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15:12:39

에어푸르트 변소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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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주요한 생존자 하인리히 6세.
<colbgcolor=#ffcc21><colcolor=#000> 역사적 정보
날짜 1184년 7월 26일 (그레고리력)
장소 신성 로마 제국 마인츠 선제후국
에어푸르트 성 베드로 성당
사고 유형 붕괴로 인한 추락사/익사/질식사
인명 피해 60여 명 사망
언어별 명칭
독일어 Erfurter Latrinensturz
이탈리아어 lIncidente della latrina di Erfurt
영어 Erfurt latrine disaster

1. 개요2. 발단3. 전개4. 피해자5. 이후6. 기타

[clearfix]

1. 개요

에어푸르트 변소 사고[1]1184년 7월 26일 에어푸르트의 페테르스베르크 성내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일어난 붕괴 사고다. 이 사고가 유명해진 이유는 단순한 붕괴 사고라기에는 경위가 너무나 황당했고 피해자들이 신성 로마 제국의 고위 귀족들이었기 때문이다.

2. 발단

1182년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작센 공작 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사자공이 국외로 추방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하인리히 사자공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다. 사자공은 무려 2개의 공작 작위를 겸직하며 바르바로사 황제보다도 훨신 넓은 직할 영지를 보유하고 있었고, 동방식민운동에서 슬라브족을 연파하며 넓은 동방 국토를 획득하며 독일 국민들에게 큰 국민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반면 바르바로사 황제는 직할 영지가 사자공보다 훨씬 작은데다가, 독일 국내 정치는 내팽개치고 로마 황제의 후계자를 꿈꾸며 수십년간 연거푸 이탈리아 원정을 떠났지만 1176년 레냐노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며 개망신을 당하고 전유럽의 웃음거리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레냐노 전투 참패로 사망설까지 나돌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온 바르바로사 황제는 체면이 말이 아니었고, 당장 다른 귀족들이 약해진 황권에 도전할 가능성도 커졌다. 실제로 바르바로사 황제보다 훨씬 넓은 직할영지를 보유하고 있었던 사자공이 자의이던 다른 귀족들의 추대로건 황권에 도전할 가능성이 그 어느때보다 높았다. 이에 바르바로사 황제는 치밀한 정치 공작으로 유력 귀족들을 우호 세력으로 포섭한 후 긴급히 궐석재판을 열어 하인리히 사자공이 레냐노 전투 때 지원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아웃로라고 선포한 후 그를 공격했다. 아웃로가 된 하인리히 사자공은 동맹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황제에게 패해 장인의 영지인 잉글랜드 왕국으로 피신했다. 황제보다 훨씬 방대한 영지를 가지고 있었던 사자공이 추방된 후 바르바로사 황제는그의 영지는 모조리 몰수 처리하여 자신을 지지한 귀족들에게 뿌려졌다. 다만 프리드리히 1세가 죽은 후 제국 회의에서 뒤늦게 바르바로사 황제의 영지 몰수가 잘못되었다는 결의가 나왔지만, 이미 되돌리기는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막대한 하인리히 사자공의 땅을 나누다 보니 귀족들 간의 분쟁이 종종 발생했는데 대표적인 분쟁이 바로 튀링겐 방백 루트비히 3세와 마인츠 대주교 콘라트 간의 분쟁이었다.

다른 분쟁들과 달리 이 둘 간의 분쟁은 갈수록 뜨거워졌다. 튀링겐 방백국과 마인츠 선제후국은 루트비히 3세의 아버지 루트비히 2세 때부터 영지 문제로 싸워온 앙숙이었던 것도 있고 두 사람이 어느 한쪽을 찍어 누르기 어려울 만큼 대등하게 높은 사람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루트비히 3세는 황제의 조카였고 콘라드 대주교는 제국 재상이었는데 둘의 분쟁은 2년 넘게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당시 로마왕이었던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하인리히(미래의 하인리히 6세.)가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하인리히는 군대를 이끌고 폴란드 왕국을 치러 가는 길이었는데 마침 행선지에 두 귀족이 분쟁을 벌이던 지역인 에어푸르트가 있어 에어푸르트에 멈춰 제국의회를 개최했다. 이 문제는 제국 전역의 귀족들에게 흥미롭게 받아들여졌는데 단순한 두 사람의 영지 분쟁뿐만 아니라 장차 세속 귀족과 종교 권력이 영지를 놓고 싸울 때의 판례가 될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쟁의 당사자인 두 귀족은 물론 많은 귀족들이 의회 참석을 위해 에어푸르트에 모였다.

3. 전개

7월 26일, 에어푸르트의 페테르스부르크 성에서 의회가 개최되었다. 정확한 개최 장소는 페테르스부르크 성 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의 2층 교구장실이었다. 로마왕 하인리히와 분쟁의 당사자인 두 귀족, 그리고 수십 명의 귀족들과 그들을 따르는 수행원들이 북적북적하게 모였다.

참석해야 할 인원들이 모두 모이고 로마왕이 회의를 개회하는 순간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 교구장실 바닥은 목재 바닥이 낡은 데다가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게 설계되지는 않은 탓에 방 바닥이 통째로 무너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추락했고, 심지어 재판 당사자인 튀링겐 백작 루트비히 3세까지 떨어졌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떨어졌기에 1층 바닥도 추락의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부서지면서 사람들은 지하에 있는 화장실 배수로[2]까지 빠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성 베드로 성당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방 안에 있던 사람 중 추락하지 않은 사람들은 돌로 된 창문가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던 로마왕 하인리히와 마인츠 대주교 콘라드, 그리고 그들의 수행원 몇 명뿐이었다. 이들은 방 바깥 복도에서 무너진 바닥을 가로질러 사다리를 놓아서 구출했다.

당시 성의 화장실 배수로는 말이 배수로지 움푹 파인 부분이 깊어 실질적으로 똥통이나 다름없었다. 배수로에 빠진 이들은 대소변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똥물에 빠져죽거나 썩은 대변이 뿜는 유독가스에 중독되어 죽어갔으며, 일부는 무너진 바닥 자재에 맞아죽기도 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많지 않았으며 겨우 구조되었다.

4. 피해자

  • 지겐하임 백작 고즈마르 3세
  • 아벤베르크 백작 프리드리히 1세
  • 키르쉬베르크 성관백[3] 프리드리히 1세
  • 슈바르츠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 바르트부르크 성관백 부르하르트
  • 멜딩겐 백작 베링게르 1세

위 여섯 명은 성 베드로 성당 연대기에서 확실하게 이 사고로 사망했음을 전하고 있는 귀족들이며 그 외에 50여 명 이상이 사망했다. 참여자의 대부분이 백작들이었기 때문에 백작 피해자가 많았으며 수행원들도 많이 희생되었다. 적은 수지만 구출된 사람들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튀링겐 방백 루트비히 3세가 화장실 배수로에서 구출되었다.

5. 이후

당연히 제국의회는 취소되었다. 눈앞에서 건물이 무너지고 귀족들이 끔찍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직관한 로마왕 하인리히는 충격에 빠져 혼이 다 빠져라 달려 긴급히 에어푸르트를 떠났다. 직후 폴란드와의 강화도 맺어져 결국 하인리히는 괜히 길을 나섰다가 변만 당할 뻔한 꼴이 되었다. 그해 말에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직접 나서서 이 사건의 발단이 된 분쟁을 중재했다.

6. 기타

  • 이 사건의 전개가 워낙 충격적이고 개연성이 없어 황당하기 때문에 유머화되었다. 현실이 그다지 개연성은 없다는 것의 예로 자주 이야기된다.
    사실 구국의 위인이 어느 날 돌에 걸려 넘어지는 류의 사건에 비하면 그럴 만한 이유는 있는 편이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회의실로 쓰인 교구장실은 애초에 집회를 위해 만든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정해진 용도 외의 용도로 공간을 활용하면 여러 문제를 겪곤 하는데[4] 건축 기술이 미흡해 최대 하중 자체가 크지 않았던 과거에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다만 한 국가의 중대사를 논한다는 이야기의 맥락에서 보자면 갑작스러운 건물 사고로 논의가 중단되었다는 것이 황당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 하도 어처구니 없이 터진 참사인데다 인간의 존엄성을 똥통밑바닥까지 떨구는 더러운 사인까지 겹치다 보니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한 사극은 물론이고 서양 배경의 판타지 작품에서조차 이 사고 및 거기에서 따온 전개나 사건을 다룬 적이 없다.
  • 중국사에도 이와 같은 사고로 사망한 군주가 있는데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의 28대 국군인 진경공으로 병입고황 고사성어의 주인공이다. 이 양반도 정말 어처구니없게 변소 바닥이 무너져내려 익사하였는데 세계 역사상에 이처럼 비참하게 죽은 사람은 드물 정도로 처참하게 사망했다.


[1] Latrine의 의미상 똥통 사고라고도 한다.[2] 중세의 화장실이런 식(사진은 런던탑 화장실)으로 생겼다.[3] 성을 영지로 삼는 백작위. 타국의 자작과 비슷한 급으로 취급받았다.[4] 가까운 예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본래 지하에 둘 예정이었던 온돌 바닥 식당을 최상층으로 올린 것이 사고 원인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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