐, 영원의 문에서>에서 윌렘 대포가 연기하였다.
- <Fate 시리즈>에서는 빈센트 반 고흐를 자칭하는 서번트가 등장했다. 반 고흐(Fate 시리즈) 참조.
- 1994년에 개봉한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빈센트(Vincent & Theo, 1990)>에서는 팀 로스가 고흐 역을 맡았다.
- 2019년에 출간된 작가 데보라 하일리그먼이 쓴 《빈센트 그리고 테오》라는 책이 있다.
- <명탐정 코난: 화염의 해바라기>에서도 고흐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대표작품들 중 하나인 '고흐의 해바라기'를 다루었다.
- 고흐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배경으로 적들과 싸우는 <Starry Knight>라는 게임이 있다.
- 미니어처 게임 <Warhammer 40000>의 등장인물인 말카도르가 빈센트 반고흐의 그림을 무척이나 좋아했으며 제일 아끼던 물건들중 하나가 고흐의 해바라기였다고 한다.이곳 세계관에선 사후 대강 3만년동안이나 본인의 그림이 보존되고 기억되었으니 고흐 입장에선 최고의 호사가 아닐가 싶다.
- 대체역사물 <이중제국의 문화천재>에서는 주인공 덕분에 운명이 바뀌게 되는데 주인공이 그의 그림을 사주면서 예술가 인생이 펴게 된 것. 그림이 팔리자 동생의 건의로 시작한 전시회와 파리 박람회에 출품한 그림이 대박이 터지며 생전에 인정받게 된 것. 그 결과 주인공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빈으로 오게 되고 그곳에서 구스타프 클림트 등 오스트리아의 예술가들과 교류하다 아예 새로운 협회를 차리게 된다.
- 고흐를 소재를 한 일본 만화가 발간되었는데 스토리가 21세기 현재 화가를 꿈꾸는 지망생인 주인공에게 어느날 어떤 계기로 영혼이 깃든 고흐의 유품을 만지자 고흐가 나타나서 주인공을 도와주는 조력자가 되고 그런 고흐와 같이 다니며 재능을 펼치는 전개를 다루고 있다.
- 2019년 12월 26일[26] <고흐, 영원의 문에서>[27]가 개봉했다. 주연으로 고흐 역할을 맡았던 윌렘 대포는 이 영화로 베니스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윌렘 대포는 고흐와 외모가 실제로 상당히 닮았을 뿐 아니라 이름인 '윌렘'도 겹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살면서 많은 걸 봤지만 이렇게 당신이랑 보는 세상만큼 멋진 세상은 없어요."
-11대 닥터
-11대 닥터
- <닥터후> 뉴 시즌 5 에피소드 10 'Vincent and the Doctor'의 메인 캐릭터로 출연한다. 리처드 커티스가 각본을 쓴 에피소드이며 배우는 토니 커런.
해당 에피소드는 시각을 속이는 외계생물 '크라페이스'를 유일하게 고흐만이 알아보고[28] 닥터와 에이미와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인데, 제작진이 고흐만의 독특한 색채 감각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극중에서도 고흐의 눈에 어떤 식으로 세상이 비치는지를 감각적으로 나타낸 장면과 함께 그에 대한 찬사가 나온다. 닥터는 이미 정해진 역사에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탓에 역사상 실존했던 유명인물들과 함께 여행하는 일은 거의 피하는데, 이번만은 고흐를 위해서 단 한 번 시간여행을 시켜준다. 그들이 간 곳은 2010년 파리 오르셰 미술관의 반 고흐 특별 전시회. 고흐는 미래의 사람들이 '반 고흐야말로 역사상 최고의 예술가'라 자신을 칭송하며 사랑한다는 것을 듣고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29] 드라마 속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고흐의 팬들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볼 만약 반 고흐가 자신의 미술이 인정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가정을 영상으로 보여주어 오랜만에 훈훈하고 따뜻한 에피소드가 나왔다.[30][31] 다만 이런 사실을 알았음에도 고흐는 37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나온다.
뉴 시즌 5 에피소드 12 처음에서 고흐가 꿈에서 온 시공으로 전파되는 정보[32]를 받고 정신 상태가 악화되어 타디스가 폭발하는 그림, '판도리카 열리다(The Pandorica Opens)'을 그리고 오열한다. 아마 닥터후 세계관에서 고흐가 더 오래 못 살고 자살한 원인은 이것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33] 그 그림은 1941년 영국의 윈스턴 처칠에게로 전해지고, 처칠은 그림을 닥터에게 보내는 메시지로 생각해 닥터와 통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타디스는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11화) 리버 송이 대신 전화를 받게 한다. 연락을 받은 리버는 탈출하여 리즈 10이 지키고 있는 52세기의 로열 콜렉션에서 그림을 가져와 서기 102년에서 클레오파트라로 변장하고 닥터를 기다린다. 고흐가 자신에 대한 미래의 평가를 알았으니 절망 속에서 자살하지 않고 더 많은 그림을 그렸을 거라며 잔뜩 기대한 채 오르셰 미술관으로 돌아온 에이미 폰드는 전시품과 큐레이터의 설명이 그대로인 걸 보고 "우린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면서 울먹이다가[34][35] "For Amy"라고 적힌 해바라기 그림을 보고 감격하며 고흐를 그리워한다. 에이미가 작중에서 고흐에게 해바라기를 좋아한다고 말한 것 때문에 고흐가 해바라기 그림을 에이미에게 헌정한 것으로 보인다.[36]
8.1. 뮤지컬
9. 외부 링크
[1] 본래 표기법은 판호흐이지만 관용 표기로 반고흐가 인정되었다.[2] 19세기 중후반 당시의 네덜란드 남성 평균 키가 164cm였음을 감안하면 그 시대에 170cm는 큰 키이다.[3] 과거 보조 목사 일을 했다.[4] 혼전 성은 '카르벤튀스(Carbentus)'[5] 고흐는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한때 목사가 될 목표로 신학교에 입학해 신학 공부를 했으며 벨기에 몬스 탄광으로 개신교 선교사로 파송되어 전도 사역을 하기도 하였다.[6] 위즈덤하우스에서 펴낸 한국어 번역인 반 고흐, 영혼의 편지에는 "나를 꿈꾸게 하는 밤하늘"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제목은 역자가 붙인 것이다. 링크에서 해당 부분의 원문은 'Mais toujours la vue des étoiles(고흐는 이 편지를 프랑스어로 작성하였다)', 영어 번역은 'But the sight of the stars always'로 시작한다.[7] 위즈덤하우스에서 펴낸 한국어 번역인 반 고흐, 영혼의 편지에는 "너의 짐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기를"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제목은 역자가 붙인 것이다. 링크에서 해당 부분의 원문은 'Le jour viendra cependant(고흐는 이 편지를 프랑스어로 작성하였다)', 영어 번역은 'The day will come, though'로 시작한다.[8] 실제 네덜란드어 발음은 자음동화로 인해 [vɑŋ ˈɣɔx\]에 가까우나 네덜란드어 표기법에서는 이를 반영하지 않고 표기한다.[9] 지리상으로는 독일에 위치하고 있지만 네덜란드와 붙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저지대 지역 도시들 중 하나이다.[10] 사실 '고호'라고 하는 것은 양반이고, 심지어는 그를 '반 고그\'라고 부른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고흐는 평생 자신을 '빈센트'라고 불러주기를 바랐다. '반 고흐'라고 하면 제대로 불러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 화가들은 완성한 그림에 성으로 서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고흐는 거의 '빈센트'로 서명했는데 그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11] 후자의 경우 'tough(/tʌf/)' 등에서 'gh'가 [f\]로 발음되는 경우를 적용한 듯.[12] 안톤 모베에게 배우던 시절이 있었지만 창녀인 시엔을 도우는 걸 두고 모베가 "자네는 타락했어."라고 한 뒤 교류가 끊겼다.[13] 실제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렘브란트가 일필휘지로 그림을 그린 것이 놀랍다고 말하기도 했다.[14] 현재는 Espace Van Gogh라는 이름의 문화센터로 변하였으며, 그림에 나와 있는 테라스와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5] 그 그림의 다른 버전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 중이다.[16] 참고로 사이토의 기업이었던 다이쇼와제지(大昭和製紙)는 그가 죽은 후 재정난에 빠져 다른 미술품들을 연이어 팔아야 했을 정도로 몰락했고, 결국 닛폰제지에 흡수합병되었다.[17] 이는 사이토가 죽자 세계적으로 논란이 되면서 엄청난 항의와 질문 끝에 유족들이 맹세한 것이다. 알다시피 일본은 고흐를 아끼고 연구를 많이 하며 소장도 많이 하고 있기에 그의 발언은 일본에서도 엄청나게 비난받았다. 심지어 사이토와 친한 다른 일본 재벌들에까지 개인적 자리에서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안 되죠. 인류문화유산을 겨우 장작으로 쓰신다고 하는 건 파렴치한 이기주의 아닙니까"라는 쓴소리까지 듣었다고 한다.[18] 일본은 최고 상속세율이 50%에 달해 선진국 중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19] 400 프랑에 팔렸는데, 당시로는 꽤 큰 금액이었다. 물론 현재 고흐의 그림가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단 고흐의 그림이 한 점만 팔렸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고흐가 알게 모르게 싼 값에 팔아 넘기기도 하고 밥 한끼 값으로 대신 지불한 그림도 많았기 때문에, 고흐의 전기작가들 가운데에는 "단 한 점"밖에 팔리지 않았다는 것을 허무맹랑한 전설로 치부하는 사람도 있다. 전술했듯 연필로 그린 드로잉은 10장 넘게 팔렸다고 한다. 뭐 돈 안되는 건 마찬가지지만.[20] 고흐는 예전부터 종종 '일반적으로 먹을 수 없는 것들'의 맛을 보곤 했다고 한다. 가난 때문에 먹은 게 아니라 마약 성분이 있는 압생트를 금지 당하자 금단 현상 때문에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소문 자체가 당대 프랑스의 와인 제조업자들이 당시 파리에서 희석식 소주 정도의 포지션이었던 압생트와의 가격경쟁에서 밀리자 퍼뜨렸다는 기록이 있다. 무엇보다 마약성분이라고 주장하는 쓴쑥에 들어있는 투존 성분은 흔히 알려져 있듯 환각과 정신착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물론 분명히 과도하게 음용했을 때 어지럼증, 발작, 혼수상태, 심하면 사망까지 이르게 할 수 있지만, 압생트만으로 이 정도로 다량의 투존을 섭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투존 성분이 들어간 쓴쑥 자체도 전 세계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베르무트나 빅스 베이포럽(코막힘 치료제) 등에도 여전히 쓰이고 있다. 또한 저 투존 성분의 부작용이라는 게 사실 보면 습관성 과음의 증상과 다를 것도 없다. 즉 압생트야말로 음모론의 희생자라는 이야기. 실제 압생트의 맛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향신료인 아니스이다.[21] ![파일:attachment/빈센트 반 고흐/목포반씨.jpg]()
현재는 수정되었다.[22] 예멘 내전으로 인하여 국가에서도 커피 원두를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를 안 하고 있어 저품질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으며 마타리라는 명칭은 커피 애호가 사이에서는 고품질 원두가 아닌 단지 베니마타르 지역에서 나온 원두라는 인식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 애초에 이런 이유로 예멘 모카 마타리 원두의 질은 좋지 않은 편인데 원두 크기도 다르고 색상도 다르며 인력 부족으로 전통 가공법으로 아직도 맷돌로 갈아서 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마타리에 특유의 복잡한 맛도 이런 크기, 색상, 저급등이 섞인 고르지 않은 원두로 인한 맛으로 이런 질 안 좋은 원두가 유통도 좋지 않아 가격도 올랐는데 이런 고흐 떡밥까지 포장해서 프리미엄이 되었다.[23] "밤의 카페 테라스"와는 다른 그림이다.[24] 위즈덤하우스에서 펴낸 한국어 번역인 반 고흐, 영혼의 편지에는 "파괴와 광기의 공간, 밤의 카페"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제목은 역자가 붙인 것이다. 링크에서 해당 부분의 원문은 Dans mon tableau du café de nuit (고흐는 이 편지를 프랑스어로 작성하였다), 영어 번역은 In my painting of the night café로 시작한다.[25] 책을 읽은 그날 밤, 너무나 가슴이 설레어서 잠을 이룰 수 없었고, 하룻밤 만에 이 노래를 완성했다고 한다.[26] 최초개봉일은 2018년 11월 16일 미국[27] 작품 《영원의 문, Sorrowing Old Man (At Eternity's Gate) (1890)》에서 제목을 붙였다.[28] 공감각에 가까운 톡특한 색채 감각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다는 설정.[29] 참고로 이를 해설하는 큐레이터는 빌 나이가 배역을 맡았다.[30] 실제로 고흐가 살아있을 때 팔렸던 그림은 단 한 점밖에 없었고, 모두 고흐가 죽고 난 뒤에 비로소 그 가치를 알아본 그림이다. 그것까지 생각하면 더 감동적인 장면인 셈.[31] 이러한 스토리(평범한 시간여행, 과거의 실존인물 등등) 덕분에 60년간의 설정으로 쌓여 입덕하기 힘든 닥터후를 일반인들에게 추천할 때, 입덕 에피소드로 자주 뽑힌다.[32] 아마도 시간의 틈과 같이 판도리카가 열리고 타디스가 폭발하는 것과 관계된 듯.[33] 어쩌면 꿈에서 전송된 정보들 중에서 에이미가 로마병사에게 살해당하는 순간을 보고 정신적인 충격을 배로 입어서 정신이 망가진 것일지도...[34] 추측이지만, 고흐가 원래 자살하는 원인이 에이미랑 닥터에 의해 타임 패러독스 때문에 인과적인 원인이 변경되었지만, 가변 역사와 불가변 역사의 법칙 때문에 판도리카가 꿈을 통해서 전송받은 미래의 정보를 보게 된 충격으로 정신붕괴로 인해 자살하는 것으로, 자살하게 되는 인과적인 원인이 우회적으로 교체되었다고 여길 수 있다.[35] 굳이 판도리카라는 먼 주제가 아니라도 평소에 자신을 멸시하는 주변의 반응에 비해 사후 자신이 유명해진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36] 시기상 저 그림 자체를 에이미를 위해서 그린 건 아니고 이미 그려둔 해바라기 그림을 에이미에게 선물한 것이다. 고흐가 '해바라기'를 그린 때가 '오베르의 교회'를 그린 때보다 2년 전이다.
현재는 수정되었다.[22] 예멘 내전으로 인하여 국가에서도 커피 원두를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를 안 하고 있어 저품질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으며 마타리라는 명칭은 커피 애호가 사이에서는 고품질 원두가 아닌 단지 베니마타르 지역에서 나온 원두라는 인식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 애초에 이런 이유로 예멘 모카 마타리 원두의 질은 좋지 않은 편인데 원두 크기도 다르고 색상도 다르며 인력 부족으로 전통 가공법으로 아직도 맷돌로 갈아서 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마타리에 특유의 복잡한 맛도 이런 크기, 색상, 저급등이 섞인 고르지 않은 원두로 인한 맛으로 이런 질 안 좋은 원두가 유통도 좋지 않아 가격도 올랐는데 이런 고흐 떡밥까지 포장해서 프리미엄이 되었다.[23] "밤의 카페 테라스"와는 다른 그림이다.[24] 위즈덤하우스에서 펴낸 한국어 번역인 반 고흐, 영혼의 편지에는 "파괴와 광기의 공간, 밤의 카페"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제목은 역자가 붙인 것이다. 링크에서 해당 부분의 원문은 Dans mon tableau du café de nuit (고흐는 이 편지를 프랑스어로 작성하였다), 영어 번역은 In my painting of the night café로 시작한다.[25] 책을 읽은 그날 밤, 너무나 가슴이 설레어서 잠을 이룰 수 없었고, 하룻밤 만에 이 노래를 완성했다고 한다.[26] 최초개봉일은 2018년 11월 16일 미국[27] 작품 《영원의 문, Sorrowing Old Man (At Eternity's Gate) (1890)》에서 제목을 붙였다.[28] 공감각에 가까운 톡특한 색채 감각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다는 설정.[29] 참고로 이를 해설하는 큐레이터는 빌 나이가 배역을 맡았다.[30] 실제로 고흐가 살아있을 때 팔렸던 그림은 단 한 점밖에 없었고, 모두 고흐가 죽고 난 뒤에 비로소 그 가치를 알아본 그림이다. 그것까지 생각하면 더 감동적인 장면인 셈.[31] 이러한 스토리(평범한 시간여행, 과거의 실존인물 등등) 덕분에 60년간의 설정으로 쌓여 입덕하기 힘든 닥터후를 일반인들에게 추천할 때, 입덕 에피소드로 자주 뽑힌다.[32] 아마도 시간의 틈과 같이 판도리카가 열리고 타디스가 폭발하는 것과 관계된 듯.[33] 어쩌면 꿈에서 전송된 정보들 중에서 에이미가 로마병사에게 살해당하는 순간을 보고 정신적인 충격을 배로 입어서 정신이 망가진 것일지도...[34] 추측이지만, 고흐가 원래 자살하는 원인이 에이미랑 닥터에 의해 타임 패러독스 때문에 인과적인 원인이 변경되었지만, 가변 역사와 불가변 역사의 법칙 때문에 판도리카가 꿈을 통해서 전송받은 미래의 정보를 보게 된 충격으로 정신붕괴로 인해 자살하는 것으로, 자살하게 되는 인과적인 원인이 우회적으로 교체되었다고 여길 수 있다.[35] 굳이 판도리카라는 먼 주제가 아니라도 평소에 자신을 멸시하는 주변의 반응에 비해 사후 자신이 유명해진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36] 시기상 저 그림 자체를 에이미를 위해서 그린 건 아니고 이미 그려둔 해바라기 그림을 에이미에게 선물한 것이다. 고흐가 '해바라기'를 그린 때가 '오베르의 교회'를 그린 때보다 2년 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