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01:29:17

반도 일본어설/근거 및 검증



1. 개요2. 지명에 대한 검증3. 고대 언어에 대한 검증
3.1. 진한어에 대한 검증3.2. 변한어가야어에 대한 검증
4. 고고학적 근거와 검증
4.1. 언어학계의 검증4.2. 고고학계의 검증
5. 수사에 대한 검증6. 기타 근거에 대한 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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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도 일본어설에 대한 근거와 이에 대한 학계의 검증에 대해 서술한 문서이다.

2. 지명에 대한 검증

반도 일본어설의 근거로 거론되는 것은 대부분 일반 명사나 수사, 지명이나 인명 등의 고유명사이다. 특히 역사학자 및 언어학자들은 경덕왕의 한화 정책 이전에 사용되었던 한반도 남부의 옛 지명들이 한국어보다는 일본어와 유사하다는 것을 강력한 근거로 들고 있다. 찬성론에서는 지명은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기에[1], 경덕왕이 바꾸기 전의 지명은 반도 일본어족이 지은 것이기에 일본어와 유사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化昌縣本知乃彌知縣景徳王改名
화창현은 본래 지내미지(tinəmiti)현이었는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西畿停本豆良彌知停景徳王改名
서기정은 본래 두량미지(turamiti)정이었는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單密縣本武冬彌知一云曷冬彌知景徳王改名
단밀현은 본래 무동미지(mutuŋ miti) 혹은 갈동미지(katuŋ miti)였는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道安縣本刀良縣景徳王改名
도안현은 본래 도량(tora)현이었는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위 기록들은 전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신라의 옛 지명들 중 일부이다. 경덕왕의 한화 정책 이전 본래 지명인 tinəmiti, turamiti, mutuŋ miti/katuŋ miti, tora는 한국어 지명이라고는 보기에는 어색하지만, 알렉산더 보빈은 이 지명들을 일본어로 쉽게 분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먼저 tinəmiti의 경우, 고대 일본어 속격 조사 -nö [nə], 고대 서부 일본어에서 ‘길’이라는 뜻의 mîti로부터 ti-nö mîti를 얻을 수 있다. 고대 서부 일본어 ti는 '피, 우유, 아버지, 힘'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며, 보빈은 tinəmiti의 의미는 고대 일본어로 '강한/견고한 길'라는 의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A]
  • turamiti의 경우, 고대 서부 일본어에서 tura는 ‘앞, 얼굴‘이라는 의미이며, mîti는 상술했듯이 ‘길'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turamiti의 의미는 고대 일본어로 ‘앞길에 있는 정’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추측했다.[A]
  • mutuŋ miti의 경우, 상술했듯이 miti는 고대 서부 일본어로 ’길‘이라는 뜻이다. 또한 고대 서부 일본어는 음절말 자음이 없었음을 염두에 두면, mutuŋ은 고대 서부 일본어 mutu '친밀한, 가까운'과 비교해볼 수 있다. 따라서 mutuŋ miti는 ‘은밀한 길’이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경덕왕이 지은 ’단밀(단지 은밀함)‘에도 일부 보존되어 있다고 추측했다. mutuŋ miti의 또다른 이름인 katuŋ miti의 경우, 고대 서부 일본어로 ’합치다‘라는 뜻의 ‘kate-’와[4] ’길‘을 의미하는 mîti로 번역할 수 있으며, ‘합쳐지는 길’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A]
  • tora의 경우, 고대 서부 일본어로 ‘호랑이’라는 뜻의 tôra로 쉽게 번역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A]

진한신라 외에도 변한가야계의 몇몇 소국들의 이름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이를테면 변한 및 가야의 소국 중에서는 미오야마(彌烏邪馬)사이기(斯二岐)라는 국가가 있다. 이 두 국가들의 국명은 한국어로 보기에는 상당히 낯설지만 일본어와는 괴리감이 없다는 점에서 근거로 쓰이고 있다. 특히 ’미오야마‘에서 일본어로 산을 뜻하는 ‘야마(やま, 山)’를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오야마(미오산)’라는 명칭을 일본 신화에 나오는 나라현에 위치한 ‘미와야마(미와산)’와 관련짓는 주장도 있다.[7]

다만 미오야마 국명 반도 일본어설에 대해서는 비판도 있다. 말 마(馬) 자는 주조마국처럼 다른 나라 이름에서도 이름 뒤에 붙는 사례가 있기 때문에 일종의 접미사로 보는 주장이다.[8] 미오야마국에서 마 자를 접미사로 보고 제외하면 ‘미오야국’이 되는데, 구야국이나 안야국에서 볼 수 있듯 삼국지 동이전에서 야(邪) 자로 끝나는 나라 이름은 여럿 존재한다. 그리고 만약 말 마 자가 접미사라면, '야마'를 세트로 묶어서 추정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부정된다. 또한 ‘미오야마’라는 말에서 가야의 또 다른 명칭인 ‘임나(미마나)’가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에서 더 나아가 일각에서는 ‘임나’의 음운에 중점을 두어 ‘미오야마’라는 명칭은 ‘미마야오(彌馬邪烏)’나 ‘미오마야(彌烏馬邪)’를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알렉산더 보빈은 탐라의 이름 역시 고대 일본어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탐라‘가 '타미(民 - 백성)'+'무라(村 - 마을)', 혹은 '타(田 - 밭)'+'무라(村 - 마을)'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즉 제주어가 탐라에 건너가기 전 제주도의 토착 국가로 추정되는 주호국의 토착어인 탐라어가 일본어족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탐라’에서 ‘타’가 ‘타(田)’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은 탐(耽)의 당시 한자음이 /*tom/이었음을 간과한 것으로서 신빙성이 떨어진다. 게다가 고대 일본에서는 '토라(度羅, トラ)'라는 명칭으로도 불려졌다는 상반되는 증거도 있다. 일본의 전통 궁중 음악 가가쿠(아악)의 탐라 음악도 이를 따라 '토라가쿠(度羅楽)'이다.

그러나 적어도 탐라의 뒷부분만큼은 보빈의 가설대로 반도 일본어족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수서》에서는 탐라를 탐모라(耽牟羅)라고 표기했는데, 여기서 모라(牟羅)라는 지명 요소는 《일본서기[9], 《양서[10], 〈울진 봉평리 신라비[11] 등 삼국시대의 각종 문헌에서 문증되며 《삼국지[12], 〈광개토대왕릉비[13], 《삼국사기[14]에도 비슷한 단어가 등장한다. 학자들은 이 단어를 보통 일본어무라(むら)와 연관지어 마을이라고 해석하는 편이다. 다만 이 어휘가 차용된 방향성은 알 수 없다. 반도 일본어파의 잔재일 수도 있으나 반대로 고대 한국어 어휘가 일본조어로 넘어갔다가 되려 한국어족에서는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그리고 위키낱말사전에 따르면 한국어 '무리(중세 한국어: 물)'과 관련짓는 견해도 있다.# 참고로 중세 한국어에서 'ᄆᆞᅀᆞᆶ(/*mʌzʌlh/)'이었던 현대 한국어의 '마을'과는 별개의 어원을 가진다.

또한 모라(牟羅)와 모로(牟盧)는 산(山)을 뜻할 가능성도 있는데, 그 근거로는 《일본서기》에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구례산(久禮山)이라고 표기되었다는 점, 모로비리국의 옛 땅이 신라에 편입된 후 고창군(高敞縣)이 되었다는 점,[15]용비어천가》에 피〮모로〮라는 산 이름이 나온 점 등이 있다. 그리고 고구려 지명 중 고구려어로 산을 뜻했던 달(達)이 들어간 경우가 많았듯이,[16] 산악지대가 많은 한반도 특성상 현대 대한민국이나 북한의 지명에도 山자가 들어간 곳은 매우 많다. 탐라가 위치했던 제주도야 한라산이라는 대표적인 산이 있다.

3. 고대 언어에 대한 검증

알렉산더 보빈은 상술했듯이 진한변한/가야에서 쓰이던 언어를 일본어족으로 보았다. 현재 남아 있는 변한어 사료는 존재하지 않지만,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후한서, 양서 등의 사서에는 진한어 자료가 일부 남아있다. 기록에 의하면 진한과 변한은 언어가 같다고 했으므로, 진한어가 일본어족임이 입증되면 자연스럽게 변한어 또한 일본어족이 된다. 아래 문단에서는 고대 한반도 국가 중 진한 및 변한의 언어에 대한 검증을 다룬다.

3.1. 진한어에 대한 검증

알렉산더 보빈은 초기 진한에서 쓰였던 언어를 일본어족에 속한 언어로 보았고, 북쪽에서 내려온 한국어족 계통의 집단이 사로국을 건국함에 따라 진한 지역이 한화(韓化)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이 설에 따르면 초기 진한어는 일본어족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국어족인 신라어로 언어가 대체되었다는 것이다.[17] 이에 대한 근거로 보빈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후한서, 양서에 제시되어 있는 진한의 언어를 들었는데, 그는 남아 있는 진한어 텍스트가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혼재되어 있다면서, 이는 본래 일본어족 언어를 쓰던 진한 지역이 한화되는 과정, 즉 과도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 사서들에는 신라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진한은 중국 방면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라고 하고, 언어 관련해서도 중국과의 언어적 관련성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가며 주로 설명하지, 일본어 계통과 관련 있다고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보빈도 이에 대해 중국 사서에 적힌 진한어들은 중국어처럼 보인다고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중국어처럼 보이는' 진한어들을 제대로 재구하고 어원을 밝혀내면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혼재된 결과가 나온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실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온 진한어의 예시와 보빈의 분석이다.
東方人名我爲阿
동방 사람들은 ‘나’라는 말을 아(阿, *ʔa)라 한다.
名國爲邦
나라를 방(邦, *pæwŋ)이라 한다.
賊爲寇
도적을 구(寇, *kus)라 한다.
相呼爲徒
서로 부르는 것을 도(徒, *da)라 한다.
  • 진한어로 ‘나’를 ‘아(ʔa)’라고 한다는 점에서, 1인칭 단수 대명사 *a(阿, 상고 한어 및 전기 중고 한어 *ʔa)를 얻을 수 있다. 보빈은 이를 중세 한국어에서의 1인칭 단수 대명사인 na와는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아, 진한어의 1인칭 단수 대명사 ‘아’의 어원을 일본어족에서 찾았다. 일본조어에서 ‘나’를 의미하는 *a, 고대 서부 일본어의 a, 고대 동부 일본어의 a, 고대 류큐어의 a, 세소코어의 'a, 요나구니어의 'anu에서 볼 수 있듯 고대 일본어족에서 1인칭 단수 대명사는 '아'였다. 이로써 보빈은 진한 일본어 *a '나'를 재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B]
  • 진한어로 나라를 방(*pæwŋ)이라고 한다는 점에서, 언어학자인 고노 로쿠로는 한고조 유방을 피휘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그러나 보빈은 고노의 주장이 틀렸다고 주장하고 邦(*pæwŋ)이라는 글자를 열도 일본어에서 기대되는 마지막 자음 탈락이 나타난 형태인 ‘근처, 장소’라는 뜻의 고대 서부 일본어 pê, '-의 쪽'이라는 뜻인 고대 동부 일본어 ‘-N-pï’와 비슷한 일본어 낱말을 적은 것으로 추측했다. 이와 동계어로는 '하늘 꼭대기(구름-쪽-꼭대기)'라는 뜻인 kumo-fe-tithe에서 나타나는 ’쪽‘이라는 뜻의 고대 류큐어 ‘-fe’가 있다고 보았다. 이 낱말이 때때로 류큐조어 *e를 보존하고 있는 고대 류큐어에서 문증되므로 확실히 동계어로 보았으나, 다른 류큐 방언에서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일본 본토로부터 차용된 말일 수도 있다고 보았다. 이로써 보빈은 진한 일본어 *pe(ŋ) '나라'를 재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B]
  • 진한어로 도적을 구(寇, *kus)라고 한다는 점에서, 보빈은 賊과 寇의 대립에는 어떠한 개별 방언적·지리적 특성도 없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보빈은 *kus라는 진한어 낱말을 중국 사서에서 한자로 준훈차한 것으로 보았으며, 이에 대한 어원으로 중세 일본어로 ‘무례한 부류, 범죄, 사기꾼, 불의’를 의미하는 kuse에서 찾았다. 이를 통해 보빈은 진한 일본어 *kus '도적'을 재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B]
  • 진한어로 서로를 '도(徒, *da)'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진한인들이 제자백가 사상에 심취해서 서로를 '제자님(徒)'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 때문에 이는 2인칭 단수 대명사인 '너'를 음차한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중세 한국어 ne와는 전혀 맞지 않기에, 보빈은 '*da'의 어원을 일본어족에서 찾았다. 일본어족의 류큐어 분지에서 2인칭 단수 대명사 '너'는 하테루마어 daa, 요나구니어 Ndaa, 시토이어 daa로, 진한어에서의 2인칭 단수 대명사 *da와 매우 유사하다. 이 낱말은 류큐어에서도 널리 퍼지지 못했지만, 남류큐어와 북류큐어에서 모두 발견된다는 사실에서 보빈은 류큐조어에 이 날말이 존재했을 것이라 추측했다.[21] 하테루마어 daa, 요나구니어 Ndaa, 시토이어 daa에서 류큐조어의 2인칭 단수 대명사인 *Ndaa를 재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보빈은 선(先)비음화된 *Nd-를 한자로 적을 때 *d-로 전사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3세기 중국어에는 선비음화 파열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보빈은 진한 일본어 *da '너'를 재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B]

상기된 예시 외에도 보빈이 같은 방식으로 진한어를 재구한 결과, 진한어 낱말에는 일본어와 한국어가 섞였다고 주장했다. 재구한 결과에 따르면 진한어에서 나타나는 일본어계 낱말은 인칭 대명사, 중요하지 않은 기초어휘, 문화어휘이고, 한국어계 낱말은 형태론적 표지 하나를 포함하여 중요하지 않은 기초어휘와 문화어휘이다.

어족을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인 인칭대명사가 일본어족 계통으로 나타났다는 점을 들어, 보빈은 원래 진한 지역의 토착 언어는 일본어족이었으나, 한국어족이 침입해 일본어족과 한국어족이 혼재되어 쓰이던 시기의 언어가 바로 진한어이고, 이후 진한 지역을 완전히 정복한 신라에 의해 완벽하게 한화되었다고 주장했다.[B] 또한 마한의 왕이 진한까지 전부 지배하였다는 기록도 있기에, 보빈은 한국어족 사용자인 마한 지배자들이 진한 지역의 일본어족 사용자들을 동화시켜 한국어족의 영역으로 만들었다고 여겼다.

반면 보빈은 양서에 제시된 7세기 신라어 낱말을 분석해도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혼재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 가능성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신라가 7세기까지 양층 언어 국가였다는 것과, 두 번째는 일본어족이 기층 언어가 되어 한국어족에 남았다는 것이다.

첫 번째 가능성과 관련하여 신라어를 반도 일본어와 연관짓는 주장도 간혹 나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도자 칭호들이 반도 일본어족의 흔적이 있다고 보는 경우가 있다. 거서간, 이사금, 매금 같은 칭호조차도 일본어와 연관짓는 가설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신라인 혹은 백제인과 왜인이 말이 통하지 않는다거나 통역[24]이 필요하다는 문헌 근거가 굉장히 많이 남아있다.

현재 해석할 수 있는 신라어 텍스트로 향가가 전하는데, 향가를 해석한 결과 향가의 언어는 일본어족이 아닌 한국어족에 속했다. 신라가 양층 언어 국가였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최소한 신라의 주류 언어는 고대 한국어 계통일 가능성이 높고, 반도 일본어와 연관시키기는 어렵다. <일본서기1>, <일본서기2>,[25] <일본후기>, <입당구법순례행기1>, <입당구법순례행기2> 그렇기에 보빈은 두 번째 가능성에 더 주목하였다.[B]

다만 알렉산더 보빈은 적어도 7세기까지는 일본어족 계통 언어가 한반도 남부에서 쓰이고 있었다고 추측했는데, 경주지역은 이미 기원전 1세기 이후로는 재래의 검단리 문화가 소멸하고 와질토기 문화권으로 통합되었다는 사실[27]과는 배치된다. 이후 성립된 사로국은 후대의 통일 신라까지 별다른 단절이나 변혁 없이 6부라는 지배층이 쭉 이어진 정치체임이 고고학적으로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렇기에 신라가 시대별로 언어가 어족 단위로 달라졌으리라 상정하기 어렵다. 또 마찬가지로 기원전 시기 경주 지역의 주민 계통이 비교적 중층적이라는 사실은 인정받지만, 기원후에 사로국-신라 사회는 와질토기 문화권으로 동질적인 물질문화를 이루고 양층언어 사회로 볼 만한 근거는 찾기 어렵다.[28]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가능성은 총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반도 일본어설이 참이라는 가정 하에, 사로국 권역을 제외한 나머지 진한의 지역에서는 여전히 반도 일본어가 쓰였지만, 사로국이 권역을 넓혀가면서 한국어족을 진한 지역에 보다 빨리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즉 7세기 무렵부터 반도 일본어는 일부 시골의 장노년 계층에서만 간혹 쓰이는 언어로 전락했다는 가능성이다.[29] 두 번째는 반도 일본어설이 참이라는 가정 하에, 사로국 건국 시기쯤, 즉 보빈의 추측보다 훨씬 더 빨리 한반도 전역이 한국어족 사용 지역으로 모조리 동화되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반도 일본어설이 거짓이라는 가정 하에, 한반도에서 일본어족 계열의 언어는 쓰였던 적은 없으며, 한반도 전역이 원래부터 한국어족의 권역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위 세 가지는 전부 심증에 기반한 추측일 뿐이고, 자료가 부족하여 결정적인 물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3.2. 변한어가야어에 대한 검증

기록에 따르면 진한변한은 언어, 의식주, 법속이 전부 같다고 한다. 만약 위의 초기 진한어가 일본어족 계열이라는 것이 확실시 된다면, 진한과 언어가 같다는 변한도 자연스럽게 일본어족이 된다.[30] 이에 따라 변한의 후신인 가야의 언어에도 자연스럽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대체로 반도 일본어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변한 대까지는 일본어족이 사용되었고, 이는 초기 가야 시절까지 이어지다가 중후기로 들어가면서 한화되었다고 본다. 진한어의 텍스트가 꽤 있는 것과는 달리, 이를 검증하기 위한 가야어 자료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다음이 전부이다.
加羅語謂門為梁云
가야어에서는 '문(門)'을 '양(梁)'이라 이른다.

량>양은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고 실제 梁이 표기하는 발음은 '돌(twol)'인데 고일본어에서 문을 의미하는 '토(と; 戶)'와는 음운이 굉장히 유사하다. 이는 가야어-일본어 간의 관계를 추측하는 하나의 지표로서 여겨졌다. 하지만 ‘울돌목’, ‘돌쩌귀’ 등 순우리말에 문을 돌로 지칭하는 표현이 남아있는 것을 볼 때, 고한국어에서도 원래 돌이나 그 비슷한 발음으로 발음했으나 한자어 ‘문’으로 대체되었으며, 가야어가 한국어족 언어들 중에서 예외적으로 대체가 일어나지 않았거나 늦게 대체되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즉, ‘문’을 의미하는 ‘돌/토’는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공유했던 어휘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석봉천자문에는 문의 순우리말을 '오래'라고 기술한 것으로 보아, ‘울돌목’이나 ‘돌쩌귀’에서 ‘문’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돌’은 단순히 가야어의 잔재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 기록을 보면 고대 일본어를 가야에서 사용된 고대한어(韓語)와 구분짓고, 가야어를 한어(韓語)라고 기록하는 등의 에피소드를 보면 당대에도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한 듯하다. 예를 들면 가야를 능욕하기 위해 작성된 기사로 보이는 가야의 지배층의 아녀자들이 임나일본부의 왜국측 인사들을 성적으로 유혹하기 위해 ‘너의 뿌리를 나의 뿌리에 넣어라’라고 발언한 기사가 있는데 거기서 임나일본부측 왜국 인사는 아녀자들이 하는 고대 가야어를 알아듣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반도일본어설은 엄격한 사료검증을 요한다. 예시

4. 고고학적 근거와 검증

반도 일본어설을 주장하는 언어학 연구자들은 이를 방증하는 여러가지 고고학적 증거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고고학계의 해석은 다른 경우가 많고, 때로는 근래의 고고학계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낡은 학설에 근거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31] 물론 고고학적인 물질 문화 양상이 언어, 어족과 같은 관념 문화의 양상을 온전히 반영할 수는 없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언어학적 추론을 무시한 채 오로지 고고학적인 관점으로 해석한 내용을 토대로 반도 일본어 가설을 완전히 틀린 것으로 배척하기도 어렵다는 것은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고학적 관점 및 분석을 무시한 채 언어학적 추론만을 가지고 어족과 인간집단의 이동이라고 하는 거대한 역사적인 사건을 재구성하는 것 역시 어렵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현재 나타난 고고학적 자료들은 반도 일본어설만을 유일하게 옳은 언어학적 가설로 확증지을 만한 논거를 제시해주지 않으며, 동시에 반도 일본어설이 거짓임을 확증지을 만한 논거를 제시해주지 않는다. 즉 아래 문단에서 제시되어 있는 이러한 고고학적 자료들을 반도 일본어설을 입론 및 반론하는 근거로서 사용하는 것에는 부당한 측면이 존재한다. 이는 반도 일본어설을 입증 및 반론하기 위해서는 고고학계와 언어학계의 적극적인 상호 보완 연구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4.1. 언어학계의 검증

반도 일본어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 집단들이 반도 일본어를 사용한 집단이라고 본다. 이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알렉산더 보빈과 존 휘트먼(John Whitman)이 있다. 휘트먼은 기원전 1,500년경, 요동반도에서 한반도로 논농사가 도입되면서 일본어족이 들어왔다고 본다. 이후 기원전 300년경,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침입하면서 수많은 유이민들이 발생하였고, 이들이 한반도로 이주하면서 한국어족이 들어왔다고 주장한다. 특히 일본어족의 경우 논농사를 기반으로 해서 한반도 남부지방으로 빠르게 확산되었고, 기원전 300년경 이들 집단이 일본 규슈 지방으로 이주하면서 일본 열도로 일본어족이 확산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반도 일본어의 경우 기원전 300년경에 유입된 한국어족으로 인해 점점 소멸되어갔다고 주장했다.

휘트먼은 이러한 원시 일본어족 문화의 지표 유물을 민무늬 토기로 보고 있다.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간 야요이인들의 문화는 대체로 송국리식 토기의 유적 문화와 일치하는데, 송국리식 토기는 이 민무늬 토기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어족의 문화는 십이대영자 문화로 대표되는 이중구연토기, 점토대토기가 지배적으로, 민무늬 토기와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실제로 송국리 문화를 영유하던 집단은 일부가 일본열도로 직접 이주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당시 한반도에 살던 주민이 일본 열도로 이주했다는 사실 자체는 유전학적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Cis-AB형의 존재가 있는데, 이 혈액형은 침미다례의 지역이었던 전라남도의 남쪽과 일부 변한 지역, 그리고 일본 규슈에서만 발견되는 희귀 혈액형이다. 침미다례의 고고학적 계통은 서해안 토돈분구묘 + 위만조선계의 예맥 + 송국리 문화 유형인 계열 세력의 융합인데, 이를 근거로 송국리 문화 유형인들의 Cis-AB형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알렉산더 보빈은 상술했듯이 마한진한변한보다 일찍 한화되었다고 주장했는데, 이 또한 고고학적 증거가 존재한다. 보빈은 한국어족 집단들은 비파형 동검세형 동검으로 대표되는 북방 세력이라고 보았는데, 진국 지역 일대에서 세형 동검이 가장 먼저 등장한 지역은 준왕이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마한 건마국 부근, 즉 금강 유역이었다.# 즉 이는 준왕의 마한 정복 전승과도 통하지만 실제로 이는 서기전 300년경의 일로, 위만의 쿠데타보다 100년 정도 앞선다. 다만 기원전 300년은 상술했듯 고조선이 연나라에게 패하여 중심지가 심양에서 평양으로 이동한 시기와 일치하는데, 즉 기존 준왕의 전승보다 더 빨리 한국어족이 한반도에 유입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4.2. 고고학계의 검증

언어학계에서 반도 일본어설 입론의 근거로서 이와 같은 물질 문화의 변화상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고고학계에서는 이러한 물질 문화의 변화를 토대로 언어와 같은 관념 문화, 그리고 실제의 혈통 변화를 해석하는 데에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현재 고고학계에서는 앞서 제시된 휘트먼의 가설과는 달리, 기원전 5-4세기 이후 점토대토기문화의 확산을 단순한 이주나 주민교체설의 견지에서 설명하지 않는다. 고고학계는 이를 비교적 소규모의 이주민과 토착민 간의 활발한 교류 및 융화의 관점에서 설명하거나, 전기 청동기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온 요동지역 청동기 문화 네트워크 사이의 교류의 결과로 해석하고 있다.[32] 특히 알렉산더 보빈이 제시하는 '무기와 전술이 우월한 북방의 기마민족 내지 수렵민남방의 농경민족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지배했다'는 식의 자극적인 주장[33]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상호 간의 호혜적인 교류 속에 점진적으로 통합되어갔음을 시사하고 있다.[34] 한편 강원 지역에서는 점토대토기 문화가 기원전 4세기부터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는 종래의 민무늬 토기와 병존하다가 새로운 철기문화로 모두 흡수되기 때문에 딱히 점토대토기 문화가 지배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도 없으며,[35] 이 지역에서 한국어족이 정착한 과정은 단순히 '점토대토기 문화 집단'의 이주 이외의 다른 부가적인 요인을 통해 해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상기한 논의는 민무늬 토기와 점토대토기와 같은 몇 가지 표지 유물만을 가지고 어족과 집단의 이주를 단순화해서 이해하는 반도 일본어 가설의 입장과, 새로운 문화의 출현을 이주 뿐만 아니라 교류 및 전파, 융합과 같은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는 주류 고고학적인 견해들 사이에 적지 않은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물론 물질 문화의 변화 양상을 통해 해석된 상기의 논의들이 관념 문화의 변화까지 온전히 포괄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것이 반도 일본어설이 거짓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극단적인 수준의 대규모 주민 교체는 없었을지언정 비교적 소규모 수준의 고조선 계통 주민들의 집단적 이주는 어느정도 존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또 이들이 지역적인 교역망을 주도함에 따라 이들의 언어인 한국어족이 점차 지배적인 언어로 부상했을 가능성 역시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반도 중남부에서 청동기 시대 말기에서 원삼국 시대 사이에 어떤 집단이 대규모로 이동했다고 상정할 수 있을 만큼의 극적인 변화는 나타나지 않고 있는 이 무렵의 고고학 자료들을, 외래인의 대규모 이주로 말미암아 어족이 비교적 단시간에 극적으로 변했다는 반도 일본어 가설을 결정적으로 확증할만한 근거로 사용하기는 어려워보인다는 점은 분명하다. 확실한 것은, 반도 일본어설의 찬성론자들이 이 무렵의 일본어족 집단으로 가정하는 한반도 중남부 토착민들은 단순히 이러한 외래 문화를 일방적으로 수용하거나 이들에 흡수되는 입장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적극적으로 외래 문화를 수용하고, 다른 집단과 교섭하면서 토착문화와 외래문화가 융합된 새로운 문화를 창출시킨 주역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36] 즉 일본어족 토착민이 일부 기층 어휘만을 남기고 외래의 한국어족 집단에 흡수 및 소멸한 것으로 가정하는 반도 일본어설의 기존 주장과는 다소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37][38]

이와 같은 고고자료의 양상은, 외래 한국어족에 의한 토착 일본어족 집단의 대체라고 하는 반도 일본어 가설에 부분적으로 개연성을 제공할 여지는 있으나, 이러한 자료를 반대되는 가설[39]을 배척하는 논리로 이용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40] 또한 고고자료 상 점토대토기 문화 집단을 한국어족으로, 토착민을 일본어족으로 규정하는 논리는 고고학적 해석을 통해서는 도출하기 어려운 많은 비약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한편, 반도 일본어설을 지지하는 이들 중 일부는 '송국리문화가 한국어족 도래 이전에 이미 기후문제로 쇠락해 있었으며, 따라서 한국어족 계통 이주민들이 자연스럽게 토착 송국리문화를 대체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고고학계에서도 기원전 7-6세기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한 송국리문화가 기원전 6-5세기에 걸쳐 불상의 이유로 크게 쇠락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한다. 하지만 이는 송국리유적, 관창리유적, 진주 대평리 유적과 같은 그 당시 송국리 사회에서 각 지역별 최상위 취락의 역할을 담당했던 대형취락이 해체되거나 축소된 사실에 대한 담론일 뿐이다. 실상은 이주민에 의한 재편론을 지지하는 조진선조차도 변, 진한사회의 기층에 송국리문화와 검단리문화가 자리잡고 있음을 인정하며, 세형동검문화 계통의 취락을 극소수인 데에 반해 다수의 송국리형-검단리유형 취락들이 잔존해 있었다고 보고 이들의 흔적은 기원전 1세기 와질토기문화가 성립할 무렵까지 지속되었다고 본다.[41] 뿐만 아니라 2010년대 이후 대다수의 고고학자들 모두 점토대토기문화가 유입된 이후에도 송국리계통 취락이 잔존하고 있었다고 보며, 이미 앞서 언급했듯 소수의 점토대토기 계통 이주민과 다수의 송국리문화계통 주민들이 결합하여 양자의 문화가 혼합된 다수의 복합취락을 형성했다고 보고 있다. 다시말해 송국리문화는 기원전 6-5세기에 걸쳐 기후변화 및 점증하는 사회적 갈등으로 말미암아 상당부분 정치적 혼란을 겪은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갑작스레 해당 문화를 영위하던 주민들이 증발하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다.

물론 2000년대 이전의 고고학계에서는 연나라 진개의 동정이나 준왕의 남정과 같은 문헌기록을 고고자료와 연결시키는 데에 과도하게 집착했던 나머지, 마치 송국리문화 자체가 기원전 대략 기원전 4세기 무렵의 거점취락의 해체와 동시에 사라지고, 세형동검을 공반한 점토대토기문화가 이를 대체했다는 단절론적 입장이 우세했던 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점토대토기문화 주민교체론'에 해당하며, 세형 동검의 전래를 언어교체의 계기로 보는 휘트먼의 가설이 대체로 이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이청규가 세형 동검과 점토대토기의 출현 연대를 서로 상이하게 보는 것을 시작으로[42] 이러한 단절론의 근거가 되는 문헌중심적 편년연대론이 공격받기 시작했으며, 2010년대 이후 이창희 등에 의해 문헌기록과 무관한 유물의 자체적인 새로운 편년안이 정립되면서[43] 고고학계에서는 '송국리문화가 이미 쇠락하기 이전 단계에도 점토대토기를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있었으며, 한반도 중남부에서의 세형 동검의 유입은 점토대토기문화의 출현보다 늦다'는 견해를 대체로 수긍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이미 송국리 사회는 최초의 점토대토기문화의 출현시점부터 적극적으로 이러한 외래 문화를 수용하고 이주민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매우 점진적으로 점토대토기와 세형동검과 같은 초기철기문화의 문화요소들이 성립하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며, 주민교체론과 같은 극단적인 단절론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또 앞서 언급했듯, 애당초 이러한 점토대토기문화 계통 이주민들의 취락이 취락이 매우 소수인데다가 소규모라는 점도 이러한 단절론을 배격하는 한 가지 근거가 되었다. 애당초 이들 이주민들의 흔적은 매우 열세하여 입지상 충분한 가경지조차도 확보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상황에서[44] 도대체 무슨 수로 이들 소수의 이주민들이 다수의 토착민들을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단 말인가?[45]

뿐만 아니라 세형 동검과 점토대토기문화가 이주민에 의해 동시에 확산되었다고 보는 문헌중심적 연대관에는 또 하나의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이에 근거해서는 세형 동검이 보다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호서 및 호남서부지역에는 세형 동검과 공반하는 생활유적 자체가 거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동시기에 원형점토대토기문화의 단일 마을유적이 나타나는 곳은 송국리문화가 확산되지 않았거나, 중심지에서 크게 떨어져 있어서 송국리문화가 크게 우세하지 않은 지역들이 대부분인데, 오히려 해당 지역에서는 세형동검이 거의 출토되지 않는다. 결국 이에 따르면 송국리문화를 대체하고 들어섰다는 점토대토기문화 계통 이주민들은 호서 및 호남서부 지역에 분묘와 위세품만 두고 생활유적을 건설하지 않았으며, 정작 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 지역에서는 세형동검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기이하고 모순된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이는 구(舊)연대관에서 송국리문화가 점토대토기-세형동검 문화에 의해 일괄 대체되는 것으로 가정하여, 점토대토기가 공반되지 않는 순수한 송국리형 취락을 일괄적으로 기원전 4-3세기 이전으로 편년한 데에서 기인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김장석은 이러한 편년관에 반대하여, 적어도 호서지역 및 호남서부 일대에 한해서라도 송국리문화 종말기의 연대를 기원전 2세기 중후엽까지 내려 볼 것을 제안한다. 이에 따르면 송국리형 취락들은 세형동검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기원전 4-3세기 무렵에 존속하고 있었으며, 해당 지역에서 분묘에 세형동검을 부장하던 영위하던 권력자들은 주로 송국리문화 계통의 취락들을 기층으로 거느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김장석은 피난민에 불과한 점토대토기문화 계통의 유이민들이[46] 토착 송국리사회를 압도하고 재지 문화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고있는데, 이들이 부분적으로 재지 송국리문화사회의 지배층에 편입되었을 수는 있을지라도, 세형동검을 수용한 것은 어디까지나 재지계통 지배층의 선택의 결과로 해석한다. 다시말해 세형동검의 유입은 어디까지나 재지 송국리문화 계통 주민들의 선택의 결과에 가까우며, 세형 동검의 유입으로 송국리문화가 종말한다는 것은 편년 오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47] 그렇다면 세형동검을 점토대토기문화와 결부시키고, 이를 외래의 한국어족의 유입 및 토착언어 대체의 근거로 보았던 휘트먼의 가설은 그 기초부터 무너지게 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천선행 역시 원삼국시대 한(韓) 문화를 세형동검 및 점토대토기와 같은 외래계 문화로 간주하는 통설에 반대한다. 특히 근래에 들어 송국리문화 및 점토대토기문화의 접변 사례에 대한 보고가 늘어나고 있어 분구묘와 같이 과거에 송국리문화와 초기철기문화 간 단절이라고 생각했던 요소들이 실은 상당부분 연속적이고 점진적인 변화의 결과로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 문화를 재지 토착민과 단절된 문화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천성행의 경우에는 문헌기록 상 준왕의 남래 자체는 사실로 인정하지만,[48] 재지 문화는 묘제와 토기 제작기법 등에 계승되어 오히려 연속적인 측면이 강했기 때문에 토착민의 문화가 외래문화와 공존, 화합하면서 지속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49]

이러한 논의들을 토대로 볼 때, 고고학계에서는 송국리문화 이후 외래민들의 이주나 그들이 좀 더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는 연구자들 중에서도 '송국리문화가 일괄적으로 해체되거나 일시에 사라졌으며, 일방적으로 외래민들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고 보는 논자는 거의 없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서 초기철기시대, 그리고 원삼국시대로 물질문화가 변화하는 과정은 다양한 계통의 외래문화의 지속적인 유입으로 말미암아 점진적이고 지속적으로 변화한 것이지 특정한 단절론적 획기에 의해 변화한 것이 아님이 고고자료가 축적될수록 보다 더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근래에 들어서는 그러한 변화 과정의 연속적인 측면 역시 보다 더 세밀하게 재구성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문화 접변이 그다지 무력 정복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볼만한 근거도 없고, 오히려 토착사회가 적극적으로 외래 물질문화를 수용하는 양상으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오히려 일부의 새로운 묘제형식이 추가된다던가, 세형동검이나 일부 토기제작양식이 외부에서 유입된 데에 반해, 생계경제 양상이나 수단, 생활주거 양식 등은 거의 변하지 않고 재래의 요소가 연속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과연 세형동검이나 점토대토기와 같은 새로운 문화요소가 토착민의 언어를 대체할만한 계기일 수 있는가에 대하여, 나아가 굳이 해당 요소를 언어 교체의 계기로 지목해야만 하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지에 대해 반문해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외래에서의 새로운 문화요소의 유입이나 소규모 이주민이 있었을 가능성 자체를 전면적인 언어교체의 계기로 볼 근거는 없기 때문에, 앞선 단락에서 언급된 휘트먼의 가설은 고고학적으로는 전혀 증명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 한편, 반도 일본어족 가설의 주장대로라면, 당시 중국 동북지역 및 한반도 중, 북부에 있던 수렵민 성향이 강한 '한국어족' 계통의 주민집단과, 한반도 중남부 농경민들을 중심으로 한 '일본어족' 계통의 주민집단이 적어도 특정 시점에는 서로 어족 수준의 언어의 차이가 분명히 나타날만큼 이질적인 집단으로서 병존해야만 한다.[50] 물론 물질 문화의 양상이 언어, 어족과 같은 관념문화를 온전히 반영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고고학적 사료를 통해서는 물질 문화 집단을 확연하게 두 개의 이질적인 집단으로 구별할 만한 실마리는 그다지 나타나 있지 않다.

예를 들면 기원전후부터 다양한 문화권이 병존하는 요서-요동-서북한-압록강-두만강 유역의 광대한 영역의 문화집단들은 이들을 단일한 '북방세력' 내지 '북방문화'로 단순화할 수 있을만큼 동질적이지도 않았다. 예컨대 부여계 문화를 대표하는 서단산문화나 고구려 계통 문화도 유사한 점이 있으면서도 묘제나 여타 문화요소가 분명히 차이가 나며, 이들은 다시 원삼국 시대 이후 강원지역의 예계 문화권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와도 상당한 차이점을 보인다. 흔히 후대의 문헌기록을 과도하게 소급 적용하여 이들을 '예맥계 종족'이라고 단순화하는 경향도 분명히 학계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실상 이들은 삼국시대 이전에 어떤 통일된 종족집단이나 물질문화를 이루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51] 또한 북방 문화는 반대로 한반도 중남부의 청동기 문화 집단과 아주 격절적으로 문화적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이들은 같은 요령식 비파형 동검 문화권에 속해 오히려 긴밀히 교류하는 관계였다는 점도 분명히 주지해야 한다. 오히려 송국리 문화가 확산된 한반도 중서부 일대는 해로를 통해 서북한 및 요동집단과 밀접하게 교류했던 경향 역시 존재한다.[52][53]

한편, 청동기 시대 조기부터 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중남부는 이미 이러한 다양한 계통의 북방 문화의 영향을 받고 수용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이러한 영향으로 청동기 시대 조기-전기부터 다양한 문화 조합상이 한반도 중남부에 나타났다.[54] 이후 청동기 시대 중기 혹은 후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문화권이 생업양상별로 통합되어, 대략 울산-경기 중부를 가르는 축선으로 송국리 문화권과 비송국리 문화권이 구별될만큼 한반도 민무늬 토기 문화권도 역시 그다지 동질적이지 않았다.[55] 물론 이들 역시 서로 간의 무조건적인 긴장관계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경주, 부산 등 동남부 일대에는 이들 사이의 점이지대가 비교적 광범위하게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야요이 문화의 초기 기원 중 하나로 지목되는 곳이 이 지역으로, 송국리 문화를 일부 수용했으나 청동기 시대 전기 이래의 잔존 요소가 상당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 초기 야요이 유적에서도 마찬가지로 송국리 문화에서는 이미 소멸된 각목돌대문토기나 공렬문토기 등이 나타나고 있어 전형적인 송국리 문화의 양상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56] 사실 송국리 문화는 야요이 문화와 상당한 접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 양자를 완전히 동일시하기는 어렵고 기존에 존재하던 송국리 문화와 조몬 문화가 상당한 변형 및 융합을 거쳐[57] 형성된 제 3의 문화로서 야요이문화가 탄생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58][59] 혈연적 공통성과는 전혀 무관하게 문화요소의 공통점만을 가지고 송국리 문화로서 한반도 중남부 제집단이 범칭되고 있기는 하나[60], 단순히 이에 근거하여 한반도 중서부의 전형적인 송국리 문화 집단과, 상당히 많은 문화적 변형을 거쳐 형성된 일본 규슈의 야요이 문화 집단을 혈연적으로 동일한 계통의 집단으로만 해석할 수 있을지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일 수 있다.

대개 반도 일본어 가설에서는 반도 일본어족을 주로 농경민인 송국리 문화와 동일시하고, 이들 문화가 태백산맥을 경계로 비교적 수렵채집의 생계양식이 여전히 강하게 잔존하던 한반도 중동부, 중북부 일대로 전파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반도 일본어족과 한국어족이 서로 명확히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당 지역의 고고학적 양상들은 이보다는 훨씬 복잡한 것으로, 강원 지역 및 울산 지역에서는 오히려 오랫동안 점토대토기보다는 민무늬토기가 우세한 반면에, 한반도 중서부 일대에 먼저 점토대토기와 세형 동검이 출현하며, 이들은 또한 반도 일본어 가설에서 한국어족의 기원지로 지목하는 요동지역과 긴밀한 교류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반도 일본어 가설에서 각 어족에 대한 지표들로 제시하는 민무늬 토기, 세형 동검, 농경 내지 수렵 채집이라는 생계경제 양상 등은 어떤 측면에서건 고고학적으로 서로 다른 두 집단으로 명확히 분리해서 해석할 수 있을만큼 일관적인 양상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61]

위와 같은 기원전 시기 동북아시아 지역 문화유형의 복잡한 양상을 검토해보면 단순히 이 광범위한 지역에 거주하던 여러 제종족들을 거대한 두 개의 집단, 즉 한국어족 집단과 일본어족 집단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지에 많은 의문부호가 달린다. 오히려 물질문화의 양상으로만 보자면 한국어족-일본어족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별법보다 훨씬 더 다양한 스펙트럼의 문화 양상이 존재하였으며, 이들은 서로 외떨어져 존재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또 긴밀한 교류의 관계 속에 존재했다. 그렇다면 반도 일본어 가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렇듯 다양한 범주의 문화권을 어디에서부터 한국어족으로, 또 어디에서부터 일본어족으로 구획해야하는지, 또 그러한 구획에 어떤 정당한 근거가 있는지를 먼저 해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청동기 시대부터 요동 지역과 한반도 중서부 일대가 교류망을 이루고 이주민이 일부 지속적으로 유입되었다는 사실, 야요이 문화가 부분적으로 한반도 이주민의 기여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사실과 같은 몇 가지의 고고학적 증거만을 가지고서는 보빈류의 반도 일본어 가설에서 상정하는대로 반도 일본어족이 한국어족과 뚜렷이 구별되는 상태로 오랫동안 존재해왔고, 이들이 한반도 중남부 일대에 지배적이었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가설을 증명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설령 일본 야요이 문화의 기원이 한반도 주민의 이주로 인해 시작되었으며, 또 그들 이주민이 원래 한반도에서 사용하던 언어가 일본어족의 원류가 되는 언어였다고 할지라도, 그 언어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는지는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논증되기는 어렵다.

결론적으로, 청동기 시대부터 원삼국 시대까지의 고고학적 양상은 반도 일본어 가설에서 상정하는 바와 일부 부합하는 측면도 있으나 차이점도 적지 않으며, 따라서 고고학적 근거를 토대로 반도 일본어 가설을 논증하고자 할 때는 매우 조심스럽고 엄밀하게 고고자료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편, 앞선 문단에서는 탐라어가 일본어족과 연결될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으나, 오히려 탐라일대의 무문토기문화 계통 송국리문화의 이주는 소규모에 불과했고, 탐라 정치체의 형성과 함께 제주도에서 원형주거지가 대규모로 확산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자료들은 주로 기원전 4-2세기 경 원형점토대토기를 중심으로 한다.[62][63] 앞서 휘트먼의 가설에 따르면 세형동검 및 점토대토기를 한국어족의 표지유물로 간주했으므로, 이에 따르면 탐라어는 당연히 한국어족이 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제주도가 송국리 및 점토대토기문화의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일지라도, 제주도의 송국리문화가 기층문화라거나 점토대토기문화가 지배층이라는 시각은 물질자료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해석에 불과하며, 송국리문화 유입 이전 재지민의 잔존문화의 양상이 오히려 더 강하게 나타난다는 입장도 존재한다.[64] 이에 따르면 제주도의 토착 언어를 토대로 한반도 주류 언어가 어떤 언어인지를 추측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일 수 있다.[65]

한국 고고학 연구자 중 정규 논문을 통해 반도 일본어 가설에 대해 평가한 연구자는 김장석과 박진호가 거의 유일하다. 그들은 반도 일본어 가설에서 상정하는 바와 달리 청동기 시대 전기 당시의 한반도의 물질 문화 양상은 비교적 동질적라고 보아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청동기 시대 전기 이전에 이미 분지되어 한반도 북부 및 중남부 일대에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서로 병존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보며[66][67] 또 한국어족이 세형 동검과 함께 확산되었다는 휘트먼의 주장에 대해서는 세형 동검 계통 이주민은 비교적 소수였을 것으로 보이므로 근거가 부족하다고 본다.[68][69] 김장석, 박진호는 이에 따라 벼농사 등 생계경제 수단의 확산과 함께 한국어족이나 일본어족이 한반도나 일본열도에서 제각기 확산되었다고 보는 농경-언어 확산 가설 이외에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한국어와 일본어의 기원 및 분화에 대해 추측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 이러한 김장석의 주장 역시 어느정도 유전학적 근거와 일치하는 측면이 있다. UNIST 생명공학과 박종화 교수팀에 의해 진행된 한국인의 기원에 대한 게놈분석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의 게놈은 8천년 전 악마문 동굴에서 나타나는 북아시아 신석기인과 3500년 전 동남아 철기시대 밧콤노우 고대인의 게놈을 융합한 결과로 잘 설명된다고 한다.[70] 이 때 악마문동굴의 북아시아 신석기인 역시 동남아에서 기원하여 이미 오래 전에 북아시아에 광범위하게 확산된 '선남방계'이며, 아직 이들에게는 남중국계통의 청동기-신석기인들인 '후남방계' 혈통의 영향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이 당시에는 후남방계 집단이 아직 한반도에 도래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71] 그러다가 대략 5-4000년 전 무렵, 중국 남부에서 유래한 '후남방계'가 한반도, 북중국, 동남아 등 다양한 방향으로 확산되었고 그 중 한반도 방면으로 확산된 집단이 선남방계와 결합하여 현재의 한국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 남중국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을 고려하면,[72] 이들 후남방계의 확산은 일반적으로 도작농경의 확산과 거의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이는데,[73] 이에 따르면 한반도에 도작농경이 유입된 청동기시대 전기에 전면적인 고고자료의 변화가 나타난다고 주장한 김장석의 입장과 일치한다. 그리고 후남방계의 도래 이후로는 별다른 대규모 유전적 변화는 검출되지 않으므로, 설령 대규모 인구 이동이 있었더라도 또다른 이질적인 인류집단의 유입을 상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역시 도작농경의 전래 이후에도 '이들 도작농경민과 어족 수준에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질적인 집단이 한반도에 유입되었다'는 휘트먼의 주장을 비판한 김장석의 견해와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5. 수사에 대한 검증

보다 이전에는 규슈대학 무라야마 시치로(村山七郎) 등이 수사의 유사성을 제기한 바 있다. 수사의 유사성은 동계어의 중요한 증거로서, 상당히 일찍 갈라진 인도유럽어에도 1, 2, 3과 같은 기본 수사는 상당히 비슷하다. 예를 들어 3을 가리키는 수사는 영어 Three, 프랑스어 Trois, 스페인어 Tres, 러시아어의 Три(Tri), 그리스어 τρία(Tria), 산스크리트어 Tri.가 있는 등. 고구려와 일본어의 수사가 유사하다는 주장은 국내에서도 《고종석의 문장》등 여러 언어, 문장학 교양서에서 인용되었다. 이후 크리스토퍼 벡위드 등이 주장한 부여어족 가설도 이러한 어휘 비교를 근거로 했었다.
수사 고구려어 한국 한자음 구결 고대 일본어 현대 일본어
3 mv 밋츠[みっつ]
5 于次 우차 u-ts 이투 이츠츠[いつつ]
7 難隱 난은 na-n 나나 나나츠[ななつ]
10 tv 토워 토ー[とお]

위의 수사 비교는 모두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지명 이력을 근거로 했다. 《삼국사기》의 지명은 대개 한문을 훈과 음 양 쪽으로 읽던 시기의 것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지명의 고유명사에서 실질 형태소를 분리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계통 연구에서 상당히 신뢰성 있는 것으로 꼽히며 실제 '물(勿)'이 '수(水)'와 통한다는 것[74]이나 '달(達)'이 '산(山)'과 통한다는 것은 거의 자명한 사실이다. #

문제는 이를 근거로 분리된 수사 표본에 대한 신뢰성이다. 상기한 '물'과 '달' 같은 후보는 수많은 지명에서 사용되어 표본 신뢰성이 확실한 편이나, 재구된 수사의 경우 그 증거가 되는 표본이 굉장히 적다. 이 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숫자 '10'이 '덕'인 이유를 두고 삼국사기 지명 '십곡현(十谷縣)'을 다른 말로는 '덕돈홀(德頓忽)'로 불렀는데, '골 곡()'자가 '조아릴 돈()'과 통하므로 '열 십()'이 '큰 덕()'이라고 비정했다. 7의 '난은' 역시 '칠중현(七重縣)'을 '난은별(難隱別)'이라고도 불렀으므로 '일곱 칠()'이 '난은'이라는 주장이며, '오곡군(五谷郡)'은 '우차탄홀(于次呑忽)', '삼현현(三峴縣)'은 '밀파혜(密波兮)'라는 기록에서 각각 5, 3이 이츠츠(いつつ)와 밋츠(みっつ)와 관련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수사 3이라면 한반도 동남부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밀=推=密=三이라는 상관관계를 도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 지리지를 분석하면 '현풍(玄風)'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일대의 옛 행정구역이었다. 그러나 신라 때에는 '량화현(良火縣)' 또는 '량화현(良火縣)'이라 하였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 '현효현(玄驍縣)'으로 고쳐서 화왕군(火旺郡: 창녕)에 속하게 하였다. 즉, 위의 표본대로 수사를 수집한다면, 벡위드나 이기문 등이 고구려-백제 계통에서 분리하는 신라어에서도 고구려어와 유사한 경향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초기 신라어가 일본어와 매우 가깝다고 추정한 보빈의 경우에는 이 지적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수사 '3'은 현재 '密 발음설'과 '悉(siet)/史(s^ïei) 발음설'로 나누어져 있어 지명만으로는 정확히 비정하기 어렵다. 후자는 다른 지명 기록에서 '실직군(悉直郡)', '사직(史直)'이 곧 '삼척군(三陟郡)'이 되었다는 것을 그 근거로 한다.

'5'의 경우에도 이를 '우차'로 인정하더라도 고일본어 '이투'와의 대응이 문제이다. 이를 현대음으로 생각하면 비슷하게 여겨질 지 모르나 고대음가로 생각하면 비슷하다고 하기 어렵다. 次의 성모는 清母[tsʰ]인데 이를 기준으로 할 경우 于次의 상고음은 [ɣiotsʰi]에 해당한다. 그러나 상대 일본어의 ツ는 당대에 [tu]로 발음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치경 파찰음은 대부분 サ행으로 옮겨졌다.[75] 때문에 정말로 于次와 연관을 가졌다면 ギュウシ~ウシ로 음사되었어야 합당하다. 즉, 현대음을 기준으로 하면 비슷할지 모르나 당대 음가를 생각하면 이 둘이 비슷하다는 것은 문제가 많다.

2017년에는 서울대 이승재 교수가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백제어 목간[76]에서 수사를 분리하여 #, 숫자 '2'를 '의털읍(矣毛邑)', 숫자 '3'을 '새태읍(新台邑)', '5'를 '도스읍(刀士邑)', 7을 '일고읍(日古邑)', 8을 '옅털읍(今毛邑)'이라 재구하였는데, 여기서 재구된 음은 상술한 것과는 전혀 다르고 현대 한국어와 매우 비슷하다. 사실상 백제어는 한국어족에 속한다고 보고있다.

6. 기타 근거에 대한 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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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토끼를 의미하는 '오사함'이 일본어 '우사기'의 유래라고 주장하나[77],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으며 오히려 한자의 고대어 음가를 생각하면 고구려 독음과 고일본어 독음은 상당한 차이를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 탐라어에 대한 검증 또한 존재한다. 신당서, 일본서기 등 문헌에는 7세기의 탐라국 인명으로 유리도라(儒李都羅), 아파기(阿波伎), 고여(姑如), 구마기(久麻伎), 도라(都羅), 우마(宇麻), 가라(加羅) 등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구마기, 도라, 우마 3명은 각각 일본어로 을 뜻하는 쿠마(くま), 호랑이를 뜻하는 토라(とら), 을 뜻하는 우마(うま)와 발음이 비슷하여 주목할 만하다. 이 외에도 탐라국의 세 형제 중 막내가 수여받았다는 관직인 ‘도내(都內)’가 일본어의 ‘토노(との)’와 동원어라는 의견도 있다.[78]
  • 여담으로 한반도에서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했던 집단의 언어가 일본어족인지 한국어족인지는 미스터리인데, 알렉산더 보빈과 존 휘트먼은 이 집단의 언어를 일본어족과 한국어족 둘 다 아닌 미지의 언어로 추측했다. 이 미지의 집단으로 일본 열도의 선주민으로 추측되는 조몬인/아이누로 추측하였다.[79]


[1] 예를 들어 홋카이도에 존재하는 대다수의 지명들은 야마토 민족이 홋카이도를 점령하기 전 아이누들이 지은 아이누어 지명을 음차만 해서 사용하고 있다. 유럽의 여러 강들의 이름도 선사 시대부터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여 이를 이용해서 고유럽 제어를 재구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다.[A] Alexander Vovin(2013) - From Koguryǒ to T’amna[A] [4] 고대 서부 일본어 kate- ‘합치다’는 모음 동사로, 한정형은 kat-uru이다. 반도 일본어 katuŋ은 후행 비음 앞에서의 kat-uru > kat-uŋ의 변화가 일어났거나, 혹은 더 현실적으로 반도 일본어에서 동사 활용의 한정형은 고대 서부 일본어와 다른 형태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A] [A] [7] 미와야마에 있는 오미와 신사는 현재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 중 하나로,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뱀신으로, 신화에 의하면 이 신은 신라계 도래신이라고 한다. 미와야마는 오미와 신사가 지어지기 훨씬 전부터 신이 사는 산으로 숭배되었다고 한다.[8] 물론 기록상 말 마 자가 이름 뒤에 붙는 경우는 미오야마국과 주조마국이 전부이다. 이와 관련이 있는지 확실치 않지만 마한에서의 ‘마’도 말 마 자를 사용한다.[9] 529년 3월 신라가 공략한 성들 중 하나인 포나모라(布那牟羅), 동년 4월 왜국의 오우미노케나가 머무른 가야구사모라(久斯牟羅), 530년 9월 기사에서 등장하는 이사지모라성(伊斯枳牟羅城),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 등리지모라(騰利枳牟羅), 모자지모라(牟雌枳牟羅), 그리고 554년 12월 백제의 부여창이 요새를 쌓았다는 구타모라(久陀牟羅)가 기록되어 있다.[10] 6세기 신라인들은 왕성을 건모라(健牟羅)라는 명칭으로 부른다고 기록했다. 이는 《남사》에도 실린 내용이다. 健(건)은 '큰'의 음차로 '건길지' 할 때의 백제어 鞬(건)과 같으며, '牟羅'가 '마을'이라면 '健牟羅'는 '큰마을'이라는 뜻일 것.[11] 524년 1월 15일의 기록으로, 울진 지역에 거벌모라(居伐牟羅)라는 지명이 있었다고 한다.[12]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마한의 54개국 중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과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이 있다.[13]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점령한 옛 백제의 성들 중 구모로성(臼模盧城), 각모로성(各模盧城), 모로성(牟盧城), 모루성(牟婁城), 고모루성(古牟婁城)이 있다고 기록했다.[14] 전라북도 고창군의 백제 시절 지명으로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이 등장한다.[15] 신라는 한화정책을 실시할 시 '산'에 대응하는 어휘를 山 말고도 高로 번역하기도 했다. 또 다른 예는 본래 고구려의 달홀(達忽), 즉 '산성'이었던 고성군(강원특별자치도).[16] 오사함달, 공목달, 달홀 등.[17] 향가 등 현재 남은 신라어 텍스트는 전부 한국어족이다.[B] Alexander Vovin(2007) - Cin-Han and Silla Words in Chinese Transcription[B] [B] [21] 이는 언어학자 Thorpe가 재구한, 류큐어에서 더 널리 퍼진 2인칭 단수 대명사 *Ura(Thorpe 1983, 352)와는 분명히 다른 형태의 2인칭 단수 대명사이다. 즉 류큐조어에서는 2인칭 단수 대명사가 두 개 있었다는 의미이다.[B] [B] [24] 특히 백제에서 딸려보낸 일본어 통역관은 '오사(wosa)'라는 이름으로 불렸다.[25] 신라가 일본에 인질을 보냈다는 구절은 일본서기가 원래 신라든 백제든 간에 외국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면 인질을 보냈다고 일관되이 서술하므로 그러려니 하자. 사신이 일본에 갔음은 일본서기 기록대로 사실이지만 그 사신이 인질은 아니었음은 한국, 중국 사료와 교차검증으로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인질이라는 단어가 한국과 일본의 용법이 달라, 일본에서는 단순히 정부측이 사람을 보냈다는 의미로 통한다. 이에 대해선 일본서기 항목 참조.[B] [27] 조진선, 진·변한의 형성과 분립 과정, 2023./ 이 때 조진선은 당시 경주지역에서는 검단리 문화 계통 주민들이 사회 기층을 이루고, 한반도 중서부 일대로부터 이주해 온 세형 동검 문화 집단이 상층을 이루고 있었다고 본다. / 이후에는 낙랑군 설치 이후 위만조선 계통의 이주민이 또 한차례 발생하였으리라 보인다.(최병현, 원삼국시기 경주지역의 목관묘·목곽묘 전개와 사로국, 2018)[28] 물론 기원전 1세기 이전에 정착한 선주민 계통의 묘제와 위만조선 계통의 묘제가 병존하는 양상은 있으나, 이들은 모두 반도 일본어설에서 한국어족으로 간주하는 세형 동검 문화의 도래 이후의 일이다.[29] 현재의 제주어를 생각하면 된다. 제주어는 지속적인 표준 한국어의 유입으로 인해 사멸 위기 단계에 있으며, 젊은 계층에서 이러한 토종 제주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조차 사라지고 있다.[30] 반면 마한은 진한과 언어가 다르다고 하는데, ‘다르다’의 범주를 가지고 단순히 방언으로서 다르다는 의견과 언어 자체가 다르다는 의견이 있다. 반도 일본어설을 따른다면 한화가 된 마한은 일본어족을 사용하는 진한과 언어가 다를 것이다.[31] 예를 들면 점토대토기단계의 주민교체론이나 4세기 무렵 한반도 남부 기마민족 남하설 등[32] 송만영, 중부 지역 점토대토기 사회에 대한 다른 인식, 2019 / 김현식, 남한 청동기시대 원형점토대토기문화 출현의 정치·사회적 의미, 2023[33] 보빈은 기병을 가진 북방의 한국어족이 남방의 일본어족을 정복하고 예속시켰다고 추측하지만(From Koguryo to T'amna, 2013), 일반적으로 한반도에서 기마 내지 차마 문화와 연결지을 수 있는 흔적은 낙랑군 설치 이전 시점으로 소급되지는 않는다고 본다.(김두철, 한국 고대 마구의 연구, 2000 / 손로, 고대 동북아시아 차마구와 기마구의 변천, 2012) 마찬가지로 보빈이 한국어족의 남하 시점으로 처음 지목한 3-4세기 무렵 삼국시대 한반도 남부지역에 기마문화가 출현하는 현상 역시 고고학계에서는 기마민족의 남하와 같은 극적인 인구이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토착민의 능동적인 대외교류의 결과로 해석되고 있다.(강봉원, 신라 적석목곽분 출현과 기마민족 이동의 상관관계에 대한 재검토, 2013)[34] (김승옥, 만경강 유역 점토대토기문화의 전개과정과 특징, 2016) 이 때 김승옥은 만경강유역에서는 점토대토기 문화 집단이 송국리 문화 집단에 비해 사회의 주도권을 가졌을 것이라 추정하지만, 호남 일부지역에는 점토대토기 문화의 최말기까지 송국리 문화가 잔존하여 이러한 방식의 통합이 모든 지역에서 일률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리라 보고 있다.[35] 이숙임, 강원지역의 점토대토기문화 고찰, 2007[36] 문안식, 요하 문명과 예맥, 2012[37] 물론 조진선, 주보돈 등 이 시기의 비교적 문헌기록을 신뢰하는 연구자들은 이 당시 진-변한 사회에서 유이민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기 때문에 이들의 관점은 반도 일본어 가설과 어느정도 통할 여지는 있다.[38] 다만 이러한 입장들에서도 초기 점토대토기 계통의 이주민들이 최초 이주 단계에서 재지민과의 마찰을 피해 고지에 취락을 설치하고 그 유물의 수도 많지 않아 재지민에 비해 지극히 열세였던 상황(이형원, 청동기시대 갑천유역의 유적 분포양상과 그 의미, 2016)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이후 점토대토기 계통 이주민들은 재지민과의 활발한 교섭을 통해 서로 통합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미 이들이 어느정도 자리잡은 단계에 이르면 순수하게 점토대토기문화로 이루어진 외래계 취락은 거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고, 재지계 유물과 외래계 유물이 공반된 복합취락이 절대다수를 점하는 상황에서, 다소 점토대토기 문화가 각 취락에서 우세하게 나타나는 정도이다. 또한 취락의 규모 역시 외래계 취락이 재지계 취락보다 매우 소규모로 나타난다.(진영민, 중서부지방 점토대토기문화 취락의 변천과 성격, 2015) 이 시기에 유이민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입장은 이른바 '재편론'이라 불리는데, 이러한 입장도 앞서의 이유로 이주민이 재지민을 흡수하거나 정복, 지배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단지 이주민들이 우월한 문화요소를 바탕으로 재지민과 교섭, 통합하여 새로운 복합취락을 구성하는 가운데에 좀 더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의미이다. 설령 이들 이주민이 통합의 주도권을 행사하기는 하였을지라도, 이주민이 소수인데에 비해 점토대토기문화가 광범위하게 빠른 시간 안에 확산된 것은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외래 문화수용이라고 하는 재지민의 역할을 고려하지 않고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뒤에 나올 김장석 등도 이렇듯 재지민들과 통합 내지 재지민에 흡수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주민들이 기존 재지민의 언어를 대체할 수 있었을지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39] 예컨대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한국어족이 한반도 중남부에 널리 자리잡았다는 입장[40] 예를 들면 반도 일본어설은 주로 진한어에 일본어족으로 볼 수 있는 어휘들이 존재한다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진한일대, 특히 울산지역에는 검단리 문화가 소멸한 이후 일부 야요이계 토기가 부장되는 등 일본과 활발한 교류의 흔적이 존재하며(이수홍, 울산지역 청동기시대 종말기의 지역상, 2019 / 이러한 교역은 주로 철을 매개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삼국사기에도 사로국 초기 왜에서 왔다고 명시적으로 기록된 '호공'이라는 인물이 존재한다. 기원전후 무렵 문물교류 및 인적교류는 주로 한반도에서 일본열도 방향으로 향하기는 했으나, 일부 그 역방향도 존재했던 것이다. 이는 이미 야요이문화가 일본 열도에 성립한 이후, 일부 그 요소가 한반도로 들어온 흔적이다. 그렇다면 보빈의 가설 속, 진한 일대에 존재하는 일본어족의 흔적을 상기한 교류관계의 영향으로 해석해볼 여지도 있을 것이다. 단, 이 때 해당 지역은 이미 점토대토기-와질토기 문화권으로 상당부분 동질화된 가운데에서 일부 야요이토기가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설령 일본계 종족이 이 지역에 존재하였더라도 극소수의 이민자에 가까웠을 뿐,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는 최종적으로 진한어를 대체하게 된 신라어를 한국어족으로 평가하는 보빈의 가설과도 일치하는 지점이다.[41] 조진선, 진·변한의 형성과 분립 과정, 2023[42] 이청규, 요녕 본계현 상보촌 출토 동검과 토기에 대하여, 2010[43] 이창희, 점토대토기의 실연대-세형동검문화의 성립과 철기의 출현연대, 2010[44] 이형원, 송국리유형과 수석리유형의 공존양상, 2005[45] 물론 언어가 어떻게 확산되는지에 대해서는 함부로 단언하기 어려우나, 일반적으로 언어는 그 주민집단의 정체성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아서 매우 보수적인 측면이 있다. 이 경우, 무력과 정복으로 지배층의 언어를 강요하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현지의 언어를 일방적으로 대체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또 대개 토착민보다는 이주민들이 현지사회에 동화되고자하는 동기가 더 강하다는 측면 역시 고려해야 한다.[46] 송만영의 경우,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분묘를 대상으로한 탄소연대의 확률밀도를 분석한 황재훈의 연구(분묘 자료를 통해 본 청동기시대 취락 경관의 구축, 2018)를 인용하여 이 무렵 어떤 계기로 유입되었건 간에 이주민들의 유입이 고고자료를 통해 검출될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또 마찬가지 이유로 점토대토기문화 이래 외래 집단에 의해 토착민들이 기층민으로 재편되었다거나, 문화담당 주체가 바뀌었다고 보는 견해는 아무 근거가 없다고 본다.(중부 지역 점토대토기 사회에 대한 다른 인식, 2019)[47] 상기 두 문단 전체, 김장석, 호서와 서부호남지역 초기철기-원삼국시대 편년에 대하여, 2009[48] 또 그렇다고 준왕의 남하 역시 언어교체의 기점으로 삼기도 어려운 일인데, 준왕 도래 이후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군집토광묘 역시 마찬가지로 같은 시기의 주거지의 숫자와 비교해보았을 때 이를 모두 이주민의 흔적으로 보기는 어렵고 상당부분 토착민들이 이러한 묘제를 수용하여 조성한 것으로 본다. 또 만경강 유역에서는 일부 외래요소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 이외에는 재지 요소가 상당부분 연속적인 층위에 있을 뿐더러 준왕 일족의 절멸 기사와 부합하게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만경강 유역의 문화가 대체로 쇠퇴일로에 놓여 있었으므로 이들 집단이 한반도 중남부의 다른 지역까지 확산되어 토착민을 모두 정복했다고 보는 것에도 큰 무리가 따른다.[49] 위 문단 전체, 천선행, 만경강유역 한(韓) 문화의 실체와 전개, 2023[50] 알렉산더 보빈은 한국어족을 기마술을 가진 정복자로, 일본어족을 보병 중심의 농경민족으로 대별하였다.(From Koguryo to T'amna, 2013), 앞선 각주에서 언급했듯이 일단 어느 시점에건 기마민족이 대대적으로 한반도로 남하했다는 가설은 고고학적으로는 아무 근거가 없다.[51] 오영찬, 예맥의 종족성과 물질문화, 2023[52] 강인욱, 초기 고조선 네트워크의 형성과 비파형동검문화, 2018/ 이후석, 요동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체계와 사회, 2020[53] 반면 반도 일본어설에서 이 당시 민무늬 토기 집단과 같은 일본어족이라고 가정하는 야요이 문화권에서는 정작 비파형 동검이 나타나지 않으며, 점토대토기 문화가 한반도 중남부에 나타난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점토대토기 및 세형 동검이 규슈 지역으로 확산된다. 특히 최근에는 야요이 문화의 상한이 한반도 청동기시대 중-후기인 기원전 8-7세기까지로 상당 부분 올라갔는데도, 딱히 야요이 문화가 비파형 동검 문화권과 연루된 정황은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는다.[54] 천선행, 청동기시대 조기설정 재고, 2015 / 청동기시대 조기문화 성립과 지역 간 관계변화, 2019[55] 이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비송국리 문화권이라고 해서 점토대토기를 사용한 것은 아니고, 이들은 오히려 원삼국 시대 개막 직전까지 오랫동안 민무늬토기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점토대토기는 해로를 통해 송국리 문화의 중심지인 한반도 중서부일대에 처음 유입, 확산된 것으로 본다.(박순발, 요령 점토대토기문화의 한반도 정착 과정, 2004 / 송종열, 만경강유역 점토대토기문화의 정착 과정, 2015 등)[56] 이홍종, 송국리문화의 시공적 전개, 2003 / 이홍종은 이 때문에 이 당시 야요이 문화의 기원이 되는 세력은 한반도 내부의 열세 집단으로서, 여러 내외의 압력을 이겨내기 위해 외래의 송국리 문화의 문화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본다.[57] 재지적 특징이 강한 변형된 송국리 문화의 이주, 토착 조몬인들에 의한 선별적 문화수용 및 이들 양자의 결합 등[58] 이정은, 규슈지역 송국리문화의 확산과 문화변동, 2019 / 다만 비교적 규슈 지역에서는 송국리 유형 주거지로만 이루어진 취락이라던가, 송국리형 주거지가 기존 재지 주거지보다 우월한 입지를 확보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주는 결코 소규모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비교적 이주민이 재지민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보는 입장이 일반적이다.(유병록, 일본 구주지방 송국리문화 연구, 2010 등)[59] 뿐만 아니라 유전적으로 현대 일본인 혈통 중 적게는 3%, 많게는 20% 정도만이 조몬계 혈통이며, 나머지는 한반도 계통의 혈통이 우세하다는 것이 통설이다. 다만 오랫동안 점진적으로 이민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는 사실 이러한 혈통적 우세는 어떤 언어가 우세한가의 문제와는 다소 무관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현대 미국에서 백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57.8% 밖에 안 되고 # 백인 중에서도 미국 전체 인구 중 대략 15% 정도를 차지하는 독일계 등 비영어권 국가들 출신들까지 모두 배제하면 순수하게 출신지의 언어가 영어인 인구는 과반이 훨씬 안 된다. 그럼에도 미국에서는 당연히 영어가 압도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는 이미 미국이라는 사회가 초창기부터 영국계 주민들에 의해 세워져 영어가 처음부터 공용어로 널리 통용되고 있었던 데다가 이후 비영어권 출신의 이민자가 들어와서 이들이 나중에는 영어권 출신들보다도 더 수가 많아졌을지라도, 그들이 이민할 당시에는 그들은 어디까지나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야요이 사회도 초창기에는 송국리문화 계통 이주민들이 토착 조몬사회와 활발히 교섭하고 융화되었다는 사실을 미루어보면, 지속적인 한반도계 주민들의 유입으로 결과적으로 이들이 혈통적으로는 다수가 되었을지라도, 그러한 이민은 오랫동안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각각의 이주 시점에서는 한반도계 언어를 사용하던 이들이 야요이 사회에서 항상 소수에 머물러 있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원래 한반도계 언어를 사용하던 이주민들은 이미 토착화한 야요이문화의 주류언어에 지속적으로 동화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야요이문화에서도 야요이시대 조기인 기원전 8-7세기 경부터 기원전후, 혹은 그 이후의 시점까지도 한반도로부터의 이주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60] 사실 송국리문화권에 속하는 진주대평리 유적만 하더라도 청동기시대 전기 이래의 재지의 물질문화 요소가 송국리문화와 융합하여 형성된 취락이며, 본래 송국리 문화는 직접적인 이주를 통해서만 확산된 문화가 아니다.(이종철, 송국리형 문화와 취락체제의 발전, 2015)[61] 한편, 앞서 언급한 휘트먼은 어족을 구별하는 지표로서 민무늬 토기와 세형 동검만을 대별하고 있을 뿐인데, 이에 따르면 민무늬 토기문화권 중에서도 농경문화 전통이 비교적 약한 검단리 문화권, 천전리 유형권 등 강원지역 및 울산-경북 북부 일대 역시 일본어족이어야 할 것이다. 해당 지역에서는 송국리 문화권과는 달리 수전농경이 널리 퍼져 있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수전농경을 일본어족의 특질로 부여하는 반도 일본어설은 이 부분에 대해 충분한 해명이 필요할 것이다.[62] 오원홍, 탐라 이전 송국리형 주거취락의 변화 양상 : 삼양동·용담동 일대 유적을 중심으로, 2018[63] 일반적으로 제주도의 '송국리형 주거지'라고 부르는 것은 주로 원형주거지라는 하나의 요소만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박경민, 전통과 변화의 관점에서 본 제주도 원형 주거지, 2018) 어차피 점토대토기문화의 주거지 평면형태 자체가 원형이나 방형으로 일반화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므로(구숙현, 원형점토대토기문화 취락의 특징과 의미 -중서부지역을 중심으로-, 2023) 결국 제주도는 점토대토기문화의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64] 박경민, 전통과 변화의 관점에서 본 제주도 원형 주거지, 2018 / 이에 따르면 송국리문화 유입 초창기, 비교적 소규모로 형성된 원형주거지 내에서는 외래의 송국리토기보다는 재지계의 심발형토기가 훨씬 우세하다가 이후에 점진적으로 삼양동식 토기로 대체된다고 한다. 또 점토대토기문화의 유입으로 원형주거지가 비교적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을 때에도, 각 주거지 내에서 오히려 종래의 재지계 토기(심발형 토기 및 삼양동 토기)의 비중이 점토대토기의 비중보다도 훨씬 높게 나타난다고 한다. 이는 송국리문화 유입 이전 재지민들이 송국리 및 점토대토기문화라는 외래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65] 제주도는 한반도에서 최초로 토기가 발견된 지역으로, 특히 한반도 신석기시대 초창기(B.C 10,000~6000)의 토기로는 제주도의 고산리식 토기가 유일하다. 이 당시 제주도의 구석기-신석기 전환기의 양상은 러시아 아무르, 연해주, 바이칼 일대에서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에 걸쳐 상당부분 공통된 요소가 관찰되는데, 고산리식 토기와 고산리 유적에서 발견되는 여러 석기 유물들이 그 예시다. 고산리의 신석기 문화는 그 중 아무르강 하류의 제 3단계 신석기문화와 관련이 깊고 일본 규슈일대와는 비교적 관련성이 약하다고 한다. 제주도의 고산리식 토기는 기원전 6000년 경 신석기시대 조기가 개막된 이후에는 고산리식 토기는 비교적 계통적으로 단절되고, 한반도 남해안의 융기문토기문화가 유입된다. 이는 기본적으로 활동성이 강한 한반도 남해안 신석기시대 조기 주민들이 이주하거나 이들과 교류한 결과로 해석되며 이후부터는 남해안 토기문화권에 속하게 된다. 한편, 이 당시 한반도 신석기시대 조기의 융기문토기는 일본 조몬계 토기와는 기형, 문양의 시문기법, 형태가 완전히 다르다(강창화,제주 고산리 신석기문화 연구, 2007) 이후 제주도는 신석기시대 전기에 이르러 영선동식 토기가 나타난다던가, 청동기시대 전기에 이르러 흔암리식 토기가 유입되는 등 대체로 한반도 남부지역의 토기문화와 궤를 같이 한다. 이 과정에서 육지에서의 이주 역시 상정되지만, 일정부분 재래 집단의 선택 역시도 제주 문화가 육지 문화와 차별화되는 중요한 계기로 작동하였으리라 보인다.(박경민,제주 북서부 청동기시대 물질문화의 시간적 흐름과 성격, 2017) 이로 볼 때 제주도 역시 휘트먼 등이 전형적인 일본어족 집단의 물질문화 형식으로 부를만한 물질문화조합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신석기시대 초창기에 일부 일본 조몬문화와 먼 친연관계가 존재하기는 하나, 신석기시대 조기 이후로는 별다른 관련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선사시대 제주도는 대체로는 일본 및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한반도 남부의 문화양상을 따르면서도, 다시 또 한반도 남부지역의 전형적인 문화조합상과는 다소 차이를 두고 독자성을 강하게 띠는 문화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굳이 따지자면 송국리문화의 영향은 비교적 약했고,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전기의 주민과 점토대토기문화 계통 주민들의 수가 비교적 많았을 것이므로 제주도의 언어양상도 해당 문화의 유입기의 육지 언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개연성이 커 보인다 할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제주도만의 독자성이 보이는 경우가 많으므로, 어쩌면 신석기시대 초창기 이래의 선주민의 영향이 지속적으로 남아있었을 수도 있다.[66] 해당 주장은 한반도 중남부 일대에 분포권이 한정돼 있는 송국리문화를 일본어족의 기원으로 지목하는 반도 일본어설에 대한 반론에 가깝다. 송국리문화는 청동기시대 후기(혹은 중기)인 기원전 8-7세기에 성립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한반도 중서부 일대가 검단리, 천전리 유형문화권과 생계경제 양상이나 물질문화가 뚜렷이 구별되기는 하지만, 그 이전 청동기시대 전기에는 다른 지역과 물질문화상으로 그다지 뚜렷한 차이가 관찰되지 않기 때문이다.[67] 한편, 청동기시대 전기 이후에 양자가 분리됐다는 입장에 대해서는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의 차이를 감안할 때 언어학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라고 지적한다.[68] Jangsuk Kim-Jinho Park, Millet vs rice: an evaluation of the farming/language dispersal hypothesis in the Korean context, 2020, 단, 이들의 연구는 반도 일본어설 자체를 전반적으로 다룬 것이라기보다는 반도 일본어설에서 가정하는 몇 가지 핵심 주장에 대해 언급하고 검토한 것에 가깝다.[69] 해당 논문에서 김장석 등은, 로베이츠가 제시한 기장-조 언어 확산설 및 휘트먼이 제시한 세형동검 언어 확산설을 모두 기각하고 있으며, 이를 넘어 농경-언어 확산 가설 자체가 이 당시 한반도 상황에서는 잘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 이를 적용할 때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부연하자면 로베이츠가 제시한 기원전 3500년 경의 기장과 조의 유입은 주로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 계통의 토착주민들이 주체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보이므로 언어확산의 계기로 보기가 어렵다고 본다. 한편으로 휘트먼이 한반도에서 첫번째 언어 확산의 계기로 제시한 기원전 1300년 경 벼농사의 유입에 대해서는 언어확산의 계기로 볼 수 있을만한 물질문화의 변화상이 분명히 나타난다고 본다.(이는 일본 열도의 야요이문화 형성기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 이유는 이 당시 농경민들이 대규모로 이주한 뒤 자원을 배타적으로 점유함으로써 종래의 수렵채집계통의 빗살무늬토기 사회의 경제가 붕괴하고 벼농사 중심의 생계경제 양식으로 대체되었으며, 주거문화 및 물질문화 역시 전면적으로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휘트먼이 한반도에서의 언어확산의 두번째 계기로 제시한 세형동검의 유입 당시에는 그 이주 규모가 대규모였다고 보기는 어렵고, 송국리문화는 인구가 밀집한 상태로 오랫동안 잔존하고 있어 이주민이 토착민을 압도했다 하기도 어렵다고 본다. 이 때 휘트먼은 벼농사와 함께 유입된 언어집단을 일본어족으로, 세형동검과 함께 유입된 언어집단을 한국어족으로 보았지만, 김장석 등이 고고자료를 검토한 결과로는 벼농사 유입을 계기로 언어확산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반대로 세형동검 유입을 계기로 언어확산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그다지 확실해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70] #[71] #[72] Ahn S-M, Origin and Differentiation of Domesticated Rice in Asia, 1993 / 아시아 재배벼의 기원과 분화, 1999[73] 박종화 교수 역시 이들 후남방계는 정착농경을 했기 때문에 토착 선남방계(북방계) 수렵채집민보다 훨씬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74] 오늘날에도 '물'이라는 고유어가 수(水)를 가리키는 것은 동일하므로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북방 퉁구스어 계통에서도 '물(勿)', '말(末)' 등의 어휘가 곧 '강' 등으로 풀이되는 것이 비슷하며, 하술할 수사 문제와는 별개로 일본어로 물을 가리키는 '미즈(みず)'의 고형 '밑', '미투'의 어원이라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다.[75] 이에 대해서는 상대 특수 가나 표기법 항목의 サ행 파찰음설 참조. 대표적으로 千이 せん으로 옮겨진 것을 생각하면 된다.[76] 백제 멸망 이후 만들어졌으나 점령자인 신라의 문법과는 구별된다는 점에서 백제어의 흔적이라 추정했다.[77] 계림유사에서는 도끼를 烏子蓋(오자개)라고 기록하였으나, 鳥(조)의 오자다. 이렇게 하면, 15세기 국어 '돗귀'와 鳥子蓋(teu t͡sɨ kɑi)의 발음이 비슷해진다. 이로 미루어 보아, 烏斯含(오사함)이 아닌, 鳥斯含(조사함)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중세국어 형태의 '톳기'와 한층 발음이 비슷하다. 뿐만 아니라 다름아닌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鳥를 烏로 잘못쓴 듯 보이는 사례들이 여럿 있다. 가령 현 이름들 중에 猪足(저족)은 烏斯迴(오사회), 猪䢘穴(저수혈)은 烏斯押(오사압)에 해당하는데, 여기에서 烏斯에 猪가 대응됨을 알 수 있다. 이 때 烏를 鳥의 오기로 보면 鳥斯(teu sie)가 되므로 돼지의 고어형 '돋', 방언형 '돗'과 비슷하고, 鳥斯含에서의 발음과 일치한다. 그러나 烏斯를 '우사기'에 착안해 '우사'로 읽는 경우 이렇게 일관된 설명이 어렵다. 상대 일본어로 猪에 해당하는 단어는 발음이 전혀 다른 '위(ゐ)'이기 때문이다.[78] 탐라어의 계통과 관련해서는 일본어족설 외에도 오스트로네시아족설, 몽몐어족설, 크라다이어족설, 조몬인 계통설, 니브흐어설 등이 존재한다.[79] 단, 이 역시도 아무런 고고학적인 근거는 없는 추측이다. 일본열도의 조몬계 토기와 한반도계 융기문토기, 빗살무늬토기 등은 이미 신석기시대 초엽부터 형태 상 명확한 차이가 나타난다. 기원전 6000~2000년 사이에 형성된 한반도 신석기시대 유적인 동삼동패총에서는 일부 조몬토기가 나타난다던가, 일본 규슈와 혼슈에서 빗살무늬토기가 나타난다던가 하는 식으로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교류관계가 나타난 것은 사실이나, 양 지역의 토기 계통과 발달과정은 아주 명확하게 구별되므로 동일한 종족성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없다. 이 때,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 문화권과 조몬문화권 간의 교류관계에 대해서는, 하인수(신석기시대 한일 문화교류와 흑요석, 2006)가 자세히 다룬 바 있는데, 해당 논문에서는 양 문화권의 활발한 상호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으나, 동시에 한반도의 조몬계 토기와 일본 열도의 빗살무늬 토기가 각 지역에서 외래계 토기임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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