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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에 의한 독일 점령 기간의 강간

1. 개요2. 소련군3. 서방 연합군4. 관련 문서

1. 개요

베를린을 돌아보니 우울한 기분이 들었소. 우리는 괜찮은 한 민족을 몰살하고 그들을 소련공산주의 야만인들로 대체하려 하고 있소. 이제 유럽은 전부 공산주의자들의 차지가 될 것이오. 듣자하니 베를린을 점령하고 1주일 동안 소련놈들은 도망치는 여자들은 쏴죽이고 도망치지 않은 여자들은 모조리 겁탈했다고 하오. 만약 정부가 허락했다면 소련군 대신 내가 베를린을 점령했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오.
조지 S. 패튼. 1945년 7월 21일자 부인에게 보낸 편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및 종전 직후 연합군에게 접수된 독일 영토에서 연합군 병사들에 의해 자행된 독일 여성들에 대한 대규모의 복수성 강간. 연합군에 의한 독일 여성들의 강간 피해는 전후에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유럽 각국에서 저지른 악행들로 인해 수십 년 동안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었다.[1] 그나마 냉전이 종식된 후에는 21세기 들어 서방 국가에서는 특히 소련군 범죄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소련 내무인민위원부(NKVD)는 내부 문건에 지도부가 강간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완화하는 데 효과가 없었다고 기록하였다.[2] 영국의 군사역사학자 안토니 비버(Antony Beevor)는 소련 내무인민위원회(NKVD) 문건들을 증거로 들어 소련 지도부가 이러한 실태를 알고 있었지만 멈추지 않았다는 내용의 책을 발표했는데, 그의 책들은 일부 러시아 학교 및 대학들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다.

사실 독일 민간인 여성들만 강간의 대상이 되었던 것도 아니며 한반도의 여성도 38선 이북 지역[3]에서는 강간을 당해서 부녀자들이 이를 피하기 위해 남장을 했다고 알려져 있고 만주에서도 이런 사건이 있었으며 # 프랑스, 북유럽 등 독일군 점령 지역의 민간인 여성들도 수복 후 종종 서방 연합군이나 자국 남성에 의해 강간의 대상이 되었다.[4] 주로 독일군 병사들과 성관계를 했다는 이유로[5] 나치와 붙어먹은 년 취급을 받으면서 '정당한' 강간의 대상이 되곤 했는데, 이는 애국심 등으로 포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여성을 빼앗긴 소유물로 보는 남성 중심적이고 마초이즘적인 범죄에 불과했다. 즉, 본질적으로 나치즘과 동일한 것이었으며 실제 사회에서도 종종 벌어지는 강간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재강간 범죄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고, 강간까지 당하지 않더라도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차별 받는 여성들도 많았다.

보복이라고 해도 독일 남성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범죄가 독일 여성들을 대상으로 저질러졌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는 남성 집단에 의한 여성 대상 범죄의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 따라서 특정 국가의 편향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사안이 왜곡되거나 프로파간다로 흐르기 쉽다. 즉, 전쟁 중에 국적과 상관 없이 남성 군인들에 의해 여성 민간인이나 여군들이 강간 당했다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전쟁과 관련된 주제에서 늘 그렇듯이 독일 우익이나 네오나치들이 이것을 거론하면서 물타기를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반공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소련을 가해자로 놓고 독일을 피해자로 놓는 관점은 이미 1960년대 이전부터 서독에서 성행했으나 당시에는 의외로 서독에서도 이 부분을 잘 거론하지 않았으며, 베를린의 여인의 원작 수기도 출간되자 강한 반발을 샀던 사례가 있는데 이것은 '성범죄에 대한 폭로'라도 피해자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던 당시에는 '오히려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냐'는 관점이나 '독일 여성들의 명예를 실추 시킨다'는 시각 때문이었다.[6] 한편 한국에서는 주로 북한에서 이런 일이 있어 피난민의 구전에 의해 이런 일을 거론하여 정보를 얻기 어려웠고 여성의 명예를 실추 시킨다는 관점은 적었지만 대신 남북관계와 관련하여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에 대한 보복을 두려워하여 # 이런 언급을 꺼리는 분위기는 있었다. 북한 내부에서는 이런 과정을 통해 혼혈아가 태어났는데 은근히 그들이 북한에서 손가락질을 받았다는 증언을 하는 경우도 있다. #

2. 소련군

소련군 병사에게 강간 당한 독일 여성의 수는 무려 200만 명을 상회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대부분 피해 여성들은 한 차례만 강간 당한 것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 윤간 당했으며 많은 경우 60~70회에 이르는 강간을 당하기도 했다. 피해 여성의 나이는 8세에서 80세까지 다양하며 강간 피해자 중 관련 사망자는 24만 명으로 추산된다.

베를린에서는 강간 피해자 10%가 강간에 의한 내상 혹은 소련군에 의한 살인으로 희생되었고 생존자 20%는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여(11,560건) 이 가운데 90%의 여성들이 낙태를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전체 신생아 가운데 5%가 러시아인에 의해 강간 당해 출산한 사례였는데(1,156명) 피해자 200만명의 추산 통계는 상기된 숫자들과 비가임 여성(월경을 하지 않는 유년기 소녀들과 갱년기 여인들)의 강간 통계들을 합산 및 역산한 후 전체 독일에 소급적용하여 산출된 수치다.

초기에 소련군은 강간에 대한 엄벌은커녕 강간을 방임하였다가 그로 인한 문제가 계속 발생하고 통제가 안 되기 시작하자 뒤늦게나마 보복성 전쟁범죄 단속을 시작해 엄벌했으며, 장교나 정치장교들이 해당 현장을 목격했을 경우 구두 경고 없이 바로 권총을 꺼내들어 가해 병사를 즉결 총살하기도 했다. # 피해자가 1만 명대일 경우는 적당히 하라는 구두경고가 고작이었으나 비공식 집계만으로도 1백만 명 이상이 강간 당하자 그제서야 불명예 제대와 수용소행, 총살형으로 경고하기 시작했고 이미 상당한 피해와 다수의 사망자들이 발생한 뒤였다. 하필이면 유복한 베를린의 가정에 술을 보관한다는 소문이 퍼져 오랜만에 이 약탈한 술들을 마시고 거나하게 정신줄을 놓은 다음 날에야 광란을 벌였음을 알게 된 일도 많았으며, 소련 군 장성들은 이에 인도주의 차원이 아니라 소련 포로들과 등가교환할 점령국 시민들을 죽여선 안 된다는 이유로 소련 여군들을 차출해 베를린의 성범죄 피해자를 진료하게 했다.

창작물에 등장한 사례로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자전적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에서의 하루>에서 언급된 독일 여성을 강간하고 굴라크에 끌려온 소련군 병사 2명의 사례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논픽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는 언급된 약탈과 성폭행을 저지른 사람이 총살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후자의 경우 강간을 당하고 크게 다친 베를린 여성은 자신을 치료해 준 소련군 소녀병사 출신 간호장교에게 군법에 의해 가해자를 총살할 것이니 혐의자들을 지목하라는 요구를 받고 눈 앞에서 더 이상의 피를 보는 것이 두렵다며 지목을 포기해 처형되지 않았다. 이 간호병사는 훗날 알렉시예비치에게 이 일화를 말하면서 도무지 이해가 가진 않지만 이것이 바로 전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라고 말한다. 해당 피해 여성은 치료를 받고 회복하라는 의미로 큰 빵을 한 덩이 받고 떠난 후 행방에 대해 알려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동포들을 죽인 나치에 대한 반감에 기계적으로 환자를 치료했다는 소련 의사들과 간호병들에 따르면 그들이 베를린을 탈환한 후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소련군에 의한 강간 사건은 전적으로 독소전쟁에 대한 보복성을 띠고 있는데, 독소전쟁은 알아도 이러한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도 그런 이유다. 당시 독일도 전쟁 동안 수많은 소련인 여성들을 강간하고 학살했으며 저지른 범죄가 너무 많다 보니 상대적으로 묻혀버린 셈이다. 소련계 유대인이자 기관지 '붉은 별'의 칼럼니스트 일리야 예렌부르크는 이제부터 독일인은 어느 누구라도 사람으로 대우해선 안 된다는 내용의 선전물을 썼는데, 베를린을 탈환한 소련군들은 당시의 자신들을 일컬어 그렇게 풍족한 삶을 살면서도 만족하지 않고 가난한 조국을 침략한 독일을 용서할 수 없어 그들의 인종 청소에 버금가는 짓으로 복수할 각오 덕분에 살아 있었다고 말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익명으로 알렉시예비치에게 베를린의 아동과 청소년 강간까지 저지른 것을 후회한다고 고백했다.

한편 폭력적인 강간을 최소화하고자 장교 등의 고위 계급들을 만나 그들에게 몸을 의탁하는 여성들도 소수 존재했다. 극한 상황에서 물리력이나 권력이 있는 남성에게 의존하여 성범죄를 포함한 범죄를 피하려는 여성들의 사례는 자주 발견된다. 물론 이는 절대 비난 받을 일이 아니며 남성들도 형태는 좀 달라도 비슷하다. 이를 '극단적'으로 확장하면 '여자는 인질이다' 같은 래디컬 페미니즘 책에서처럼 현대 사회에서도 모든 여성이 불특정 다수 남성들의 강간을 피하기 위해 한 남성에게 의존하게 되는 인질 및 스톡홀름 신드롬과 같은 처지에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실화를 다룬 저서 '베를린의 여인'에는 미군의 포격을 머리에 맞는 것보다 뭐든 목숨을 부지하는 게 낫다고는 하면서도 자칫 진짜로 끔찍하게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윤간을 피하기 위해 소련군 장교의 현지처로 들어가 안전을 보장 받는 독일 거주 여성의 이야기가 나온다. 노벨상 수상자 귄터 그라스도 어머니와 누이가 겪은 불행을 언급하였는데, 어머니가 내 딸만은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면서 스스로 소련군에게 몸을 내주었으나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음을 어른이 된 후에야 알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한편 그 와중에도 독일 여성 마르타 쿠르츠만의 회고에 따르면 최소한의 인간애와 천운으로 위기를 넘긴 순간도 있었다. 쿠르츠만과 여동생을 붙잡은 소련군은 이들이 막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중인 것을 알고 욕설을 퍼붓고 침을 뱉긴 했으나 순순히 놓아주었다고 한다. 추가로 심지어 고층 건물 옥상으로 도망치니 다리가 아팠는지 추격을 포기한 그들을 피할 수 있었다거나 변소에 일부러 빠져 혐오스러운 몰골이 되고, 흉측하게 분장하거나 가족을 닮았다는 이유로 화를 면한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행운을 누린 여성은 드물었으며 당시에는 생존자들 사이에 '당했냐고 묻지 말라, 몇 명에게 몇십 번 당했냐고 묻는 것이 온당하다'는 식의 자조적인 자학유머까지 유행할 정도로 참혹한 지경이었다.

3. 서방 연합군

Northern Kentucky University에 의해 2007년에 출간된 책 Taken by Force에 따르면 서방 병사에 의한 강간 사건이 약 1만 1,000회 발생한 것으로 추산되었으나 성범죄 공식 통계가 으레 그러하듯 보고, 신고된 사건을 위주로 집계된 통계이며 2015년 '군인들이 왔을 때'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미리암 게브하르트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약 86만 명의 독일 여성들이 서방 연합군에 의해 강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 기간에 노르망디 지역에서만 미군에게 성폭행 당한 프랑스 여성이 500명이나 된다고 한다. #

4. 관련 문서



[1] Helke Sander/Barbara Johr: BeFreier und Befreite, Fischer, Frankfurt 2005. #1, #2, #3[2] Bird, Nicky (October 2002). "Berlin: The Downfall 1945 by Antony Beevor". International Affairs. Royal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 78(4): 914–916.[3] 소련군정을 다룬 당시 보도에서도 대낮에 약탈, 협박은 물론 강간까지 자행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 대한민국이 실효 지배하는 강원도 고성 일대에서도 딸을 지키려는 아버지가 사살당했다는 보도가 있다. #[4] 음란과 폭력, 한스 페터 뒤르.[5] 강간이나 협박에 의한 것, 연애나 기타 이유로 인한 것을 모두 포괄한다.[6] 한국 일각에도 일본군 위안부는 국가적으로 수치스러운 역사이므로 거론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있다.