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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송)/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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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집안 내력3. 초기 생애4. 황제 즉위
4.1. 진교의 변4.2. 진실?4.3. 구 황족의 대우
5.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6. 이루지 못한 통일
6.1. 수상쩍은 최후6.2. 여러 의문점
7. 사후
7.1. 한국의 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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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나라 창업군주 송태조의 생애를 다룬 문서.

2. 집안 내력

송나라 황실의 기록에 따르면 송태조는 전국시대 조나라 마지막 왕 조가의 후손이라고 한다. 조나라 영성 조씨 왕가의 후손들은 진시황 시대에 각지를 전전하다가 한나라 성립 이후 과거 조상의 영토였던 탁군 지역에 정착, '탁군 조씨' 또는 후대의 행정구역에 따라 '하간 조씨'로 알려지게 되었다. 견사생풍의 고사에 등장하는 서한 대의 경조윤 조광한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3. 초기 생애

탁군[1] 고안현 사람으로[2] 조광윤이 태어난 시기는, 당나라 멸망 이후 수많은 왕조들이 난립하여 혼란스러운 5대 10국 시기였다. 실제 조광윤의 집안도 원래 후당의 금군을 지휘하는 장수였다가, 후당이 망하자 후주에 복속된 군관 집안 출신이었다. 아버지 조홍은은 후주의 금군을 지휘하여 여러 군벌들과 맞서 싸우면서 공적을 세운 고위급 지휘관이었고, 조광윤 역시 당시 후주 태조 곽위의 양아들인 시영[3]의 수하로 들어가 군관으로 활약하였다.

시영(후주 세종)이 954년 제위에 오르자 영토 확장 의지를 천명하였고, 조광윤은 군의 지휘관으로서 남벌에 참여하여 상당한 공적을 세웠다. 특히 고평 전투에서 숙위장령으로 결사대를 지휘해 기울어진 전세를 되돌려놓는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당시 거란족의 도움을 받아 후주를 위협하던 군벌들을 모조리 박살내고 버로우시켰다. 이렇게 조광윤이 탁월한 지휘 능력을 발휘하여 후주에 수많은 승리를 선사하자, 세종으로부터 상당한 총애를 받았다.

게다가 세종 시영은 죽기 전에 금군 총사령관이었던 자신의 처남을 해임시키고, 그 후임으로 조광윤을 앉혀서 후주의 모든 병력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그 이유는 '자신(= 시영)이 만약 갑작스럽게 죽으면 처남이 자신의 어린 아들을 죽이고 황제에 오를 수 있기 때문에 외척인 처남보다는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자신의 수하로 있었고 또 자신에 대한 상당한 충성심을 가진 조광윤에게 힘을 실어 줘서 어린 아들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4] 사실 시영 본인도 직계 혈통이 아닌 고모부의 양자로 황제가 된 경우이기 때문에, 외척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4. 황제 즉위

4.1. 진교의 변

959년 세종이 승하하고 그 뒤를 이어 아들인 시종훈이 공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즉위 당시 공제는 7살 먹은 어린아이에 불과했기 때문에, 유제의 등극으로 후주를 갈아 마시기 딱 좋은 시기라고 판단한 거란과 후주와 대립 중인 여러 군벌들은 서로 결탁하여 후주를 압박하였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조광윤이 나섰으나, 당시 부하들은 "이게 모두 저 어린 황제 때문이다"란 생각과 함께 시씨 황실에 대한 불만을 품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조광윤의 엄청난 군공과 명성, 후주에서의 위치를 감안하면, 충분히 황제가 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조광윤은 제위에 대한 욕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는데, 결국 참다못한 부하들이 조광윤을 옹립하기로 결정하고 행동에 나섰다.

960년 정월, 후주의 여러 신하들이 정월을 축하하는 중 북변 수비대가 전갈을 보내왔다. 전령은 요(거란)와 북한 연합군이 대거 침입한다고 알렸다. 이에 후주 조정에서는 귀덕절도사 겸 검교태위, 전전도점지휘사 조광윤에게 금군을 이끌고 출동케했다. 군을 이끌고 출정한 조광윤은 개봉 동북쪽에 위치한 진교역(陳橋驛)에서 야영을 했다. 원래 조광윤은 술자리를 가지면 술에 취해 떡이 되도록 마시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를 이용하여 그날 밤 동생 조광의와 부하들은 조광윤에게 술을 계속 권했다.

결국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신 조광윤은 부하들의 계획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 사이 조광의, 조보 등은 미리 준비해둔 황포를 가지고 술에 만취된 조광윤의 침소로 쳐들어간 뒤 급히 조광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간 후 황포를 입혔다. 이후 부하들은 “우린 당신을 황제로 모시기로 했으니 얼른 어린 황제로부터 양위 받으시오! 안 그럼 우린 반란 일으킬 겁니다!" 라고 말하며 양위받을 것을 강요했다. 이때 군사들이 황포를 걸친 조광윤을 보고 일제히 “만세! 만세! 만세!”라고 삼창을 하자 조광윤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난감해했다. 이후 조광윤은 황실과 신하들, 백성들에 해를 입히지 않겠다는 조건과 절대 복종의 맹세를 받아낸 후에야 부하들과 휘하 장졸들의 요청을 수락하였다.[5] 결국 병력을 이끌고 개봉에 입성한 조광윤은 공제의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올랐고 북송을 건국하였다. 왕건과 마찬가지로 자신은 군주가 될 생각이 없었는데 부하들이 추대해서 군주가 된 케이스다.

4.2. 진실?

이것이 역사서에 적힌 공식적인 설명이나, 이 기록을 그대로 믿기란 어려운 일이다. 요나라의 공격으로 조광윤이 출동했다는 것은 송나라 기록이고, 요나라 기록에는 당시 송나라를 공격했다는 내용이 없다. 자국 내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느라 바빴을 뿐이다. 즉, 거란이 공격했다는 것 자체가 조광윤이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기 위한 거짓 정보에 불과했다. 더구나 부하들이 억지로 황포를 입혔다고 했는데, 황포는 황제의 옷이므로 군중에 굴러다닐 리가 없다. 사전에 준비하지 않았으면 황포가 갑자기 등장할 리가 없다. 게다가 조광윤은 출동하기 전에 자기 가족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았다. 이를 종합해보면 조광윤은 처음부터 반란을 일으킬 목적으로 거란이 공격해왔다는 거짓 보고를 이용해서 군사를 이끌고 출동했던 것이다.

참고로 진교정변은 자치통감에 나오지 않는다. 자치통감은 959년 12월까지만 서술하고 끝나기 때문에 960년 정월의 진교정변은 등장하지 않는다. 진교정변이 요나라와 북한 연합군이 공격할 때 일어났다고 나오는 것은 960년부터 내용이 시작하는 청나라 때의 속자치통감이다.

4.3. 구 황족의 대우

그러나 그는 비록 제위를 빼앗았지만 실제 개봉 입성 후 휘하 군사들이 곽위 때와 달리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았고, 전임 왕조도 잘 대해주었다. 중국 역사 내내 선양으로 제위에 오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실상은 남북조 시대부터 군대가 성 안에 들어오면 민가를 약탈하고 반항하는 백성들을 죽였고, 전 황족은 그 자리에서 족치거나 적당히 대접하다가 몰래 암살하는 일이 빈번했다.[6] 하지만 조광윤은 이런 선례와 달리 미리 휘하 군대에게 철저히 민가 약탈과 살육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고, 전임황제인 시종훈와 후주 황족들을 죽이기는 커녕 오히려 우대했다. 아울러 단서철권(丹書鐵券)[7] 을 내려 시씨 문중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시씨 문중은 북송이 금나라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갈 때도 송나라 황실이 함께 데리고 갔고, 남송이 멸망할 때까지 양송 3백 년간 보호받았다. 그리고 선양한 공제 시종훈을 정왕(鄭王)으로 봉해 식읍을 내려 그의 가문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가 973년에 20세의 나이로 요절했을 때에도 황제에 준하는 예우로 장사까지 지냈다. 이러한 후대는 이후 송나라 내내 이어졌고, 그래서였는지 후에 애산 전투에서 패한 송나라가 멸망할 때 많은 시씨 일족이 끝까지 송나라 황실과 명운을 같이 했다. 이런 시씨 일족 중 한 명이 수호전에도 등장하는데 바로 소선풍 시진이다. 시씨 이외에도 5대 10국의 군주나 장수들도 죽이지 않고 관용을 베풀었고[8] 정복한 지역의 백성들의 약탈을 엄금하면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반면 관용을 베풀되 통일에 대한 의지는 확고했던 거 같다. 남당후주 이욱이 조광윤에게 "더 이상 싸우지 말고 이대로 천하를 반분해서 각자 다스립시다"라고 말하자, "내가 누운 침대 옆에서 외간 남자가 코골며 자는 것을 어찌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라며 으름장을 놓으며 사신을 내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5.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

일단 제위에 오른 조광윤은 병권을 가진 군벌들이나 자신을 옹립한 장수들의 존재가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하였다. 많은 창업 군주들은 자신을 도운 공신들을 토사구팽 식으로 조지는 비정한 면모를 보이거나, 쳐죽이려다가 오히려 역공당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조광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과 형제처럼 지낸 공신들과의 의리를 이용해 병권을 인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방법은 정직하게 설명을 한 뒤 설득으로 병권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960년 소의절도사 이균과 회남절도사 이중진의 반란을 진압한 후 조광윤은 휘하 장수들을 모두 초청하여 연회를 벌였는데, 이 자리에서 장수들이 만취 상태에 놓이자 갑자기 시종들을 물러가게 하고 금위군 장수 석수신 등의 공신들만 남긴 다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아주 솔직하게 설명했다.
조광윤: "만일 그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짐이 천자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천자가 된 후 짐은 매일 밤잠을 설치노라."

공신들: "폐하, 신들이 혹여 역심이라도 품을 것을 우려하시옵니까? 신들이 어찌 감히 다른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조광윤: "짐에게도 본디 역심이 없었지만 그대들이 술을 먹이고 용포를 입히지 않았는가. 그대들에게 아무리 역심이 없더라도, 그대들의 부하들이 술을 먹이고 용포를 입힌다면? 그런 상황에서는 그대들도 거부하기 힘들 것이 아닌가?"

공신들: "폐하께서 안심하시려면 신들이 어찌해야겠사옵니까?"

조광윤: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돈'. 그리고 '마음의 평화'이니,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그대들 스스로 잘 생각해 보도록 하라."
공신들은 조광윤의 뜻을 쉽게 알아차렸다. 즉 조광윤은 "나도 니들 토사구팽하기 싫고, 니들도 토사구팽 당하기 싫지 않느냐? 허튼 생각하지 말고 다 내려놓고 부귀영화나 누리면서 지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장성급 공신들 전원이 전역원을 제출하였다. 조광윤은 그들을 바로 전역시키지는 않고 일단 지휘권이 없는 보직으로 전보 조치하는 식으로 잠시 대기발령시켰다가 순차적으로 정리해주었다.

이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오대십국이 왜 벌어졌는가를 다시 정리한 것인데, 각 장수들이 병권을 갖고 있다 보니 장기적으로는 황제를 우습게 보고 또 다른 분란의 원인이 된 경우가 허다했다는 것. 그렇게 술자리에서 자신의 고민을 토로함으로써 하루 아침에 군벌들의 세력을 넘겨받아 중앙으로 복속시킨다. 이 사건은 지방 군벌에 의한 군웅할거의 국면을 종식시키는 계기가 된다. 태조는 동일한 수단으로 왕언초(王彦超) 등 여러 절도사들의 병권도 자발적으로 받아내고, 지방의 행정과 재정을 모두 중앙으로 복속시켰다.

왜 황제에게 병권이 집중되어야 하는지를 설득하는 한편, 병권을 내놓은 개국 공신들에게 그에 따른 혜택도 약속했다. 그리고 동일한 방법으로 각 지방의 절도사들을 불러 역시 정직하게 설명하고 설득한 뒤, 병권, 지방 행정권, 재정권 등을 중앙 정부로 흡수하였다. 이로써 조광윤은 피를 보지 않는 무혈 숙군으로 상황을 말끔히 정리하였다. 여타 많은 나라의 초대 왕이 개국 공신에게 피 튀기는 숙청을 한 것에 비하면 꽤 특이한 사례. 물론 병권 반납에 대한 불안감을 가질 사람들을 위한 혜택은 철저하게 줬다. 조광윤은 병권을 내놓은 휘하 장수들이나 지방 절도사, 군관들을 지방의 관리로 전보하거나 토지와 재물을 하사하는 등, 공신들이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게끔 조치를 취함으로써 자신이 한 약속을 모두 지켰다.

배주석병권은 역사적으로 드문 케이스로, 후대의 귀감이 될만하다. 다만 이는 조광윤이 휘하의 장수나 군벌들과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에 가능한 일이긴 했다. 실제로 조광윤 자신조차도 처음부터 군권 회수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는데, 휘하에 있던 군인들의 설득[9]으로 군권 회수를 최종 결정했다고 한다.

물론 일각에선 배주석병권도 말 그대로 설득으로 좋게만 풀렸다기보단, 은근한 숙청 경고와 함께 잘 구슬려 결과적으로 비폭력적으로 해결되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사실 연회에서 한 말의 속뜻은 '너네 숙청당해서 뒈질래, 고향 내려가서 편하게 살래?'에 가까운 말이기도 하다. 허나 어찌 되었든 비폭력적 과정을 통해 결과까지 좋게 나왔으니 위업은 위업인 것도 사실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쉽게 처리한듯도 보이나, 사실 조광윤의 평상시 인덕과 말빨이 없었다면 공신들이 저 말에 순순히 따랐을 리도 없다.

조광윤의 사람 관리는 지금 봐도 배울 점이 있는데, 조광윤은 공신의 임지를 수시로 바꾸어 뿌리를 못 내리게 하는 식으로 세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추구하면서도, 과정적으로는 신하가 마음 섭섭하지 않게 정성을 다했다. 성의없이 임명장만 휙 던져주는 게 아니라 직접 대면하니 신하들 입장에서도 속셈은 보이지만 황제가 직접 읍소하는데 뭐라 하긴 그렇고 해서 따라간 것도 있었다.

어쨌든 많은 유혈숙청들은 권력을 빼앗긴 사람의 원한이란 게 죽기 전에는 잘 사라지지 않아서다. 그런 면에서 다 죽이는 건 거칠게 말해 많은 창업군주들이 쉽게 혹할 수 있는 나 하는 수준이지만, 권력 회수라는 목적을 달성하면서도 유혈사태를 보지 않았다는 것은 정치력이 거의 올타임 넘버탑급 수준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다.

예를 들어 중국의 역대 왕조 중에서 송 왕조와 함께 중앙집권을 지향하면서 장기 존속에 성공한 한족 통일왕조 한나라, 명나라의 사례와 비교하면 이 점은 명확하다. 일단 통일왕조가 탄생한 뒤 정국이 안정되기 위해서는 군벌(중앙정부-황제의 통제 바깥에서 군권을 가진 권신)이 없어져야 한다. 이것을 하지 못한 사례가 바로 오대십국시대의 역대(오대) 왕조들과 서진 왕조로, 이들 왕조는 일시적인 통일을 이루었을지언정 대부분 단명했다. 반면 장기 존속에 성공한 한, 송, 명 세 왕조의 경우,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왕조 초기에 공신들의 군권 회수에 성공했다는 공통점도 가진다. 다만 여기서 한, 명 왕조와 송 왕조의 차이는 토사구팽의 전형을 보여준 한, 명 왕조에 비해[10] 송 왕조에서는 공신들을 숙청하는 대신 군권만 내놓으면 편안한 여생을 보장해주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같은 목표를 지향하면서도 피를 흘리는 대신 압박과 설득으로 해결한 송 태조의 정치력이 대단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든 셈. 보통 정치력, 말빨이 떨어지면 그보다 하책인 힘으로 해결하려 들면서 여러 사람 피만 보는게 일반 사회에서도 종종 보이는 생리인지라. 게다가 피 대신 협상과 설득으로 얻어낸 결과물 역시 충분히 대단하여, 망탁조의이자성[11]과 같은 내부 반란세력의 발호로 멸망 수순에 빠져든 한/명 왕조와는 달리 송 왕조는 외부의 침략에 시달리면 시달렸지, 애산 전투에 이르기까지 역대 송 왕조에서 우대받았던 사대부들의 충성심은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여담으로, 이후 비슷한 방법으로 공신들의 재산을 꽁으로 가로채기도 했다. 공신들을 다시 모아 연회를 베풀고 술이 떡이 되도록 만들고는 부축하고 데리고 갈 각 집안의 아들들에게 '너희 아비가 국가 발전을 위해 10만 관을 조정에 바치기로 했다'라고 한 것. 공신들은 술에서 깨고 보니 자기가 지난 밤 술김에 돈을 바친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그런 말을 한 기억은 없지만 그걸 또 부정하면 황제를 능멸한 대역죄가 되니 울며겨자먹기로 바치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그런적 없다는 걸 알았어도 '폐하 왜 구라를 치십니까?' 할수는 없었다.

6. 이루지 못한 통일

조광윤은 통일을 위해 송과 대립하던 5대 10국 시대의 국가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하였고, 반항하는 군벌들을 밟아나아가면서 중국 대륙 통일 작업에 착수하였다.[12] 더불어 과거 제도를 시행하고 문치주의를 표방하면서 사회 제도 개편에 나섰다.[13] 이 과정에서 여러 공신들이 불만을 품고 반발하기도 했으나, 유혈 숙청을 싫어했고 뭐든지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조광윤은 그 때마다 필살기처럼 술자리 초청 스킬을 발휘하여 대화로 풀어나갔다. 이런 점을 보면 유화술은 타고난 사람이었던 모양.

976년 당시 오월, 북한, 청원 절도사(민나라 잔당), 귀의 절도사[14]가 남아있었다. 아쉽게도 조광윤이 같은해 사망하면서 중국 통일을 보지 못했고, 1035년 서하에게 멸망한 귀의 절도사를 제외한 다른 세력들은 송태종 시기에 복속되었다.

6.1. 수상쩍은 최후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 남은 건 송나라 북쪽에 있는 북한(北漢)과 남쪽에 위치한 오월(吳越) 정도였다. 그러나 조광윤은 중국 통일 위업을 달성하지 못하고 976년 숨을 거두고 영창릉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동생 송태종 조광의가 즉위하여 조광윤이 시작한 중국 통일 및 국가 체계 정비를 완수하였다. 다만 즉위 과정에서 의문점이 많아 혹시 조광의가 형을 암살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얘기를 들어보면 엄청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얘기인즉슨, 조광윤이 죽던 날 밤 동생 조광의가 광윤의 침실에 들어가 다른 사람들을 물리치고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신하들이 방문 밖에서 바라보니 누군가 도끼를 방바닥에 찍으면서 "그렇게 하라!" 라고 외치는 모습이 촛불 그림자로 비치었다. 이후 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조광의가 나와 "형님이 말씀하시기를, '장남 조덕소가 아직 어리고 천하일통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으니, 어린 아들을 황제로 삼으면 후주 공제처럼 나라를 잃을까 두렵다. 아우가 제위를 물려받으라.'라고 하셔서 내가 사양하니, 형님이 도끼로 나를 위협하여 어쩔 수 없이 '제위를 받겠다.'고 하자 숨을 거두셨다."라고 주장하며 제위에 올랐다.

6.2. 여러 의문점

당연히 의심할 만한 일인지라, 일부 신하들은 태조가 아니라 태조의 첩을 희롱하다 걸린 태종이 도끼를 들고 형을 위협하여 제위를 찬탈했다고 믿었다. 사실 전해지는 초상화에서 보이듯이, 이 두 형제가 서로 너무 닮아서 그림자만으로는 누군지 구분할 수 없었던 것이 이러한 의심의 근원이었다. 이 고사를 '촛불 그림자와 도끼 소리'라는 뜻의 촉영부성(燭影斧聲)이라고 한다. 이 고사가 어찌나 유명한지 정사에선 어영부영 넘어가더라도 각종 야사로 꾸준히 전해진지라 청나라 강희제가 유조에서 역대 왕조가 후사 정하던 얘기하면서 언급할 정도.

애당초 태종의 주장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당시 태자 덕소는 어린 아이가 아니라 거의 30살에 가까운 26세의 나이였다는 것이다.[15] 사실 위에서 설명한 조광윤의 즉위 과정도 작전을 계획하고 총지휘한 게 바로 동생 조광의였음을 생각하면 묘하게 섬뜩한 부분이다. 정말로 저 모든 걸 계획해서 계획대로 자기가 황제가 되었는지, 아님 형에게 충성스런 동생으로 살다가 진짜로 형이 죽기 직전 반강제로 권유해서 자연스럽게 형의 뒤를 이었는지는 당사자 밖에 모르겠지만...

또한 태종 조광의는 형수 효장황후에 대한 예우를 매우 박하게 해서 의심에 불을 지피게 했다.

당장 조선에서도 이 '도끼'일화에 대한 평가는 '세상에 그걸 누가 믿냐?' 였다.

7. 사후

참고로 이때부터 북송의 역대 황제와 남송 초대 황제 송고종대까지는 송태종의 후손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송태종의 자손이 귀했고, 송고종 이후에는 송휘종대에 정강의 변으로 송태종의 자손들이 대거 금나라로 끌려가고, 송고종의 대도 끊기면서[16] 송태조의 자손들이 황제에 오르게 된다.[17]

7.1. 한국의 조씨

한국의 성씨 중에 배천(白川)[18] 씨는 조광윤의 차남 연의왕 조덕소(趙德昭)[19]3남 위왕 조유고(趙惟固)가 시조다. 조유고는 황실의 난[20]을 피해 조지린(趙之䢯)으로 개명하고, 979년 고려로 망명해 경종대에 황해도 배천군 도태리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지린은 고려 현종대에 좌복야참지정사가 되었다. 조지린의 아들 조양유(趙良裕)는 덕종대와 정종대에 판위위사승(判衛尉寺丞)을 지냈고, 추의찬화익조공신(贊化翊祚功臣) 문하시중으로 배천군(白川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배천 조씨가 배출한 대표적 인물로는 조선의 2등 개국공신인 지중추원사 부흥군 조반과 정3품의 관직까지 올랐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직을 물리고 의병을 일으킨 중봉[21] 조헌(趙憲)이 있다.

마찬가지로 임천(林川)[22] 조씨는 연의왕 조덕소의 차남 기강효왕 조유길(趙惟吉)의 5남 조수강(趙守康)이 시조다. 조수강은 황실의 난을 피해 조천혁(趙天赫)으로 개명하고, 979년 숙부 조지린과 함께 고려로 망명해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천혁은 현종대에 강감찬과 함께 요나라를 격파한 공으로 가림백(嘉林伯)[23]에 봉해졌다고 한다. 여담으로 가수 조용필의 본관이 임천 조씨다.


[1] 현재의 허베이성 줘저우 시(涿州市)로, 유비와 동향인 셈이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유비의 충신인 조운은 송태조와 같은 조씨다.[2] 탁군은 조광윤의 본적지이고, 실제 출생지는 낙양의 협마영이다[3] 원래 곽위의 아내의 조카, 다시 말해서 곽위의 처조카이다. 고모부의 성인 곽(郭)씨 성을 받고 양자가 되었으나, 고모부가 죽은 뒤 도로 시(柴)씨 성으로 돌아왔다.[4] 물론 조광윤은 처음에 후주를 멸망시키거나 할 계획도 아니었으며 본래 후주충신으로 남길 원했으나 친인척들과 휘하 장수들의 협박 또는 강력한 설득으로 인해 결국 선양 형식으로 후주를 멸망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시영과의 의리 때문인지, 찬탈은 했어도 일족은 보전해주었다.[5] 5대10국 시대 당시 정변이 일어난 뒤 군이 도성 안에 들어올 경우, 민가를 약탈하고 백성들을 죽이는 일들이 빈번했다고 한다.[6] 이게 420년 유송 멸망 이래 징크스처럼 자리잡았다.[7] 면사금패(免死金牌)라고도 하며,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는 일종의 국가유공자 증명서 겸 개국태조가 내린 대훈장 역할을 하는 문서였다. 이것이 있다면 역적모의를 획책하지 않는 한 아무리 후대의 황제라도 함부로 벌을 내릴 수 없었다.[8] 조광윤이 특별한 건 아니고 황족만 바뀌고 지배층은 그대로 유지한 게 5대 10국 전체의 특징이다. 풍도가 대표적 예이다.[9] 군권을 가진 사람 개개인의 충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그 부하들이 엉뚱한 생각을 하고 그들에게 군권을 사용할 것을 강요한다면 어쩔 것이냐는 지적이었다. 실제 역사를 보면 이런 사례가 굉장히 많다. 당장 조광윤 본인부터가 후주의 장군으로 동분서주하다가 부하들이 술 먹이고 황제로 추대한 사람이다.[10] 사실 한나라의 국조인 한태조 유방은 알려진 것에 비하면 그렇게까지 직접적이고 가혹한 공신 숙청을 벌이지는 않았다는 견해도 오늘날 나오고 있지만, 어쨌건 유방 사후 여후 집권기에도 숙청이 일어났고 무제 시기까지도 지방 세력의 반란을 제압하는 형식으로 군권을 회수했다. 명나라주원장은 그냥 본인이 학살자라고 욕 먹어도 쌀 정도로 직접 철저한 공신 숙청을 자행했다. 그런데 더 웃긴건 그렇게 숙청하고도 정작 아들인 영락제는 숙청하지 못해 2대 황제가 된 손자 건문제가 아들에게 내전 끝에 황제 자리를 뺏기는 광경을 초래하고 만다. 그야말로 비효율 끝판왕격 숙청을 보여준 셈.[11] 명나라 다음 왕조가 청나라다보니 명나라가 청나라의 침략으로 멸망했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가끔 있으나 실제 명나라는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했다. 오히려 청나라는 이자성이 참칭한 순나라를 "천자국 명나라의 원수를 갚겠다."라는 명분으로 무너뜨려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다만 명나라의 남쪽 후신 정권인 남명은 청나라에서 병합시킨 게 맞다.[12] 조광윤의 치세 기준으로 남평, 후촉, 남한, 남당이 멸망하였다.[13] 내치에 집중한 기간이 꽤 길다. 거의 10년 가까이 되는데 즉위 이전에 시영과 함께 거슬리는 주변국은 다 패놔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정권교체로 인한 반란도 진압하여 어느 정도의 여유가 생겼기에 가능했다. 게다가 시영이 추진하던 일들을 조광윤이 적극적으로 이어받았으니 시영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일지도?[14] 오늘날 감숙성 서부에 존속했던 절도사 세력. 이곳은 고립된 위치 탓에 송나라도 형식상 절도사직을 수여하고 종주권을 확인했을 뿐이다.[15] 현대에도 이미 성인인 나이인데 그 당시에는 장성하여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였다.[16] 다만 송태종의 후손이 전멸한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송영종대에 재상을 지낸 조여우(趙汝愚)가 태종의 후손이다.[17] 송효종은 송태조의 4남 조덕방의 후손이며, 송이종송도종은 송태조의 차남 조덕소의 후손이다.[18] 황해도 배천군이다. 한자 표기는 白川이지만 백천이 아니라 배천으로 읽는다.[19] 장남 등왕 조덕수(趙德秀)는 요절해서 사실상 장남이었다.[20] 조덕소가 태종의 압력에 의해 자살한 사건이다.[21] 조헌의 호.[22]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이다.[23] 임천의 옛 이름이 가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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