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실패한 내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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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고려시대의 정변 | }}}}}}}}} |
1. 개요
三別抄之亂고려에서 1270년 5월 ~ 1273년 4월까지 무신정권의 잔당인 삼별초가 일으킨 반란. 여몽전쟁의 마무리격으로 여겨진다.
2. 전개 과정
2.1. 강화도 탈출
1270년 5월 임유무의 살해(경오정변)로 무신정권이 무너지자 원종은 그 즉시 개경 환도를 준비했다. 그러나 삼별초는 이에 반발하여 왕명을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부고를 징발했으며 여름 6월에 배중손과 노영희 등이 나라를 돕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격구장에 모이라고 했다가 모인 사람들이 달아나서 사방으로 흩어지자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강으로 돌아다니면서 군사들을 이끌고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승화후 왕온을 강제로 협박해 왕으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원종에게 마중을 나간 백관들의 처자들 다수를 사로잡았고[1] 강화도를 지키는 군사들이 많이 도망가서 육지로 나갔기에 강화도를 지키지 못할 것이라 여겨 재물과 자녀들을 모조리 실었다. 남쪽으로 내려간 삼별초가 이끄는 배는 1,000여 척이나 되었고, 이숙진과 윤길보 등이 추격하자 부락산에서 군세를 과시해 도망가게 만들었으며 이어서 김방경과 송만호 등의 추격을 받아 영흥도에 정박했다가 도망치는 것에 성공했는데, 이때 삼별초로부터 남녀 1,000여 명이 도망갔다.2.2. 진도에서의 항쟁
가을 8월에 진도에 입성하여 주변의 여러 주, 군을 침략하고 왕의 명령이라 사칭하면서 전라도 안찰사에게 백성들에게 곡식을 거둬들일 것을 독촉하게 하면서 바다 섬으로 옮겨 들어가 살게 했다. 겨울 12월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 몽골의 조서를 받들고 위로하면서 항복시키려 했지만 거절했다. 고려 조정은 1271년 몽골과 함께 여몽연합군을 편성하여 진압에 나섰는데 김방경, 홍다구, 아카이 등이 군사를 이끌고 진도를 공격하자 역습을 했지만 김방경이 돌진해 필사적으로 저항해 고전하다가 양동무가 구원하자 삼별초는 철수했다. 봄 2월에 장흥부의 조양현을 침입해 노략질을 해서 전함을 불태우고 방어도정령 진정의 군사를 격파했으며 3월에는 합포현을 공격해 감무[2]를 사로잡고, 동래군을 공격했다. 여름 4월에 금주에 침입한 후에 산성을 불태우고 노략질을 했으며 5월에 몽골군이 이기지 못하는 것을 보고 방비를 하지 않다가 김방경과 홍다구 등의 공격을 받아 놀라서 처자를 버리고 흩어졌다. 결국 진도는 9개월만에 함락되었고, 삼별초를 이끌던 장군 배중손은 전사했다.2.3.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항쟁
김방경과 훈둔 등이 이끄는 군사들의 추격을 받아 그 과정에서 승화후 왕온이 살해당하고 남녀 10,000여 명, 전함 수십 척이 여몽연합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등 큰 피해를 입자 김통정이 삼별초를 이끌고 탐라도로 향했다. 이때 삼별초 중에서 일부는 남해현을 점거하고 연해 지방을 공격해 노략질하다가 김방경 등의 공격으로 인해 탐라도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배 80여 척을 이끌고 뒤따라갔다. 1272년 봄 3월에 회령군을 공격해 조운선 4척, 여름 5월에는 대포에 침입해 조운선 13척을 약탈했으며 대포를 공격한 달에 탐진현을 불지르고 약탈했다. 금훈이 초유하기 위해 삼별초에게 향하다가 추자도를 통과할 때 금훈의 종자를 죽이고 전리를 억류하면서 금훈이 타던 배를 빼앗고 작은 배를 주어 돌려보냈다. 가을 8월에 전라도의 상공미 800석을 약탈하고 9월에 고란도를 공격해 전함 6척을 불태웠으며, 배를 만드는 장인들을 죽이고 홍주부사 이행검, 결성 감무, 남포 감무 등을 사로잡았다. 겨울 11월에 안남도호부에 침입해 부사 공유와 그 아내를 붙잡고 합포를 공격해 전함 20척을 불태우고 몽골 병졸 4명을 붙잡았으며, 거제현을 침입해 전함 3척을 불태우고 현령을 사로잡았다.이로 인해 겨울 12월에는 원나라에서 조서를 내려 군사 6,000명, 수부 3,000명을 징발하게 했다. 1273년 봄 정월에 삼별초가 10척을 이끌고 낙안군을 공격하고, 합포를 공격해 전함 32척을 불태운 후 원나라 군사 10여 명을 붙잡아 살해했다. 봄 2월에 원나라에서 훈둔(忻都, 忽敦)과 홍다구 등을 시켜 탐라도를 토벌하도록 지시하자 김방경이 정예 기병 800명을 거느리며 훈둔을 따랐다. 훈둔과 홍다구가 반남현에 주둔한 뒤에 출발하려고 했다가 여러 도의 전함들이 표류하거나 침몰했다. 여름 4월에 김방경이 훈둔과 함께 군사 10,000명, 전함 160척을 이끌고 탐라도로 향했으며 함덕포에서부터 들어갔다. 이에 삼별초가 매복했다가 고려군의 중군을 공격했으나, 김방경이 성난 소리로 꾸짖으며 고세화와 나유 등이 삼별초를 공격해 격파하자 생포한 사람이 많았다. 특히 여몽연합군 좌군의 전함이 비양도로부터 삼별초의 진지를 공격해 삼별초 병력을 무너뜨리자 삼별초 병력 대부분이 항복하면서 삼별초를 평정했으며, 전세가 뒤집혀버렸다. 참패한 김통정은 부하 70여 인을 거느리고 산 속으로 도망가 농성을 벌였으나 추격해온 여몽연합군을 당해낼수 없었고, 결국 패배를 직감하고는 부하들 전원과 함께 자살함으로써 삼별초의 난은 막을 내렸다. 이후 관군은 항복한 삼별초 장교 35명과 병사 1,300명 중에서 장군인 김원윤을 포함한 6명을 반역죄로 공개 처형했다.
3. 평가
1차 교육과정 때는 그저 반란으로 여겼으나[3] 군사정권 시기인 2차 교육과정 시기 즈음부터 국난 극복의 항쟁 중 한 사례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고려 무인의 조국 독립을 지키기 위한 민족항쟁" 같은 방식으로 소개되었다고 한다. # 군사정권의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연구된 많이 미화된 평가라는 것인데 아직 대몽항쟁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서술되는 경우도 많다. 원나라에게 저항했던 것은 맞는 사실이고, 각지의 농민과 노비들이 지지했기 때문에 민의 저항의 성격으로 볼 수 있다. 재평가의 필요성은 제시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결론은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교과서에는 이를 반영해 대몽항쟁 외에 권력투쟁과 민의저항 등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하는 것으로 보인다.삼별초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고려 관군은 삼별초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서남 해안의 모든 섬에 <공도령>(空島令), 즉 섬을 비우는 정책을 강제로 시행했다. 이 때문에 섬 주민들은 강제적으로 본토로 이주해야 했다. 게다가 이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이어지면서 공도령은 이어졌다. 이로 인해 한반도 남부에서 수천년 동안 이어져 오던 섬 지역의 문화들이 거의 소멸해버렸다. 특히 공도령을 처음부터 실시하지 않은 제주도나 <공도령>이 오래 지속되지 않은 진도군, 대몽항쟁기 고려 정부의 중심지이자 군사 요충지인 강화도 지역을 제외하면 제대로 섬 고유의 문화가 남은 곳이 거의 없을 지경이다.
게다가 삼별초는 당시 탐라 주민들에게는 전혀 환영받지 못했다.[4]삼별초 문서 참조. 뿐만 아니라 진도 주민들조차도 환영하지 않았음에도 배중손 사당이 있다. 그리고 막부에 지원군을 요청해서 오히려 지금은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 재평가를 받고 있다. 가마쿠라 막부에 지원군을 요청한 부분에 대해서 비판하기도 하나 원종 자체도 외세인 원나라를 끌여들었다.[5] 또한 삼별초가 섬주민들한테는 환영받지 못했지만 각지의 농민들과 노비들이 지지하고 참여한 부분도 있기에 민의저항 성격도 가지고 있다. 단순한 권력투쟁에 의한 반란으로 치부하기에는 복잡한 성격을 띄고 있는 것이 삼별초의 난이다.
전라도와 관련된 문제에선 이연년의 난에 대한 보복으로 전라도를 점거했다고 보기도 하는데, 삼별초의 경우는 이연년의 난을 진압한 지역인 나주를 공격하고, 오히려 이연년의 난의 중심지인 담양을 건드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면 정치 보복에 대한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시간차도 생각보다 많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역으로 삼별초가 최항을 옹립하고 김경손의 죽음에 가담했다는 점에서 보면 김경손을 도운 쪽을 쳤다는 설도 있다. 생각보다 많은 추측이 오고가는 반란 중에 하나이다.
가마쿠라 시대 후기의 공경이었던 요시다 쓰네나가가 남긴 일기인《길속기》나 《고려사》 <반역 열전>에 삼별초의 수장들이 실렸다는 점에서 보면 반역자임은 분명하지만 애초에 원종이 국내의 정적들을 자체적으로 제거하지 못했고, 무신정권이 사라진 상황에서 삼별초와 같은 사병들을 중앙군에 편입시키기보단 오히려 그들을 버린 책임도 컸다. 한마디로 원종은 외교로 탁월한 성과를 냈으나 내정에서 보여준 단점이 이 사단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삼별초가 최씨 무신 정권에 결탁한 것은 사실이나 최씨 정권을 붕괴시킨 것도 삼별초라는 점에서 보면 원종이 이런 격변기에 현명하게 행동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4. 노비들의 참가
이제까지 삼별초의 난에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자, 고려 각지에서 수많은 노비들이 삼별초에 가담했던 것이다.한 예로 1270년 12월 몽골에서 돌아온 고려 태자(충렬왕)가 가져온 몽골 황제 쿠빌라이 칸의 조서에는
“주인을 배신하고 삼별초에 가담한 노비들은 삼별초를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 그렇게 하면 노비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겠다.”
라는 내용이 있었다. 몽골 황제가 직접 삼별초에 합류한 노비 문제를 거론하는 것으로 보아, 삼별초에 몰려간 무리들 중에서 노비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만약 삼별초에 가담한 노비들이 적은 수였다면, 대제국의 주인인 몽골 황제가 굳이 조서에서 거론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1271년 1월,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는 숭겸과 공덕 등 관아에서 일하던 노비 4명이 같은 노비들을 선동하여 몽골에서 와 개경에 있었던 몽골인 관리들을 죽인 다음, 삼별초에 가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비록 음모가 들통나서 일을 꾸민 노비 4명은 모두 처형당했지만, 그 후에도 개경의 길거리에는 난동을 부리거나 관아를 습격하는 노비들이 계속 나타나서, 고려 조정이 무척 두려워했다.
노비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삼별초에 가담하려 했던 이유는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강화도의 관청에 보관되어 있었던 노비 문서들을 불태우는 식으로 노비들의 호감을 얻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100년 동안 고려를 쥐고 흔든 무신정권의 이의민과 김준 등의 집권자는 천민 즉 노비 출신이었다. 그러니 노비들의 입장에서는 만일 삼별초의 난이 성공하여 삼별초가 고려 왕실을 제압하고 고려를 지배하게 된다면, 그 삼별초에 가담한 자신들도 장차 이의민과 김준처럼 출세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삼별초와 합류하지는 않았지만, 삼별초에 동조하는 노비들의 반란이 고려 각지에서 계속 일어나기도 했다. 고려 왕실로부터 버림받고 몽골로 끌려갈 신세에 놓인 삼별초의 처지에 노비로 대표되는 고려의 수많은 하층민들이 동정심을 느꼈거나, 그들이 외친 반몽골과 반고려 왕실의 구호에 동조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이다.
이밖에도 비록 노비는 아니지만 지방 관리들도 삼별초에 동조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는데, 1271년 1월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인 밀성군에서 현지 주민들인 방보, 계년, 박평, 박공, 박경순, 경기 등이 삼별초에 호응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사람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밀성군 부사 이이를 죽이고, 자신들을 '공국병마사'라 칭하면서 여러 고을들에 삼별초에 호응하자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그런 의미에서 삼별초의 난은 피지배층의 신분 해방을 위한 항쟁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6]
5. 기타
- 1260년 여몽전쟁이 아직 한창이던 시기, 당시 집권자였던 김준은 수도인 강화도를 제주도로 천도하기 위해 나득황[7]을 파견하여 제주도를 조사했다. 이는 삼별초의 난보다 11년 앞선 일이었다. 그러나 김준의 실각으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다만 고려 무신정권이 강화도가 몽골군의 위협을 받거나[8] 혹은 함락당할 위기에 처한다면, 몽골군을 피해 제주도로 수도를 옮기려는 계획은 세우고 있었는데, 여몽전쟁 말기에 몽골군한테 항복한 고려 관리들이"강화도의 고려 조정이 장차 몽골군을 피해 바다 깊은 섬(제주도)으로 달아나려 한다."
라면서 고려의 기밀 정보를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6. 관련 문서
[1] 그냥 인질이 아니라 젊은 여자들은 강제로 겁탈하여 자신들의 아내로 삼았다.[2] 지방관의 일종[3] 일부가 굳센 고려 무인의 정신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민족 항쟁으로 여겨지진 않았다.[4] 다만, 김통정이 제주도민을 배려하는 행적을 보였고, 제주도 남부 지방에는 그에 대한 호의적인 전승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제주도민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삼별초를 반대시한 건 아닌 듯하다.[5] 백제 또한 나당연합군에 대항하기 위해 왜군을 끌어들인 역사도 있다. 다만 백제의 경우에는 외침이었고 삼별초의 경우에는 내전이라서 비교대상이라고 보기 힘들다. 진압군측(원종), 반란군측(삼별초) 양측이 모두 외세를 끌어들이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내전상태에서 양쪽 모두 외세를 끌어들인 갑신정변하고 비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6] 출처 : 《실업이 바꾼 세계사》 / 도현신 지음 / 서해문집 / 88~90쪽[7] 이 사람은 제주도에 가서 무자비한 수탈을 벌여 제주도민을 쥐어 짯고, 도민들에게 도둑놈 소리까지 들었다고 한다.[8] 실제로 여몽전쟁 말엽에 몽골군은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 있어서 고려가 계속 저항하자, 함대를 만들어 강화도를 직접 공격하려는 시도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