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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욱/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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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초기 생애3. 조조에게 임관4. 서주 대학살5. 복양 전투6. 삼보의 난7. 조조 휘하8. 완 전투9. 양 전투10. 관도대전11. 하북 평정12. 조조 휘하13. 형주 정벌14. 조조 휘하15. 죽음

1. 개요

순욱의 생애를 서술한 문서.

2. 초기 생애

《전략》에 따르면 중상시 당형(唐衡)이 자신의 딸을 여남 사람 부공명(傅公明)에게 시집보내려고 했지만 공명이 승낙을 하지 않자 순욱에게 보내려고 했다. 순욱의 아버지 순곤은 당형의 권세를 생각하여 순욱에게 당형의 딸을 맞이하게 하였다.[1] 사람들은 순욱이 그 사실을 속였다고 한다.[2]

순욱이 어릴 때 남양의 하옹이 순욱을 기이하게 여기며 이렇게 말했다.[3]
왕을 보좌할 재능을 가지고 있구나! [4]

《어림》에 따르면 공숭은 젊어서 스무 살이 안 되었을 때, 순욱과 함께 태학에서 유학했다.

3. 조조에게 임관

<종요전> 주석 《후한서》에 따르면 음수는 영천태수로 있을 때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했다. 그 가운데 오관연 장중, 찰공조 종요, 주부 순욱, 주기연 장례, 적조연 두우, 효렴 순유, 계리 곽도 등은 모두 국가의 동량이 되었다.

189년, 효렴으로 천거되어 수궁령에 배수되었다. 동탁의 난 때, 외직으로 나가 보필하는 관리가 되길 구하였다.[5] 항보 현령에 제수되었으나, 마침내 관직으로 버리고 돌아와서 고향의 부로들에게 말했다.
영천은 4면에서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땅인데, 천하에 변란이 있어 항상 군대의 충돌이 생길 것이니, 마땅히 이곳을 떠나 오래 머무르지 마십시오.
고향 사람들이 많이 땅을 생각해 주저하며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기주목으로 같은 군 사람인 한복이 기병을 보내 맞이하려 하게 되자, 따르는 자가 없으니 순욱만 그의 종족들을 데리고 기주에 이르렀다. 원소가 이미 한복의 지위를 박탈하였으나, 순욱은 중요하고 지위가 높은 손님의 예로 대우했다. 순욱의 형제 순심 및 같은 군 사람인 신평, 곽도는 원소에게 임명되었다. 순욱은 원소가 끝내 대사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때 조조가 분무장군이 되어 동군에 있었는데, 191년, 순욱은 원소를 버리고 조조를 따랐다.[6] 조조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나의 자방(장량)이로다.
그리고는 사마로 삼으니, 이때 나이가 29세였다. 밑에서 서술하듯이 이 시기에는 순욱이 항상 종군하며 조조의 전투를 보좌하였다고 한다.

이때에, 동탁의 위세가 천하를 능멸하고 있었는데, 조조가 순욱에게 묻자 순욱이 말했다.
동탁의 포학이 이미 극심하여 필히 변란으로 끝날 것이니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동탁이 이각 등을 보내니 관동으로 나가 가는 곳마다 노략질하고 영천, 진류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고향 사람들 중 머물러 있던 자들은 많이 살해되고 노략질당했다.

다음 해 조조가 연주목을 맡고, 후에 진동장군이 되었는데, 순욱을 항상 사마로서 종군케 했다.[7]

4. 서주 대학살

194년, 조조가 도겸을 정벌하면서 순욱을 연주에 머물게 해 남은 일을 맡겼다. 즉, 당시 순욱은 서주로 같이 가지 않았으므로 그에게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우기엔 어렵다.[8] 다만 조조의 첫 번째 주(州) 단위 외정인 서주전에서도 순욱의 조언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학살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아니면 '조조의 우발적 행동이었고, 따라서 순욱은 나중에야 이를 알았다'가 될 텐데 일단 조조에 대한 충성과는 별개로 순욱은 백성들 상대로의 학살이 전략적으로 이득이 없는 행위임을 알고 있었다. 조조가 다시 식량사정 등의 문제로 서주를 치려고 했을 때 순욱은 도겸이 비록 죽는다고 해도 서주는 망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패배를 거울 삼아 단결하고 있다고 했으며 보리를 거두고 성을 굳건히 하고 청야작전을 펼치고 있으니 열흘도 안 되어 10만 병사들이 궁핍해질 것이라 말한 다음[9] 이어서 이런 말로 말리기도 했다.
장군께서는 본래 연주에서 일을 시작하였으니, 먼저 평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서주가 평정되지 않는다면, 장군께서 어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전에 서주를 토벌할 때 위벌(威罰)이 실행되어 그 자제(子弟)들이 부형(父兄)의 치욕을 생각하니 필시 사람들마다 스스로 지키려 하며 항복하려는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설령 격파할 수 있다 해도 가히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정사 순욱전

'위벌'이라고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이로 인해 서주 백성들의 자제들이 아버지와 형제가 (조조에게) 치욕을 당해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한 점에서, 순욱 역시 이걸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으니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순욱의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아 서주 대학살로 잃은 민심으로 인해 서주 출신 인재들이 대항 세력에게 가는 계기가 되었다. 대표적 서주 출신이 바로 제갈량노숙.

5. 복양 전투

장막진궁이 연주로써 배반하여 몰래 여포를 맞이하게 되었다. 여포가 이르자, 장막이 이에 유익(劉翊)을 시켜 순욱에게 알렸다.
여장군은 조사군(조조)이 도겸을 치는 것을 도우러 왔으니, 마땅히 빨리 군사와 식량을 주시오.
사람들이 다 의심스러워했다.

순욱은 장막이 반란을 일으켰음을 알고 곧 병사를 이끌고 대비를 했으며, 동군태수 하후돈을 빨리 불러들였지만, 연주의 여러 성이 모두 여포에게 호응했다. 이때 조조의 모든 군대는 도겸을 공격하고, 남겨서 수비하던 병사는 적었고, 감독하던 장수와 큰 관리들이 장막, 진궁과 많이 남몰래 서로 통하여 공모하였다. 하후돈이 도착하자, 그날 밤에 모반하였던 자 수십 인을 주살하니, 군대가 이내 평정되었다.

예주자사 곽공이 군사 수만을 이끌고 성 아래에 이르렀다. 혹자들은 곽공이 여포와 같이 모반을 일으켰다고 말하니, 군사들이 심히 두려워했다. 곽공이 순욱을 보려 하니 순욱이 가려고 했다. 하후돈이 말했다.
그대는 한 주의 중요한 인물로, 가면 반드시 위험하게 될 것이니 가면 안 됩니다.
순욱이 말했다.
곽공이 장막과 본래부터 결탁한 것은 아니며, 지금 빨리 온 것은 그 계책이 반드시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오.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때 그를 설득하면 중립을 하게 할 수 있으나, 만약 먼저 의심한다면 저들은 장차 노하여 계책을 완성할 것이오.
곽공이 순욱을 만나는데 두려운 뜻이 없고, 견성은 쉽게 공격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 하에, 마침내 병사를 이끌고 가 버렸다.

<정욱전>에 따르면 장막이 모반하여 여포를 맞이하자 군현들이 이에 호응했으나, 오직 견성현, 범현, 동아현만은 동요되지 않았다. 이때 당시 연주는 9개 군 80현으로 이루어졌으므로 3현을 제외한 77개 현, 즉 대략 96.25%의 영향력을 상실한 것이다.

여포군에 항복한 자들이 진궁이 직접 병사를 이끌고 동아현을 취하려 한다고 말하자, 다시 범의를 시켜 범현을 공취하게 하니,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순욱이 정욱에게 말했다.
지금 연주가 반란을 일으켜서, 우린 오직 이 3성만 가지고 있소. 진궁이 막강한 군대로 임한다면, 깊이 그들의 마음을 붙들어 두지 못해 세 성은 반드시 동요할 것이오. 당신은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자이니, 돌아가 저들을 설득한다면 거의 괜찮아질 것이오.

정욱과 계획을 세워 범현, 동아현을 설득해, 마침내 3성을 보전하고 조조를 기다렸다.
<정욱전> 주석 《위서》에 따르면 정욱이 어렸을 때 일찍이 꿈에 태산(泰山)에 올라 두 손으로 해(日)를 받드는 꿈을 꾸었다. 정욱이 혼자서 이를 기이하게 여기다가 순욱에게 말해 주었다. 연주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자 정욱의 공에 힘입어 세 성을 보전하게 되었다. 이에 순욱이 정욱의 꿈을 조조에게 말해 주니 조조가 경이 끝내는 내 심복이 되리란 꿈이오라 했다. 정욱의 본래 이름은 립(立)이었는데, 조조가 이에 립(立) 위에 일(日)을 더하게 하여 이름을 욱(昱)이라 고쳤다.

조조가 서주에서 돌아와 복양에서 여포를 공격하니, 여포는 동쪽으로 달아났다.

195년, 조조가 승씨에 주둔했는데, 큰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 먹을 지경이었다. 도겸이 죽으니 조조가 마침내 서주를 취하고, 돌아와 이내 여포를 평정하고자 했다. 순욱이 말했다.
장군께서는 본래 연주에서 일을 시작하였으니, 먼저 평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서주가 평정되지 않는다면, 장군께서 어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이전에 서주를 토벌함에 위엄과 형벌로 실행해서 사람마다 반드시 스스로 지키며 항복할 마음이 없으니, 가서 격파할 수 있다 해도 아직 우리 소유로 할 수 없습니다.
조조가 이내 그쳤다. 보리를 크게 거두고, 다시 여포와 싸우며, 병사를 나눠 여러 현을 평정하게 했다. 여포는 패주하고, 연주는 마침내 평정되었다.

6. 삼보의 난

196년, 조조가 황건을 격파했다. 한 헌제가 하동에서 낙양으로 돌아왔다. 조조가 황제를 받들어 맞아 허(허도)에 도읍을 정하는 것을 의논했는데, 혹자가 산동은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한섬양봉이 새로 천자를 데리고 낙양에 도착하고 북으로 장양과 연계되어 있어서, 끝내 제압할 수 없다고 했다. 순욱이 조조에게 천자를 받들어 모시는 것(奉)은 백성들의 여망을 따르는 것으로 이는 큰 순리라 권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조조가 장차 천자를 영접하려 하자 제장들 중에 간혹 반대하는 자가 있었으나, 순욱, 정욱이 권하자 조홍을 보내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천자를 영접하도록 했다. 위장군 동승이 원술의 장수 장노와 함께 험준한 곳을 막고 있었으므로 조홍은 진군할 수 없었다.

조조가 마침내 낙양에 이르러 천자를 받들고 허에 도읍했다. 천자가 조조를 대장군에 배수하고 순욱을 시중으로 승진시켜서 상서령을 관장했다. 항상 중용을 지키며 엄중함을 가졌다.

7. 조조 휘하

《전략》에 따르면 순욱은 아랫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자신을 낮추었으며,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을 대하지 않았다. 정치를 행하는 관청에서 정치에 관한 논의를 할 때에는 자신의 사사로운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순욱에게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조카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순욱에게 이렇게 물었다.
일을 처리할 때 조카와 상의하지 않고 왜 반드시 의랑과 함께 논의합니까?
순욱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관직이란 재능이 드러나야 출세를 하는 법이오. 만약 그대의 말처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소?
순욱의 공평하고 공정한 마음은 이와 같았다.

조조가 정벌 때문에 밖에 있으면서, 군무와 국정의 일을 모두 순욱과 계획했다.

《전략》에 따르면 순욱의 사람됨이 아주 훌륭하고 아름다웠다고 했다.

<예형전>에 따르면 예형은 조조에게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고 하고는, 또 순욱은 큰 몸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조융은 올챙이배를 가진 것을 본 적이 있었으므로, 이렇게 대답했다.
문약(순욱)은 상가에 조문이나 가는 데 쓰면 좋을 것이고, 치장(조융)은 주방장이나 하면서 손님 접대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10]

순욱은 용모가 뛰어났고 조융은 배가 커서 아무것이나 잘 먹는 대식가였다.

<예형전> 주석 순욱의 비문에 따르면 순욱을 아름다운 자태와 기이한 모습을 갖추었다고 했다.

<유소전>에 따르면 태사(太史)가 글을 올려 말했다.
정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을 것입니다.
유소는 당시 상서령 순욱의 관부에 있었다. 앉아 있는 사람의 수가 몇 십 명이었는데, 어떤 이는 새해에 지내는 조묘의 제사를 폐지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조회를 뒤로 물려야 된다고 했다. 유소가 말했다.
성인이 제도를 정할 때, 변이 때문에 먼저 조례를 폐지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어떤 때는 재난과 변괴가 점점 사라져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미리 알아보는 기술에 잘못이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순욱은 그의 말에 매우 찬성하였다. 명령을 내려 조회를 옛날처럼 하도록 하자, 일식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만총전>에 따르면 이전에 태위를 역임했던 양표가 체포되어 현의 옥으로 보내졌다. 상서령 순욱, 소부 공융 등은 모두 만총에게 부탁했다.
단지 죄상에 대해 설명을 듣는 것에 그치고 형벌을 가하지는 마시오.
만총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법에 따라서 심문했다. 며칠이 지나, 만총은 조조에게 만나기를 요청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양표를 심문했지만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사형에 처해야만 되는 자는 먼저 그의 죄를 명백히 밝혀야만 하는데, 이 사람은 명성이 있으므로 만일 죄가 명확하지 않으면 명공(明公)은 반드시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잃게 될 것입니다.
조조는 그날 중에 양표를 사면하여 석방시켰다. 처음에 순욱과 공융은 만총이 양표를 엄하게 심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매우 화를 냈었지만, 이러한 결과를 얻게 되자 오히려 만총에게 감사했다.

조조가 순욱에게 물었다.
누가 능히 경을 대신해 나를 위해 계모를 짤 수 있겠소?
순욱이 말했다.
순유종요입니다.
이에 앞서 순욱이 책략을 짜는 선비를 말하면서 희지재를 천거했다. 희지재가 죽자 곽가를 천거했다. 조조는 순욱이 사람을 알아본다고 여겨서, 여러 순욱이 천거해 이른 사람들은 모두 합당한 직위를 가졌지만, 오직 양주(揚州)자사가 된 엄상과 양주(凉州)자사가 된 위강만이 후에 자리를 잘못 잡아 패망했다.

<두기전> 주석 부자에 따르면 두기는 형주에서 귀향한 후, 허현에 가서 시중 경기를 만나, 밤을 세우며 이야기를 나눴다. 상서령 순욱과 경기는 저택이 인접하였으므로 순욱은 한밤에 두기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훌륭한 인재로 여겨 사람을 보내 경기에게 물었다.
나라의 훌륭한 선비가 있음에도 추천치 않다니, 귀공은 자신이 왜 관직에 있는지도 모르는 건가?
두기와 만난 후 순욱은 그를 이해하기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이처럼 하였다. 결국 두기를 조정에 추천하게 되었다.

<유방전> 주석 <손자별전>에 따르면 상서령 순욱이 손자를 만나 감탄하며 말했다.
북방의 주는 전쟁의 상황이 오래되어 그곳의 현명하고 지혜 있는 사람들이 모두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다시 손계군(손자)을 만났으니!
그리고는 상주하여 상서랑으로 삼아 머물게 하려고 했으나 집안의 난리를 핑계 삼아 하동으로 돌아왔다.

<순욱별전>에 따르면 순욱은 전후로 뛰어난 인재를 여러 사람 추천했다. 그 가운데 고향 사람으로는 순유, 종요, 진군이 있었으며, 하내에서는 사마의가 있었다. 또 당대에 이름난 사람으로는 치려, 화흠, 왕랑, 순열, 두습, 신비, 조엄과 같은 사람도 있었다. 이들 가운데 공경의 반열에 오른 사람만 10명이 넘었다. 인재 가운데에는 일반적인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희지재, 곽가 등은 세속의 법도를 어기기도 했으며, 두기는 오만하고 학문이 얕았지만 모두 뛰어난 지혜와 책략으로 천거되어 각자 이름을 날렸다. 순유도 나중에 위의 상서령이 되어 역시 많은 인재를 추천했다. 조조는 이 두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순(二荀)[11]이 논한 사람은 더욱 믿을 만하다. 나는 영원히 그것을 잊지 못할 것이다.

8. 완 전투

조조가 천자를 영접한 이후로 원소는 내심 불복할 마음을 품었다. 원소가 이미 황하 이북 지역을 병합하자 천하가 그 강성함을 두려워했다. 조조는 때마침 동으로 여포를 걱정하고 남으로 장수를 막고 있었는데, 장수가 완성에서 조조군을 패배시켰다.

원소가 더욱 교만하져 조조에게 글을 보냈는데 그 말이 패악하고 오만하였다. 조조가 크게 노하여 평소와는 달라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장수 일로 이로움을 잃은 것 때문이라 생각했다. 종요가 이를 순욱에게 묻자 순욱이 말했다.
공께선 총명하므로 반드시 지난 날의 허물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마도 다른 생각이 있을 것이오.
이에 순욱이 조조를 뵙고 물어보니 조조가 이내 원소의 편지를 순욱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이제 장차 저 불의한 자를 토벌하고자 하는데, 힘이 상대가 되지 않으니 어찌해야겠소?
순욱이 말했다.
지금 공과 천하를 다투는 자는 오직 원소뿐입니다. 무릇 네 가지 이기는 것으로 천자를 보필하고, 의를 가지고 정벌하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원소의 강성함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 도량: 원소는 겉으로는 관대하나 남에게 일을 맡겨도 그의 마음을 의심하지만, 조조는 재능으로서만 그 마땅한 바를 맡긴다.
  • 모책: 원소는 지지부단하여 결단이 적어 후에 기회를 잃는데, 조조는 대사를 결단하며 임기응변으로 정해진 방법이 없다.
  • 무력: 원소가 비록 사졸들이 많다고 해도 군대를 거느림에 관대하고 느슨하여 법령이 제대로 서지 않으니 그 실상은 쓰기 어렵다. 조조는 비록 사졸이 적지만 법령이 분명하고 상벌을 반드시 행하여 모두 죽을 때까지 싸운다.
  • 덕: 원소는 선대의 자금에 힘입어 꾸미고 명예를 거두어들이기에 선비들 중 능력은 작지만 묻기 좋아하는 자들이 많이 그에게 귀부하는데, 조조는 천하의 충정과 실효가 있는 선비들은 모두 기용되길 원한다.

조조가 기뻐했다. 순욱이 말했다.
여포를 먼저 취하지 않으면, 하북 또한 쉽게 도모하지 못합니다.
조조가 말했다.
그러나 내가 걱정되는 것은 또 원소가 관중을 침범해 소란스럽게 하고, 강족, 호족에게 난을 일으키게 하며, 남으로 촉한을 유인할까 두려우니, 이것은 나 혼자 연주와 예주로써 천하의 5/6를 대항하는 것이오. 장차 어찌하면 좋소?
순욱이 말했다.
관중의 장수는 십수명이지만, 능히 서로 하나로 하지 못하고, 오직 한수마초만이 가장 강성합니다. 저들이 산동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것을 보면, 필히 자기 군대를 껴안고 스스로를 보호할 것입니다. 종요는 가히 서쪽 일(외교)을 맡길 수 있으니, 공께서는 걱정할 바가 없습니다.

9. 양 전투

<무제기>에 따르면 조조가 군을 이끌고 퇴각하려 하는데 장수의 군사들이 추격해 와 조조의 군이 전진할 수 없자 둔영을 연결하며 점차 전진했다. 조조가 순욱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적이 와서 우리 군을 추격해 와 비록 하루에 몇 리밖에 행군하지 못하지만 내가 헤아려 보건대 남양군 안중현에 도착하면 반드시 장수를 격파할 수 있소.
안중에 도착하자 장수가 유표의 군사와 합쳐 험지를 지키니 조조의 군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조조는 밤중에 험지를 뚫어 땅굴을 만들고 치중(輜重)을 모두 지나게 한 후 기병을 두었다. 날이 밝자 적은 조조가 달아났다고 여겨 전군이 추격해왔다. 이에 기병을 풀고 보병과 기병으로 협공하여 적을 대파했다.

가을 7월, 조조가 허도로 돌아왔다. 순욱이 조조에게 물었다.
이전에 적을 반드시 격파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조조가 말했다.
적이 퇴각하는 군사인 우리 군을 막아서서 사지(死地)에서 맞붙어 싸우니, 이로써 나는 우리가 반드시 승리할 줄 알았소.

10. 관도대전

헌제춘추》에 따르면 동승이 죽고 나자 복황후는 아버지 복완에게 편지를 보내 사공(조조)이 동승을 죽였으니 황제께서 원한을 갚아달라고 한다고 했다. 복완은 그 편지를 순욱에게 보여주었더니 순욱이 그 편지를 보고 증오하면서 오랫동안 감추고 말을 하지 않았다.

198년, 조조가 이미 장수를 격파하고 동쪽으로는 여포를 사로잡아 서주를 평정하여, 마침내 원소와 서로 항거하게 되었다. 공융이 순욱에게 일러 말했다.
원소는 땅이 넓고 병사가 강합니다. 전풍, 허유는 지모의 선비로 그를 위해 계책을 짜고, 심배, 봉기는 충성을 다하는 신하로 자신의 직임을 맡고 있으며, 안량문추는 용맹함이 전체의 군대 중에 으뜸이라 그 병사를 통솔하고 있으니, 아마 이기기 어려울 것이오!
순욱이 말했다.
원소의 병력은 많으나 법령이 정비되어 있지 않소. 전풍은 강하나 윗사람을 거스르고, 허유는 탐욕스러워 다스리지 못하오. 심배는 제멋대로 하여 지모가 없고, 봉기는 과감하나 스스로를 판단하니, 이 두 사람을 남아 뒷일을 처리케 한다면, 허유의 가족들이 법을 범하여 풀려나지 못하면 허유는 변란을 일으킬 것이오. 안량과 문추는 한갓 필부의 용맹일 뿐이어서, 한번 싸워 사로잡을 수 있소.

그리고 이 평가들은 신기할 정도로 맞아떨어져서, 그 장수들은 순욱이 평가한 단점이 원인이 되어 최후를 맞이하였다.
  • 원소: 병력은 많으나 법령이 정비되어 있지 않음. >"최강의 세력이었으나 자신의 독단과 카리스마만으로 세력을 이끌어 왔고 1인자인 자신이 죽자 세력이 분열되고 결국 조조에게 각개 격파되었다."
  • 전풍: 강직한 성품을 지녔으나 윗사람을 거스른다.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간언하다 원소에게 미움을 사 옥에 갇힘"
  • 허유: 탐욕이 심하여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 반드시 배반할 것이다. > "부정부패가 들통나, 심배가 원소에게 비방할 명분을 주었고 결국 배반하여 조조군에 항복한다, 거기다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말대로 조조군에 항복한 이후 조조에게 심하게 허세와 거만을 떨다가 조조에게 미움을 받아 죽는다"[12]
  • 심배: 독단적이며 계획성이 없다. >"본인들의 이익을 위해 봉기와 함께 원상을 제멋대로 옹립해 원가의 분열을 조장"
  • 봉기: 과단성이 있지만, 스스로의 판단에 따른다. >"봉기 또한 본인들의 이익을 위해 심배와 함께 원상을 제멋대로 옹립해 원가의 분열을 조장. 그나마 과단성 있다는 평답게 용기 내어 원담과 원상의 중재를 나섰으나 그 용기가 독이 되어 죽고 만다. 직접 원담에게 찾아가 원담과 원상의 협력을 유도하던 와중 결국 화가 난 원담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 안량, 문추: 필부의 용맹을 가졌으니(= 용맹은 하나 지혜가 없다) 한 번의 싸움만으로도 사로잡을 수 있다. >"안량은 관우의 무예에 패배하여 사망, 문추는 순유의 계략에 의해 사망"

당시 원소군은 대륙 최강이었는데 그에 비해 순욱의 평가는 너무나도 박하다. 아마 강대한 적을 앞에 두고 세력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단점만을 과장해서 비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순욱의 비평이 그들의 최후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순욱이 원소군을 잘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몇몇 인물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을 어떤 사람들이 주목하기도 하는데, 원소군에서 지위가 높은 순욱의 친척[13], 동문들의 경우 언급을 피했거나 혹은 원소군 멸망 이후 비판 내용을 생략했을 수 있다는 추측이 있다.[14]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더라도 저수는 빠질 이유가 없기 때문에, 어쩌면 순욱이 단점을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인재 아니냐는 주장도 존재한다. 다만 순욱의 이 비평은 공융의 발언에 대한 반론이라 그냥 단순히 공융이 언급한 인물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다보니 생략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후자면 공융이 순욱 눈치본건가

200년, 원소와 연이어 싸웠다. 조조가 관도를 보전하고 있자, 원소가 이를 포위하였다.

무제기에 따르면 이때 조조의 군량이 적어 순욱에게 서신을 보내 허도로 돌아가는 일을 의논했다. 순욱이 말했다.
원소는 모든 군을 관도에 집결시켜 공과 더불어 승패를 결정하고자 합니다. 공은 지극히 약한 것으로 지극히 약한 것을 감당해야 하는데, 만약 이를 능히 제압하지 못한다면 필시 저들이 이를 틈탈 것이니 이는 천하를 가름하는 관건입니다. 게다가 원소는 평범한 사내로 사람을 끌어 모으는 일에는 능하나 그들을 제대로 쓰지는 못합니다.
조조가 이 말에 따랐다.

조조군의 군량이 막 다해가려 하니, 순욱에게 글월을 보내 허도로 돌아가 원소를 유인하고자 하는 방법을 의논했다. 순욱이 말했다.
공께서는 1/10의 군사로 땅을 지키고 있으며, 나아가지 못하게 한 지 이미 반년이나 되었습니다. 정황을 보아하니 세력이 고갈되어 필히 장차 변란이 생길 것이니, 이는 빼어난 계책을 쓸 때이므로 놓쳐서는 안 됩니다.
조조가 이내 머물렀다.

안량과 문추는 진영에 임해 머리를 준 꼴이 되었으며, 심배는 허유의 가족이 법을 어겼다 하여 그 처자를 잡아들이자, 허유는 노하여 원소를 배반했다. 마침내 날랜 병사로 원소가 주둔한 곳을 습격하여 그 장수 순우경을 베어버리니, 원소가 패퇴하여 달아났다. 전풍은 간언하다 주살되었으니, 이 모든 것이 순욱이 계책을 세운 바와 같았다.

201년, 조조가 동평군 안민현에 가 곡식을 받았는데 군량이 적어 하북과 서로 상대하기에 부족하여, 원소가 최근 격파된 틈을 타서 그 사이 유표를 쳐서 토벌하고자 했다. 순욱이 말했다.
지금 원소는 패배하여 그 군사들의 마음이 떠났으니, 마땅히 그의 곤란함을 타서 마침내 평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연주와 예주를 등지고 멀리 장강과 한수에까지 군사를 이끌고 갔다가, 원소가 그 나머지 무리를 거둬 들여 빈틈을 타 후방에서 나온다면, 공의 일은 성사되지 못할 것입니다.
조조가 다시금 하수(황하)가에 주둔했다.

11. 하북 평정

원소가 병으로 죽었다. 조조가 하수를 건너 원소의 아들 원담, 원상을 공격하였으나, 고간곽원이 하동 지역을 침략하자, 관서 지역이 진동했는데 종요마등 등을 거느리고 이를 격파했다.

203년, 조조가 순욱의 전후의 공을 기록해 표를 올리니 순욱을 봉하여 만세정후로 삼았다.

<순욱별전>에 따르면 순욱이 야전에서 공을 세우지 못했다고 사양하자 조조의 표는 시행되지 못했다. 조조는 순욱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와 더불어 함께 일을 해 오면서 조정을 바로 세울 때, 그대는 함께 페하를 크게 보필했으며, 그대와 함께 수많은 인재들을 추천했고, 그대와 함께 여러 가지의 계책을 세웠으며, 그대와 함께 비밀리에 모략을 꾸민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야전에서 공을 세우지 못했다는 말로 사양을 하지 마시오.
순욱도 더 이상 사양을 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204년, 조조가 업성을 함락시키고, 기주목을 맡았다. 어떤 자가 조조를 설득하길 마땅히 말했다.
옛 제도를 부활해 구주(九州)를 두면, 기주가 담당하는 곳이 광대하여 천하가 복종할 것입니다.
조조가 이 의견을 따르려 하자, 순욱이 말했다.
사람마다 절로 자신의 토지를 보전하지 못하고 그 병사를 지킬 수 없을까 두려워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땅을 나눠 기주에 속하게 하면, 장차 모두 마음이 동요하게 될 것입니다. 또 사람들이 관서 지방의 여러 장수들에게 설득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사실을 듣는다면, 반드시 차례대로 빼앗기게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조조가 마침내 구주의 의논을 그치게 하였다.

이때 순유가 항상 일을 주장하여 꾀하는 사람이 되었다. 순욱의 형인 순연은 감군교위로서 업성을 지키며, 하북의 일을 모두 감독하였다. 조조가 원상을 정벌할 때, 고간이 은밀히 병사를 보내 업성을 습격할 것을 모의했는데, 순연이 반역을 알아차리고 모두 다 주살하니, 그 공으로 열후에 봉해졌다.

조조가 그 딸을 순욱의 장자 순운에게 시집보냈는데, 후에 안양공주라 칭해졌다. 순욱과 순유는 같이 귀중해졌지만, 모두 겸손하고 검소해, 녹봉은 종족이나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집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두기전>에 따르면 조조가 하북을 평정한 뒤, 고간이 병주를 이끌고 반역했다. 원소군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고간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는 매우 큰 위협으로 닥쳐왔는데, 조조는 초기 진압에 실패하였고, 이에 순욱은 두기를 고간이 장악한 하동군에 보내었다. 예상대로 두기는 내부에서 反고간 세력을 규합해 고간 진영을 혼란시켰다. 이에 고간이 직접 이를 수습하기 위해 나섰으나 실패하였고 마등 또한 조조 측에 가세해 상황이 역전되었다.

<두기전> 주석 《부자》에 따르면 순욱은 두기의 용기는 큰 곤란에 맞서기에 충분하고, 지혜는 변화에 응하는 것이 가능하니, 그를 시험삼아 써봐야 한다고 칭찬했다.

207년, 다시 순욱의 식읍을 1천 호 늘려 이전과 합쳐 2천 호가 되게 하였다.

<순욱별전>에 따르면 조조가 올린 표에서 말했다.
그의 뛰어난 모략과 남다른 공로는 신으로서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전에 상과 녹봉을 받은 것은 순욱의 빼어난 공로를 생각하면 너무도 미약하오니 거듭 그의 공을 가늠하시어 적절하게 식읍을 하사하시기 바랍니다.
순욱이 다시 정중하게 사양하자 조조는 그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책모에 대한 보답은 두 번 표를 올리는 것으로도 모자란다. 두 번 다 다시 사양을 한다면 이는 겸양도 너무 지나친 일이다.
조조는 다시 표를 올려 순욱을 삼공(三公)으로 삼으려 했지만 순욱은 순유를 보내 한사코 사양했다. 몇 차례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자 조조는 더 이상 표를 올리지 않았다.

12. 조조 휘하

순씨가전에 따르면 진군공융이 여남과 영천의 인물에 대해 토론을 할 때 진군은 이렇게 말했다.
순문약(순욱), 공달(순유), 휴약(순연), 우약(순심), 중예(순열)는 당대에 상대를 할 사람이 없다.

<순욱별전>에 따르면 당시는 정벌을 통해 창업을 하느라고 여러 가지 제도를 다시 수립해야 했다. 순욱은 조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한 적이 있다.
마땅히 유학에 통달한 인재를 천하에서 널리 모집하고, 그들로 하여금 육경을 연구하고 강론하게 하며, 전기를 간행하고 고금의 학문을 보존하되, 번잡한 것을 없애어 참다운 성인의 학문을 하나로 정립해야 하며, 아울러 예학을 일으켜 점차 교화를 두텁게 하는 일이 왕도와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순욱이 조조와 함께 정치의 도에 대해 토론한 것이 이와 같았으며, 조조도 항상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병원전> 주석 <병원별전>에 따르면 병원이 조조를 만나고 난 후에 돌아갈 때 군중의 사대부들 가운데 병원을 따라나서는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조조가 그것을 괴이하게 생각하여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그 연유를 물어보자, 마침 순욱이 조조의 곁에 앉아 있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병원에게 물어보아야만 알 것입니다.
조조가 말했다.
저 사람은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사대부의 마음까지 기울게 하는가?
순욱이 말했다.
저 사람은 당대의 이인이자 사대부들의 자존심입니다. 공께서는 예를 다하여 대접해야 합니다.
조조가 말했다.
정말 나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다.
이후로 조조는 병원을 더욱 정중하게 대했다.

<화타전>에 따르면 화타는 허현의 감옥으로 넘겨졌으며, 심문을 받고 죄를 시인했다. 순욱이 조조에게 간청하여 말했다.
화타의 의술은 확실히 매우 정통합니다. 사람의 목숨이 걸려있는 바이니 그를 당연히 용서해야 합니다.
조조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천하에는 이런 쥐새끼 같은 자가 없어야만 하오.
그리고 화타를 가혹하게 고문했다.

13. 형주 정벌

조조가 장차 유표를 토벌하려고 순욱에게 어디로 출정해야 하는지 계책을 물으니 순욱이 말했다.
지금 중원은 이제 평정되었으니 남쪽에서는 곤란함을 알 것입니다. 완성과 엽 사이로 나와 샛길로 가벼이 진군한다면, 불의의 곳에서 엄습하게 될 것입니다.[15]
조조가 마침내 출정했는데, 유표가 병들어 죽었다. 조조가 순욱의 계책처럼 완성과 섭현 사이를 곧장 내달려 가자, 유표의 아들 유종은 형주를 들어 항복했다.

<괴월전>에 따르면 조조가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형주를 얻은 것은 기쁘지 않으나, 괴이도(괴월)을 얻은 것은 기쁘오
라 하였다고 한다.

14. 조조 휘하

<전주전>에 따르면 법을 집행하는 곳의 관리는 전주를 탄핵하여, 그는 본성이 교활하고 도를 어기며 작은 절개를 내세우고 있으니, 응당 그의 관직을 박탈하고 형벌로 처벌해야 된다고 했다. 조조는 이 건의를 매우 신중하게 생각하며, 오랜 시간을 끌었다.

<전주전>에 따르면 상서령 순욱과 사예교위 종요 또한 전주 본인의 뜻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주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순욱은 이렇게 말했다.
군자의 도는 혹은 세상으로 진출하고 혹은 머물러 쉬는 데 있으나, 그것을 적당한 때에 맞출 뿐입니다. 그러므로 필부는 뜻을 고집스럽게 지키기만 하고, 성인은 각자의 할 일을 이루고자 노력합니다.

《어림》에 따르면 순욱은 나중에 형주자사가 되었으나, 공숭은 집안이 가난하여 신야리의 머슴과 함께 하인이 되었다. 순욱이 어느 날 출타했다가 공숭을 만나 마차에서 내려 손을 붙잡고 말했다.
옛날엔 자네와 함께 부채를 흔들며 함께 태학에서 유학했는데, 지금 자네는 하인이 되었으니 나 역시 애통하네!
순욱이 공숭을 대속해 주라고 명했으나, 공숭은 머슴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의 곧은 절조가 이와 같았다.

<순욱별전>에 따르면 순욱은 덕행을 두루 갖추었으며, 정도가 아니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외의 영걸과 준재들이 모두 자신의 군주의 조상으로 여겼다. 사마의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책에서 전하는 오랜 일들을 나는 목전에서 나의 눈과 귀로 보고 들었다. 백수십 년 동안 순령군(순욱)에 미치는 남보다 뛰어난 재주는 없었다.[16]

<순욱별전>에 따르면 종요는 안자(顔子)가 없는 상황에서 구덕(九德)을 갖추고 있으면서 허물이 없는 사람이 없었지만, 순욱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사람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이 종요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순욱의 우아하고 중후함을 안자와 비유하면서 자신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는데, 무슨 근거로 그러한 말을 하십니까?
종요는 이렇게 말했다.
조조는 총명하기가 짝이 없을 정도이지만, 큰 일이 있을 때에는 항상 순군(순욱)에게 먼저 자문을 구합니다. 우리들은 명을 받아 행동을 하지만, 순욱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행동을 하더라도 주군의 뜻과 그리 멀지 않습니다.

세설신어보에 따르면 유계화가 일찍이 말했다.
순영군(순욱)이 남의 집에 가면 그가 앉았던 곳에서 늘 사흘 동안 향기가 난다.
[17]

마초의 거병에 대해서도 진언을 했던 기록이 있다. 

마등이 조조에게 귀순한 뒤 몇 년이 지나 건안 16년(211년) 3월, 조조 휘하에서 손꼽히는 부관들인 종요하후연이 하동을 거쳐 장로를 토벌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자 마초를 비롯한 관중의 제장들은 이것이 한중 정벌을 핑계 삼아 관서를 압박하기 위한 조치가 아닌가 의심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비단 관서 현지인들만의 것이 아니었는지, 조조의 속관으로 있던 고유(高柔)가 다음과 같은 진언을 올리기도 했다.
 
대군이 서쪽으로 출병하면 한수와 마초는 자신들을 칠 것이라고 의심하여 반드시 서로를 부추기며 군사를 움직일 것입니다. 마땅히 먼저 삼보三輔(=관중)의 사람들을 불러들여 평안케 해야 합니다. 삼보가 평정되면 한중은 격문 한 장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능히 평정할 수 있습니다.[18]
 
그러나 어째서인지 조조는 고유의 말을 무시했다.

이때 관서 제장들은 겉으로는 귀부했으나 내심은 믿을 수 없었다. 사례교위 종요는 3천 병을 청해 관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겉으로는 장로를 친다고 칭했으나 내심 실제로는 그를 위협하여 인질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위기 역시 고유와 같은 의견을 냈다.
서방의 제장들은 모두 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켰으므로 천하에 웅거할 뜻이 없으니 실로 눈 앞의 안락을 구할 뿐입니다. 지금 국가에서 이들을 후하게 대우해 작호를 더해주어 그 뜻을 이루게 해 준다면 중대한 사고가 없는 한 변고를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의당 그 후에 도모해야 합니다. 만약 군사를 일으켜 관중으로 들어가 장로를 토벌한다면 장로는 깊은 산에 있어 도로가 통하지 않을 것이고 저들이 필시 의심을 품을 것입니다. 한번 놀라서 동요하게 되면 땅이 험하고 무리들이 강성하니 그 위태로움은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순욱이 위기의 의견을 조조에게 보고했다. 조조는 처음에는 그 말을 옳게 여겼으나 종요가 스스로 자신의 임무를 관장해야 한다고 하여 마침내 종요의 의견에 따랐다.[19]

그렇게 211년 종요가 부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자 마초가 무리를 통솔하게 된 후 마침내 한수와 굳게 맹세하여 서로 응하고 한수, 후선, 정은, 양추, 이감, 성의, 마완, 장횡, 양흥 등 10명의 제장들이 일제히 거병하여 도합 10부로 함께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각 부곡에서 징집된 병사가 1만 명씩은 되어 연합군의 규모는 총 10만 명을 헤아리는 어마어마한 대군이었다.[20] 종요와 하후연이 서쪽으로 기어이 출진하고 나자 그들은 더 이상 군사적 위협을 참지 않겠다는 듯 군사를 연합해 조조가 당황하게 만들 대군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들은 위수(渭水) 북단을 단숨에 가로질러 관중 지역 최고의 요새인 장안성을 그대로 통과, 그 동쪽에 있는 동관(潼關)을 점거하고 조조군과 대치했다. 이들은 하수, 동수 일대를 점거하고 진영을 벌여 세웠다. 사서에서는 군벌들의 총 병력이 10만이라고 적고 있으며 액면 그대로 믿지 않더라도 6~7만 이상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21]

15. 죽음

헌제춘추》에 따르면 복완이 처의 동생인 번진에게 편지를 보여주자 번진은 그 사실을 조조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조조는 몰래 대비를 했다. 순욱은 그 사실이 발각될까 두려워서 스스로 내막을 밝히려고 사람을 업으로 파견하여 조조의 딸을 황제의 배필로 삼으라고 권고했다.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조정에는 복황후가 있는데, 내 딸을 어떻게 주상의 배필로 삼겠는가? 나는 미미한 공으로 재상의 지위에 올랐지만, 어찌 또 딸의 힘을 빌려서 권세를 누리겠는가?
순욱이 이렇게 말했다.
지금 복황후는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성정이 흉악하여 항상 그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흉악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황후를 폐해야 합니다.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경은 전에 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가?
순욱이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에 이미 공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조조는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일이라지만 내가 잊을 리가 있겠는가?
순욱은 다시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자세히 생각해보니 공에게 그러한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전에 공께서 관도에서 원소와 대치하고 있을 때 집안 일로 격정을 많이 하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어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조가 다시 꾸짖듯이 말했다.
관도에서 일이 끝난 후에는 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가?
순욱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사죄를 할 뿐이었다. 조조는 이 일로 순욱에게 한을 품게 되었지만 겉으로 용서하는 척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다.

배송지는 순욱처럼 현명한 사람이 멍청하게 나오고 순서가 맞지 않는다며 이 기록의 신빙성을 부정했다. 진위가 의심받기는 하지만 이 헌제춘추의 기록이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조조와 순욱 사이의 빈틈은 이때부터 만들어졌을 것이다.

212년, 동소는 조조의 작위를 국공(國公)으로 올리고 구석을 갖추어 남다른 공훈을 표창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은밀히 순욱에게 자문하였다. 순욱은 조조가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조정을 바로잡고 나라를 편안히 하기 위함이어서, 충정의 진심을 잡아 물러나 겸양하는 내실을 지켜야 하므로, 군자는 덕으로 남을 사랑해야지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했다.[22] 조조가 이로 인해서 마음 속으로 평안할 수 없었다.

헌제춘추》에 따르면 동소가 귀공을 세우자고 건의를 했을 때 순욱은 동의를 하지 않고 조조를 찾아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고 했다. 군사들에게 음식을 보내 위로를 하도록 하라는 조칙이 내려지자 잔치가 끝나기를 기다렸던 순욱은 뒤에 남아서 잠시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조조는 순욱이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 관한 일을 말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모두 읍을 하고 물러나도록 했다. 순욱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권을 정벌할 때, 표를 올려 순욱이 초에서 군사를 위로하길 청하여, 이로 인해 순욱을 남겨두고 시중 광록대부 지절로서 승상의 군사에 참여케 했다. 여기서 자기 부하인 순욱을 사용하는데 왜 요청이 필요했는지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아래 서술하듯 중국 황실 관직은 외조와 내조로 나뉘었는데 외조의 수장은 승상을 비롯한 삼공이었고 조조 집권 당시 승상부가 최고 권력기관에 오르므로 조조 본인이었다. 그리고 순욱은 내조의 최고 권력자인 상서령이었다. 물론 순욱은 조조의 부하였지만 일단 관직상 승상 권력의 밖이자 황제의 직속기관인 내조의 우두머리였으므로 황제에게 표를 올려 허가를 받을 필요는 있었다. 조조가 권력을 다 쥐고 헌제는 꼭두각시였으므로 단지 형식상의 문제였기는 하지만...

이 부분 또한 토사구팽의 개념으로 읽히고는 하는데, 순욱에게 군사적 능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는 조조를 대신하여 본진을 관리하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그가 군사활동에 나선 건 오로지 조조의 세력이 미미하였을 때나, 조조가 없는 동안 조조 세력에게 위기가 닥쳐왔을 때뿐으로, 조조에게 입신한 초창기 혹은 조조가 정벌에 나선 동안 본진에서 군대를 일으켜야 할 때뿐이었다. 여포, 진궁, 장막의 배반에서 연주를 지켰을 때나, 고간의 반란으로 허창에서 군대를 일으켜 사예주를 공격하였을 때가 예시. 그런 그를 조조가 자신의 정벌에 이끌고 간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례였고, 직전에 순욱과의 사이가 벌어지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변화는 부정적인 것으로 읽히고는 한다.

<문제기> 주석 《전론제자서》에 따르면 후에 군이 남정하며 곡려에서 머무르는데, 상서령 순욱이 사신으로 군을 위로하다, 조비의 담론이 끝나감을 보더니 말했다.
듣기론 군께서 좌우로 활을 쏘는 것이 훌륭하시다던데, 이는 실로 능히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조비가 말했다.
집사께선 아직 제가 목덜미에서 쏘거나 입에서 쏘면, 말굽이 구부러지고 월지(月支)가 젖혀짐을 보지 못하셨습니다.
순욱이 즐거워 웃으며 뜻밖이라고 말했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조조의 군대가 유수에 이르렀을 때 순욱은 병이 걸려 수춘에 남았는데, 걱정하다 죽으니 이때 나이가 49세였다. 다음 해 조조는 마침내 위공이 되었다.

반면 《위씨춘추》에 따르면 조조가 순욱에게 음식을 내렸는데, 열어 보니 빈 공기여서[23] 이에 독약을 먹고 죽었다. 《자치통감》에서도 순욱이 병을 이유로 수춘에 머물다가 약을 마시고 죽었다고 적고 있다. 265년, 순욱에게 태위를 추증했다. 시호를 경후(敬侯)라 했다.[24]

<순욱별전>에 따르면 순욱은 상서령이 된 이후에 자신이 한 일을 항상 글로 써서 남겨두었다가 죽을 때가 되자 모두 불로 태워 없앴다. 그러므로 그의 기책과 밀모는 알 수가 없게 되었다.

헌제춘추》에 따르면 순욱이 수춘에서 죽자 수춘을 도망친 어떤 사람이 손권을 찾아가 조조가 순욱에게 복황후를 죽이라고 했지만 순욱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자살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손권은 그 사실을 촉에 알렸다. 유비는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늙은 도적이 죽지 않았으니 환란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1] 당형은 164년에 죽었으니 당시 순욱이 결혼할 때 나이는 유아기였다.[2] 청류파 명사였던 순씨의 자제가 환관 일족과 맺어지는 것에 대하여 주변으로부터 비판을 받은 것이다.[3] 하옹은 젊을 적 조조의 재능을 간파했고, 후에 순유와 함께 동탁 암살을 계획한 인물이다.[4] 보통 연의의 영향을 받아 관상을 통해 그 인물의 운명을 파악한 것처럼 묘사하는 작품들이 많고 많은 사람들의 인식도 그러한 편이지만 사실과는 다르다. 실제로는 단순한 인물평으로, 저런 신비적 요소가 아닌 해당 인물의 언행을 잘 관찰한 후에 그것을 기초로 평가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인물평. 당대에는 유력인사의 이런 인물평이 출세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5] 당시는 동탁이 소제를 폐하고 헌제를 제위에 올리던 시기이다.[6] 삼방순욱라는 고사성어가 있지만 삼고초려와 다르게 정사에는 없으며 사후 민중들에 의한 창작인 것으로 보인다. 순욱이 제갈량에 자연스레 대치되다 보니 이러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냥 단순히 이런 이야기가 창작될 정도로 조조 세력 내 순욱의 위상이 높았다 정도로 생각해둘 썰이라고 보면 된다. 이 부분에서 각색되어 삼국전투기, 삼국지톡 등에서는 본래 원소의 부하였다가 조조로 넘어간 것으로 묘사하나, 위에 설명하듯 부하가 아니라 손님으로 대접받다 넘어간 것이다.[7] <무제기>에 따르면 조조가 진동장군이 된 것은 196년 협천자 이후이고 진동장군 고작 3개월 하고 9월에 대장군으로 승진했다고 한다. 순욱이 조조를 종군한 것은 이때까지의 초기 정도뿐이고 대체적으로 순욱은 조조를 대신해 본거지 수비와 내정을 주로 맡게 된다. 191년에 조조의 밑으로 갔고, 아래 내용을 보면 194년 전후로는 이미 본거지를 담당하였다가 여포 세력의 배신으로 조조 세력이 크게 약화됨에 따라 종군을 했다고 볼 수 있다. 191년부터 196년까지의 기간 도중에 본진 관리 역할을 맡던 적도 있으니 순욱의 참군 경력은 길어도 3년 정도일 것이다.[8] 192년에 조조가 연주목을 맡고, 후에 진동장군이 되었는데, 순욱을 항상 사마로써 종군케 한 적이 있다. 무제기의 일에 따르면 조조가 진동장군이 된 것은 196년의 일이므로 196년 즈음에도 종군하는 일이 있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포-진궁-장막의 배반 당시(194년) 본거지를 맡고 있던 걸 생각하면 이 시기 이전에도 이미 안방관리를 전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서주 관련 첫 사건이 일어난 초평 4년 (193년)을 기준으로 했을 시 순욱의 정확한 행보를 예측하기는 어려우나 순욱의 다른 발언들을 볼 때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포 측이 대립하며 조조 세력은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가 2년에 거쳐 회복하였는데, 이때가 대략 196년이다. 이를 고려하면 "조조 세력 초창기 종군 > 조조 세력이 확장되며 본진 관리 > 여포 세력의 득세로 조조세력이 큰 타격을 입으며 세력 축소 > 다시 종군 > 조조 세력 회복 > 다시 본진 관리에 전념"이라는 흐름일 경우 대략적으로 앞뒤가 맞는다.[9] 배송지는 이때 서주를 평정하지 못하고 연주 또한 반란을 일으켜 십만의 군사라 말하였다. 비록 억누르고 막는 말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작고 약한 전쟁이 아닌 것이다. 관도의 일을 하는 것이 이로운 것을 알게 되어, 부득이하게 병사들이 불만을 많이 가질 것이라 일컬었다고 했다. 이는 파성넷 등지에서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정사 삼국지 주석으로 나무위키에서 번역되었음을 밝혀둔다.[10] 예형의 이 비방에 대해 배송지는 참신한 해석을 하였는데, 다른 사람의 험담만을 말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예형도 순욱의 외모가 좋은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는 실례로써 들고 있다. 조조 패거리를 대표해서 조문을 가는 얼굴마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말이니까.[11] =순욱과 순유[12] 연의에선 화가 난 허저에게 죽임을 당한다.[13] 당장 순욱의 형인 순심이 원소 휘하에서 종사하고 있었다.[14] 실제로 원소 휘하 인물 중 순욱과 같은 영천군 호족 출신 인물들(순심, 곽도, 신평 등) 중에서 비판을 한 이는 없다. 특히 이들 중 곽도는 위에서 깐 인물들 이상의 삽질을 한 인물인데도 불구하고.[15] 중원이 평정되었으니 조조 세력의 강성함을 남쪽 지역도 알고 있다. 크게 전쟁을 벌이기보다 가볍게 군사를 일으켜 위협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16] 사마의 또한 순욱을 크게 존경하였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크게 존경하면서 동시에 본인과 같은 청류파 출신인 순욱이 조조에게 반쯤 정치적 숙청을 당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후 사마 가문이 조조 가문을 배신하는 것에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을 거라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17] 이 일화에 대해서는 다른 2차 창작엔 나오지 않았지만, 대군사 사마의에서 채택하여 작중 순욱은 언제나 손님을 맞이할 때 집안에 여러 개의 향초를 태워 은은한 향을 낸 다음 대화를 나누었다.[18] 삼국지 위서 고유전[19] 위기전 주석 위서[20] 배송지 주 전략[21] 연의와 달리 마초가 장안을 점거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정사 삼국지 내에 없다. 장안 너머에 있는 동관을 포위했다고 나와 정황상 장안을 점거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은 있으나 직접적으로 마초가 장안을 함락했다는 식의 기록은 없으며 장안 점거를 한 건 아니고, 장안에서 못 기어나오게 위협만 한 후 우회를 하였다는 것이 대세. 실제 드라마 삼국에서도 이걸 염두에 둬 마초가 장안을 무시하고 동관으로 바로 진격하는 식으로 나온다.[22] 순욱은 한나라를 유지하겠다는 정치적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23] 순욱의 존재가 조조에겐 빈 공기와 같다는 뜻이다. "쓸모가 다 한 그대를 다시는 중히 써주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또는 빈 공기를 보냄으로써 "너는 이제 내가 녹(음식, 월급)을 주는 게 아까우니까 앞으로 내가 주는 밥 먹을 생각도 하지 마라."처럼 음식을 일체 취하지 말라는 뜻으로, 스스로 죽으라는 의미다.[24] 시법에서 공경 경(敬)은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일을 공경하게 하고 훌륭하게 법을 집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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